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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굴뚝 연대의 글] '몸의 언어'의 강력함


 

‘몸의 언어’의 강력함





지안/수유너머N 회원





중학교를 다닐 때, 영화제에서 우연찮게 <저 달이 차기 전에>(<당신과 나의 전쟁>의 이전 제목)라는 영화를 보았다. 당시 그나마 표가 남아있는 영화들 중 가장 제목이 끌렸던 이유로 관람하였으니, 정말로 우연한 계기였던 셈이다. 그것은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파업 점거 투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그중 나에게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는 쌍차 평택 공장 옥상에서 무장한 경찰들이 파업 중인 해고노동자들을 몰아세우며 패는 장면이다. 여러 명의 무장한 경찰이 이미 쓰러져있는 노동자를 밟기도 했다. 극영화가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이 사람을 패는 것을 보았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파업 노동자 중에는 당뇨에 걸린 분이 있었다. 그가 약이 떨어져 신경이 날카로운 상태에서 영화 안의 낮과 밤은 계속 바뀌어갔다. 사실 나는 그때 파업이 무엇인지, 저 사람들이 누구인지도 어렴풋이만 알 뿐이었는데도 컴컴한 공장안의 다급하면서도 힘 빠진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약도 밥도 떨어져가는 공장에서, 영화의 끝머리는 이러한 물음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는 언어들이었다.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이겨서 공장을 나갈 수 있을까? 저 달이 차기 전에?’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매일 같이 신문에는 쌍용차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이 계속, 정말 계속 죽어갔다. 당시에 사람들은 파업에 대해 이기적이고 극단적이라고 말했지만 죽음은 안타까워했다. 또, 매일 같이 보도되는 새로운 죽음을 슬퍼했지만 죽음 이전의 삶에는 관심 갖지 않았다. 쌍차 해고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했지만 죽음은 부당해고가 이미 예견하고 있는 사회적 살인의 의미로 읽히지 않았던 것이다. 죽음은 그저 안타까운 것, 남아있는 사람들이 견뎌야 하는 과거로만 여겨진 것 같았다. 수년이 지나고 그들의 죽음을 잊지 않으려 시청 앞에 세워둔 영정사진마저 국가는 들어내려 했다. 이제 과거의 사건이 된 죽음은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낯설고 숨겨야 하는 것이 되었다.

얼마 전 북토크에서 이창근 씨는, “해고노동자가 맨 몸뚱이로 싸우는 것은 그것만이 허락된 언어라서 그렇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싸우는 방식은 몸의 언어 이며 그 행동의 의미를 읽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집단 난독이라고 표현했다. 26명의 죽음이 사회적 살인으로 읽히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77일 간의 점거 파업은, 폭력진압과 손해배상으로 이어졌다. 이제 쌍차 해고자들은 굴뚝으로 올라갔다. 이 언어 역시 업무방해로 읽히고 있다. 노동자들이 사측과 그냥 언어로 대화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들이 “이것은 부당한 정리해고다”라고 했을 때,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했을 때 그 외침이 말로 받아들여졌다면 좋았을 것이다. 공장 점거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사람들은 죽지 않았을 것이고, 바람이 쌩쌩 불어 흔들리고 있는 굴뚝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말은 덜 중요하거나 이기적인 것, 듣지 않아도 좋은 것으로 여겨진다. 수많은 구호들은 그냥 흩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정치인들의 황당한 언어를 목격하며 우리는 말의 무용함을 느끼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오히려 우리는 몸의 언어에 주목하게 된다. 무심코 굴뚝일보를 보게 되고 기사를 찾아보게 되고 평택에 가게 된다. 가까이서 말하지 않아도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아도 굴뚝에서 보내는 언어들은 생생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추모하기 위해 대한문에 있던 영정사진까지 들어내는 과잉진압들은 몸의 언어가 이처럼 강렬하게 전달된다는 것의 반증이 아닐까? 우리는 몸의 언어를 통해 무한히 연결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대법원의 황당한 판결문, 그런 식의 말보다 훨씬 강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