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사건 (6)

- '홀림'-목적론과 결정론 -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Manet, 《Olympia》, 1863Manet, 《Olympia》, 1863



II. 해석과 사건의 공시적 적용 -올랭피아

1. 현상학적 접근

나는 유명한 하나의 그림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이 그림은 텍스트로 취급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당대의 센세이션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떤 허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물의 모사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우선 그림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붙잡히는지’, 즉 개념(Begriff)으로 다가오는지에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작품을 미적으로 감상하기보다 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전유(appropriation)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림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평범한 오브제들의 고전적인 배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여인(아마도 마네의 취미가 이 여인을 선택했을 것이고, 이것은 충분히 주관적이다)과 하녀로 보이는 흑인, 그리고 맨 왼쪽 귀퉁이에 검은 고양이. 이 각각의 오브제들은 따로 떨어진 거리에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맨 처음 드러난다. 하녀가 여인의 하녀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양이는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무관한 대상들이 하나의 캔버스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생산한다. 그것은 필연성이라는 효과다. 무관함이란 그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네의 이 작품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여기 놓여 있으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이 그림 자체가 우리에게 증언’(attestation)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증언 속에 놓여진 이 무관한 대상들은 그것이 그러그러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 애초에 붙잡힌 이 그림의 우연적인 성질은 어느 순간 필연적인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연성은 대상들의 배치 자체다. 여기에 화가의 의도가 깊이 개입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자의성과 연관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네가 당대의 부르주아들에게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는 에피소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에피소드는 화가의 자의성이 작품을 생산하는 중에 대상들을 배치하면서 발생시키는 우연성에 비해 사후적이고 퇴행적인 전망에 불과하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철저한 계산 하에 대상들을 배치하는 화가라 하더라도 최초의 결정과 작품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결심들이 작품을 순간순간 형성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오브제들의 배치와 결정(결심들)의 과정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이 작품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작품의 존재적인 틀 안에서, 한 편의 작품이라는 텍스춰(texture), 즉 직물을 짜 나가는 두 가지 실이다. 이것은 사실상 어떤 심원한 잠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분석을 통해 그저 드러나는 것이며, 우리의 직관이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바를 그저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즉 이 작품은 텍스트며 우리는 그것을 읽어 나간 것이다.

 

2. 홀림(séduction, bewitchment)[각주:1]

위에서 우리가 붙잡은 사실은 이 작품이 어떤 우연한 배치와 결정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즉 우리가 분석하지 않은) 존재적 틀 내에서 어떤 신체들의 덩어리로 형상화(figuration)된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화 과정이 대번에 여기 나와 있는 대상들의 본래 이름(하녀, 올랭피아, 고양이)로 불릴 수는 없다. 형상화는 우선 시각적인 최초의 인상’(impression)이며 어떤 경우 거기서 그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어떤 강제에 의해 이 그림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면 모든 것은 잠재적인 것들의 층 안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최초로 잡아 끈 저 대상들은 이제 어떤 신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고, 점점 명석판명’(clara et distincta)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명석판명함이란 결국에는 최종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이러한 상의 잡힘이란 A...A...B...C...A... C... 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잡히는 과정이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이라는 것, 그것이 하나의 대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발생적인 애매모호함이 우선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에 대상들이 차례로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의 음각과 양각이 존재한다. 현전(présence)은 비현전 또는 은폐와 늘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애매모호성은 따라서 명석판명함 만큼의 인식적인 가치를 지닌다. 아니 오히려 저 상의 개념화가 진행되는 비선형적인 과정 자체에서 이 두 가지 양식화된 인식요소는 번갈아가며 무한하게 뒤섞인다. 따라서 오히려 명석-애매, 판명-모호가 더 근원적으로 다가온다. 즉 벗은 여인, 흑인 하녀, 고양이는 애초에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백색의 흑인 하녀, 고양이 머리를 한 여인, 꼬리를 곤두세우는 마네 ...


하지만 우리는 어째서 저 세 가지 대상을 추적하는 것인가? 어째서 왼쪽 상단에 삐죽이 드러난 커튼 조각이나 불연속적으로 접힌 침대보의 디테일이나 심지어 고양이의 출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가? 우리는 혹시 사로잡힌 채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대상을 추적하는 어떤 지향(intention)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이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향이라는 것보다 사로잡힘또는 홀림이라는 말이 이 사태를 정리하는데 더 적절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지향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필연적인 방향성, 저기 놓여 있는 대상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현전하거나 은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태다. 이것은 지향과는 다르며, 오직 어떤 정동’(affect)에 기반한 신체적인 움직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홀림이며, 특히 형상화 과정에서는 시선’(regard)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언한다. 시선의 움직임은 형상화 과정과 더불어 덩어리들(bloc, mass)을 이제 하나의 신체(corp)로 주조해 낸다. 그리고 여기서 신체들은 당장에 개별화된 어떤 것, 즉 여인, 하녀, 고양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잔여적인 것들(residuum)은 시선의 폭력 아래에 배제되며, 그림의 테마를 붙잡고자 하는 열정(의미화의 열정)에 의해 단죄된다. 홀린 자로서의 우리 인식하는 감상자는 자신의 정동이 어떤 방식으로 틀잡혀 있는지 반성하기도 전에 대상이 대상으로서 정립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왼쪽에, 저것은 오른쪽에 그리고 나머지는 저 뒤편에 ...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앞서 말한 존재의 틀이 제 모습을 갖춘다.


그것은 공간’(espace)이다. 틀 잡히고 안정화된 정동은 이 그림의 외곽을 뚜렷하게 구분짓고 있는 내외부의 경계를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신체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면서, 그것이 하나의 화폭 안에 정돈되며, 그것이 이쪽저쪽으로 배치되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내외부의 공간성이 일구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발생은 애초에 붙잡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느닷없는 이 공간의 출현은 신체들을 뭉개버리고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섞어 버릴 것이며, 정동과 시선의 틀을 갑작스럽게 부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또한 시간’(temp)을 선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올바르게진행된 이 과정은 어째서 다만 중심으로서의 세 신체와 주변적인 것들로서의 잔여들을 앞뒤로 그리고 전면과 배경으로 가르면서 공간을 발생시키고, 시간성을 확증하는 것일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밖에 진행되지 못하는 것인가? 사실상 최초의 점, 즉 시선이 탄생하던 그 점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마네의 그림을 시선 아래 잡아둠으로써 벌써운명(fatum)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감상자로서의 나의 시선의 편에도 그림의 편에도 있지 않다. 운명의 선이 그림을 따라 형성된다거나 수많은 감상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의 시선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떠도는 단자(monad) 또는 운명을 결정하는 리듬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동과 그림의 존재적 틀을 이렇게 정해 놓은 것이다. 운명에 의해 정해진 궤적, 그것은 자유도’(degré de liberté)의 분포를 헤집어 나가는 끌개(attracter). 이 끌개는 시공간의 화살이지만 끝점이 없으며, 미지의 운동량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이 자유도의 궤적을 따라 신체로부터 시선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문턱을 발견한다. 사실상 마네의 이 그림, 올랭피아라고 이름 붙여진 바, 그 개별성은 바로 이 시선의 발견에서 열어 밝혀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름 붙여진 그것, 그것과 나의 시선이 형성하는 그 무한히 분할되는 깊이(공간, spatium) 안에서 직감했고’, 직감할 것이었. 도대체 이 깊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본다. 무엇을 사유하는가?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사유한다.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과, 액자 안에 배치된 신체들. 하지만 그 시야(전망, vue)와 배치는 어떤 발생적이고 동역학적인 상태공간(espace d'état) 안에 먼저 자리 잡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 공간은 사실상 식별불가능한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이며 시간과 분간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분간된다면 이미 식별가능한 지점으로 진입하여 개별화된 것이다. 즉 문턱을 넘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문턱을 지나온 것일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나의 정동은 언제 어디에서 지성(intelligence)이 되는가? 이것은 일종의 정동의 지성-되기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주체성(subjectivit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즉 무분별한 amypilon 또는 nopilamy 이라고 하든, erehwon이라고 하든 그 어떤 것에서부터 올랭피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동은 완연한 주체로서의 어떤 것으로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에 따라 지성되기조차 지성적인 주체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되기라는 것은 어떤 문턱을 통과하면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의 사건, 즉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사건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건의 다른 이름은 다른 것-되기. 하지만 표명되다시피 이미 다른 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성으로 응고된 사실일 뿐이다. 올랭피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실재로 우리가 이 그림을 이것’(thisness)라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개별화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우리와는 다른 것대상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이라고 느낀다는 것, 이 봉인된 사건은 대상과는 다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설명되고, 설명되고 ... 설명되는 것이다. 무한한 해석이 발생한다. 좀 전에 우리는 시선에 대해 말했다. 해석은 사실 이 시선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시선이 그림 안의 여인의 시선, 하녀의 시선, 고양이의 시선에 고정될 때, 이 신체들은 마침내 살(chair)이 되고, 유기적인 배치가 거기서 이루어진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만들어내는 사건의 영역은 이상한 표지들의 떠돎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표지들은 어떤 배치’(agencement)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 배치의 과정은 형상화 이전의 배치와는 다르다. 형상화와 식별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치는 유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끌개는 개별화를 완성하고,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미분화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은 신체를 살로 공고화하고,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을 도우며, 그렇게 해서 반성적 의식 아래에 완연한 해석 대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제 선형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림 안에서 다른 시선을 생각할 여지 따위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인의 눈에서 시작하든, 하녀의 눈에서 시작하든 상관없다. 시선을 가지고 이리저리 변증론을 펼치는 것은 이제 지성의 영역이 되므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이제 해석들 간의 갈등이며, 거기서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하는가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보자. 어떤 것이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충실한 것인가? 충실성(fidelity)은 이 그림의 어디에서 현전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실을 해석할 때 인정해야 하는 것은 전통이다. 어떤 해석이든 전통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해석이 반전통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될 때조차 그것은 전통에 반하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그림이 어떤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를 사태라고 해도 상관 없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발생한 것은 이 그림 안에 사건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홀림의 방향 아래에서 이 그림의 신체들이 살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의 고정점이 되는 저들의 시선을 좇아가는데 익숙하다. 그러면서 경악하며, 그 경악을 해석해 낸다. 당대의 부르주아들이 이 신체를 매춘부라고 명명하고, 지금의 우리가 이 여자를 천사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시선을 해석해 내는 어떤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 운동이 우리와 저들 부르주아 그리고 우리와 그림, 부르주아와 그림이 형성하는 깊이 안에서 길항하기 때문이다.[각주:2] 그래서 이 깊이 안에서 저 고정점은 늘 유동한다. 어떤 경우에는 시선은 누운 여인 쪽에서 적분되고, 어떤 때에는 하녀, 어떤 때에는 고양이 쪽에서 그렇게 된다. 이 모든 해석은 그러나 무한하게 분할되어서 미분화된 지점에까지 이를 수는 있지만, 즉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어디까지나 그것이 적분되어 나가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해석에는 언제나 지평이 존재한다. 그 지평은 인간의 유한성,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폐쇄될 것이다. ‘죽음은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순간순간이 죽음의 과정이라는 말은 그러한 죽음의 전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전능함은 그림 안에서 시선으로 응고되기 전의 모든 생성하는 운동들에 편재한다. 사실상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 그리고 그림 안의 대상들은 이 죽음의 전능성을 거슬러 스스로를 완성하며, 우리의 시선조차 앞으로 힘겹게 나갈 때 그러한 죽음을 항상 곁에 둔다. 바로 이 맥락에서 이 텍스트, 올랭피아는 비로소 예술이며, 하나의 유일한 작품이 된다.


반면 우리의 시선(혹은 그것이 해석이라고 하자)이 멈추고 눈동자가 풀어지면 곧 죽음이 도래한다. 이 이완된 상태는 바로 사실로 응고되기 전, 그리고 응고되고 나서, 배제되는 저 화폭의 나머지들(residuum)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감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감응하기 위해서는 다시 수동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하며, 그것은 애써 넘어온 문턱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선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으며, 나아가 삶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몰락과 파멸을 의미한다. 순전한 데카탕티즘조차 표면적인 몰락과 파멸 안에 견고한 시선의 패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잔여를 배제하며, 늘 이해하고 해석하고 반복한다. 이 과정은 어디에나 있다.

 

3. 기계론, 결정론, 목적론의 문제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이와 같은 패턴은 정당한가’? 나는 이 패턴에 대해 현상이라는 명명을 했고, 또한 그것에 홀림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과연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패턴은 해석과 사건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어떤 현상에 대한 파악(apprehension)이란, 우선 주객이분 이전의 감응(촉발, 정동)을 통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촉발을 통해 생겨나는 전체 구도 안에는 잡다한 현상들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데, 그것이 경로를 정하게 되면, 어떤 신체와 감각으로 뭉쳐지고, 어느 순간 지성의 영역에 진입함으로써 비로소, 대상화되어 우리 앞에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다. 이 파악의 과정은 사실상 직관의 순간을 펼쳐낸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과정이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적 과정으로 자리매겨질 때조차 그것이 인과성의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지성이란 대상에 대한이해며, 그래서 직관이 최초에 포착해 낸 감응의 질서를 주체화 한다. 즉 주체의 시선 아래로(sub) 던져 놓는다(ject).


그래서 이 주체의 시선은 이전의 직관의 질서에서 드러난 인상들에 중심점을 설정하고, 그로써 인상들을 재정돈하며, 좌표화한다. 직관에 존재하지 않는 인과적 질서를 인상들에 강요함으로써 하나의 체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고전역학의 결정론(détermisnisme)이다. 17세기에 결정론은 라플라스(P. Laplace)와 뉴턴(I. Newton) 천체역학 그리고 베르나르(C. Bernard)의 생리학에서 절정에 이른다.[각주:3]


바슐라르(G. Bachelard)에 따르면 이런 모든 것은 철학적 결정론에 속한다.[각주:4] 이 관점은 전체성이라는 관념 안에 세계를 재단하는 것으로 일련의 검증되지 않은 일반 원리에 구속되어 있다.[각주:5] 이런 일반원리들은 모두 철학이 상정하는 존재 영역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보기에 공간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를 공간으로 환원함으로써 그 범주 외에 있는 존재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적 묘사에 제한된 보편적 결정론은 비록 단순한 관념론적 가정은 아닐지라도 현상들의 실제적인 연관성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을 초기저작에서만큼은 공유했던 칸트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칸트(I. Kant)의 경우에 인과성은 특히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인데, 선험적인 인식능력의 도식작용을 의미한다.[각주:6] 즉 이것은 단순히 범주라고 하기보다는 경험적 직관의 형식인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칸트는 시간 안에서의 선후관계와 인과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간이 단순한 지각의 순서라면, 인과는 현상 일반의 운동(변화)의 순서에 해당되는 것이다.[각주:7] 따라서 바슐라르가 라플라스 류의 철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대의 미숙한 과학의 결정론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미숙한과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슐라르 자신의 이후 언급들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철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기하학적 결정론에 대해서 말하는 바, 그것은 곧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것은 동력학적 결정론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때 동력학적 결정론은 바로 바슐라르가 비판의 근거로 삼는 양자역학의 체계라 할 수 있다.[각주:8] 하지만 이 양자역학의 동력학계는 반드시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 즉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과학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 문제는 라플라스류의 기하학적, 기계적 결정론이 설명할 수 있는 거시수준과,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수준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사실상 고전역학의 체계에서 결정론은 기계론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론이 원인에 대한 결정론적인 해석을 끝내 성취하기 못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결정론은 무한퇴행의 인과사슬에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초월적 변증론에서 말한 이율배반의 한 항목을 형성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결정론은 이 무한퇴행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앞서 바슐라르가 언급한 그러한 것이다. 즉 결정론에서 무한’(apeiron)의 형상을 제거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무한은 퇴행을 자초하는 사유구도다. 원인의 사슬은 그런 형이상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실험과 증거로 돌아와야한다.[각주:9] 그리고 무한은 이제 불확정성이라는 엄밀한 수학적, 실험적 불가능성으로 대체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하나의 제한된 결정론으로 상정할 수 있게 되며, 양자역학적인 위상적 결정론과 더불어 관찰하거나,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해서 동력학계는 하나의 선형적(lineary)인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선형성의 유지는 고전역학의 결정론과 위상적 결정론을 기술적으로 확정하는 어떤 실험적 작업에 의해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를 담당하는 기술자나 실험가에게는 관측 가능한 요소들을 통해 불확정성을 체계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 ‘모든 것은 무한하다따위의 형이상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전문 기술의 목표인 잘 정의된 결정론의 구조를 에워싸고 있는 무제한적인 결정론의 안개를 거두어내면서 점점더 잘 그의 작업을 실현시켜야 한다. 만일 그가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작용한다라는 말을 믿는다면 도구의식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의 기술적 확신의 토대 자체를 잃는 것이다”(Bachelard 1998, 294-95)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슐라르의 결정론을 우회하여 다시 칸트로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바슐라르에 따르면 이제 결정론에 서명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실험가, 또는 그 실험가의 신체의 일부인 실험도구가 결정론적 현상들에 마지막 서명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의지의 자유이며, 인간적 요인이라는 측면에서 칸트가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라고 지칭한 그것, 즉 행위와 책임의 원인(규범적 인과성)이라고 말한 그것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각주:10] 그러나 이 주체는 일종의 소박한 차원에서 선험적이다. 즉 이 주체는 어떤 고정된 주체을 향유하기보다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배우는주체라고 할 수 있다. 과정 속에 있는 주체는, 그래서 지식을 소유한 절대적 힘을 소유하기 보다, “지식을 넘어 이해하는 힘을 가진다(Bachelard 1998, 296). 그리고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작용하는 나의 자아, 내가 아는 현상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다른 주체와 토론하는 나의 자아, 그런 자아의 일종의 가능성에 현상을 종속시키는 것이다”(Ibid.) 이렇게 원인의 계기 중 하나를 형성하는 국지화된 자아는 이해의 과정에서 전능한 힘을 발휘한다기보다, 이 이해의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면서, 실험의 결과에 어떤 불확정성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에서 미숙한 과학적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는 개별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임의적이다(Ibid., 298). 그렇다 하더라도 이 주체는 자신의 보편성의 확실함을 분명하게 아는 합리적 주체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주체는 과학자 사회의 주체로 판명난다(Ibid.). 인과관계에 선형적 인과관계를 가져다주는 주체는 이렇게 합리성을 견지하면서도, 자신의 국지성을 자각하고, 그 인과계열에 내재적으로 자신을 위치지우는 과학자라는 집단적 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슐라르에게서 결정론은 이해된 결정론이이며, 딱 거기까지의 결정론, 즉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유한한 이해능력 안에서, 불확정성을 증언하는 그런 결정론인 것이다. 라플라스의 근대적 결정론, 전체적 결정론은 이 지점에서 인간적 결정론에 의해 수정되고 이 안에 포괄된다.


과학자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 주체의 개입은 고전적 방식의 인과율이 미시적 수준에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의 연속성은 A의 초기조건이 알려졌을 때, 완전히 예견될 수 있지만, 미시수준에서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은 Δt의 간격 안에서 불연속적인 것이다. 이 불연속성은 사실 인간의 운명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플라톤적인 설득되지 않는 chora로 보인다.


다시 문제로 돌아오자. 우리가 저 작품을 통해 발견한 일정한 지각의 패턴들은 바슐라르의 결정론 비판에 따르면, 임의성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지각 기호들(또는 표식이라고 하자)은 잡다한 현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지만, 그것을 질서지우는 작용은 다만 주체또는 집단적 주체의 결정사항에 많은 부분 달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주체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되는가? 아니면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이분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무한성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가? 바슐라르는 그러한 무한성을 불확정성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실험과 경험의 준칙 안에 포섭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정당하지 못한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바슐라르의 입론은 바로 물리적인 실재에 국한된 사안이 아닌가?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은 생물들, 인간이라는 유기체들에게도 곧장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 방면에서 화이트헤드(N. Whitehead)의 결정론 비판은 새로운 방향을 열어 보인다.[각주:11]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결정론을 유물론과 극단적 기계론이라는 견지에서 파악하면서 목적론적인 구도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에게 극단적 기계론이란 분자의 상태들, 운동들을 사물과 인간, 유기체 전체에 적용하는 관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완화된 기계론조차 일종의 타협일 뿐이다. 이러한 기계론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심쩍은 것이며, 어딘가 본질적인 이원론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Whitehead 1989, 125). 이러한 모든 학설들은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유물론이며, 이것은 오직 지극히 추상적인 존재들, 즉 논리적인 식별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Ibid.) 그에게 구체적인 것은 유기체이며, 이들은 전체 계획에 의해 종속된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사유구도와 바슐라르의 그것이 단순히 물리주의와 유기체주의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논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이 둘의 대조되는 지점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우선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계론에서 분자단위의 메카니즘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분자적 단위의 역학적 층위는 그대로 유기체적인 전체 계획에 종속되는 것이다. 또한 바슐라르의 결정론에서 불확정성은 거기에 어떤 주체적인 의도가 개입한다는 측면에서 동역학적 체계의 공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사유구도는 어디에선가 분명히 조우할 것이다. 그러한 조우를 가늠할 수 있는 하이트헤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동물의 경우, 그 정신상태는 그 유기체 전체의 계획 속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종속적 유기체들의 계획을 변경시켜 가는데, 이러한 변경은 순차적으로 하위의 유기체로 계속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전자(電子)와 같은 극미한 유기체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 내부에 들어 있는 전자는 신체가 갖는 계획 때문에 생명체 외부에 있는 전자와 다르다. 전자는 신체의 내외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린다. 그러나 신체 속에서는 그 속에서 그것이 갖게 되는 특성에 따라 달린다. 즉 신체의 일반적 계획에 따라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 속에 정신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재 방식 변경의 원리는 자연 전체에 걸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생명체만이 갖는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학설은 전통적인 과학적 유물론을 버리고 유기체설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 일[이다.](Ibid., 125-26)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전자적인 단위에서부터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적 계획이 주도하는 우주론적 설계를 가정하고 있다. 이 계획은 우선 요소적 측면에서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분자들(전자들)을 수용하지만 그것의 운동과 같은 존재방식은 이들의 메커니즘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본다. 거기에는 존재방식 변경의 원리라는 일반적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Ibid., 126).

 

나의 이 이론에 따르자면, 분자는 일반 법칙에 따라 맹목적으로 달릴 수 있으나, 각 분자들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유기체 전체의 계획에 따라 그 내재적 성격을 달리한다(Ibid.).

 

사실상 이 장엄한 계획은 일반법칙을 포괄하는 섭리의 우주론적 설계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종교적 경지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결정론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슐라르의 그것과 사뭇 다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바슐라르의 경우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을 설정하고, 무한성의 지대에 불확실성을 도입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카오스를 도입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질서라는 전일적인 기획을 자연에 부과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초월적 질서를 도입한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공히 현대과학이 발굴하고, 탐사한 사물의 분자적 층위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다른 점은 바슐라르가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양자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면(bottom-up), 화이트헤드는 생물학적 실체로서의 유기체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내려 온다(top-down)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어떤 류의 자연주의에서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나의 저 기초적인 해석(올랭피아)은 어떤 유기체적 질서의 계획과 양자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내적인 구성은 이미 철학사 안에서 물어져 왔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위의 절에서 논의된 올랭피아에 대한 접근은 현상학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그것은 철학사적인 의미에서의 현상학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컨대 이 접근 전체는 패턴의 구성잔여의 배제라는 이항(二項)의 길항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전자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측면에서 나의 기술(description)은 현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술의 과정을 넘어서는 전제. , 기계론과 결정론, 목적론이 그것이다. 기술의 과정에서 전제되는 이 항목들은 올랭피아를 잠재적 층위에서 현행적 층위에까지 기술하면서 암묵적으로 가정된 것이다. 나는 이 단적인 현상작품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시적인 단계들, 다시 말해 그 단계들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단계들이 서로를 침투하고, 앞으로 뒤로 관여하는 상황들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미 사용한 개념들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어떤 무전제의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니다. 개념들이란 일차적으로 전통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들에 대한 질문은 우선 그것이 경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라는 함축으로 인해 난해함을 노정한다. 여기서 경험적이란 우리가 저 현상을 작품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이 전혀 초재적이며 선험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초재적이지도 선험적이지도 않다면, 과연 전제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여기서 일정한 물리학적인 개념을 전용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성격은 전체 분석의 진행이 인간주의적 중심점, 즉 주체성의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대상과의 조우를 마치 주체 없는 과정처럼 그려냈다는 데 놓여 있다. 자연주의란 그런 주객 이분법의 상항(上項)으로 기능하는 어떤 이념(Idea)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난해함이 경험과 자연이 그 자체로 무한성’(Infinitum)을 향유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무한성 안에서 정신은 자신의 특기추상화를 행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유실된 실재를 기반으로 자신의 공고한 로고스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논하자면, 우리의 추론적 정신(dianoia)은 이러한 경험과 자연의 세계를 어떤 결정적 인과성으로 포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각주:12] 이러한 사실은 과학의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학은 그러한 가치결정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는 가지는 것이 타당한지 등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과학의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를 형성하는 과학의 철학만이 해낼 수 있다. 한 가지 더해서 과학의 철학, 과학철학은 과학의 실질적 기반에 대해 반성한다. 무한성에 직면하여 그것을 과학적 법칙과 이론이 마땅히 고려해야할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행한 현상학적 기술과 과학철학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해석적, 사건적 특성의 설명을 이 과학과 그것의 철학에 의뢰해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각주:13]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선 문제는 저 패턴들이 어떤 기계론적인 함축을 가지는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이것은 원인’(cause)이유’(raison)에 대한 논의를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해 현상학적 기술, 저 순전한 기술적 성격이 어떤 기계론적, 결정론적 이유나 원인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해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에 대한 타당성 논쟁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철학적 천재성이 발현된 특이한 경우다.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어떤 과학적 전개가 역사 안에 도래한 것이기에 그는 4가지 관건적인 원인(hê aitia)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히 대답되어질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 4원인의 상호간의 관련성과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만을 해낼 수 있을 뿐이다.[각주:14]


4원인은 우선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1. ‘사물은 무엇으로(en quoi) 되어 있는가?’-질료인. 2. ‘이것(사물)은 무엇인가?’-형상인. 3. ‘누가 만들었는가?’-작용인(운동인). 4.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목적인. 하지만 이러한 4 가지 원인들은 따로 분립되어 있지 않다. 특히 이것은 일방에서는 일체성을 노정하는데, 특히 인간의 기술적 행위와는 다른 자연적인 과정에서 이러한 일체성을 볼 수 있다. 형상인과 목적인 운동인이 자연적 과정, 특히 종적인 생식 과정에서는 하나로 일치되는 반면, 기술적 행위에 있어서는 형상인은 인간의 욕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작용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신경생리적, 근육의 작용인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외재적인 원인이 된다. 전자의 경우 일체화된 원인은 으로 환원된다고 본다. 그래서 4원인이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제작적, 기술적 설명에서이며, 자연적인 생성에서는 단지 형상인과 질료인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자(二者) 구분도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구분불가능성도 기술적 과정보다는 자연적 과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기술적 과정에서 하나의 침대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목재이며, 그것의 형상은 장인의 개념으로서 초기에는 분리되어 간주될 수 있지만, 자연적인 나무는 그 질료인으로서의 목질과 그 목질을 나무이게끔 하는 나무성은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애초의 4원인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다가,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일체성을 이루는 단계에서 현실성잠재성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원인의 항목은 4개가 아니라 6개라고 선언된다. 형이상학의 해당부분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013b16-1014a18).

 

원인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구성부분 기체 출처 목적이자 좋은 것. 그런데 원인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동종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앞서거나 뒤선다. 또한 부수적 원인과 그런 것들의 유들이 있다. 부수적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멀거나 가깝다. 능력이 있는 것(ὡς δυνάμενα)이라는 뜻에서,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것(ὡς νεργοντα)이라는 뜻에서 원인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수가 여섯이며, 각각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A) 개별자와 유, 부수적인 것과 그것의 유, 연결된 상태로 말해지는 것들과 단순하게 말해지는 것들이 있으며, (B) 이것들은 모두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점에 차이가 있다. , 현실적인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은 그것들을 원인들로 삼는 것들과 동시에 있거나 있지 않다.

 

여기서 잠재적인 것(능력이 있는 것)과 현실적인 것이 구분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개별자든, 부수적인 것이든 간에 끊임없는 변형의 과정 안에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변형의 과정이란 4원인이 일체화되거나, 분리되면서, 유기적 전체를 이루거나 분해되어 사멸하는 그 변화’(metabole)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잠재태현실태의 범주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물론 질료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의 본성은 형상 혹은 현실태를 만나서 복합체로서의 개별적 실체로 변형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원인에 대한 탐구는 단순하게 4원인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개별적 실체들의 잠재태와 현실태를 따져보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 준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확인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과제를 자신의 연구과제로 적극적으로 안고 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연학에서 이미 현실화된 사태들을 분류하고, 위계화하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사유의 사태는 근대에 이르러 별 변화 없이 이어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대의 기계론적 사유를 예비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각주:15] 그는 자신의 체계 내에 진정한 존재론의 근원을 내장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자신의 본류로 설립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측면은 그 전승의 간접적 특성이나, 여러 왜곡된 번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생할 수도 있었다.[각주:16]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단의 함축을 가진 사상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는데, 아무리 혁신적인 사유를 펼친 수사(修士)라 하더라도 그 시대적 한계를 제대로돌파하기는 힘겨웠던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비과학적 태도는 이후 스피노자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 시대 분위기로 이어졌다.


근대는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을 이어 받는다. 형상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구도가 그대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수학적 방법론으로의 일원화’(방법론적 일원론)가 그런 구도를 희석시켜 마치 중세의 사변이 일소된 것처럼 여겨졌던 것 뿐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면에서 중세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인물이 아니다. 데카르트에게서 세계를 설명하는 수학적 방법은 법칙의 지위에까지 승격되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이 가진 사유 구도를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섭리와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는데, ‘신앙고백은 그러한 무관함에 어떤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래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은 그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질서를 이해하는 능력일 뿐인 것이다.[각주:17] 이 질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철학과 과학에 남겨진 과제인 반면, 나머지는 신학의 영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목적인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한당하며, 오로지 라는 형상에 따라, 사물들의 작용인(운동)을 파악하는 데 그치게 된다. 기하학은 이렇게 해서 세계라는 기계에 적합한 형상이 되며, 17세기의 자동기계의 발명에 고무 받아 기계를 그리스의 ‘Deus ex machina’ 식의 우발적인 개입자가 아니라 항존하는 세계의 본질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세계 이해의 지평은 17세기 말에 와서 이미 난점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힘과 에너지라는 질료적인 형상을 발견하고서 부터다. 이것은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움직이는 작용인의 발생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질료적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힘과 에너지가 그것의 물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각적 실체라기보다는 추론적 실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체는 예컨대 데카르트가 가정한 기계로서의 우주보다 더 큰 설명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원격적인 힘으로서의 중력은 데카르트의 개체적인 기계조각들(톱니바퀴들)보다 이론적으로 정합적이며, 단순하다.


이 단순성이 여전히 기계적 인과성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결정론 자체의 인과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게다가 확률적인 비결정성을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미시세계(양자장)에서 이런 결정론은 그 자체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이 근거는 물어질 수밖에 없다. 라이프니츠의 그 충분한 이유는 그래서 그가 언급한 대로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각주:18] 만일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그 충족이유율에 따른 신존재증명이라는 노선을 자연주의적인 방향으로 파악한다면, 여기에 어떤 목적론이 반드시 개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연은 가장 짧은 길을 통해 작용한다라는 원리를 주장한 것은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모든 가능한 해결 방식 중에서 가장 큰 확률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Gourinat 1969, 104). 이것은 이제 필연성의 원리가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우리가 작용인 또는 물질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 시대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이 운동 법칙들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목적인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논리학적 진리, 대수학적 진리 그리고 기하학적 진리들처럼 필연성의 원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 즉 지혜를 통한 선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라이프니츠 2010, 240).

 

이 구절 바로 뒤에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 가장 명백한 신 존재 증명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내 경우에 이 구절은 단지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유기체의 전체적 계획이라고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계획이란 바로 자연이 가진 적합성의 원리, 즉 자연의 지혜이며, 그것은 최소 작용의 원리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양자역학의 간섭실험은 이 최소작용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째서 자연에 목적론이 필요해 지는지에 대해 사유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 실험에서 광자가 장막의 두 구멍 중 어느 쪽으로 어떤 확률에 따라 통과할 것인지는 오직 잠재적으로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광자의 운동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최소작용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최후의 상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우리가 이 최후의 상태를 똑같이 확정된 최초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변화의 법칙을 규정한다”(Gourinat 1969, 105) 이것은 단적으로 목적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구도는 물리적인 대상들에 대한 의인적인 파악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렇게 목적인과 형상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은 인간이 기술적 체험들에서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물리적 자연의 법칙이 어떤 거대한 우발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관점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어떤 사유의 무능력을 포장하는 철학적인 사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피하고 자연에 자연다운 목적론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인론적이지 않은 결정론 또는 목적론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먼 우회로를 통해서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기계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도 인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비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은 잘못 제기된 질문, 자연은 기계처럼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리석게도 라고 답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시작했던 분석으로 돌아와 생각하자면, 실제로 우리는 촉발과 지각의 과정이 어떤 목적론적인 과정 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결정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사실상 우리의 인식의 방향도 그렇게 지정되어 상식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지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목적론과 결정론, 기계론에 대한 철학사적인 고찰을 진행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사유의 처지를 다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해석은 그 틀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은 잠정적으로 지금까지 해 온 논의들을 종합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한다.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한다는 점은 해석과 사건의 존재론 안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가 올랭피아에 대한 공시적,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어떤 흔적이나 표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석의 기반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반은 직접적으로 어떤 음성적 사태를 지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지각촉발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흔적의 확장). 이 과정의 제일 기반은 물론 우리의 지각과 저 작품이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분자적이며 요소적인 사태들(bottom-up)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여기에 어떤 전체성으로서의 목적론적인 계획(top-down)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일의적인 로고스 안에서 서출적 추론과 정식의 추론이 양면을 이루면서 저 대상을 작품으로 형성한다. 여기서 표지는 직접적으로 서출적 추론의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완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가면서 정식의 추론이 전면에 나서며, 그리고 나머지는 잔여적인 것으로 후면으로 물러난다. 이런저런 무수한 흔적들은 이때 선별된 표지와 배제된 표지로 나눠지면서, 해석주체를 안정적으로 구성하는 바, 선별된 표지들은 이제 지성이라는 한정성과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와 설명 그리고 파악이 이루어지며, 재전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어떤 역방향의 되먹임이 일어난다. 즉 이렇게 파악된 표지들은 배제된 표지들이 다시 흔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행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힘들을 소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들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이 된다. 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 힘들은 현행화되어 해석의 내용을 이루는 그 선별된(선발된) 이념들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잠재적인 사태가 현행화되는 사태를 떠받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초의 선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바로 목적론적인 구도가 다시 개입한다. 선별은 이렇게 배제되는 표지들의 힘들, 잠재적인 힘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방식, 최단거리를 가기 위해 ‘()장거리의 궤적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진다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역방향의 되먹임은 그래서 해석주체의 실체적 기반을 늘 불안하게 하고, 잔여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제 다시 흔적이 출현하며 앞서의 과정들이 새롭게 반복되면서 순환이 이루어진다.


앞 절 마지막에서 했던 질문을 반복해보자. 그렇다면 표지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잔여적인 흔적들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이미 관련되어 있음이라는 존재적인 사태라는 것이 바로 이 흔적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흔적들이란 늘 표지와 관련되어 이해된다. 그러나 그 표지들이란 선별된 표지들일 것이며, 배제된 표지로서의 흔적들은 도대체가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힘-운동으로 지칭되거나, 또는 에너지라거나 불확정성이라는 부정적인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제 텍스트가 가지는 특권적 장소성은 흔적들을 선별하는 순간 그것이 특권적인 표지가 된다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적이 출현하는 카오스와 그것을 배제하는 목적론적 질서라는 두 암초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질문이 구성된다. 현행화된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잠재적인 흔적들로 갈 것인가? 또 그 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전자의 질문은 해석에서 사건으로의 구도며, 후자는 사건에서 해석으로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이 구도들을 사유하기 위해 두 대가의 텍스트들을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적(그래서 사건적인) 유명한 구절을 앞에 던져 놓고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후 이 구절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안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가능한 한도의 질서와 조화를 가지고 결정적으로 질서 지워져 있고, 최고의 지혜와 선은 완전한 조화를 가지고만 행동할 수 있으며, 현재는 미래를 품고 있으며, 우리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미래의 사실을 읽을 수 있고, 보다 멀리 떨어진 것은 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이 경과해야 비로소 감각할 수 있도록 전개되는 그의 주름들을 우리가 모두 펼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영혼 속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안에 있는 각각의 판명한 지각들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무한한 수의 모호한 지각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지각하는 사물을, 그의 지각들이 판명하고 고양된 한에서만 인식하며 그 영혼의 완전성은 그 지각의 판명성에 비례한다. 모든 영혼은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 모호한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마치 내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바다의 굉장한 소음을 들을 때 나는, 물론 서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전체의 소음을 구성하는 모든 파도의 개별적인 소음들도 듣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호한 지각들은 바로 전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들의 결과이다. 이것은 모든 모나드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Leibniz 2010, 241-42).   


<계속>

  1. ‘홀림’이라는 우리 말에 해당되는 불어단어로는 ‘séduction’이, 영어 단어로는 ‘bewitchment’가 적당하다고 보인다. 이 말에는 어떤 마술적인 유인과 그에 대한 비의지적 복종이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 [본문으로]
  2. 이 4항 관계는 ‘사건’의 맥락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해석’은 사건과 역사의 지평을 횡단한다. [본문으로]
  3.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선행하는 상태의 결과와 미래 상태의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주어진 순간에 자연에 생기를 주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자들 각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성이 있다면 그리고 모든 자료를 이 지성이 분석하기에 충분히 폭넓고, 우주의 아주 큰 물체의 운동과 아주 가벼운 원자의 운동을 동일한 형식 안에 포함시킨다면, 이 지성은 불확실한 것을 하나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그에게는 분명할 것이다” P. Laplace, 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és, Paris Bachelier, 1840, p. 3. [본문으로]
  4. 그런데, 바슐라르는 현대 기상학과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까지 이 결정론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분명 지나친 일반화라 하겠다(Gaston Bachelard, 정계섭 옮김,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전통』, 민음사, 1998, p. 285). 사실 현대과학에서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은 아직 그 접점이 탐색중이다. 이를테면 ‘양자 카오스’와 같은 개념이 그러한 접점을 찾는 와중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이론 모두 어떤 ‘불확정성’을 전제한다. 초기값의 변화 여부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불확정성과, 위치와 운동량을 확률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불확정성’은 동력학계라는 동일한 계 안에서의 다른 수준(하나는 거시수준, 하나는 미시수준) 간의 이론적 경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는 이 경합의 상황이 어떤 철학적 결론으로 이끌어지느냐에 따라 매우 중요한 세계관의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5. 이 일반원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표현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진공은 실재성이 없다. 존재는 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우주는 연관성이 있는 하나의 전체이다”(Bachelard 1998, 286-87). [본문으로]
  6. 이 도식작용은 순수이성의 수준에서 인과성을 현상에 부여하는 원초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식작용에 대한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관건적인 사항들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뒤에서 들뢰즈의 칸트론이 이 도식작용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도식작용에 대해 논한 강영안의 저서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왜냐하면 강영안은 자신의 책에서 도식작용을 순수이성 뿐 아니라 실천이성과 판단력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면서, 해석학적 도식론이라고 불릴만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들뢰즈, 리쾨르와 더불어 다시 논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도식, 특히 ‘초월적 도식’에 대해 정리한다. “1. 초월적 도식은 시간과 관련해서 ‘초월적 시간규정’(A138/B177)이며, 범주들의 네 그룹(수량, 성질, 관계, 존재방식)의 순서에 따라 ‘시간 계열, 시간 내용, 시간 순서, 시간 종합’(A145/B185)이다. 2.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실현하고 동시에 제한하는 ‘감성의 형식적 순수 조건’(A140/B179)이다. 3.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의 도식’(A140/B179)이다. 4. 초월적 도식은 ‘상상력의 도식’(A141/B180)이며, 직관을 규정하는 ‘상상력의 종합규칙’(A141/B180)이다. 5. 초월적 도식은 그 자체로 늘 ‘상상력의 산물’(A142/B179)이며 경험을 철자화하는 데 쓰이는 ‘상상력의 약자(Monogram)’(A142/B180)이다. 6. 초월적 도식은 경험적인 개념의 그림이나 수학적인 도식과 구별해서 단지 순수종합(A142/B180)에 지나지 않는다. 7. 초월적 도식은 내감 일반의 규정에 관여한다(A145/B179). 8. 초월적 도식은 범주를 대상에 관계시키고 범주가 의미를 갖도록 만드는 조건이다(A145-146/B185). 9.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도식이요 상상력의 도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의 도식’(A146/B185)이다. 따라서 도식은 현상계에만 적용된다. 10.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에게 대상과의 관계, 곧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하고 참된 조건이다(A146/B185). 11. 초월적 도식은 그것을 통해 무엇이 주어질 수 있는 ‘판단력의 조건’이다.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든 포섭은 실패한다(A247/B304)”(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pp. 133-34). [본문으로]
  7. “그러므로 내가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 하나를 먼저 놓고, 다른 하나를 후에 놓는다는 것이지, 객체에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지각을 통해, 서로 계기하는 현상들의 객관적 관계가 무규정적인 채로 남겨진다. 이제 이것을 규정된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들 간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전후(前後)로 놓여져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식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종합적 통일의 필연성을 담지하는 개념은 지각에 있지 않고, 오직 순수 지성 개념이고, 여기서 그것은 인과관계 개념인 바, 시간 안에서 후자를 결정하는 것은 전자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단지 상상 안에서 선행할 만한 어떤 것(또는 전혀 지각될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들의 계열과 따라서 모든 변화를, 경험이 이에 따라 그 자체로, 특히 현상과 변화의 경험적 인식이 가능한 바, 이 인과율에 종속시키고, 이 법칙에 일치하기만 해야 한다”(B234).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저서 인용은 기본적으로 백종현 판을 따르지만, 번역을 수정해야 할 경우, Guyer-Wood 영역판을 따랐다. Immanuel Kant, trans., Paul Guyer, Allen Wood, Critique of Pure Reason, Cambridge Univesity Press, 1998;2000. [본문으로]
  8. “이처럼 역학을 양자역학이라는 보다 섬세한 수준에 이르게 하자마자 언제나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로부터 일체를 이루는 전(全)공간을 끌어들이는 절대적 결정론은 폐기될 것이다. 미시물리학에서 만들어진 양자역학은 그래서 무제한의 우주라는 나태한 관점에 대해 수정작용을 할 것이다. 힘을 고려한 필요가 없는 직관 속에서 운동학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한, 세계는 가득 메워진 연관성이 있는 덩어리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데카르트 물리학에서처럼 물화된 공간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서는 기하학적 결정론만을 탐구할 것이다. 실세계와 이것이 함축하는 동역학적 결정론은 다른 직관, 즉 동역학적 직관을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 어휘가 필요할 것이다. (...) 동역학적인 직관은 우리를 직접적인 에너지 실재론으로 끌어넣는다. 이 에너지 실재론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기하학적 세계가 아닌 세계에서 합리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게 하며, 현대과학에서 배우고자 하는 철학자에게 비데카르트적인 인식론에 도달할 것을 요청한다”(Bachelard 1998, 289-90). [본문으로]
  9. “무제한적 결정론의 형이상학을 증거의 사실주의로 돌아오게 한다”(Ibid., 293) [본문으로]
  10. “사실 객관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인이라는 개념은 이 개념이 초래하는 확신의 근원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는 나, 행동의 대용물로서 하나의 생각을 확인하는 나, 원인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수집하고 그 원인을 조회하는 신처럼 사용하는 나를 함축한다. 이것이 소박한 차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원인의 결정은 배우는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주체, 합리성의 도상에 있는 주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인과 관계의 치밀한 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의 전문기술을 고려해야 한다. 인과관계가 종합 개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원인의 요소들을 수집했을 경우 뿐이다”(Bachelard 1998, 295-96). [본문으로]
  11.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지음, 오영환 옮김, 『과학과 근대세계』, 서광사, 1989, pp. 124-26 참조. [본문으로]
  12. M. Gourinat, De la Philosophie, Hachette, 1969, chap. 2 참조. [본문으로]
  13. 더욱이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의 사유를, 또한 과학 자체를 자신의 철학하기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러나 들뢰즈가 전적으로 과학에 자신의 철학의 근거를 발견했다고 하면 타당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과학철학적 접근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로트만(Lautman, A)이 말했듯이 그러한 접근은 결코 존재적인(ontic) 영역의 한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트만은 하이데거를 인용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존재론적 평면에서, 엔터티의 존재 구축이 존재적 평면에서, 과학적 지식의 대상들이 생명과 물질을 받아들이는 어떤 영역의 사실적 현존의 결정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특정한 개념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의 실현들(realizations)로 향하는 것이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개념적인 분석이, 개념의 예견(anticipation)으로서, 실현되거나 역사화되는 구체적인 관념들을 투사하면서 진행하는 것이다. 본질과 현존[실존]의 구별, 그리고 특정하게 엔터티와 관련된 관념의 발생에서 본질의 분석의 확장은 때로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숨겨져 있다. 이것은 실존론적 고려의 중요성으로 인한 것인데, 세계-내-존재와 관련되어, 『존재와 시간』에 등장한다. 하지만 『근거의 본질』(1969[1929])에서, 하이데거는 정확하게 존재론적 관점과 존재적 관점을 구분하면서, 인간적인 실재성(reality)과 세계-내-현존[실존, existence]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에 대해 설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 개념은 일반적으로 엔터티들의 단순한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적(ontic) 관념, 예외적으로 인간적 실재와 연관되어 있고,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작용(effective) 조건들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적 실재의 본질을 세계-존재(bein-the-World)가 합당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따른 주제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존재는 … 사실적으로 현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43, 45[67]). 다른 한편, 세계-내-존재는 인간적 실재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Lautman, A. Mathematics, Ideas and the Physical Real, (trans.) Duffy, S., Continuum, 2011, p. 201. [본문으로]
  14. 렇기 때문에 쉽사리 이 네 가지 원인을 폄훼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 발전이 고도화된 현대세계에 이르러서도 이 네 가지 원인의 목록은 그대로 설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의 논의 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본문으로]
  15. 이 사태는 단적으로 잠재태와 현실태 쌍 뿐만 아니라 형상인과 목적인이 의도적이고 이론적으로 무시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본문으로]
  16. 대표적으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일원리론』II.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질료 자체는 형상에 대해 모순적 잠세태(potentia contradictionis)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 형상을 통해 현실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태(potentia, 잠재태)를 현실태로 환원시키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현실태에 있다. - 그것이 합성체의 작용인인데, 왜냐하면 ‘합성체를 만드는 것(facere compositum)’과 ‘질료가 형상에 의해 현실태에 있게 되는 것(materim esse actu per forman)’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형상과 질료는 우선 결합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것은 작용인의 성격을 지니므로, 그로부터 형상적 현실화(actuatio formalis)가 뒤따른다”(둔스 스코투스 지음, 『제일원리론』, 박우석 옮김, 누멘, 2010) 이 부분은 결과만이 질료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작용인이라는 관점에서 질료인과 형상인을 결합하는 ‘힘’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잠재태’를 강조하게 되면 피조물들의 구성이 어떤 ‘자율성’을 가지거나, 그러한 내재적인 원인을 신적인 것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범신론 또는 범재신론의 혐의를 받게 된다. [본문으로]
  17.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섭리에 관여하기를 바랄 정도까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ver. Adam-Tannery, Tom VIII, I, 28.) [본문으로]
  18. Leibniz, 윤선구 옮김, 『형이상학 논고』, 아카넷, 2010, p. 2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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