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의 존재론

이진경, 불교를 철학하다』, 휴, 2016

 

 

최유미/수유너머 N 회원

 

 

 

 

 

 

 

 

 

 

내가 불교와 처음 만난 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이었다. 60세에 말기 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붓을 들어 반야심경을 쓰면서 마음을 다스리셨고, 우리들에게는 성철스님의 유명한 공안 진공묘유(眞空妙有)”를 한 장씩 써 주셨다. 그 덕에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읽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헛되고도 헛되도다로 읽었기에 산 자를 위한 철학은 아니지 싶었다. 그렇지만 느닷없이 닥쳐온 죽음 앞에서도 아버지가 비교적 담담하셨던 건 순전히 불교 덕분이라 생각했기에 나는 불교에 어느 정도는 고마움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공부해 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아무래도 윤회니 해탈이니 하는 개념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전생에 지은 업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고, 현생의 업에 따라 미래가 결정되다니.. 틀림없이 뭔가 야로가 있을 거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진경의 새 책, “불교를 철학하다는 나처럼 창밖에서 힐끗 안을 들여다보고 막연하게 불교에 대한 상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 무상, 인과, 보시, 윤회 등의 25개의 불교 개념을 제대로 생각하게 해 주는 책이다. 무엇보다 불교를 허무주의로 읽은 나의 오독을 바로 잡아 주었다. 덕분에 아버지가 써주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책의 미덕은 자칫 고원(高遠)해지기 쉬운 불교 개념들이 이진경과 만난 덕분에 과학, 현대철학, 문학, 예술이 침윤한 싱싱한 모습으로 다가오는데 있다. 책 표지 역시 ‘21세기 불교를 위한 하나의 초상이라는 부제답게 로봇신체를 한 부처가 연꽃 비행선을 타고 있는 그림이 실려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단지 21세기의 기술문명을 표상하는 것만은 아닌 듯싶다.

 

책 표지를 보고 나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렸다. 언젠가 이진경이 이 영화에 꽂혀서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렸던 기억이 있어서인 것 같다.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천공에 건설된 파라다이스다. 700년간이나 대지를 탈주해 있던 천공의 파라다이스 라퓨타는 다시 대지를 장악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사로잡히고, 주인공들은 자신들도 죽게 됨에도 불구하고 라퓨타에 멸망의 주문을 건다. 영화의 마지막은 그 라퓨타가 대지를 향해서 무너져 내리는 장면인데, 이때 인간의 욕망과 무관한 라퓨타의 동물, 식물, 로봇들은 천공을 향해 부상한다. 이미 라퓨타는 대지를 벗어나 있었지만, 그 탈영토화는 철저하지 않았다. 이들은 대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탈영토화를 감행하는 것이다. 책표지의 부처는 인간의 신체를 탈영토화하고, 대지로부터 자신의 뿌리를 뽑아버린 연꽃 비행선을 타고 다시 탈주를 감행한다.

 

이 책이 보여주는 불교의 초상은 이런 탈영토화를 존재론으로 밀어붙인 모습이다. 이진경이 불교를 통해 펼치는 존재론은 존재자를 탈영토화 한다. 존재자를 탈영토화한 존재. 이 책에서 존재, 있음 그 자체의 존재론이 중도(中道), (), (), 그리고 십이연기(十二緣起)의 개념들을 빌어서 펼쳐진다. 이진경은 전작인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에서 보다 있음그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이진경이 자신의 존재론을 선보이게 될 날이 머지않았음을 이 책으로부터 예감하게 된다.

 

그나저나 유물론자가 분명한 이진경이 윤회나 해탈 같은 개념을 어떻게 독해했을까? 아버지 49제를 주관하신 스님은 아버지가 중음신이 되지 않도록 그리고 부디 인간의 몸으로 환생하도록 기도한다고 했다. 나는 그때 속으로 인간으로 환생한들 그가 이전의 내 아버지와 어떤 같은 점이 있을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불교는 무아(無我)”말하면서, 또 아()를 그대로 유지한 다음 생을 말하는 셈이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아닌가?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그를 누구로 불러야 할까? 이진경은 보르헤스의 죽지 않는 사람들을 들어 윤회의 시간을 관통하는 것은 수많은 삶, 그 '모든 사람'이 될 수 있는 아무도 아닌 자만이 있을 뿐이다"(217)라고 .. 윤회는 “‘무아생명이라고 불리는 것이 더 적절한 어떤 힘의 영원한 흐름이다”(218)라는 파격적인 해석을 내어 놓는다. 윤회하는 것은 존재이지 존재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 하나 이 책을 읽는 재미는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선승들의 선문답을 조금이나마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준다는 점이다. 나는 벽암록은 아예 펼쳐들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선불교의 기초적인 공안집이라는 무문관에서 한차례 좌절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화두를 끝까지 밀어붙이고는 말해보라! 말해보라!”고 윽박지르는 선승들의 다그침 통에 나도 덩달아 숨이 막힐 것 같아서 책을 덮고 말았었다. 이진경의 이 책은 그것을 다시 펼쳐보게 꼬드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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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시 한번 마르크스

- 이시카와 야스히로,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나름북스)





전 주 희 / 수유너머N 회원




이렇게까지 귀여워도 되나싶다. 그래도 맑스인데. 심지어 베이비 핑크의 맑스라니. 





책의 뒷면을 보는 순간 숨이 턱 멎었다. 아... 난생처음 보는 맑스의 뒤태라니! 

(저 엉덩이 어쩔거냐. 김보통 작가는 책임져라.)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수없이 쏟아지는 맑스 입문서 중에서도 극강의 귀여움으로 독자들을 몸서리치게 만든다. 평생 저런 맑스를 본 적이 없다. 정말 이렇게까지 유혹해야해? 라고 묻고 싶을 정도다. 그런데 저자는 '그렇다'라고 대답할 거 같다.  

저자는 ‘부드러운 마르크스 입문서’를 내걸었다. 맑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맑스가 뭐에요?’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을 소개했다. 그렇구나. 세상에는 맑스를 아는 사람과 맑스를 모르는 사람 혹은 맑스를 좋아하는 사람과 맑스에 적대적인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 ‘맑스가 뭐냐?’라고 묻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한 번도 그렇게 물은 적이 없다. 난 처음부터 맑스가 싫었다. 지겨우리만치 푸르던 대학교정의 잔디밭이 권태로워 미치기 일보직전일 때, 잔디밭 대신 맑스가 싫었다. 대체 언제부터 싫었을까? 고등학생 때 종로에서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철거민들하고 학생들을 쫓아 영화관 골목까지 쫓아온 백골단들의 살기보다 학생들과 철거민들의 그 눈빛이 더 싫었을 때부터였나? 아니면 중학생 때 나와 자주 어울려 장구와 꽹과리를 치고 놀았던 선생님들이 죄다 전교조 선생님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나? 한달, 두달이 넘게 단식을 하고도 교단에서 머리끄댕이를 잡힌채 기어이 쫓겨나 미처 챙기지도 못해 그들의 책장에 그대로 박혀있었던 ‘그 책’ 때문이었을까?

하여간 학교다니는 내내 맑스가 싫었다. 그리고 선배들은 집요하리만치 내게 맑스를 읽게 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딱히 ‘처음’이랄게 없는 맑스와의 지리한 만남들이 있었던 것이다. 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이십대 내내 맑스가 싫을수록 까뮈가 부러웠다. 알베르 까뮈는 자신을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든 한권의 책에 대하여, 세계적인 작가가 된 후에 서문을 남겼다. 그의 영원한 스승인 장 그르니에의 <섬>에 대해, 까뮈는 강렬하게 체험한 자신의 '처음'에 대해 고백했다. 





한 인간이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얻는 위대한 계시란 매우 드문 것이어서 기껏해야 한 두 번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계시는 행운처럼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는다.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그와 비슷한 계시를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길거리에서 이 조그만 책을 열어본 후 겨우 그 처음 몇 줄을 읽다 말고는 다시 접어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마침내 아무도 없는 곳에 가서 정신없이 읽기 위하여 나의 방에까지 한걸음에 달려가던 그날 저녁으로 나는 되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알베르 까뮈, 장 그르니에의 <섬>에 부쳐.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는 까뮈가 부러워 미치겠다. 나는 왜 온 우주에 심사가 뒤틀려 이십대를 보냈던가. 또 회한에 사무쳐 사십대에 이런 글을 쓰고 있나. 

대신에 나는 맑스를 나와 함께 읽었던 사람들의 푸르던 눈빛들을 기억할 따름이다. 어느 철도 노동자는 <자본>을 읽고서 맑스를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고마운 사람이라니. 나는 맑스보다도 그 철도노동자를 보기 위해 <자본>을 읽는 자리에 꼬박꼬박 나갔다. 그러니까 살려는 열정, 알려는 열정에 북받쳐 <자본>의 한 귀퉁이를 씹어먹을 듯이 노려보던 그가 좋았고, 부러웠던 것이다. 

베이비 핑크로 무장한 맑스 앞에서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 내는 건 순전히 저자의 한국어 서문 때문이다. 내년에 60세가 되는 노학자는 부드러운 맑스를 소개하기 전에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를 이야기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본을 뒤흔든 시절, 저자는 맑스를 ‘평화운동’과 함께 만났다.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가 시작된 이후 40년간 축적된 새로운 맑스를 다시 읽기 위하여 저자는 자신이 청년시절 읽었던 맑스가 아니라 지금의 젊은 세대들에게 맑스를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 듯 하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위해 저자는 심지어 ‘부드러운 맑스’로 유혹하며 함께 동지가 되자고 말 건넨다. 이 책의 미덕은 심오한 통찰이나 깊이있는 분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맑스가 뭔지 모르는 사람들과 맑스를 놓고 말이 오갈 수 있는 여백이 만들어진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마르크스는 태어나서 처음’이라는 이십대 제자들과 맑스의 <자본> 1장을 읽고 나눈 대화를 싣는다. 대략 이런 식의 대화다.  



후쿠다(제자1).       ‘환원’은 무슨 의미인가요?


하토오카(제자2).   캐시백 같은 거죠?


아시카와(저자)    그렇죠. 고객 감사 세일 비슷한^^. 사전에는 ‘사물을 이전의 형태나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라고 했어요. 그렇게 보면 여기서의 환원이란 추상적 인간노동이라는 ‘사물의 형태’로 되돌리는 걸 의미하겠죠. 

    • 본문, 194쪽. 




아.. 캐시백이라니.. 한참을 웃고나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내가 왜 맑스가 싫었는지. 

맑스를 참으로 많이 알고 있었던 선배가 너무 멋져서 고백한 밤. 

“선배, 좋아해요.”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깊은 상념에 빠지더니, 나에게 그랬다. 

“세상에 사랑은 두 종류가 있지. PT적 사랑과 BG적 사랑. 넌 너의 BG적 사랑을 부끄러워 해야해.”

그놈이 그랬다. 대충 느낌으로 차인 것 같았지만 PT가 ‘프롤레타리아’의 약어고, BG가 부르주아를 뜻하는지 나중에 가서 알고 나서, 맑스가 진절머리가 났다. 이번에도 선배대신 맑스가 미웠다. 

그 시절 그 선배에게 ‘환원’을 캐시백이라고 대답했다면, 난 아마 ‘자본주의의 하수인’정도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인 아시카와 선생은 ‘붉은 맑스’를 젊은 후배들에게 전달해주는 대신, 젊은 세대들이 만나는 맑스가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도록 부드러운 여백을 만들어준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 ‘여백’이었을 것 같다. 나는 맑스를 읽어야만 하는 99가지의 이유에 질렸던 것이다. 나에게는 맑스가 나에게 말 건네주는 그 처음의 공간. ‘맑스가 머에요?’라고 묻게 만드는 시간. 그 ‘처음’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가보다. 아직도 지리하게 맑스를 읽는 나는 항상 다른 사람들의 ‘처음’을 흠모하며 질투하며 그들과 함께 읽는다. 

오늘 처음으로 이 <자본>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하며, 다시 한번, 마르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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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현상학을 한다는 것?

-이광석 외,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 그린비, 2016.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현대 기술 미디어 철학의 갈래들]은 그동안 산만하게 분산되어있던 기술, 미디어에 관한 철학자들의 담론을 보기 좋게 정리하고 소개하는 책이다. 다루고 있는 이는 질베르 시몽동, 발터 벤야민, 빌렘 플루서, 마셜 매클루언,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브뤼노 라투르, 도나 해러웨이, 주디 와이즈먼, 앤드루 핀버그 이다. 이중 상대적으로 생소한 베르나르 스티글레르를 다룬 "5장: 시간, 기억, 기술 : 베르나르 스티글레르의 기술철학(이재현)"을 살펴보자.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베르나르 스티글레르(1952~)


 스티글레르는 이력이 흥미롭다. 1952년생인 그는 학생운동의 일환으로 은행을 털다가(?) 5년간 옥살이를 했다. 복역 기간에 그는 철학 책을 탐독하며 데리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출옥 후 데리다의 제자가 되어 1992년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현재는 퐁피두센터 산하의 연구혁신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고 동시에 시골마을에 철학학교를 세워 비판적 사고 능력, 리터러시 교육도 병행하고 있다. 주저로는 [기술과 시간] 3부작이 있고 이외에도 30권의 저서가 있다. 아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다.




에피메테우스의 실수


  그가 전유하는 철학자는 크게 칸트, 후설, 하이데거, 시몽동, 데리다다. 분야로 말하자면 현상학이 되겠다. [기술과 시간] 3부작중 1권의 부제는 ‘에피메테우스의 실수’인데 에피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의 쌍둥이 동생이다.


                                     [기술과 시간 1], 부제가 '에피메테우스의 실수'이다.




 ‘먼저pro 생각하는자 metheus’란 의미의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나중에epi  생각하는 자’인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에게 줄 능력을 따로 남겨놓지 않고 모두 동물들에게 주고 만다. 이 실수로 짐승들의 위협에 처한 인간에게 형인 프로메테우스는 헤파이스토스 대장간에서 기술과 이를 만들 수 있는 불을 인간에게 가져다준다. 

 이 신화를 통해서 스티글레르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결핍된 존재이고 그래서 이를 메우기 위해 보철이 필요한 존재라고 해석한다. 데리다 식으로는 결핍의 ‘대리보충‘을 위해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을 통해 인간은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다른 계통의 진화를 겪는다. 즉 진잔트로피언에서 네안트로피언에 이르기까지는 대뇌가 발달하는 생물학적 진화를 따르다가 어느 정도 단계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의 대뇌상의 변화는 없고, 대신 기술 계통으로의 진화가 발생한다. 인간은 외재하는 인공적 기억에 의거해 진화를 이어 왔다. 이것을 ’후천계통발생‘이라고 일컫는다. 



                         -생물학적 진화가 안정기에 도달하면, 기술 계통의 진화가 시작된다-




[ 이제 우리는 인간의 대뇌 피질 진화의 종료가 삶의 일반 역사의 관점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질문해야 하며, 따라서 최초의 뗀돌조각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기술의 역사이자 인간의 역사에서 근간이 되는 ‘생명 이외의 다른 수단에 의한 삶의 진하 추구’, 이 표현은 ‘후천계통발생’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우리를 이끈다] [기술과 시간 1권], 본문에서 재인용




외재적 기억의 3가지 종류.


그는 기억이 크게 3가지 외재적 지원을 받는다고 한다. DNA, 신체, 기술이다.  DNA가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던 유전적 기억이라면 신체는 살아가면서 획득하게 되는 경험과 관련한 기억이다. 기술은 기억을 외화 시켜 영속화할 수 있게 해준다. 이 기술을 통해 인간은 기억을 DNA 말고도 후대로 전할 수 있게 됨으로써 후천계통발생적으로 진화해왔다. 그래서 스티글레르에게 기술은 인간에게 원초적인 그 무엇이다.



시간성


책 이름이 [기술과 시간]인 만큼 기술성을 시간성과 관련되는데, 그는 하이데거의 개념을 전유한다.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세계-내-존재로서 지평을 갖게 되며, ‘이미 그곳’이 주어진 존재다. ‘이미 그곳‘이란 선재하는 것으로, 세대를 거쳐 전승되는 유산이다. 내가 경험하지 않은 과거가 나의 과거가 된다. 스티글레르에게 이 과거란 바로 '외화된 기억들'로 바뀐다. 예를 들어 ’책‘ 같은.. 


                                



또한 하이데거에게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로, 죽음을 향해 미리 달려가 봄을 통해 자신의 실존론적 가능성을 깨닫는다. 이것이 스티글레르에게는 기억의 문제로 바뀐다. “죽는다는 것은 곧 모든 기억이 없어진다는 것을 뜻하므로” 죽음에 미리 달라가 본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외화하기 시작한다.(가령 책을 쓴다.) 

            -죽기 전 얼른 얼른 씁시다. -



정리해보면 ’이미 그곳‘에 있는 선재는 외화를 통해 물려받은 것이며, 이 외화는 제3기억(기술)을 통해 실현된다.(가령 펜, 종이, 타자기, 그리고 요즘은 컴퓨터). 한 마디로 스티글레르에게 현존재는 기억을 물려받고 기억을 기술을 통해 남기는 존재인 셈이다. 그에게 있어 기술은 모두 기억기술(mnemotechincs)이다. 




기억의 산업화: 개체화의 상실


 기술은 의식에는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는 후설의 개념을 빌려온다. 음악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음을 하나하나 분절해서 듣지 않고 선율로서, 곡의 진행으로서 듣는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제1파지(primary retention)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곡이 어떤 곡인지 기억해낸다. 이것이 제2파지(secondary retention), 기억, 후설의 ‘시간의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다고 스티글레르는 지적한다.


-"후설의 제1파지와 제2파지 사이에 중요한 점이 간과되고 있단 말이오.."-



 기억의 3가지 형태 즉 DNA, 신체, 기술 중 3번째 기억인 기술이 제1파지와 제2파지를 접합시킨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축음기라는 기술이 멜로디를 반복적으로 재생했기 때문에 제2파지 즉 기억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지금 현재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 내가 회상하는 것, 그리고 외화된 기억, 이 세 가지의 접합을 통해 이루어진다. p.169






-스티글레르의 제1,2,3파지가 어떤 관계인지 설명하는 도식-



 문제는 3번째 기억인 기술이 산업화되면서 발생한다. 내가 지각하고 있는 것, 내가 회상하는 것, 외화된 기억의 상호변환적 관계로서 의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화된 기억이 나머지 둘을 압도하기 시작한다. ‘기억의 초-산업화’는 넘치는 속도로 인간 의식에 자극을 가하며 오히려 인간 정신을 빈곤하게 만든다. 오직 현재의 말초적 자극 속에서 인간은 과거, 현재, 미래의 감각을 상실하고 동시에 공간감도 잃게 된다. 그는 ‘시공간적 오리엔테이션 상실’이라고 지칭한다.  왜 그가 시골에 철학학교를 세워 비판적 사고 능력의 훈련, 리터러시 교육이라는, 다분히 계몽주의적 운동에 힘쓰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스티글레르의 입장에 동의하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전통적 철학의 개념을 기술성의 맥락에서 변용시키고, 이를 통해 현대 사회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흥미롭다. 스티글레르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소개되는 대다수 학자들이 작업이 그러하다. 기존의 철학 개념을 숙지하는데 머무르지 않고 이를 통해 지금의 기술, 매체를 사유하고자 하는 이 그리고 기술, 매체 철학 전반에 대한 개략적인 상을 그리고자 하는 이에게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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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어디까지 가봤니?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민속원 아르케부스 , 2015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1.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러시아 문화와 우주철학]? 도서관에서 책을 구경하는데 신기한 제목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이 발동했고, 그 결과 이렇게 서평을 쓰게 됐다.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대체 무슨 얘기일까?

 

 


러시아 문화는 말 그대로 러시아 문화일 테니, 우주 철학에 대해서 알아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우주 철학은 우주론과 같은 뜻으로 쓰이며 천문학, 혹은 천체물리학에서 다루는 우주의 범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서 자연과학으로서의 우주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전일적 관점에서 서술하려 했던, 이론 체계를 지칭한다. 예를 들어, 우주는 기로 이루어져 있다. 혹은 세계는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져있다 식의 서술을 떠올리면 된다.

 

사실 웬만한 문화권 마다 이런 우주관이 하나씩 있지 않은가. 가까운 중국의 고대 우주관도 제대로 모르는 마당에 러시아산 우주론을 알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답은 시기에 있다. 여기서 다뤄지는 우주론은 19c후반에서 20c초반에 구성된 이론들이다. 이 시기는 이미 뉴턴 역학과 다윈의 진화론, 기본적인 천문학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시기다. 따라서 이런 시대에 우주론을 구성한다는 것은 당연히 고대의 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적 성과를 담아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그래서인지 내가 이 책에서 받은 느낌은 고대의 신비로움에 근대 과학의 차가움이 섞여있는 독특한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들이었는지 알아보자.

 



2. 니콜라이 표도로프: 자연을 개조하라! 진화를 넘어 재생으로

 

책은 크게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에서 책의 제목에 가장 잘 부합하는 핵심적인 장은 2(‘자연 철학적 우주론을 대변했던 과학자들의 사상’.)이라고 생각한다. 나머지 3,4장은 러시아의 종교철학, 신지학에서 다룬 우주론들이라 조금 거리가 있고 5,6장은 저자가 현대 문화담론, 양자물리학(봄 역학)과 러시아 우주론을 연결시킨 것이기 때문에 논의는 2장으로 국한시킨다.


2장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는 크게 3명이다. 니콜라이 표도로프, 콘스탄찐 찌올콥스키, 블라디미르 베르나드스키. 먼저 니콜라이 표도로프는 19c 중반에 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도서관, 박물관, 외무성 기록보관소에서 근무하며 거의 독학으로, 모든 분야의 학문을 공부했던 사람이다.


-니콜라이 표도로프, 사진찍기를 싫어해서 이렇게 스케치로밖에 안 남아있다능..-



 ‘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라고도 불리며 자연과학부터 인문학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던 이 만물박사는 후대의 러시아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러시아 지성계의 대부라 불린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대표적 인물들로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같은 이들이 있다.


사후 출판된 [공동 일의 철학]에서 표도로프는 실증주의를 비판한다. 실증주의는 이론과 실천을 분리시키고 인간을 그저 자연을 인식하는 존재에 머물게 한다. 중요한 것은 자연에 대해 실제적 행위를 하고 변화시키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세계의 진행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었고, 이제 인간은 이 의식을 통해 자연 진화를 조종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이론적 관조적 이성과 대비되는 실천적 이성이다. 표도로프는 재생이라는 특이한 개념으로 이를 다루는데 재생은 진화와 비교해서 이해하면 쉽다. 진화가 인간에게 있어 본능적/수동적 과정이라면, 재생은 인간의 의지적인 변혁이다. 그것은 자연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 자연 속에 인간의 의지와 이성을 주입하는 것이다. 


구체적 사례를 들어보자. 1891년 러시아에서 혹독한 가뭄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는 폭발물을 이용해 인공강우를 만드는 실험에 성공했다고 한다. 이 사건에 표도로프는 감명을 받는다. 이런 실천이야 말로 바로 온 인류가 함께 수행해야할 공동의 일이라고 그는 불렀다. 또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석탄공들의 처지를 보고서는, 앞으로 인류는 태양과 대기의 흐름에서 에너지를 직접 추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런 표도로프의 주장을 접하고선 표도로프의 자연관이 세계의 모든 에너지를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예속시킨다며 반겼다고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형제애를 발휘하여 모든 민족이 노력을 결집해야 한다.


표도로프가 '재생'이란 개념으로 전개한 사상은 그저 재생 에너지를 쓰자는 소박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태양계와 행성의 움직임까지 인간이 제어할 수 있게 되리라 예견(?)한다. 지금의 과학기술로도 엄두내지 못하는 이런 고에너지를 인간이 다룰 것이라 담대하게 말하는 이 사상가는, 인류는 진화하여 천사와 유사한 존재가 되고, 그 존재는 우주의 물질을 자신에게 필요한 것으로 변환시킬 수 있게 되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류는 우주 어느 곳에서도 살 수 있게 된다! [각주:1], 기독교에서 말하는 부활도 이제는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기술은 언젠가 부활을 실증할 수 있을 것이다.(좀비?)


자연 속에 의지와 이성을 도입하여 인간 부활의 역사를 지향하는 것. 아버지와 선조들을 과거에 묻어두고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물려받은 생명으로 아버지를 다시 부활시키는 것. 이것들을 그저 문학적 은유가 아닌 과학적 실증의 차원에서 주장하는 것이 표도로프의 독특한 지점이다.

 



3.콘스탄찐 찌올콥스키(1857~1935): “별은 뒀다 무엇에 쓰지요?”


 

표도로프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찌올콥스키는 10세 때 성홍열로 청각장애인이 되고 이후 여러 도서관을 전전하며 독학을 했던 사람이다. 홀로 물리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이 사람은 1895년 우주 비행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발표하고, 1903년에는 액체 산소를 우주 여행용 로켓의 연료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까지 기술했다. 그리고 언젠가 물리학은 공간을 단축하고 시간을 제로에 도달하게 될 방법을 찾을 것이며, 그리하여 인류의 미래는 우주에 있을 거라 예언했다. 또한 전 우주가 모두 하나의 원자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죽음은 결국 연속적인 무한성 속에 융합되는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찌올콥스키의 사상은 당시 문학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는데 특히 예브게니 엡투센코(1932~)는 실제 자기 소설에 찌올콥스키란 인물을 등장시키기도 했다. 소설 [딸기밭]에서 엡투센코는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 찌올콥스키를 등장시켜 그의 사상을 간접적으로 전달한다. 잠시 인용해보면,


찌올콥스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만약 사람들이 오늘날 적대적인 싸움에 쓰는 돈을 서로를 위하는 싸움에 쓴다면 질병뿐만 아니라 죽음 자체도 정복할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은 또한 질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바이러스를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의 먼 조상을 부활시킬 방법을 배우게 될지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소크라테스와 아침을 먹고,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과 점심식사를 하고, 푸쉬킨과 저녁밥을 먹고 싶지 않습니까?”

.... 세미라도프는 찌올콥스키에게 물었다.

대체 세상 사람들을 전부 어떻게 처치할 생각입니까? 지구는 비좁아지는데..비좁은 공간에서 지구를 구할 수 있는 건 죽음뿐이지요.”

별은 뒀다 무엇에 쓰지요?”


 

유리 가가린(1934~1968)



별은 뒀다 무엇에 쓰는가? 바로 인간이 살 공간으로 쓰인다. 우주식민지를 개척하는 것을 미래의 상으로 제시했던 찌올콥스키의 사상은 이후 러시아 우주항공공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로켓 개발을 주도했던 공학자 세르게이 코롤료프(1907~1966)는 찌올콥스키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세르게이 코룔로프(1906~1966), 소련의 수석 로켓 기술자로 스푸트니크 계획과 보스토크 계획을 담당했었다.-




4. 블라지미르 베르나드스키(1863~1945): 생명권에서 정신권으로

베르나드스키는 모스크바 대학 교수이자 지질학, 생물학 분야를 연구했던 학자이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다른 학문도 섭렵하여 후배 문인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미하일 프리슈빈(1878~1954), 안드레이 플라포노프(1899~1951)가 있다.



-블라지미르 베르나드스키(1863~1945)-



베르나드스키는 지질학적 개념을 이용해 인류 역사를 진화론적 도식으로 설명한다. 지구의 가장 안쪽부터 시작한다. 지핵, 암석권, 수권, 대기권 그리고 마지막에 생물들이 살고 있는 생명권이 존재한다. 이는 지구 안쪽을 출발점으로 한 공간적 서술이지만, 동시에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시간적 서술이기도 하다. 생명권에는 특별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의식을 통해 새로운 지질학적 변화를 일으킨다. 이 변화로 정신권이라는 또 다른 단계가 탄생한다. 인간들의 문화 에너지혹은 생화학적 문화에너지정신권이라는 층을 형성한다. 이 정신권의 개념은 1921년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있었던 앙리 베르그송 세미나를 통해서 서유럽에도 소개되었다.


생물권과 정신권을 이어주는 교량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기술권이다. 과학/기술할 때 기술말이다. 베르나드스키에 영향을 받은 안드레이 플라포노프는 자신의 소설에 기술권의 개념을 차용한다


-안드레이 플라포노프(1899~1951), 개인적으로는 플라포노프가 가장 흥미로웠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많은 경우 물질의 변용을 자유 자재로 구사하는 천재 기술자로 묘사된다. 플라포노프에게 기계는 인간이 세계를 변형시키는 도구임과 동시에 인간의 감정처럼 교감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다. 소설 [프로]에서는 여주인공 프로샤의 남편을 기술자로 설정하는데, 이 남자는 전압의 크기를 자신의 욕망처럼 느끼고, 기계 내부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기계의 고통과 저항을 감지하는 인물이다. [광폭한 광휘의 세상에서]에서 화자는 열차를 바라보며 과거 푸슈킨의 시에서 느꼈던 감동과 환희를 느끼곤 한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기관사 말쩨프는 방전으로 인해 실명을 했음에도, 기관차의 감촉을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 물론 그렇다고 플라포노프가 마냥 기술을 예찬하는 것만은 아니다. 기술이  원래 목적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될 때 디스토피아가 펼쳐진다는 것도 동시에 견지한다.

 



5. 근대적인 너무나 근대적인

물론 앞에서 소개한 사상가들의 주장이 모두 지금의 과학에 수용될 수 있다는 건 아닐 게다. 가령 현 인류가 보다 더 진화하여 나중에는 우주의 물질을 자유로이 변형할 수 있는 천사와 같은 상태에 도달하리라는 표도로프의 생각을 진지하게 검토할 과학자는 내가 알기론 없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인문학적 개념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 역시 이런 점에서 이들 사상가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연과학의 성과를 빌어 그것으로부터 세계상을 제시하는 이들의 작업이 오늘날 유행하는 통합, 통섭, 융합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러시아 우주론자들은 이른바 통섭주의자들이라는 것이다[각주:2]. 트랜스휴머니즘이란 개념이 서유럽에서는 20c중반 산발적으로 제기되어오다 20c후반이 돼서야 인정된 것보다 훨씬 이전에, 러시아에서는 19c 중반에 시작되어 발전되어 왔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트랜스휴머니즘의 원조들로부터 많은 인문학적 개념들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각주:3]


이 두 가지 주장에 대해 나는 생각이 조금 다르다. 일단 첫째로, 저자가 기대고 있는 윌슨, 최재천의 통섭이란 개념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다. ’통섭이란 개념이 다양한 학문들을 오직 과학이라는 하나의 원리로의 환원이라는, 인문학자들의 비판이 지금은 꽤 제기됐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저자의 고민은 찾아보기 힘들다. '러시아 우주론자들은 통섭의 원조다, 그래서 주목해야 한다' 식의 단순한 주장을 넘어서, 통섭 개념은 무엇인지, 그것과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의 논의가 정말 일치하는지, 다르다면 어떤 면에서 다른지 섬세한 분석이 있었으면 했다.


두 번째도 비슷한데 트랜스휴머니즘 자체의 문제다. 러시아 사상가들이 트랜스휴머니즘의 원조라고 하더라도, 트랜스휴머니즘의 전제들이 내가 보기엔 17,18세기의 계몽주의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가령 콩도르세(1743~1794)에게[각주:4] 진보란 인간 지성의 무한한 자기 완성능력에 다름 아니었고 이 역시도 역사를 단계별로 구분한다. 당연히 역사는 발전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데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미분화된 것에서 좀 더 분화된 것으로 진보한다. 그리고 사회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이질적이고 분화된 것들을 하나의 단일한 전체로, 유기적으로 통합해나간다. 또한 계몽주의자들에게 공유되는 전제는 과학, 기술에 대한 무한한 신뢰, 그것을 통해 자연이나 세계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이는 위에서 등장한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에게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부분이다.


   선형적인 시간 개념, 인간 중심적인 전제, 부분을 통합하고 동질화하는 방식으로 확장(‘우주는 하나의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되는 전체론적 관점. 이 모두가 계몽주의자들에게, 백과사전학파에게 이미 제시된 것들이다. 러시아 우주철학자들에게 독특한 점이 있다면, 이들은 이것을 적당한 수준에서 멈추지 않고 전 우주적 차원으로까지 전개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주장에서 기이한 느낌을 받는다면 근대를 넘어선 지점 때문이라기 보다는 어쩌면 너무나근대적인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1. 박영은, [러시아 문화와 우주 철학] , p.42 [본문으로]
  2. 박영은(2015), p.269 [본문으로]
  3. 박영은(2015), p.244 [본문으로]
  4. 이진경,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5장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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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3.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김충한(수유너머N회원)





1.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이언 해킹의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2014)[도대체 왜 수리철학이란 것이 있는가?]는 수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들이 순수한 연역적 추론으로 구성된 것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수학의 이론들이 응용으로 뻗어나가는 식이 아니라 거꾸로 응용분야에서 시작한 것들이 기존의 이론 속으로 삽입된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수학의 외부에서 온다는 결론을 내렸다.(지난 글 http://nomadist.tistory.com/entry/%EC%88%98%ED%95%99%EC%9D%84-%EC%88%98%ED%95%99%EC%9D%B4%EA%B2%8C-%ED%95%98%EB%8A%94-%EA%B2%83%EC%9D%80-%EB%AC%B4%EC%97%87%EC%9D%B8%EA%B0%80#)


해킹의 작업은 어떤 철학사상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태도(순수수학)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과의 상호작용이 수학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해킹의 주장에서 떠올린 것은 들뢰즈의 유목사상이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은 물론 초원에서 양떼를 치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삶의 양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각주:1]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해보면, 자본주의 안에서 그것의 공리계로부터 벗어나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도들을 이어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수학으로 이런 유목을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경제학 이론을 수학을 통해 만드는 이런 것을 뜻하는 걸까?




     +           = ?





2. 유목수학이란?


들뢰즈는 [천의 고원]이란 책에서 과학사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상이한 과학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왕립과학(royal science)이고 또 하나는 유목과학(nomadic science) 혹은 소수적 과학(minor science)이다. 우리는 유목과학의 특징을 통해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들뢰즈는 과학과 수학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같이 쓰도록 한다.)


유목과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체와 흐름의 이론을 다룬다.

둘째, 생성과 이질성의 모델을 만든다.

셋째 소용돌이형 모델을 만든다.

넷째, 문제설정적(problematic)이다.


 




유목과학은 유체와 흐름을 다룬다. 반면 왕립과학(국가과학)은 유체조차도 고체를 통해 사고하려고 한다. 유목과학은 생성과 이질성의 모델을 만들고자 하지만 국가과학은 불변의 모델을 구축하고자 한다. 유목과학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고민하지만, 국가과학은 이미 만들어진 이론들을 모아 분석하고 그것들을 공리(axiom), 정리(theorem)들로 체계화시킨다. 그래서 유목과학이 문제설정적(problematic)이라면 국가과학은 정리적(theorematic)이다.


구체적으로 들뢰즈가 제시한 예들은 아르키메데스(BC287~212), 베르누이(1654~1705)의 유체역학과 데자르그(Girard Desargues, 1591~1661)의 사영기하학이다. 그런데 첫 번째 특징인 유체와 흐름을 다룬다고 말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유목수학이라는 것은 유목적 사유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지, 수학의 특정 분야를(가령 유체) 다루는 내용으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도 기계공학과와 수학과에 종사하는 십만 유체역학 전공자들이 모두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유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인가.



        흐름 ≠  




유목수학의 첫 번째 특징으로 언급되는 흐름을 들뢰즈는 물질적 의미의 흐름으로 보고 기체와 액체를 다룬 과학을 유목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사 진의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제 책에서 제시하는 예는 아르키메데스, 베르누이의 유체역학이다. 그것은 차라리 비유나 철학적 의미의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철학적 의미에서의 흐름이란 미규정성 상태의 순수 질료적 흐름, 현실화 될 수 있는 잠재성(virtuality)의 최대치를 뜻한다. 갑자기 어려운 말들이 등장했는데 다시 써보면, 유목수학은 수학의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룬다는 말이다. 무엇의 잠재성일까? 바로 수학의 잠재성이다.



3. 잠재적 수학: 잠재성(Virtuality)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보존 법칙(conservation law)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량 보존 법칙 등. 혹시 이과였다면 각 운동량 보존 법칙도 들어봤을 테고.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너지 보존 법칙은 라이프니츠로부터, 운동량 보존 법칙은 데카르트로 부터 유래한다. 300년이 넘은 이 법칙으로부터 우리는 지금도 던진 공의 궤적을 시각화 하고, 전기 도선에 전류가 얼마나 흐르고 전압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보존 법칙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없을까?


20c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Emmy Noether,. 1882~1935)는 대칭성(symmetry)이란 개념으로 이 보존 법칙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낸다. 뇌터는 위 법칙들을 하나로 묶는 '정리'를 증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미 뇌터(Emmy Noether, 1882~1935) 

아인슈타인이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이다." 라고까지 말한 바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어떤 시스템이 연속적인 대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 대칭인 것에 대응하는, 시간 안에서 불변인(invariant) 양이 있다"


물리학에서 대칭성이란 어떤 변환하에서 보존되고 불변하는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공이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보자. 공들은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이 둘을 더하면 총 에너지가 나온다. 시간이 지나 충돌이 일어나고 공들은 과거와 다른 궤적으로 운동할 거다. 그런데, 만일 충돌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완전 탄성충돌이라고 가정하면, 총 에너지는 충돌하기 전이나 충돌 후나 같을 것이다. 이런 경우 에너지는 시간에 대해 대칭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뇌터는 아래의 수식이 운동에 대해 불변임을 증명하는데,, (일단 아래의 동영상을 먼저 보시면 쉬울 겁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CxlHLqJ9I0A






\left(\frac{\partial L}{\partial \dot{\mathbf{q}}} \cdot \dot{\mathbf{q}} - L \right) T_r - \frac{\partial L}{\partial \dot{\mathbf{q}}} \cdot \mathbf{Q}_r   = constant (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이 식을 이용해서 시간에 변화(t → t + δt)를 주면, 위 식의 좌변에 에너지 수식이 등장한다.


에너지=상수(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즉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직선 위치에 대한 변화(qk → qk + δqk )를 가하면 운동량이 등장한다. 

운동량= 상수(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즉 운동량 보존 법칙이다.

회전 위치에 대한 변화(\mathbf{r} \rightarrow \mathbf{r} + \delta\theta \mathbf{n} \times \mathbf{r}.)를 주면 각 운동량이 등장한다.이는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다. 



뇌터의 정리를 통해 이제 우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량 보존 법칙, 각 운동량 보존 법칙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된다. 


에너지 보존 법칙= 시간에 대칭인 물리량.

운동량 보존 법칙=직선 이동에 대칭인 물리량.

각 운동량 보존 법칙= 회전 이동에 대칭인 물리량.  


운동량 보존 법칙(데카르트), 에너지 보존 법칙(라이프니츠) 같은 서로 상이한 사상으로부터 유래한 법칙조차 이제 우리는, 대칭이라는 하나의 시점 속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운동량 보존법칙은 보다 근원적인 대칭성의 직선 이동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잠재성을 '경험적 사실이나 사건이 펼쳐지는 양상을 선규정하는 '초험적'(transcendental) 조건'[각주:2] 이라고 본다면, 뇌터의 정리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법칙들을 선규정하는 초험적 조건을 가시화 한다. 




에셔의 [말씀]1942

어떤 이론 물리학자들은 복수의 물리 법칙을 설명할 단 하나의 수식이 있을 거라 믿는다.  








각 보존 법칙들이 경험적인데 반해, 뇌터의 정리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마따나 정리(theorem)여서 연역적 추론을 통한 수학적 전개로 얻어진다. 초험적 조건이라고 부르는 이유 그리고 뇌터를 물리학자가 아니라 수학자로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것은 곧 수학의 잠재성이 가진 최대치를 다룬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법칙들에 머물지 않고 이를 추상화하여 보다 근원적인 잠재성의 장을 드러내는 것.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일까?


여기서 조금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흐름이란 것을 물리적 유체들의 운동 양상이 아닌 철학적 의미에서의 질료적 흐름으로 본다면, 사실 위의 예는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철학적 의미에서의 질료적 흐름은 미규정성 상태에서 무엇이든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위의 예에서 등장한 잠재성 개념은 특정한 것들(운동량, 에너지, 각운동량등)이 출현하도록 선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잠재성과 될 수 있는 것을 선규정하는 초험적 장으로서의 잠재성. 이 둘은 모두 잠재성이란 같은 말로 쓰이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다른 개념어가 필요하다.  




4. 잠재적 수학: 잠재화(Virtualization)


힌트는 이진경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그린비,2009)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들뢰즈가 구조주의의 영향하에 쓴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후에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잠재성을 구분한다(물론 [의미의 논리]에서는 확연히 구분이 안 되는 지점도 있지만)[각주:3]. 앞의 두 저작들에서는 잠재성이 선규정 되어 있어서, 그때그때 현행화되는 조건에 따라 그 구조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현실로 드러난다. 가령 수정란을 떠올려보자. 아직 소화기관, 호흡기관 같은 분화가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될 잠재성을 수정란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특정 조건들(단백질 분자)과 만나 개별 기관들로 분화가 된다. 뇌터 정리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뇌터의 정리 수식 안에 시간에 대한 변화를 조건으로 대입하면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바뀐다. 직선 위치 변화를 대입하면 운동량 법칙으로 바뀐다. 회전 위치 변화는 각 운동량 법칙으로 바뀐다. 다시 개별적 법칙들로 분화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생은 특정계열의 개념들의 발생을 함축한다. 가령 수정란에서 팔, 다리는 나올 수 있을지언정 돌덩어리가 분화될 순 없는 거고, 뇌터의 정리에서 뜬금 없이 슈뢰딩거 방정식이 나올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잠재성으로서의 알]



이와 달리 [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잠재성 개념은 선규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된다.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붉은 깃발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복잡한 사거리에서는 교통신호로 사용되지만, 치어리더 손에 들리면 응원도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시위대의 손과 만나면, 적기가 된다. 이렇게 다양한 양상들로 변이될 수 있었던 것은 깃발 안에 그런 잠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깃털로 깃발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허나, 이때의 잠재성이라는 것은 선규정 되어 있는 구조 같은 게 아니라, 접속과 계열화를 통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확인되는 것들이다. 깃발의 물리적 구조를 암만 들여다 본다한들, 혹은 수학으로 추상화 한다해도, 거기에서 응원도구라든가 적기라는 잠재성이 찾아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깃발의 잠재성은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사후적으로 규정된다. 이 과정을 기존의 잠재성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 잠재화(Virtualization)라고 명명한다.


어떤 것의 잠재화는 그것의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앞서 보았듯 깃발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잠재성이 역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깃발에 이런 용도가 있었다니...) 뿐만 아니라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무언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교통신호, 응원도구, 적기 이 뿐이겠는가. 그것이 어떤 맥락, 배치에 끼여들어가느냐에 따라 깃발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깃발은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거의 무엇이든될 수 있다. 이것이 [차이와 반복]에서 나타나는 선규정되어 있는 잠재성과 [천의 고원]에서 나타나는 잠재성(잠재화)의 차이다.




       [ 중요한 것은 배치다.]



이제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유목수학을 한다는 것은 수학이 가진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루려는 태도를 말한다.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루려는 것은, 이미 나온 결과들을 모아 추상화시켜 그것들을 선규정하는 구조를 찾고, 잠재성의 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 안에서 분화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선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재화로서 이뤄질 수 있다. 잠재화라고 하여 수학적 식들을 와해시켜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은 상태의 미규정적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잠재화라는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현행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각주:4]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끊임없이 현행화로, 구체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미' 주어진 식들을 추상화시켜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구조를 찾고, 이마저도 더 추상화시켜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미규정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식의 잠재화다. 정 반대로 상이한 배치, 맥락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문제들을 푸는 과정을 통해 기존에 주어진 식들에 새로운 것들을 덧붙여 나가고, 이 식들을 추상화시킨 관계와 구조조차 새로 등장한 수식과 개념들로 인해 다르게 규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 이것이 "초험적 장 조차 내재성의 평면위에서 결정화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던"[각주:5] 말년의 들뢰즈의 입장에 가깝지 않을까. 





에셔, [해방](1955)

 잠재성의 최대치는 추상화가 아니라 구체화로 나아가는 방향이지 않을까?


 



4. 수학의 외부: 리좀적 수학사


상이한 배치, 맥락과의 접속을 통해 만들어진 수학의 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예는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Tensegrity theory(건축물의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리에 관한 이론)이다. 어떻게 하면 강한 힘을 받아도 도형이 찌그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사실 수학자보다는 건축가, 토목공학자들의 것이다. 이 이론을 처음 제안한 이는 버스뮌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발명가, 건축가, 시인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풀러는 어떻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재료가 적게 들어가면서 튼튼한(찌그러지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지난 글에 등장한 지오데식 돔이다. 이 돔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수학과 결합(=접속)하면서 Tensegrity란 분야를 만들어내고 순수수학의 주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두 번째 예는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이다. 때는 바야흐로 17세기. 유럽의 건축에서는 바로크 건축 양식이 시작된다. 바로크 건축의 특징은 비정규곡선을 사용하고 선을 구부러뜨리는 투영기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투영의 기술을 사용해 바로크 건축 양식은 2차원 공간이 마치 3차원인 듯 비현실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돌을 비스듬히 깎아 내는 기술인 절석술]




그러기 위해선 2차원 도형들을 적절히 변환하는 계산과 돌을 비스듬히 깎아내는 기술(절석술)이 필요한데 이 가운데서 생겨난 기하학이 사영기하학이다. 물론 사영기하학은 투시법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브루넬레스키(1401~1472)때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체계적인 기하학을 만든 이는 지라르 데자르그(1591~1661)이후부터다. 건축가이자 수학에도 능했던 데자르그는 자신이 알던 기하학적 지식과 케플러의 연속성 정리, 사영이란 요소를 결합해 사영기하학이란 분야를 만든다. 사영기하학의 발명은 수학(기하학)과 그 외부적인 것(투시법, 바로크 건축)의 접속의 사례를 보여준다.




[2차원인 종이를 3차원으로 만드는 원근법처럼 공간을 구성하면 2차원상의 꽤 복잡한 증명식도 매우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사영기하학을 이용한 대표적 사례인 '데자르그의 정리']




사실 너무 생소한 데서만 찾을 필요도 없다. 지금은 수학의 핵심분야인 해석학(미적분)을 떠올려 보자. 운동하는 물체의 기술이란 물리학적 관심사 없이 수학의 내적 논리에서 어떻게 미분법이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또 통계학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진대로 통계학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이런 실천적 요구 없이 통계학이 그저 지적 유희의 결과로서 만들어 졌을리는 없다. 좀 더 최근으로 오면, 컴퓨터 과학은 어떨까?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수학 이론, 통신 상 오류를 자동으로 정정하는 코드 이론,  컴퓨터로 계산해 내는 이론에 관련한 수치 해석. 컴퓨터 보안과 관련된 암호론 등. 현대 공학기술의 집적체인 컴퓨터가 없었어도 이런 수학 이론들이 만들어졌겠는가.


 더 나아가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분야들은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기존에 있던 분야들과 결합해 또 다시 새로운 분야(미분기하학, 미분위상수학, 확률미적분학 등등)를 파생시켜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수학의 외부에서 온다는 주장은 수학사 연구를 통해 더 탄탄하게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해나가는 수목적 형상으로서의 수학사가 아닌, 다른 분야와의 접촉면에서 발생한 것들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그물처럼 얽힌 리좀적 형상으로서의 수학사.







5.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외부에 의한 사유.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 즉 수학의 잠재성을 최대로 펼치고자 함은, 수학이라 불리던 것들을 추상화하고 보이지 않던 관계와 구조를 가시화 하는것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반대로 수학이라 불리지 않던 것들과의 접속을 통해 그것은 달성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란 말이 있다. 이는 어떤 것의 내적 본성을 가정하지 않고, 이웃항과 맺고 있는 관계가 그것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부른다.[각주:6]수학에 대해 조금 바꿔서 대입해보자. 수학은 수학이다. 특정한 관계에서 그것은 사영기하학이 되고, 미적분학이 되고, 통계학이 되고, 암호론이 된다.  

수학을 모두 관통하는 어떤 내적 구조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그것이 다른 분야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복수의 수학들이 발생한다는 생각. 이 생각은 우리가 이제껏 찾아온 수학의 잠재성을 최대로 펼치고자 하는 태도, 즉 유목 수학에 해당함이 드러난다, 따라서 수학을 그것의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것은 유목과학 혹은 소수적 과학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진경, 노마디즘1, p.295 [본문으로]
  2.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25 [본문으로]
  3.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29~142 [본문으로]
  4.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30 [본문으로]
  5. 같은 책, p.142 [본문으로]
  6. 같은책, p.1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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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언해킹(Ian hacking,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4-

 





김충한(수유너머N 회원)

 






1. 수학 철학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도대체 왜 수학 철학이란 것이 있는가?]) 은 이언 해킹이 2010년부터 세계 각지의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하며 작성한 원고를 기초로 한다. 단편적인 강의원고들을 책으로 냈다 해서 짜임새가 부족할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매우 분명한 이분법적인 논리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구성은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3장은 수학과 수학철학에 대한 개괄이다. 3장에서 수학에 대한 상이한 입장 에 따라 범주를 나누는데 고대/근대, 증명/응용, 플라톤주의/반플라톤주의 가 그것들이다. 4장부터 이 구분에 맞춰 전개되며 그래서 4장의 제목은 증명. 5장은 응용. 6. 플라톤의 이름으로, 7. 반 플라톤주의 이렇게 짜임이 이루어진다. 고대는 증명, 플라톤주의, 순수수학으로 연결되고 근대는 응용, 반플라톤주의, 응용수학과 짝 지어진다고 생각하면 된다.이런 기본적인 골격위에 해킹은 특유의 간결하고 일상적인 언어로 수학 철학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일단 본격적인 내용을 소개하기에 앞서, 수학 철학을 왜 알아야 하는가? 이 사이트에 들어오시는 분들은 대부분 철학은 좋지만 수학에는 별로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그것에 대한 철학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잘 알려진 철학자들이 수학에 대해 너도나도 한 마디씩 했다는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칸트, , 러셀,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등. 서양 철학의 굵직한 사상가들은 수학에 대해 다 한 마디씩 했다. 아니 한 마디 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적 기반을 수학 위에 얹어 진행한 사람들도 있다. 왜 그랬을까? 학문 중에 가장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게 수학이었나 보다. 1+1=2를 보라. 얼마나 확실한가. 그러므로 ‘어떻게 수학은 그토록 확실한지를 생각해보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물음일 것 같다. 이런 물음에 도달했다면 이미 수학철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셈이다. 


두 번째 이유는 지금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 2007년 시작된 서브프라이 모기지 사태를 기억하는가? 파생상품이라는 이상한 걸 만들어서 세계 경제가 휘청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도대체 파생상품이 뭔지를 알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무리 신문기사를 읽고 또 읽어도, 커다란 논리는 이해가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면 꼭 등장하는 수학 공식 때문에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파생상품 설계의 기초가 된다는 Black-Scholes equation]



까짓 거 복잡하고 알고 싶지 않은데 신경 끄고 살지 뭐라고 넘기기엔 그것은 지금 우리의 삶에 너무나 큰 '실질적인' 영향을 미친다. 어떻게 수학은 종이위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에도 영향력을 행사하는가? 이런 질문도 역시 수학 철학과 관련된 전통적 문제이다. 


수학 철학은 보통 철학과에 가면 전공 분야로 존재한다. 하지만 대부분은 논리주의, 직관주의, 형식주의라는 사조에 대해 배우고, 논리주의에서 파생한 논리실증주의 흐름을 따라가는 매우 아카데믹한 분과인 듯하다. 그런데 이언 해킹의 이 책은 그런 전통적인 수학 철학을 다시 반복하기 보다는, 앞서 우리가 떠올린 그런 질문들처럼, 누구나 수학에 대해 한번쯤 궁금해 하는 물음에 대해 철학자들은 어떤 대답을 하려고 했는지를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정리한다.

 


2. 구분. 고대: 수학은 어떻게 그토록 확실한가?- 플라톤, 증명, 순수수학, 수학자들.


책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큰 구분은 고대와 근대이다. 수학에 대한 고대적 입장은 단연 플라톤주의이다. 수학은 왜 그렇게 확실한가? 바로 수학이 이미 세계에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던 것을 발견한 것 뿐이라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정리가 확실한 이유는 그것을 만들어 낸 피타고라스가 너무 똑똑해서가 아니라 이미 세상에 그것이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의 수학자건 남아프리카의 수학자건 서로 아무 교류 없이도 똑같은 증명법을 발견해낼 수 있다. 혹은 수학의 하위분야인 대수학에서 풀리지 않던 문제가 전혀 다른 분야인 기하학에서 고안된 개념을 통해 풀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미 그런 개념들이 연결된 채로 세상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수학자는 그저 그것을 '발견'할 뿐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철학자들이 보기에는 조금 유치해보일 수 있다. 2000년도 더 된 낡은 생각을 설마 지금도 하겠어? 그러나 놀랍게도 지금도 한다. 그것도 모자라 대다수의 현직 수학자들은 플라톤주의자다. 가령 1982년 필즈상을 수상한 프랑스 수학자 알랭 콘(1947~)이 대표적인데 이 사람은 자신이 기여한 이론을 처음 발견(?)했을 때 너무나 감격스러워 눈물까지 흘렸다고 한다


[알랭 콘과 뇌과학자 장 피에르 상제의 대화를 책으로 낸 책. 현직 수학자들이 얼마나 플라톤주의에 가까운지 이 책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뇌과학자인 상제는 수학은 그저 당신 뇌의 물리-화학반응일 뿐이라고 공격한다.  ]



이쪽 입장을 좀 변호해주자면 이런 근거를 댈 수 있을 것 같다. 가령 프랙털 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브누아 망델브로트가 발견(?) 한 이 개념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 프랙털을 시각화 하는 데는 너무나 많은 계산이 필요해서 컴퓨터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1980년 미국 IBM 연구소에서 일했던 망델브로트는 컴퓨터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그려낸 것이 아래의 그림이다. 



오늘날에는 프랙털 식을 컴퓨터에 입력하면 좀 더 화려한 그림들을 얻을 수 있다. 가령 

  


세부를 확대하면 전체 구조와 같은 구조가 반복되는 이 복잡한 문양은 계산량이 너무나 많아서 컴퓨터 없이는는 시각화 할 수 없다. 프랙털의 일종인 망델브로트 집합 같은 것은 망델브로트가 고안해 낸 것이 아니다. 어떻게 자신이 표상할 수도 없는 개념을 발명해 낼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이미 세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수학자는 발견해 낼 뿐이다. 이런 논리다


우주에 조화와 비율이 있다고 믿었던 피타고라스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이런 입장은 수학을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로 본다. 그래서 만약 외계인이 있고 그들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인간과 비슷한 수학을 가지고 있을거라고 생각한다.(물론 개념들에 붙인 이름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들은 또한 마치 번데기가 성숙해서 나비가 되듯, 수학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필연적인 단계를 거쳐 성숙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허수(imaginary number)4차방정식을 풀다보니 만들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수학에 있어 새로운 수나 개념의 등장은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외계인들도 4차방정식을 풀기 위해선 허수라는 개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3. 구분. 근대: 수학은 어떻게 물리적 세계와 영향을 주고받는가?: 칸트, 응용, 철학자들


물론 수학자들이야 수학이 실제로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으면 좀 더 보람차게 연구할 수 있다. 또 직접 수학을 하는 만큼 무언가를 증명해 냈을 때 그 경험이 너무나 강렬해서 수학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외의 사람들에겐 그것이 해묵은 플라톤주의와 크게 다르지 않게 들릴 수 있다. 특히 철학자들에게는 더더욱.


철학자들은 수학의 확실성에 대해 과감하게 수학적 존재를 가정하기보다는, 칸트 식으로 분석명제니, 종합명제니 하는 식으로 개념화시킨다. 또 수학자들이 주로 증명에 매달리는 것과 달리 철학자들은 수학이 어떻게 자연 현상과 결합하는가에 주로 관심이 있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종이위에 끄적인 공식이 종이를 벗어나 현실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한다는게 놀랍지 않은가.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5+7=12 라는 유명한 예시를 들어 이런 것이 가능한 이유를 수학이 선험적이면서 종합명제임을 통해 주장한다. 더 나아가 현상과 무관한 수학을 순수 수학(pure mathematics)으로, 현상과 뒤섞인(mixed) 수학을 응용 수학(applied mathematics)으로 구분한다. 이 구분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게 지속되고 있다. 대학교 수학과 홈페이지에 가서 교수들 세부 전공에 applied mathematics라고 쓰여 있으면 응용수학자고 이런 말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나열되어 있으면 순수 수학을 한다고 보면 얼추 맞을 거다.


순수 수학은 가령 이런 거다. 5+7=12. 이 식이 맞는지 증명하는 것은 순수 수학이다(대상 혹은 현상과 무관한). 그런데 사과 5개와 배 7개를 더하면 모두 12개다. 라는 건 일종의 응용 수학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사과, 배라는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대상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경제학에 등장하는 수학, 물리학에 등장하는 수학은 모두 응용수학이다. ? 사회현상, 자연현상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예로, 소수(prime number)중에 4n+1의 형태를 가진 수는 모두 두 수의 제곱의 합으로 표현된다는 명제가 있다. 가령 29를 예로 들어 보자.




신기하게도 29 이렇게 5의 제곱과 2의 제곱으로 쓸 수 있다. 29뿐만이 아니라 4n+1의 형태로 쓸 수 있는 모든 소수는 이렇게 나타낼 수 있다. 이런 걸 수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순수 수학의 예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척 보기에 아주 쓸데없는 짓을 하는 것 같으면 순수수학이라고 보면 된다.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주로 응용 수학에서 다룬다.


수학이 그저 확실성뿐만 아니라 현실에 강한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당연히 응용수학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이쯤되면 또 다른 의문이 피어오른다. 응용수학도 수학이라고 할 수 있나? 그것은 그저 순수수학을 현상에 적용시킨 것은 아닌가? 5+7=12 인 것을 그저 사과5개, 배7개에 적용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 수학이론의 실천정도라고 봐야하지, 수학의 정수라고 부를 수 있는 건 결국 순수수학이 아닌가? 



 


4. 응용들(Applications)


책의 5Applications(응용들)는 수학의 응용들, 즉 응용 수학에 대해 앞에서 언급한 질문들을 다룬다. 이 장이야말로 책 전반에 걸쳐 해킹의 수학 철학에 대한 입장을 가장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근대적 진리관인 재현으로서의 진리는, 순수 수학과 응용 수학의 구분에서도 유지된다. 5+7=12 라는 식을 순수 수학자가 증명해내면, 응용 수학자는 여기에 대응되는 현상을 찾아 적용시킨다. 사과 5, 7개가 있으면 이제 그것들을 일일이 세어보지 않고 12개임을 알 수 있다. 이를 거시적으로 풀어보면 순수 수학이 이론을 만들어 내고 응용 수학자는 이 이론을 현상에 적용하는 일을 한다고 바꿔 말할 수 있다. 그러니 당연히 진짜 수학은 순수 수학에 있다고 볼 수 밖에. 해킹이 문제제기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정말 응용은 이미 만들어진 이론을 현상에 적용시키는 일만 하는가? 현상과 맞대고 작업하는 중에 거꾸로 이론이 뒤바뀌는 일은 없는가? 그렇다면 진짜 수학은 순수 수학이라는 생각은 일종의 착각이 아닌가?


해킹의 전작 [표상하기 개입하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해킹의 이런 시도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을게다. 토마스 쿤에서 시작된 과학철학 1세대들이 주로 이론 물리학을 과학의 모범으로 전제한다면, 이언 해킹을 비롯한 과학철학 2세대들은 실험 물리학과 응용 물리학으로 관심의 초점을 전환시킨다. 과학의 확실성은 이론의 완결성 같은 데 있는 게 아니라(표상하기) 우리가 직접 실험을 설계할 수 있고, 뭔가를 조작해서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개입하기) 얻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런 그의 지론을 참고해서 다시 책으로 돌아오자. 응용분야가 거꾸로 순수수학 분야에 영향을 주는 사례는 없을까? 있다. 그가 제시하는 예는 Rigidity(강직성) 이론이다. Rigidity 이론은 건축설계 시, 무게를 지탱하는 구조물들이 힘을 받았을 때 휘지 않을 수 있는 구조를 연구하는 수학의 분야다. 쉽게 말해서





위의 사각형은 힘을 주면 평행사변형으로 휘어진다. 하지만 아래의 삼각형은 어떻게 힘을 줘도 삼각형 모양이 유지된다. , 어떤 기하학적 형상을 갖춰야 힘을 받아도 휘지 않는가를 연구한다고 보면 된다.


이러한 안정적인 구조물의 기하학적 특성에 대해선 1860년 저명한 물리학자였던 맥스웰이 제시했다. n개의 점과 3n-6개의 선들로 구성된 도형은 안정적이다. 가령 삼각형은 3개의 점과 3*3-6=3, 3개의 선으로 이루어진 도형이다. 그래서 안정적이다. 문제는 그 역은 참이 아니라는 것이다. 안정적인 도형은 모두 n개의 점과 3n-6개의 선들로 구성된 것있는 건 아니다. 예외적인 것들이 존재하는데, 이것들을 찾아내는 것은 당시 수학자들에게는 별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외려 공학자들과 건축가들에게 흥미로운 문제로 여겨졌는데 이 시기에 미국의 Buckminster Fuller(1895~1983)은 이른바 Geodesic dome 이란 도형을 발견(?)해낸다. 


 

Fuller와 Geodesic dome 모형.



위의 있는 형태는 n개의 점과 3n-6개의 선들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음에도 강한 힘을 받아도 휘지 않는다. 건축가였던 Fuller는 이를 더 발전시켜 Tensegrity이론을 만드는데, tensegritytensionintegrity를 합친 말이다. tensegrity는 건축물의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리다. 예를 들어,


 

이렇게 쇠파이프와 이를 연결하는 철사들로 '안정적인 구조'를 구축할 수 있다. 이를 응용한 대표적 건축물이 호주 브리즈번의 Kurilpa Bridge 이다.


Kurilpa Bridge



이런 것들을 Tensegrity 원리를 이용했다고 부르는데 이 tensegrity는 현재 수학의 하위 분야로 들어와 연구되고 있다. 수학의 어떤 분야일까? 응용수학? 순수수학? 놀랍게도 순수수학이다. 수학적 배경과 무관한 건축가가 고안한 개념이 거꾸로 수학으로 들어와 이론을 만들어낸 것이다. 순수수학=>이론, 응용수학=>적용 이란 도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 사례를 들어 해킹은 수학의 발전은 순수한 것을 고집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질적인 것과의 뒤섞임,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we should think of the constant interplay of different genres of inquiry in scientific acitivity. The examples presented in 24-34 illustrate the ways in which these styles fruitfully interact” p.190

 

(물론 이 사례만 제시하는 건 아니다. 또 다른 사례는 유체역학의 연구와 관련된 사례다. 지면상 생략하니 궁금하면 책을 읽어보시라.)


 

5.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위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사회학은 그저 응용심리학이지, 심리학은 그저 응용 생물학이지, 생물학은 그저 응용화학이지, 화학은 그저 응용물리학이지, 물리학은? 그저 응용수학이지.그리고 가장 오른쪽에는 순수수학이 있다.


위 도식은 우리가 이론과 적용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평범한 생각을 반영한다. 모든 현상에 대한 설명은 현상과 무관한 추상적 사유로부터 시작되어 그것의 적용으로서 이해된다. 허나 실제 역사적 과정을 근거로 이런 상식에 거리를 두게 해준다는 점에서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 는 가치가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면 그 실의 힘은 어떤 하나의 실 가닥이 이 실 전체 길이만큼 길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많은 실 가닥들이 서로 겹쳐 있기 때문이다. 수학의 힘은 그것이 순수하게 단일한 이론으로 수학의 내적 논리에 의해 발전해왔기 때문이 아니라, 수많은 응용과 뒤섞이고 수학의 외부에 있던 것들과의 접촉을 통해 획득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응용들이 수학에 들어오면서, 그것들은 수학에 의해 재영토화 되지만 동시에 기존에 수학이라고 불리던 것들의 모습 또한 다른 모습으로 변이시킨다. 그렇다면,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결국 수학의 외부로부터 온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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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과학인 건 무엇 때문인가?





김충한(수유너머N회원)




 

원래는 간단히 책 서평을 쓸 생각이었다. 평소 관심 있던 과학철학자 이언 해킹(Ian hacking)이 작년 수학철학에 관한 책을 냈다 길래, 수학을 공부하고 있는 지금 읽으면 좋을 것 같았다. 혼자 읽고 끝내는 것보다 글로 정리하는 게, 쓰는 이나 읽는 이나 생산적인 것 같아서 서평을 쓰기로 했다. 허나, 주로 인문/사회 과학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수학철학이 뭔지, 더 나아가 과학 철학이 뭔지 개괄이 필요하다는 편집자의 주문에 이렇게 과학 철학에 대한 개괄적 글을 시작한다. 아무리 개괄이라도 내가 대충 알고 있는 식으로 설을 풀 수도 없고 그만한 능력도 안 되어, 새로 관련한 책을 찾아봤다. 주로 참고한 책은 Gary Gutting, [Continental Philosophy of Science]이다. 과학 철학에 대한 입장 차이에 의한 구분을 거팅의 책을 참고해서 요약했다.







1.과학철학이란 것이 왜 있는가?: 17c 과학혁명과 칸트.


왜 철학에 과학철학이란 것이 생겨났을까? 이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가령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을 들어, 처음부터 철학은 자연에 대한 앎(자연학)과 그 너머에 대한 앎(형이상학) 모두 포괄하는 학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헌데 여기서 말하는 과학 철학은 데모크리토스, 루크레티우스 같은 자연 철학의 뜻이 아니다. 이른바 지금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들(물리학,화학,생물학)이 참인 근거는 무엇인지, 과학이라는 것을 특징짓는 것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는 근대과학의 등장과 동시에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때는 바야흐로 17c. 과학혁명의 시기라 불리는 이때에 유럽에서는 갈릴레오,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케플러, 뉴턴 같은 이들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과학 발전(?)(혹은 단절)을 만들어 냈다. 지동설, 관성의 법칙, 직교 좌표계, 미적분, 타원 궤도, 만유 인력의 법칙,,, 지금도 고등학교 물리의 1단원을 구성하는 이 모든 것들이 17세기에 들어 폭발적으로 만들어졌다.





이런 눈부신 과학에 비해 철학은 어떤가? 과학의 객관성에 비해서 철학은 지나치게 주관적인 것이 아닌가? 칸트는 수학, 물리학이 객관적인 이유를 분석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철학을 하려고 했다.


[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 학문들은 실제로 주어져 있으므로, 이 학문들에 대해서 그것들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제 묻는 것은 적절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가능해야 함은 현실적으로 있음에 의해 입증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형이상학에 관해서 말할 것 같으면, 그것의 이제까지의 형편없는 진행과정이, 그리고 그것의 본질적인 목적에 관련해 볼 때, 이제까지 설파된 어떤 형이상학에 대해서도, 하나의 형이상학이 진정으로 있다고 말할 수 없으므로,,,] 순수이성비판,p.230


수학,자연과학이 참인 이유를 칸트는, 순수이성을 이용한 선험적 종합 인식이라는 데서 찾고 있다. 선험적 종합 인식이란 무시무시한 말은 쉽게 말해서 이런 거다. 경험에 좌지우지 되지 않는 확실성을 가지면서(선험) +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과 같은 무언가 새로운 인식(종합)을 주는 것을 뜻한다. 그런 게 어떻게 있을 수 있나? 경험해보지 않고 종이와 연필만 가지고 뭔가 새로운 걸 알 수가 있다고? 칸트에 따르면 그렇단다. 바로 수학과 물리학이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단다. 그렇다면 철학도 과학처럼 선험적 종합 인식으로 구성한다면 하나의 철학,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이 세워질 것이다. 이렇게 칸트는 수학, 과학을 토대로 자신의 철학을 건축한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수학, 과학적 인식에 대한 분석이 선행할 것이고 여기에서 과학철학의 시초를 찾을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은 물론 수학, 물리학을 해명하고 정초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가능 근거를 분석해서 이를 토대로 그것들을 넘어서는 초월적 영역에 철학을 세우려는 것이 목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철학의 시작을 수학, 과학적 인식의 분석에서 시작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간단하다. 그것들이 가장 확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집을 지을 때 그 지반이 무너져 내리면 모든 것이 끝이니까. 칸트에게는 당시 잘 나가던 수학, 물리학만큼 확실해 보이는 것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칸트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하는 지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다 이유가 있다. 칸트의 과학에 대한 태도가 이후의 과학 철학의 상이한 흐름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잘 기억해주자.

 


2. 구분해 봅시다- by 개리 거팅


자 이제 어려운 칸트 얘기는 그만하고 과학 철학에 대한 입장들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아보자. 큰 도식을 잡고 보는 것이 처음 접했을 때의 공부할 부담을 덜어주니 거칠지만 이용해보겠다. 같은 부류로 엮이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매우 상이한 입장 차이가 있기 때문에 거친분류라는 걸 염두해 두고 보자.

 

a. 과학만이 오류없는 인식을 가능하게 한다. 철학은 그에 대한 논리적 설명일 뿐: 논리실증주의, 경험주의, 반성적.

{논리실증주의자들, 푸앵카레, 에른스트 마흐}.

 


첫 번째 입장은 과학을 가장 확실한 인식의 장이라고 믿는다. 철학이 할 일은, 조금 산만하게 진행된 과학 이론들을 보기 좋게+ 공부하기 좋게+ 깔끔하게+ 논리적으로다가 정리해주는 일이다. 과학 실험으로 확인할 수 없는 말( 가령 세계는 음양으로 이루어졌다.. ) 이런 건 헛소리다.(마흐) 우리가 오류에 빠지는 건 늘 과학처럼 실험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말을 하며 논리가 뒤죽박죽된 언어습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정리 좀 하고 살자. 20c 빈 학파로 유명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대표적이다. (카르납,슐리크)

 

b. 과학은 역시 오류없는 인식을 준다. 따라서 철학은 그것을 토대 삼아야 한다: 비판적, 칸트주의.

{칸트, 브롱슈뷕(Brunschvicg), 바슐라르, 카시러, 포퍼}



두 번째 입장도 과학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한다. 하지만 철학을 그것에 대한 논리적 분석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외려 과학이 말할 수 없는 영역까지 넘어서는 영역에 그것의 영역이 있다고 믿는다. 이 점에서 a와 다르다. 앞서 본 칸트가 대표적이다. 칸트의 철학은 뉴턴 물리학을 기초로 했기 때문에 뉴턴 물리학이 무너지면 같이 무너진다. 감성의 직관 형식으로 시간과 공간이 있다는 칸트의 초월적 감성학은 선험적 종합 인식으로 더 할 나위 없이 확실하다고 칸트선생님은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으로 합쳐지는 개념으로 바뀌면서,, 칸트의 철학 역시 보편적인 학문으로서의 철학이 아닌 칸트의 철학일 뿐임이 명시적으로 드러난다.

 

c. 과학보다 철학이 더 근본적이다: 존재론적 혹은 형이상학적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

c입장이 a, b입장과 가장 갈린다고 할 수 있다. 과학은 확실한 것 그래서 거기에 토대를 세우거나 그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철학과 달리 이 입장은 과학보다 오히려 철학이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앎을 준다고 믿는다. 대표적으로 베르그송, 후설, 하이데거를 들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하이데거를 인용해보면,


[오늘날의 과학의 근본개념들은 해당 과학이 다루는 존재자의 존재에 관한 본래적인 존재론적 개념들을 결코 포함하지 않으며, 또한 그러한 본래적인 존재론적 개념들이 단지 오늘날의 과학의 근본개념들의 적절한 확장을 통해서만은 획득될 수도 없다. 오히려 모든 과학적 근본개념을 정의하기에 앞서 근원적인 존재론적 개념들이 획득되어야 하는데,,,] [근거의 본질에 관하여, 이정표2 p.43]


과학은 전자, 질량, 충돌, 자기현상 등을 다루지만 이런 것들(존재자)보다도 먼저 무언가가 있다라는 것(존재이해)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더 근본적인 앎인데 이런 앎을 과학은 물을 수도 묻지도 않는다. 논리학도 마찬가지다. 과학 그만 하고 철학하자.


 


c 입장이 a,b와 얼마나 다른지 확연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이 철학에 대해 가지는 특권적 위치를 부등호로 나타내면 a>b>c 이 될 것이다. ab은 그럭저럭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과학적 인식의 참됨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c는 좀처럼 교집합을 구성하기가, 특히 a 입장과는 겹치는 영역이 거의 없다. 알다시피 a를 대표하는 논리실증주의자들은 2차 세계 대전 시기 미국으로 망명하고 미국 주류 철학의 흐름을 형성한다. 과학에 대한 서로 다른 극단적 입장 차이+물리적 거리까지 겹쳐지면서 각기 서로의 이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게 되는 상태가 된다.그래서 요즘엔 영미철학/대륙철학이라 구분을 한다. 서로에 대해서 얼마나 모르냐면 참고로 영미철학자들 중 대다수는 도미니크 르쿠르의 책이 번역되기 전까지 프랑스 철학자 바슐라르(Bachelard)의 발음조차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설마 바..바첼라드? 이 두 진영사이의 극단적 입장 차이는 90년대 소칼 논쟁이란 식으로 불거지기도 했었다. 뉴욕대 물리학과 교수였던 앨런 소칼은 [경계를 넘어서: 양자 중력의 변형적 해석학을 위하여] 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제목으로 소셜 텍스트(Social Text) 라는 유명한 인문학 잡지에 논문을 보낸다. 그런데 이 논문은 소칼이 일부러 말도 안 되는 과학 지식과 화려한 개념어로 점철한 가짜 논문이었다. 재밌게도 이 논문이 소셜 텍스트지에 실리게 되었고 소칼이 후에 이거 가짜 논문이라고 밝히자 큰 논쟁이 일었던 사건이다. 이후 소칼은 [지적 사기]라는 책을 써서 들뢰즈, 브루노 라뚜로, 데리다 등의 프랑스 사상가들을 지적 사기꾼이라고 칭하며 한 바탕 소동이 일었었다.(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 참고) 영미학자들과 대륙 특히 프랑스 학자들간의 지적 반목을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몇 년 전는 촘스키가 인터뷰를 하며 데리다, 라캉, 지젝을 일컫기를 여러 음절을 조합한 화려한 개념어를 써서 마치 무슨 이론이 있는 척 행세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특히 지젝에 대해선 그가 얘기하는 것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당신이 언급한 저작 중에서 경험적으로(empirically) 검증 가능한 명제를 끌어낼 수 있는 게 있는지 한번 찾아보라라는 말을 했단다.이에 대해서 지젝은 촘스키는 언제나 경험적일 것을 강조하지만, 그 사람만큼 경험적으로 틀린 말을 자주 하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며 받아쳤다고 한다.ㅋㅋ 이 둘 사이의 골이 지금도 여전히 깊다는 걸을 잘 보여준다.


한 마디로 영미철학/대륙철학을 구분한다면 logocentric(영미), nonlogocentric(대륙)이라 할 수 있겠다.

 

 

3.분화: 영미/ 대륙


과학철학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입장차이가 오늘날 철학의 지형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언급했다. 좀 더 소개하고 싶은 건 그 이후의 진행상황이다. 영미로 이어진 논리실증주의는 이후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이란 더 커다란 학파로 흡수되고 과학철학도 역시 분석철학의 한 파트로서 자리매김한 듯 하다. 그래서 언어 논리의 힘을 빌어 과학적 인식을 분석하고 정리하는 식의 과학철학을 하고 있는 듯 하다.(물론 언어 논리를 중점에 두지 않는 다른 식의 과학철학을 하는 흐름도 있다. 가령 토마스 쿤, 이언 해킹)

 

한편, 프랑스에서는 전혀 다른 전개 과정이 있다. 아무래도 이 글을 읽을 분들은(나를 포함해) 대부분 이쪽에 관심이 있을 테니 이는 다음에 기회를 봐서 좀 더 살펴보려고 한다. 프랑스의 흐름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영미철학에서는 과학철학이 수많은 철학 분과중 하나인데에 반해, 프랑스에서의 과학철학(여기에서는 인식론이라고 부르는데)은 어떤 한 분파가 아닌 프랑스 철학 전반에 걸쳐 영향을 행사했다는 점이다. 대표적 과학철학자인 조르주 깡길렘의 박사논문 [정상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서문에 미셸 푸코는 깡길렘의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서 그 이후에 생겨난 알튀세르 학파나 라깡의 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조금 과장(?)섞인 말을 할 정도니 말이다.

 


4. 이언 해킹(Ian Hacking)은 누구?


다시 돌아가 앞으로 서평을  책의 저자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보자. 이언 해킹은 캐나다 출생으로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그리고 캠브리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는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연구로 받았다. 앞서 우리의 논의에 따르면 a에서 이어져온 분석철학 전통에서 공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어 논리를 중심으로 연구해오기 보다는 나름 개성을 가지고 자신만의 연구를 한 사람인데, 특히 과학철학에서는 토마스 쿤(1세대) 이후 제2세대 과학철학의 흐름을 만든 중심적 인물이다. 토마스 쿤이 패러다임이란 개념을 제시하며 들었던 근거들은 주로 이론 물리학에 관한 것이었는데 해킹은 이와 달리 실험 물리학 혹은 응용 물리학(특히 고체물리학)에 관련한 이론을 전개하며 실험과학에 관한 과학 철학내의 흐름을 촉발시켰다. 이런 입장의 차이로 인해 토마스 쿤 부류와 다른 제2세대 과학철학자라고 부른다.


(Ian hacking, 1936~)



영미권에서 이미 성공할 대로 성공한 이 철학자는 스탠포드에서 재직할 당시 푸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푸코에 관해 두툼한 책을 쓰기까지 했는데, 어느날 이 두툼한 책의 원고더미를 휴지통에 버리는 것을 학생들이 보고 놀라 물었더니 그는 대답하기를 푸코를 연구하지 말고 행하라: Don’t study Foucault, Do Foucault” 라고 답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일화가 있다.


이후 정말 ‘Do Foucault’를 해냈는지, 2000년 프랑스 지성의 최고의 자리인 콜레주 드 프랑스의 과학사,과학철학 교수로 초빙이 됐다.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인데,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영미철학과 대륙철학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촘스키처럼 지적 허세부리는 녀석들이라고 무시하는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캠브리지라는 영미 전통 철학의 한복판에서 공부한 철학자가, 프랑스의 일반 대학 교수도 아니고 콜레주 드 프랑스에 임명된다는 건 꽤나 센세이셔널했다고 할 수 있겠다.


영미철학/ 대륙철학 양 진영에서 모두 인정받은(그것도 각각에서 최고 수준으로) 이 사람의 저서가 당연히 읽어보고 싶지 않으신가?


국내에 번역된 책으로는 [표상하기 개입하기], [우연을 길들이다], [푸코 효과](공저)가 있고 

번역되지 않은 것들로는 The Logic of Statistical Inference (1965) The Emergence of Probability (1975) Why Does Language Matter to Philosophy? (1975) Scientific Revolutions (1990) Rewriting the Soul: Multiple Personality and the Sciences of Memory (1995) Mad Travellers: Reflections on the Reality of Transient Mental Illness (1998) 

The Social Construction of What? (1999)An Introduction to Probability and Inductive Logic (2001)

Historical Ontology (2002)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 (2014)

 

이중 서평을 쓸 책은 가장 최근에 나온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2014)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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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영매를 자처한 복화술사: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고

 




인문학 협동조합/한영인

 




 마르크스의 저작이라곤 선언을 비롯해 선집의 몇몇 글들만을 접한 문학도가 마르크스와 이진경의 철학적 대결에 끼어 토론(討論)’한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은 한 명의 독서 대중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를 나누는 것 역시 어떤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따라서 토론은 응당 대상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일이어야 하겠으나 모자란 깜냥 상 나의 부족한 공부를 메우는 자리가 될 것 같아 송구스럽다. 이만 각설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이 책은 두 가지 다른 흐름이 교차한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어 닥친 마르크스 열풍이 있다. 주지하듯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부터 마르크스가 새롭게 조명 받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국내에도 다시 마르크스의 이론과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여럿 출간된 바 있다. 저자가 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책이 2008년 이후 맑스 르네상스의 흐름 위에 위치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저자 역시 이 책의 7<현대 자본주의>를 시작하면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진경의 일관된 관심사다. 이진경은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 미래의 맑스주의(2006) 등의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마르크스의 작업과 치열하게 대면해왔다. 이 책에는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온 이진경의 이론적, 실천적 관심사가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두 가지 흐름이 교차되면서 기대되는 효과는 마르크스의 현재성/적실성에 대한 검토와 이진경의 작업이 갱신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적어도 한 명의 독서 대중으로서의 나는 이 책을 통해 위의 두 가지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에 값하게 책을 통해 많이 배우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 아쉽고 의아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걸 풀어내기가 쉽지 않아 피치 못하게 횡설수설 중언부언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린다.





책을 시작하며 저자는 영매를 자처한다. 마르크스를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초대해 지나간 그의 이론과 저자의 이론적 관심사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이 책의 이러한 형식을 보고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화. 거기서 진중권은 그 둘의 이론에 입각해 대립점을 설정하여 논의를 풀어 나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르크스를 발화하는 발화자가 대화의 직접적인 상대방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커다란 위험성이 뒤따른다. 내가 A의 이야기도 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한다는 것은, 나의 서사 속에 A를 편의적으로 배치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학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들이 남긴 저작에 근거하는 서술자이자 논평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마르크스는 어떤 사안에 대한 그 자신의 논평을 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진경의 주장에 대한 인위적인 변증법적 대립물 - 곧 합으로 화할 -의 기능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마르크스는 말할 수 있는가?’ 이진경 역시 이 위험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서문>을 통해 이에 대해 긴 부연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다음과 같은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혹은 언제) 마르크스는 이진경이라는 복화술사의 손 위에 덧입혀진 봉제인형이기를 그칠 수 있는가? 이진경은 영매를 자처했지만 실은 복화술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샌가 MY의 구별이 무화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목소리의 다성성이 어느 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세기를 잇는 철학의 대결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아쉬운 면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다루는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대의 교양인답게 마르크스는 - 비록 슬쩍 스치듯 지나갔다 하더라도 - 다방면의 문제를 거론했다. <예술>도 물론 그에 포함된다. 하지만 주지하듯 마르크스는 그의 일관된 예술론을 남긴 바 없다. 문학에서의 리얼리즘론도 엥겔스가 마가릿 하크네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에서 촉발되었을 뿐, 그것을 만들어간 것은 루카치를 비롯한 이후의 이론가들이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여기에 길게 대화를 할 계제가 아니다. 그렇다보니 예술란은 코뮨주의’, ‘역사와 혁명’, ‘노동과 계급’, ‘현대 자본주의등과는 다르게 마르크스와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진경의 일방적인 강의가 펼쳐지는 장이 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4장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 여기서 이진경은 정치적 예술예술에서의 정치를 구분한다. ‘미학의 정치를 논한 랑시에르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은 마르크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서의 정치란그와 달리 예술 자체에서 작동하는 정치를 통해 정의되어야 합니다. 예술이 정치적인 대상을 다루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안이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예술은 아주 쉽습니다. 남들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다루면 되니까요. 그 경우 정치적 선언문, 삐라, 정치포스터가 가장 정치적인 예술이 될 겁니다. (중략) 중요한 건 예술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포착하고 정의하는 겁니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지만 마르크스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필연성은 없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러한 인식의 싹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독자는 의아한 기분에 처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저자의 복화술에 따라 움직이는 장면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 말 자체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진경은(마르크스가 한 말이지만 실은 이진경이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으니) “예술 자체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서 선언문과 삐라, 포스터의 예술성을 아주 쉬운 정치적 예술성으로 폄훼한다. 그런데 이 책의 121페이지에 나오는 대중은 대중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들은 혁명적이 된다.”라는 말을 패러디해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삐라는 삐라다. 특정한 국면 속에서만 그것은 예술이 된다.” 실제로 벽의 낙서, 선언문, 삐라, 노동자들의 수기 등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문학이나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단지 아주 특정한 순간에만 예술이 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가 기억하듯 정치적 혁명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이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예외다.)


가령 1980년대 민중문학론자들의 투쟁은 이 예술의 고답적인 성채를 부수고 저 너절한 글들을 예술로 편입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문제는 삐라나 선언문이 본질적으로예술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이진경이 대중에 대해 한 말을 우리는 그대로 예술에도 적용할 수 있다. 대중이 흐름이라면 예술 또한 흐름이다. 그것은 예술 자체와 같은 굳은 본질을 갖지 않는다. 어떤 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게 만들것이냐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혁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어째서 뒤샹의 변기는 예술로서의 자격이 없던 것을 예술 작품 안으로 밀고 들어간 것의 한 예가 되면서 삐라나 선언문 노가바는 안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진경은 1980년대의 혹은 그 시대로 대표되는 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해 너무 쉽게 미학적 모더니즘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외부에 의한 사유>가 곧 유물론이라면, 너절한것들이 유물론적 시야에 의해 예술로 포착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돌아오면, 이 책은 이제까지 이진경이 펼쳐왔던 사유를 마르크스와의 대결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실상 추인 받는 자리인 듯하다. 여기서 그것은 코뮨주의’, ‘외부성’, ‘프레카리아트등의 개념이다. (이 개념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뮨주의(2010), 외부, 사유의 정치학(2009),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2012)를 읽으면 된다. 3대중에 대해서는 대중과 흐름(2012)를 참고.)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개념들의 대화적 상대로 불려나온 마르크스가 독자를 긴장시키는 팽팽한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이론적, 실천적 관심과 논의를 한 눈에 살피기에는 매우 적합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면서 가졌던 어떤 기대 - 이진경 사유의 갱신 -를 충족시키기에는 뭔가 미진함이 남는 것 같다.


과문한 탓에 이 책을 읽으며 사소한 의문들이 많이 들었다. 그것은 논리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실천적 모호성에서 연유된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코뮨이 아닌가 싶다. 이 자리에서 코뮨주의의 대가를 만났으니 만난 김에 좀 더 여쭙고 싶다. “코뮨주의란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가는 현행적 실천 속에 있는 것”(60p)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실천과 과정, 행동과 지향 그 자체를 강조하는 말들은 그 모든 비판의 책임으로부터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받는 알리바이로 기능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외부성의 원리가 관철되는 코뮨이라면, 응당 외부로부터의 비판과 이질적인 적대 역시 마주해야 할 텐데, 나는 실천과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이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외부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지 감을 잡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현재진형형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진행의 형태를 완료나 결과의 형태로 오인하여 행하는 섣부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외부에 서 있는 나의 편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코뮨주의외부성의 조직들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의외의 강고한 자기동일성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가 활용되는 모습을 보며 그 자기동일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면 심한 과장일까? 저자의 일관된 이론적 작업 - 그 자체가 저자의 동일성을 강화시키는 - 에 어떤 파열을 가져오기에 이진경의 몸을 빌린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업의 동일성과 체계를 교란시키기 위해 저자가 도입해야 할 진정한 외부는 어디/누구일까? (가령 노동중심성에 대한 6장의 비판. 이런 이야기는 죽은 마르크스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그 누군가와 만나 더욱 치열하게 논의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





덧붙여. 대중에 대하여. 3장에서 펼치는 저자의 논의를 보면 대중이 긍정정인 정치적 주체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듯하다. 저자에 의하면 대중은 주어진 자리나 지위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이탈의 벡터를 지닌 채 끊임없이 유동하는 어떤 흐름이다. 그런데 144~146쪽의 논의처럼 이탈의 벡터를 지닌 대중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이어서 정치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파시즘과 문화혁명 때의 대중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대중과 군중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로 넘어가버린다. 저자는 대중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주체라고 판단하는 지 궁금하다. 그런데 만약 대중은 외부성에 의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대중일 수 있다고 할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탈의 벡터를 가진 대중이냐 여부가 아니라 그 이탈의 벡터의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힘은 무엇일까



*이글은 4.21 화요토론회("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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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지 않은 자’, 새로운 연대를 꿈꾸다

- 도미야마 이치로,유착의 사상』(심정명 옮김, 글항아리)

 

 

 

 

노 의 현/수유너머N 회원

 

 

 

 

지난 125,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농성장에 찾아갔다. 이들은 2009년에 이뤄진 사측의 부당 해고에 반발하며 7년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갔을 당시는 이창근, 김정욱 두 명의 해고자가 44일째 쌍용자동차 공장의 굴뚝 위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던 때였다. 공장 입구는 그 높은 굴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농성장과 멀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가던 금속노조 조끼 입은 아저씨의 뒤를 쫓았다. 농성장에 도착하니 한진중공업의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도 보였다. 어젯밤 시청에서 범국민대회를 마치고 이곳에 와 밤새 농성장을 지켰다고 했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과 함께 불을 쬐고 은행을 까먹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다였다. 내가 쌍용차 투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옆에 있어주는 일뿐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무슨 힘이 되는가? 나는 이들의 투쟁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상시에는 책을 보고 간간히 하는 알바로 먹고 사는 의 시선으로,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년간 춥고 더운 곳에서 꿋꿋이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섣불리 글을 써내도 되는 것일까? 투쟁 현장에 가면 으레 그랬듯, 나는 이 간극에 다시 한번 당황하고 만다.

 

 

 

오키나와 문제에 갇힌 사람들

 

도미야마 이치로가 오키나와 문제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것 또한 이러한 간극이었다. 이는 본토인의 입장에서 오키나와 식민지 문제를 사죄하고 보상해야 할 것으로, 오키나와인들을 구제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도미야마는 본토의 지식인들이 가진 이러한 태도를 외부의 수다스러운 해설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오히려 오키나와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히로쓰 가즈오의 소설 <떠도는 류큐인>과 오키나와 청년동맹 사이에 벌어졌던 논의가 그 예이다. 이 소설은 일본 본토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 오키나와에서 온 인물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등장하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점이었다. 오키나와 청년동맹은 히로쓰의 소설이 본토 사람들로 하여금 오키나와인들을 모두 범죄자로 인식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그의 작품을 폐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히로쓰는 이러한 비판을 수긍하고 오키나와 청년동맹에 사과하며 자신의 작품을 철회한다. 하지만 도미야마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히로쓰의 부정적인 묘사에서 오키나와의 문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목격한다. 폭력적이고 신의와 도덕을 결여한 그들의 모습은 본토 사람인 히로쓰가 한때 본토인에 의해 오키나와에 가해졌던 폭력을 현재 자신의 일상 속에서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문제를 저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일상 속에서 발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그가 오키나와 청년동맹에게 사과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은 “‘오키나와 문제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쓰러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으로 고정되며, 이는 당신들을 구하고 싶다는 지식인의 양심과 포개어진다. 이로써 오키나와는 또 다시 오키나와 문제에 갇혀버리고 만다. 히로쓰는 오키나와 청년동맹과 화해하였고, “그리고 결렬했다

 

 

 

 

오키나와현과 일본 본토 사이의 '거리'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

 

오키나와에 대한 또 다른 묘사를 담은 글, 구시 후사코의 <망해가는 류큐 여인의 수기>를 둘러싼 논쟁은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구시 또한 오키나와와 본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다뤄내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비참한 오키나와인과 그에게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는 본토라는 구도가 가시화된다. 즉 그녀는 오키나와 문제에 직접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또한 본토인에게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구시는 이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긴 해명 글을 통해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반박한다.

 

도미야마는 이 해명 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내용보다 말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이야기한다. 이 글을 쓴 구시는 오키나와 사회 안에서 학식 없는 사람’, ‘교양 없는 여자로 취급받아 왔다고 한다. 때문에 구시의 해명 글은 공적 세계에서 버젓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이, “민족 혹은 토착과 관련된 문제를 말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드러내 준다. 따라서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은 결국 당신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구시는 해명 글을 통해 외려 그 자격을 묻는다.

 

 

이를 통해 구시의 글은 히로쓰와는 달리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선다. 이처럼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그들의문제가 나의 세계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폭력으로부터 내가 당신들을 구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도 오키나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을, 즉 그 자격을 증명하려면, 또 한 명의 당사자가 되는 것, 자신의 일상에서 폭력을 예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구시는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폭력으로서 감지하며 소리 높여 저항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미야마가 말하는 유착을 발견하게 된다. 유착(流着)이란 유랑하는 토착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타자의 장소에의 이동을, 공간을 재구성하는 시작으로서 확보하는 지각이다. 유착이라는 이름의 토착은 자신의 공간을 떠나 타인의 장소로 흘러들어감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시의 글은 본토로의 이동을 통해 구제법 속에 있는 오키나와라는 경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착이다.

 

 

나는 무엇을 예감하는가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우리들은 이러한 폭력을 어떻게 예감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는 한 발표문에서 알제리의 식민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란츠 파농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파농은 각각의 상황에 입각해서 읽혀졌으며, 그런 의미에서 복수의 파농이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위치에서 개별적인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경험을 움직일 수 없는 근거로 삼는 앎이 아닌, 개개의 구체적인 현상을 묻고 바꿀 수 있는 복수의 상황으로서 함께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파농의 개개의 상황적 앎으로서 읽혀야 한다.

 

즉 알제리인도, 그를 점령했던 프랑스인도 아닌 우리들의 이름은 파농의 메시지의 수신자로 쓰여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가짜 독자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농의 가짜 독자가 됨으로써, 각자의 상황에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복수의 파농을 만들어낸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글 또한 이렇게 읽혀야 한다. 우리는 도미야마의 텍스트에서 오키나와를 그저 오키나와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상황에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를 바꿔낼 수 있는 앎으로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미야마의 가짜 독자가 됨으로써 복수의 도미야마를, 복수의 오키나와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히로쓰와 구시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현실을 예감하고 변화시켰던 방식이다.

 

 

 

  

 

지난 2월 열린 수유너머N 국제워크샵에서 강연 중인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

 

 

 

앞선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내가 느꼈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과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 될 수 있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즉 당사자가 아님에도 왜 그것을 문제 삼는가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도 그 폭력의 대상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시작할 것이다. 알바 노동자라는 나의 일상 속에서 폭력을 감지하는 것, “사실 1~2월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의현 씨가 별로 필요 없어요. 사실 잘라도 되는데... 일을 잘해서 3월 달에도 쓰려고 그동안 써준 거니까 2월 말에 그만두거나 하면 안돼요. 그럼 완전 배신이야.”라고 생색내며 이야기하던 사장의 태도에서 나 또한 폭력의 대상임을 감지하는 것.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미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연대의 가능성은 이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평택 공장에 버티고 있는 쌍용자동차 농성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알바생이라는 나의 상황과 공간 또한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유랑하는 토착은 이러한 운동을 일컫는다.

   

 

이어지는 질문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연대를 통해서 나는 과연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오키나와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유착이라는 하나의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연대의 견고한 출발점을 만든다. 그런데 이 운동은 에게서 출발해서 그들에게 가지만, 결국엔 다시 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유착을 통해 나의 공간은 변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지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더 나아가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나의 자리에서 나의 투쟁을 만들어가는 일뿐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각자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물론 겪지 않은 자들의 연대는 구제의 대상과 구제자라는 이분법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연대가 본토의 지식인들이 하고자 했던 것과 이어질 수 있을까? 본토의 지식인들이 결과적으로는 오키나와의 식민지 문제를 오키나와 문제라는 구제법에 갇혀버린 문제로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사실 이러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오키나와의 식민지라는 역사는 문제화조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나로부터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냈다고 해서 과연 침묵하며 펜스 옆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꾸중에 반박할 수 있을까.

 

 

 

 

구시가 자신에 소설에 대한 꾸중에 반발하며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녀가 오키나와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오키나와 안에 있기에 누가 오키나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 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사자가 아닌 이가, 오키나와 밖에 있는 이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일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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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중국, 보이지 않는 중국

(이창휘/박민희 엮음, <중국을 인터뷰하다>, 창비, 2013)

  



이진경/수유너머N 회원

 

 

 

 

알다시피 너무 작은 것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너무 큰 것 또한 잘 보이지 않는다. 크기가 시야를 벗어나면 우리의 눈은 볼 것을 놓치게 되고, 보아야 할 것은 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좀더 근본적인 것은 크기에 가려, 크게 보이는 것에 가려 작은 것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 크기에 요구되는 시선으로는 작고 사소해보이기에 보여도 놓치게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이 바로 그런 경우일 것 같다. 49년 이후 중국의 역사는 성공과 실패의 양극단을 오가는거대한 사건들, 위대한 인물들에 의해 포착되어왔고, 그래서 성공을 말하든 실패를 말하든 그 큰 것들에 가려 사람들의 삶은, 작아서 전체에 비하면 미소하기까지 한 사람들의 삶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두 개의 중국, 두 개의 중국사회주의가 있다는 첸 리췬의 말은 잘 알지만 쉽게 잊고 마는 것을 새삼 상기하게 해준다. “모두가 주목하는 마오 쩌둥, 덩 샤오핑, 공산당 지도하의 중국, 그들이 건설한 사회주의의 모델이 그 하나라면, 또 다른 하나는 그가 지하의 중국이라고 부르는 민간사회, 민간사회주의로서의 중국이다. 한때 마오의 구호에 열렬히 반응하는 문혁 조반파의 일원이었던 첸리췬이 청년들과 함께 민간사상촌락을 만들어 중국인의 삶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실험하던 것도, 11년의 하방생활 속에서 체득한 농민들의 삶을 바탕으로 원톄진이 소농사회주의를 주장하며 향촌건설운동을 하는 것도, 중국의 밖에서 보는 우리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 저 지하의 중국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선 이보다 더 깊은 지하의 중국을 주시하고 그 속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거대한 깃발이나 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경계에 선 채, 분투하며 살아가고 있는소수자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 중국에선 결코 상영될 수 없는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영화감독 장 률의 시선 속에 있는 이들이 그들일 것이다. 시디를 판돈으로 고향을 떠나온 노동자(대개는 농민공’)들이 모여서 교류하고 공부도 하는 노동자의 집과 그들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동심실험학교를 만들어 대학생 자원활동가와 더불어 배제된 운명의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문화적 기운을 불어넣으려는 가수 쑨 헝의 가슴 속에 있는 이들이 그들일 것이다.


이들은 영웅들과 다른 사회주의의 꿈을 꾸는 민간 사회주의조차 가 닿지 못한 지하의 민간이고, 아직도 모든 사회주의의 꿈 이전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 착취당하는 인민이다. 농민들의 노동을 수합하여 값비싼도시를 건설하곤, 농민들이 그곳으로 이동할 수 없게 만든 호구제도(후커우제도)는 도시에 의한 농촌의 착취라는, 중세도시 이래 자본주의에서 진행되어 온 관계를 사회주의 중국에서 더욱 강한 강도로 반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살아남기 위해선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갈 수밖에 없는 그들은, 도시에 거주등록을 할 수 없는 불법이주민, 혹은 불법체류자라는 이유로 도시민에게 주어지는 모든 혜택에서마저 배제될 뿐 아니라, 더욱 값싼 상품의 노동력이 되어야 한다.


쑨헝이 농민공이란 말에 분노하는 것은, 그들을 그토록 싸게 부려먹으면서, 언젠가 다시 농민으로 돌아가야 함을 상기시키는 이름이란 이유에서다. ‘순희라는 이름의 인물로 형상화된, 거리에서 김치를 파는 조선족 아주머니들은 관료들에 의해 쫓겨다니다 나중엔 자본이 만든 김치공장에 의해 그 쫓겨다니던 거리마저 잃어버린다. 국가와 자본에 의한 이중의 배제. 이를 찍은 장률이 중국내 상영을 포기하면서까지 당국의 검열을 거부하는 것은, 이 이중으로 핍박받는 소수자들의 삶을 검열의 시선 아래 다시 한 번 꺾을 순 없다는 항의의 표시일 게다.




그래서 지하의 중국, 아니 지하의 지하의 중국에 대한 얘기들은 소문 이상으로 가슴 아프지만, 그런 이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런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건 이들이 있음을 보는 것은 절망을 먹고 자라나는 식물의 존재를 보는 것 같아 슬프면서 기쁘다. 또 이 미련한시도들을 위해 자원봉사자로 나서는 대학생들이 적지 않다는 여러 사람의 전언은 소문에선 들리지 않던 희망의 메시지 같아 반갑다. 이는 중국을 말하는 다른 책들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것일 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보여주는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를 세우고 국가적 관점에서 말하는 중국과, 지하의 중국에 속하는 반대편 극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의 대립으로 단순화되지 않는다. 최소한 또 다른 두 개의 다른 시점이 이 두 개의 시점과 다른 차원에서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중국을 만들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좀더 복합적인 구도 속에 위치짓는다. 하나는 문화혁명과 하방을 통해 노동자와 농민의 삶을 체험했고 그렇기에 개방경제가 야기한 그들의 고통에 진지하게 이해하고 해결하고자 하지만, 동시에 국가를 통해 중국 사회의 문제를 보고 국가적 관점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는 이들이다. 첸 리췬이 말한 두 개의 중국 사이에서, 그 두 개의 극을 오가며 중국의 문제를 보고 해결하려는 이들.


농업문제를 농촌문제, 농민문제가 응축된 것이란 점에서 삼농문제로 제기하며, 신향촌건설운동의 하방형 대중운동을 하는 동시에 당중앙을 통해 국가적 차원의 해결을 추구하는 원 톄쥔이 상대적으로 농민대중에 가까운 지점에서 두 극을 오가고 있다면, 당정간부들에게 매년 일정기간 짧은 하방을 의무화하고 혁명가요부르기범죄와의 전쟁등을 시행하여 문혁의 재연이라는 의심을 받는 충칭의 경험을 자본중심의 경제개방에 대한 대안으로 발전시키려는 추이 즈위안은 상대적으로 국가적 관점에 서서 두 극의 간극을 좁혀보려는 시도라고 해야할 것 같다.


사실 중국에서 지식인이 국가나 당의 바깥에서 중국문제를 사유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큰 것 같다. 그렇기에 스스로를 민간 사회주의의 편에 있다고 자처하며 츠이 즈위안 같은 신좌파와 거리감을 표시하는 첸 리췬조차, “중국의 현 상황에서 정부와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는 국가의 외부에서 사유하는 것의 어려움을 의미하는 것이고, ‘지하의 중국을 말하면서도 국가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스스로 저지하는 이유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의 극은 중국의 외부에서 중국 인민의 삶, 중국사회의 문제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주시하며 그것에 개입하기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다. 지나가다 휩쓸려들어갔던 텐안먼 사태 속에서 처음으로 독립노조를 만들며 주동자가 되어 체포되었다 추방당해 외부자가 되었던 한둥팡, 반대로 문화혁명 및 친중국파와의 대립 속에서 홍콩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홍콩이 중국에 편입됨에 따라 중국의 내부 아닌 내부 속에 들어갔고, 그런 조건에서 여전히 외부자로서 중국의 인민과 운동을 지원하고 그에 개입하려는 아포 레웅과 조셉 청이 그들이다.


물론 네 개의 극이 복잡하기 이를데 없고 광활하기 그지 없는 중국에서 길을 찾는 지도 전체를 요약한다고는 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한 이들과는 반대로 공동체의 힘에 사로잡혀 개인적인 자유가 부재한 것이야말로 지금 중국의 가장 근본적 문제라고 보면서, 중국정부와 각을 세우고 있는 자유주의자친 후이나, 중국이란 구도를 벗어나 동아시아라는 틀에서 중국을 보려 하는 쑨 거는 이 네 개의 극에서 벗어나는 또 다른 사유의 방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인민, (국가의) 내부와 외부라는 네 개의 극은 현재 중국에서 진행되는 사건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고려해야 할 최소항이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이는 중국 정부나 당 지도부의 발언으로 중국을 이해하거나, 아니면 그에 대한 서방에서의 해석으로 중국을 이해하는 일방적이고 단조로운 입장에서 벗어나 중국의 현재에 대해 입체적이고 역동적으로 생각할 사유의 공간을 제공한다.


사회주의 혁명에서 당과 국가, 인민의 관계, 도시와 농촌의 관계, 그에 따라 발생하는 노동자와 농민, 특히 농민공의 문제, 그리고 사회주의적 깃발과 자본주의적 시장 사이에서 진행되는 경제개혁과 정치개혁의 문제, 사회주의 국가에 의해 배제되고 착취당하는 인민대중의 문제 등 인터뷰이들이 논하는 많은 문제들을 나는 이런 구도 속에서 다시 읽을 수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국가를 통해 문제를 보는 이들에 대해 어쩌면 너무 안이하다할 평가를 했을 것이고, 사회주의 중국에서 다시 한 번 이념의 무력함과 인간의 무참함에 절망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그들의 사고와 행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두 개의 사건이 있다. 문화혁명과 톈안먼 시위가 그것이다. 그 이전과 이후가 결코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사건이란 말에 강하게 부합한다. 이 책의 인터부를 읽다보면, 문화혁명 이후 중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이 사건을 받아들이고 영유하는 방식의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처럼 느껴진다. 이 책에서 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자신에게 거부할 수 없는 것이란 점에서 운명처럼 닥쳐왔던 이 사건들에게 대해 한결같이 진지하다. 아마도 그런 진지함이 자신이 겪은 사건을 쉽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했을 것이고, 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삶을 펼쳐가는 과정에 어떤 깊이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우리에게도, 닥쳐온 사건들에 대해, 혹은 닥쳐올 사건들에 대해 좀더 진지하고 깊이 생각하며 영유하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이유에서 이 책은 단지 중국에 대해 단지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책을 넘어서는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 글은 프레시안 북스에 2013.9.27자로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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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의 힘, 실재를 향한 열정

(바디우, 세기, 이학사)

이진경/수유너머N 회원

 

 

 

복제가 원본을 초과하고, 원본 없는 복제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시대, 진리나 주제을 말하는 게 촌스러운게 되어 버린 포스트모던 시대에, 바디우는 기꺼이 진리와 주체를 말한다. 헤겔은 한 시대의 대세가 된 것을 시대정신이라 명명하며 개인을 넘어선 정신의 힘을 말한 바 있지만, 바디우는 그에 거스르는 반시대성’(니체)의 편에 서 있는 셈이다. 그의 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인 개념인 사건진리가 바로 그렇다.


그가 말하는 사건이란 9시 뉴스에 매일 나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있어도 평소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날 갑자기 솟구쳐 오르는 것, 혹은 예상하거나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 갑자기 도래하는 것, 그게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가령 80광주사태같은 것이 그렇다. 바디우에겐 아마 685월혁명이 그랬을 것이다. 물론 기존의 상황이나 지식에선 설 자리가 없는 것이기에, 그 사건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것의 도래를 볼 줄 아는 이에게만 그것은 사건으로 온다.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 그것은 그저 지나가는, 별 거 아닌 거’, 아무것도 아닌 거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사건이라 함은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결코 같을 수 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것은 기존의 틀이나 지식에서 벗어난 것이기에, 그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모호하기 마련이다. 사회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기존의 통념이나 지식으로 그 사건을 해석하게 되는데, 그 때 그 사건에 고유한, 전에 없던 특이성은 보이지 않게 된다. 따라서 그런 해석에만 맡겨두면, 그 사건은 전에 없던 면모를 잃고 기존의 어떤 것에 맞춰지게 된다. 내란음모 사건이 되거나, 간첩의 선동에 놀아난 폭동, 혹은 늘상 있던 데모 같은 게 되고 만다.



그걸 사건으로 체험했다면, 이런 해석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건의 특이성을 지우려는 시도, 통념적인 해석과 대결하며, 그 사건이 갖는 의미를 탐색하고 그 의미를 보이게 하기 위해 지배적인 해석과 싸우게 된다. 때론 거리에서, 때론 조직에서, 때론 분석적인 글로, 때론 항의의 함성으로. 이처럼 기존의 지식이나 관념 안에 자리를 갖지 않기에, 그런 지식이나 관념에 간극을 만들고 그것과 대결하며 그것의 자리를 만들어가는 활동을, 그런 활동의 충실성을 바디우는 진리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처럼 충실성을 갖고 사건의 진리를 만들어가는 이를 ‘주체라고 말한다.


이런 사건과 유사하게, 기존의 체계 안에 자리가 없지만, 그렇기에 기존의 체계에 균열과 간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것을 정신분석학(라캉)에선 실재라고 부른다. 이는 우리가 통상 현실이라고 말하는 것과 아주 다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현실을 고려하거나 알라고 말할 때에도, 현실이란 알 수 없는게 아니라 알 수 있는데 미처 생각지 못한 것, 그래서 좀만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현실은 대개 지배적인 가치의 체계나 질서를 뜻한다. 가령 현실적으로 생각해라는 말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이나 지위, 남들 흔히 하는 그런 삶의 방식을 환기시키는 말이다. 실재란 이런 가치나 의미를 갖지 않는 것, 현실의 질서 바깥에 있는 것, 그래서 저기 있어도 보지 못하거나 억지로라도 피해가려는 그런 것이다. 얼룩이나 상처 같은 것, 끔찍한 폭력이나 처참한 고통 같은 것이다.



*이 글은 중앙일보 2014.1.25자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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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상 최대의 마술쇼!, ‘원전 머니’가 감추는 원전의 문제점들

- 신문 아카하타 편집국, 『원전 마피아』(나름 북스, 2014)



지안 / 수유너머N 회원





작년 봄 쯤 뜨거웠던 원전 비리적발 문제에 이어 연말에는 원전 해킹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작년 26, 신고리 3호기에서 노동자 3명이 질소배기밸브의 결함으로 사망했다. 원전과 관련하여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문제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최근 노동자 3명의 사망사고가 발생한 울산의 원전, 신고리 3호기의 모습이다. 



최근 신고리 3회기 노동자 질식사망사고의 원인이 된 밸브를 납품한 업체는 2013, “원전 비리 전수조사 과정에서 수동단조밸브의 시험성적서를 조작한 것이 밝혀져 공급업체자격 효력 정지를 당했으나 2년 후 심사를 거쳐 공급업체 자격을 회복한다. (자료 출처: 민중의 소리, 12/30일자, 구자환 기자) 비리 납품으로 적발된 이력이 있는 업체의 밸브 작동 이상으로 3명의 노동자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러한 원전 안에서의 사망사고와 원전 해킹사건의 대응능력을 보았을 때 우리는 원전 관리 능력을 총체적으로 문제 삼아야 한다. 두 가지 사고 모두 대응능력은 미비했다. 노동자 3명이 사망할 동안 그들의 위치를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으며, ‘원전 해킹문제에 있어서는 12/9일 원전 해킹이 처음 발견되었지만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열흘 뒤인 12/19일 발표한 관심 경보뿐이었다.


대체로 사람들은 원자력 사용에 있어 효율적인 비용을 자주 논한다. 그렇지만, 원전의 주요 구성 물질인 플로토늄만을 따져보아도 그것의 반감기는’ 24000년이다. 원자력 발전소를 이용하는 것에 당장 들어가는 비용을 제외하고도, 인류는 앞으로 몇 만 년 동안 핵 폐기장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비용을 계산해보았을 때, 그리고 지금 고려하는 것이 불가능한 여러 재해들을 염두에 두었을 때 우리가 원전을 이용하는 것은 정말 효율적인 것일까?



"지상 최대의 힘!" 안전장치 없는 원전 신화

지상 최대의 힘-인류는 그것을 수중에 넣고 스스로의 의사에 따라 사용할 수 있다.” 이 문장은 1954AEC의 홍보책자에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지상 최대의 힘이란 원자력 발전소-원전-를 가리킨다. 마술쇼에나 어울릴 법한 지상 최대라는 수사는 이 힘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오히려 잘 드러내준다. 상자 속에서 비둘기가 사라지는 마술은 비둘기가 압착되어 상자 속에 깔리는 것을 눈속임으로 포장한다. 깔린 비둘기 일본과, 마술사 미국의 관계는 원전 머니를 통한 온갖 번쩍이는 것들로 숨겨진다. ‘여기 보세요. 여기에 비둘기를 마음대로 사라지게 하는 마술쇼가 있습니다!’ 





1950년대부터 미국이 광고하던 지상 최대의 힘이 황당한 속임이었는가는 2011년 후쿠시마를 통해서 밝혀졌다. <원전 마피아>는 이러한 마술이 어떻게 구조적으로가능했는가를 따져 묻는 책이다. 사실 원전의 일차적인 문제점은 일단 사고가 일어나면 그 피해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끝없이 확대 되는 원전 사고의 이질적 위험’”이다. 일본에서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피해 범위가 넓어지고 있는 피폭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현재 일본의 70%가 세슘 오염지역이다. 그리고 전 영토의 20% 고농도 위험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단 한번이라도 원전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것은 피해의 규모를 따질 수도 없으며 되돌릴 수도 없는 지구적 차원의 문제가 된다. 핵폭탄과 원자력의 공통점은 중성자 충돌로 발생하는 힘을 이용한다는 원리이며, 차이점은 핵의 농도와 분열 속도이다즉 핵의 농도와 분열 속도를 제어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원자력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자력 이용의 전제는 그것에 대한 제어가 충분히, 언제나 가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난 일본 후쿠시마 제 1원전 사고를 통해서, 원전이 제어 가능하다는 생각이 실제로 얼마나 불가능한 것인지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의 이미지다. ‘은 피폭자들, 공포, 죽음을 연상시키지만 원전은 보장된 경제적인 생산성과 안전할거란 기대를 갖게 한다. 즉 핵폭탄이 전쟁과 결부되어 있다면 원전은 핵의 평화적인 이용처럼 여겨진다.



세계 5대 과학지인 PNAS에서 게재한 일본 방사능 지도이다.


 

2014521, 간사이 전력 오오이 원전의 운전 금지 요구와 관련해 진행된 재판이 있었다. 이때 후쿠이 지방법원의 오오이 원전 3,4 호기의 재가동 금지를 판결했다. 재판부의 판결문은 정확히는 원전의 안전 기술과 설비가 취약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이는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최근 문제가 불거졌던 부산 기장군의 고리 1호기는 30 수명으로 설계되었으나 37년째 가동되고 있다. 노후 원전과 원전 비리 문제(바로 몇 주 전에도, 원전 부품인 전동기를 8간 담합하여 입찰했던 기업들이 적발되었다.)를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2014년 한국 사회란 UAE 원전 수주를 따낸 것을 자랑스럽게 홍보하는 사회다.



원전 대국 일본을 탄생시킨 미국의 정치적 전략

일본은 세계 3대 원전대국이다. 일본이 50년대 이후로 급격하게 원전을 건설하여 원전대국으로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20세기 미국 아이젠하워 정부의 전략이 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지역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이후로 미소간의 핵전쟁에 대한 국제적 우려가 발생한다. 그러자 미국은 국제 사회에 새로운 전략으로 대응한다. 그것이 바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평화를 위한 원자력연설이었다.

미국의 원자력 평화 이용의 숨겨진 두 번째 전략은 사용가능한 핵물질의 확보였다. 군사적으로 전용하지 못하는 물질인 플로토늄을 외국에 유치한 원전이라는 장치를 통해 재획득하는 것이다.

 

한편 21세기의 일본 민주당 정권은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에도 불구하고, 원전수출 방침을 고수하는 중이다. 수출 대상국은 베트남, 요르단, 리투아니아, 터키, 4국이다. 일본 경제상업상은 국내에서 원자력 이용을 계속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와 가지고 있는 기술을 다른 나라에 이용하도록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자원에너지청 담당자는 도쿄전력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영향과는 무관하게 교섭이 조용히 진행되고 있다.”고 전했다. 미국이 전 세계, 특히 일본에 원전을 건설한 것이 정치적 이익 때문이었다면 이제 일본의 원전 수출 문제에서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생명권에 우선하고 있다.

 


원전 설립 지역의 발전기금을, 전기세 형태로 거꾸로 납부하는 지역민들

일본에서 원전 부지로 선정이 되면, 그 지역에는 온갖 출처 없는 기부금이 흘러들어온다. 지자체당국도 기부금의 출처를 밝히지 않는다. 1974년 일본에서는 전원 3법이라는 법이 만들어졌는데, 전원 3법이란 세금으로 원자력발전소 입지 지역에 답례용 공공시설등을 건설하고 현지를 원전 추진체제 안으로 편입시키는 제도이다.

지자체 관계자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보면서 새삼 아오모리의 원자력 관련 시설에 공포를 느꼈다. 솔직히 큰 액수의 기부금을 생각해 보면 원전 탈피를 말하기가 주저된다.”고 말할 정도이니 전원3법 제도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원전을 유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부금은 마을 만들기 사업이나 지역 발전을 위해 쓰인다. 그런데 원전 머니를 통해서 리조트 같은 초등학교와 번듯한 건물들이 들어서면 마을 만들기활동, 혹은 적어도 지역발전은 가까워지는 걸까?

카시와자키 모치다 시의원은 원전 머니로 지역시설을 짓는 것이 지역사회를 위한 일이라고 모두 착각하지만, 이런 돈들이 오히려 주민의 단결을 저해한다고 말했다. 대규모 시설에 유지비는 당연하게 많이 들고, 그로 인해서 지자체 재정이 압박 받는다. 도심이 아닌 지역에 수요나 필요와 무관하게 대규모 시설을 지었을 때 오히려 지역 적자가 발생한다.


이런 눈 먼 돈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 시절, 56.8%의 전력 요금 인상안이 통과된다. 즉 전력회사가 뿌려대는 지역 기금은 일본 국민들의 전기 요금에서 충당되는 것이다. 인상된 전기요금에는 원전 입지 지역으로 들어가는 지역기금을 이루고 있는 전원개발촉진세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세금은 전력회사가 일본 정부에 납부하는 형태지만 사실 전기 요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원 개발 촉진을 위한 비용을 사실상 일본 국민들, 원전 설립 지역 주민들이 부담하고 있는 것이다.

 후쿠시마 사건 이후로 지역주민들 역시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기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은 지역발전을 위한 필요악인 것처럼 선택된다. 또한 한국의 경우에서도 전력난을 해결할 여러 가지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만이 답인 것처럼 여겨지는 여론을 지난 2014년 총선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원전 마피아>의 부제는 이권과 종속의 구조이다. 이권에 눈먼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구조에 생산 중심적 사고방식은 종속된다. 이러한 구조가 지속되는 한 원전에 대한 종속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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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우리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한병철, 피로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박기형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성과사회, 우리는 여전히 피로하다

 

2014년을 돌아볼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지난해를 기억할 여러 중요한 단어들이 있지만, 여기서 필자는 드라마 <미생>을 꼽고자 한다. 드라마 <미생>은 직장인과 대학생을 비롯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을 인상 깊게 그려냄으로써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대학생인 필자가 취업준비 중인 친구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드라마 속의 인물들에 자신들을 대입하여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과 각종 불만들을 토로하였다. 이렇듯 드라마 <미생>은 끊임없이 경쟁의 장에 내몰리는 한국인들의 우울한 자화상에 대한 자각과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2015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성장에 사로잡혀 있다. 새해 벽두부터 경제침체에 대한 우려와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신년사들이 각종 미디어를 장식했고, 심지어 경제민주화 논의를 무색하게 할 만큼, 경제 활력을 위해서는 경제범죄를 저지른 재벌인사들을 사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보란 듯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지금도 수많은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이 자기계발과 성과창출을 위해 노력하며, 스펙 쌓기 및 구직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비록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의 장 속에 뛰어들어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무한한 경쟁에 따른 불안감에 대한 사람들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완생이 되지 못한 채 미생으로 머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더욱 높은 수준의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즉 한국 사회는 경제가 좋은 성과를 내야, 기업이 발전해야, 국가가 성장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삶의 불안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무한경쟁과 경제성장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 사회를 우리는 무슨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성장과 발전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 새로운 자본주의 이윤창출 방식

 

한병철은 그의 저작 피로사회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단면을 피로성과라는 표현을 통해 포착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하면서, ‘성과사회의 구조적 성격 상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경쟁 그리고 성장의 압력에 내몰린다고 말한다. 즉 저자는 현재의 사회상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전환되었다고, 또는 전환되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이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바뀐다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과사회에서는 긍정성의 과잉이 나타나고, 자아는 끊임없는 자기착취 속에 빠져,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마모시키는 쳇바퀴에 놓인다. 이에 따라 자아는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보다는 할 수 있음이라는 능력에 따라 행동하지만, 완전하고 무한한 자유의 약속은 오히려 그에게 무기력함과 낙오자라는 자책감을 안길 뿐이다.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성과사회의 주체들은 우울증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와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로 보장받은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소진하고 있다. 따라서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 된다.

특히 한병철에 따르면, 이러한 성과사회의 요구와 자기착취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윤축적 방식이다. 즉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가 보다 많은 이윤창출을 위해서, 더욱 생산적이기 위해서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보다는 자유와 선택에 의한 자기 착취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며, 그러므로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 멈춰서기, 머뭇거리기, 사유하기

 

저자는 성과사회의 압력에 따른 우울증의 확산을 방지하고, 성과주체를 쳇바퀴에서 내려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깊음 심심함’, ‘보는 법이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성과사회에서는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멀티태스킹 능력이 요구되는데, 이로 인해 성과주체는 사색과 같은 깊은 주의, 깊은 심심함을 상실하고 산만한 주의, 분주한 활동성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성과사회의 자아는 과잉활동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하는,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 속으로 빠져든다. 즉 활동적 삶이 절대화됨에 따라 사색적 능력이 상실되었고, 그로 인해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보고, 생각하고,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