본문 바로가기

칼럼_철학.사회

[봄날엔 맑스] 자본은 생산관계다-임금노동과 자본

[봄날엔 맑스]

 

자본은 생산관계다

칼 맑스, 임금 노동과 자본(1849, 1891)

 

문화/수유너머N 회원

 

 


[1891년 독일어판에 부친 엥겔스의] 서설


 

임금 노동과 자본은 맑스가 184945신 라인 신문에 논설로 게재한 것이다. 이것은 브뤼셀 독일인 노동자 협회에서 강연한 것을 기초로 한 논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원문을 엥겔스는 자신이 약간의 수정과 보충을’(536-앞으로 인용한 원문은 박종철판 전집에서 가져옵니다.)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이 이 모든 수정과 보충맑스의 뜻에 따라 행동하였음을 확신’(536)한단다. 분명 맑스(1818~1883)는 세상을 떠나고 없는데 어인 근거로 자신이 맑스의 뜻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일까.



나는 왜 맑스의 글을 ‘수정’하는가?(1891년의 엥겔스)

 


 

나의 수정들은 모두 한 가지 점과 관련되어 있다. 원본에 따르면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판다; 이번의 텍스트에 따르면 자신의 노동을 판다. 그리고 이러한 수정으로 인하여 내게는 설명의 책임이 있다. 여기서 단순한 자구 해석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경제학 전체의 가장 중요한 점 중의 하나가 문제 되고 있음을 노동자들이 알도록 하기 위한 설명.(536)

 




엥겔스에 따르면 이러한 수정은 이 글이 노동자들이 그들의 문제를 납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전 정치경제학은 상품의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때의 노동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가? 고전 경제학은 여기에서 설명을 멈추었다. 맑스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노동가치 형성적 속성최초로 연구한다. 그리고 상품의 가치가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에서 나오는 것임을 밝힌다. 우리는 이에 대한 서술을 맑스의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1859)자본1(1867)에서 확인할 수 있다.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다!

 

그런고로 엥겔스는 맑스의 임금 노동과 자본(1849)1891년에 출간하면서 맑스의 이후의 사유를 반영하여 이 글을 고칠 수 있다는 명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파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만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직시할 수 있을 것이므로... 이러한 불가피한 사정으로 엥겔스는 자신이 맑스의 글에서 노동이란 단어 옆에 조심스레 이라는 단어를 추가한다.


그렇다면 노동노동력이 어떻게 다르기에 맑스는 고전 정치경제학에서 멈추지 않고 이를 더 분석한 것이며 엥겔스 역시 이를 그토록 강조하는 것일까. 고전 경제학에 따르면 상품의 가치는 그것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에 의해 규정된다. 그런데 이 때 노동은 또 어떻게 생산될까. 맑스는 여기에 의문을 가하고 계속 질문하고 또 질문한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에서. 그렇다면 노동은 어떻게 생산되나? 노동의 생산비는 또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경제학자들은 확인 불가능한 노동 생산비 대신에 노동자의 생산비를 연구한다.

 

그런데, 노동자의 생산비를 연구하다 보니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맑스는 하루에 3마르크에 임금을 받고 12시간 노동을 하며 기계부품을 생산하는 노동자를 가정한다. 그리고 이 노동자가 만드는 기계부품의 생산비를 계산한다. 원료는 20마르크인데, 작업 도구의 마멸은 하루 1마르크의 가치만큼 마멸된다. 그리고 노동자의 임금으로 3마르크가 나간다. 자본가는 자신의 고객들에게 27마르크를 받고 이 부품을 판다. 이때 자본가는 3마르크를 이윤으로 받는다.


 

27마르크=21마르크(원료비)+6마르크(노동력이 생산한 가치)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임금은? 3마르크! 나머지 3마르크는 어디로???


 

27마르크짜리 기계부품에 있는 생산비를 다시 정리해보자. 27마르크 중에서 21마르크는 기계공이 노동하기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원래 있던 것이다. 이 원료의 가치에 6마르크가 덧붙여졌다. 이 덧붙여진 것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노동자에게서다!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서. 12시간의 노동이 6마르크를 덧붙인 것이다. 그런데 노동자는 얼마를 받았는가? 3마르크다. 이처럼 맑스는 노동자의 생산비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노동자는 노동의 대가로 받는 액수보다 더 많은 노동을 하는 것이다.

 

노동자는 노동력이라는 자신들의 상품을 자본가의 상품인 화폐와 교환한다. 임금은 바로 노동력의 가격을 가리키는 특수한 이름이다. 그런데 이 임금은 어떻게 결정되는가. 자본가가 임금을 지불할 때 이는 상품의 판매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지불하는 것이 아니다. 임금은 노동자가 생산관계안에서 자기 자신을 자본가에게 처분의 대가로 맡긴 결과 얻은 것이다.

 

1848혁명은 왜 반혁명이 되었는가?


자본은 생산관계다.

 

자본은 바로 이러한 노동 도구들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흑인이 노예가 되듯이 이러한 생산관계 속에서 자본을 구성하는 생활 수단들노동 도구들이 만들어지고 축적된 것이다. ‘자본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 생산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맑스는 여기에서 자본을 구성하는 생산관계의 과정을 추적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라는 질문은 계속된다.

 

일정 양의 상품들과 교환 가치들이 자본으로 변모하는 것은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 사이의 교환 속에서 일어난다. 노동자와 자본가간에 일어나는 교환 과정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노동자가 5만원의 일당을 받고 일을 했다. 그는 자본가에게 10만원 어치의 수입을 확보한 상태다. 이때 5만원은 자본을 위해서는 재생산적으로두 배의 가치를 늘리는 것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에게는 어떤가. 5만원이라는 일당은 그의 생활비로 비생산적으로 사용되고 만다. 이렇게 자본임금 노동은 서로를 전제하면서 산출해낸다.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을 생산한다.

 

노동자의 노동이 자본을 증식할 때, 이렇게 자본의 증식이 노동자에게도 좋은 것 아니겠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반론을 예상했다는 듯이 맑스는 이에 대해서도 조목조목 비판한다. ‘자본의 증식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증식이다.’(559) ‘자본의 이해관계가 노동자의 이해관계와 같다.’(559)? 이러한 환상이 다 헛말인 것은 오늘날 우리가 더 잘 안다. 말해 뭣하겠는가. 자본이 성장해도, 자본과 임금노동자의 관계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관계는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의 무한 증식과 비례하는 욕구들

 

맑스는 이 글1848년의 계급투쟁의 전개를 배경으로 하여, ‘경제적 관계들자체를 상세하게 보기 위해 썼다고 한다. 결국 투쟁을 위해서는 자본이 생산되는 메커니즘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맑스의 가치에 대한 분석은 어떤가. 맑스의 시대보다 몇 배 복잡해져버린 자본주의 생산방식은 그의 틀만으로는 분석이 불가능할 때도 많다. 하지만, 자본의 무한 증식하는 재생산 기능은 여전하다. 그러한 한 맑스의 문장들을 오늘날의 우리 삶에 이리저리 붙여봐야 한다. 어색하면 엥겔스가 그랬던 것처럼 맑스라면...’하고 추가하고 뺄건 빼고... 이리 저리... 맑스의 문장을 여러면으로 독해해보아야 한다. 맑스 역시 노동자들의 임금과 삶에 대해 말할 때 다양한 연관이 있음을 염두하자고 말했다. 그뿐 아니다. 맑스는 자본의 증대와 함께 노동자의 욕구의 문제 또한 말한다.

 

비록 노동자의 향유가 증대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주는 사회적 만족은 노동자가 넘볼 수 없는 자본가의 증대된 향유에 비하면, 사회의 발전 상태에 비하면, 감소된 셈이다. 우리의 욕구와 향유는 사회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회를 기준으로 그것들을 재는 것이지 그것들의 충족 대상들을 기준으로 재는 것이 아니다. 욕구와 향유는 사회적 본성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본성이다.(560)

 

임금노동자의 임금과 자본의 관계를 말하면서 이러한 욕구의 상대적 측면까지 말하는 맑스. 결국 자본의 문제는 일면적인 임금에 대한 조정으로 풀 수도 없다. 이렇게 무한증식하는 욕구들... 사회적인 욕구의 문제도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복잡한 연관을 고려하지 않는 한 혁명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 맑스의 이 글은 혁명과 반혁명에 대한 고뇌의 시작을 보여준다. 물론 복잡한 모순들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