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번역 안해줄거 잖아]



한국전쟁 시대의 '공작자'들의 문화=정치






 

가게모토 츠요시/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미치바 치카노부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 시대 1950년대 서클 문화운동의 광망>(미스즈 쇼보, 2016, 411, 3800세금)



원제목:道場親信, 下丸子文化集団とその時代 1950年代サークル文化運動光芒, みすず書房, 2016.


 

1. 서클 운동 연구

 

일본에서의 서클 운동을 언급할 때, 50년대 말 다니가와 간에서 논의를 하는 사례를 들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니가와 간이 그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은 서클 운동이 한 단계를 마무리한 시기의 일이다. 서클 운동이 처음에 활발해진 시대는 50년대 초반이다. 그런데 그것의 생생함을 일본현대사는 제대로 조명하지 못해왔다. 물론 당사자들이 남긴 책은 꾸준히 출판되어 왔으며, 부분적/단편적으로는 계속 접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2007년에 잡지 <현대사상>에서 특집으로 기획된 '전후 민중 정신사'라는 책자였다. 이는 서클 운동을 새롭게 논의하는 시도였으며, 여러 필자들이 50년대 초반에 대한 논문이나 회고를 다수 실었다.


약간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식민지 조선 출신이고,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소설을 썼던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41)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중에 이 작가로 학부 졸업논문을 쓰게 되는데, 고바야시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 알기 위해 이것저것 먼지가 쌓인 책을 뒤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고바야시는 50년대 초반의 공산당 무장투쟁에 대한 소설을 썼기도 했는데, 이러한 운동은 일본공산당의 공식적 역사에서는 '극좌폭력노선'으로 일괄 부정되고 있다. 그러한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간행된 잡지를 봐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것이 <인민문학>이라는 잡지이다. 지금으로는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극좌폭력노선'의 문학잡지로 별로 평가되지 않았던 잡지이다. 그런데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의 저자를 비롯한 몇 명의 꾸준한 연구로 인해 이제는 <인민문학>에 대한 편견은 없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째든 당시 도바 코지의 <운동체 아베 고보>(鳥羽耕司, 運動体 安倍公房, 一葉社, 2007)라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 경험을 중심으로 한 연구서도 읽었으며(이건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많은 일본문학 연구자에게 이 책에서 받은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자는 '우리 시대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경험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라고 웃더라고), 50년대 초반의 정치의 복잡함은 공산당의 공식역사에서 지워진 만큼 흥밋거리가 되었다. 물론 아직 조선총련이 출범 이전이기도 하며,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공산당에 속해 있었으며, 더욱 무장투쟁이나 한국전쟁 반대운동 등, 다양한 층위에서 50년대를 바라보고 있던 무렵에 <현대사상>의 특집에 접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상>특집에서 읽은 것은 50년대 초 도쿄 남부 지역의 풍부한 서클 운동에 대한 사례들인데, 내가 그때까지 읽은 적이 없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들이었다. 이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온 사람들이 있던 덕분에 가능한 연구였다(<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에서는 어떻게 자료가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서술에서는 절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영역에 있는 것이 당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면서 움직이던 서클운동들이다. 그것에서는 정치적인 문구도 쓰였기 때문에 문화주의자들에게는 '정치적'이라고 부정되어, 정치진영에서는 '문화적'이라 부정당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은 문화적/정치적이라는 부정의 언어가 아무것도 대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정치적인 수사로 무엇이 표현되었는지를 육박하려는 내재적 이해의 시도이다. 자연발생성이나 목적의식성으로 정리함으로 지워져버린 영역에 있는 것이 바로 50년대 서클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와중에서 표현된 것들, "그것은 '정치''문학'이냐는 이자택일 중에서 설정된 논쟁 틀을 벗어나는 것이며, 제도적 '문학'을 다시 정의하도록 할 가능성을 내포한"(207)것이었다.

 

2. 한국전쟁 후방에서의 시 쓰기

 

일본어로 '전후'라고 할 때 1945년 이후를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후'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해갔을 만큼 일본은 한국전쟁의 일부분을 구성했다. 즉 미국의 전쟁기계 속에 있으면서 미군이 정한 법의 외부에서(비합법영역에서) 싸우는 것이 50년대 초의 '운동'이던 것이다(14). 그 비합법성은 바로 한국전쟁반대운동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남부 공장지대는 서클 운동이 활발한 곳이면서 동시에 조선특수로 은혜를 받고 있는 곳이다. 이 겹침은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도쿄 남부지역의 당대 성격이다. 즉 최악의 방식으로 조선과 연결되면서 그와는 다른 관계성을 실현하려 하는 시도로서 운동이 있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저항은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한 저항 가운데에서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시모마루코 문화집단은 생긴 것이다.


이 지역에 모이던 대소 공장들은 인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도보로 오가면서 서클 운동을 만들었다. 이 서클은 기업체나 공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거기에서 시도된 것이 '()'였다. 시는 노동자들이 쓰기 쉬운 장르였으며, 시를 쓰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의 시각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인용을 해보자. "시는 '집단창작'하기 쉽고, '나도 쓸 수 있었다'는 체험을 그다지 고생하지 않아도 손에 놓을 수 있는"(228)문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가장 문턱이 낮은 문학이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턱을 넘은 경험을 통해 문학표현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가 사회운동과 직결된 시대였다. 이러한 시 쓰기를 노동자들에게 권유한 자가 바로 문화공작자들이었다(이 가운데 아베 고보도 있었다). 이는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과는 다른 언어표현을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서클에서 시도된 이러한 '쓰기'를 잡지<인민문학>은 적극적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이러한 '쓴다'는 것이 정치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문학/정치라는 기존의 코드를 계속 바꾸면서 표현을 창출해내는 존재가 바로 '공작자'이다.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이던 츠루미 슌스케는 일본 쇼와 사상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서클 문제를 전향문제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복잡하면서 수많은 표현자가 나오게 되는 이 서클의 시대야말로 일본에서 '주체'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극한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건드리는 존재가 '공작자'인 것이다.


그런데 50년대 후반, 서클 운동은 점점 침체되면서 도쿄 남부에서는 '문학'을 지향한 단체로 수렴해간다. 이는 문학적인 부분이나마 집단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200). 서클이 문학 서클로 되어갔을 시절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수용소(조선인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으로 여기에 수용된 조선인은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에 강제추방이 되기도 했다)'오무라 조선 문학회'와의 교류이다. 거기에서 잡지의 가리판을 대신해서 해주지 않을까라는 요청이 와서 도코 남부의 문학집단이 대신해주었으며, 교류가 시작한 것이다. 오무라 수용소에서 온 편지에는 "오무라 수용소 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공민자치회 오무라 문학회"(159-160)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결국 도쿄 남부의 서클 운동은 59년에 해산되기에 이른다. 55년 체제의 성립은 일본공산당의 단일화도 포함하는데, 당일화되기 전에 <인민문학><신일본문학>에 흡수된다. 이 과정에서 '공작자'라는 개념 역시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되지도 못한 채 청산되어버린다. 그 후 얼마 시간을 두고 50년대 말에 바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규슈 지방의 <서클 마을>이던 것이다. 도쿄에서 좌절된 <공작자>라는 개념을 감히 가지고 나타난 것이 다니가와 간이었다.

 

3. 공작자, 에지마 히로시

 

이 책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더군다나 필명이나 무서명의 기사에서는 '개인'이 보이지 않을 경우도 많다. 그런데 특별히 강조된 인물이 에지마 히로시(江島寛)이다.


본명은 호시노 히데키. 식민지 조선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편 관련의 일을 했기 때문에 조선 각지에서 자랐다. 경성중학 재학 중 일본 패전으로 일본으로 인양했다. 그는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한 시나 소설을 썼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고등학교를 방교처분당해 도쿄로 건너갔다. 야간고등학교에서 배우면서 서클 활동을 활발하게 벌었다. 노동자들과 연결되어 공작자로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해 나간다. 즉 표현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변혁하며, 거기에서부터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코드를 창출하는 운동/표현활동을 벌었다(304).


한국전쟁 휴전 후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부흥'해 가는데, 부흥 속에서의 대중사회의 도래는 '공작'의 목표를 보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길을 열어야 했던 그였지만, 548, 21세로 죽고 만다. 장례식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에지마보다 5살 위인 고바야시 마사루도 방문했다(342).


그의 시는 도쿄 남부와 전쟁터인 조선을 연결하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지 군수공장이나 하네다 군용 비행장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연결된 이미지는 실체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넘어가는 상상력이다(322). 전쟁과 미군으로 연결된 도쿄와 조선을 노동자의 연대로 또 다른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해방된 동아시아를 꿈꾼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서로의 관계가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도쿄와 조선은 전쟁에서만 연결된 상태였다. 그것과는 다른 상상력을 마음에 가지면서 죽고 만 에지마의 사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조선'과 대면하려 한 일본의 사상가를 더 한 명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죽음과 관련해서 저자인 미치바 치카노부 역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것을 추가해두어야 한다. 책 후기를 보면 2016년 초에 암이 발견되어 스스로의 작업을 다시 검토하면서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논문을 정리해 이 책을 출판되기에 이루었다고 한다. '후기'가 쓰여진 20169, 그는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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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wh

도시의 목소리 듣기




 

가게모토 츠요시

 



 


하라구치 다케시 <외침의 도시>(라쿠호쿠 출판, 2016)

(원서명原口剛びの都市洛北出版, 2016, 410(사진 다수), 2400)



1. '가마가사키'라는 공간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책 제목은 '외침'이다. 이 책을 읽어보면 확실한 외침의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들리지는 않는다. 도시는 철저히 외치지 못하게 개조되었고, 과거 외침들은 마치 속삭임처럼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듣고야 비로소 외침은 외침으로서 들리기 시작한다.


이 책은 일본 최대의 인력시장인 오사카의 '가마가사키' 지역의 역사를 지리학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부각시킨 것이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을 지탱한 것이 일용직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이제 고령이 되어서 가마가사키는 현재 고령 남성들이 많은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일용직 노동이 없어진 것이 아니며, 현재 노동자들은 휴대전화를 통해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간다. 이는 매일 새롭게 공급되는 후쿠시마 원전 수습 '작업원'들의 존재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예전의 일용직 노동자가 그랬듯이 '노동자'로 불리지 않았으며, '작업원'이라 불린다(201611월 단계 신문보도를 보면 최전선에서 외국인도 일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는 이제 물리적인 '인력시장'에 갈 필요가 없어진 시대에 있는 것이다. 현재 가마가가키는 비교적으로 싼 값의 숙소(원래 일용직 노동자가 살던 숙소)가 많기 때문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드나들기도 한다. 행정적으로는 이미 '가마가사키'라는 용어는 쓰지 않게 되었는데, '가마가사키'라는 명칭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행정적인 시선과는 다른 시선으로 이 지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는 공문서와 주민들이 다른 지명을 쓴다는 것인데, 이는 통치자와 통치받는 자들의 비대칭적 관계를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113). 비교적으로 오사카 도시부에 가깝다는 점과 오사카시의 노숙자 배제의 움직임 때문에 젠트리피케이션의 대상이 되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말한다면 일본 역사 속에서 최하층의 사람들이 살아온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물론 그곳으로 온 조선인들도 많을 것이다). 이러한 지역이기에 몇 번이나 폭동이 일어났으며, 그 폭동을 통해 여러 권리를 획득하기도 해왔고, 동시에 폭동을 통한 인간관계 형성술을 만들어낸 지역이다.


필자인 하라구치 다케시는 이 가마가사키에서 현지조사를 하면서 2008년의 폭동에 조우하며, 그 현장에서 "과거에서의 목소리"(21)를 듣게 된다. "우리는 이미 가마가사키적 상황을 살고 있다. 그렇다면 가마가사키의 기억을 상실하는 것은 현재에 대한 시좌를 획득하기 위한 실마리를 놓쳐버리는 일이 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가마가사키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가 그것을 재구성하는 일이 필요하다."(30) 이것이 필자의 문제의식이다. 필자가 지리학자로서 완성시킨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 책은 역사나 지리를 바라볼 시점으로 항상 '현재'와의 관련을 맺으려 한다. 그만큼 젠트리피케이션의 흐름이 과거와 현재의 단절을 넘어, 아예 과거의 기억을 없애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단순한 평면적인 지리학이 아니라 (폭동에서의 투석이 바로 그것이었듯이) 아스팔트를 떼어벗기고, 흉각에 의지하면서 지하로 내려가는 역사기술과 함께 '지리'공간을 쓰겠다고 말한다. "공간을 '움직인다'"(32)라는 선언과 비슷한 말은, 젠트리피케이션을 당해 가는 현재 지리파악에 대한 비판의 근거지를 만들기 위한 최대한의 선언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가마가사키/오사카 항 이주노동자들의 흐름

 

필자는 우선 가마가사키로 들어가기 전에, 커다란 일용직 노동자의 인력시장이 오사카에 만들어져야 했던 이유인 오사카 항의 항만노동자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한다. 필자는 가마가사키의 외부에 있는 오사카 항을 통해 "항만지역에서 가마가사키에 걸쳐 연결된 도시 하층노동의 지리가 부각된다. 이러한 관계성에서 가마가사키라는 공간은 이해되어야 한다"(73)고 말한다. 이 공간을 유동하는 노동자들은 '근본적 법외성(法外性)'(76)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실 일본에서는 미국 점령기 GHQ의 행정에서는 함바(飯場)제도 등을 없애는 '민주적'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방침이 내세워지기는 했는데, 한국전쟁 때문에 일본이 군사적 '특수(特需)''은혜'를 받아 다시 노동자 공급에 관련된 규제가 완화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본에서의 함바제도가 존속하도록 만들었다는 지적은 한국이라는 맥락을 읽어내려는 독자에게 흥미로운 부분일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근대 함바제도를 지탱한 노동자들은 오키나와, 아이누, 조선 등 몸밖에 팔 수 있는 것이 없어진 유동노동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로 가마가사키의 노동자는 결코 '일본인'만이 아니며, 일본에서도 못사는 지역 출신의 사람이 많다. 이를 잘 보여준 다큐영화로 김임만 감독의 <가마가사키 권리 찾기>(2011)가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가마가사키의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등장한다. 어쨌든 가마가사키는 이민노동자들이 모이는 장소였던 것이다. 즉 정착하는 '노동자'와는 아예 다른 성격을 가지는 유동적인 '노동자'(어떤 의미로 그들은 '노동자'로 불리지도 않았으며, '노동자'들에게 차별을 받기도 했다)이었던 것이다(이 책에서 일용직 노동자들의 세계에서는 조선어에서 나온 용어가 있다는 것이 몇 번 제시되는데, 한국의 '노가다''함바'가 일본어에서 온 것처럼 하층노동자들의 용어는 자본가들보다 국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마가사키의 일용직 노동자들은 "국가와 자본의 모순을 온몸으로 짊어지는"(98) 존재인 것이다.


항만 노동자들은 1962327일에 파업을 수행했다. 이 때 파업은 전 태평양적으로 벌어진 것이었다. 오키나와(당시 일본이 아니었다), 미국, 케네다, 하와이, 호주, 인도네시아, 인도, 중국, 소련 등에서 동맹 파업이 수행되었으며, 일주일에 걸쳐 일본선적의 선박에 대한 일제의 작업을 중단되었다. 이는 일본에서의 항만노동법의 실현을 요구하는 것이었다(174-7). 그런데 이 때 오사카 항 파업의 중심이 된 노동자는 일용직 노동자가 아니라 정규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에는 동시기에 일어나던 가마가사키의 폭동은 보이지 않았다(185). 그런데 이 항만노동자들은 가마가사키의 일용직 노동자를 조직하려 나서며 다양한 투쟁을 벌인다. 거기에서 획득하는 것은, 일용직노동자들에게 부여될 여름과 겨울의 일시적 수당인 '소면 값''떡 값'이다. 이들 노조활동가들은 계획된 의식적 운동을 지향했으나, 경찰의 눈에는 운동과 폭동을 구별할 수 없었다. 물론 정규직 노동을 바탕으로 하며, 의회투쟁 같은 것도 하던 항만노동자들의 운동은 정확히 운동이며, 폭동은 아니었으나, 그들의 방법은 폭동에서도 사용이 되었다. 이러한 연결이 만들어진 전제로 가마가사키와 오사카 항을 왔다갔다하던 일용직노동자의 존재가 있었다. 그리고 60년대 말부터의 항구 컨테이너화는 그들의 일터를 잃게 만들었으며, 일용직노동자들은 건설현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80년대부터의 오사카 항 재개발은 이러한 일용직 노동자들의 기억을 망각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기억은 정리된다(그 상징 가운데 하나가 오사카항 부근에 있는 '가이유칸海遊館'이라는 수족관이다). 그렇지 않은 시각을 확보해 나가야 한다.

 

3. '사회문제'와 도시개조 폭동의 이면

 

가마가사키는 계속 '사회문제'였다. 그런데 그것이 '사회문제'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폭동이 있어야 했다. 필자인 하라구치는 폭동은 '사회문제'를 부상시켰지만 동시에 '사회문제에 대한 처치'로는 봉합될 수 없는 별개의 힘을 가졌으며, 그것을 직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가마가사키=슬럼이라는 이미지 자체가 담론권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이미지를 통해 그 지역을 한꺼번에 해결해주는 방법으로 '사회문제''사회병리'라는 개념이 동원되었다. 즉 이들 개념이 보여주듯이 오사카시는 가마가사키 문제를 '외과수술'(142)과 같은 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놀랍게도 1966년에는 이 지역을 담당하는 '니시나리 경찰서'(활동가가 만든 폭동 기록영화 등을 보면 니시나리 경찰서는 '국영 조폭 니시나리 경찰서'라는 매우 적합한 나레이션이 나온다)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었다(147). 이렇게 가마가사키는 사회문제가 있는 지역으로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권력은 이 지역에서 자율적으로 무엇인가가 만들어지는 것에 경계하며 봉쇄하려고 한 것이다(148). 이 과정에서 가마가사키에서 살던 가족형태의 거주자들이 주변부로 이사하게 되어, 지역에 아이가 없어지고 단신노동자들의 지역이 되었다(일본 만화/애니메이션의 걸작 <자린코 치에じゃりんこチエ>는 가마가사키에 아이들이 있던 무렵이 잘 그려져 있다. 유튜브에서도 몇 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 직업 소개소인 '아이린 종합센터'이다. '아이린'은 한자로 쓰면 愛隣(사랑의 이웃)이다. 행정이 가마가사키에 부여한 이름은 매우 끔찍한 것이며, 가마가사키를 어떻게 개조하려 바라보는지 잘 보이는 이름이다. 때는 마침 오사카 만국박람회로 인한 건설 붐이었다. 국가도 일용직노동자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면 그만큼 강제적인 공간개조를 해야 할 정도로 이 지역에서 벌어진 투쟁은 격렬한 것이었다. 이를 필자는 앙리 루페블의 <도시로의 권리>에서 나오는 <도시적인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무리()가 무리를 불러올 중심성'이었다(165).

 

4. 유동적 하층노동자들의 폭동

 

인력시장의 일용직 노동자들의 폭동은 무질서적이면서도 일정한 리듬을 갖춘, 만 단위의 신체의 집단적 유동이었다(208). 폭동은 이 리듬을 만들어낸다. 가마가사키의 폭동은 1961년에 1, 62년에 2, 66년에 4, 67년에 1, 70년에 1, 71년에 3, 72년에 7, 73년에 2, 90년에 1, 92년에 1, 2008년에 1번 일어났다(221). 최초의 폭동은 차별 대응을 하는 경찰에 대한 항의 행동이 실마리가 되어 시작했다. 왜 그러한 집단적인 연결이 가능했냐면, 가마가사키의 노동자들에게는 '에고이즘''공생'의 마음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립되는 개념이지만, 모든 권력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에고이즘이며, 자신과 관련된 타인과의 강렬한 공생이라는 의미이다. 일용직노동자들은 서로 과거 이야기를 하지 않다는 것도, 관계성 만들기의 규범인 것이다(226-7). 그런데 그들은 가마가사키라는 '지리'를 공유하고 있었다. 동네 전체가 부엌이자 사랑방이자 사교하는 우물가 같은 것이었다. 이것이 에고이스트이면서 집단적인 노동자가   있는 폭동의 심성인 것이다(228).


이 점에 관해서 항만노동자의 노조는 폭동을 억지하는 역할로 스스로의 의미를 부여하며, 의회투쟁을 통해(노조에서 의원을 선출하고 있었다) 행정에게 문제를 알리고 행정을 통해 폭동의 원인을 해결하려고 했다. 이러한 노조의 시선은 여러 권리를 획득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에서 의의를 가지지만 이와 다른 흐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필자는 주장한다.


노조와 <폭력 수배사 추방 가마가사키 공투회의(가마 공투)>의 노선대립이 그것을 잘 보여준다. 대립의 원인은 월등투쟁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노조는 그것은 행정에게 시켜야 할 것이라 소극적이었는데, 가마 공투는 그렇지 않았다. 가마 공투는 '노조는 폭동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반란을 권력으로까지 올릴 수 없다'고 비판을 한 것이다. 이때 가마 공투는 '노무자'라는 용어를 다시 획득한다. '노동자'라는 용어는 노조 때문에 더럽혔다고 말하면서 차별용어인 '노무자'를 다시 발견하는 것이다. 가마 공투 활동가들도 참여한 <노무자 도세(労務者渡世)>라는 잡지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노동자라는 말과 노무자라는 말을 따로 쓰는 세상일반의 차별감정에 대해서는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신 차별받는 자의 반항, 반란의 자유는 확보한다, 라는 것이다."<노무자 도세>, 1975. (242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그들이 잡아낸 '노무자'라는 말은 '피식민적 상황'이 함의되어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일반과 노무자의 적대성을 명확히 한 것이었다. 이로써 그들은 노무자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도쿄나 오사카의 인력시장을 자유롭게 드나든 활동가였으며, 그리고 오키나와 미군 기지 앞에서 자신의 몸을 불태워 분신자살한 후나모토 슈지(船本洲治)가 노무자를 "유동적 하층 노동자"라고 규정했다. 이 용어는 인력시장을 단순이 하나의 지역으로써 이해하는 것을 거절했다. 다양한 여러 인력시장과 연결된 노무자들의 흐름(폭동의 흐름)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중심이 된 폭동은 파괴가 아니라 다채로운 실천을 가능케 할 정치적 공간을 만든 창조적인 것이였다. 우익에 의해 살해된 인력시장 활동가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야마오카 교이치(山岡強一)의 다큐영화<야마 당하면 복수하라>(1985)는 일본 곳곳의 장면이 나온다. 그 중 하나인 규슈의 탄광은 일본의 에너지 정책 전환 때문에 이동하는 노동자를 많이 산출했다. 그러한 노동자들은 도시의 공장으로 정착하지 않았으며, 인력시장에 모였다. 인력시장에 모인 노동자들은 '유동적 하층 노동자'이었다.


그들은 행정의 눈에는 노동자성을 상실한 자들이며, 시민사회의 '병리'로 보일 것이지만 그들의 '일탈'은 자율적인 '일탈'인 것이다(370). 그 흐름을 2000년대 이후의 노숙자배제 반대운동으로 연결시킨 것으로 이 책은 마무리된다.

 

 

 

부기. 이 글을 쓰는 중에 이 책에 대한 서평이 <아사히 신문>에 실렸다. '누구도 번역해주지 않을 책'을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 글의 대상이 천하의 부르주아 신문<아사히 신문>에 실리다니, 약간 이 연재 글의 성질을 애매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고 아뿔싸,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사히 신문>의 서평자는 이 책의 현대성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아마 책을 진지하게 보지 않는 채 쓴 것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을 이렇게 소개할 의미는 나름 있을 것이다. 매우 현대적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책이라 실제로 번역될 가능성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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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의 사상의 투쟁


후쿠다 가츠히코 <산리즈카 암흙> 읽는다


 


(원서 서지 정보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 4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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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리즈카 투쟁, 그리고 농업

 

도쿄 지방의 공항으로 알려진 나리타공항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커다란 공항이 건설되기까지 현지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는 것도 일본의 운동사를 조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오제 아키라의 기념비적인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가 한국어로 번역 소개 되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이 만화를 보면 그것이 어떤 투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만화에서도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보수'성은 그려졌다. 농민들이 일본 패전 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소위 '전후 개척자'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만화에서 그려졌으며, 그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나리타공항이 있던 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 그리고 농민들이 천황에 친화적이었다는 것 등도 이미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 그려진 바 있다.


사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일본 학생운동 가운데에서 ''을 지향하지 않는 집단에서 필독서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공산당을 비롯한 각 당파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으며, 따라서 ''을 지향하는 운동에서는 거의 읽힌 바 없는 만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마을 이야기>의 독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리는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의 다양한 운동 속에서도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만화는 일반잡지에 실린 것이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만화가 아니다.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은 공항의 당시 지명을 가지고 와서 '산리즈카 투쟁'이라고 불린다. 거기에서의 다양한 운동의 움직임, 인간생명의 희생, 운동하는 사람들의 싸움 등에 대해서는 많은 책이 발행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 같은 사람도 이 운동과 행정 사이의 갈등 해결에 간여했으며, <나리타란 무엇인가>(이와나미 서점)라는 책을 썼다. 혹은 최근 잇따라 DVD화되어 있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다큐 영화 가운데 하나인 <산리즈카의 여름>DVD로 발행되어 비교적 쉽게 관련 영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다큐 영화는 촬영중의 카메라맨이 중간에서 체포당하는 등(그래서 화면이 흔들린다), 상당히 생생한 작품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어느 정도 산리즈카 투쟁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책 <산리즈카 암흙>은 산리즈카에서 과연 어떠한 농업이 시도되었는지, 산리즈카의 ''이라는 관점에서 투쟁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상서이자 역사서이다. 심각한 부딪침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떠났으나 현지에 남아 농업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있던 농민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거기에서 어떠한 '농업'을 체득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발현시켰는지, 그러한 물음을 통해 일본이라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생각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저자인 후쿠다 가츠히코는 책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3년 생이며 1998년에 죽었다. 이 책에 실린 저자연보는 '낙서 연보'라고 되어 있으며,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후쿠다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했다가 바로 그만두고 다큐 영화 집단인 오가와 신스케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그는 산리즈카의 다큐 영화 촬영에 계속 참여했다. 한때는 산리즈카를 떠났지만 기본적으로 산리즈카에서 살았다. 70년대 이후의 산리즈카의 운동에 계속 관여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산리즈카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남겨진 것이 이 책이다.


그리고 하나 추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이 나리타공항이 있는 지역, 즉 산리즈카 투쟁 이후에 새로운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농사 현장을 20113.12의 원전 폭발은 오염지역으로 만들었다(자연재해가 아니라 동경전력이 만든 재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감히 지진과 쓰나미의 '3.11'이 아니라 원전이 폭발한 날인 '3.12'라는 용어를 쓰겠다). 이렇게 사상과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길고 긴 생활과 타 지역과의 연대운동을 원전은 순간적인 폭발로 파괴했다.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잘 조사하지 못해서 자세히 쓰기 어렵다(듣고 알게 된 정보는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밝히기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중심으로 소개하며,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쪽.


2. 보수성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마지막의 백성 봉기였다. 게다가 화산회토(火山灰土)의 백성 봉기였다. 지금 시작하려는 여행은 (중략) 누구나 기술이나 진보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시대에서 오로지 생활의 보수를 내걸은 산리즈카 투쟁의 의미를 찿는 여행이다. 말하자면 '보수 심층으로의 여행"(14)이다. "산리즈카를 응원한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산리즈카는 일관해서 보수의 사상이라고 해도 좋다. 다소 변명하자면 보수 반동이 아니라 보수 본류이다."(436)


이 책의 저자 후쿠다는 일본이 세계 최초로 굶주림을 극복한 나라라고 말한다(21). 그런데 그 대가는 '고도경제성장'이었다. '성장' 속에서 계획된 것이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공항) 건설이었다. 일본정부는 현지 농민들에게 '대체지'를 보장한다고 했는데, 이 토지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면적으로서의 토지이며, 농민들이 감각하고 있는 ''은 아니었다. 따라서 투쟁 초기에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농지 사수", "마을을 지키라"라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호소였다. 이 슬로건에 '군사공항반대', '미일안보조약 반대'를 추가한 것은 외부에서 온 사회당이나 공산당, 그리고 신좌파의 각 당들이었다. 외부 정치 세력과 일본국가는 '진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진보적인 정치조직이나 당이 내세운 것도 아니며, 일본행정이 내세운 것도 아닌 '보수'인 것이다(25).


그런데 농민들은 어떻게 이 토지에 오게 되었는가. 이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은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도 그려진 바 있다. 이 땅이 1945년의 일본 패전과 식량위기로 인해 농지로 개방되었다. 공식적으로 허락되기 전부터 농민들은 그곳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 일본은 미국 점령하에 있었다. 그 가운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전후 개척'이라고 해서 중국동북부 등 일본 밖에서 패전으로 인해 돌아온 농민들이 다수 있었다. 특히 산리즈카 투쟁에서 잘 알려지게 된 촌락들은 새롭게 들어온 그러한 농민들의 촌락이었다. 물론 원래 있던 농민들과 전후개척으로 들어온 농민들의 싸움도 있었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은 그러한  가지 성격을 가지는 마을을 함께 싸우게 만들었다. 농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투쟁 초기인 68418, '노인 행동대'118명으로 천황에게 청원하러 가기도 했다(47). 농민들의 싸움의 논리는 '우리는 천황을 대신해서 지금 정치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농민들은 중국의 모택동을 영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는 확실한 모순으로 들리지만 그 농민들의 마음으로 보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산리즈카는 본래 천황제 농본주의의 풍부한 토양이었다'는 것은 이 투쟁에 대해서 단순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공항은 천황의 목장을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를 농민들은 일본국가에 대해 던진 것이다.(52)


"<>이라는 말을 발견하여 그것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투쟁의 키워드로까지 결정시킨 것은 산리즈카가 처음일 것이다."(157) 그러면 산리즈카의 흙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책 제목 자체가 '암흙'이다. 이 흙의 문제는 이 책이 투쟁을 바라볼 방법이다. 이 지역이 화산회로 만들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농업용지가 아니라 천황가의 목장이었다. 이 땅이 좋은 흙으로 개조된 것은 농민들의 끊임없는 토양개량 덕분이었다. 이 토양개량 과정에서 화학비료도 많이 쓰였다. 바꾸어 말하면 개척자들의 분투한 것은 이 좋지 않은 화산회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산리즈카가 좋은 농지가 될 수 있던 것은 끊임없이 인간들이 고투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능해진 일본 전후 경제 성장이었다. 개척농민의 생활은 산리즈카의 풍경에 남아 있다. 바람을 막는 방풍림, 이는 개척농가가 외부 사람을 막아내는 거절처럼 기능한다(62). 이러한 의미로 전후 개척은 '마을'공동체가 되기 전에 파괴된 것이다. 농민들의 집이 파괴된 후 전신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진 마을은 "마치 개척의 최초로 돌아간 것 같"은 풍경이 되었다(146).


저자는 개척자들의 '인간불신'을 읽어내었는데, 그 정신이 좋지 않은 토지를 좋은 토지로 만든 정신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잘 보여준 말이 농민들이 말하는 "흙이 도망간다"는 말이다(67). 항상 풀을 뽑고 흙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공항 계획은 바로 이러한 개척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농민들의 개척은 과정에 있으며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국가는 빼앗으려 했다. 그들에게 채소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등의 종류가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는 것이 그들의 의식이다.


공항 계획 이후 반대파이던 농민들이 조건파로 '전향'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난다. 이때 가상적으로 '자족'이나 '마을'의식이 만들어진다. 이는 바뀌어 가는 농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농민들의 분열상황을 일상생활에서 떠맡아야 했던 것은 여성들이었다(100). 그러면서도 농민들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은 '사상'이나 '믿음'에 두지 않다는 것은 외부자로서의 저자에게 놀라운 부분이다


"서로 100%가 아니라 서로 결락한 부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결락하기 때문에, 서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계속하자는 마음이 남는 것이다"(116). 이 말은 공동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라는 우리가 항상 가지는 과제와 연결된다. 이러한 마을의 사상을 어떻게 육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투쟁 과정에서 다시 옛 마을 전통에서 호출된 것이었다. 이러한 마을의 논리에서 움직이던 청년행동대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상식으로 인식했다.


동시에 투쟁은 여성의 생활을 바꾸었다. 아무 권리가 허용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발언권이 부여되었다. 전투경찰(기동대)과 싸우는 과정은 젊은 남성과 싸운다는 의미를 가졌다. 어떤 의미에서 '외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들이 그들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다. 이는 동시대 페미니즘 운동과 아무 연결점이 없으면서도 관련된 것이었다.


산리즈카 투쟁에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이 농민운동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는 것은 좌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135). 이런 표현도 이와 관련된다. "농민은 농사 짖기에 돌아가면 흙이라는 불합리한 것과 격투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석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납득하지 않는다. 농민의 세계는 민주주의와 먼 세계인 것이다."(177.) 왜냐하면 농업이란 "식물을 관리하는 기술"(227)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대론적 논의도 할 수 있다. 청년들은 공해가 보도되기 시작한 이후 미나마타 병을 일으킨 '질서'회사의 농약이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며 고민하는데, 부모 세대는 화학비료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그것은 '노동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이렇듯 화학비료는 실감을 수반한 신화인 것이다. 이 역시 그들의 투쟁의 논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3. 민주주의가 아닌 세계

 

청년행동대는 나리타 용수문제에서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어중간함이었는데, 이 어중간함이 있었기에 ''의 사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240). 이 어중간함은 '지원'하러 온 학생운동 조직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떤 논의를 할 때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절대적 반대를 말하는 절대적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원/당사자 관계를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 의식이 주인공의식으로 올라갔을 때, '절대치'가 생긴다(237). 절대의 등장, 어떤 의미에서의 신의 등장, "우리는 주인공인데 왜 우리 말을 안들어."(237) 이러한 권위주의 탄생(260)의 지적을 외부자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사후적이지만 그것을 썼다.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를 결정하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런데 고민과 고투 가운데에서 사상은 생기며, 그것이 훨씬 사상적이라는 것도 저자의 주장이다(280). 그 사안을 어떠한 농업적인 전망을 가질 것이었는지, 그 점에서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 논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지원으로 온 학생 운동단체였다. 그들은 산리즈카에서 대립하는 그룹이 지원하는 농민의 밭을 밤에 공격했다. 옥수수를 다 무너트린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대립적인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농민이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립관계에 가슴을 아파하는 농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대립관계를 이유로 당당하게 상대방을 공격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후자들은 대립하면서도 함께 농협 여행을 즐기는 농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원자들이 알 수 없었던 것이 '마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을은 반() 권력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을 환영할 수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과 싸울 수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에게 차를 따라준다. 이것을 선악이나 정의감으로 비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을은 항상 마을의 존속만을 의도하며, 그것을 위해 무장하는 것도 무릅쓴 현재에 와서는 거의 보기 드문 집단인 것이다. 마을이 파괴될 때, 마을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싸우는 공동체'로 변혁된 것이 아니다. 신좌파의 여러 당파는 그러한 이론을 전개했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진보파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아니라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확실히 래디컬(근원적)으로 소급한 것이다. 오히려 보수 근원과 같은 곳에 회귀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거기에는 자유나 평등을 향한 특이하며 새로운 감각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유동적이었으며, 정착하려 하지 않는 뜨거움에 넘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리즈카의 미지의 매력에 끌렸을 것이다."(284-5)

 

이러한 지적은 중요하며, 청년행동대와 지원 학생단체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찰 대응에서도 그랬었다. 체포당한 다음, 지원학생들은 완전 묵비를 관철한 경우가 많았는데, 청년행동대들은 경찰의 질문에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혁명을 지향할 활동가들에게 청년행동대는 '나약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경찰한테 활동가가 묵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내부적이며 전위조직적인 비밀을 가지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도 유용한 논의일 것이다. 비밀을 가지는 운동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고한 조직체를 가져야 한다. ''이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산리즈카 투쟁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그 의미는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에서 농민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결코 '농민운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산리즈카의 반대 농민들의 각 파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이는 도식주의에 빠진 이해를 만들기 쉽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을 여기에서 쓰지 않도록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척의 정신, 일신교, 일원론, 전후 헌법/민주주주의 파.

오래된 마을의 정신, 다원론 다신론, 헌법보다 마을의 룰, 비민주주의의 파(265).

 

저자는 후자에서 '농의 논리'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개척자들에게는 자신의 토지를 담보해주는 것은 이웃 사람보다 국가였다. 국가와 집의 중간항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개척농민들의 의식은 근대적 토지소유인 것이다. 그들은 '농민'이 아니라 '백성'이며, 그들이 가지는 것은 '토지'가 아니라 ''인 것이다(299). 산리즈카 투쟁의 흐름의 핵심을 '토지에서 흙으로'에서 찾은 저자의 시선이다. 토지는 교환가능하며, 계산 가능하다. 그런데 흙은 교환할 수 없으며, 계산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 저자는 더욱 밀고나가 '민주주의파''채소인간'의 대립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408).


80년대 산리즈카 투쟁에서 국가와 농민이 직접 이야기를 할 자리를 갖게 된 이후, 정부쪽 관료들 중 전공투 경험자가 많아졌다는 점 때문에 농민들과의 논의가 쉬워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적인 방법만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민주주의적 해법에 관해서는 산리즈카에 지원을 와서 현지 청년들과 결혼해서 거기에 정착한 여성활동가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옛 농촌의 사람들과 여성해방운동을 겪은 여성들은 민주주의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농의 논리'라는 이중구조가 있던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산리즈카 투쟁을 '민주주의'라는 말로 봉합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투쟁은 종결할 수 있다. 싸우는 논리는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와의 대화에서 승화된다. 그런데 '채소인간'들은 그렇지 않는 것이다(435).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공시적인 문제밖에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439). 이에 반에 ''의 사상은 통시적이다. 산리즈카가 도달하려던 것은 '전후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자아였다.

 

4. 유기 농업으로

 

백성들이 향한 것이 투쟁과 생산의 양립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화학비료보다 값싼 유기비료 만들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백성으로 살면서 투쟁한다는 것이다. 산리즈카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계기는 환경사상보다도 이러한 면에서였다. 그리고 산리즈카가 만든 농업시스템 중에 산지 직송 시스템이 있는데, 이것도 체포당한 농민의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시작한 것이다. 산리즈카의 흙의 사상을 심화시킨 '흙만들기''투쟁만들기'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투쟁하는 자끼리의 공동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315).


거기에서 등장한 것이 '원 팩 운동'이다. 산리즈카 채소를 일본 각지에 보내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소비자는 박스 안에 들어갈 채소를 선택할 수 없다. 무조건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매 달 한 박스씩 받아(분량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박스의 채소로 도시 구매자의 생활은 일부분 산리즈카에 지배되는 것이다. 게다가 번거롭지만 맛난 것을 먹는다는 형식으로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먹는 것은 하나의 운동이 된 것이다.


필자(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친구가 구매하고 있던 산리즈카 채소를 매달 먹었다. 한 달 한 번씩 배달되는 채소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배달될 날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요리하고 먹고(술도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이야기를 한다. 같이 설거지를 하고 다시 논의하고(...) 하는 식으로 '산리즈카 채소 모임'이라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졌다. 몇몇으로 나누어서 먹으면 한 사람 당 비용도 적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이 모여서 한 꺼번에 먹기 때문에 채소가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다. 필자는 간사이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나리타 공항이나 산리즈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접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모임을 통해 차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스에 들어간 채소는 먹어본 적 없는 것도 많았고, 한마디로 맛있었다. 그런데 3.12 사건 이후 그 채소 구매를 그만둔 사람도 많이 생겼다. 3.12 이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어쨌든지 '유기농업'으로 가는 길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유기농업'은 결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농업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당시 노인들의 눈에서 보면 '복고'였던 것이다(343). 농약을 쓰는 근대농법이 넘어서버린 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고였다. 그리고 산리즈카에서 농업의 중심이 밭이었다는 점에서 보아도 일본적인 ''농업과는 별개의 마을 별개의 농적(農的)인 세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결코 '민주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보수 본류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었다.

 

5. 나가며

 

매우 난삽한 글이 된 듯하다. 오랜만에 이 책을 보면서 다양한 생각이 났다. 그런데 괜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기보다 이 책이 보여준 사상과 역사, 그리고 투쟁의 방법들을 쓴 것은 우리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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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를 통해 보는 어떤 반전 운동

 

가게모토 츠요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_연재를 시작하며.-한국에서 소개되지 못할 것 같은 일본의 운동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일본 책들이 번역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책이 별로 번역되지 않는다. 한국에 관련된 역사책이나 사회학 책은 번역되지만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철학책 등은 아예 번역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일본 책이 소개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어 책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일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현대사상이나 애니메이션, 문학 등은 일본어를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일본 책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시장논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인 말인데 그런 책이야 말로 중요하다. 잘 팔리지 않은 책은 발행부수가 적은 만큼 독자에 대한 필자의 책임이 커진다. 잘 팔리는 글쓴이는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만 단 한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애 편지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글쓴이의 힘이 보다 많이 담겨져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발행부수가 적을수록 그 책은 연애편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책임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핵심을 잡을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잘 팔리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소개되지 않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들을 소개해 보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다. 잘 팔리는 책이 가질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1.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다음과 같다.

 

세키야 시게루, 사카모토 요시에 편, <이웃집의 탈주병이 있던 시대 쟈텍, 어떤 시민운동의 기록>, 사상의 과학사, 1998. (644)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時代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 

 

 

이 책은 쟈텍(JATEC)이라는 운동의 기록이다. 쟈택이란 Japan Technical Committee의 약칭이다. 무엇을 했던 운동인가?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탈주한 미군 병사를 보호하며 제3국에 탈주시킨 운동이다. 쟈텍에 의해 제3국으로 탈출한 어떤 병사의 수기는 일본을 떠나는 순간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결정된 출발의 날, 나는 공항의 모든 곳을 어떤 문제도 없이 통과했습니다. 불안을 안고 출발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내 비행기 넘버가 불렸습니다. 밖으로 나와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내에 들어가기 전에 계단을 올라가 멈추었습니다. 뒤돌아보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사히 기내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쩐지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나의 안전한 여행을 빌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한 미리 알려진 지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기장을 불러달라고 말하며, 정치 망명을 요구하며, 기내에서 나가기를 거부한다는 것. 비행기 내는 기술적으로는 프랑스 영토로 인정되어 기장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망명을 허락할 권장이 있다고 합니다. 엔진이 파워를 내며, 비행기는 이륙의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며 지상에서 올라가면서 나의 마음도 비행기와 같이 뛰어 올라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난 것입니다."(370)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 일본의 기지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병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비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자텍은 어떤 이유든 탈주의 의사가 있는 병사를 보호했다. 물론 부대복귀를 시켜서 부대 내부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탈주와 망명의 의사를 표시하면 실제로 탈주를 시키도록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병사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매우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도 있었다. 이 운동은 전쟁터에서 베트남인을 직접 죽이고 온 병사들을 바로 자기 집에서 비밀로 보호하면서 같이 지내던 일반 사람의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기록집이기 때문에 탈주한 병사에 배신당하고 화를 낸 기억이나, 돈 문제로 탈주 병사로 싸운 이야기 등도 나온다. 어쨌든 어제까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해온 병사들과 함께 지낸다는 실천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실제로 했다는 일은 놀라운 것이다. "탈주병들은 일본 가정의 냉장고의 내부를 알게 된 최초의 외국인"(492)인 셈이다.

 

이 책이 98년에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쟈텍의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은 긴 시간이 흘러서야 자기 운동 경험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8년의 시점에도 아직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면서 추후 봉인을 풀기로 한다고 한다.(495).


2. 법의 문제

 

베트남 전쟁 시기 일본에는 일본군 병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의 상식에서 보면 탈주는 매우 큰 죄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일 안보조약에 인한 미군의 지위협정에서 미군 병사는 입국에 관해서 일본법의 적응 대상 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탈주 운동을 지원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탈주병사들에게 전쟁에 되도록 참여하지 않기 위한 권리를 알리는 상담활동도 쟈텍이 수행한 중요한 운동 중 하나였다. 쟈텍이 병사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알림으로, 그들이 제대를 신고하거나 부대 내부에서의 합법적 대항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이 미군 내의 법을 배우면서 일본군의 군율과 매우 다른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법과 관련해서 말하면 일본정부는 절대로 그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알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살겠다는 의사를 제시한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백인, 흑인 병사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역시 탈주했다는 것은 지적해두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국전쟁 고아로 양자를 가서 미국에서 잘았다. 그는 전쟁에 나가며 일본에서 탈주했다. 그는 일본공산당, 조선총련, 쿠바대사관을 거쳐 쟈텍에 접속했다. 그는 무사히 유럽으로 출국했다. 탈주병 가운데에서는 한국군 병사도 있었다. 그는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라는 작가이자 당시 쟈텍의 활동에 관여하던 사람이 76년에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그 인물을 모른다고 했으며, 나중에 그런 사실은 없다는 답이 왔다고 한다.

 

어쨌든 이 운동은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대사관도 관여하기는 했는데, 결국 그런 국가들은 쟈텍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쟈텍은 정말 시민운동으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간첩과 조직의 문제

 

이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간첩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미군은 쟈텍에 대해서 대응했다. 쟈텍은 제1차와 제2차로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간첩 때문에 한 번 조직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쟈텍은 간첩을 그대로 받아 들었다. 쟈텍은 간첩 찾기를 하는 일이 스스로의 운동을 부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간첩 찾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간첩이 들어오면 그냥 조직자체를 무너져 버리자는 쟈텍의 생각은 비밀조직으로서의 전위주의와 아예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던 까닭은 운동 내부에서의 간첩 찾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힘든 역사적 운동 경험에서 배운 운동으로 쟈텍의 간첩 대응법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운동, 이 조직론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를 줄 것이다. 당시 제1차 자텍에서 운동하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의 맺음말로 이 인용문을 대신하겠다.

 

"스파이 존슨에 대해서는 그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생각납니다.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가 스파이였다는 것을 확신했었습니다. 그것을 츠르미 슌스케(鶴見俊輔)씨에게 말했을 때, 츠르미씨는 찌그러진 얼굴로 "동료 사이에서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 무너질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그의 찌그러진 얼굴을 이 30년 동안 자주 생각나면서 왜 그랬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최근 저는 겨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츠르미씨는 옳았다는 것입니다. 1차 자텍은 스파이 존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스파이의 침입에 대해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모든 탈주병과 협력자에 대해서 의혹의 눈을 가졌으면 탈주병 원조 운동은 붕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 이렇게 운동 경험자가 가볍게 그 무렵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상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비밀이 없는 열린 운동을 소중하게 싶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전위주의입니다(예전의 저에게는 다분히 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아니라 누구든지 교체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필요합니다. 실제로 쟈텍은 그러한 운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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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w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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