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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6.04.23 [식민지 소설 큰잔치] 11화 겁쟁이 남편과 수다스러운 아내
  3. 2016.03.30 [식민지 소설 큰잔치] 10화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
  4. 2016.03.23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네 번째 부분
  5. 2016.03.16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세 번째 부분
  6. 2016.03.05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두 번째 부분
  7. 2016.03.03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첫 번째 부분
  8. 2016.02.28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여섯 번째 부분
  9. 2016.02.22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다섯 번째 부분
  10. 2016.02.18 [지안의 난독일기] 계산이 불가능한 순간, 청년난민은 어떻게 ‘계산’을 빗나가는가? (1)
  11. 2016.02.17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네 번째 부분
  12. 2016.02.15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세 번째 부분
  13. 2016.02.13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두 번째 부분
  14. 2016.02.11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첫 번째 부분
  15. 2016.02.10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마지막 부분 (1)



연재를 마치며 : 식민지 소설, 타자들의 시공간을 열다

 

 

 

 

 

지영/수유너머N 회원

 

 

1. 외면 받는 식민지 소설들

 

조선시대에도 문학이라고 부를 만한 글들이 다수 존재하긴 했었지만, 현대인들의 감수성에 부합하는 문학들이 본격적으로 창작되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 시기였다. 신체시를 개척한 최남선과 무정을 통해 근대소설의 문을 연 이광수가 등장하면서 무용하면서 동시에 유용한 문학이 등장했다. 그러므로 식민지 시기에 등장한 문학 작품들, 그 중에서도 소설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수많은 추문들을 만들어냈던 한국현대문학의 기원을 탐색하는 작업과 맞닿아 있다.

 

우리들은 식민지 소설 속에서 오늘의 삶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수많은 타자들의 삶이 그 속에 담겨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또한 이 시기의 소설들을 통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과 접속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 시기에 대해, 그리고 이 시기에 창작된 소설들에 대한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지 못하는 것일까? 그 거리감의 근원을 사유하는 일은 식민지 소설을 읽는 작업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이 식민지 시기에 창작된 소설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는 이유 중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70~100여 년의 시간차가 만들어 내는 이질감이다. 이 시기 동안 한국의 근현대사는 식민지 시기가 막을 내렸고, 해방을 맞이했으며, 전쟁을 겪었고, 독재 정치의 억압을 견뎌냈다. 그 후에도 산업화와 자본주의화, 최근의 회자되는 신자유주의까지 수많은 역사적 사건을 겪으며 세대가 몇 차례 바뀌었다. 이처럼 격변의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사람들의 감각과 인식 역시 급격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것에 대한 동경과 속도감을 동반한 변화는 낡은 것에 대한 거부감을 그 안에 품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언급할 수 있는 원인은 식민지 시기가 뿜어내는 어둠의 아우라이다. 최근에 일본어 자료를 읽어낼 수 있는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식민지 말기에 창작된 (조선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문학 작품에 대해서도 학계에서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수많은 작품들이 창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한국문학사에서 이 시기를 비롯한 식민지 시기 전체는 암흑기라는 인식이 자리 잡혀 있었다.

 

일제의 통치권력에 의해 행해진 강력한 검열 작업이 의식 있는 작가들은 절필을 하게 만들었고, 매문으로 생활을 이어가야 했던 작가들은 통속소설에 안주하게 만들었으며, 친일적 성향의 작가들은 제국주의를 긍정하며 대중을 선동하는 작품을 창작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가 이런 식으로 진행될 경우, 한국문학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조차도 이 시기의 작품들을 굳이 찾아 읽어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렵게 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식민지 시기는 당대 최고의 엘리트들이 문필가라는 직함을 내걸고 사회적 삶을 영위하던 시기였다. 문맹률이 높은 조선인들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광수나 인간의 본원적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애썼던 김동인, 당대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머뭇거리는 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웠던 염상섭까지 식민지 초기의 작가들은 다양한 각도에서 식민지인들의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을 그려내기 위해 분투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작품을 매개로 하여 억압과 통제로 점철된 듯 보이는 삶 속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긍정적 힘에 대한 천착이 이루어졌다.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옥죄어 오는 검열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직설적인 말하기 대신에 역설적 말하기, 알레고리, 과잉 의도의 오류 등을 창작 기법으로 선택하여 다양한 문학 표현 의 기법들을 개발해 나갔다. 채만식의 치숙은 부정적인 화자가 비판하는 아저씨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읽힐 수 있기 때문에 역설적 말하기의 방법을 사용한 예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김남천의 에는 사회주의자의 전향을 설명하기 위해 빨간 잉크에 담그면 빨간 꽃을 피우고, 파란 잉크에 담그면 파란 꽃을 피우는 수국의 알레고리가 등장한다. 또한 김사량은 풀 속 깊이에서 통치권력의 요구에 대해 과잉 충성을 보이는 친일적 인물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지를 재치있게 그려냈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이 시기 소설에 대한 거부감의 원인은 초중고의 정규 교육 과정 안에 편성된 식민지 소설을 다루는 문제와 관계가 깊다. 어떤 나라에서든 국어 혹은 문학 교과서에 실리는 작품이 그 나라 안에서 정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교과서에 실을 작품을 선정하는 작업은 신중히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권위 있는 국문학 연구자들이 국어/문학 교과서 집필 작업에 참여하는 이유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에 들어간 작품은 접근성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이 작품들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이 문학 작품 전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문제는 교과서에 실을 작품을 선정하는 작업보다는 그 작품들에 접근하는 방법에 있다. 식민지 시기에 창작된 문학 작품들 중에는 미래의 전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끝나는 작품도 있고, 시대적 배경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을 다룬 작품들도 있다. 그럼에도 이 시기에 창작된 작품에 대해 학교에서 배울 때는 거의 모든 작품을 어두운 시대적 배경과 연결시켜 독해한다. 작품 속에 시대성이 잘 드러나지 않아 내재적 독해가 가능한 작품들조차도 일제의 억압이라는 대전제 아래 분석하는 교육을 받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교과서에 실린 이 시기 작품들의 주제는 대부분 식민지 시기 ○○○의 고난/비애/비극등으로 규격화된다. 다채로운 작품들을 하나의 기준으로 재단함으써 작품을 화석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재를 하면서 식민지 시기 소설에서 삶의 보편적인 양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그 모습들을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생활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려고 했다. 또한 암울함으로 규정되는 식민지 시기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를 해보려 했다. 그 삶 속에는 강요되고 뒤틀린 웃음만이 아니라, 삶의 근원적 요소인 생동감긍정성’, 그리고 명랑성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2. 식민지 소설에서 오늘을 읽다

 

앞에서 살펴본 이유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소설들을 제대로 읽어 보지도 않고 재미가 없을 것이라고 섣불리 판단한다. 그럼에도 이 연재에서 식민지 소설에 주목했던 이유는 식민지 시기에 지금과 유사한 사유의 체계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식민지 시기와 오늘날이 유사하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지금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방식, 즉 나와 타자의 공간을 구획짓고, 질서를 기반으로 한 사고와 제도가 만들어지며, 이성과 관찰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만을 믿으려는 태도들이 이때부터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식민지 시기와 오늘날이 공유하고 있는 이 방식들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시기를 연속선상에서 사유할 수 있게 한다.

 

식민지 시기에 발표된 소설에서뿐 아니라 오늘날의 삶의 현장에서도 자신들이 살고 있는 현실 속의 (국가) 공간을 부정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안정된 직장을 구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생계의 문제와 직면해야 하는 사람들의 삶이 퇴행을 거듭하면서 이러한 문제들이 가시화된다. 이 과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다르다고 판단되는 자들에게 타자의 자리를 부여한 후, 그들에게 혐오의 감정을 투사하는 것 역시 이 두 시기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옥)+조선이라는 언어의 조합은 최근에 등장한 것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를 지옥과 같다고 느낀 사람들은 식민지 소설 속에도 등장한다. 내가 발 디디고 있는 공간이 삶의 공간이 아니라 죽음의 공간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러한 공간과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냉소는 예나 지금이나 존재한다.

 

염상섭은 만세전(1922)에서 식민지 조선을 구더기가 득시글득시글 끓는 공동묘지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죽음의) 공간성에 중점을 둔 묘지였는데, 작가는 이 작품을 책으로 출간하면서 제목을 (혁명의) 시간성이 두드러지는 만세전이라고 수정하였다. 191931일의 전국적인 만세 운동이 있기 바로 전, 다시 말해 1918년을 작품의 배경으로 설정하여 당대의 암울함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젊은 사람들의 얼굴까지 시들은 배춧잎 같고 주눅이 들어서 멀거니 안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이나 헤헤하고 싱겁게 웃는 그 표정을 보면 가엾기도 하고, 분이 치밀어 올라와서 소리라도 버럭 질렀으면 시원할 것 같다.

이것이 산다는 꼴인가? 모두 뒈져 버려라!’

찻간 안으로 들어오며 나는 혼자 속으로 외쳤다.

무덤이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이다!’ ()

공동묘지다! 공동묘지 속에서 살면서 죽어서 공동묘지에 갈까 봐 애가 말라하는 갸륵한 백성들이다.’

하고 혼자 코웃음을 쳤다.

(염상섭, 만세전)

 

인용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식민지 조선이 무덤혹은 공동묘지로 표현될 수 있는 이유는 젊은 사람들의 얼굴이 시들은 배춧잎 같고이들이 자신들의 존엄을 짓밟는 일본인 앞에서 저항의 몸짓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빌붙는 듯한 천한 웃음을 짓거나 싱겁게 웃기 때문이다. 작품 속에서는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건너와 순진한 시골 사람들을 팔아넘기고, 조선인들이 일본인인 체 하는 모습 등이 그려진다. 이런 세상 속에서 헌병에게 꼬투리가 잡힐까봐 비굴한 태도로 일관하는 조선의 젊은이들에게서 진취적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는 의지와 긍정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권력자들에게 보여주는 이들의 거짓된 미소는 식민지 조선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이 싹트기 어려울 것임을 짐작케 한다. 이러한 모습은 21세기 한국의 문화지형학을 파국론으로 읽어내려는 문제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만세전의 이인화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공동묘지라고 인식하게 되는 원인은 개인들의 차원에 국한되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식민지라고 하는 사회적역사적정치적 배경과 더불어 논의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채만식의 명일(1936)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만세전은 일본에서 경성까지 이동하면서 이인화가 관찰한 것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의 문제를 진단한다. 반면 명일(明日)에서는 지식인 범수의 상황과 내면이 어우러지면서 지식인의 만성적인 실업이라는 당대 사회의 문제와 그 원인, 그리고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의 차이 등을 핍진하게 그려낸다.

 

범수는 대학까지 졸업한 지식인이지만 직업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아내가 삯바느질을 해서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중이다. 작품은 명수가 놓인 개인적인 차원의 서술들 위주로 짜여 있다. 그러나 지식인이 직업을 얻지 못하는 원인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범수와 아내는 의견이 갈라진다. 범수는 자신에게 직업이 없는 이유는 공부를 해도 그것을 펼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조선의 현실, 즉 식민지 조선의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에 주목한다. 반면에 아내 영주는 범수가 직업이 없는 것은 남편 개인의 문제, 다시 말해 범수의 성미가 유별나서 세상과 융화를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똑같은 상황 속에서 현실에 대한 진단이 이렇게 다를 경우, 그에 대한 해결책 역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범수는 자식들을 자기처럼 만들지 않기 위해 기술을 가르치려 한다. 하지만 영주는 아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아야 직업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범수는 큰 아들을 자동차 서비스 공장으로 보내고, 아내는 둘째 아들을 학교에 입학시킨다. 작품은 범수가 누가 옳은지 두고 보자며 마음속으로 벼르는 데에서 끝이 난다.

 

작품의 제목인 명일이라는 말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범수와 영주가 현재에 어떤 선택을 하는 이유는 자식들의 명일=내일이라고 하는 미래의 시간을 준비하기 위함이다. 작품 이후의 시간을 토대로 평가한다면 범수와 영주의 선택 중 옳았던 것은 범수 쪽이다. 이 둘의 선택이 있고 나서, 몇 년 뒤 식민지 조선에서 각광 받는 것은 지식인보다는 기술자였다. 일본이 참여한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기술자들은 특등의 대우를 약속 받았다. 반면에 학문을 연구했던 지식인들은 식민지인이라는 한계 때문에 제국대학의 강사 자리도 얻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염상섭이나 채만식의 작품들에서 그려지는 모습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식민지 소설 속에서 오늘날의 부정성을 미리 발견하는 일은 뒤틀린 기시감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간 삶의 보편적인 요소들은 다양한 시간층 속에 공존한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도 존재하는 삶의 태도들을 식민지 시기에 창작된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일이 서로 다른 시간대가 연결되어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문학을 매개로 해서 서로 만나고, 충돌하고, 교차하고, 침투한다.

 

 

3. n+1 : 식민지의 타자성들

 

식민지 시기의 대표적인 단편소설인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1924)에서는 이 시대에 타자들을 생산했던 다수의 기준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노동자의 타자화를 확인할 수 있다. 신분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후에도 상민에 대한 하대는 여전히 남아 있었고,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공적 공간이 재편성되면서 노동자 계층에 대한 하대도 등장하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김첨지는 동소문 안의 인력거꾼이다. 그런 김첨지는 나이 어린 손님에게 합쇼체를 사용하는 반면, 손님은 그에게 하오체로 말한다. 김첨지와 손님 사이에서 오가는 말투의 교환은 노동자인 김첨지가 손님보다 아래에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운수가 좋은 하루 동안 김첨지가 인력거에 태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김첨지는 다양한 타자의 자리를 경험하게 된다. 그가 처음으로 태운 손님은 문안에 들어가겠다는 앞집 마마님이었다. 반상의 위계는 이미 사라졌고 인력거꾼인 주인공 역시 첨지라는 양반의 칭호를 달고 있다. 하지만 김첨지가 사용하는 마마라는 호칭은 단순히 손님을 높이는 표현에 그치지 않고, 김첨지가 벼슬로 대변되는 봉건적인 신분제도안에서도 상민이라는 타자의 자리에 놓임을 추측케 한다.

 

김첨지가 두 번째와 세 번째로 태운 손님은 동광학교의 교원인 듯 보이는 양복쟁이와 코꾸라 양복을 입은 학생이었다. 근대적 제도를 대표하는 학교라는 공간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교원이나 학생이라는 지위는 근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주체의 자리에 놓일 수 있다. 그러나 근대적 제도의 외부에 존재하는 김첨지는 근대성을 기준으로 적용할 때에도 타자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그가 학교와 관계를 맺는 방식은 교원을 학교 앞까지 태워다 주거나 학교 앞에서 학생을 태워 정류장에 내려줄 때뿐이다. 그에게 허락된 공간은 학교 앞까지이기 때문에, 그는 결코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정거장에 도착한 후 김첨지는 빈 인력거를 끌고 돌아가기가 싫어서 태울 사람이 있는지를 둘러본다. 그러다가 양머리에 뒤축 높은 구두를 신고 망토까지 두른 기생 퇴물인 듯, 난봉 여학생인 듯한 여편네에게 다가가 인력거를 타라고 권한다. 하지만 그녀는 추근거리는 김첨지에게 벽력 같이 소리를 지르고는 돌아선다. 작품 속에서 이 여인의 신분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차림을 통해서 추측할 수 있듯이, 그녀가 김첨지보다는 경제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녀는 거지같아 보이는 김첨지에게 분노를 표출한다. ‘조밥도 매일 먹을 수 없는 김첨지는 경제적 측면에서도 타자인 빈자(貧者)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봉건적 신분제도, 근대성, 경제력 등에서 타자인 김첨지보다 더 타자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과 여성을 가르는 가부장제, 그리고 건강과 질병이라고 하는 측면에서도 타자의 자리를 차지하는 김첨지의 아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녀는 조밥을 먹고 체한 후 김첨지에게 뺨을 맞아야 하는 여성이고, 게다가 체한 뒤 며칠 째 제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병든 육체의 소유자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날에도 일을 나가는 남편을 막지 못한다. 그리고 등을 대고 눕지도 못할 만큼 아프지만 제대로 된 약 한 번을 써보지 못한 상태로, 그렇게 먹고 싶어 하던 설렁탕도 먹어 보지 못한 채 나무등걸과 같은 모습으로 죽고 만다.

 

하여간 김첨지는 방문을 왈칵 열었다. 구역을 나게 하는 추기, 떨어진 삿자리 밑에서 올라온 먼짓내, 빨지 않은 기저귀에서 나는 똥내와 오줌내, 가지각색 때가 켜켜이 앉은 옷내, 병인의 땀 썩은 내가 섞인 추기가 무딘 김첨지의 코를 찔렀다.

(현진건, 운수 좋은 날)

 

그래서 작가는 그녀가 죽어 있는 자리, 다시 말해 타자의 자리를 인용문과 같이 묘사한다. 김첨지의 코를 자극하는 이 냄새들은 그녀가 가난하고 병들었으며 더 이상 아이를 돌볼 수 없는 주검의 상태임을 단적으로 제시한다. 근대적인 위생이나 청결과는 거리가 먼 이 냄새들의 복합적인 작동 속에서 김첨지는 아내의 죽음이라는 사건을 읽어낸다. 이 중층의 타자성을 지닌 아내가 죽으면서 남겨놓은 냄새들은 지금은 방안에 가득 차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모두 사라져 버릴 것들이다. 타자들은 죽음 후에도 지속될 수 있는 자리를 부여받지 못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타자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운수 좋은 날을 비롯해서 식민지 시기에 창작된 소설들 속에는 ‘n’개의 타자성에 ‘1’개의 타자성이 더해진다. 학교에서 배우는 이 작품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식민지 시기에 살았던 하층민의 비애정도가 될 것이다. 작품 속에 식민지혹은 일제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의 머릿속에서 식민지라는 시대적 배경은 지워지지 않는다. 작품은 식민지라는 타자성한 개를 이미 전제하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민지의 타자성은 ‘n+1’이라는 숫자로 표시해야 한다. ‘무수함을 뜻하는 ‘n’‘1’이 더해진 방식으로 말이다.

 

 

4. 타자의 고통에 다가가기

 

 

문학은 사회의 금기를 넘어 욕망을 감싸 안을 수 있게 만들고, 갈 곳 없는 영혼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며,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동반자가 되어주기도 한다. 때로는 죽음으로 삶을 가르치고, 인간이 아닌 생물이나 사물과도 교감할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문학은 타자의 슬픔과 고통에 공명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문학을 읽고, 막힌 골목과도 같은 삶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문학에서 찾으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문학의 기능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의 슬픔과 고통에 공명하는 것이 아닐까. 문학을 매개로 직접 겪어 보지 않았기에 알 수 없었던 영역,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나의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다양한 삶의 양상들에 다가갈 때 그 중심에 기쁨과 행복이 있다면 그것도 물론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함께 웃고 잊을 수 있는 행복보다는 상처처럼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슬픔도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타자와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개개인의 고립도는 갈수록 높아지는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매체들이 타자의 슬픔을 실어다 주어서 그것을 소비한 후에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손탁의 표현처럼 타자의 고통을 휘발시키는 시각매체의 즉물성과 달리, 문학은 고통 받는 개개인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그들의 고통을 한 편의 이야기로 꾸려낸다. 타자의 고통이 담긴 서사를 따라가면서 우리는 그 고통의 시간을 공유하게 되고, 그 시간은 뇌리에 남아 사유를 지속시키는 힘으로 작동한다.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면서 병이 없어도 앓아야 하는 사람을 시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 천명에 대해 누구보다 처연하게 노래한 이는 윤동주이다. 21세기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학이라는 천명을 삶 속에서 고민해본 적이 없음은 물론, “사소한 것에만 분개하는것이 비겁한 일이라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윤동주는 병원이라는 시에서 폐병을 앓고 있는 여자가 누웠던 자리에 가서 따라 누워보는 화자를 등장시킨다. 이 화자가 보여주는 무언의 행동, 즉 타자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타자와 자신을 포개보는 그 행동이 바로 문학을 통해 타자의 고통에 다가가는 것이다.

 

문학을 통해 과거의 시간 속에 봉인된 타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식민지 시기에 창작된 소설뿐 아니라 다양한 시대의 문학들을 읽어야 한다. 보도매체가 전하는 역사적 사실과 철학이 만들어내는 관념적 구도와 더불어 문학이 전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숨결을 포착해야 하는 것이다. <식민지 소설 큰잔치>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시작된 기획이었다. 연재가 진행되었던 1년여의 시간을 마무리하며, 그동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Posted by 노마디스트

식민지 소설 큰잔치 11



 

겁쟁이 남편과 수다스러운 아내

 

 

 

 

지영/수유너머N 회원

 

 

 

 

1. 남편들이 겁쟁이가 된 사연

 

1935년에 카프(KAPF,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가 해산된 이후 카프 출신 작가들의 전향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후에는 카프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의 작품에 전향을 한 사회주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 시기의 전향사법 당국에 의해, 당국이 옳다고 지시하는 방향으로 개인의 사상 방향을 바꾸는 것이었다. 이것은 “(통치) 권력에 의해 강제된 사상의 변화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주체의 굴복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전향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굴욕적인 자괴감 속에서 삶을 영위해 나간다.

 

특히 식민지 조선에서 전향은 곧 친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에 전향은 부재하는 국가조선에 대한 국가적배신행위라는 형용모순으로 통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전향은 사회주의를 추구했던 주인공들이 자신이 믿었던 사상을 포기했으며, 공적인 삶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음을 뜻했다. 잃어버린 국가를 찾기 위한 고투, 핍박받는 민족을 구하기 위한 노력, ‘계급을 타파하기 위함 몸부림이 모두 정지 상태에 이른 것이다.

 

이처럼 공적인 삶을 상실한 전향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이제 가정 안에서의 삶, 즉 아내가 전담해 왔던 먹고 사는 문제만이 남게 된다. 그동안은 사회를 위한다는 대의를 내세우며 외면할 수 있었던 생계의 문제가 이들 삶의 전면에 부각되면서, 이들은 생활의 무게에 압도당한다. 그리고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내면은 소설 속에서 독백의 형태로 제시된다. ‘부끄러움을 기저에 깔고 작동되는 내면은 누군가를 대면한 상태에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주인공들은 자기 자신을 청자 삼아 속마음을 이야기한다.

 

1940년에 발표된 한설야의 숙명파도에서는 생활공간에 안착한 주인공들의 삶과 내면을 확인할 수 있다. 숙명의 주인공인 치술은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흙을 파고 있는 아내를 보며 안해가 타고난 그 무서운 숙명- 전해로부터 가지고 온 그 무서운 힘, 질리고 질린 강심, 그 보이지 않는 보배랄가 무어랄가 알 수 없는 그것을 깨닫는다. 가족들의 생계가 걸려 있음에도 공장에 띄엄띄엄 나가는 치술과 달리, 아내는 닭을 키우고 달걀을 팔아 살림에 보태는 등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언제나 성실하게 일한다.

 

이렇듯 생활을 이끌어 가는 아내의 모습은 파도에서도 나타난다. 명수의 아내는 본래 부잣집에 한 번 시집을 갔다가 소박을 맞은 여자인데 대신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재산을 가지고 있다. 명수는 고향을 떠나서 이십 년 동안 만주와 동경으로 떠다니며, 하숙, 감옥, 무슨 단체 회관, 잡지사 사무실, 친구의 집에서 그럭저럭 지내다가 선배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와 만났다. 하지만 문학에 관여하는 지식인 명수는 먹고 살 걱정이 없는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패배자라는 생각에서도 벗어나지 못한다.

 

시대적 매력을 가진 일때문에 감옥에 다녀온 명수이지만 그가 요즘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은 아내를 학대할 때뿐이다. 그는 자신이 괴롭히면 아파하는 아내를 보면서 살아있는 인간을 느낀다. “지고 있는 것이 분명한 삶, 그래서 밑바닥이 드러나도록 져 보았으면하고 바라는 삶이 명수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패배의식에 젖어 아내를 학대하면서 자신도 마음의 상처를 키워간다.

 



 

사회적 관계가 부재한 상황 속에서 아내에게만 몰두하는 그의 내면은 자학을 담은 독백들이 채워간다. 사실 결혼을 하고 글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명수의 독백은 사회적 맥락에 좀 더 근접해 있다. 명수의 독백은 자신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지만 그가 성찰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진 이유는 더 이상 사회에 대해 비판하거나 시대적 문제를 논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이루어지는 독백은 개인적 내면의 독백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서 사회적 문제를 담아내는 담론의 장소로 기능한다.(임병권, 고백을 통해 본 내면성의 정착과 주체의 형성, 153-154)

 

그러므로 명수의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이유는 상실감때문이다. 화자는 사회혹은 대사회적 발언을 할 수 있는 여건의 상실로 인해, 현실 세계에서 사회적 존재로 살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되어 자기 내면의 세계에 몰입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사회적 측면으로 이어지는데, 소설이라는 공적 매체 속에 등장하는 명수의 독백은 자신이 속한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장치로 사용된다.

 

식민지 말기에 창작된 한설야의 작품에 지식인 남성의 독백이 등장할 경우, 그 독백에 담겨 있는 외부세계에 대한 경멸과 조소는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의 나약함에서 기인한다. 세상의 속물적 모습에 대한 비판이 개인의 성격 문제로 환치되어, 대사회적 발화는 그 목소리를 잃기도 한다. 개인의 성격 문제가 올바른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 성격의 근저에 있는 사회적 관계가 그려져야 하는데(김외곤, 자의식의 과도와 현실의 왜곡, 317), 이 시기 한설야의 작품 속에서 그것은 공백으로 남겨져 있다.

 

게다가 명수는 계속해서 외부세계를 외면하다 보니 어느 새 소설을 쓸 때도 시대 현실을 그려내는 데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문단에서 점점 잊혀진다. 그리고 명수는 그것을 주검과 같이 무서운 일이라고 여긴다. 그러므로 명수가 아내에게 행사하는 폭력과 명수의 자조적인 독백은 그가 사회적 죽음 앞에서 느끼는 공포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디는 고백이란 자신의 본성을 존재할 필요가 있고 자신을 확정시켜 줄 필요가 있는 공동체를 대표하는 청자에게 자신의 본성을 설명하려는 한 개인의 의도적이고 자의적인 시도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고백이 개인적 행위라기보다는 언제나 공동체의 행위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자신을 공동체 안에 위치 지으려는 화자의 고백은 공동체와 의사소통을 전제로 하는 발화이다. 그리고 소설 속에 등장하는 독백은 두디가 말하는 사회 속의 고백과 유사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 이유는 소설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공공성과 발화자의 독백이 사회적 자아를 드러내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전향 사회주의자들의 고백을 들어줄 공동체를 대표하는 청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적 영역에서 밀려나 사적 영역 안에 머무르면서, 다시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준비해야 하는 이들에게 공동체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전향 사회주의자들은 파도에서처럼 아내를 학대하거나, 이녕에서처럼 자신보다 약한 족제비의 목을 비틀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상태, 다시 말해 겁쟁이의 상태에서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2. 수다의 장소를 찾아서

 

한설야의 이녕에는 전향 사회주의자를 남편으로 둔 아낙네들이 모여서 수다를 떠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정주에서 이루어지는 이 아낙네들의 수다는 지식인 남성들의 독백과는 달리, 대화 상대를 앞에 둔 상태에서 진행된다. 또한 이 수다는 최신의 소식을 전하는 소문들을 포괄하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정주에 모인 아낙네들은 거의 다 민우의 아내와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이다. 한때 그네들의 남편들은사상관계로 감옥 안에 있었으나 지금 대부분의 남편들은 직업을 가진 상태이다.

 

그때 그러고 다니던 사람들도 지금은 모두 돈벌이 하고 얌전들해졌어. 철들이 나서 그런지 세월이 좋아서 그런지…….”

수득이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자 곁에서 따라서 누구는 수리조합에 다니느니, 누구는 부정 토목계 측량반으로 다니느니, 누구는 어느 회사 고원으로 다니느니, 누구는 무슨 장사를 하느니, 누구는 신문 지국 기자로 다니느니 하는 따위 이야기를 창황히 주워댄다. (한설야, 이녕, 대계29, 23)

 

위의 인용문에는 수득이 어머니와 민우 아내의 대사를 잇는 소문들, 즉 서술자가 요약하여 전달하는 소문들이 담겨 있다. 이 장면들에서 구체적인 발화자가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전향자들이 어떤 직업에 종사하게 되었는가를 논하는 이 자리에서, 중요한 것은 수리조합’, ‘부정 토목계 측량반’, ‘회사 고원’, ‘장사’, ‘신문 지국 기자등의 직업과 그들이 돈을 모으는 방법이지 발화의 주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민우네 정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판은 아내들의 수다판인 동시에 기존의 소문을 창황히주워대고, 새로운 소문을 만들어내는 소문들의 진원지이자 교차로라고 할 수 있다.

 

계집질 좋아하는 사내는 그저 한 번씩 톡톡히 큰집(감옥) 구경을 시켜야지. 그래야 버릇이 떨어진다니까.”

민우의 아내가 결론짓듯 이렇게 말하자 모두 참말 그렇다는 듯이 맞장구판이 벌어진다. 누구는 감옥 다녀오자마자 곧 취직해서 인제는 돈을 모으고, 누구는 책사를 해서, 누구는 토지 거간을 해서, 또 누구는 부자 과부를 얻어서 진장을 장만하고 아들딸 낳고 깨고소하게 산다 하고, 어떤 사람은 지위 있는 관리들과 상종하고, 무슨 대표로 동경까지 갔다 왔는데 다만 누구만은 아직도 징역살이가 부족해서 길이 좀 덜 들어 궁을 못 벗은 것이라는 이야기가 또 한 거리 넌즈러졌다. (한설야, 이녕, 대계29, 33)

 

그런데 위의 인용문에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수다가 오락의 기능과 정치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수다는 사람들을 통합하기도 하고 특정인을 배제하기도 한다. 우선 수다에서 통합의 대상은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다. 민우네 정주에 모인 아낙네들 중에서 계속해서 남편 자랑을 하는 수득 어미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함께 수다를 떨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통합의 대상이다. 반면에 대화 속에 등장하는 계집질 좋아하는 사내는 이 수다판에서 배제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진다.

 

이녕에서 수다를 떠는 아낙네들은 전향자들의 아내여서 인용문에는 과거에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이들이 전향 후 어떤 직업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돈을 벌고 있는지가 주된 관심사로 등장한다. 전향자들의 아내들끼리 모이면 이 수다판에서 서로가 들은 소문이 교환되기 때문에 여러 사람의 목소리는 교차될 수 있다. 왁자지껄한 이 공간 안에서 아낙네들은 자신의 남편을 자랑하기도 하고, 근거 없는 소문을 나르기도 하고, 자신보다 못한 집을 걱정하기도 하면서 독백으로 점철된 남편들의 삶과는 달리 고립되지는 않는다.

 

 

3. 남편 목소리의 소거와 아내들만의 수다

 

한편 이 시기 김남천 소설에 등장하는 전향 사회주의자들은 동일화보다는 이화(異化)’의 대상으로 그려진다. 이들은 사상을 포기하고, 생활에 안주하고자 하는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급급하다. 그러나 결국에는 소설 속 타자의 시선과 자신의 자조 섞인 독백, 그리고 서술자의 평가에 의해 그 위선과 가식이 폭로된다. 그리고 아내의 목소리를 통해 이들에 대한 공격이 진행될 때, 남편들의 목소리는 사라지고 아내의 발화만이 남는다.

 

1937년에 발표된 처를 때리고는 일상생활에 편입하고자 하는 전향 사회주의자의 생활과 내면을 그리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자였던 차남수는 전향 후 변호사 허창훈의 자본과 김준호의 기술을 모아 출판 주식회사를 차리려고 한다. 그런데 자신의 아내인 정숙이가 김준호와 함께 저녁 먹은 것을 숨긴 사실을 알고는 부부싸움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차남수의 위선이 폭로된다.

 

세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에서 첫 번째 장은 부부싸움 중에 아내인 정숙이 남수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이 부분은 식민지 시기의 소설 중에서 전향한 사회주의자에 대한 비판을 가장 적나라하게 담고 있다. 그리고 이때 정숙이가 남수를 비판하는 내용은 단순히 남수가 사상을 포기한 것에 국한되지 않고, 윤리적인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까지를 포괄한다.

 



 

남수는 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데 방해가 된다며 정숙이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정숙이 생각하는 그 진짜 이유는 남수에게는 본처와의 사이에 자식들이 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해서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상태가 된 정숙은 자신을 불구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불구자는 일차적으로 아이들 낳지 못하는 정숙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대의를 위해서 주변인들의 희생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으나, 지금은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는 전향자, 즉 남수를 비판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다.

 

허 변호사는 영리한 놈이라 차남수가 옛날엔 ○○계 거두니까 돈이나 주어 병정으로 쓰구 제 사회적 지위나 높이려구한다는 소문이나 너는 알구 있니. 또 차남수는 자기가 이용되는 줄 알면서 그것을 거꾸로 이용하여 생활비를 짜낸다는 소문을 너는 알구나 있니. 그래 그게 청렴한 사람의 소위 청이불문이냐. (대계3, 처를 때리고, 159)

 

그 놈이 돈을 낸다구 출판사를 하겠다구. 출판사를 하여 문화사업을 한다구. 너두 양심이 있는 놈이면 잡지책이나 내구 신문소설이나 시나부랭이를 출판하면서 그것이 다른 장사보다 양심적이라는 말은 안 나올 게다. 직업이 필요했지. 그따위 장사를 하려면 왜 여태껏 눈이 말뚱말뚱해 앉았었나. 작년에 하지. 아니 재작년에 하지. 문화사업. 이름은 좋다. (대계3, 처를 때리고, 162-163)

 

부부싸움으로 인해 격앙된 정숙이 두 번째로 비판하는 부분은 에 대해 초연한 척하는 남수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친구를 이용하는 허창훈의 위선이다. 허창훈은 차남수의 명분이, 차남수는 허창훈의 돈이 필요해서 두 사람은 전략적 제휴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 둘이 함께 문화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출판사를 하려는 것은 이들에게는 더 이상 민중을 위하는 사상도 없고, 지식인으로서의 소명도 없기 때문이다. ‘청이불문(聽而不聞)’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이 두 사람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친구마저도 이용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다.

 

이는 사회주의 사상이 실패하고 식민지 자본주의 체제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던 당대 지식인들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에게 사상은 과거의 불미스러운, 혹은 화려한 경력으로만 남는다. 그런 전향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을 계몽하고, 청년들을 교육하는 문화사업은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지 못하며, 하나의 장사로 여겨질 뿐이다.

 

마지막으로 정숙이 비판하는 것은 남편이 신봉했던 사회주의 사상 자체이다. 정숙은 사회주의가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닌 지식인들의 허영의 산물이며, 이름만 좋은 것, 자본 앞에서는 자존심도 버리게 만드는 것이기에 부정한다. “흥 사회주의 이름은 좋다.”, “야 사회주의자 참 훌륭하구나.”라는 빈정거림과 사회주의자들의 특성을 질투심. 시기심. 파벌심리. 허영심. 굴욕. 허세. 비겁등으로 규정하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정숙은 남편의 사상이 대중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숙은 남편을 향해 독기를 품고 악을 쓴다. “네 몸을 흐르는 혈관 속에 대중을 위하는 피가 한 방울이라도 남아서 흘러 있다면 내 목을 바치리라.”

 

 

4. 뒤틀린 내면과 자학으로서의

 

처를 때리고의 두 번째 장은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초점화자가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지만, 남수의 내면이 주로 서술된다. “나는 안 믿으련다.”라는 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남수는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무시하고, 자기를 합리화한다. 또한 나는 ~을 알고 있다라는 서술이 반복적으로 등장하여, 남수가 상대의 마음을 안다고 착각해서 오히려 진실에 다가가지 못함을 보여준다.

 

남수는 아내와의 싸움과 그 과정에서 아내를 때리게 된 이유를 모두 아내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용서해 주는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을 보호하려는 내면 역시도 그의 의식이 만들어낸 허위임이 폭로된다. 아내를 때리는 행위 역시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아내에게 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김준호가 몰래 취직운동을 해서 총독부까지 출입할 수 있는 사회부 기자가 되었음이 밝혀진다. 이 사실을 알고 난 후 남수는 “‘이년 이런 놈하고 산보할 때 너는 행복을 느끼느냐’”라고 생각하며, 아내를 뚜드리고싶어 한다. 하지만 곧 이 감정이 결국 제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불쌍한 심리임을 자각한다. 아내를 향한 분노를 곧 자신을 향한 분노인 것이다.

 

전향 지식인의 문제를 가정 안에서 풍자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처를 때리고와 같은 해에 발표된 춤추는 남편이 있다. 춤추는 남편의 홍태는 조혼을 했으나, 지금은 동경 유학 시절에 만난 영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딸 헤라와 함께 살고 있다. 영실은 헤라의 취학을 앞두고 남편에게 본처와 이혼할 것을 요구하지만, 홍태는 이혼에는 동의하면서도 적극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지적 허영에 젖어 사는 홍태는 본처와의 이혼을 계속해서 요구하는 영실에게 이혼을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거짓말을 한다. 왜냐하면 영실과의 관계도 관계지만, 영실 아버지의 도움으로 현재 무역회사에 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은 이혼을 미룰 수 없는 시점에서 그는 일본인 변호사 오까무라를 찾아가서 이혼 소송을 하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날 본처 소생인 아들이 보낸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소자가 금번 차처 보통학교를 우수성적으로 졸업하옵고 상급학교를 지원코저 하옵는대 부주전의 신분 때문에 공립학교는 지원할 수 없고 사립××고등보통학교를 희망하온 중 그곳서도 또한 가정 관계와 기타 여러 가지를 조사한다 하오니 바쁘시겠사오나 소자의 장래를 생각하시와 일차 ××로 내려오셔서 선생 등을 방문하시고 운동을 해주시오면 감사하겠습니다. 이곳 조부주께 부탁하였으나 연로하신 탓에 걱정만 하시고 또 부친주의 욕만 하십니다. 그리고 ××에 낙제하면 경성이래도 가려고 하오니 많이 생각하셔서 선히 주선해 주심 복망하나이다. 모친 주는 일거 무소식이로소이다. 소자는 부모를 두고도 고아와 같습니다. 이월 ××일 소자상서. (대계3, 춤추는 남편, 202)

 


소자상서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는 자식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아버지 홍태에 대한 원망과 조혼 거부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지식인 남성들의 재혼, 그리고 전처소생들의 불우한 삶이 담겨 있다. 하지만 홍태 역시 처를 때리고의 남수처럼 문제의 근원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언제나 술을 먹인 것은 영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홍태는 꼽추의 신체를 흉내내는 꼽장춤을 춘다. 이념과는 이미 결별했고, 가족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며, 생계를 잇기에 급급한 홍태의 모습은 꼽장춤을 매개로 불구자의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홍태의 춤추는 모습만 볼 수 있는 영실과 헤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지만, 홍태는 곧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눈물을 흘린다. 홍태에게 꼽장춤은 즐거워서 추는 춤이 아니라 자학의 또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5. ‘소망(少妄)’ 뒤에 숨겨진 비밀

 

그런데 1938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소망(少妄)에는 앞의 작품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이 작품에서도 남편의 목소리는 소거된 채, 자신의 언니와 수다를 떠는 아내의 목소리만 등장한다. 하지만 앞의 작품들과 달리 남편은 부재하는 가운데도 아내의 인용을 통해서 목소리를 낸다. 남편의 눈에는 아내가 보기 싫은 인간들 하고 휩쓸려 도야지처럼 엄부렁덤부렁 지내속물혹은 속충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내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서, 잘 다니던 신문사를 팽개치고는 한여름에 찜통 같은 건넛방에 처박혀 있고, 말복에는 겨울 외투와 모자까지 쓰고 종로를 나다니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의사인 형부와 언니를 찾아가서 남편이 신경과전문의를 만날 수 있게 자연스러운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가정은 돌보지도 않고,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하면 신경질만 부리던 남편이 일상생활을 온전히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작품의 제목인 소망(少妄)’젊은이 명령이라는 뜻이다. 작품 전체가 수다를 떠는 아내의 목소리로 짜여 있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소망의 주체는 남편으로 느껴진다. 남편은 집에서 책 디리파기, 신문 잡지 뒤치기, 그렇지 않으면 끄윽 드러누워서, 웃지두 않구, 이야기두 않구, 입 따악 봉허구서는, 맘 내켜야 겨우 마지못해 묻는 말대답이나 허구, 그리다가는 더럭 짜증을 낸다. 그리고 닷새에 한번쯤 혹은 열흘에 한번쯤 화동 사는 서씨를 찾아가는 것이 고작이다. 그런 그가 한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돌아다니니 아내로서는 남편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더운 여름날 겨울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남편과 세상이 갈수록 망가져 가는데 가족의 안위만을 걱정하고 여름이니 친정으로 피서를 가서 물놀이를 하자고 이야기하는 아내, 둘 중 누가 더 문제일까? 이 질문에 다다르게 되면, 지금까지는 눈에 띄지 않았던 남편의 이야기들이 부각된다.

 

(1) “남을 위해서 내가 죽는 것두 개주검일 경우가 많아! 제일차 세계대전 후에, 아메리카 녀석들이 무얼루 오늘날 번영을 횡재했게! 귀곡성(鬼哭聲)이 이천만이 합창을 하잖나! 억울하다구. 생때 같던 장정 이천만 명!” (채만식, 소망, 전집7, 346)

 

(2) “이 동물아! 내가 이렇게 꼼짝 않구서 처박혀만 있으니깐, 아무 내력 없이 그러는 줄 알아? 나는 이게 싸움이야, 이래 뵈두. 더위가 나를 볶으니까, 누가 못견디나 보자구 맞겨누는 싸움이야 싸움!” (채만식, 소망, 전집7, 346)

 

첫 번째 인용문에는 그가 직업을 버리고 칩거를 시작한 이유가 담겨 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게다가 이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발표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는 예전처럼 평온무사한 삶을 사는 것을 거부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이처럼 망가진 시대와 대결하지 않고는 스스로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증가마 속 같은 건넛방에 머무는 것을 농성(籠城)’이라고 표현했고, “천하사를 도모하는 노릇이라면 아내가 원하는 것을 함께 할 생각이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두 번째 인용문에도 등장하는 것처럼 더위를 참고 견디는 것이 내력이 있는 행위이며, 하나의 싸움임을 강조한다. 그는 더위가 좋아서 건넛방에 머물고 말복에 겨울옷을 입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몇 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그는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시대가 문제라면, 그리고 그런 시대와 싸움을 할 생각이 있다면 집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활동을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이불 속에서 활개 치는 것이 무용한 것처럼, 그의 행위는 자기와 함께 살고 있는 아내를 괴롭히면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비겁한 행동은 아닐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가 집 밖에서 한 행동들을 다시 짚어 보아야 한다. 우선 그는 6월 그믐쯤에 싸전에다가 시골에서 돈을 마련해 곧 외상값을 갚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돈은 마련되지 않았고, 그 후 그는 화동 서씨네 집을 갈 때면은 곧장 내려와서 가회동으로 넘어가덜 못하구서는, 위정 중앙학교 뒤루 길을 피해 비잉빙 돌아다녔다.

 

바로 여기에 소망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그가 싸전에 외상값을 처리하지 못/안 한 것은 바로 화동 서씨네 집을 빙빙 돌아서 가기 위한 하나의 위장인 것이다. 작품 속에 구체적인 서술들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행간의 의미를 추론해 보면, 그는 화동 서씨와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함께 도모하는 중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싸전 앞을 지나 화동으로 바로 가는 길을 택하기보다는 우회로를 통해 화동에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 그는 싸전에 외상값을 갚지 못한 것이 민망해서 그 앞을 지나치지 못하는 소심함을 연기한다. 게다가 이러한 상황을 숨기기 위해 그는 아내의 다변을 역으로 이용한다.

 

그러므로 젊은 그의 망령’, 즉 복날 겨울옷을 입고 종로에 서 있는 행동은 이러한 위장을 지속하면서도 그 방향을 바꾸기 위한 설정으로 보아야 한다.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할 복장을 한 바로 그날, 그는 싸전 앞을 당당히 지나온다. 그리고 그의 표정은 그새처럼 침울하기는 침울해도, 말소리는 애기같이 명랑했으며, 그는 오늘 자신의 행위에서 유쾌한 해방을 맛보았다고 말한다. 이런 방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그의 얼굴에 쉽게 지울 수 없는 침울함을 남기지만, 그나마 이렇게라도 할 수 있음에 그는 명랑할 수 있는 것이다.

 

한설야나 김남천의 작품들에서는 아내의 수다에 의해서 전향한 남편들의 무기력함이 폭로되었던 것과 달리, 채만식은 소망에서 일상인인 아내의 수다를 자신을 위장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한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는 남편을 미쳤다고 생각하겠지만, 망령의 상태가 남편에게는 하나의 보호색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2차 세계대전이 다가옴을 예견했지만 그것을 막을 수는 없던 시대, 맨정신으로는 시대와 대결할 수 없었던 시대, 그때 저항은 망령의 외피를 입은 형태로 이루어진다





Posted by 노마디스트

식민지 소설 큰잔치 10




 

무엇을 읽고, 어떻게 쓸 것인가 



 

 

 

지영/수유너머회원






0. 읽기와 쓰기의 힘


1917년 작품인 이광수의 『무정』은 작품의 주인공들이 모두 외국 유학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이 났다. 미국에서 생물학과 수학을 전공하겠다던 이형식과 김선형, 그리고 일본에서 음악을 전공하겠다던 박영채와 김병욱은 그 후에 조선에 돌아와 학생들에게 힘과 지식과 과학과 문명을 주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과 같은 교육자들의 노력으로 ‘배워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는 욕망은 조선의 교육열을 시간이 흐를수록 높아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1920~30년대가 되면 구술문화적 환경에서 고전소설을 음독하던 전통적 독자층과는 구분되는 근대적 독자층이 형성되었다. 근대적 독자층이 형성되도록 추동한 힘은 당대에 헤게모니를 얻어가던 글쓰기와 책 읽기였다. 교육체계가 제도화되고 신문 저널리즘이 일상화되자, 개별 주체들이 독서와 글쓰기를 실행하였고 그에 대한 인식을 내면화할 수 있게 되었다. 양반들의 특권이었던 ‘읽기’와 ‘쓰기’가 대중적인 현상으로 자리 잡아간 것은 ‘앎의 민주주의’가 조금씩 실현되고 있음을 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근대에 형성된 독자층이 모두 같은 상태를 지향했던 것은 아니다. 근대적 독자층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중 독자층과 엘리트 독자층으로 분화되었다. 소학교에서 배운 것과 신문을 읽는 정도의 문식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대중 독자층으로 자리 잡았고, 대학을 경유하고 독서를 통해서 심도 있는 사상에 접근하거나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한 이들은 엘리트 독자층이 되었다. 이들의 내면에 공통적으로 자리 잡고 있던 앎에 대한 욕구는 개인적 차원의 문제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문제까지를 해결할 수 있는 힘으로 작동하였다.(천정환, 『근대의 책읽기』, 푸른역사, 2003)



1. 노동자가 된 ‘철학자’의 서재


앎에 대한 욕구가 확산되면서 식민지 조선에도 ‘철학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게다가 그들이 읽었던 책은 지금 철학을 공부하는 우리들이 읽는 책과 별반 다르지 않다. 1936년에 발표된 이기영의 『인간수업』의 첫 장은 ‘철학자’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데, 여기에서 주인공 현호는 “뇌를 너무 써서 생긴 병” 때문에 입원을 했음에도, “명상적 기분에 싸여서 여전히 철학을 운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철학자인 현호의 서재에는 “쏘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시대 삼대 철학자는 물론이요, 스토아 철학자, 스피노자, 라이프니쯔, 스펜서, 쇼펜하우에르 또 누구누구 기타 근세철학자까지. 유교, 불교 등” 동서고금의 철학자들과 도학자들의 책이 가득하다. 뿐만 아니라 서재의 벽에는 괴상한 철학자들의 사진이 빈틈없이 걸려 있다. 그래서 동화은행의 사장인 그의 아버지는 아들을 없는 셈치고, 독실한 기독교도인 그의 어머니는 아들 현호의 병이 ‘철학마귀’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라고 확신한다. 





사람들은 그의 상태를 ‘우울병’이라고 진단하지만 현호는 자기를 “가장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로 인정”한다. 그는 철학을 통해 자신의 ‘속사람’이 커짐을 느끼면서 “사람은 무엇하러 사는 것인가?”라는 실존적 고민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이 질문은 이 작품의 서사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철학 책을 읽는 현호의 이 질문은 인간의 본질적 삶과 관련이 있고,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가는 과정 속에서 현호는 점점 변해간다. 


하지만 현실을 무시한 철학은 공소한 것이고, 이러한 철학에 탐닉하는 현호의 모습은 소설의 전반부에서 시종일관 우스꽝스러운 형태로 재현된다. 작가 이기영이 이 작품을 ‘풍자소설’이라고 이야기한 것 역시 철학의 관념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아내의 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공감 부재의 인간, “문제는 말에 있지 않고 행위에 있는 것”임을 알면서도 독서와 사색만으로 삶을 구성하는 인간이 현호이기 때문이다. 현호의 이런 모습은 생활이나 현실과는 유리된 관념상의 철학에 대한 ‘주아적(主我的) 집착’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인간수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단계에서 현호가 선택하는 것은, ‘사색과 독서’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두뇌 철학’이 아니라 ‘손’을 사용하는 행동주의이다. 그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두뇌 철학’에서 ‘손 철학’을 거쳐 실천적 삶에 해당하는 ‘정신적 문화적 활동’으로 나아간다. 그러면서 문명사회를 건설한 인간의 삶 속에서 정신과 육체, 즉 두뇌와 손의 가치는 분리 불가능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는 ‘손 철학’은 현호가 자신의 관념성을 타파한 후에 얻게 될 도달점이자, ‘주아적 집착’의 상태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인생의 빈집[公家]’을 삶의 의미들로 가득 채울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수단으로 기능한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호가 ‘손 철학’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힘 역시 철학 책을 읽은 경험에서 나왔다는 사실이다. 대학을 나온 지식인이자, 부르주아 가정의 장남이라는 외피 대신에 자신의 ‘속사람’에 주목하고, ‘삶의 의미’를 탐색하며, 종국에는 도로를 건설하는 노동자가 되기까지 현호의 삶을 이끌고 있는 것은 철학 책, 그 중에서도 ‘손’의 의미를 설명한 칸트나 ‘노동’의 의미를 강조한 마르크스의 책에서 발견한 가치들이었다. 


현호는 작품이 창작되었던 시대적 배경과는 무관하게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을 연구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반성하고, 구축해 나간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주변 사람들과 분리되더라도 철학과 노동을 통해서 삶의 진리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철학에 대한 그의 독서 편력은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닌 보편성과 시대와 지역을 폭넓게 수용하는 포용력으로 인해 나름의 자율성을 획득한다.



2. 기술자의 책 상자와 여기(餘技)로써의 독서

 

『인간수업』의 현호와는 달리 중일전쟁 이후에 발표된 김남천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서책들의 목록들 속에는 분명히 당대적 상황과 직접적으로 결부되는 측면들이 발견된다. 특히 「길 우에서」의 서술자 ‘나’(박영찬)가 친구의 동생인 K기사의 책 상자 속에 놓인 책들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1930년대에 ‘청년’으로 호명된 기술자의 취향에 대한 전향 사회주의자의 호기심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관심 속에는 도서를 하나의 기호로 코드화하여 K기사의 내면을 투시하고자 하는 염탐의 시선이 담겨 있다. 



‘책, 책이 가장 K의 내면 생활을 증명할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심에 꺼리는 것을 그대로 책궤 앞으로 기어갔다.

‘혹시 『킹구 청년』이나 『강담』의 애독자는 아닐는가?’

그랬으면 하는 생각과 제발 그렇지 않아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함께 기묘하게 설켜 도는 것 같다. 

『난센스 전집』이 한 권 끼었으나, 『개조』도 있고, 『중앙공론』도 끼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책은 합쳐서 네다섯 권, 그 나머지 네다섯 권은 토목에 관한 기술적인 특수 서적, 학생 시대의 노트, 그러나 그 밖에 근 스무 권에 가까운 책의 전부가 수학사나 과학사, 단 한 책이기는 하나 『자연변증법』의 암파문고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목을 굽히고 궤짝의 뒤를 살펴보니 한 자 길이로 두겨 놓은 책 가운데는 알랭의 번역이 한 권, 괴테와 하이네의 시집, 포앙카레의 작은 책자들이 섞여 있었다. 나는 가슴속을 설레고 도는 동계를 스스로 의식하면서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상의 결론을 찾으려고 애써보고 있었다. (김남천, 「맥」, 233-234쪽)



독서는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강력한 작업이기 때문에 책의 목록을 통해서 한 인간의 “내면생활을 증명”하려는 서술자의 태도를 비약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K기사가 당대의 대중 독자들이 즐겨 읽었던 『킹구 청년』이나 『강담』의 애독자이길 바라면서, 동시에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서술자의 이중적인 태도이다. 서술자의 이율배반적인 태도는 그가 K기사에게 바라는 두 가지를 짐작케 한다. 전자를 긍정한다면 서술자는 K기사가 전문분야에는 깊은 지식을 가졌더라도 그 외의 세상사에는 무관심한, 즉 대중오락잡지 수준의 교양을 지닌 인물로 살아가길 바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후자를 긍정하면 서술자는 K기사가 세계와 시대에 대해 특정한 입장의 연장선 위에서 신념에 따라 직업을 선택하고 살아가길 바랄 것이다. 


영찬이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는 이유는 ‘사회주의’에서 ‘전향’으로 이어지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 사실 ‘영찬’과 K기사의 형은 『맑스전집』, 『맑스, 엥겔스전집』, 『신흥문학전집』, 『크로포트킨전집』, 『경제학전집』 등을 탐독하며 사회주의를 추종했던 세대였다. 반면 K기사는 사상 방면의 책은 거의 읽지 않은 세대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K기사에 대한 첫 번째 바람은 자신의 세대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다시 말해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하는 마음과 관련이 있다. 반면에 두 번째 바람은 자신은 비록 사상을 포기했지만 그 다음 세대는 그러지 않기는 바라는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K기사의 책 상자에는 『개조』와 『중앙공론』처럼 사회비평잡지부터 기술 관련 전공서적과 기초 과학서적, 그리고 엥겔스의 저작에서 최근의 유럽 현대철학과 고전문학 작품까지 들어 있다. 이 일관성 없어 보이는 책의 이름들과 저자들이 불규칙하게 들어 있는 K기사의 책 상자는 영찬이 해독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세계이다.(차승기, 「“비상시(非常時)”의 문/법- 식민지 전시(戰時) 레짐과 문학」) 


그래서 이들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영찬은 “취직난이 유례가 없는 시대”에 특등의 대우를 받는 기술자 K를 “선망이 절반, 질투가 절반”인 감정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K기사는 형 친구 앞에서 형 세대의 사상적 고민을 “청년다운 센티멘탈”로 치부해 버림으로써, 자신과 그들 사이의 거리를 확보한다. K기사는 사회주의에서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자 했던 형 세대처럼 책에서 배운 지식을 가지고 자신의 세계관을 확립하기보다는, 그때그때의 흥미에 따라 다양한 독서를 시도함으로써 책을 취미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3. ‘전향’으로 이끄는 독서 체험


그렇다면 이 시기 인쇄매체에서 읽은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삶의 지향점을 설정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그들은 어떤 책을 읽었고, 그 속에서 무엇을 얻었으며, 또 그 영향은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김남천의 「경영」과 「맥」, 그리고 『낭비』 연작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 즉 전향자인 오시형과 시대의 비판자인 이관형, 삶의 모색자인 최무경의 내면은 책을 매개로 해서 구성되고, 굴절되고, 변용되기 때문이다. 


사상범으로 감옥에 갔던 오시형은 출소한 후에 감옥 안에서 가장 감격하며 읽은 책은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크리톤』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이 책들이 감동적인 이유는 소크라테스의 사정이 자신과 비슷해서라기보다는 글의 내용이 자신의 환경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철학자 플라톤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환경이 지닌 특수성을 잊고 보편적 세계와 접속하게 되는 시형은 소크라테스의 그 훌륭한 태도가 자신에게는 “직선적으로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소크라테스와 오시형은 둘 다 당대에 반사회적 인사로 분류되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재판정에서 이 둘이 보이는 태도는 상반된다. 오시형은 소크라테스처럼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죽음에 이르는 대신 공판장에서 기존의 신념을 버리고 제국 일본을 향해 마음을 돌리는 ‘전향’을 선언한다. ‘전향’을 ‘마음’이 돌아선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는 근대의 재판장에서 재판받고 처벌받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그림자, 즉 욕망이나 충동이기 때문이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45쪽) 


“경제 방면 서적은 전부가 불허가”인 형무소 안에서 시형은 마르크시즘으로 대변되는 경제학과 절연하고 철학이라는 보편적 학문과 접속하여 전향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전향 후의 시형에게 경제학(=마르크시즘)은 “변통성 없는 완고한 학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시형의 논리대로라면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돌아선 덕에 그는 완고함에서 벗어나 융통성의 세계와 변형의 가능성을 향해 열리게 된다. 







애인인 무경의 이해 여부와는 상관없이 시형은 자신의 사상이 경제학에서 철학으로 넘어갔고, 자신의 사관은 구라파의 학문을 중심으로 하던 일원사관에서 동아신질서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다원사관으로 이동하였음을 설명한다. 그리고 수감 전에는 사상의 차이로 인해 대립했던 “평양서 부회 의원과 상업회의소에 공직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를 따라서 고향인 평양으로 내려간다. “사상과 여러 가지 가정 문제로 의견을 달리하던 부자”의 화해가 아무런 갈등 없이 가능해진 이유는 감옥 안에서의 독서 체험을 통해 시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시형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일 주일이 지나서야 무경에게 도착한 편지에는 시형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는 자신의 장래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정신적으로 재생하여 자기를 강하게 하고 자기를 신장시킬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였다. 일찍이 사회주의를 통해 외부 세계에 대한 준열한 “비판의 정신”을 배웠던 그가 비판만으로는 창조가 나올 수 없음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저의 사상적인 경로를 보면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겔로 옮아갔다는 느낌이 듭니다. 하이데겔이 일종의 인간의 검토로부터 히틀러리즘의 예찬에 이른 것은 퍽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철학이 놓여진 현재의 주위의 상황으로부터 새로운 문제를 집어 올린다는 것은 최근의 우리 철학계의 하나의 동향이라고 봅니다. 와쯔다(和辻) 박사의 풍토 사관적 관찰이나 다나베(田邊) 박사의 저술이 역시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를 토구하여 이에 많은 시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제가 과거의 사상을 청산하고 새로운 질서 건설에 의기를 느낀 것은 대충 이상과 같은 학문상 경로로써 이루어졌습니다.” (김남천, 「맥(麥)」, 795-796쪽.) 



그래서 시형은 “머리를 청결하게 깍은 국민복 입은 청년”의 모습으로 재판장에서 자신의 사상적인 경로가 ‘딜타이의 인간주의’에서 ‘하이데겔’로 옮겨왔음을 시인한다. 그리고 ‘히틀러리즘’과 파시즘에 동조한 ‘하이데겔’을 긍정하고, ‘풍토사관’에 바탕을 두고 (제국 일본이 만들어낸 담론인) “국가, 민족, 국민의 문제”에 관심을 보인다. 그의 전향 선언을 들은 일본인 재판장은 만족한 미소를 짓는다. 



4. 실연과 독서, 그리고 남겨진 물음들


시형의 이러한 변화는 자신의 과거 속에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 사상뿐 아니라 사람들과의 결연까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시형이 떠나고 무경은 그가 남긴 책들을 읽으며 그의 내면이 겪었을 복잡다단한 과정들을 되새겨 본다. 이제 무경의 서가에는 시형이 남겨 놓은 철학 서적, 즉 세계 정신을 떠받들고 구라파를 구해보겠다는 거물들, 즉 “니체, 키에르케고르, 베르그송, 뒤르켕, 딜타이, 하이데거, 세렐, 페기, 오르테가, 짐멜, 슈미트, 로젠베르크, 트레루치, 듀이……” 등의 책이 “뭇별처럼 찬연히 빛나고” 있다. 


무경은 이 책들의 목록을 코드화하고 그 코드들을 사용해서 시형의 내면과 접속하기 위한 노력을 할 것이다. 그 내면의 심급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암호화되어 있는 수많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무경은 위의 책들에서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찾아서 그 단서들을 바탕으로, 미지의 영역인 시형의 내면을 퍼즐처럼 맞춰야 갈 것이다. 시형에게 구원을 준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이해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시형의 내면을 읽고자 하는 무경의 노력은 “학문과 애정의 문제가 함께 얽혀” 있는 가운데 “그의 생활의 전체를 통솔하고 지배하는 열쇠”를 찾기 위한 것이다.


책들에 담겨 있는 내용은 고정불변의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들이 놓인 맥락에 따라 해석은 다각도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일본이 식민지에 제공한 동양론과 근대초극론 등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반응은 시형처럼 그것을 수용하는 방식으로만 나타나지는 않았다. 동양론의 자의성과 그 안에 담겨 있는 제국의 편의적 성격을 간파한 이관형은 시형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당대의 정치사상에 대응해 나간다. 『낭비』에서 경성제국대학의 영문과 강사에 지원했다가 실패한 관형은 「경영」, 「맥」에서 일본이 생산한 담론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보이며 이러한 사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경계한다. 그 원인 역시 그의 독서와 집필 이력을 통해서 추정해 볼 수 있다. 



5. 헨리 제임스, 세계 사상으로 통하는 통로 


『낭비』에서 관형이 경성제국대학의 영문학 강사가 되지 못한 이유는 식민지인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 때문이었다. 한때 관형에게 “영문학이라는 보편성은 자신의 식민지성을 은폐하는 기제”(장문석, 「소설의 알바이트화, 장편소설이라는 (미완의) 기투- 1940년을 전후한 시기의 김남천과 『인문평론』이라는 아카데미, 그 실천의 임계」, 248쪽)가 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논문을 심사받는 과정에서 관형은 자신의 학문세계가 식민지 지식인이라는 처지로 인해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오염될 수밖에 없음을 발견한다. 


관형이 영문학을 공부하고 헨리 제임스에 대한 글을 썼다는 사실 자체가 일본의 지식인인 심리학과 교수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관형의 논문을 읽는 그의 태도 속에는 식민지인을 감시하고 검열하는 제국의 시선이 작동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관형의 논문을 일본인 지원자가 쓴 논문과 같은 기준으로 심사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식민지인인 관형의 의식이 이미 오염된 것처럼 일본인 교수의 의식도 제국과 식민지의 관계성 속에서 공정성을 유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관형은 미국에서 태어나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구세계인 유럽의 지혜와 신세계인 미국의 순수함에 대해 천착했던 헨리 제임스를 통해 “세계사상으로 통하는 통로”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런 그가 ‘쓴 것’과 일본인 교수가 ‘읽은 것’은 문자적 측면에서는 분명 동일한 논문이다. 하지만 관형이 ‘쓰고자 한 것’과 교수가 ‘읽고자 한 것’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학문을 통해서 자신을 넘어서고자 했던 관형과 그의 논문에서 제국에 대한 식민지인의 저항과 전복의지를 읽으려고 한 교수 사이의 간격은 쉽게 좁혀지지 않을 것이다. 


이 둘의 관계는 ‘지식/권력’을 둘러싸고 벌어지는데, 여기에서 드러나는 ‘지식/권력’의 양상은 서구의 사상을 배척하면서 근대초극론으로 나아가려 한 제국 일본의 이율배반을 증명한다.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유착관계 안에는 이미 제국의 지식인과 식민지의 지식인들이 하나로 융합될 수 없게 만드는 간극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리고 제국과 식민지뿐 아니라 주변국과도 융합을 강조하는 일본의 의도가 식민지 지식인에게는 유보해야 할 것으로 분류되는 모습이 포착된다. 


헨리 제임스를 연구하면서 연구대상과 연구주체가 분리되지 않는 상황을 경험한 관형은 논문 심사가 진행되는 중에 연구 방향을 ‘영국비평사’로 바꾸어 버렸다. 영국비평사는 이관형에게 “하나의 역사요, 남의 나라에서 점차 비평이 형성되고 성립되는 과정을 정밀히 살피는 사업”이라서, 조금만 노력하면 연구대상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해 놓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형의 노력은 논문이 반려되면서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논문이 반려된 후 관형은 내선일체의 허구성을 절감하고 부르주아 가정에서, 그리고 제국대학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우며 허무감에 젖는다. 헨리 제임스가 모국에서도 유럽에서도 불안을 느끼는 이중적인 유랑 상태을 경험했었다면, 식민지의 지식인인 관형은 자신을 드러내면 억압당하고 침묵하면 의심받는 이중적인 억압 상태(서승희, 「전환의 기록, 주체화의 역설」)를 겪은 것이다. 


1930년대 말이 되면서 본격적인 전시 체제가 시작되었고, 통치권력은 조선문학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의 독서는 통치권력의 정책적인 통제 하에 놓였다. 이것은 작품을 발표하는 작가나 시인, 혹은 비평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문지법과 출판법이 검열의 기준을 제공하긴 했겠지만 논문을 집필하는 영문학도 이관형도 사끼자끼 교수로 대변되는 통치권력의 통제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6. ‘절독(絶讀)/절필(絶筆)’, 그리고 생활인 되기


한편 김남천의 「등불」에 등장하는 서술자인 장유성은 전향을 한 후에 자신의 몸에 배어버린 생활인의 비굴함을 감지한다. 그리고 잡지사를 운영하는 문우 신형을 만나 조선의 작가들이 소설을 쓰지 않아서 “국어(일본어) 원고에 비해서 조선어 원고가 얻기” 힘든 현실에 대해 알게 된다. 그는 조선어로 작품을 쓰는 작가들은 주로 어떤 내용을 다루는지 질문하고 다음과 같은 답을 듣는다. 



“소극적인 인생태도를 가지고 오던 분은 역시 애조나 실의(失意)나 쇠멸의 정조 같은 것을 그전처럼 취급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어느 때까지 쓸 수 있을런지오, 또 시대적인 감각을 가졌다는 분들은 모두 시국편승이라고 욕먹어 마땅할 천박한 테마로 일시를 호도하는 현상이지오. 가장 딱한 것은 내선일체의 이념을 작품화한다고 곧 내선인간의 애정문제나 결혼문제를 취급하는 태돕니다. 이런 주제는 퍽 흔합니다, 되려 일상생활에서 출발하는 편이 자연스럽고 시국으로 보아도 좋을 것인데. 그러니까 아직 시대와 겨누어서 하나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발견했다고 볼 작가는 없는 셈이지요.” (김남천, 「등불」, 116쪽)


“시대와 겨누어서 하나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발견”한 작가가 부재하는 상황 속에서 잡지사를 운영해야 하는 신형을 보면서, 장유성은 그가 지금 “정신적으론 깊은 고독” 속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잡지를 통해 공적 영역을 구성하고, 또 현실과 접속해야 하는 신형이 느끼는 ‘깊은 고독’은 자신과 세계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부재하는 데서 기인한다. 고독은 “타인과의 ‘객관적’ 관계와 이 관계들에 의해 보장되는 현실성이 박탈된 상태”에서 탄생(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112쪽)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유성은 “오랫동안 잡지에 나는 동료들의 작품을 구경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는 절필뿐 아니라 독서도 멈춘 상태[絶讀]로 생활 세계에 정착하였다. 무엇을 읽었는지 감시 받고, 어떻게 썼는지 검열 받는 시국 속에서 작가이자 독자인 장유성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대응한다. 글을 읽는다는 것과 글을 쓴다는 것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가정을 돌보는 개인적 차원의 삶과는 다른 것이다. 독서를 통해 현재의 세계를 파악하고, 집필을 통해서는 시대와 겨눌 만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유성은 오래 전에 소설을 써달라는 청탁에 응답하기 위해, 편지와 일화를 중심에 배치한 글을 자그마한 ‘등불’ 아래에서 써내려간다. 생활 세계에서 느끼는 타성에 젖어 있을 때 그는 어둠 속을 걷는 듯하였다. 하지만 그가 글을 쓰는 동안에는 ‘등불’만큼의 빛이 그를 에워싼다. 시국의 문제 때문에 전향을 하고 고요하지만 의미도 없는 삶을 살던 그가 다시 삶의 ‘등불’ 같은 글쓰기를 시작한 것이다. 읽기와 쓰기에 대한 실천이 다시 시작될 때 개인을 억압하는 시대와의 대결은 새로운 국면을 열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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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 번째 부분 보기)




4. 상징적 전쟁의 귀착점



병조판서를 그만두고 조선을 떠나기 위해 길동은 남경땅 쪽에 갈만한 곳이 있는가 탐색합니다. 그리고 임금에게 쌀 1천석을 얻어 부하들을 데리고 남경땅 ‘제도’라는 섬으로 들어갑니다. 거기서 율도국을 정복하여 이젠 스스로 임금이 됩니다. 흔히 조선의 외부에 율도국이라는 ‘이상국가’를 건설한다고 흔히 요약되는 이 부분은 홍길동이 조선땅을 휘젓고 다니며 ‘사고를 치는’ 전반부의 내용과 많이 다르지만, 앞서 분석한 <홍길동전>을 ‘완성’해주는 부분입니다.[각주:1]


삼천 명의 무리를 데리고 섬에 들어간 홍길동은 이전과 달리 구빈활동은 하지 않으며 정의의 도적이 되지도 않습니다. 섬에 정착한 그들은 집을 짓고 농사를 짓는 한편, 무기창고를 짓고 군사훈련을 합니다(48). 농사를 짓는다고 한 걸로 보아, ‘정착’했다는 말은 단지 거처를 정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정착적인 생활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농사를 지으면서, 도적질이나 구빈활동을 할 것도 아닌데 왜 무기창고를 짓고 군사훈련을 하는 것일까요? 낯선 땅이니 뜻밖의 떼강도나 인근 국가의 침입에 대비하려는 것일까요? 그러나 “이곳은 본래 깊고도 아늑한 곳이라 누구도 알 사람이 없고 또한 풍족했다”(48)고 하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인근에 율도국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그 넓이는 수천리요, 사방이 막혀 있어 과연 견고하고 풍요로운 나라였다”고 합니다(58). 완판본에서는 “중국을 섬기지 아니하고, 수십 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다고 쓰고 있습니다(『홍길동전 전집』, 78). 그런데 “길동이 매양 이곳에 뜻을 두어 왕위를 빼앗고자 했는데, 이제 [부친의] 삼년상을 마치고 기운이 활발하여 세상에 두려워할 사람이 없게 되었다.”(<경판본>, 앞의 책, 58) 하여 군대를 일으켜, 언제 그리 늘었는지 오만 명의 정예군사를 거느리고 율도국을 습격합니다. 물론 결과는 율도국의 왕과 태자가 죽고 길동이 왕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홍길동은 아무도 없는 어느 오지에 가서 율도국이란 나라를 새로 만든 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완판본에선 심지어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다”고 묘사되는 멀쩡한 나라인 율도국을, 왕위를 얻기 위해 난데없이 침략하여 정복한 것입니다. 이건 이전에 자처하던 ‘의적’과는 거리가 멀고, 문제가 있는 어떤 체제에 반하여 그것을 전복한 것도 아닙니다. 왕위를 얻고자 멀쩡한 나라를 침략한 것입니다. 경판본에서도 완판본에서도 이 침략이나 정복에 어떤 명분도, 그럴 듯한 이유도 제시하지 않습니다.[각주:2] 그렇다고 왕권을 획득한 길동이 평생의 한이었던 신분제나 서얼제도를 없애는 것도 아닙니다. 병조판서 되고 나선 한이 풀렸는지, 그 얘긴 다신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거 아닌 다른 개혁적인 조치를 했다는 얘기도 전혀 없습니다. 그 뒤에 태평성대를 누린다고 쓰기는 하지만(그거야 아무 생각 없이 붙이곤 하는 상투구지요),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길동이 율도국을 친 데는 왕권에 대한 개인적인 야망 말고는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습니다.[각주:3]

 

이 무참한 태도는 남경 제도의 산에 들어갔다 만난 ‘괴물’을 죽이는 장면에서도 당혹스럽지만 이미 충분히 예시(豫示)됩니다. 약을 구하러 섬의 망당산에 들어간 길동은 ‘울동’이라는 ‘괴물’을 만납니다. 울동은 “그 모습은 비록 사람이나, 짐승의 무리가 분명했다.”(49) 모습은 사람인데 짐승이라니, 이거 참 난감한 말입니다. 김경미가 소현세자의 『심양장계』에서 발견되는, 태국인 등 남도의 낯선 인종에 대한 묘사를 빌어 지적하듯이(김경미, 2010: 198), 사람처럼 생겼으나 짐승인지 아닌지 모호한 이 울동이란 존재는 아마도 그 섬의 원주민이었을 겁니다. 어쨌건 사람 같이 생긴 존재인데, 사람인지 아닌지 확인해보지도 않고 ‘짐승의 무리’라고 단정합니다. 무슨 징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짐승이면 죽여도 된다고 생각했던 걸까요? ‘짐승이 분명했다’는 판단 하나로 활시위를 당깁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자신을 공격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길동은 ‘내 두루 다녀보았으나 이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이제 저것을 잡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리라’고 생각하곤 활을 쏩니다.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활을 쏘는 것입니다. 그리곤 다음날 그들의 소굴로 찾아가 독약을 써서 전날 화살을 맞아 부상당한 우두머리를 죽이고, 놀라서 달려드는 울동의 무리를 갖은 술법으로 써서 모조리(!) 죽여버립니다. “한바탕 싸움으로 모든 요괴를 다 죽이고, 도로 요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가 남은 요괴까지 모조리 죽였다.”(51) 죽여야 할 특별한 사건도, 죽일만한 이유도 딱히 없는데, 모두 죽인 것도 모자라 다시 사는 곳까지 찾아가 남은 것들을 모조리 죽인 것입니다. 거기서 돌문 안에 있던 두 여자마저 “계집요괴인 줄 알고 마저 죽이려고 했다.”(51) 계집요괴라고 생각했던 이 두 여자는 울동에게 납치된 인간이었고, 나중에 홍길동의 두 처가 됩니다.[각주:4] 인간을 계집요괴라고 생각했던 걸 보면, 그가 ‘요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모두 인간이었을 것임을 함축합니다. 


홍길동의 이 살해는, 아무리 괴물이라는 딱지를 붙인다고 해도 정당한 이유를 찾기 힘듭니다. 그건 심지어 사냥도 아닙니다. 거기에 심지어 남녀도 없고 노소도 없습니다. 끝까지 찾아가 모조리 죽입니다. 단지 자신이 ‘요괴’라고 생각했다는 이유만으로. 낯선 모습에 놀라 괴물이라고 생각했다곤 해도, 이건 일족의 씨를 말리는 학살입니다. 의적은커녕 학살자의 모습입니다. 이는 아무런 명분도 없이 왕위를 얻으려는 야망으로 율도국을 침략한 것과 사실은 매우 잘 부합합니다. 이런 이유에서 율도국에서의 <홍길동전>은 낯선 이를 ‘타자화’하고, 멀쩡한 나라를 침략해 정복하는 식민주의적 서사라는 지적(김경미, 2010)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율도국 정복에 왕위에 대한 욕심 말고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명시적이진 않지만 사실은 명백하고 중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경땅 제도에 들어간 길동이 율도국을 치기 전에 가장 공들여 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래지 않아 돌아가실 아버지의 묘를 미리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무덤의 규모는 왕의 무덤인 ‘국릉’과 가까웠습니다(54, 56). 무덤을 조성한 뒤 길동은 조선으로 갑니다. 그 아버지는 홍길동이 찾아올 것이라며 “부디 서자 차별하지 말고 제 어미를 잘 대접하라”(54)고 이르고 죽고, 그 죽음을 예상하여 멀리 조선으로 아버지 문상을 하러 간 길동은 부친의 시신을 자기가 사는 땅으로 모셔옵니다. 같이 온 형도 산소를 국릉 같이 꾸며놓은 걸 보고 크게 놀랍니다. 여기서 아버지 무덤을 ‘국릉’ 같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이미 그가 왕의 지위를 꿈꾸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즉 어디가 되었든 왕의 자리를 얻고자 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거꾸로 그가 “누구도 알 사람 없을 만큼 깊고 아늑하며 풍족한” 섬에 정착해 처음부터 군사훈련을 하고 병법을 가르친 이유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이미 그는 그 섬에 들어가면서부터 왕이 되겠다는 꿈을 갖고 군사를 키우고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처럼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율도국을 치고 들어간 이유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길동이 아버지의 무덤을 국릉처럼 조성한 것은 단지 지극한 효성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가 아버지의 무덤을 왕릉처럼 조성한 것과, 그가 율도국을 쳐서 왕이 된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행위였습니다. 길동은 왕위에 오른 뒤 모든 장수들에게 벼슬을 하나씩 주어 치하한 후에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하는 다음의 절차로 정복을 완성합니다.



“부인 백씨와 조씨를 왕비로 봉하고 부친을 추존하여 현덕왕으로 봉했으며, 모친 춘섬은 대비로, 백룡과 조철은 부원군으로 봉하여 궁실을 내려주었다. 또한 부친의 능호를 선릉이라 하고 선릉 위에 올라 제문을 지어 제사지내고, 모부인 유씨를 현덕왕비로 봉했으며...”(61)



이로써 아버지와 왕이라는 두 개의 주인기표는 하나로 통합되고, 길동은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아버지와 왕이라는 기표를 모두 소유하게 됩니다. 아버지와 그 위의 왕으로 이어지던 주인기표는, 왕인 자신과 왕릉 같은 무덤을 통해 ‘선왕’으로 변형된 그 위의 아버지로 대체되어 길동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 것입니다. 천비소생의 천한 주체가 왕이라는 최고의 귀한 주체가 된 거지요. 분열되었던 가족은 정상화되었을 뿐 아니라 버젓한 ‘왕가’를 이루게 되엇고, 천출의 신분으로 인해 발생한 정체성의 간극은 왕이라는 자리를 통해 해소된 것입니다. 이를 확인하기라도 하려는 듯, 길동은 모든 것이 잘 풀려 안정된 뒤 모친을 모시고 “지난 일을 생각하며 서글프게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합니다. “소자가 당초 집에 있을 적에, 만일 자객의 손에 죽었다면 어지 오늘날 이같이 되었겠사옵니까?”(61) 이는 정체성 안의 간극과 주체화의 실패에서 시작한 드라마가 상징적인 투쟁을 거쳐 도달한 최종적인 완결의 지점이란 점에서 <홍길동전>의 결말이라 하기에 적합하다 하겠습니다. 






  1. 이병원(1988)은 문장의 글자수 비교를 통해 독자의 흥미를 위해 후세에 첨가한 부분으로 간주합니다. 율도국 부분이 앞서 조선에서 홍길동의 활동을 다룬 부분과 이질적이라고 보는 셈인데, 무대가 바뀌고 활동이 바뀐 만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질적인 텍스트라고 할 수 있을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질적인 텍스트라고 해도 이어 붙여 작품이 된 만큼, 연결의 효과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최대한 분석하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으로]
  2. 김경미(2010)는 이를 식민주의적 침략이라고 평하는데, 타당한 지적이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3. 후대의 독자들 또한 이는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여 1900년경 필사된 세책본인 동양문고본 홍길동전(이윤석, 1998)에서는 율도국을 “태평하고 넉넉한 나라”가 아니라 정사를 돌보지 않는 왕으로 인해 인민들이 고통 받는 나라로 길게 바꾸어 묘사합니다. 율도국을 정복하는 전쟁의 과정도 매우 길게 확장되어 있습니다. [본문으로]
  4. 이걸 보면, ‘계집요괴’와 이들 여인 간에 별다른 외형상의 차이가 없었음은 분명하며, 이런 의미에서 울동이란 그 섬의 원주민이라고 할 이유가 텍스트 내부에 충분히 있는 셈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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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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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증상적 기호의 상징적 전쟁


홍길동이 왕과 관리를 상대로 벌이는 투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홍길동’이란 기표를 여럿으로 증식시켜 의미의 단일성을 깨는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그의 자리가 갖는 이 양가성과 그의 정체성이 갖는 모호성을, 그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혼란을 왕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임금의 명으로 홍길동을 잡으러 나선 포도대장 이흡은, ‘홍길동’이란 이름을 지우고 홍길동이란 인물의 정체성을 속이며 다가온 소년에게 속아 잡히게 됩니다. 이는 홍길동이란 이름의 인물이, 정체성의 확실함과 기의의 단일성을 가정하는 통상적인 권력으로는 잡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존재임을 뜻합니다. 이후 홍길동이 사용하는 전술은 여러 명의 홍길동을 만들어 팔도에서 동시에 ‘장난’을 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수의 기호들을 동시에 사용하여 ‘홍길동’이란 기표의 의미나 내용, 그것의 위치조차 결정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홍길동’이란 이름을, 체포할 수 없고, 장악할 수 없으며, 포착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의미에서 ‘있을 수 없는 기호’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다의적이고 발산하는 기표의 의미를 고정하지 않고선 그것을 다룰 수 없고 장악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그 기표의 부동(浮動)을 정지시키고 위치를 고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합니다. 왕과 신하가 찾아낸 것은 그의 부친과 형을 통해 ‘홍길동’을 유인하고 붙잡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매우 적절한, 어쩌면 유일한 해결책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홍길동은 ‘호부호형’에 대한 욕망을 통해 아버지라는 기표에, 가족 안에서의 ‘귀한 자리’에 이미 사로잡혀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의적인 기표에 단일한 의미를 부여해 하나로 고정할 수 있는 것은 홍길동의 주인기표인 그의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형이었습니다. 그래서 형의 이름으로 방을, 즉 길동을 부르는 기표들을 써붙여, 가문의 멸문을 협박하며 “스스로 형을 찾아와 사로잡히라”고 호소합니다(39). 그리고 예상대로 길동은 형이 있는 경상감영에 스스로 나타나 오라를 받습니다. 


그러나 홍길동이 그것으로 잡히고 끝난다면, 그의 욕망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말 것입니다. 호부호형을 하지 못한 한으로 가출하여 ‘장난’을 벌였고 그 한을 상기시키며 형 앞에 나타난 그는, 이제 팔도에서 여덟 명의 홍길동 모두 동시에 잡혀 들어가게 하여 서로 자신이 진짜라며 다투게 합니다. 홍길동을 대신하는 이 여덟 개의 ‘초인(草人)’들, 그것은 홍길동이란 실제 인물을 대신하는 기호들입니다. 그런데 그게 8개 동시에 잡혀 들어와 서로가 진짜라고 주장하니, 누가 진짜 ‘홍길동’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8명의 홍길동, 그것은 유사한 기표의 증식을 통해 홍길동을 식별불가능한 기호로 만드는 또 다른 방법이었던 셈입니다. 


이에 대한 대응 또한 주인기표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은 즉각 길동의 부친을 불러 “아들을 알아보는 데는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 하니, 저 여덟 중에서 경의 아들을 찾아내라” 명합니다(41). 홍판서는 “네 지척에 임금님이 계시고 아래에 아비가 있는데도, 이렇게 천고에 없는 죄를 지었으니 죽기를 아까워하지 말라”며 피를 통하고 쓰러집니다(41). 임금과 그 아래의 아버지, 길동의 두 주인기표들을 상기시키며 복중을 요구하는 셈이니, 길동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여덟 길동은 모두 쓰러지는 부친을 보고 동시에 눈물을 흘립니다. 부친이 정신을 차린 후, 여덟 길동이 입을 모아 다시 호부호형 못한 한을 다시 말하고 사라져 ‘초인’ 8개만 남습니다. 짚단으로 만든 이 기호들은 단지 한 맺힌 말을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기호들이었던 것입니다.[각주:1]

 

그 다음 홍길동은 “홍길동은 아무리 해도 잡지 못할 것이나, 병조판서로 임명하면 잡힐 것”이라는 방을 사대문에 붙이고 다닙니다(43). 아버지라는 주인기표 뒤에 있는 실질적인 주인기표에게 보내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도적을 잡으려다 잡지 못하고 도리어 병조판서에 제수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왕은 다시 길동의 형을 다그쳐 잡아 올리라 명합니다. 길동은 다시 형에게 갈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주인기표인 아버지가 사실상 인질로 왕의 손 안에 있는 셈이니까요. 


이전의 속임수가 있었으니, 이번엔 진짜를 식별하려 합니다. 주인기표인 아버지의 지적대로 왼쪽 다리에 붉은 혈점이 있음을 보고 진짜 길동임을 형은 확인합니다. 그 혈점으로 기호의 의미를 확인하고 고정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런 것으로 기호의 의미를 고정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시 대궐 앞에 이르자 몸을 흔들어 쇠줄을 끊고 수레를 깨고 사라져버립니다. 이전에는 홍길동을 잡으니 어떤 놈이 진짜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면, 이번에는 기호의 의미를 하나로 고정하니, 그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셈입니다. 홍길동을 장악할 가능성을 얻으면 식별할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고, 홍길동인지 식별할 가능성을 얻으려면 장악할 가능성을 제거해 버리는 ‘불확정성’의[각주:2] 기호학적 전략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을 식별하여 체포할 가능성이 없음을 반복하여 입증함으로써 길동은 임금으로 하여금 체포를 포기하고, 결국 자신을 병조판서에 임명하게 만듭니다. 다의적으로 발산하는 기호와 통제할 수 없는 기호를 이용한 ‘상징적’ 투쟁을 통해 최고의 주인기표의 인정을 얻은 겁니다. 여기서 길동에게 중요한 것은 실질적인 병권을 장악하여 조선의 무력을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병조판서라는 상징적 지위, 그 명칭으로 표시되는 사회적 인정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병조판서에 임명되자마자 대궐을 떠나 사라집니다. 그런데 나중에 임금 앞에 나타나거나 다른 이들에게 이름을 말할 때 항상 ‘전임 병조판서 홍길동’임을 명시합니다. 그의 이름 앞에 달라붙는 ‘병조판서’라는 기호가 그가 진정 바라는 바였던 것입니다. 


이름을 둘러싼 갈등과 호칭을 둘러싼 상징적 전쟁, 이것이 <홍길동전>에서 길동이 벌이는 투쟁의 요체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가 관리나 임금을 겨냥해서 벌이는 투쟁은 진정한 전쟁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전쟁이고, 기표를 획득하기 위한 게임이며 가짜 전쟁입니다. 기호학적 게임이라고 하는 게 적절할 듯합니다. 그는 의적을 자처하며 부자들이나 악질 관리들을 털고 괴롭히지만, 그것은 이름을 알리고 상징적 지위를 얻기 위한 투쟁의 일부였을 뿐입니다. 실제로 경판본 <홍길동전>에서 의적으로서 활동하는 장면은 매우 간단하고 소략하게 처리될 뿐입니다. 완판본에선 그 부분을 좀 늘리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부분이 속이고 잡히고 다시 속이는 일종의 ‘진실게임’이고, 그런 방법으로 자신의 속내를 고백(!)하며 임금 주변을 반복하여 오가는 ‘밀땅게임’입니다. 자신을 알아주길 바라는 고백의 주체와 그걸 들어주는 주인기표 사이의 갈등이란 아무리 심각한 것이라도 결코 ‘전쟁’이 될 수 없습니다. 전쟁의 흉내를 내서 만든 스펙터클이고, 냉정하게 말하면 일종의 ‘쇼’일 뿐입니다.[각주:3]


임금이 길동을 병조판서에 제수한다는 방을 붙이자, 길동은 “사모관대에 무소뿔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는 높은 수레를 타고 큰길로 버젓이 들어오면서...‘지금 홍판서가 임금께 인사하러 온다’”고 외칩니다. 병조판서를 받자마자 그만두고 사라졌다 돌아와 임금 앞에 나타난 길동이 하는 말은 그의 투쟁이 기호를 이용한 상징이었을 뿐 아니라, 기호를 얻기 위한 상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무뢰배들과 함께 관아를 치고 조정을 시끄럽게 한 것은 신의 이름을 드러내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46)[각주:4] 홍길동이 하고자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홍길동 자신의 입으로 이처럼 명확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병조판서’란 직함을 한 번 얻자마자 그는 ‘홍길동 장난’은 물론 빈민을 구제하는 활빈당의 의적활동 중지하고 사라집니다. 새로운 체제나 가치를 추구했던 것도 아닐 뿐 아니라, 그나마 ‘활빈’이란 명목의 활동조차, 병조판서로 임명해주자 모두 중단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니 홍길동의 활동에서 ‘혁명적’ 성격은커녕 ‘개혁적’ 성격도 사실 찾아보기 힘듭니다. 왕에게 자기 설움은 반복하여 말하지만 자신의 설움을 낳았던 서얼제도의 철폐를 요구하지도 않으며, 빈민들을 구제하는 어떤 조치를 요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병조판서가 되어 민중을 괴롭히는 관리들을 징치한 것도 아닙니다. 병조판서라는 이름 하나 받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중단하는 것은, ‘활빈’이란 명목의 활동조차 실제론 개인적인 명예를 위한 게 아니었던가 의심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 점에서 “길동의 활빈활동은 국가적 질서와의 정면대결”(박일용, 2003: 127)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혁명적이란 말은 물론 개혁적이란 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봉건적 사고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가의 사상적 한계”(이윤석, 1996)나 “충효의 윤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지적하는 평가(안창수, 1986)가 실제 내용에 더 가깝다고 보입니다. 이런 한계를 두고, 대다수 민중들이 유교적 이념과 도덕관념에 침윤되어 있었기에, 왕을 제거하고 국가에 반하려 했다면 “길동을 민중적 영웅으로 생각하기는커녕 천하에 다시없는 역적이라며 철저하게 배척했을 것”이며 그간의 활동마저 “순전히 개인적 욕망과 반역을 위한 명분으로 매도되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순화된 내용을 당시 민중의 의식수준을 고려한 서사전략이라고 하기도 하는데(이상구, 2013: 320), 이런 것이라면 ‘서사전략’에 작품의 본질적인 내용이 잡아먹힌 것이 되고 맙니다. 개인적인 명예욕을 위해 ‘활빈’활동마저 쇼로 하는 인물을 ‘민중적인 영웅’이라고 한다면, 민중적 영웅이란 비판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지지하고 찬사를 보낼 대상은 아니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엔 “반항과 순응의 연속을 통해 당대 사람들이 처해 있던 본질적 삶의 조건을 보여주고, 쉽게 현실 도피하는 대신 그 안에서 고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안창수, 1986)는 평가조차 너무 후한 평가입니다. 그 고뇌가 아버지와 임금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욕망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1. 이런 기호들에 대해 정신분석학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증상적 기호’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홍길동의 실재와 상징적 지위 간의 채워질 수 없는 간극, 그 간극이 상징계 안에 만드는 얼룩으로서의 길동의 상처, 그리고 그 상처로 인해 만들어지는 증상적인 기호로서의 여러 홍길동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홍길동이란 인물은 아버지에 대한 양가감정을 갖고서 그 트라우마 주위에서 증상적 행위들을 반복하는 신경증적 주체가 됩니다. [본문으로]
  2. 위치를 고정하면 에너지 불확정도가 무한히 커지고, 에너지양을 확정하면 위치불확정도가 무한히 커지는 양자적 현상을 하이젠베르크는 ‘불확정성의 원리’라고 명명한 바 있지요. [본문으로]
  3. 이에 대해 ‘속임수’와 ‘배신’이란 개념을 대비하여 사용하는 것도 좋을 겁니다. 기표적인 체제에서 벌어지는 기표적인 투쟁이란 사실상 기표들의 사용이나 해석을 둘러싼 투쟁인데, 이는 그 모든 기표를 중심기표인 왕으로 환원하는 속임수의 체제를 구성합니다. 반면 배신이란 얼굴을 돌리며 탈주선을 그리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기표적인 가치나 해석을 등지며 시작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탈기표적 체제에 속합니다. 홍길동은 배신하는 자가 아니라 속이는 자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Deleuze/Guattari, 2000(1) 5장 및 이진경, 2002(1) 5장 참조. [본문으로]
  4. 이 대사는 완판본에서는 빠져 있지만, 동양문고본에는 동일하게 포함되어 있습니다(『홍길동전집』 완판본, 75~76; 동양문고본, 16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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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2. 호칭의 문제와 인정욕망: <홍길동전>


<홍길동전>에서 가장 중심되는 테마는 이름입니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호칭의 문제입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어린 홍길동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도, 그가 집을 나가게 하는 것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설움 내지 한입니다. 뿐만 아니라 활빈당이라는 도적떼의 무리를 이용해 소란을 일으키고, 여덟 명의 가짜 홍길동을 만들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도 모두 이 한 때문입니다. 가족의 안위에 대한 위협으로 홍길동을 잡으러 경상감사로 파견된 형을 찾아가 하는 말도, 여덟 명의 홍길동이 동시에 잡혀가 임금 앞에 앉아 고하는 말도 똑같습니다. “신이 본디 천비 소생이라, 그 아비를 아비라 못하옵고, 형을 형이라 못 하오니, 평생 한이 맺혔기에 집을 버리고 도덕이 무리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홍길동전』, 42)[각주:1] 


이 말은 활빈당의 이름으로 행했던 ‘의적질’도, 관리와 임금을 농락한 둔갑술도 모두 아비를 아비라고 부르지 못하는 호칭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고를 치는’ 부정적 행위 뿐 아니라, 새로운 땅을 찾아가서 율도국을 얻는 ‘긍정적’ 행위에서도, 그가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일관되고 강력한 동기였음을 나중에 볼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텍스트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호칭의 문제’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호칭의 문제란 이름을 부르는 방식의 문제고, 이름이라는 기표(signifiant)를 다루는 문제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간단히 몇 개의 개념을 설명하자면, ‘기표’란 쓰여지고 말해지고 표시되는 기호를 뜻합니다. 대쌍개념은 그 기호의 의미를 뜻하는 기의(singnifié)입니다(기표라고 번역된 단어 signifiant은 ‘의미하다’를 뜻하는 동사 signifier의 현재분사형이고, signifié는 그것의 과거분사형입니다). 소쉬르는 기표와 기의는 기호의 두 측면이라고 보며,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라고 봅니다. 즉 기표는 그것이 지칭하는 지시체(referent)와 무관하게 선택되어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기표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다른 기표와의 관계인데, 일단 정해져서 사용되기 시작하면 사회적 힘을 갖습니다. 누구도 그 정해진 바에 따라 써야 한다는 강제력을. 이런 강제력을 라캉은 ‘기표의 물질성’이라고 명명합니다. 물질성을 갖는 기표들의 연쇄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일차적인 기표를 그는 ‘남근적 기표’라고 합니다. 모든 기표의 의미나 의미작용의 중심에 있는 ‘주인’이기에 ‘주인기표’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기표의 의미작용은 ‘주인기표’인 ‘남근(phallus)’을 통해 직조되는 기표들의 연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의 ‘아버지’나 국가 안에서의 ‘왕’이 그런 주인기표라는 건 쉽게 짐작하실 수 있겠지요?



페르디낭 드 소쉬르. By "F. Jullien Genève", maybe Frank-Henri Jullien (1882–1938) - Indogermanisches Jahrbuch,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9173509



<홍길동전>에서 결정적인 위상을 갖는 것은 아버지나 왕이라는 ‘큰 타자(Autre, the Other)’[각주:2] 혹은 그것을 표시하는 ‘주인기표’입니다. 가령 홍길동은 어미를 어미라 부르지 못하는 일은 없었고, 부친 홍판서의 부인을 어미라 부르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지도 않습니다. 주인기표는 아버지와 형이라는 남성적이고 가부장적 선을 따라 이어져 있고, 이 선의 근원에는 ‘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왕이 주인기표의 요체임을 뜻하기 하고, 아버지가 바로 ‘왕인 기표’임을 뜻하기도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른다 함은 제대로 된 아들로 ‘인정’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라 못 부르는 겁니다. ‘어르신’이라 부르겠지요. 호부호형의 욕망은 아버지에게 아들로 인정받으려는 욕망입니다. 아버지를 향한 호부호형의 욕망은, 아버지 뒤에 있는 왕을 향하여 자연스럽게 올라갑니다. 왕의 인정을 구하고, 결국 왕이 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왕이 인정해주는 기표(‘병조판서’)를 구하고, 결국 ‘왕’이라는 기표를 얻고자 하는 것, 이것이 홍길동을 이끌어가는 욕망이지요.


홍길동이 아비를 아비라 부를 수 없다함은 아비와 형을 잇는 가부장적 기표들로 직조되는 기호들의 망 속에서 좋은 ‘기표’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아버지’라는 좋은 기표를 갖는다(사용한다)는 말은 ‘아들’이란 기표를 갖는 것을 뜻합니다. 그걸 갖지 못함은 ‘아랫것’이란 기표를 갖는 것입니다. 가족 안에서 좋은 호칭으로 표시되는 좋은 자리를 갖지 못함을 뜻하지요. 양반가문의 가족관계 안에 자리를 갖지 못함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사실 호칭의 문제는 단지 호칭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즉 그저 기호나 이름을 입으로 말하고 소리내는 문제만이 아니란 겁니다. 집을 떠날 때 홍판서는 길동에게 “오늘부터 호부호형을 허락하노라”라고 말하고, 길동은 “소자의 지극한 한을 풀어주시니 죽어도 한이 없사옵니다”(26) 답하지만, 그건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서자로서의 신분적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집에서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문제가 풀리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기에 길동은 그 후에도 소란을 일으키곤 형이나 임금 앞에 잡혀가서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한”을 반복하여 하소연하는 겁니다.


앞에서도 말한 적 있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친족 체계를 ‘호칭의 체계’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아버지, 이모, 조카 등의 호칭은 가족관계 안에서 그 호칭을 사용한 이와 호칭으로 명명된 이의 관계를 표시합니다. 그 호칭은 개인의 선호에 따라 좌우되지 않으며, 개인의 탄생 이전에 어떤 것을 사용해야 할지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사용하도록 강제됩니다. 이를 ‘호칭의 물질성’이라고 한다면, 이 물질성(강제성)이란 사실 ‘물질’이 아니라 친족관계, 사회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것은 그 사회적 관계의 강제고, 그 사회적 관계 안에 명확한 자리를 갖지 못함에서 오는 제약입니다. 그렇기에 홍판서는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한을 듣고 길동의 처지가 측은히 여기지만 “재상가 천비 소생이 비난 너뿐이 아니거든, 네 어찌 방자함이 이와 같으냐? 앞으로 다시 이런 말을 하면 눈앞에 두지 않으리라”(18) 꾸짖습니다. “위로하면 마음이 방자해질까 걱정”하여 그랬다고 하는데, 그것의 실질적 의미는 자신이 그를 위로하고 심지어 호부호형을 허락하더라도, 가족 바깥의 세계에선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그 경우 그 설움이 바깥 사회에 대한 ‘방자함’으로 나아갈까 걱정했던 것일 겁니다.


어떤 기표를 갖는다는 것, 즉 어떤 호칭으로 불리고 어떤 호칭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런 기표로 표시되는 ‘주체’가 됨을 뜻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면 적자(嫡子)로 주체화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적자로 주체화되지 못합니다. 아들이지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즉 아버지에게서도 제대로 된 아들 대우를 받지 못하는 주체, 서자라는 나쁜 주체가 됨을 뜻합니다. 서자의 자리는 강제적이고 ‘물질성’을 갖지요. 안 그러면 누가 그 나쁜 주체의 자리를 받아들이겠어요. 천민이나 평민 같은 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길 그런 걸 어쩌겠어’라는 포기가 그런 주체의 자리를 받아들이게 합니다. 


그러나 홍길동처럼 양반의 피와 천민의 피가 섞인 경우, 천민임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습니다. 하여 양반의 자리를 욕망하고 그걸 표시하는 기표를 요구하지만, 그건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길동은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가 되는데 실패합니다. 반쪽이지만 양반의 피을 받은 데다 뛰어난 재능마저 타고 났기에, ‘귀함이 없는’ 자리에서 행해지는 주체화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초란의 개입이 있기 이전에 이미 모친에게 남의 천대를 받는 것은 당치 않다며 “어머님 슬하를 떠나려 하옵니다”고 고합니다. 천한 주체 말고는 허용되지 않는 가족을 떠나려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홍길동전 / 사진출처: By Heo Gyun (d. 1618) - [1],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2293



이는 역으로 홍판서의 가족이 길동을 자신들이 할당한 자리에서 주체화하는데 실패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홍판서의 첩인 초란이 개입하여, 주체화를 교란하는 이 간극을 확대하고, 이를 계기로 길동은 집을 떠나게 됩니다. 가족이나 신분 같은 틀을 벗어난 삶을 향해 떠나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흔히 ‘은둔’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이들이 그 당시에도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길동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좋은 기표에 대한 욕망, 좋은 주체의 자리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만큼 그 기표의 가치에 강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겠지요. 집을 떠나서도 귀한 주체의 자리에 대한 욕망에 매여 있었기에 아버지나 왕이라는 주인기표로 반복하여 되돌아가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주어진 주체의 자리를 거부하는 길동의 주체화는 새로운 탈주선을 그리며 시작하는 탈기표적인 주체화가 아니라, 아무리 멀어져도 주인기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기표적인 주체화에 머물고 맙니다.[각주:3]


아비를 아비라 못하는 길동의 한(恨)은 아들이면서 아들로 인정받지 못하는 설움입니다. 그것은 그에게 주어진 자리가 갖는 양가성(兩價性)에 기인합니다. 그는 양반의 아들이지만, 양반의 아들이 아닌 것입니다. 그는 양반의 아들인 동시에, 천민의 신분인 노비의 아들입니다. 그렇기에 그의 ‘정체성(identity)’은 모호합니다. 양반도 아니고 천민도 아닌, 뚜렷한 위상을 갖지 못하는 불안정한 정체성. 여기서 그가 호부호형을 욕망한다 함은, 단지 아버지나 형에 대한 애착이 아니라, 그런 양가적인 지위에서, 양반의 아들로 인정받고자 욕망함을 뜻하고, 그 불안정하고 모호한 정체성을 양반의 자식이라는 확고한 정체성으로 고정하고자 욕망함을 뜻합니다. 


길동이 호부호형을 그토록 욕망하는 것은 그를 양반의 신분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천한 신분이 아니라 귀한 신분으로 인정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늘이 만물을 내심에 오직 사람이 귀하오나, 소인에게 이르러서는 귀함이 없사오니 어찌 사람이라 하오리까?”(18) 모친에게 하는 말도 그렇습니다. “소자 팔자가 기박하여 천한 몸이 되오니 품은 한이 깊사옵니다.”(19) 길동이 임금을 만나서도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반복하여 호소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집안에서 개인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길동이 병조판서를 실제로 할 뜻도 없으면서도 굳이 병조판서를 시켜주면 소란을 중지하겠다고 강변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병조판서라는 호칭을 얻는다는 것은 사회적 인정을 얻음을 뜻합니다. 아버지가 호부호형을 허한다고 해도 실은 해결되지 않는 것을 왕에게 호소하여 해결하는 것이지요. 이게 길동이 반복하여 왕에게 다가가고, 반복하여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말하는 이유입니다.







  1. 이하에서 분석의 중심은 경판30장본으로, 문학동네의 번역본을 인용합니다. 완판36장본과 동양문고본을 언급하기도 할 텐데, 완판본과 동양문고본은 글솟대에서 나온 『홍길동전 전집』에 있는 것을 인용합니다(완판본은 65~80, 동양문고본은 154~171). 특별한 표시가 없이 숫자만 표시한 것은 모두 경판본의 인용입니다. [본문으로]
  2. 큰 타자(대문자 타자 Autre)란 아버지나 왕, 법, 규범 등 나를 둘러싸고 나의 욕망이나 행동을 규정하는, 나 아닌 ‘타자’들을 지칭합니다. 라캉에 따르면 나의 욕망이란 엄마로부터 ‘남근’으로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망’이고, 바로 그렇기에 아버지에 동일시하게 만드는 욕망입니다. 즉 이러면 엄마/아빠가 좋아할 거야 하며 그걸 욕망하는 겁니다. 그걸 자신의 욕망이라고 오인하는 거지요. 공부 잘 하는 것, 돈을 잘 버는 것, 명예를 얻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이는 엄마/아빠의 욕망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규범이 제시하는 욕망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나의 욕망을 규정하는 엄마/아빠나 법, 규범 등을 ‘큰 타자’라고 합니다. 나의 욕망이란 이런 타자의 인정을 구하는 인정욕망이고, 자신의 욕망으로 오인된 타자의 욕망입니다. [본문으로]
  3. 기표적 주체화와 탈기표적 주체화의 개념에 대해서는 Deleuze/Guattari(2000) 5장 및 이진경(2002) 5장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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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3장 나는 <홍길동전>이 좋은 소설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진경





얼마전 출간된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입니다. 여러 서점에서 찾아보실 수 있습니다.





1. ‘사회소설’과 저항?


굳이 ‘내재적 발전론’으로 국한하지 않아도, 고전 소설에 대한 그간의 연구를 보면, 여러 가지 방향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니셔티브를 갖고 있는 것은 신분 같은 전근대적인 제도가 와해되는 징표나 왕을 비롯한 봉건체제에 대항해 싸우는 투쟁의 단서를 찾는 것, 혹은 상업과 부에 대한 근대적 경제관념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기생신분임에도 양반자제와 결혼하는 <춘향전>, 왕의 대체물인 용왕을 희롱하며 봉건적 복종의 관념을 비웃는 <토끼전>, 근대적 경제관념이 등장하는 <흥부전>이나 <허생전>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도, <구운몽>에서 보이는 사랑의 행각 속에서도 신분을 가로지르는 결연을 주목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홍길동전>을 매우 중요한 작품이라고 보는 이유가 단지 ‘최초의 국문소설’이라는 것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서자의 주인공을 앞세운 봉건적 신분제도 비판과 왕을 필두로 한 체제에 대한 명시적인 투쟁만으로도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을 겁니다. 


이러한 해석이 주류가 된 것은 무엇보다 근대 이전의 체제에 정체된 사회임을 증명하며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식민사관에 대한 오래된 비판의식과, 봉건제와 자본주의 등을 잇는, 사회의 발전법칙에 대한 맑스주의의 오래된 도식 등이 작품 해석의 방향을 이끌었기 때문일 겁니다. 유사한 맥락에서지만, 작품과 사회적 관계의 상관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리얼리즘 이론이 현대의 문학예술 작품에 대한 독서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다는 사실도 여기에 추가되어야겠지요.


이런 관점을 좀더 확실하게 충족시켜주는 것은 사회문제나 정치적 저항 같은 것을 다루는 작품일 겁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의 고전소설들에는 이런 작품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가족이나 사랑 인근에 몰려 있습니다. 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별로 없었기 때문일까요? 사회관계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아서일까요? 그런 면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사회’라고 말할 때 떠올리는 사회의 이미지는 대개 ‘국민국가’와 동일한 범위를 갖는 집합체인데, 이는 근대에 와서야 형성된 것입니다.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같은 마을이 분할되어 각각 조선과 중국에 속하게 된 것도 그것입니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유명한 책(Anderson, 2013)으로 잘 알려진 것처럼, 이는 국가단위의 국경이 그냥 통과할 수 없는 경계선이 되고, 국경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동일한 하나의 언어로 다루는 인쇄물들을 통해 형성된 ‘상상된 공동체’입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국내 소식’으로 다루어지는 곳은, 가본 적이 없고 평생 가볼 일이 없는 곳조차 ‘내가 속한 사회’라고 상상하게 되지 않습니까? 만나본 적 없지만, 그 경계 안에 사는 이들은 나와 같은 집단(공동체)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요. 사실 이 ‘사회’란 말도 서양에서 수입된 society라는 말을 일본에서 번역한 단어인데, 원래 ‘협회’나 ‘모임’ 같은 것을 지칭하던 말이었습니다. 그게 집단을 지칭하는 말로 확장되었다가, 우리가 아는 ‘사회’라는 의미를 갖게 된 거지요. 


국민국가가 특권적인 ‘사회’의 지위를 갖게 되는 근대 이전에, 사회란 당연히 다양한 층위의 집단적 경계를 뜻하는 말로 쓰였을 겁니다. 그 단어는 없었지만, 집단적 관계가 분명히 존재하던 근대 이전의 조선에서도 그랬을 겁니다. 가장 일차적인 것은 아마도 ‘가문’이라고 해야 정확할 가족이었겠지요. 그리고 왕이 지배하는 국가가 있었으니 ‘국가’라고 불리는 집단도 있었을 것이고, 그 사이에 마을을 비롯한 공동체가 있었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양반들의 경우엔 더 그랬을 터인데, 생각이나 이념이 지향하는 곳인 중국이 있었겠지요.


그렇기에 조선조 시대의 소설들은 가족이나 공동체 인근에서 진행되는 게 많지만, 특히 양반들이 쓴 작품들의 경우에는 조선이 아니라 중국을 무대로 쓰여진 것이 많습니다.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 <창선감의록>, <옥루몽> 등이 모두 중국이 무대입니다. 그러니 당시 조선의 ‘사회 문제’를 특별히 다룰 여지가 적었을 것이고, 다룬다고 해도 그것은 조선사회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적 스케일로 펼쳐지는 ‘보편적 문제’로 다루어지게 되겠지요. 즉 가족 안의 문제와 중국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라는 두 극단으로 문제가 양극화되는 거지요.


또한 조선 안에서 사회 정치적 문제를 다룬 작품이 적은 것은 가정이나 지역을 넘어서면 곧바로 왕이 지배하는 공간으로 나아가야 했고, 이 경우 사회문제를 다룬다는 것은 왕이 지배하는 체제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될 위험이 있었을 겁니다. 굶주림의 고통이 극에 달하지 않고선 저항의 계기를 찾지 못하던 시대에 그런 대결을 쉽게 기대하는 것은, 근대 이후의 ‘정치적 권리’에 익숙한 우리의 관념을 과잉투사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홍길동전>이나 <허생전>은 확실히 특별한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허생전>은 책만 읽던 선비가 상인이 되어 돈을 벌고 굶주리다 도적이 된 무리를 이끌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얘기인데다, 당시 사회에 대한 통렬한 명시적 비판이 더해져 있고, <홍길동전>은 적서의 차별이라는 신분제도에 대한 분노로 ‘의적’의 무리를 이끌고 왕과 관리들에게 저항하다 멀리 조선을 떠나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까지 하는 드라마니까요.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홍길동전 / 사진출처: By Heo Gyun (d. 1618) - [1],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2293



그러나 개인적인 얘기를 하자면, 이번에 작품들을 찾아 다시 읽으면서 가장 당황하고 실망했던 작품은 바로 <홍길동전>이었습니다. 대부분 지루하고 뻔해 재미없었던 ‘고전의 기억’ 가운데서 가장 신나고 가장 정치적이며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던 게 그것이었지요. 그래서 전에 『노마디즘』이란 책을 쓰면서, 오래된 독서의 기억만으로 ‘전쟁기계’란 『수호지』의 양산박이나 홍길동의 활빈당 같은 것을 지칭한다고 예로 들었었는데, 막상 이번에 읽어보니 홍길동에 대해선 그 말을 취소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아, ‘전쟁기계’란 전쟁을 일으켜서 사람들을 죽이는 나쁜 장치들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치의 전쟁’이라는 니체의 개념을 확장한 것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안함으로써 지배적인 가치에 대해 전쟁을 벌이는 것을 지칭하는 들뢰즈/가타리의 개념입니다(Deleuze/Guattari, 2000(2); 이진경, 2002(2)). 그렇기에 “좋은 전쟁에선 연기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미리 말해두자면, 홍길동은 서얼의 신분제에 대한 반감 속에서 관가를 털고 왕과 전쟁을 벌이지만, 새로운 가치를 창안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왕에 대항하는 소란을 벌이지만, 실제론 왕조체제는 물론 기존의 왕조차 부정하지 않습니다. 거꾸로 왕에게 매우 충성스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 “호부호형”도 못하는 서자신분에서 벗어나 아버지나 왕의 인정을 얻으려고 할 뿐이고, 결국 자기 소망대로 병조판서에 임명해준다고 하니까, 일체의 활빈활동을 중지하고 말지요. 나중에 율도국을 ‘세웠다’고 하는 것도 없던 나라를 세운 게 아니라 기존에 멀쩡히 있던 평화로운 나라를, 왕의 자리를 탐하여 침략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여 왕이 되지만 자신을 그리 서럽게 했던 서얼제도나 신분제도를 없애거나 바꾸는 일조차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했다는 ‘활빈 활동’이란 왕의 인정을 얻기 위해,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벌인 요란스런 ‘쇼’에 지나지 않았다고 해도 지나치다 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가정소설이란 관점에서 보아도 그렇습니다. 아시다피시 이 작품은 호부호형 못하는 서자, 그리고 그 부자관계에 끼어드는 아버지의 또 다른 첩이 얽혀서 암살 시도로까지 이어지는 분란이 발생하고, 그걸 계기로 홍길동이 집을 나가게 된다는 점에서 일종의 가정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집으로부터 탈영토화되고, 허구적인 가족적 윤리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작품이지요. 그러나 홍길동은 가족을 치고 나갔지만 무엇을 하든 ‘호부호형’ 못하는 한을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그 생각만 반복한다는 점에서 어디를 가도 가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이며, 어디에 있든 가족 안으로 되돌아와서 자기 자리를 찾고자 하는 인물입니다. 율도국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가장 정성들여 하는 일은 아버지의 묘자리를 거하게 만드는 것이었고, 작고한 아버지를 그 왕릉 같은 묘에 모시는 것이었지요. 


이점에서 홍길동은 <사씨남정기>의 사정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반면 심청과는 아주 상반됩니다. 길동이 가족적 윤리가 깨지는 지점에서 집을 나가지만 언제나 가족으로 되돌아올 생각만 하고 있다면, 심청은 가족의 윤리를 ‘극단적인 방식으로’ 따라가 임당수의 심연 속으로까지 들어가지만, 다시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대신 아버지를 비롯한 전국의 봉사들이 집으로부터 나오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다시 말해 심청은 주어진 윤리를 과도하게 준수함으로써 그 윤리를 해체하지만, 길동은 윤리를 벗어나 체제에 대항하지만 실은 윤리 안에서 인정받고 체제 안에서 자리 잡는 데에만 몰두한다는 점에서 정반대되는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길동과 심청은, 작품이 갖는 정치적 의미나 가치란 그것이 명시하는 주제나 주인공이 하는 행동의 거칢과는 거리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하에서는 가족소설이란 관점에서 <홍길동전>을 읽기보다는 흔히 하듯 ‘사회소설’로서 읽고자 합니다. 홍길동이 했던 왕에 대한 투쟁이 어째서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는지, 그가 벌인 사회적 저항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를 세밀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를 어떤 명시적 투쟁이나 항쟁을 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사회소설’의 주인공인 허생과 비교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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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다섯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 세 번째 부분 보기 / 네 번째 부분 보기 / 다섯 번째 부분 보기)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홍길동전 / 사진출처: By Heo Gyun (d. 1618) - [1],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052293






8. 도구적 도술: <홍길동전>


전우치의 도술과 홍길동의 도술이 확연히 다름을 보여주는 것은, 전우치와 달리 홍길동은 살생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는 점입니다. 전우치는 자신을 죽이려던 적대자나 자신이 징치해야 했던 도적떼의 우두머리조차 ‘살생은 하지 않으리라’는 원칙대로 죽이지 않습니다. 반면 홍길동은 자신을 죽이러 찾아온 자객 특재를 즉각 죽여버릴 뿐 아니라, 공모자인 관상녀를 일부러 찾아가 칼로 베어버립니다.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해 초란마저 죽이려고 하다가 상공이 사랑하심을 깨닫고 칼을 던”져버립니다(25). 분노와 원한 때문일까요? 그는 살생에 아무런 주저함이 없습니다. 이후 활빈당을 만들어 관청을 털 때에도 탐관오리의 목을 벱니다. 나중에 조선을 떠나 남경땅 제도라는 섬에 들어갔을 때, 망당산에 약초를 캐러 들어갔다가 만난 울동이라는 ‘짐승’도, 죽일 이유가 전혀 없었건만 모두 죽이고 그들이 사는 곳까지 찾아가 몰살시킵니다.


홍길동 역시 전우치처럼 분신술 내지 둔갑술을 써서, 팔도에 동시에 나타나 난리를 부립니다. 임금이 부친과 형을 압박하자 자수하여 잡혀갈 때 팔도에서 모두 잡혀 여덟 명이 서로 자신이 진짜라고 다툽니다. 이는 상황 자체가 매우 웃기는 것이기에 전우치의 도술처럼 유희적으로입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실은 그의 도술에 유희적 성격은 없습니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상황을 즐기고 권력자를 우롱하기 위한 게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 임금에게 알리기 위한 ‘과시적’인 목적에서였습니다. “무뢰배들과 함께 관아를 치고 조정을 시끄럽게 한 것은 신의 이름을 드러내어 전하께 알리려는 것이었습니다.”(<홍길동전>, 46) 따라서 그의 도술에는 장난스런 면도 없고 웃음도 없습니다. 명확한 목적을 갖고, 속이거나 공격합니다.


홍길동이 이리 난리를 피우고 다니는 이유는 알다시피 서자라는 신분으로 인해 출세할 수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홍길동은 이를 반복하여 말합니다. 가령 병조판서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임금이 받아준 뒤 곧 사라졌다가, 어느날 임금 앞에 다시 나타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신이 전하를 받들어 만세를 모시려 하였사오나, 한갓 천비의 소생인지라 문과에 급제해도 옥당에 참여하지 못할 것이요, 무과에 급제해도 선전관에 천거되지 못할 것이니, 이런 까닭에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팔방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46) 


이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첩실의 자식이라는 처지, 다시 말해 양반의 자식이지만 양반의 자식 대우를 받지 못하는 처지, 달리 말하면 ‘자리 없는 자’의 자리에 있기에 홍길동은 국가와 가족, 아버지와 임금에 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는 그가 선 자리가 통치에 반하여 자리를 이탈하고자 욕망하는 ‘반국가적’ 지점임을 뜻합니다. 거기에서 ‘무뢰배들과 함께 관아를 치고 조정을 시끄럽게’ 했으니, 얼핏 보면 반국가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홍길동이 민중의 반란이란 저항을 다른 작품이라 보는 해석은 모두 이로 인한 것일 겁니다. 그러나 “요신 홍길동은 아무리 해도 잡지 못할 것이나, 병조판서로 임명하시면 잡힐 것입니다.”라고 스스로 사대문에 방을 써 붙이고, 임금이 병조판서에 임명하겠다고 하자 얼른 궁궐 안으로 들어가 임금에게 절을 하곤, 이제 사고 안 치고 나라를 떠나겠다고 한 것을 보면, 정말 그런 것이었나 의심하게 됩니다. 자신을 가둔 신분제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지만, 그것이 그런 신분제에 기초한 체제에 대한 저항이었는지, 그리고 군주의 권력에 반하는 행동을 반복했지만 그것이 정말 군주의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이었는지 의문입니다.[각주:1] 


홍길동은 국가나 제도에 의해 배제된 자가 그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사고를 치고 난리를 부린 것이며, 임금이 포섭하고자 했을 때 얼른 들어가 절하곤 충정을 말한다는 점에서, 배제된 상태에서도 이미 사실은 국가에 충분히 포섭되어 있는 인물입니다. 물론 그는 천비 소생의 서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는 점에서 보면, ‘치안’과 대비되는 ‘정치’에 속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하는 경우에도 홍길동은 임금이란 통치자에게 등을 돌린 게 아니라 버림받은 처지의 원한을 호소하며 포섭해주길 욕망하고 있다는 점에서, 포섭 이전에 이미 포섭된 자입니다. 


따라서 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도술 또한 국가나 통치에 반하여 사용되는 게 아니라 그 내부로 들어가기 위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의 소망이라는 ‘병조판서’란 국가의 치안을 담당하는 최고 지위 아닙니까! 따라서 그의 도술은 반국가적 도술이 아니라 마이너스 형태의 국가적 도술이고, 반통치적 기술이 아니라 음각적(陰刻的) 형태의 통치적 도술입니다.


이런 목적으로 사용된 홍길동의 도술이기에 거기엔 유희적 성격은 당연히 없습니다. 그는 원한을 가진 자의 무거운 울분과 성공을 추구하는 자의 냉혹한 합목적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선 피와 죽음에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여러 명의 홍길동을 만들어 ‘장난’을 친 것도 장난 아닌 ‘과시’라는 별개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니, 유희적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합목적적 ‘이벤트’였을 뿐입니다. 모든 도술의 사용이나 무력의 동원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 그것을 얻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에서 ‘도구적’ 도술이었습니다.


변신술이 동반하게 마련인 속임수의 성격에서도 전우치와 홍길동은 같지 않습니다. 전우치가 변신술로 임금이나 관리들을 속일 때, 거기에는 유희적 성격과 더불어 ‘배신적’ 성격이 있습니다. 임금에 대한 배신, 충성이라는 도덕에 대한 배신, 통치자가 제시하는 선이나 ‘의로움’이란 가치에 대한 배신. 그가 사용하는 변신술의 속임수란 이런 배신적인 행위를 위해 사용되는 것이기에 ‘기만적’이라기보다는 ‘배신적’입니다. 반면 홍길동의 변신술은, 그가 임금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한 과시적이고 선전적인 목적을 갖는 것이었으며, 임금과 대면하여 비난받을 때조차 그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결코 배신적이지 않습니다. 그가 사용한 분신술의 속임수는 오히려 임금에게 자신을 알리려는 것이란 점에서, 임금을 향한 ‘충실성’ 안에 있고, 자신의 진정한 소망을 호소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진실성’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충실성은 기존의 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충실성이고, 이 진실성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잊지 못하는 진실성입니다. 새로운 것을 꿈꾸지 못하는 충실성이고, 결여된 것에 사로잡힌 진실성입니다.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호부호형하지 못함을 한탄하고 원망하지만 아버지나 형에 대한 도덕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가족적인 가치를 등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렇게 사고를 쳤으면서도 아버지와 형에게 충실합니다. 심지어 조선을 벗어나 제도로 날아간 뒤에도 부친의 죽음을 짐작하고 미리 묘자리를 만들곤 아버지의 시신을 모시러 조선에 들어갑니다. 상제인 형을 보고 하는 다음과 같은 말이 단지 의례적인 언사라고만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소자 처음에는 마음을 잘못 먹고 폐단을 일으키기를 일삼았더니, 아버님과 형이 화를 당하실까 염려하여 조선 땅을 떠나,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풍수지리 보는 술법을 배워 살아왔습니다.”(55) 





  1.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12장에서 다시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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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네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 세 번째 부분 보기 / 네 번째 부분 보기)




7. 유희적-반국가적 도술: <전우치전>



이제까지 우리는 발생적인 기원을 통해서 구미호나 용왕 아들의 변신술이나 전우치의 변신술, 홍길동이나 박씨부인이 다루는 도술, 그리고 금방울전에서 금방울의 도술이 상이한 기원과 ‘본성’을 갖는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불어 그 변신술이나 도술이 나아가는 방향과 목적을 통해 그것들이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점 또한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왕 아들의 변신술과 전우치의 변신술은 같은 방향을 갖는다고 했지만, 같은 성격을 갖지는 않습니다. 전자는 노인의 ‘집’을 빼앗으러 오는(그렇다고 믿는) 구미호로부터 집을 지키려는 것이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횡단하며 흐리는 것을 저지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보수적’이라면, 전우치의 변신술은 인간의 손 안에 장악된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세계의 경계를 흐리고 넘나드는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횡단적’입니다. 전자가 왕수재를 통해 왕건으로, 즉 인간세계의 통치자인 왕으로 이어지는 것이란 점에서 ‘통치’에 속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통치자를 희롱하고 통치자가 할당한 자리에서 벗어나는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정치’에 속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전우치전>에서 전우치가 호정을 먹고 천서의 술법을 여우에게 배운 뒤 가장 먼저 그걸 써먹은 것은 왕을 속여 황금대들보를 얻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왕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전우치는 선관으로 변신하여 오색구름에 상서로운 기운까지 만들어 임금에게 옥황상제의 명령이라면서 궁궐을 손질하려 하니 황금대들보를 하나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곤 그 금을 팔다 (일부러) 잡혀가지만 임금 앞에서 가서도 먹병을 이용해 어이없는(!) 장난을 칩니다. 그 뒤에도 가난한 백성에게 호조의 돈을 꺼내 쓰게 해준다거나 호조의 창고에 있던 돈을 청개구리와 뱀으로 바꾸어 버리며, 내전의 궁녀들의 족두리를 까마귀로 바꾸어버린다거나 궁녀를 호랑이에 태워 희롱합니다. 전우치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벼슬을 내려 포섭하지만, 궁 안에 들어가서도 자신의 동료 내지 상관인 선전관들을 속이고 희롱합니다. 역모를 했다는 누명으로 잡혀죽게 되자, 임금을 속여 ‘그림’ 속으로 도망칩니다. 그 뒤에 조정은 전우치를 잡아들이지만 잡혀 들어간 전우치가 360명이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우니 모두 죽여버리자는 도승지 왕연희의 말을 따라 사람들을 베기 시작하자 왕연희를 전우치로 바꾸어 칼 앞에 서게 합니다. 임금이 한탄합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요괴가 이처럼 장난하니, 종사를 어찌 보전하겠는가? 역적 하나를 죽이려고 죄없는 신하와 억울한 백성만 수없이 죽이겠도다.” 하여 심문을 중지합니다. 그 사이 전우치는 왕연희로 변신하여 진짜 왕연희를 구미호로 바꾸어 가두게 합니다.


전우치의 도술은 일관되게 왕이나 관리 같은 통치자를 희롱하고 엿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으로 변신술을 써먹었음에서 분명합니다. 통치자가 아니라 지나가다 알게 된 일들에 끼어들면서도 거만한 관리나 잘난체 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하는 이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엿을 먹입니다. 인간세계 안에 이런저런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자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시키는 것이란 점에서 정확하게 통치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게 전우치의 도술입니다. 반통치적이고 반국가적인 도술인 셈입니다. 홍길동과 달리 그걸 써서 얻고자 하는 게 딱히 없습니다. 임금의 회유책에 따라 관리가 되어 활동한 적도 있지만, 그에 대한 애착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거만한 선전관들을 골탕먹이는 데서 보이듯, 권력에 반하는 그의 유희는 관리가 된 뒤에도 계속되며, 도둑 염준을 잡으러 가선 혼을 내준 뒤엔 제멋대로 풀어주고 돌아옵니다. 즉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이 없습니다.



최근에도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곤 하는 전우치는, 저자에 따르면 원작에서도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인물이었다. 사진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8227



전우치가 도술을 사용하는 데서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왕연희를 구미호로 바꾸어 가두어 놓았지만 ‘며칠 더 속이면 살지 못하리라’ 생각하여,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네 나와 원수진 일이 없는데, 나를 죽여 나라에 공을 세우려 하기에 내가 먼저 너를 죽여 한을 씻으려 했으나, 내 평생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너를 용서하니, 너는 마땅히 다시는 이런 행실을 하지 말라.”(121) 도적떼를 이끌던 염준을 진압하러 가서도 “내 평생 살생을 안 했으나 제가 이제 천명을 거역하기에 마지못해 죽이나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해놓고도 ‘내 어찌 쉽게 살생을 하리오. 마땅히 이 놈을 사로잡으리라’ 생각하며, 결국 잡았다가 풀어주곤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변신술을 쓰고 여러 가지 술법으로 임금 이하 온갖 사람들을 골탕먹이지만 끝내 살생은 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우치의 도술이 유희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우치전>은 어떤 작품보다 도술의 사용이 빈번하고 전면적이지만, 그가 도술을 사용하는 것은 목적이나 방법이나 모든 면에서 장난스럽고 유희적입니다. 임금에게 잡혀가 먹병에 들어가 먹병 조각이 되어 장난을 치는 것부터 시작해, 호조의 돈을 청개구리와 뱀으로 바꾸어버리기도 하고, 선전관의 아내들을 기생으로 바꾸어 그들의 연회장에 끌어들인다거나, 거만한 선비의 고환을 없애고 그 옆 기생의 음문을 배꼽 있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물론 이런 장난은 단지 장난만은 아닙니다. 장난스런 익살을 통해 임금이나 관리들, 거만한 선비 등 권력자나 그걸 등에 업은 이들을 명시적으로 진흙탕 속에 처박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우치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확고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것이 말 그대로 ‘유희’임을, 즉 즐겁기 위한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능력이나 술법이 죽음을 야기해선 안된다는 것, 그것은 그의 도술이 삶을 위한 것임을, 삶을 즐기기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가 임금을 속여 황금대들보를 얻는 것도, 재물을 얻기 위한 것처럼 씌어져 있으나, 그 또한 그렇게 얻은 황금은 팔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임금과 신하 전체를 속이는 것은, 단지 축재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것은 임금 이하 신하들 전체라는, 누구도 감히 속이거나 골탕먹이려 생각하지 못하는 이를 대놓고 희롱하려는,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위한 장난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금을 잘라서 성안에서 팔려다가 포교가 보고 의심하자 집과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곤 태수가 오길 기다리는 것도 그 다음 장난을 위해서임을 보여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은 먹병 속에 일부러 들어가 잡혀가선, 임금에게 “답답하니 병마개를 빼주소서” 외칩니다.


이런 유희적 성격이 반국가적이고 반통치적인 도술과 아주 잘 부합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국가나 통치자는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명령하고 집행합니다. 임금의 얼굴이나 관리의 얼굴이 그렇습니다. 엄숙함과 진지함만이, 죽음마저 종종 동반하는 국가적 명령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명령 앞에서 장난을 치고 웃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 명령의 힘은 웃음거리가 되고, 임금의 행동조차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이 되고 맙니다.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이토록 직접적으로, 이토록 멀리까지 밀고 간 작품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이런 점에서 <전우치전>은 흔히 평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비판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통치자나 지배계급에 속한 이들이 이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을 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양반들이 양반들 읽으라고 썼을 <한문본 전우치전>은[각주:1] 한글본 <전우치전>과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한글본에서 천방지축 장난을 치며 날뛰는 전우치를 엄숙하고 진지한 양반 술사들이 진압하여 꼼짝 못하게 가두는 것이란 점에서 한글본에 대한 대항텍스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문본 전우치전>은 한글본 <전우치전>에 대항하고 반대하는 <반-전우치전>입니다. 고전 소설들이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는 이본들을 많이 갖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처럼 원래 소설에 대항하는 식으로 쓰여진 것은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한글본에서 전우치는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지만, 한문본에서는 “문장에 능하고 여러 가지 재주를 지녔는데, 과거에 수차례 응시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떨어졌다”고 쓰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니 재주가 있다고 하긴 해야겠는데, 과거엔 붙지 못했다고 하여, 아예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배제된 무능한 자로 매김합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배우는 과정도, 그것이 보여주는 도술의 본질도 한글본과 완전히 다릅니다. 


전우치가 절에 앉아 『주역』을 공부하는데 여우가 본색인 소년이 찾아옵니다. 전우치가 여인으로 변신한 여우들과 같이 자는 일종의 결연을 통해 동물적 도술에 접근하게 되는 한글본과 달리, 한문본에서는 ‘소년’이 ‘찾아와서’ 『주역』에 대해 논하다가, 의심을 한 전우치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앞서 대비했던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의 차이를 안다면, 여기서 전우치가 『주역』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크게 다른 길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여우가 『주역』을 논하며 전우치와 맞먹는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동물과 인간의 도술이 갖는 상이한 본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전우치에게 잡혀 여우는 위기에 처하는데, 변신능력을 가진 그가 변신술로 빠져나가지 않는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소년으로 변신할 수 있다면 당연히 다른 작은 동물로 변신해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여우를 잡으려면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합니다. 한글본에서는 부적과 특별한 끈이 있었으나, 한문본에선 그게 없습니다. 그냥 바보 같이(!) 잡혔을 뿐입니다. 이는 여우의 재주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졸로 보고 있음을 뜻합니다. 한글본처럼 호정을 빼앗아 먹는 일도 없습니다. 


죽게 된 소년은 천서 세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천, 지, 인으로 된 세 권의 천서를 받아서 전우치는 ‘혼자’ 읽고 배웁니다. 이 역시 여우의 도움 없인 읽을 수 없었던 한글본과 배우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소년이 준 책이 인간의 책과 구별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 권을 다 읽는 것도 한글본과 다릅니다. 나중에 천서를 다시 가져가지만 세 번째인 ‘인’ 권을 못 가져간 것은 그가 읽으며 붉은 물감으로 점을 찍으며 읽어서 그렇다는 것도 허술한 얘기입니다. 이는 전우치가 혼자 읽지 못해 여우의 힘을 빌어야 했고(또 다시 ‘결연’입니다), 그나마도 한 권밖에 못읽었으며, 도술로 천서를 되찾아간 여우를 쫓아가려다 안되겠다 싶어 포기했던 한글본이 동물적 변신술의 외부성에 대해, 자신의 힘 밖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아주 일관되게 쓰고 있었음을 역으로 확인토록 해줍니다.


그렇게 도술을 익힌 전우치가 그걸 써먹으며 다닌 일은, <전우치전>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어야 마땅함에도 한문본에서는 단 한 문단으로, 아니 반 문단으로 쓰고 있습니다. 



“전우치가 그 책을 밤낮으로 익혀 묘리를 터득하매 변화무쌍한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되어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대부의 집이나 궁궐 안을 출입하며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벌이고 다녔으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우치는 이제 온 세상에 아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한문본 전우치전>, 『낯선 세계 속으로』, 72)



이 얼마나 놀라운 요약입니까! 그나마 전우치의 그 모든 행실을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짓”이라고 하여, 징치해야 할 대상임을 명시합니다. 그리고 제어할 이 없는 전우치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인물이 둘 있다면서, 윤군평과 서화담을 거론합니다. 이후의 내용은 전우치가 윤군평과 서화담을 찾아가 도술을 겨루다 피박살나는 것으로 일관됩니다. 이 텍스트에서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이유는 단지 “자기 재주를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73). 그들의 언사를 빌어 한마디로 말하면,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겨루는 도술은 대부분 부적을 던져 동물을 다루는 것입니다. 부적을 사용하는 도술, 이는 동물적 도술이 아니라 인간적 도술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전우치는 도술을 쓰는 족족 윤군평에게 당하고 서화담에게 깨집니다. 그들이 던진 부적은 전우치가 부적으로 부린 동물을 전우치에게 다시 덤벼들게 하는 것이란 점에서 반사적 도술입니다. 대결의 양상 또한 아주 빈곤한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불쌍하게도 도술을 ‘자랑하려’던 전우치는 매번 반사적 도술에 당합니다. 임금이나 관리를 희롱하던 전우치 대신, 윤군평의 도술에 눌려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사헌부의 관리들의 형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전우치만 있을 뿐입니다.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전우치는 정확하게 ‘사헌부’라는 ‘치안(police)’의 장소로 보내집니다. 윤군평은 막되먹은 전우치를 잡아 징벌의 장소로 보내는 ‘경찰(police)’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도술은 ‘인륜적’ 도술이고, 치안의 도술이며, <한문본 전우치전>은 이 치안의 도술을 통해 <한글본 전우치전>의 ‘유희적’ 도술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치안의 서사인 것입니다.  


도술을 자랑하려 고수 앞에서 까불다 제압당한 전우치는 반복하여 상대의 도술에 감복하였다고, “앞으로는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반성을 합니다. 서화담에게 맞붙어보려다 깨진 후 전우치의 대사는 진지한 반성문입니다.



“선생의 도술이 이처럼 높으신지 헤아리지 못하고 작은 재주를 펴 보였으니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요사스런 도술에 불과합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을 우롱하는 데나 쓰일 뿐이니, 선생께서 지니신 신선의 도술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78)



한글본 <전우치전>의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이야 애시당초 등장하지 않았으니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의 차이를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문본을 쓴 이도 전우치와 윤군평/서화담의 도술 간의 차이는 구별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그것은 통치에 반하는 유희적 도술과 진지한 치안 내지 통치의 도술 간의 차이였지만, 어느새 거기에 양반들의 가치판단이 부적처럼 달라붙으며 ‘요사스런 도술’과 ‘신선의 도술’이라는 도덕적인 분할을 따라 명명됩니다. 그리고 전우치의 반성적 자백을 빌어, 요사스런 도술이 신선의 도술을 애시당초 이길 수 없다는 항복선언을 받아냅니다. 이 무력한 반성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우치 자신의 그런 도술이 “세상 사람을 우롱하는 데나 쓰일 뿐”이라는 사실이지만, 이는 양반들의 눈에 비친 전우치의 행동이 유희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반성의 말에 서화담은 점잖게 대꾸합니다. 



“이른바 ‘신선의 도술’이니 ‘요사스런 도술’이니 하는 게 무언지는 잘 모르겠소. 나는 다만 올바름으로 사악함을 제압했을 뿐이오. 듣자니 당신이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며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벌이고 다닌다고 하더구료. 앞으로 서울에 있지 않고 멀리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며, 다시는 함부로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그치겠지만, 만일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오.”(78~79)



신선의 도술과 요사스런 도술의 차이를 모르겠다면서 어느새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며’ 다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을 앞뒤 안맞는 소리라고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 텍스트는 요사스런 도술과 신선의 도술이란 구별을 사악함과 올바름이라는 명시적인 도덕적 범주로 대체해 버립니다. 전우치의 도술은 요사스런 도술이며 그것의 본질은 사악함이라는 말입니다. 서화담은 그런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깊은 산속’, 도술이라곤 쓸 일 없는 그런 장소라고 명시합니다. 거기 들어가 얌전히 살라고, 다시 그 자리를 이탈해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고 다니면 ‘죽여버리겠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로부터 전우치는 자취를 감추어 세상에서는 그 종적을 알지 못했다”(79)라는 문장은 ‘일사소설(逸士小說, 숨어사는 선비가 되는 걸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에 흔히 보이는 문장이지만, 현실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이의 행적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지정된 자리에 유폐되어 버린 반인륜적 범죄자의 행적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난데없이 전우치의 문장실력을 칭찬하며 그가 지은 시들을 나열합니다. 하지만 다시 “시의 격조는 지극히 높았지만 요사한 도술 때문에 사람과 문장까지도 버려지고 말았”다며 뻔한 교훈을 적어놓습니다. “서화담이 전우치의 술법을 제압하여 굴복시킨 일”은 주자가 도교의 연단술을 다룬 『참동계』를 풀이하는 글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라며, 두 가지 술법을 새로이 주자와 도교, 군자와 술사의 대립으로, 양과 음의 대립으로 바꾸어 놓곤, 음이 양을 이기지 못한다는 설교를 덧붙입니다. 


이는 양반층이 한글본 <전우치전>을 읽으며 꿈꾸었던 상상적 복수라고 할 만합니다. <전우치전>이 얼마나 못마땅했으면, 같은 제목의 한문본을 만들면서,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소설을 썼던’ 것일까요! 이는 역으로 <전우치전>이 갖는 유희적이고 반국가적인 성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 양반층 전체에게 지극히 부담스럽고 불편한 작품이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요? 이는 <전우치전>의 유희적 도술이 반통치적이고 반국가적 도술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1. 한문본 전우치전은 『잡기유초』에 실려 전해지는데, 이 역시 박희병이 교합하여 박희병/정길수가 번역한 텍스트를 이용했습니다(『낯선 세계로의 여행』, 돌베개).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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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의 난독일기 


'읽기 어려움이란 뜻의 난독은 굳이 고전이나 어려운 철학책에만 유효한 것은 아니다매일같이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이 벌어지는 사회야말로 우리가 읽어내기 어려운 무엇이다. ‘청년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여러 사회 담론을 난잡하게 독서하려 한다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지는 일기처럼 통일된 논점이 아니라 계속 삐끗거리는 이야기들을 연재하고 싶다.  



 


계산이 불가능한 순간청년난민은 어떻게 계산을 빗나가는가?


 -미스핏츠, 『청년, 난민되다』(코난북스)

 



지안 / 수유너머N 회원





 

청년들에게-나는 저번 주에만 정확히 3번을 들었는데-“어떤 것이든 해보라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어보았을 것이다. 어떤 것이든 다 해보라는 것은 그만큼 정해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해지는 일들이 있다는 청년의 속성을 어느 시기에는 청춘이라고 표현 했다. 대표적으로는 아프니까 청춘이다부터 그 반대급부로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닌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청춘담론들이 있었다. 지금은 책의 제목대로 난민이라는 말이 그것을 대체한 것 같다. 청년이 청춘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논하는 사이 청년들은 스스로를 난민으로 칭하고 있다. 





<청년, 난민되다>의 표지.


청춘은 열정적인 자이다청춘이 가진 특유의 불안정함이란 무언가를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다면난민이 주는 불안함은 막연하고 무차별적으로 행동하는 어떤 이미지에서 기인한다따라서 사람들은 난민을 계획하지 못하고 그래서 대책 없는 무엇으로 규정한다그러나 사실 난민의 삶이란 냉소적이고 동시에 끝없는 계산의 과정이다난민의 일상은 한정된 자원과 그에 따른 치밀한 계산속에서 가능해진다청춘은 계산하지 않는다면난민은 모든 것을 계산한다.

결국 불안정함과 불안함의 차이가 청춘-청년과 난민-청년의 경계를 정확히 지목하는 것이다. 불안정함이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안정화될 미래의 어떤 상태를 염두에 두는 것이라면 불안함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감정이다. 그렇다면 왜 동아시아 네 국가의 청년들은 일제히 불안 자체의 상황 속에 처해졌을까? 청년은 왜 난민이 되었는가?

 

당장 다음달 삶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이라는 감정이 사물의 형태를 띤다면, 그 모습은 타오팡(타오팡은 부엌은 없고 개인 화장실이 딸려 있는 주거 형태를 말한다)일 것이다.”

 

주거는 사람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난민-청년의 주거를 탐사하는 미스핏츠misfits의 기획은 결국 불안한 주거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정체성 탐색으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 난민되다>의 이야기들은 상당히 피곤했는데, 난민-청년의 삶은 청춘으로서의 그것과 다르게 계산을 통해서 무언가를 하나씩 포기해나가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청년난민들이 포기해나가고 있는 것은 내가 언젠가 집을 살 수 있을까, 나는 집을 사고 가정을 꾸리는 종류의 삶은 포기해야 하는가?’ 를 결정하는 것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게는 그것은 오늘 저녁으로 구내식당을 이용할 것인가, 아니면 1+1 삼각 김밥을 먹을 것인가의 문제다. 포기는 가격 차이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1. 계산하는 청년

 

처음 집에서 나왔던 순간, 그건 상당히 우발적이었는데, 내가 계획해왔던 삶이 증발하는 경험이었다. 두 계절을 친구 집을 전전하며 살다가 겨우 모은 약간의 돈으로 고시원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들의 집은 부족했지만 나름의 아늑한 공간들이었다. 언제나 그들은 더 있으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시원을 찾은 건 그 집들이 나에게 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부터 갑자기 보이게 된 건 길거리에 널린 부동산들이었다. 부동산 유리창 앞에는 내가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숫자들이 쓰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공(0)을 세면서, 머릿속으로는 하나의 공을 갖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일해야 하는지 계산했다. 그리고 계산의 답은 금방 얻을 수 있었는데,

 

계산이 불가능하다는 답이었다.

 

알바로 생계를 부양하는 청년이 주거공간을 찾을 때 시간은 언제나 공간과 교환된다. 당시 최저시급은 5210원이었고, 신촌 인근 고시원의 한 달 방세는 35만원이었다. 서툴러 보이는 나에게 방을 보여주며 고시원 총무는 멋쩍게 웃었다. “많이 좁죠? 그래도 시세보다 싼 편이예요. 창문 없는 방도 보여드릴게요.” 창문 있는 방에서 창문 없는 방을 뺐을 때 매달 5만원을 얻을 수 있다면, 잃게 되는 건 무엇일까? 역시 이것도 계산이 불가능한 계산이었다.

 




<청년, 난민되다>의 청년들은 계산기를 두드리는 청년들이다. 통학하는 데 드는 시간적인 비용과 집에서 살면서 드는 심리적인 비용, 그리고 언제쯤 취업이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내가 받을 수 있는 임금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이고. 또 그것의 몇 퍼센트를 어느 만큼의 기간 동안 모아야 집다운 집에 살 수 있는 지 계산하는 청년이다. 그리고 버티는삶의 이 기간을 벗어날 것을 상상하며 옷장 대신 행거를 사고, 침대 대신 소파베드를 사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우리가 이라는 것을 계산할 수 있을까?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도 집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시점에서 청년주거문제와 그것을 둘러싼 집의 사회적인 문제는 너무 당연해 보인다.

 

언제든 박스 몇 개에 나눠 담을 수 있도록 인생을 정리한다는 것. 원치 않지만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 도시에서 안정적으로 공간을 빌릴 자본이 없는 청년은 잠재적 난민이다. 원치 않는 이동을 반복하고, 안전하지 않고 익숙하지 않은 공간을 떠돌면서 소진된다.”

 

그렇지만 미스핏츠의 기획은 집이 무엇이어야 하는 가라는 철학적인 질문이다. 집은 일상의 피로를 리셋할 휴식의 공간이며 다음 삶을 준비할 만큼의 여유를 주어야 하는 공간이다. 문제가 막막해지는 건 여기서 부터다. 요지는 이라는 건, 적금 붓기처럼 집요한 계획 하에서 가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계산이 성립되지 않는 삶의 가치라는 것인데 그것은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수식으로 불가능한 계산이기 때문이다.

 


 

2. 계산에서 빗겨나가는 청년


최근 리먼 사태를 다룬 영화 <빅쇼트>가 역주행을 거듭하며 외화 예매율 1위를 달성했다. <빅 쇼트>는 2008년 미국 주택시장의 붕괴가 촉발한 세계경제위기 발생 이전의 몇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이때 주요 등장인물들인 약간 아류적인 펀드매니저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출의 파생상품그 파생상품들이 지탱하는 주택시장이 붕괴할 것을 예감하고 그것에 배팅한다. 그들은 월스트리트 거대 은행들이 파생시킨 거대한 숫자 누각을 발견하고 분노하는 한편시간이 흐르고 부동산 버블이 실제로 꺼진 시점에서 수천억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회수한다영화 속에서 주택시장의 붕괴에 배팅한 이들 펀드매니저는 계속해서 숫자를 이야기한다월스트리트의 숫자가 얼마나 잘못 되었고… 내 숫자는 어떻게 옳은가. 이 시장이 얼마나 근거 없이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허울인가

 





어쨌든 이 펀드매니저들은 영화 내내 월스트리트의 계산에 반대되는 온갖 숫자들, 계산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대사가 음향 처리 되는 와중에, 카메라가 마치 귀찮다는 듯이 지속적으로 심드렁하게 잡아내는 이미지는 대사를 하는 펀드매니저들이 아니라 수십 개의 초단위로 분할된 장면들, 그냥 길을 돌아다니는 개인들의 일상이다. 수천, 수조 단위의 계산들이 귓속을 복잡하게 울리는 와중에 영화의 개별 이미지들은 숫자가 아닌 개개인들의 삶을 가리킨다.

 

이들이라고 계산하지 않았을까? 주택을 담보로 대출을 하고 그것을 갚아나가는 계산은 그것을 토대로 하는 더 큰 계산에 가볍게 밟혔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임대인들의 계산이란, 임대료를 높여도 나가지 않을 무한정의 임차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월스트리트의 계산이란 일정의 일자리가 존재하고, 일하며 대출금을 갚을 마음이 있는 노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미스핏츠misfits란 저자들의 이름은 우습게도 우리를 두 번째 차원으로 데려간다. 첫 번째 차원에서 이 부적응자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부여된 이름이다. 취업시장에서도, 주거시장에서도 부적응하고 있는 청년들. 한 세대 전체가 총체적으로 난민화 되었음에도 개개인들에게 집요하게 물어지는 맞지 않는 사람misfit 이라는 판단이다. 이런 판단의 기저에는 더 열심히 계산하라는 엄포가 깔려있다. 하지만 수식 자체가 맞지 않음misfit 을 발견함으로써 가능해지는 건 새로운 범위의 삶의 방식이다.

 


 

3. “느슨한 관계”로서 청년들

 

누군가의 재산으로써의 이라는 가치가 살림으로써의 집을 파괴한 시점에서 집은 최소한의 주거를 보장하라는 인권적 차원과도 연결되지만, 동시에 집은 항상 정체성과 동시에 표상된다. 고향집은 찌개가 보글보글 끓어가는 가운데 존재하는 가족 구성원으로서의 나를 상상하게 하고, 불 꺼진 고시원 방은 삭막한 도시의 공기와 끝없이 불안한 1인 가구로서의 나를 상상하게 한다. 언제나 집은 누구와 어떻게 사느냐의 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청년세대가 집을 구매하려는 삶에서 벗어나면서 주어지는 것은 재산으로서의 집의 가치붕괴인 한편 청년 세대가 욕망하는 삶의 방식, 정체성 변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보증금을 마련하기 위한 적금을 드느니, 그 돈으로 건담 하나를 더 사겠다는 일본 긱하우스 거주자의 말이나 종샤우동루의 몇 백억 짜리 집 옆에 누워 항의 운동을 벌인 대만의 민달팽이운동처럼 말이다. 기성 시장이 만들어놓은 핏한 계산들 속에서 난감한 선택을 벌인 빗겨나간 청년들은 먼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유주거를 만들어나가는 한국 민달팽이유니온의 사례나 사회주택 건립을 시도하는 서울소셜스탠다드의 경우처럼 말이다. 이렇게 공동주거를 하며 사는 1인가구들은 느슨한 관계로 서로를 정의한다. 각자의 공간은 존재하지만 공유공간을 통해 서로의 일상을 나누고, 필요한 순간 결합하는 관계 말이다.

 

저자들의 해결책은 주거문제의 제도적 기반 마련에 가깝지만, 그보다 가까이 있는 전망은 오히려 직방에서 셰어하우스를 구하는 1인 가구들이 늘어났다는 점 같아 보인다. 주거 대책마련보다 주택을 보는 삶의 관점이 변화한 사람들의 존재 말이다. 집을 내가 소유하고 투자해야할 사유대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흩어지고 때로는 공유하면서 느슨하게 흘러가는 삶의 방식의 집합으로써 보는 청년들의 탄생 말이다. 그래서 청년난민인 우리가 고민할 것은 이 지점일 것 같다. 표지가 보여주듯이 박스 하나 캐리어 하나에 담겨버리는, 수식을 버티는 삶이 유지될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짐을 무기로 계산을 빗겨나갈 것인가

 

 

 

 

 

 

 

 

 

Posted by 노마디스트

**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세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 세 번째 부분 보기)



5.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


<왕수재전>에서 변신술은 모두 동물적인 힘과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구미호의 변신술은 3천년이라는 미지의 시간으로 표현되는 어떤 지각불가능성의 지대에서 형성된, 여우의 동물적인 능력의 확대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고전 소설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구미호의 변신술은 단지 특정한 여우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어떤 동물적 능력의 환유입니다. 그런 능력에 대한 경외감과 두려움이 뒤섞인 양가적 감정의 표현입니다. 


용왕의 아들인 노인의 도술 내지 변신술 역시 동물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신들에게 있었으면 하는 능력을 투사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그런 만큼 인간의 욕망을 담지하는 동물적 은유이긴 합니다. 그렇기에 대개 그 능력은 인간을 도와주는 방식으로 사용되고, 그걸 사용하는 동물은 인간에 복속된 것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왕수재전>에서 용왕 아들이나 그 딸의 능력은 왕수재로 하여금 부자가 되게 해주며 “무엇이든 마음먹으면 반드시 이루어지며 어떤 일이든 하기만 하면 꼭 성공”하게 해줍니다(181). <최고운전>에서 용의 아들 이목은 최치원이 중국 가는 길을 수행하며, 최치원의 부탁에 따라 가뭄 든 섬마을에 비를 내리게 해줍니다. 이들의 능력은 인간에게 없는 능력에 대한 소망의 표현이고, 동물의 형상을 통해 확장되는 인간적 소망이고, 동물적 형상을 통해 펼쳐지는 동물적인 능력입니다. 현실에 부재하지만 강력한 능력을 갖는 기이한 동물은 인간 자신에게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망의 표현이고, 그런 동물의 형상으로 자연에 투영된 인간적 소망의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인간이 이들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은 적으로 다가올 것에 대한 ‘공포’라기보다는, 자신의 소망이긴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넘어선 것에 대한 ‘불안감’입니다. 자기 능력을 초과하기에 언제 자신의 뜻을 넘어선 사태로 흘러갈지 모른다는 불안의 징표입니다. 왕수재가 용이 된 아내의 모습에 질리고 최치원이 황룡이 된 이목의 모습에 졸도하는 것이 그것일 겁니다. 이는 인간화되었어도 동물인 한 끝내 믿을 수 없다는 근본적 불신, 무력한 자의 위축된 마음을 표현합니다.


<왕수재전>에서 구미호와 용의 대결은 이런 상반되는 두 가지 동물적 능력의 대결입니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자연의 힘, 그렇기에 인간의 손 밖으로 벗어나 있는 동물적 능력과, 그것의 비밀을 포착하고 그 힘을 손 안에 장악한, 인간의 소망이 담긴 강력한 상상적 동물의 능력이 대결하는 것입니다. 그 대단한 능력을 가진 구미호가 고작, 궁궐은커녕 대단할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노인의 ‘집’을 빼앗으러 온다고 하면서, 그걸 지키지 위해 구미호와 목숨을 걸고 싸운다는 대결의 구도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그 집이 대체 무엇이길래 그 대단한 능력의 구미호가 굳이 빼앗으러 온다는 것인가? 저 정도의 구미호라면 멋진 궁궐을 하나 만들어 살면 되는 거 아닌가?


집은 크든 작든, 좋든 보잘 것 없든 인간화된 공간입니다. 자연 안에 있지만 ‘자연’과 구별되는 인간의 공간이며, 동물 같은 외부적인 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해주는 공간입니다. 자연 안에서 인간이 확보한 인간의 자리입니다. 노인의 작은 집은 글자 그대로 보자면, 선계의 음악을 울리고 수많은 시자들을 거느린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인 구미호가 굳이 탐낼 이유가 없는 보잘 것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집을 탐하여 목숨을 건 쟁투를 벌이면서 싸우러 온다 함은, 인간이 확보한 자리를 빼앗으러 온다는 말일 겁니다. 자기 영토를 남에게 빼앗길까 걱정하는 영토적 동물의 두려움을 표현하는 말일 겁니다. 



왜 구미호 씩이나 되는 존재가 집을 욕심내는 것으로 그려지는가? 저자에 따르면 이는 동물적인 능력이 인간의 영역을 넘을지도 모른다는 인간들의 공포를 반영한다. 사진 출처: http://magdeleine.co/photo-by-elizabet-lies-n-307/



이는 근본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변신술로 치환되어 표현된 동물적-자연적 능력이, ‘자연적 변화’라는 말로 대체할 수도 있을 그 힘이 우리의 집을, 우리가 사는 세계를 덮쳐 와해시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의 표현이고, 그런 두려움이 만들어낸 피해망상 같은 것입니다. 자연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그에 대한 적대감이 만들어낸 피해망상이고, 저 대단한 구미호가 목숨을 걸고 빼앗으려 할 만큼 대단한 것이라는 과대망상이 결합되어 만들어낸 편집증적 공포입니다.


이와 달리 완전히 인간화된 도술이 있습니다. 비바람을 부르고 저승의 신장을 불러내지만, 인간의 손에 의해 완전히 장악된 도술이. 가령 <옥루몽>에서 홍혼탈(강남홍)이 사용하는 도술이 그렇고,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사용하는 도술이 그렇습니다. 홍길동의 변신술은 이미 충분히 인간의 개념과 범주를 통해 구사되는 것이란 점에서 ‘인간적’입니다. 이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러한데, 첫째는 도술 자체의 성격이 『주역』 등과 같이 변화를 포착하는 인간화된 개념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부친의 소실인 초란이 자객을 보낸 날, 집을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홍길동은 “촛불을 밝히고 『주역』을 보며 깊이 생각하다 문득 들으니 까마귀가 세 번 울고 가는 것이었다. 길동이 괴이하게 여겨 혼자 말하길, ‘이 짐승은 본디 밤을 꺼리거늘, 지금 울고 가니 심히 불길하도다.’ 하고 잠깐 팔괘를 벌여 점을 보고는 크게 놀라 책상을 물리고 둔갑법을 행하여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홍길동전>, 김현양 역, 『홍길동전·전우치전』, 문학동네, 23)[각주:1] 그리곤 자객이 비수를 감추고 방에 들어오는 걸 보고선 진언을 외워 집을 없애고 첩첩산중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여기서 홍길동은 『주역』을 읽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주역』이라는 책은 자연이나 인간의 세상에서 발생하는 변화를 포착하고 개념화한 책입니다. 즉 인간의 개념을 통해 포착된 변화의 원리를 담은 책입니다. 이런 책을 읽는 이라면, 야밤의 까마귀 울음이라는 작은 현상 하나조차 어떤 사건의 징조로 읽어내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런 책을 통달한 이라면 홍길동처럼 ‘둔갑법’이라고 표현된 변신의 기술을 사용하기도 하고, 팔괘를 던져 점을 쳐 다가올 사태를 예견할 수 있습니다. 점이란 원래 자연의 리듬을 읽어내고 그에 맞는 인간 행동의 적절한 시점을 찾는 기술입니다. 인간화된 시간 개념 안에서 자연의 흐름, 사태의 흐름을 읽는 기술입니다(이진경, 2010: 31-33). 홍길동의 점 또한 사태의 흐름을 포착하며 미리 도래할 사태를 예측하는 기술이고, 변신이란 그런 변화의 원리를 빌어 통상적인 변화의 속도를 초과하거나 방향을 바꾸고 경계를 횡단하는 기술입니다. 


구미호의 도술이나 심지어 용왕 아들의 도술조차 왕수재라는 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예측불가능한 것이었다면, 『주역』이라는 책을 통달한 홍길동의 눈은 아직 오지 않은 일을 미리 예측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변화를 만들어 사태를 통제합니다. 그렇기에 앞의 것이 ‘동물적’ 내지 ‘자연적’인 것이라면, 뒤의 것은 ‘인간적’인 것이고, 앞의 것이 인간의 힘에 대해 ‘외부적인’ 것이라면 뒤의 것은 인간의 손 안에 있는 ‘내부적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 <왕수재전>에서 도술이나 변신술이 사용되는 게 인간의 집을 ‘빼앗으러’ 오는 자연적 내지 동물적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면, <홍길동전>에서 그것이 사용되는 것은 ‘호부호형’을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원통함, 그리고 아버지의 소실과의 갈등이라는 ‘인간적인’ 관계에 기인해서였습니다. 다시 말해 전자가 자연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이라면, 후자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입니다. <홍길동전> 어디에서도 자연과의 대결구도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왕수재전>에서는, 뒤에 왕수재와 아내 사이에서 발생한 사건조차 <홍길동전> 같은 인간관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용과 인간 간의 관계, 동물의 신체와 인간의 감정 간의 관계에서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6. 전우치는 어디에서 변신하는가?: 변신술의 위상학


<전우치전> 역시 변신술에 대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사용되는 도술은 동물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병존합니다.[각주:2] 그러나 <홍길동전>에서는 변신술조차 동물적인 기원과는 무관했다면, 전우치가 사용하는 도술은 변신술 아닌 것도 본질적으로 동물적 기원을 갖습니다. 전우치가 변신술을 비롯한 특별한 능력을 얻게 되는 일차적인 계기는 여우의 ‘호정’(여우의 넋)을 빼앗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서당에 가기 위해 산을 넘던 전우치는 대숲에서 소복을 한 채 울고 있는 여자를 만납니다. 계모의 모해가 괴로워 죽을까 하지만 차마 죽지 못해 울고 있다는 여인에게 ‘작업’을 하여 같이 자는데, 이 얘기를 들은 스승 윤공은 이 여자가 입에 머금고 있을 구슬을 빼앗아다 보여 달라 합니다. 다시 대숲에서 여자와 만나 사랑을 나누다 입 속에 있는 구슬을 보곤 사랑하는 마음을 이용해 빼앗습니다. 여인이 돌려 달라 보채다 입을 열려 하자 전우치는 그것을 삼켜버렸고, 구슬을 잃어버린 여인은 울며 돌아가버립니다. 이 얘기를 듣고 윤공이 말합니다. 



“네 이미 호정을 먹었으니 천문과 지리에 통달할 것이며, 지살(地煞, 풍수지리에서 터가 좋지 못한 데서 생기는 모질고 독한 귀신의 기운) 일흔 두 가지의 변화를 부릴 것이다. 또 올해 4월에는 진사벼슬을 할 것이니, 이후의 일들을 조심하거라.”(<전우치전>, 김현양 역, 『홍길동전·전우치전』, 76)[각주:3]



윤공은 전우치 부친의 친구로서 “세상의 문장을 두루 익혀 만 리 앞을 내다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74). 여기서 전우치의 앞일을 예견하는 윤공의 능력은 앞서 홍길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서책에서 얻은 ‘인간적인’ 능력입니다. 반면 그의 설명에 따르면 전우치가 앞으로 얻게 될 능력은 여우의 넋을 먹어서 얻은 것이란 점에서 동물적인 것입니다. 전우치는 “호정을 먹은 후로는 서른여섯가지 변화에 능통하게” 됩니다(76). 이는 변신한 여우와 ‘백년해로’하자며 사랑을 나누어 얻은 것이란 점에서도 또한 동물적인 것입니다. 인간의 세계로 밀고 들어온 동물과의 결연을 통해, 전우치는 변신의 능력을 획득한 것입니다.



최근 들어 영화로 그려지기도 한 전우치. 전우치전에도 여러 도술이 나오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런 도술은 홍길동전과 매우 다르다.



그러나 여우의 호정을 빼앗아 얻은 것만으론 그 여우의 변신능력을 넘어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여우가 <왕수재전>의 구미호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면 모르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그 힘은 다른 여우와 대적하기에도 취약한 것일 수 있습니다. 고전 소설에 흔히 나오듯 전우치가 “문장은 이태백을 누르고 필법은 왕희지를 대적할 정도가 되었다”(76)고는 해도, 그게 변신의 기술 자체를 증장시켜줄 리는 없습니다. 전우치의 탁월한 능력을 위해선 또 다른 계기가 필요했습니다. 


진사에 합격한 후 전우치는 전국의 명산대첩을 돌아다니다 세금사와 성림사라는 절에 변고가 반복되어 사람들이 모두 떠났다는 말을 듣고 나중에 세금사에 찾아갑니다. 거기서 다시 본래 양반인데 도적을 만나 쫓겨 도망쳐왔다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백년동락’을 하자며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억지로 술을 먹여 재우곤, 가슴에 붉은 글씨로 진언을 써서 여우임을 확인하곤 묶어서 괴롭혀 구미호의 본모습을 드러내게 만듭니다(사실 전우치가 먹은 호정이 구미호의 힘을 제압할 정도는 못되었기에, 중간에 노인이 나타나 부적과 끈을 줍니다. 그로 인해 전우치는 구미호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호정을 주면 살려주겠다고 하지만, 호정은 뱃속에 있다며 그보다 나은 천서(天書)를 주겠다고 하여, 그의 굴에 가서 천서 세 권을 얻습니다. 그러나 읽을 수 없는 글자였기에, 여우의 도움 없이는 아무 소용없는 책이었습니다. “술을 마신 후에 구미호를 앉혀놓고 천서 상권을 배워 하룻밤만에 모두 통달하니, 이는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 술법이었다. 그제서야 우치는 여우의 손을 풀어주고는 등에 붙였던 부적을 떼어 상권에 붙이고는” “은혜를 입었기에 살려 보내주니, 앞으로 다시는 변고를 일으키지 마라”고 하며 놓아줍니다(82). 나머지 두 권이야 혼자 읽으면 될 것이려니 했으나, 여우가 술법을 써서 두 권을 되찾아갑니다. 화가 난 전우치는 여우집으로 찾아가 요괴를 쓸어버리겠다고 나서지만, “산천이 깊고 길이 아득하여 찾을 수가 없었다”(83)고 해요. 


여기서 또 다른 여우의 호정 대신 얻은 천서는 ‘책’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홍길동이 읽던 『주역』과 달리 인간이 읽을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책이란 여우나 동물적 술법을 개체의 차원을 넘어 일반화한 것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이 읽을 수 없다 함은 『주역』처럼 인간의 개념이나 관념을 넘어서 있는 것임을, 여우나 읽을 수 있는 동물 세계의 비전(秘典)이었음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을 ‘천서’라 칭한 것은 단지 여우만의 술법이 아니라 ‘천’이라 명명되는 자연계의 술법, 동물의 술법 일반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천서를 여우가 갖고 있었던 것 역시 거기 쓰인 술법이 여우나 동물의 세계에 속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여우의 도움을 얻어 다시 배운 전우치의, ‘귀신도 헤아리기 어려운’ 새로운 술법은 여전히 인간적인 게 아니라 동물적인 것입니다. 


왕수재는 용왕 아들의 집에 머물렀고 그의 딸과 결혼했음에도 그 변신의 술법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배우려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반면 전우치는 호정을 먹음으로써 능력을 얻기도 하고, 여우의 눈을 빌어 천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둘 다 동물과 결연을 맺었다는 점까지 비슷하지만, 전우치는 왕수재와 달리 동물적인 능력 그 자체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아니, 거기에 매혹되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동물적 술법을 배우기 위해 그는 여자로 변신한 여우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전우치가 단지 동물적 도술만을 가졌다면, 동물들을 제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물에게 배우는 처지란, 그 동물보다 술법이 낮음을 뜻하는 것이니까요. 동물을 제압하려면 동물에게 없는 무언가가 더해져야 했습니다. 구미호를 잡으러 갈 때 나타난 노인이 준 부적과 끈이 그것입니다. 구미호를 잡거나 천서 상권을 다시 빼앗기지 않았던 것은, 변고를 해결하러 세금사 가는 길에 만난 노인이 준 부적과 끈 때문이었습니다. 그 부적과 끈은 여우의 손 밖에 있는 것이었기에, 자연적 술법이 아니라 인간적 술법에 속하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구미호도 노인이 전우치에게 건네준 인간적 술법의 벽은 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물론 공력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동물 아닌 인간의 형상을 한 노인이 구미호의 힘을 제압하도록 도와준 것이었으니 인간적 술법이었다고 하는 게 타당할 것입니다. <왕수재전>에서 용왕 아들과 인간인 왕수재의 힘이 더해져서 구미호를 이길 수 있었듯이, 여기선 동물적 술법을 익힌 전우치의 힘만으론 구미호를 이길 수 없었고, 노인이라는 다른 인간의 힘이 더해져서 구미호를 이길 수 있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탁월하다 싶은 것은, 전우치가 천서 세권의 술법을 모두 배우는 게 아니라 상권만 배우곤 나머지는 도로 빼앗긴다는 점입니다. 이는 동물적인 술법의 힘이 전우치가 익힌 것을 뛰어넘어 존재함(중권, 하권의 천서)을 의미합니다. 책을 빼앗긴 뒤 열을 받아 여우굴을 쓸어버리겠다고 찾아가지만, ‘산천이 깊고 길이 아득하여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우나 동물의 세계는, 천서를 상권 마스터한 전우치로서도 아직은 도달할 수 없는 아득한 깊이와 거리 저편에 있는 것입니다. 전우치 역시 이를 잘 압니다. “이 요괴가 부리는 변화는 예측하기 어려우니, 가히 이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리라.”(83) 하여 그는 서책을 챙겨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필경 전우치는 여우에게 농락당하거나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전우치는 현명하게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힘을 넘어서는 것의 존재를 인식하거나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변신술이나 도술 이전에 삶을 살아가는 데서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인 것입니다.


변신술의 유형이란 점에서 보면, <전우치전>은 <왕수재전>와 <홍길동전> 사이에 있습니다. <왕수재전>에서 술법을 대결하는 두 인물은, 온 방향, 가려는 방향은 달라도 둘 다 동물적인 존재였습니다. 인간 왕수재는 바로 옆에 같이 살면서도 그걸 배우지 않으며, 거꾸로 동물적 신체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아내를, 변신의 능력을 떠나보냅니다. 떠나보내지만 그것은 무능력에 의한 것이었기에 안타까움의 감정을 수반합니다. <홍길동전>에서 홍길동이 부리는 술법은 전적으로 인간적인 것입니다. 동물적인 술법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짐승이라 명명되는 자가 한 번 등장합니다. 율도국에 간 이후 속에서 발견한 ‘울동’이란 존재가 그것인데, ‘짐승’이란 말과 더불어 ‘괴물’ 내지 ‘요괴’란 말이 사용되는, 동물인지 인간인지 모호한 존재입니다.[각주:4] 그런데 이에 대한 홍길동의 태도는 지극히 적대적입니다. 그들은 홍길동에게 어떤 해도 가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의 눈에 발견되었을 뿐인데, ‘내 두루 다녀보았으나 이 같은 것은 처음 보는 것이라. 이제 저것을 잡아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리라’며 활을 쏘아 우두머리를 맞힙니다(49). 그리곤 그들을 속여 독약으로 그 우두머리를 죽이고, 다른 ‘괴물’들도 모조리(!) 죽였을 뿐 아니라 “도로 요괴가 사는 곳으로 들어가 남은 요괴까지 모조리 죽였다”(51)고 해요. ‘처음 보는 것’이란 것 말고는 어떤 이유도 없이 일방적인 선제공격으로 몰살시켜버리는 이런 태도는 낯선 동물이나 존재에 대한 인간적인 적대감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전우치는 왕수재와 달리 변신한 여우과 같이 사랑을 나누고 그의 호정을 빼앗거나 그에게 천서를 읽게 하여 동물적인 술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왕수재와 다르고, 변고를 일으킨 구미호조차 자신이 은혜를 입었다 생각하여 죽이지 않고 놓아준다는 점에서 홍길동과 다릅니다. 또한 전우치는 동물과의 결연함으로써 술법을 배운다는 점에서 왕수재와 가깝지만, 그렇게 배운 술법을 주로 인간세계에서 인간들을 대상으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홍길동과 가깝습니다. 요컨대 전우치가 배우고 사용하는 술법은 전적으로 동물적인 <왕수재전>의 술법과 전적으로 인간적인 <홍길동전>의 술법 사이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1. 이 책은 경판 30장본 <홍길동전>입니다. <홍길동전>의 이본은 매우 많지만 내용은 대체적으로 대동소이한데, 경판본과 완판본 정도로 크게 대별됩니다. 완판본은 경판본에 척불(斥佛)의 관념을 강화하고 율도국 정벌 장면을 확대한 것입니다. 이후 <홍길동전>은 주로 경판본 30장본을 번역한 김현양 편역, 『홍길동전·전우치전』(문학동네, 2010)을 인용할 것이며, 필요한 경우에 완판본과 동양문고본을 인용할 것입니다. [본문으로]
  2. <전우치전>이라고 했지만, 다른 이름들로 표기된 작품이 많습니다. 전우치도 田禹治, 田羽致 등 한자를 달리하기도 하고, 전운치(全雲致)라는 이름의 판본도 많습니다. 이외에도 <전윷치전>, <일치전>도 있는데, 15~16세기에 살았던 실존인물 전우치(田禹治)를 모델로 한 것이어서, 점차 <전우치전>이란 이름으로 정착되어 갔다고 합니다(김현양, 2010). [본문으로]
  3. 이 책은 <전운치전 경판 37장본>입니다. <전우치전>에는 내용이 크게 다른 세 개의 계열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되는 경판본 37장본과 그것을 거의 그대로 필사한 일사본, 그리고 37장본을 축소한 다른 경판본들이 첫째 계열이고, 둘째는 주로 필사본으로 남아있는 것이며(김욱동본, 사재동본...), 셋째 계열은 한문필사본입니다. 세 계열은 내용이 아주 판이합니다. 우리가 아는 <전우치전>은 첫째 계열의 것이며, 둘째 계열은 <홍길동전>의 영향을 받아 그와 비슷한 내용으로 개작된 것이고, 셋째 계열은 뒤에 언급하듯이 <전우치전>이라기보다는 그걸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실질적으로는 <전우치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첫째 계열이 가장 오래된 판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홍길동전>과 다른 <전우치전> 고유의 면모를 잘 보여주기에, 이하에서 <전우치전>은 이 계열의 판본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겠습니다. [본문으로]
  4. 완판본에는 ‘을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경미(2010)는 홍길동전에서는 비록 ‘괴물’로 묘사되었지만, 실은 그곳의 인간이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곳의 선주민을 ‘괴물’이란 형태로 타자화하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이는 매우 적절한 지적이라고 보입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노마디스트

**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두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4. 변신능력과 왕의 권력



인간과 동물의 경계지대에서 겨루는 두 인물의 힘을 이렇게 대등하게, 아니 심지어 구미호의 능력을 더 탁월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매우 드문 경우에 속합니다. <금방울전>이나 <김원전>, <홍길동전> 등 ‘괴물’들이 등장하는 소설에서 괴물들은 대부분 주인공들의 능력 앞에서 어이없을 정도로 무력합니다. 구미호의 능력을 빼앗아 요술을 부리는 <전우치전>에서조차 구미호는 전우치의 힘 앞에서 꼼짝 못합니다. 반면 <왕수재전>에선 괴물이나 동물이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습니다. 양자의 능력은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아니, 실은 구미호의 힘이 용왕의 아들 혼자서는 이길 수 없을 정도로 강하며, 그래서 왕수재의 도움을 받아서야 간신히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하며, 그렇게 끌어들인 왕수재마저 매혹시킬 정도로 탁월합니다.


싸움이 벌어지는 섬은 동물의 힘과 인간의 힘이 만나고 섞이는 경계지대입니다. 구미호도, 용왕의 아들도 모두 인간과 동물의 힘이 섞인 인물입니다. 그 경계지대에서 노인의 형상을 취한 용왕의 아들은 ‘집’이라는 인간화된 장소, 인간세계 안에 자리 잡은 공간을 지키기 위해 왕수재라는 인간의 힘을 빕니다. 그 ‘집’은 단지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인간이 ‘거주하는’ 곳이고, 인간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세계를 지키기 위해 인간화된 동물(용)과 인간(왕수재)의 동맹에 의해, ‘외부’에서 온 동물을 물리치려는 것입니다. 왕수재가 선택된 것은 그가 활 쏘는 능력으로 인간의 최대치에 이른 탁월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용왕이란 ‘통치자’와 손을 잡고, 주어진 동물의 자리에서 이탈하여 인간의 세계로 밀고들어오려는 자를 징치하고 죽입니다. 훗날 왕수재의 아들(왕건)이 인간세계의 ‘통치자’인 왕이 되는 것은 이러한 그의 역할과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통치자란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는 자를 징치하여 자리에서 이탈하지 못하게 관리하는 자입니다. 용왕이 동물의 세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자라면, 왕은 인간의 세계에서 그런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용왕의 아들이 그 경계지대에 있는 것은 통치할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하고 훈련(‘수련’)하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왕이 되기 직전의 인간(왕이 될 자의 아버지)인 왕수재가 거기 불려 들어가는 것 또한 그와 다르지 않은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동물이나 인간을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동물인지 인간인지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의 형상이나 위치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변신이란 통상적인 구별능력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변신한 자들의 대결이 펼쳐지는 저 섬은 바로 그 구별능력을 시험하는 장입니다.



하나의 파도가 다른 파도와 구분되는가? 뚜렷하게(distinct) 구분하기 어렵다. 변신까지 갈 것도 없이, 자연에는 이런 애매한 것들 천지다. 그리고 권력이란, 이런 애매한 것들을 구분하고 자리를 매기는 힘이다. (사진 출처: http://magdeleine.co/photo-by-folkert-gorter-n-273/)



거기서 왕수재는 뚜렷하게 구별할 수 없는 것을 구별하려는 자이고, 그런 만큼 상이한 세계에 속한 것이 섞일 수 없다고 믿는 자입니다. 활을 쏘아 구미호를 죽여준다면 딸을 주겠다는 노인의 말에 왕수재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속세의 천한 사람이고 따님은 용궁의 귀인이신데, 어찌 감히 부부의 연을 맺을 수 있겠습니까? 또 물속 세계와 땅 위 세계가 다르고 사람과 용은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존재이니, 비록 선생의 허락이 있다 한들 제 생각엔 인연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178) 그는 주어진 인식과 지각의 틀 안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할 뿐입니다. 말을 해봐야 소용없음을 알고 노인은 말합니다. “수재는 그런 걱정 말고 우선 내 골칫거리부터 없애주시오. 베풀어준 은혜에 대해서는 반드시 보답하겠소.”(178)


따라서 왕수재는 아름다운 여인이 구미호라는 말을 들어도 믿지 못합니다. 그가 활을 쏘아야 할 대상은 자신이 식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존재인 것입니다.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에 한해서만 판단하고 행동하려는 인물이기에, 왕수재는 우직하고 미련스럽게 자신이 식별할 수 있는 바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그의 눈은 불행히도 그 여인이 구미호임을 식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쏘지 못합니다. “저건 사람입니다. 여우가 둔갑을 한다고 어찌 저리 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쏴 죽여서야 되겠급니까?”(177) 노인이 알려주었지만, 그것은 노인의 말일 뿐이요, 그의 눈을 대신하진 못합니다. 


그냥은 섬에서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는 위협과 딸을 주겠다는 회유의 말에 포섭되어 활을 쏘아 구미호를 죽였을 때,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나머지 무리는 모두 새끼 여우로 바뀝니다. 인간 세계 안에 침투해 들어온 것들이, 구미호의 변신능력을 제거하자 인간세계 바깥으로, 그 바깥에 주어져 있던 동물의 자리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인간의 관념 속의 격자들을 이탈하며 가로지르기를 중단하고, 격자 안의 범주들 속으로 되돌아간 것입니다. 이는 활을 쏘는 왕수재의 능력이 서게 될 자리를 역으로 비추어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왕의 능력은 변신능력은 아니지만, 변신능력 근방에서 옵니다. 변신능력을 포착할 수 있는 자가 아니면, 그것을 통제할 수 없고, 변신능력을 통제할 수 없다면 그 능력에 노출되어 있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우치전>이나 <홍길동전>에서의 왕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모두 변신술의 조롱대상이 됩니다. 그 점에서 왕의 자리는 변신능력이 작동하는 지점, 인간의 관념이나 지각과 그 외부적인 것이 만나는 점을 ‘기원’으로 합니다. 많은 신화에서 왕의 탄생이 다른 인간과 다른 이적(異蹟)의 형태를 취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왕의 위치란 통상적인 구별의 선이 와해되는 지점에 자리잡고 있음을 통해 그가 갖는 남다른 능력이나 ‘자격’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변신한 곰의 아들로 태어나는 단군이나, 새가 낳은 건지 인간이 낳은 건지 알 수 없는 난생의 박혁거세나 고주몽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곳은 인간의 능력의 한계지점이란 점에서 인간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 지대와 만나는 곳이고, 그 외부적 힘을 내부화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곰이 인간이 되어 애를 낳아서 왕이 되는 것과, 구미호가 인간이 되어 애를 낳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가장 근본적인 난점입니다. 왕은 구별불가능성의 지대에서 탄생해야 하는데, 그곳은 동물이 인간으로 변신하여 침투하는 곳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거기는 비슷해 보이는 것의 엄격한 식별을 둘러싸고 각축을 벌이는 격전장입니다. 용왕의 아들과 구미호가 그렇게 팽팽하게 오랫동안 싸웠던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왕이란 그 구별불가능한 지점에서, 인간세계에 침투하려는 동물을 제거하고, 그들과 자신의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자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언제나 경계가 모호해지는 변화와 변신의 지대에서, 구별하고 다시 구별하기를 반복하며 인간의 관념과 지각으로 반복하여 포섭하는 것, 그게 왕이 하는 역할입니다. 왕수재가 구미호를 쉽게 쏘지 못하는 것은 그런 구별의 근본적 불가능성 때문이지만(구미호에 대한 노인의 말은 증명될 수 없으며 단지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노인의 말을 따르는 것은 협박과 유혹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구별하려는 그의 신중함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왕은 동물적 기원을 갖지만 동물이어선 안되고, 변신술을 장악해야 하지만 직접 변신술을 사용해선 안됩니다. 경계선을 확고히 하고 각자가 주어진 자리를 지키게 해야 하는 인물 자신이 경계선을 흐리고 자리를 이탈하는 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왕수재도 그렇고 고주몽도, 변신술을 자신이 직접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변신능력을 가진 동물들의 도움을 받을 뿐입니다. 역으로 그들이 갖는 탁월한 능력인 활쏘기는 동물들을 잡는 능력입니다. 동물들을 장악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한 것입니다. <왕수재전>에서는 그가 변신술을 장악해 자신의 휘하에 거느리고 있도록 하기 위해 용왕의 아들은 자기 딸을 그에게 아내로 줍니다.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주몽의 포스터. 주몽은 알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졌다. 이런 왕을 둘러싼 난생 설화는 흔한 편이다.(박혁거세-신라, 김수로-가야 등) 주몽은 동물적 기원을 가지지만, 동물을 제압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다. (사진 출처: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6122021273525274&type=1&outlink=1)



왕수재가 그러하듯, 왕이란 그런 변신의 능력이 갖는 매력을 알아보는 자인 동시에 그런 만큼 누구보다 그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잘 아는 자입니다. 왕수재가 구미호라는 말을 들어 알고 있음에도 활을 쏘지 못한 또 다른 이유는, 구미호의 미모나 자태, 그리고 음악에 매료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힘은 인간 세계의 범주 안에 들어온 뒤라고 해도, 인간인 동시에 동물이기도 한 자신의 아내처럼, 사실은 항상-이미 구별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기에, 명료하고 뚜렷하게 사물이나 사태를 구별하려는 인간에게 그것은 곤혹스럽고 두려운 힘입니다. 자신을 등지는 순간을 상상하면 식은땀이 나는 두려운 존재인 겁니다. 그래서 자신의 휘하에 있지만 그에 대해선 근본적인 불신이 있습니다. 심지어 아내인 경우에조차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는 것입니다. 왕수재는 자신의 아내가 원래 ‘용’임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자신이 아내에게 안 볼 때는 용으로 변신하고 있으라고 말한 바 있음에도 그것을 직접 보았을 때에는 겁을 먹게 되됩니다. 정이 떨어지게 됩니다. 두려움과 거부감이 일어난 이상, 더는 그 변신의 힘을 즐길 수 없게 됩니다. 이를 잘 아는 용녀는 남편을 떠납니다. 



“이제 변신한 모습을 보셨으니 마음속으로 겁을 먹고 정이 이미 멀어졌을 겁니다. 지난날의 즐거움을 계속하기 어려워졌으니 저는 떠나겠습니다. 아들 딸 모두 데리고 가야겠지만 그건 너무 심한 일인 것 같아 아들은 남겨두고 가겠어요. 잘 기르고 가르치시면 한 나라의 군주가 될 겁니다.”(185~186)




이는 변신의 세계로부터 확고한 인간의 세계로 들어서게 됨을 뜻합니다. 왕수재가 아니라 그 아들이 왕이 되는 것은 왕수재가 너무 동물적 변신의 세계에 가까이 잇기 때문일 겁니다. 변신의 세계와 거리가 충분하지 못한 겁니다. 왕이란 변신의 힘에 인접해 있지만 그 위험을 잘 알기에 거리를 충분히 두는 인물이고, 이런 모호한 기원을 갖지만 충훈히 인간의 세계로 들어선 인물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변신이 갖는 더 큰 힘을 잃는 것입니다. 변신으로부터 물러섬에 따라 왕수재는 더 큰 능력의 아들을, 새로운 왕을 낳을 가능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앞의 인용문에 이어지는 용녀의 말입니다: “[아쉬운 것은] 제가 3년만 더 있었더라면 반드시 성스러운 아들을 낳아 중국을 쓸어버리고 9주를 평정해 삼대의 정치를 펼치게 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186)


용녀는 일이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인간화된 범주 안에, 인간화된 세게 안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변신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그는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남편의 말에, “못 볼 거야 없지만, 부부간에는 보여드릴 수 없”다며 거절합니다. 이는 두려움이나 거부감이란 관념을 초과한 감정이고 의식을 넘어선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기에 용녀는 남편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관계를 지속하려 합니다. 종(鍾)을 통해 미리 알리고 출입하는 방법으로 그런 거리를 확보하려 합니다. 이런 거리화 방식은 역으로 매력에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에 대해 두려움과 거부감을 갖는, 변신에 대한 태도의 양면성의 표현입니다.


변신에 대한 두려움은 본질적으로 내가 아는 것을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인간이 할당한 자리에서 벗어나고 인간의 지각이나 판단의 범주를 이탈하거나 횡단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인간의 감각이나 인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나 행동, 변화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변신에 이끌리는 매력은 역으로 그러한 것들에서 느끼는 매력입니다. 왕수재가 처음 보자마자 용녀에게 이끌렸던 것은 알지 못해도 감지되는 그 매력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매력의 힘에 끌려 왕수재는 딸을 주겠다는 노인의 요청에 따라 활을 쏩니다. 그러나 잘 알고 있었으며 이미 몸을 섞고 자식을 둘이나 낳은 관계임에도 용이 된 아내를 한 번 본 것만으로도 정이 떨어진 것은, 그 변신에 대한 두려움의 크기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두려움이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변신능력의 크기를 제한합니다. 


용녀는 자신의 아버지(‘노인’)와 마찬가지로 그 경계지대 안에서 변신의 힘을 인간의 힘/권력으로 변환시키는 지점에 있지만, 그건 동물적 힘이나 경계를 범람하는 능력을 인간의 틀 안에 가두는 것이기에 힘들고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 피곤함으로 인해 병들고 지쳐 다시 변신의 힘을 풀어놓으려 합니다. 물론 왕수재의 허락 아래서. 하지만 인간의 외부를 뜻하는 그 힘의 드러남을 왕수재는 감당하지 못했고, 결국 용녀는 다시 인간 세상의 바깥으로 나가버리게 됩니다. 변신능력을 인간의 힘으로 바꾸는 것, 그것은 변신에 대한 통제고, 본질적으로 변신능력을 지치게 하는 권력입니다. 그것은 변신에 대한 두려움을 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통치나 통제의 의지가 지배하는 곳에서 변신능력은 함부로 사용되어선 안됩니다. 그렇기에 용녀는 왕수재와 결혼하여 인간의 모습으로 살지만, 그것은 용이 갖는 본질적인 힘이 억압되고 정지된 상태로 사는 것입니다. 이제 변신능력이란 사용되지 못한 채 억압된 잠재력 능력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잠재적인 능력도 쓰지 않고 그냥 둔다면 축소되고 무력화됩니다. 변신능력을 잠재적인 것으로 가두어 놓고 그저 인간의 모습으로만 있다는 것은, 인간세계의 틀과 범주 안에 갇혀 사는 것을 뜻합니다. 변신하는 자에게 그것은 자신의 본성에 반하는 삶이고, 자신의 힘을 무력화(無力化)하는 방식의 삶입니다. 그것은 자신을 어떤 틀과 범주 안에 가두는 것이란 점에서 일종의 내부적인 감옥 안에 가두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견딜 수 있었지만 그 감금의 시간이 길어짐에 따라 몸은 병들고 무력화되게 됩니다. 그에게 다가온 죽음, 그것은 그의 본질이기도 한 변신능력의 죽음입니다. 그가 살기 위해선 다시금 인간의 관념이나 지각이 만들어 놓은 감옥(범주적 감옥)을 벗어나야 합니다. 변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변신은 남편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잘 압니다. 


따라서 그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거나 떠나거나’입니다. 잠정적으로 거리화의 방법을 취했으나 그것이 실패하자마자 그는 결국 남편을 떠납니다. 인간세계를 떠납니다. 고정된 강력한 격자의 감옥을 벗어납니다. 그래도 아들을 남겨두고 가는 것은, 자신의 잠재화된 능력이 남편과 함께 산출한 씨를 두고 가는 것입니다. 변신을 감당하고 통제하는 잠재적 통치자를. 데려가는 것은 딸입니다. 딸 역시 남편과 함께 산출한 것이지만, 여성에게 통치자의 지위를 허용하지 않는 세계에서, 변신능력을 가진 여자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  가지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처럼 고정된 범주의 통치에 갇혀 무력해지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 아니면, 범주들을 횡단하다 구미호처럼 일종의 ‘마녀’로 단번에 죽는 것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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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첫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3. 인간화된 동물과 인간을 침범하는 동물


<왕수재전>는 용왕의 아들과 구미호라는 두 인물의 싸움을 통해, 변신이 쟁투의 영역임을 보여줍니다. 누가 무엇을 두고 싸우는 것인가? 용왕의 아들와 구미호가, 용왕 아들이 사는 ‘집’을 두고 싸웁니다. 용왕도 구미호도 모두 동물인 동시에 인간으로 변신하는 동물입니다. 즉 인간과 동물의 중간에 있는 존재고, 인간과 동물 사이를 왔다갔다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구미호와 용, 양자는 어떻게 다른 걸까요? 돌다 동물이면서 또한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 동물이란 점에서 동일한 듯 보입니다. 그런데 왜 이리 다르게 다루어지며, 또 이들은 서로 무엇을 두고 싸우고 있는 것일까요?


둘 다 다른 이야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고, 원래 동물인데 인간으로 변신할 수 있는다는 점에서 같지만, 용왕의 아들은 원래 용이긴 하지만 ‘왕’이라는 지위를 갖고 그 휘하에 신하를 부리는 존재입니다. 용궁이나 수궁이라는 독자적 ‘세계’를 갖는데, 그 세계는 인간세계와 일정한 상응성을 갖는 인간화된 세계입니다. 반면 구미호는 ‘세계’를 갖지 않습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빈곤한 세계’를 갖고 있습니다.[각주:1] 구미호는 대개 홀로 나타나는 고립된 존재로 서술됩니다. <왕수재전>에 등장하는 구미호는 매우 특별하여, 화려하게 차린 시비(侍婢)들을 데리고 나타나지만, 모두 새끼여우들을 변신시킨 것으로, 구미호가 죽자 모두 동시에 죽습니다. 즉 구미호가 속한 독자적 ‘세계’가 아니라, 구미호에게 속한 것들, 구미호 신체의 연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용왕의 아들인 용은 그렇게 인간들처럼 조직되고 안정된 위계나 체계를 갖지 않는 구미호와는 아주 다른 존재입니다. 즉 용왕이나 그 자식은 나름의 ‘세계’를 갖고 있는, 이미 충분히 인간화된 동물입니다. 



용왕은 용이라기보다는 인간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저자에 따르면, 이는 용왕이 인간 세계의 연장이며 인간화된 동물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한국 콘텐츠 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http://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_id=CP_THE002&cp_code=cp0224&index_id=cp02240112&content_id=cp022401120001&search_left_menu=2)



따라서 용왕의 일족은 굳이 인간화되려고 할 필요가 별로 없습니다. 애초부터 충분히 인간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용궁이란 인간의 세계에서 수중의 동물세계로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원래 동물세계란 인간이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용궁이란 이 알 수 없는 세계를 인간화된 동물을 통해 인간의 관점에서 포착한 세계입니다. 즉 원래는 알 수 없는 수중의 세계, 동물의 세계를 인간의 눈과 귀로 포착하여 인간적 관점에서 장악할 수 있게 해주는 영역입니다. 『금오신화』의 <용궁부연록>은 인간이 용궁에 가는 얘기인데, 거기에서 용왕은 자기 딸을 위한 궁의 ‘상량문’을 짓기 위해 한생을 용궁으로 불러들였다고 말합니다. 인간인 한생이 지은 상량문을 궁전에 붙인다 함은, 그들의 집 자체를 인간의 가치와 관념으로 채색함을 뜻합니다. 용궁의 다른 신과 게나 거북이 같은 신하들이 모여서 잔치를 벌이고 노는 방식 또한 당시 인간들이 하듯이 시문을 짓고 가무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인간과 다른 것은 없으며, 인간이 예측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충분히 인간이 아는 범위 안에서, 인간이 하는대로 행동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변신한 존재고, 또한 다른 변신의 능력을 갖는다고 해도, 거기엔 불안해할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물론 한생이 용궁을 두루 구경하지만 “다 볼 수는 없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다른 세계’임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돌아가려 해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안내자’가 있어서 안전하게 원하는 곳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용궁이란 다른 세계지만, 안내자가 있는 세계고, 인간화된 왕과 신하들의 호의에 의해 구성된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인간의 눈으로 포착하고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반면 구미호가 사는 세계는 이와 근본적으로 다른 세계입니다. 구미호에게는 ‘세계가 없습니다’. 구미호는 대개 홀로, 혹은 한 둘의 시종을 데리고 등장합니다. 드물게 <왕수재전>처럼 구미호가 변신한 다른 인물들을 동반하는 경우에도, 이들은 ‘용궁’이나 천계와 같은 ‘세계’를 갖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미호는 언제나 고립된 존재입니다. 세계를 갖지 않는다 함은, 구미호의 행동이나 행적을 포착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어떤 안정적인 틀을 갖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구미호는 언제 어디로 튈지 알 수 없고, 어디서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구미호는 인간의 눈에 들어왔어도 사실상 눈 바깥에 있는 존재고 인간의 예측이나 예상을 벗어난 존재입니다. 공포와 불안의 대상인 것입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다가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는 존재입니다. 어떤 서사에서도 구미호가 용왕처럼 시문을 짓고 상량문을 부탁하는 식의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개 ‘어둠’으로 묘사되는 알 수 없는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다가와, 인간을 ‘홀리는’, 다시 말해 인간의 것이 아닌 감각이나 관념으로 인간을 사로잡는 두려운 존재인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세계의 바깥으로부터 인간계 안으로 침투하려는 자들이고, 동물적 힘에 의해 인간세계의 질서를 교란하려는 자들입니다. 구미호에 대한 이런 식의 태도는 그런 존재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의 표현이고, 구미호의 능력에 대한 묘사는 그런 것들이 갖는 능력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왕수재전>라는 작품이 탁월한 것은, 보통은 두려움과 불안을 억지로 감추기 위해 흔히 저급하고 대단하지는 않은 것으로 묘사되는 구미호의 능력을, 더 없이 강력한 것으로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세계의 것과는 다른 청아한 음악, “귀신이 되었다간 인간이 되고, 바람을 부르고 비를 내리게 하며 앞에 있는가 싶으면 어느새 뒤에 가 있는” 능력, 왕수재로 하여금 활을 쏠 수 없게 만든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과 달처럼 고운 자태,...위엄있는 의장(儀仗)”, 그리고 “한 번에 백 발의 화살을 쏜다 한들 한 손으로 막아낼” 능력 등등(175~177). 천년 가까이 섬에 살며 수련을 했다는 용왕 아들조차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입니다. 이는 인간의 꿈과 소망이 섞여 만들어진 최대치의 인물마저 초과하는 동물적 능력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는 자연의 능력을 뜻하는 것일 겁니다. 자신들이 알 수 없는 외부의 힘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이 만들어낸 존재일 것입니다.




요컨대 용왕의 아들이 인간화된 동물의 형태로 자연이나 동물을 포착하고 장악할 인간의 능력을 표현한다면, 구미호는 인간의 세계로 침투해 들어오는 동물의 능력을, 인간의 시야나 예측을 벗어난 동물적-자연적 변화의 능력을 표현합니다. 용왕의 아들과 구미호의 대결은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 ‘세계’와 그 외부가 뒤섞이는 지대에서 벌어지는, 상반되는 두 능력의 대결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상상과 관념이 동물의 형태를 통해 인간세계의 바깥을 향해 밀고 확장되어 가는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인간의 관념 바깥에 있는 동물이 인간의 세계 안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전자가 인간이 실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인간의 감각과 관념 안에 두려는 시도요, 통상은 적절한 자리를 할당할 수 없었던 것에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할당하려는 시도라면, 후자는 인간의 지각이나 관념이 파악/장악하지 못한 어떤 예측불가능한 것이 인간이 만들어놓은 세계 안으로 밀고 들어와 그것을 교란시키고 와해시키려는 시도를, 그런 시도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표현합니다. 용왕이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동물인 용일 뿐 아니라, 인간이 제공한 왕의 자리에 들어앉아, 수궁의 다른 동물들로 하여금 ‘제 자리 있게 만드는’ 통치자라면, 구미호란 통상의 여우와 달리 인간이 부여한 동물의 자리를 이탈한 여우, 그래서 여우이기를 중단한 여우인 것입니다.[각주:2]

 

그렇게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한 여우가 문제인 것은 그가 천 년간 살던 노인의 집을 빼앗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자면, 집이란 ‘인간이 거주하는 장소’요 인간의 ‘존재가 거하는 장소’입니다. 고향을 뜻하고 세계를 뜻합니다. 인간의 집을 빼앗으려 한다 함은 여우가 자신에게 주어지지 않은 자리를 차지하려 함입니다. ‘협박과 회유’ 없이는 왕수재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할 수 없었음에도 용왕 아들의 변신을 속임수라 하지 않고, 청아하고 고상한 음악과 함께 천변만화의 탁월한 능력을 구사하는 구미호의 변신을 속임수라고 한다면, 이는 변신술과 능력이 인간 자신을 겨눌 때에만 ‘속임수’라고 말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즉 이 ‘속임수’란 말은 인간의 눈, 인간의 지각능력을 초과한 변신술을 인간의 입장에서 평가하고 ‘비난’하는 말인 것입니다. 







  1. 하이데거는 인간이라는 세계-내-존재와 대비하여, 동물이란 '세계의-빈약함'으로, 바위 같은 사물은 '세계-없음'으로 특징짓습니다(하이데거, 2001: 325~344). 식물은 어떠한가는 접어둔다해도, 이는 사실 동물에 대한 매우 인간중심적 통념의 산물입니다. [본문으로]
  2. 푸코는 통치란 ‘사물들의 올바른 정렬’이라고 정의합니다(Foucault, 2012). 이는 랑시에르 식으로 말하면, “있어야 할 것이 제 자리에 있도록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를 랑시에르는 ‘치안’(la police)이라고 명명합니다. 반면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고, 주어지지 않은 몫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정치’(la politique)라고 봅니다(Rancière, 2008; 이진경, 2009).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려는 구미호야말로 ‘정치’를 가동시키는 ‘정치적 동물’인 셈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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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1. 두 가지 변신술


변신술은 확고하다고 믿는 형태를 와해시키고, 인간과 동물 같은 뚜렷한 범주의 경계를 넘는 기술입니다. 가령 전우치가 호랑이로 변신하는 것은 동물과 인간의 경계를 넘는 것이고, 홍길동이 분신들을 만들어 휘젓고 다니는 것은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입니다. 경계를 넘나들기에 변신은 역으로 익숙한 범주들로 이루어진 경계들을 주목하게 하고 문제화하게 합니다. 넘나드는 방식으로 경계의 이편과 저편에 있는 것들이 만나게 하고, 그것들이 맺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사실 변신술이 아니어도 고전 소설에서는 변신은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가령 <김원전>에서는 수박덩어리 같은 모습으로 태어난 아이가 열 살 때 멀쩡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연꽃 속에 들어앉은 심청 역시 일종의 변신한 존재고, <이생규장전>에서 죽은 뒤 다시 남편 앞에 나타난 최낭자 또한 변신한 존재입니다. <박씨부인전>에서 박씨부인은 나중에 끔찍하게 못 생긴 얼굴의 허물을 벗고 미인으로 변신합니다. ‘변신’이란 개념을 이런 식으로 다룬다면 사실 소설은 대부분 변신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지 모릅니다.[각주:1] 서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심신이 달라지지 않았다면 소설에서 진행된 과정은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고, 다른 이들과 접촉하여 사랑하거나 대결하면서 변신하지 않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로 다루려는 변신은 ‘합목적적’으로 사용되는 기술로서, 종종 ‘도술’이라고도 불리는 그런 변신의 기술입니다. 이는 재현적인 합리성과 과학적인 합리성을 양식으로 하는 요즘의 소설에선 그다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반면 고전 소설에선 이런 기술이 가령 『창선감의록』이나 『옥루몽』처럼, 변신술이나 도술이 소설의 중심에 있지 않는 작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고전소설의 변신에서 가장 일차적인 것은 인간과 동물, 혹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 간의 경계와 관련된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동물의 일종이기에, 역으로 어디서든 동물의 세계와 구별되는 인간의 세계의 윤곽을 뚜렷하게 그려내고자 합니다. 그 경계를 침범하는 것들에 대한 우려와 근심 속에서, 그걸 흐리고 침투하는 것들을 밀쳐내고 배제하고자 합니다. 이는 변신능력에 대한 부정적 서술로 표현됩니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그런 변신능력에 대한 선망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빌어 고정된 벽이나 담을, 경계선을 넘기를 욕망합니다. 그런 점에서 변신능력이란 두려움과 선망, 거부감과 매혹의 상반되는 감응을 동반합니다. 




변신은 경계를 흐린다. 

인간이 동물이 되거나(늑대인간), 동물이 인간이 되거나(구미호). 후자의 변신은 통상 제압의 대상이 된다.

사진 출처: By 미상 - From cyberx.liful.com,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703028

사진출처(울프맨):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50682



변신술이나 도술은 인간의 통상적인 힘을 넘어선 능력이기에 다른 인간들을 능가하는 자리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동물이 아니라는 확인 위에서, 동물적 힘을 제압하여 인간계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게 저지할 수 있는 통제력을 확보한 위에서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변신술을 쓰는 인간은 무엇보다 변신술을 쓰는 동물과 겨루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승리함으로써 평범한 인간들 위에 서게 됩니다. 그런 능력을 자신의 손 안에 장악한 자는 인간세계의 통치자가 됩니다.


그러나 통치자 자신이 변신술을 사용하면, 그의 위치 자체가 불안정해집니다. 동물인지 인간인지, 이 사람인지 저 사람인지 단일하게 확정될 수 없다면, ‘질서’를 만들고 유지하는 통치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동물적 변신술을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강력한 변신능력을 가진 자를 휘하에 거느리게 됩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유지하면서 또한 그것을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인간세계를 통치하는 권력은, ‘정상상태’를 형성하는 그 경계선을 확고하게 유지하면서 동시에 자신만은 그것을 넘나들 수 잇는 ‘예외상태’ 속에 있습니다. 정상상태를 규정하는 예외상태인 셈입니다. 아감벤이라면 여기서 다시 ‘주권’의 본질을 보려할 지도 모릅니다.[각주:2] 변신술을 정치학적 주권의 개념에 직접 연결한다면 지나친 확대해석이 되겠지만, 그것이 정상과 예외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경계선 상에 있으며, 동물세계 및 인간세계에 대한 통치자가 출현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음은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하겠습니다. 많은 건국신화들이 동물과 인간이 섞이는 곳을 발생지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신술이 인간과 동물의 경계에서 출현하는 한, 그것은 인간만의 독점물이 될 순 없습니다. 변신하는 동물이 없다면, 그를 제압하는 권력자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것은 인간세계를 위협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가령 흔히 등장하는 ‘구미호’는 인간의 통제와 반대의 방향에서 오는 이 힘을 표상하는 존재입니다. 거기서 인간은 구미호와 대결해야 하고 그를 제압해 이겨내야 합니다. 통치자 아닌 이가 사용하는 변신술이 종종 통치자를 위협하는 어떤 힘으로 사용되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전우치도, 홍길동도 그랬습니다. 변신능력을 갖춘 전우치가 가장 먼저 그걸 써먹는 것은 임금에게였습니다. 홍길동의 변신능력이 겨낭했던 일관된 상대도 임금이었습니다. 변신능력으로 군주를 농락했던 홍길동은, 결국 다른 지역을 찾아가 스스로 군주가 됩니다. 반면 전우치는 통치자의 이념을 대변하는 인물인 서화담에 의해 포획되고 깊은 산중으로 유폐됩니다. 이는 홍길동의 변신술이 인간적인 것이었다면, 전우치의 그것은 동물적이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상반되는 성격의 변신술이 있음을 우선 강조해야 합니다. 통치자의 수중에 들어간 변신술과 통치자를 위협하는 변신술, 그것은 또한 인간의 세계 안에 있는 변신술과 그것을 교란하는 변신술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변신술, 특히 동물과 인간이 ‘섞이는’ 양상의 변신술은, 인간과 인간 아닌 것의 경계지점에서 양자의 관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고리를 함축합니다. 이는 인간 세계의 이런저런 양상들을 다루기 이전에, 인간세계와 그것의 외부를 분리하는 구획선을 그리는 문제입니다. 인간의 세계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기 전에, 변신술을 다루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변신의 문제는 인간세계의 발생적 ‘기원’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변신술은 이후 다른 경계선 상에서 작동하는 경우에도, 이 발생적 기원과 관계됩니다. 이러한 기원에서 멀어지면서, 변신술은 점차 동물적 성격을 벗어나게 됩니다. 『박씨부인전』은 그런 동물적 기원이 완전히 사라진 ‘도술’을 사용합니다. 국가적 성격의 도술입니다. 이는 그 변신술이나 ‘도술’의 의미나 위상을 동물과 인간의 경계선으로부터의 거리를 통해 측정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2. 용와 구미호는 무엇을 두고 싸우나?: <왕수재전>


변신이란 자기와 다른 것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이 됨으로써 자기와 다른 것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것입니다. 경계를 넘어섬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이탈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확고하다고 보이던 세계에 생각하지 못한 변화의 선을 그리는 것이고, 그렇기에 그것은 그런 경계선에 의해 만들어진 구별을 흐리는 것이고, 그런 구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인간의 지각을 흐려놓고 혼동시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변신은 종종 ‘속임수’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구미호가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은 고전 소설이나 설화, 민담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소재인데, 대부분 인간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홍길동이 체포를 피하기 위해 변신을 하는 것도, 전우치가 임금 앞에서 신선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황금기둥을 준비하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구미호는 어떨까요? 구미호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변신 동물입니다. 그의 변신은 대개, 아니 언제나 인간을 속이기 위한 것으로 간주됩니다. 구미호는 변신의 위험을 알려주기 위해 불러내어지는 동물입니다. 숲속에서 아름다운 여인과 만났다면, 일단 조심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음식을 얻어먹든, 같이 사랑을 나누든, 대개 결말은 구미호라는 정체가 드러나는 것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그의 변신술은 언제나 인간을 속이려는 목적으로 갖고 있다고 간주됩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구미호와 용왕의 아들 간의 장대한 대결을 다루는 <왕수재전>은[각주:3] 인간과 동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변신술, 그런 변신술이 놓여 있는 경계지대에서 벌어지는 일을 다루는데 아주 좋은 텍스트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왕수재는 고려 왕조를 세운 왕건의 아버지라고 합니다(‘수재’는 이름이 아니라 결혼하지 않은 남자를 높여 부르는 일반명사입니다. 이생, 허생 하듯이 ‘왕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내용이 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요약하고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후삼국시대 마한(후백제)에서 태어난 왕수재는 어려서부터 힘도 좋고 영웅의 기상이 있었는 인물이었는데, 특히 활을 잘 쏘았습니다. 남경에 파견할 외교사절단에 자천하여 들어가는데, 가던 중 바다에서 배가 움직이지 않았고 그 때문에 인근의 섬에 버려집니다. 왕수재는 자신을 섬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배를 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서해 용왕의 아들을 자처하는 노인을 만납니다. 그 섬에서 산 것만 천년이 넘었다는 노인은 하늘에 오를 날이 몇 년 남았건만 3천년을 묵은 구미호가 자기 집을 빼앗으려 합니다. 그와 닷새째 싸우고 있지만 물리치지 못했고, 싸움이 너무 힘들어 수재의 활솜씨를 빌기 위해 불러들였다는 것입니다. 구미호와 싸우는 도중에 부탁대로 활을 쏘려 하지만, 구미호 주변의 음악이 너무 청아하고 모습은 너무 아름답고 고귀하여 활을 쏘지 못합니다. 안 쏘면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노인의 협박과 딸을 주겠다는 회유에, 둘이 다시 싸우는 사이에 부탁대로 활을 쏘아 구미호를 죽입니다. 그 딸을 데리고 노인이 준 검은 소를 타고 육지에 돌아온 그는, 농사든 장사든 모두 잘 되어 부자가 되며 ‘나라의 주인이 될 거’라는 아들을 낳습니다. 딸을 하나 더 낳지만, 그 뒤론 아내의 모습이 초췌해지고 몸이 약해집니다. 이유를 묻자 아내는 자신이 원래 “용의 자손이기 때문에 때때로 변신하여 기운을 펼쳐야 하는데, 낭군을 따라 나온 뒤론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요. 그게 병이 되어 죽을 날이 임박했으니 슬프기 그지없”다고 말합니다(184). 하여, 변신한 모습으로 있으라고 하니, 부부간에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며, 평소엔 변신한 상태로 있을 수 있도록 출입할 때 먼저 알려주고 들어오라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급한 일로 알리지 않은 채 들어갑니다. 황룡으로 변신해 있던 모습을 본 왕수재는 기겁을 했고, 이후 정이 사라져 멀리하게 됩니다. 변신한 모습에 겁을 먹어 정이 사라졌음을 안 아내는 딸을 데리고 황룡으로 변신하여 떠났고, 아들은 남아서 고려의 태조가 됩니다.



일본의 백면금모구미호. 구미호는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과 중국의 설화에도 등장한다. 통상 부정적인 이미지가 많다. 사진출처: By Katsushika Hokusai (葛飾北斎) - scanned from ISBN 4-3360-4636-0., 퍼블릭 도메인,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4257326



앞서 구미호의 변신술이 속임수인가 질문하며 시작했었지요? 구미호와 싸고 있는 노인은 그 섬에서 천년을 넘게 살았으며, 수행을 하여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지만, 그 노인은 자신의 집을 빼앗으러 오는 구미호가 힘에 버거워 왕수재의 도움을 청합니다. 그런데 구름을 타고 온, 인간으로 변신한 구미호에게 화살을 쏘려 하자, 그냥은 “한 번에 백 발의 화살을 쏜다한들 한 손으로 다 막아낼 테니 소용없”다고 저지합니다(<왕수재전>, 『낯선 세계로의 여행』, 176). 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더욱이 눈속임을 하며 피하는 게 아니라, 백발의 화살을 한 손으로 막아내는 것이니, 이를 두고 속임수라 할 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구미호의 변신은 인간을 속이려는 것으로 언제나 간주됩니다.


용왕의 아들인 노인의 변신은 어떨까요? 그나 그 노인의 딸이 인간으로 변신한 채 등장하지만, 이를 두고 ‘인간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왕수재는 그 딸과 결혼하여 애까지 낳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 딸은 용으로 변신을 하지 못해서 병이 난다고 말하며, 왕수재가 없을 때는 용의 모습으로 삽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평소에 인간 아닌 것이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고 있음을 뜻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속임수라 하지 않습니다. 이 불공평해 보이는 차이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 작품에서 구미호의 도술은 인간세계와는 다른, 선계의 고귀한 감응을 동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청아한 것이 인간 세계의 음악과는 달랐다.”(<왕수재전>, 175) 용왕 아들을 자처하는 노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왕수재가 감히 활을 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속임수의 느낌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일 것입니다. 왜 쏘지 않았느냐는 노인의 말에 왕수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 얼굴을 보니 이는 사람이지 결코 여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178) 이 말에 노인은 “내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살아 돌아가지 못할 거”라며 한편으론 협박하고, 다른 한편으론 자기 딸을 아내로 삼게 해 주겠다며 회유합니다(178). 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입니까!


아무 인간이나 변신하는 게 아니듯, 아무 여우나 변신하는 게 아닙니다. 그럴 능력이 있는 여우만이 변신합니다. 변신하는 구미호, 그는 대단히 탁월한 능력을 가진 존재인 것입니다. 변신은 애초의 모습을 바꾸는 것이기에, 쉽게 속임수와 혼동됩니다. 그러나 변신 자체가 속임수는 아닙니다. 속이려는 목적이 있는 변신만을 속임수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속임수란 변신 자체에 속하는 게 아니라 변신의 특정한 ‘목적’에 속한다고 해야 합니다. 용왕 아들의 집을 뺏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하고 나타나는 구미호는 용왕 아들을 속인 게 아니며, 속이려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용왕 아들은 구미호의 ‘정체’를 알고 있으며, 그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구미호 역시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노인과 싸우기 위해, 싸워서 집을 빼앗기 위해 그에 유리한 모습으로, 혹은 그 집에 어울리는 멋진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가오는 것입니다. 


심지어 속이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을 때조차도 변신은 단지 속임수만은 아닙니다. 신체를 바꾸는 것은 능력입니다. 경계를 넘어서는 능력이고, 다른 신체로 자신을 변용시키는 능력입니다. 변신이란 멀쩡한 얼굴을 거짓 가면으로 가리는 게 아니라, 얼굴 자체를 바꾸고 신체 자체를 바꾸는 것입니다. 니체가 “가면이 바로 얼굴”이라고 할 때의 그 가면이고, 그 얼굴입니다. 상황과 조건에 따라 필요한 얼굴을 만드는 것이 변신입니다. 속임수란 그 능력이 사용되는 특정한 경우를 지칭할 뿐입니다. 가면 뒤에 얼굴이 있다고 해도, 그 얼굴은 가면 쓰기 이전의 얼굴이 아니며, 변신의 가면을 만들지 못하던 때의 그 얼굴이 아닙니다. 


고전소설에서 변신술은 도술의 일종으로 다루어집니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은 그런 도술을 사용하는 특별한 능력자를 전면에 내세워, 행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을 그 도술을 이용해 행하고 말합니다. 약간 다른 양상의 도술이지만, <박씨부인전> 역시 그런 특별한 능력을 사용하는 인물이 주인공입니다. 도술이 단지 변신술만 지칭하지는 않습니다. 천문을 읽는 기술, 점을 치고 부적을 사용하는 도술, 비와 바람을 부르는 기술, 귀신을 부르거나 물리치는 기술은 고전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도술입니다. 그것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특별한 능력의 사용입니다. 






  1. 이상일(1994)이나 최성욱(1994)은 변신의 범위를 정신적 변화까지 포함시키는데, 문학작품이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사람이 변하는 것을 다루는 것인 한, 변신 아닌 것이 없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변신이란 개념이 어떤 현상을 특정할 수 없는 것이 되어 무효화됩니다. [본문으로]
  2. 칼 슈미트는 주권이란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권리라고 정의하는데(Schmitt, 2010), 이를 따라 아감벤은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통해 정상상태를 규정하고 유지하는 자라고 말합니다(Agamben, 2008). [본문으로]
  3. 정확한 제목은 <왕수재취득용녀설(王秀才娶得龍女設)>입니다. 이하에서 <왕수재전>를 비롯한 한문소설은 박희병이 교감하여 정본화한 작업(박희병, 2007)에 기초하여, 박희병·정길수가 편역하여 돌베개에서 출간한 번역본을 사용하며, 그 번역본에 없는 것에 한해 다른 번역본을 이용하겠습니다. 교감된 작품의 한문원문은 박희병의 『한국한문소설 교합구해』(소명출판, 2007, 제2판)에 실려 있고, 번역된 작품의 인용은 뒤에 참고문헌에 표시된 책의 쪽수로 표시합니다. 이 번역본에 없는 것은 별도의 주로 표시하겠습니다. 번역본에는 제목이 <왕수재>로 되어있으나, 전(傳)의 형식을 취한 소설이기에 이름인 ‘왕수재’와 구별하기 위해, 다른 작품들을 명명하는 방식을 따라 <왕수재전>이라고 표시하겠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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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1장 심청전과 ‘반인륜적’ 독서





이진경






4. 심청전의 ‘반인륜적’ 윤리학



집, 고향, 아버지가 있는 곳, 그리고 하늘마저 감동시킨 효행의 공덕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이는 <심청전>의 해석에서 어쩌면 가장 결정적인 지점이라고 해야 할 지도 모릅니다. 이는 <심청전>이 효에 대한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차라리 그에 대해 역설적인 방식으로 비판한 텍스트라고 하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은 지점이기도 합니다. 심연 속에서 다른 세계로 들어간 심청은, 지상에 올라와서도 집이 아닌 다른 세계로 갑니다. 그리고 알다시피 나중에 황후가 되어 아버지를, 맹인들을 집밖으로 불러냅니다. 무언가에 눈먼 모든 이들을 집으로부터, 고향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듭니다. 


이건 대단히 중요하기에 강조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심청이 벌인 맹인잔치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과 반대로 아버지를, 맹인들, 눈먼 자들을 집으로부터 밖으로 불러냅니다. ‘집’이라는 말로 표상되는 익숙한 관념이나 양식, 익숙한 도덕과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강력한 탈영토화의 벡터를 가동시킵니다. ‘맹인잔치’로 표상되는 그 힘에 이끌려가면서 심봉사는 심청을 보낸 뒤 같이 살던 아내(뺑덕)을 잃고 입고 있던 옷마저 잃어버립니다. 벌거벗은 알몸이 됩니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선 이전 세계에 속했던 것들을 이처럼 떠나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탈영토화의 흐름을 타고서 눈먼 아비는 ‘눈을 뜹니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다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더불어 잔치에 참가한 맹인들이, 전국의 모든 맹인들이 눈을 뜹니다. 무명의 세계에서 벗어나 눈을 뜨는 것이고, 다른 삶이 시작될 것입니다. 돌이켜 말하면, 바로 이러한 사건이 심청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던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귀향하지 않았던 행위의 또 다른 의미입니다.


집이나 가족이 누구에게나 익숙한 곳이며 익숙한 양식과 규범이 지배하는 세계라면, 그로부터 떠나는 것은 단지 익숙한 공간에서 떠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양식과 규범에서 이탈하는 것, 다른 세계를 향해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어떤 인물이 집으로 되돌아가는지, 혹은 집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는지, 대체 어디로 가는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가 어떤 식으로 떠나며 어떤 식으로 되돌아가는지를 보는 것은 작품이 무엇과 대결하며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를 가늠하는데 없어선 안될 요인입니다. 더구나 양식이나 통념과 대결하며 다른 세계를 향해 가는 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를 추적하려는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단순한 서사의 진행과는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익숙한 집을 떠나 길을 찾아가는 일은, 내가 당연히 여긴 여러 생각과 관습, 예를 들어 효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일이다.(사진 출처: http://magdeleine.co/photo-by-jared-erondu-n-406/)



연꽃 속의 심청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집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눈먼 아버지가 있는 곳, 효라는 눈먼 도덕이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눈먼 아버지와 눈먼 도덕을 따라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눈 먼’ 삶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게 하는 대신 심청은 어버지를 그 집에서 불러내고 맹인들, 즉 눈먼 삶을 사는 모든 이를 집이라는 익숙하지만 작은 세계에서 불러냅니다. 낯설지만 넓은 세계로 불러냅니다. 그리고 눈먼 삶에서 눈 뜨게 합니다. <심청전>이 효에 대한 텍스트라면, 눈먼 부모와 도덕에 순종하는 눈먼 삶이 아니라, 그들을 집 바깥의 넓은 세계로 불러내 눈 뜨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임을 설파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상에서 다룬 몇 가지 지점을 볼 때, <심청전>은 통상적으로 이해되듯이 목숨을 건 효를 설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의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효라는 도덕적 명령에 대한 지나친 복종을 통해 그 명령 자체를 당혹 속으로 모는 역설적 비판의 텍스트고, 효로 되돌아가지 않는 비인칭적 죽음을 통해, 거기서 열리는 다른 잠재성의 세계로 나아가는 텍스트요, 그럼으로써 아버지나 맹인들, 눈먼(맹목적, 무조건적!) 도덕적 명령을 ‘집’에서 벗어나 밖으로, 다른 넓은 세계로 끌어내는 텍스트입니다. 그런 점에서 <심청전>은 효라는 잘 알려진 ‘답’을 엽기적 사례를 통해 설파하고 강권하는 텍스트가 아니라, 효이기를 중단한 효, 집 밖으로 끌려나간 효를 통해 효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텍스트라고 할 것입니다. 효에 대한 다른 관념을 제안하는 텍스트라고 해야 할 겁니다. 


<심청전>이 이처럼 효로 표상되는 것과는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작품이라고 한다면, 삼강오륜으로 표상되는 도덕과 규범을 다룬 것으로 읽히는 다른 소설들은 어떨까요? ‘윤리적 이념의 소설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를 명시하는 <심청전>이 이러하다면, 근대 이전이 많은 고전 소설들 또한 표면에 드러나는 것과 달리 윤리적 이념을 등진 것일 수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대개의 작품은 윤리적 극과 그 반대극의 중간에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윤리적 극을 향해 읽은 독해는 이미 충분한 반면, 반대의 극을 향해 읽는 것은 아직도 흔하지 않다고 해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일부러라도 더 이상의 ‘해석’조차 필요한지 의문인 윤리적 독해와는 반대방향을 향해 읽는 독해의 시도가 필요한 게 아닐까요? 작품 안에서 표명되고 있는 윤리적 이념에 매몰되지 않고 읽을 수 있다면, 우리는 많은 소설들이 자신이 표명하고 있는 윤리적 이념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반박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윤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분명한 건, 가능한 한 이들 텍스트를 ‘인륜’이라고 불리던 당시의 도덕적 양식(良識)이나 그 주변을 맴도는 우리의 통념에 반하여 밀고 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윤리’라고 한다면, 차라리 다른 종류의 윤리를 향해 밀고 가야 합니다. 윤리에 쩐 것으로 보이는 고전 소설을 읽는 이런 방식의 독해를 ‘반인륜적 독해’라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위해 자식이 살을 베고 목숨을 바칠 걸 요구하는 게 ‘인륜’이고, 남편이 죽으면 여성에게 따라 죽을 걸 은근히 요구하는 그런 게 ‘인륜’이라면, 정말 필요한 것은 그런 ‘인륜’에 반하는 ‘반인륜적 독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식의 ‘인륜’에 반하여 정녕 ‘좋은 삶’을 만들어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윤리’--제일 앞의 주에서 말했던, ‘도덕’과 구별되는 것으로서의 ‘윤리’--를 사유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부분의 작품들을 시작하면서 이미 결론짓고 있는 게 그런 ‘인륜’이라면 고전소설에 접혀들어가 있는 잠재성을 여러 방향으로 펼치기 위해서라도 그런 ‘인륜’에 반하는 독해가 정말 필요하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 저는 기꺼이 그 ‘반인륜적 독해’라는 말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그런 방향으로 작품들을 읽어나가고 싶습니다. 그것은 통념화된 뻔한 독서, 그렇기에 시험이나 의무감 아니면 읽을 생각이 나지 않게 만드는 독서 대신, 수많은 이본마저 찾아서 다시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독서가 시작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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