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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 열한 번째: 낯선 나에 대한 이야기

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코너 소개-




낯선 나에 대한 이야기: 무의식


수유너머N 회원 / 만세


 오늘은 일단 강연을 하나 보여드리고 시작할까 합니다. 4분 정도로 짧은 강연이니, 다들 한 번 보시죠.



 어떠신가요? 독자 여러분들도 ‘나도 그런데’ 하면서 손을 들어 대답한 질문이 있으시겠죠? 저는 [기분 나쁜 말을 들었는데 미소로 응답하고 하루 종일 내가 왜 그랬을까 생각해 봤다]에서 처음 손을 든 이후, 수없이 손을 들었습니다. 분명 여러분들도 손을 드셨을 겁니다. 직접 강연을 듣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강연자인 프랑크가 던지는 질문은, 인간을 냉철한 이성적 존재라고 가정하면 상상하기 힘든 반응이나 행동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알려줍니다. 이런 문답이 신기하고 재미있는 까닭은, 우선은 혼자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다들 그러고 있다는 걸 확인하기 때문인 듯하고, 보다 결정적으로는 우리가 인간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방식에 대해 예상외로 무지하기 때문인 듯합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자동적으로 반복되는 인지나 행동이 있습니다. 프랑크의 지적처럼, 때로는 알 수 없는 위기감이나 불안감에 빠지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거나 행동을 합니다. 그리고 이런 일종의 습관들은 우리 삶에 참 많은 영향을 미치죠. 


 이처럼 자각 되지 않는 영역에서 불현듯 발현되는 여러 습관의 근원을 ‘무의식’이라는 단어로 지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런 무의식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통해, 이런 여러 희한한 습관들에 그저 놀라는 대신 그것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불안감이나 위기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있다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고, 반자동적인 반응 양식의 메커니즘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을 우리 삶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발현시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그 때문에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무의식을 연구해왔습니다. 오늘 소개드릴 믈로디노프의 『새로운 무의식』이라는 책은, 뇌 과학의 관점에서 무의식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무의식이라 부르는 것은 아주 명쾌합니다. 의식되고 자각되지 않는 정신 작용을 모두 무의식이라고 부릅니다. 믈로디노프는 뇌과학계에서 검증된 여러 재미있는 사례를 동원해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위에서 나온 프랑크의 재미있는 습관을 모두 설명하지는 않지만, 이런 비자각적 습관에 접근해볼 수 있는 중요한 자원임은 분명한 듯합니다.


 사실, 뇌의 작동에서 우리가 자각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 외에도 뇌는 여러 중요한 작동을 하지만, 이는 자동적이며 비자각적입니다. 대표적으로, 뇌는 일상적으로 정보를 편집하고 가공하여 우리가 가장 이해하고 수용하기 적합한 형태로 만들어냅니다. 그렇기에 기억이란 편집된 결과물이지,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이미지가 아닙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실험이 책에 나옵니다. 연구자들이 사람들에게 디즈니랜드에 대한 가짜 광고물을 보여주면서 이를 거듭 읽게 하고 과거 자신의 실제 경험을 떠올려보게 하는 실험을 했다 합니다. 그 가짜 광고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당신이 눈 앞에서 처음으로 벅스 버니를 보았을 때의 기분을 상상해보세요. 엄마가 당신을 벅스 버니 쪽으로 밀면서 악수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기다립니다.....”(106쪽) 뭐 이런 식으로 디즈니랜드에서 일어난 벅스 버니와의 만남을 묘사하는 광고물이었습니다. 이 가짜 광고물을 읽고 자신이 실제로 디즈니랜드에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질문하자, 1/4 이상이 벅스 버니를 만났다고 말했답니다. 게다가 상당수가 악수를 하거나 포옹을 했다고 구체적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하지만 디즈니랜드에서 벅스 버니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벅스 버니는 워너브라더스 사의 캐릭터이기 때문이지요. 디즈니 경영진이 미치지 않고서야, 경쟁사의 캐릭터가 디즈니랜드에 등장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억이 끊임없이 우리가 자각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편집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유 없는 불안감이나 위기감, 즉 우리가 현실에 존재하는 것 이상으로 위협을 과장하는 것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뇌는 사진 찍듯 정보를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편집하고 왜곡합니다. 그리고 특정 방식의 편집이나 왜곡이 생존에 유리하다면, 그것이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겠지요. 그렇기에 비록 냉철한 상황 판단은 아니지만, 정보를 왜곡되게 편집하여 불현듯 불안이 덮치도록 하는 기작이 우리의 생존 확률을 높였다면, 우리 뇌의 비자각적 영역이 그런 기작을 발전시킬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사실 좋은 일을 기억하는 것보다 나쁜 일을 기억하고 이를 과장하는 것이 생존에는 유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포식자나 위협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요.


 요컨대, 믈로디노프의 『새로운 무의식』은 비자각적 뇌 기능이라는 관점에서 우리가 자각하지 못했던 여러 재미있고 신기한 정신 작용을 탐구함으로써, 우리가 아직 해명하지 못한 무의식의 여러 영역에 접근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를 줍니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되는 주장이나 설명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심지어 뇌과학 내부에서도 합의되지 않은 여러 사항들이 존재할 것이니까요. 이것이 무의식에 대한 유일한 접근 방식도 아닙니다. 정신분석학 같은, 전혀 다른 형태로 무의식을 정의하고 접근하는 학문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런 뇌 과학의 설명이 아직 우리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한 우리를,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올 정도로 신기한 우리 자신을 좀 더 자세히 규명할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자원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