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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예술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사유하기 -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그린비, 2014)

예술의 가능성을 믿지 않고 사유하기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그린비, 2014)





수유너머N 회원 조지훈





 문학의 아토포스는 이 땅에서 이루어진 문예운동에 대한 이론적 개입의 흔적이다. 시인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2000년대 이후에 벌어졌던 문학을 포함한 온갖 문예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두 가지 경향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2000년대 이후 공연장이나 미술관 혹은 등단지 같은 예술제도 바깥으로 작품이 범람하는 경향과, 다른 하나는 정치적 쟁점에 참여하는 작품의 비-프로파간다 적인 경향에 대해서이다. 이러한 상이한 두 경향은 무엇을 뜻하는가? 두 가지 문예운동의 방향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책 서두에서도 밝혔듯이 저자는 이러한 문예운동의 경향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논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한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단지 새로운 문예운동의 가능성을 믿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새로운지 사유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주된 이론적 백그라운드라고 할 수 있는 랑시에르도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하기 위한 경전으로 읊조려지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연장으로 벼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자가 랑시에르를 도입하려는 맥락은 예술과 정치를 개별적인 장르로 나누지 않고 감성론이라는 하나의 지평에서 다루고자 함이다. , 예술의 내적논리를 따라가는 (비정치적) 순수예술과 정치적 쟁점에 참여하는 (순수하지 않은) 참여예술이라는 이분법을 넘기 위해서는 감성론의 차원에서의 검토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지 만이 새롭게 벌어졌던 문예운동을 정치 혹은 예술이라는 이분법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여기서 랑시에르가 말하는 감성론(Aesthetics)은 예술을 다루는 미학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감각의 수용능력을 다루는 학이라는 칸트의 개념어다. 감각 역시 칸트의 개념어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주관적 정서나 감정적 양태의 변화라기보다는 인간이 시공간을 분할하여 수용하는 방식을 뜻한다. 다시 말해 랑시에르의 감성론은 인간이 시공간을 특정하게 지각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인 것이고, 이를 통해 예술을 다룰 때 예술적 완성도나 정치적 쟁점의 참여여부가 아닌, 하나의 예술이 어떻게 시공간의 지각 방식을 분할해내는지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맥락에서는 예술의 정치는 다름 아니라 어떻게 예술이 시공간을 기존의 방식과는 다르게 분할하는지에 따라 달려있는 것이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라는 기획에 따라서 문예운동의 가능성을 사유하고자 한다. 책 제목에도 들어가 있는 아토포스라는 말은 다름 아닌 이러한 사유의 표제어라고도 할 수 있다.



     



아토포스(atopos)는 장소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토포스(topos)와 부정의 접두사(a)가 결합된 합성어로 우리말로 비장소성이라 할 수 있다(179p). 여기서의 비장소성은 장소가 없다는 결여의 의미보다는 마치 사랑의 사건처럼 어떤 장소에도 고정될 수 없다는 풍요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문학의 아토포스(혹은 문학의 비장소성)란 문학제도라는 기존의 공간에 고정되지 않는 문학의 활동이다.

 


문학적이라고 한 번도 규정되지 않은 공간에 흘러들어 그곳을 문학적 공간으로 바꿔버리는 일. 그럼으로써 문학의 공간을 바꾸고 또 문학에 의해 점유된 한 공간의 사회적-감각적 공간을 또 다른 사회적-감각적 삶의 공간성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문학의 아토포스다. 문학의 아토포스는 우리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180p).”

 


즉 미학의 정치는 기존의 문학적 혹은 예술적 공간을 파열시켜 열어젖히는 순간에야 명명될 수 있는, 비장소성으로부터 사유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물론 이때의 공간은 단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라, 행위가 발생하는 지점이라고 보아야 한다. 단지 시를 낭송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혹은 한 번도 시가 낭송된 적이 없는 거리에서 시가 낭송되는 것만이 아니라, 정치적 쟁점에 관련된 이른바 참여예술의 장 속에서 정치적인 내용과 무관해 보이는 예컨대 SF소설을 낭독하거나 사랑 노래를 부르는 것도 비장소성을 만드는 실천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보기에 근래의 문예운동의 의의를 80년대의 민중예술처럼 직접적으로 대중을 선동하거나, 혹은 기존의 예술 양식과 단절하고자 하는 모더니즘 운동을 기준으로 놓고 찾으면 곤란하다. 전자에 기준을 맞추면 지금의 문예운동은 충분히 정치적이지 못하고, 후자에 기준을 맞추면 충분히 예술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지금의 문예운동이 추구하는 비장소성의 실천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생각에 불과하다. 지금의 문예운동은 사회적으로 예술의 몫으로 할당되지 않은 장소를 비집고 들어가는 차원에서 정치인 것이고, 또한 그렇게 기존의 공간을 파열시켜서 감각을 새롭게 분할한다는 차원에서 예술인 것이다.

 


          



예술의 비장소성은 예술에 대한 니힐리즘적 태도와 대결할 수 있는 무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현대 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예술이 되거나 혹은 되고자 한다는 차원에서 예술은 이미 종언되었다는 보드리야르의 묵시록적인 태도와 맞서기 위해서 말이다. 보드리야르의 묵시록은 점점 더 현실 속에서 확인되고 있다. 창조경제가 시대의 흐름이 되면서, 디자인과 마케팅 을 통해 상품의 미학화가 심화되는 경향 속에서, 예술이라는 말은 범람하고 있으니 말이. 자본의 흐름과 더불어 예술은 자신의 장소에서 이탈하고 있다. 자본 또한 예술을 하나의 장소에 가두어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자본에 의해 범람하는 예술에 맞서, 어떻게 예술의 비장소성을 실천할 수 있을지, 어떻게 더 많은 자본의 흐름을 창출하기 위해 예술을 상품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경향에 맞서, 예술로 규정되지 않는 공간에 예술을 침투시킬 것인지, 그렇게 해서 어떻게 감각을 다시 분할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저자와 함께 고민해 봐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