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사건 (5)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Aristoteles(BC.384-322)



3.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1) ‘해석의 신화적 연원

해석은 서양 사유의 최초의 상태에 해당된다. 이 최초의 상태는 곧 로고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그려준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그것은 신화적이다. 즉 해석은 곧 헤르메스(Hermes). 헤르메스는 어떤 초월적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준다는 뜻에서 신탁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헬라인은 델피 신탁의 사제를 헤르메이오스’(hermeios)라고 불렀다. 신비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전환’(transfer)시키는 또는 번역’(translation)하는 역할을 맡은 이 신은 그 어원의 기초적인 의미에서 이동’(trans-) 또는 투과의 역능을 가진다. 신의 전언을 번역하고, 그것을 이쪽과 저쪽으로 이동하면서, 인간의 지성이 투과가능한 언어로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이 헤르메스(해석)의 의미라고 하겠다. 따라서 헤르메스는 언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언어와 관련된 작업이며, 이 작업을 해내는 것은 신성한 능력으로서, 신전의 사제들의 직분이며, ‘해석가라는 주체는 애초에 인간의 언어이해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는 존재로 승격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온에서는 당대의 해석이라는 것이 음유시인’(rhapsode)의 직분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진정한 시인(poet)들의 언어를 음송하게 되는데, 그러한 음송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의 과정이 요구된다. 해석은 해당되는 시인, 예컨대 가장 위대한 호메로스정신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음유시인들의 해석과정은 언어와 관련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해석적 실천이라 불릴 수 있는 음송은 암송과는 분명 다르다. 즉 음유시인은 마땅히 시인의 단어를 단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를 파악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해의 과정이 부재한다면, 그는 좋은 음유시인이 아니다.” 위대한 시인들의 언어를 해석한다는 것은 시인들의 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의 사유를 파악하는 것이다.(530b-c)[각주:1] 그래서 해석의 일차과정, 이동은 이해와 파악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이차적으로 음유시인은 그 자신을 시인의 사유에 대한 해석자로 그의 청중들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시인이 의미한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530c). 여기서 해석의 이차과정은 청중으로 해석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때 음유시인은 스스로를 해석자로 정당화해야 하는데, 이때 반드시 시적 언어의 의미알아야한다. 요컨대 이 과정은 한 쪽에 청중이 있고, 그쪽으로 해석이 이동하면서 의미를 실어나르는 것이며, 이것이 제대로 완수될 때 음유시인은 비로소 해석자가 된다.


이 해석자는 이해와 파악을 통해 청중에게 언어의 본래 원천을 가리키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전언을 이동시킨다. 그런데 이때 이동은 반드시 변형’(metamorphosis)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시인의 언어가 해석과정에서 설득음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로 변형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원초적인 시인의 음성이 해석자인 음유시인의 음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신탁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사제는 신의 음성을 인간의 음성으로 변형시킨다.[각주:2] 이런 면에서 해석의 최초의 신념은 문자텍스트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물질적인 진동이다. 이 진동은 하나의 힘-운동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청중들에게, 하나의 힘-운동을 또 다른 힘-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어떤 인식론적인 기능과 과정으로 해석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인식론적 기능으로서의 이해파악은 종속적인 위치에 머문다. 사실상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청중의 세계의 저 깊이, 즉 지성과 그 아래의 정념에 이르기까지 그들 본성(자연, physis)흔들어 놓는것이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진정한 매개는 바로 언어, 그 중에서도 음성언어며, 문자언어는 부차적이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이 말하기가 하나의 사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건은 전달하는 자의 호소또는 선포가 한 개인이나 무리의 영혼을 진동시킴으로써,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차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효과로서의 사건은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통해 배출되지 않고, 한 사람의 전생애를 결정짓는 행동과 질문의 원칙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플라톤이 전해주는 소크라테스, 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울리던 그 진동을 경험한 플라톤 자신으로부터 충분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해석이 제대로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변형 이후의 언어가 수행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함을 통해 무언가를 강제하고, 비물질적인 관념을 물질적인 흐름즉 발화의 흐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해석이 헤르메스라는 신성한 주체를 요구했던 것은 이러한 수행적 역량을 그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신성함만이 해석이 단순한 잡담으로서의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게 만든다.



2) 이 두 철학자에게서 해석사건

이와 같은 음성의 우선성과 그것의 존재론적인 변형에 대한 해석학적 신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Organon)의 한 부분인 해석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런데 음성(φωνή)은 정신[영혼] 안의 정동(παθημτων)의 상징(σύμβολα)이며, 문자(γραφόμενα)는 음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문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음성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최초에 [정신 안의 정동의] 신호(이마쥬, 표지, σημεϊα)라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이 [현실적인 것들의] 유사성이라는 것도 동일하다(16a4-16a9).[각주:3]

 

여기서 음성은 정신적 경험(정동) 상징으로서 문자적 상징에 앞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경험(정동)’은 그것이 상징화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 상징적인 것은 경험적으로 어떤 이마쥬가 된다. 이것이 이마쥬에 머무는 이유는 이 책의 뒷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다시피, 음성의 상징적 상태가 아직까지 관습에 의해 결합되지 않았고, 명사화 또는 이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사가 되고 그것들이 제대로 결합되었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참과 거짓의 대상으로서의 진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술이 되기 전의 명사, 명사가 되기 전의 이마쥬는 어떤 것인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즉 진술로서의 문장이 로고스의 대상이라면, 명사는 아직 그렇지 못한 상태이며, 음성은 더더군다나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로고스란 어떤 정식’(正式), ‘정의’(正義)를 말하는 것이고, 학문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진술-명사-음성의 위계 내에서 가장 비로고스적인 상태를 향유하는 것은 분명 이마쥬로서의 음성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에서 겨냥하는 바는 분명한데, 그것은 이러한 비로고스로서의 음성 상태를 벗어나, 명사와 동사, 그리고 문장으로서의 진술을 참과 거짓이 분명한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짚어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성이 정신 자체의 상징이 아니라 정신적 경험, 즉 정동의 상징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방점은 플라톤과는 다른 곳에 찍힌다.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음성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존재적인 것으로만 수용할 뿐, 해석의 텔로스로 취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한갓 이마쥬로서의 음성을 해석의 대상으로나마 취급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전체 존재론적인 틀거리 내에서 이마쥬와 가장 가까운 -운동을 가능태로 취급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형상으로 환원하듯이, ‘해석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헤르메스는 플라톤이 진입한 그 음성의 영역을 단 한 번만 밟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플라톤에 비해 단편적이라거나 풍부하지 않다고 기각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그 풍부한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은 실재로 그가 단순한 단어 차원에 머물기보다 시간성을 도입할 때다.


시간성은 명사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동사와 관련된다. “동사는 부가적으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지속성과 연관된다(16b6-10). 그런데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거기에 명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1-18). 이 시간은 현재와 현재 바깥의 시간, 즉 과거와 미래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동사로서의 언어가 해석의 시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통찰은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의 심장부에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존재에 생성의 맥박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특유한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을 사유대상이 되는 어떤 과정으로 이해할 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성은 사유대상을 포착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사유하는데, 그 까닭은 지성은 대상과 접촉하고 사유하는 가운데 사유대상이 되고, 결과적으로 지성과 사유대상은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각주:4]왜냐하면 사유대상, 즉 실체를 수용하는 능력이 지성이요, 그것은 사유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능력보다는 소유가 지성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신적인 것이며, 이론적 활동(theōria)은 가장 즐겁고 좋은 것이다(형이상학1072b20).

 

여기서 사유하는 것은 지성이며, 사유대상은 지성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인 활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용능력은 여기서 지성의 진정한 본령이 아니다. 진정한 지성의 활동으로서의 지성적 활동은 사유대상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사유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신적인 활동은 지성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 이 즐거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를 동화(assimilation)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는 대상과 지성 간의 어떤 주도성의 문턱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지성의 주도성이 사라지고, 이론적 활동이 신적인 것으로 되는 그런 문턱, 대상과 지성간의 그 불명료한 로고스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지성과 사유대상은 자기자신을 사유하게 된다. 이것은 해석이 어째서 결과적으로 지성과 대상의 구분 자체를 무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적인 증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무화는 모든 것을 비존재의 단계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강도를 누승화하는 과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현실적 활동이 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현실적 활동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사건, 해석의 사건이 된다. 즉 지성과 대상 둘 모두의 변형’(metamorphosis)이 된다.


Augustinus(AD. 354-430)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해석은, 본격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충실하게 된다. 사실상 플라톤에게 있어서 해석은 그의 전체 변증론 체계 내에 종속된 국부적인 것으로서, 일부 저작들의 부분부분에서 다루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플라톤 자신이 소크라테스적인 전통 안에서 문자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록’(écriture)이 가진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기록의 가치는 철학이 대화의 상호성을 해소해가는 과정이면서, 대화 상대자로서의 논적이나 친구를 자신의 내면으로 옮겨 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음성은 근원적인 해석의 대상이자, 해석의 본래면목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음성에 대한 강조는 중세에 더욱 강조되는 경향을 노정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성경의 창세기가 신의 음성, 즉 로고스에 기반하여 천지창조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히브리 예언자 전통 또한 기록 보다 그들의 직접언술과 선포를 통해 신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히브리 전통 안에서 음성은 더 이상 대화 상대자에게 논변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앙적 회심의 매개, 또는 도구로서 음성을 통해 그들의 실존적 변형을 강제해내고자 하는 목적론적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대화의 친구들은 이제, 오직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만 통용되는 명칭이 되며, ‘불신자들은 성경의 원초적 음성을 들어야 하고, 회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매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상대자의 대상화는 때로 반성의 매개를 통해 철학자 자신에게 부과되는데, 이러한 부과를 통해 철학자는 신앙적 회심을 경험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 등장하는 그 음성, “tolle lege, tolle lege”는 그러한 철학자의 신앙적 회심에 성서적 선포가 어떤 변형의 역량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충실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노래로 반복되었던 말은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눈물을 그치고 안색을 고치어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노랫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성서를 펴서 첫눈에 들어 온 곳을 읽어라 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령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각주:5]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최초의 음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귀에 신의 음성이 아니라, 어떤 소년, 소녀의 음성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회심의 최초의 순간에 일어나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착각은 그러나 스스로를 알게 한다(Si fallor, Sum). 다시 말해 이 착각과 실수는 곧 그의 마음에 도달한 신의 음성을 판별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시금석을 딛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곧장 성경의 로고스, 즉 마태복음을 상기하게 되고, 마침내 그 말을 쫓아, 다른 로고스, 즉 로마서를 읽게 되는 것이다.[각주:6]


이러한 변형의 사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적 작품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는 그 표면적인 목차에서도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저작을 사랑에서 시작하여 수사학’(설교론)으로 끝내고 있다. 이러한 목차가 기획하고 있는 바는 매우 분명하게도 해석이 어떤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랑과 그 사랑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선포는 마태복음 22장의 구절에서 전거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의 실천은 해석과정에서 달성된다. 이때 사랑의 최고 대상은 마땅히 신이이어야 한다. 사랑의 네 가지 대상(자기, 이웃, , 육체)은 모두 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신과 이웃만이 계명을 통해 선포된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것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우리 위에 있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 자신이요[자기애] 셋째는 우리 이웃에 있는 것[이웃사랑]이요 넷째는 우리 밑에 있는 것[육체]이다. 둘째와 넷째에 관해서는 아무런 계명도 내린 바 없다.(아우구스티누스 1989, 91-92)[각주:7]

 

자신과 자기 몸을 사랑하는 데는 계명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육체에 대한 사랑은 엄연한 자연법칙으로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짐승도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선포된 사랑은 바로 이웃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중 신만이 인간이 가장 최상으로 향유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한 성서의 골자다(마태 22,37.39.40.) 따라서 계명의 목표는 사랑이고(디모 1,5) 그 이중의 (사랑),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아우구스티누스 1989, 91-92)


해석에 있어서 신을 사랑하는 것과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율법과 성경 전부의 완성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Ibid., 107). 해석의 영혼은 전적으로 두 가지 목적, 즉 이웃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을 지향한다. “자기의 성서 이해를 오로지 이 점에 귀결시킨다면, 그는 성서해석에 안전하게 접근하기에 이를 것이다”(Ibid., 109)


해석의 목적이 이러하다면, 그 해석의 일차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표지. 표지란 사물자체가 아니라 감관으로 포착되는 형상(形象) 외의 사물로서, 자기로부터 다른 무엇이 (우리) 사유 속에 출현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Ibid., 119). 그리고 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 이 표지들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다른 모든 표지들보다 그 서술가능성의 측면에서 더 광범위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Ibid., 123).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은 특히 문자를 의미한다. 음성이란 그 지속성의 측면에서 문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표지란 무릇 언어를 눈에 보이게하는 것이며, 이로써 지속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문자로 표현된 성경은 그 자체로 자명한 표지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전의적 표지’(signa translatus)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 해석은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이렇게 전의적 표지로 충만한 성서를 그 자구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일종의 정신의 비참한 예속상태를 초래한다(Ibid., 227). 그래서 해석은 늘 장소와 시간, 상황을 고려하여표상들에 대한 전의적 해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해석의 최상의 원칙은 사랑이다. “그 해석은 반드시 사랑의 왕국에로 수렴되게 하여야 한다”(Ibid., 257)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해석은 전의적 의미를 표지로부터 추출하고, 그것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때 표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사나 동사가 될 수도 있지만, 주로 성경이 표명하는 선포의 본뜻, 즉 신앙과 사랑의 본뜻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뚜렷한 목적의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정식)와는 사뭇 다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로고스라는 지향규정성으로서 보편자인 바 존재를 향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향완성으로서 절대자인 을 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통해 실체또는 무엇보다도 개별적 실체를 지성의 힘으로 소유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어떤 변형을 달성해내려고 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신을 소유함으로써 신앙을 확증하고, 지성을 통해서는 그것을 충전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런 방향은 바로 유명한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원칙에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변형은 해석 이전에 신앙에 의해 이미 상당히 충족된 것이다.[각주:8]


또한 이 둘은 공히 음성의 원초성과 변형이라는 해석의 책무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이던 그 음성의 정동적’(경험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자에게서 표지란 곧장 음성적인 원초성의 문자적 변형이며, 그 가운데 어떤 경험적 매개도 상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음성이 가진 경험적인 성격, 즉 그 물질성이 문자적인 맥락 안에서 이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히브리 전통 안에서,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신앙적 회심의 경험 안에서 음성의 그 물질적 특성은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두 질문은 음성이 가진 물질성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아우구스티누스와 히브리 전통 안에서 음성이란 물질적인가? 이 문제는 상당히 심난한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음성이란 사실 신성한 것으로서, 신적인 범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물질계의 부수적인 효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히브리 전통에서 이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표지도 비물질적이다. 하지만 표지가 비물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각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므로 해서 비물질적인 의미즉 전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적 사건과 창세기의 사건은 이런 비물질적인 의미가 육화되는 그 동일한 과정의 다른 양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 해석은 이런 육화 이전의 어떤 초재적 의미를 획득하고 고착시키는 기술(ars)이다. 이러한 결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함축의 필연적 결과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동일한 해석과정은 경험적인 정동에서부터 시작되며, 이것은 어떤 물질적 기반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철학 내내 기체라고 불리었던 것이며,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로서 정립했던 것, 즉 결국에는 형상철학의 한 지절(支節)로 환원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해석이란 하나의 표지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만 그 세계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해석 자체를 맥락지운다. 그 세계 자체를 무엇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지만, 하나의 뚜렷한 질문이 이런 분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도대체 표지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해석과 사건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철학사적 맥락에서 공히 조금씩 변용된 모습으로 출몰하는 하나의 대상이 바로 이 표지이기 때문이다.



3) HermaSēmata 해석과 사건의 안팎

우선 우리는 표지가 신화적 차원에서 herma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Hermes의 것이며, 해석이라 불리우는 어떤 인격적 신의 흔적 안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격성은 곧 인격이 가지는 physis적 성격 즉 자연주의적 특성에 의해 침윤되는데, 고대적 발상 안에서 이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왜냐하면 herma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흔적이지만, 그것이 이동하는 거리는 올림포스의 범역을 넘지 못했으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 쥐었을 때조차 그 생생한 진동은 한낱 유일한 삶 안에서 울릴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은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인간과 다를 뿐이었으며, 인간은 오히려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각주:9] 이때 신적 표지와 인간적 표지는 영원과 유한성이라는 큰 간격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인접하고 있다. 신이란 단지 신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삶 안에 영원성의 각인을 늘 새겨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새겨 넣는 것을 통해 신은 자신의 인격성을 인간에게서 빌어오고, 인간은 자신의 신성함을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바로 physis의 지평 안에서 말이다. herma는 이 유일한 지평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고귀한 것이면서도 어렵다. 델피 신전의 사제란 이 어려운 일을 하는 최초의 해석가이고, 그런 면에서 그녀는 보호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herma는 깊은 카오스의 낭하에 뒤둥그러져 있으며 보호받지 못한다. 이때 표지는 어떤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또는 바탕’, ‘수용자로 겨우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그저 던져 놓고 지나온 한 질문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즉 플라톤적인 판타스마의 해석적 위상에 관해, ‘이것은 어떤 식으로 사유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그 질문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는 우선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는 방향에서 그 바탕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바탕은 사유에 대하여서 있는 것일 뿐 자립적인 위상을 향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유의 대당으로서 플라톤에게 서출적 추론을 강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방향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감각되지 않고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앞에서 논하였다.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으로 간주된 이 대상의 감각되지 않음이름 붙여질 수 없음이라는 특성이 모순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구도 하에서 이런 식의 규정은 로고스의 개입에 의해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되지 않고 이름 붙여지지 않는 것이 어째서 알려지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은 알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적 로고스, 즉 이성의 편에서 존재를 가늠하는 그 로고스를 통해서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플라톤의 편에서 이것은 서출적 추론에 의해 마련된다. 여기서 서출적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nothos’모순적인이라는 함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각주:10] 다시 말해 플라톤은 이 제3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인식론적인 모순에 봉착한다는 그 사실 그대로를 서출적이라는 말로 개념화한 것이다. 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보자면 이것은 이러한 이름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서출적이고 모순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봉착한 모순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감각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사유될 수도 없는 것이 알려지며, 이것이 우주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은 플라톤 체계 내에서 모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바탕은 질료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점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질료, hylē와는 다른 위상을 지닌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할 때 그것은 somata에 더 가깝다. 즉 그것은 어떤 신체적인 것’, ‘물체적인 것으로 옮길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당장 apeiron 또는 그 신화적인 chaeos의 의미가 겹쳐져 있다. 반면 hylē에는 그러한 함축이 다만 흔적’, 그것도 아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바탕물체는 완전히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탕은 물체적이지만 물체 그 자체는 아니고, 그것을 생성시키는 것이며, apeiron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물체는 자신의 형상을 이데아로부터 모방하는 쪽에 더 가깝다. 이데아로부터 형상을 모방하는 이 물체에 대해서 우리는 적절한 추론을 통해 그것을 사유 안으로 설득할 수 있으나, ‘바탕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설득이 아니라 강제가 수반되며, 이성(noesis)나 지성(dianoia)이 아니라 억견(doxa)을 산출하는 확신(pistis)이나 추측(eikasia)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바탕은 여기서도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떤 생성의 편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플라톤적인 선분의 구도 내에서 확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확신은 생성(genesis)하되 감각 가능한 것’(aistheta)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감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바탕에 대한 서출적 추론은 추측에 가까운 것이 된다. 이는 지성적이거나 이성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어떤 것에 대한 무분별한 직관에 더 밀착된다. 그것은 인식의 극한, 이데아 쪽이 아니라 카오스 쪽의 극한이 아닐까? 게다가 이 바탕에 떠도는 원인(방황하는 원인)은 판타스마다. 즉 단순한 모상(eikones)이 아니라 이마쥬(eidolon)로서의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분별한 직관이라고 말한 그 순간에조차, 이 바탕은 직관이 가진 어떤 인식주체로서의 자기 운동적인 성격을 탈각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 물체적인 판타스마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떤 폭력적인 인식론적 사태 안에 지성을, 감각을 또는 직관을 개방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이런 질문은 플라톤에게서도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으며 제기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우주론적 체계는 로고스, 그것도 이성과 지성 쪽에 가까운 정식화를 목적론적으로 구상하는 것이며, 사유 이미지는 그것에 이끌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유의 상황이 해석사건안에서 어떻게 자신을 열어 밝히는지 막연하게나마 질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herma란 그 원초적 사태에 있어서 탐구되고자 하는 것이며, 로고스 쪽으로의 전진적인 해석이 아니라, 보다 회고적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herma는 그러한 회고[각주:11] 안에서 말 건네는 사태, 즉 무분별한 직관으로서의 사유의 폭력적인 개방성 안에서 간취되는 것이다. 여기서 herma와 인식주체는 똑같은 개방성을 노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방성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사태며, 우주론적인 사태로서 외부적이지 않고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주체든 바탕으로부터 오는 전언으로서의 herma든 간에 그것은 무분별성 안에 놓여 있으면서, 서로의 원초적인 요소들로 분해되고, 단지 휩쓸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일의적인 힘-운동의 구도 안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또 때로는 감싸 안으면서, 설득하고 설득당하면서, 포획당하고 포획을 회피하면서, 내재적인 평면을 형성한다. 이 혼란한 우주 외에 다른 존재론적 평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외부는 없다. 따라서 가장 유일한 herma는 이름 붙여질 수 없는 이 힘-운동의 생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일한 herma로서의 생성자체는 우선 음성적 사태정동의 표지로 현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 안에서 해석이 어떤 방식으로 물체적인 것과 관련되는지, 또한 그것이 서출적 추론에 의해서 단지 어떤 일의적인 우주론적 사태와 연결되어, 천지창조의 그 전언이자 로고스로 드러나는지 직관할 수 있는 것이다. 음성적 사태는 문자화되기 이전의 텍스트다. 그것은 그래서 고분고분하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령하고 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Kerygma)한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안에서 보이는 그 음성적 사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은 어떤 면에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파르메니데스의 표지가 외부성을 배제하는 내재적 의미의 herma라기보다 외재적인, 또는 초재적인 sēmata라는 것과 연관되는 것은 아닌가? 표지가 이처럼 이원적인 방식으로 분리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된 일의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해석적인 사태에 매우 심대한 난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가? 실재로 우리가 앞 절에서 마지막으로 의구심을 표명한 곳에서는 이에 관한 난점이 나타난다.


동일한 음성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적 음성은 물체적인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물질적 음성과는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표지는 성경의 전의적 의미로서 신적인 음성의 불가해한 상징성을 담지한다. 신앙에 의해서만 해결될 법한 표지의 완결적인 해석과정은 사실상 어떤 확증도 지성에게 사전에 마련해주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표지는 형이상학과 우주론의 체계 내에서 갈음되고, 무분별성, 또는 무한성(aperion)이라는 표지를 획득한다. 전자는 해석의 기반으로 부동의 신을 하늘에 두고 있으며, 후자는 생성하는 카오스를 지하 세계에 놓는다. 그리고 철학사는 전자의 해석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으면서, 후자의 세계를 응결시키고 로고스의 범역으로부터 추방하고 선별하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그 결과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우주의 조화(taxia),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ousia)대표하는하나의 완결된 총체적 표지가 된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이 철학사적 궤적은 충분히 기만일 수 있다.


그렇다면 표지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해석이 이런저런 일상적 역사적 사태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러한 질문은 해결되어야 할 어떤 관건적인 철학적 상황을 겨냥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질문은 이 논문의 지금까지의 철학사적 탐구가 애초에 겨냥한 상황으로 되돌아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제 해석과 사건의 존재론적 상황은 몇 가지 잠정적이고 매개적인 결론을 내면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해석은 어떤 일의적인 로고스적 사태라고 부를 만한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로고스는 정식의 추론(logismos tis horismos)으로 향하거나, 서출적 추론(logismos tis nothos)을 향한다.


둘째, 해석은 추론의 방향을 이원적인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로고스적 일의성을 음성적인 방식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한다. 그것은 음성에 대한 파악과 설명, 그리고 그것을 통한 실존적 변형을 달성하는 과정 모두를 거치는 바, 이때 변형은 반성적 매개를 통해 해석자 자신으로 향하거나 타자에게로 향한다. 이해와 선포는 그 원초적인 지점에서 해석의 자기운동적 성격을 일신하고, 명령과 선포의 대상으로서의 수동적인 해석자를 정립한다. 하지만 최초에 이 수동성은 해석 자체의 자기운동적 능동성과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


셋째, 해석은 이제 표지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사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 해석은 추론적인 과정과 변형의 과정 내에서 사건과 이미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추론과 변형은 반드시 어떤 사건 내부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 이 이미 관련되어 있음이라는 사태는 앞서의 음성적 일의성을 내재적인 구도와 초재적인 구도로 나눈다. 문자적인 텍스트로서의 철학사와 해석의 철학은 이미 관련되어 있음의 음성적인 사건을 확인하는 것이며, 해석은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의 표지를 그 상징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고립시키고 다른 상황들을 배제한다. 이때 해석은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흔적은 해석에게 뒤늦게 도래한 표지인 것으로 보인다. 흔적은 이런저런 사태 안에서 로서 현현하는데, 텍스트는 그것의 특권적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텍스트의 흔적을 통해 표지로 다가간다.[각주:12]


넷째, 텍스트적 정향으로서의 해석은 이제 완연한 정식의 추론이 된다.해석의 규칙과 범주들이 마련된다. 그러나 해석은 여전히 방법론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며, 방법론 자체를 해체하고 구성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실존의 역량을 확인하고, 어떤 모호한 지대인 자아’(Moi)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모호한 지대라는 것은 아직 그것이 코기토로 확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텍스트로 고립된 흔적들이 여전히 어떤 서출적인 상태의 표지들을 가리키면서, 경계를 흩뜨려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지흔적음성을 가리킨다는 그 사태로 인해 텍스트의 격리된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힘-운동으로 돌아가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로써 텍스트는 반복되는 회귀의 진정한 터전이 되지만, 그것은 늘 문자로 결정화(cristallisation)되지 않는 사건의 터전으로 변형된다. 표지는 텍스트와 어떤 공간(spatium)을 떠돈다.

 

이로부터 나는 몇몇 질문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이 반복되는 해석의 과정과 사건의 과정은 모순적이지만 서로를 앞으로 뒤로 끌어가는데, 이때 어떤 주체, 즉 자아의 역량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주체와 사건의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이 주체의 대당으로는 반드시 어떤 타자가 놓인다. 과연 이 타자는 또한 무엇인가?


둘째, 표지는 흔적을 통해 추론적인 로고스로 구축되거나, 또는 카오스의 낭하로 되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지는 이렇게 해석과 사건의 커다란 구도를 경계 없이 돌아다니는 무한한 어떤 들과 같아 보인다. 이라는 가설이 어떤 식으로 정당화되는지와는 상관없이(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카오스가 로고스로 구축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고 본다. 서론의 최초 절에서 나는 카오스와 뮈토스, 로고스를 살폈고, 이 질문은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된다. 카오스가 로고스로 구축되는 그 과정의 뮈토스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 질문이 전제하는 편견은 사전에 교정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카오스에서 로고스로라는 이 과정의 일방향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시작되고 어디에서나 마칠 수 있는 과정이다. 이것은 표지의 비경계적인 특성에서 필연적으로 추론된다.

 

나는 이 소결론과 질문들을 거머쥐고, 앞서 절 말미에 예고했던 해석과 사건의 현상학적 적용을 해 나가고자 한다.[계속]

 

 

  1.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인용은 Plato(vol. 9) translated by W.R.M. Lamb.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1925에서 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οὐ γὰρ ἂν γένοιτό ποτε ἀγαθὸς ῥαψῳδός, εἰ μὴ συνείη τὰ λεγόμενα ὑπὸ τοῦ ποιητοῦ. τὸν γὰρ ῥαψῳδὸν ἑρμηνέα δεῖ τοῦ ποιητοῦ τῆς διανοίας γίγνεσθαι τοῖς ἀκούουσι: τοῦτο δὲ καλῶς ποιεῖν μὴ γιγνώσκοντα ὅτι λέγει ὁ ποιητὴς ἀδύνατον.; since a man can never be a good rhapsode without understanding what the poet says. For the rhapsode ought to make himself an interpreter of the poet's thought to his audience; and to do this properly without knowing what the poet means is impossible.(Burnet 판: 어떤 사람은 시인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좋은 음유시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유시인이란 마땅히 시인의 사유에 대한 해석자로 그의 청자들에게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본문으로]
  2. 자언어에 대한 해석의 불신에 대해 팔머는 플라톤의 『제7서한』과 『파이드로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해석은 모든 언어를 구어적 효과로 변형시키는 임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문자화하는 것은 그것의 생명력으로부터의 ‘언어의 자기소외’(alienation of language, Selbstentfremdung der Sprache)이다”(Palmer 1969, 15-16). [본문으로]
  3.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 대하여」인용은 Complete Works (Aristotle). Jonathan Barn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N.J. 1991을 이용했다. 그리스어 대조는 Loeb판을 참고했다. [본문으로]
  4.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학’의 시초 운동자로 본다면, 이 언급은 해석학적 주체를 사유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리쾨르는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 흩어진 코기토를 끌어 모으는 작업으로 본다. [본문으로]
  5. Saint Augustine, Liber VIII, caput 12 참조. 국역 『고백록』12장,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Dicebam haec, et flebam, amarissima contritione cordis mei. et ecce audio vocem de vicina domo cum cantu dicentis, et crebro repentenis, quasi pueri an puellae, nescio: tolle lege, tolle lege. statimque mutato vultu intentissimus cogitare coepi, utrumnam solerent pueri in aliquo genere ludendi cantitare tale aliquid, nec occurebat omnino audisse me uspiam: repressoque impetu lacrimarum surrexi, nihil aliud interpretans divinitus mihi iuberi, nisi ut aperirem codicem et legerem quod primum caput invenissem. 원문에 보이는 ‘interpretans’라는 단어를 특별히 볼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6.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마19:21).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본문으로]
  7. Saint Augustine,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분도출판사, 1989, p. 85. [본문으로]
  8. 하지만 사전에 이미 고지된 이 ‘신앙’이라는 변형의 과정은 그 자체로 충분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철학 내내 소환되는 이유는 이러한 불충분함을 증거하는 것이지 않은가? 신앙이란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할 신비’가 아니라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리’란 감히 인간의 지성이 다가가지 못하는 저 ‘부정성’의 영역에서 도래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9. 인간이 ‘사멸할 존재들(thnētoi)’이라면 신들은 ‘불사의 인간들(anthrōpoi athanatoi)’이다. 그들이 힘이 세다는 것과 불사라는 점을 제외하곤 인간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인간을 닮은 신들은 그들의 처신에 있어서도 적어도 인간적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희랍인들은 죽음과 불가사의한 현상들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신적이 된 인간’은 사실 그 정신(nous)에 있어서 만큼은 그러한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nous는 그 자체로 ‘신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죽음과 불멸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소포클레스(Sophoklēs)는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면서도(“하고 많은 놀라운 것들이 있지만, 일찍이 인간보다 놀라운 것은 없었거니” Antigonē, 332-3), 그 유한성을 한탄한 것이다(“오직 죽음만을 피할 길 없을 뿐” Ibid., 360-2). [본문으로]
  10. 이에 대해서는 이경직의 논문이 매우 유용하다. 이경직, 「플라톤의『티마이오스』에 나타난 공간 개념」, 『철학』87집, pp. 7-31. [본문으로]
  11. 회고는 어떤 사태를 ‘뒤로부터 끌어 당기는 것’ 또는 상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간적인 구도 안에서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 그리고 현재를 나누는 사태 이전에 존재한다. 그래서 회고는 이미 지나온 것만이 아니라 앞서 달아나는 흔적들과 표지들을 잡아 붙드는 것이다. [본문으로]
  12. ‘흔적’의 주제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해석의 존재론’에 대한 최초의 언급에 해당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서출적 추론’에 대한 언급에 이어지는 52d 이하부터 57d에 이르기까지 생성의 과정 중, 원소들(흙, 물, 불, 공기)이 어떻게 발생하고 안정되며, 복합물이 되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흔적’은 원소들 이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균형(symmetria)이 없는 상태에 놓인 어떤 것이 ‘흔적’이라는 것이다(69b). 균형이 없다는 것은 곧, “비율(logod)도, 척도(metron)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흔적들에서 곧장 원소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형’(eidos)과 ‘수’(arithmod)가 등장한다는 점이다(53b). 이러한 수학적 실체들은 흔적의 ‘깊이’(bathos)를 형성하는데, 이 중 삼각형이 바로 가장 ‘그럼직 한 것’으로 제시된다. 과연 ‘해석’에 있어서 이 ‘깊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흔적은 어째서 ‘깊이’ 안에서 수학적 표상이 되어야 하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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