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과 사건 (6)

- '홀림'-목적론과 결정론 -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Manet, 《Olympia》, 1863Manet, 《Olympia》, 1863



II. 해석과 사건의 공시적 적용 -올랭피아

1. 현상학적 접근

나는 유명한 하나의 그림을 분석함으로써 시작하고자 한다. 이 그림은 텍스트로 취급될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 그림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당대의 센세이션의 한 가운데 있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것이 어떤 허구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물의 모사였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보다는 우선 그림이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붙잡히는지’, 즉 개념(Begriff)으로 다가오는지에 관심을 가지고자 한다. 왜냐하면 여기서 우리는 작품을 미적으로 감상하기보다 철학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전유(appropriation)하고자 할 뿐이기 때문이다.


우선 그림이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매우 평범한 오브제들의 고전적인 배치가 아니다. 한 사람의 여인(아마도 마네의 취미가 이 여인을 선택했을 것이고, 이것은 충분히 주관적이다)과 하녀로 보이는 흑인, 그리고 맨 왼쪽 귀퉁이에 검은 고양이. 이 각각의 오브제들은 따로 떨어진 거리에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것으로 맨 처음 드러난다. 하녀가 여인의 하녀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게다가 고양이는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런데 이러한 무관한 대상들이 하나의 캔버스 위에 놓여 있다는 것은 어떤 효과를 생산한다. 그것은 필연성이라는 효과다. 무관함이란 그런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네의 이 작품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여기 놓여 있으며, 다른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곧 이 그림 자체가 우리에게 증언’(attestation)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증언 속에 놓여진 이 무관한 대상들은 그것이 그러그러하게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우리에게 증언한다. 이렇게 우리의 시야에 애초에 붙잡힌 이 그림의 우연적인 성질은 어느 순간 필연적인 것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연성은 대상들의 배치 자체다. 여기에 화가의 의도가 깊이 개입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자의성과 연관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서 마네가 당대의 부르주아들에게 어떤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다는 에피소드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한 에피소드는 화가의 자의성이 작품을 생산하는 중에 대상들을 배치하면서 발생시키는 우연성에 비해 사후적이고 퇴행적인 전망에 불과하다. 보다 흥미로운 것은 철저한 계산 하에 대상들을 배치하는 화가라 하더라도 최초의 결정과 작품 생산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의식적인 결심들이 작품을 순간순간 형성해 나아간다는 것이다.


오브제들의 배치와 결정(결심들)의 과정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이 작품을 보면서 직관적으로 파악하게 되는 작품의 존재적인 틀 안에서, 한 편의 작품이라는 텍스춰(texture), 즉 직물을 짜 나가는 두 가지 실이다. 이것은 사실상 어떤 심원한 잠재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적인 분석을 통해 그저 드러나는 것이며, 우리의 직관이 우리 자신에게 말하는 바를 그저 받아쓰기만 하면 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즉 이 작품은 텍스트며 우리는 그것을 읽어 나간 것이다.

 

2. 홀림(séduction, bewitchment)[각주:1]

위에서 우리가 붙잡은 사실은 이 작품이 어떤 우연한 배치와 결정들에 의해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던져져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즉 우리가 분석하지 않은) 존재적 틀 내에서 어떤 신체들의 덩어리로 형상화(figuration)된다. 하지만 이러한 형상화 과정이 대번에 여기 나와 있는 대상들의 본래 이름(하녀, 올랭피아, 고양이)로 불릴 수는 없다. 형상화는 우선 시각적인 최초의 인상’(impression)이며 어떤 경우 거기서 그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어떤 강제에 의해 이 그림을 파악하려고 하지 않고 스쳐 지나간다면 모든 것은 잠재적인 것들의 층 안에 묻혀 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최초로 잡아 끈 저 대상들은 이제 어떤 신체적인 형상을 띠게 되고, 점점 명석판명’(clara et distincta)해진다. 하지만 그러한 명석판명함이란 결국에는 최종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보다는 이러한 상의 잡힘이란 A...A...B...C...A... C... 과 같은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것은 어떤 것이 잡히는 과정이란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비선형적이라는 것, 그것이 하나의 대상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발생적인 애매모호함이 우선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드러낸다. 여기에 대상들이 차례로 자신의 신체를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떤 현상의 음각과 양각이 존재한다. 현전(présence)은 비현전 또는 은폐와 늘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애매모호성은 따라서 명석판명함 만큼의 인식적인 가치를 지닌다. 아니 오히려 저 상의 개념화가 진행되는 비선형적인 과정 자체에서 이 두 가지 양식화된 인식요소는 번갈아가며 무한하게 뒤섞인다. 따라서 오히려 명석-애매, 판명-모호가 더 근원적으로 다가온다. 즉 벗은 여인, 흑인 하녀, 고양이는 애초에 식별불가능성의 지대로부터 솟아오른 것이다. 백색의 흑인 하녀, 고양이 머리를 한 여인, 꼬리를 곤두세우는 마네 ...


하지만 우리는 어째서 저 세 가지 대상을 추적하는 것인가? 어째서 왼쪽 상단에 삐죽이 드러난 커튼 조각이나 불연속적으로 접힌 침대보의 디테일이나 심지어 고양이의 출처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는가? 우리는 혹시 사로잡힌 채로 무언가를 잡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대상을 추적하는 어떤 지향(intention)이 존재한다는 전제가 없다면 이 질문은 제대로 물어지지 않는다. 나는 지향이라는 것보다 사로잡힘또는 홀림이라는 말이 이 사태를 정리하는데 더 적절하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 지향을 거두어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따라가고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필연적인 방향성, 저기 놓여 있는 대상들이 그렇게 우리에게 현전하거나 은폐될 수밖에 없는 그러한 사태다. 이것은 지향과는 다르며, 오직 어떤 정동’(affect)에 기반한 신체적인 움직임을 수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홀림이며, 특히 형상화 과정에서는 시선’(regard)의 움직임이 그것을 증언한다. 시선의 움직임은 형상화 과정과 더불어 덩어리들(bloc, mass)을 이제 하나의 신체(corp)로 주조해 낸다. 그리고 여기서 신체들은 당장에 개별화된 어떤 것, 즉 여인, 하녀, 고양이가 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모든 잔여적인 것들(residuum)은 시선의 폭력 아래에 배제되며, 그림의 테마를 붙잡고자 하는 열정(의미화의 열정)에 의해 단죄된다. 홀린 자로서의 우리 인식하는 감상자는 자신의 정동이 어떤 방식으로 틀잡혀 있는지 반성하기도 전에 대상이 대상으로서 정립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왼쪽에, 저것은 오른쪽에 그리고 나머지는 저 뒤편에 ... 이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앞서 말한 존재의 틀이 제 모습을 갖춘다.


그것은 공간’(espace)이다. 틀 잡히고 안정화된 정동은 이 그림의 외곽을 뚜렷하게 구분짓고 있는 내외부의 경계를 처음에는 느끼지 못한다. 다만 신체들이 제자리를 찾아 가면서, 그것이 하나의 화폭 안에 정돈되며, 그것이 이쪽저쪽으로 배치되는 것과 더불어 그러한 내외부의 공간성이 일구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간의 발생은 애초에 붙잡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느닷없는 이 공간의 출현은 신체들을 뭉개버리고 앞과 뒤, 오른쪽과 왼쪽을 섞어 버릴 것이며, 정동과 시선의 틀을 갑작스럽게 부수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또한 시간’(temp)을 선형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참으로 올바르게진행된 이 과정은 어째서 다만 중심으로서의 세 신체와 주변적인 것들로서의 잔여들을 앞뒤로 그리고 전면과 배경으로 가르면서 공간을 발생시키고, 시간성을 확증하는 것일까? 어째서 일이 이렇게 밖에 진행되지 못하는 것인가? 사실상 최초의 점, 즉 시선이 탄생하던 그 점에서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로서는 마네의 그림을 시선 아래 잡아둠으로써 벌써운명(fatum)이 정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운명은 감상자로서의 나의 시선의 편에도 그림의 편에도 있지 않다. 운명의 선이 그림을 따라 형성된다거나 수많은 감상자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한 나의 시선에 따라 형성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어떤 떠도는 단자(monad) 또는 운명을 결정하는 리듬이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정동과 그림의 존재적 틀을 이렇게 정해 놓은 것이다. 운명에 의해 정해진 궤적, 그것은 자유도’(degré de liberté)의 분포를 헤집어 나가는 끌개(attracter). 이 끌개는 시공간의 화살이지만 끝점이 없으며, 미지의 운동량으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이 자유도의 궤적을 따라 신체로부터 시선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문턱을 발견한다. 사실상 마네의 이 그림, 올랭피아라고 이름 붙여진 바, 그 개별성은 바로 이 시선의 발견에서 열어 밝혀진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이름 붙여진 그것, 그것과 나의 시선이 형성하는 그 무한히 분할되는 깊이(공간, spatium) 안에서 직감했고’, 직감할 것이었. 도대체 이 깊이 안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본다. 무엇을 사유하는가? 아무것도 사유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모든 것을 사유한다.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과, 액자 안에 배치된 신체들. 하지만 그 시야(전망, vue)와 배치는 어떤 발생적이고 동역학적인 상태공간(espace d'état) 안에 먼저 자리 잡는다는 것을 느낀다. 이 공간은 사실상 식별불가능한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것들이며 시간과 분간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분간된다면 이미 식별가능한 지점으로 진입하여 개별화된 것이다. 즉 문턱을 넘은 것이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리는 어떤 문턱을 지나온 것일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하나의 질문이 등장한다. 나의 정동은 언제 어디에서 지성(intelligence)이 되는가? 이것은 일종의 정동의 지성-되기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여기에 어떤 주체성(subjectivit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것은 어떤 무의미한 것에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즉 무분별한 amypilon 또는 nopilamy 이라고 하든, erehwon이라고 하든 그 어떤 것에서부터 올랭피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동은 완연한 주체로서의 어떤 것으로 애초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그에 따라 지성되기조차 지성적인 주체를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되기라는 것은 어떤 문턱을 통과하면서 이쪽도 저쪽도 아닌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하나의 사건, 즉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사건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건의 다른 이름은 다른 것-되기. 하지만 표명되다시피 이미 다른 것은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개별성으로 응고된 사실일 뿐이다. 올랭피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실재로 우리가 이 그림을 이것’(thisness)라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하나의 개별화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우리와는 다른 것대상이라고 설명된다. 하지만 이것이라고 느낀다는 것, 이 봉인된 사건은 대상과는 다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설명되고, 설명되고 ... 설명되는 것이다. 무한한 해석이 발생한다. 좀 전에 우리는 시선에 대해 말했다. 해석은 사실 이 시선에서 시작된다. 우리의 시선이 그림 안의 여인의 시선, 하녀의 시선, 고양이의 시선에 고정될 때, 이 신체들은 마침내 살(chair)이 되고, 유기적인 배치가 거기서 이루어진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치면서 만들어내는 사건의 영역은 이상한 표지들의 떠돎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표지들은 어떤 배치’(agencement)를 구성한다. 그런데 이 배치의 과정은 형상화 이전의 배치와는 다르다. 형상화와 식별가능성의 영역에서 배치는 유기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되면 끌개는 개별화를 완성하고, 시간과 공간은 더 이상 미분화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선은 신체를 살로 공고화하고,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자리 잡는 것을 도우며, 그렇게 해서 반성적 의식 아래에 완연한 해석 대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제 선형적인 방식으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그림 안에서 다른 시선을 생각할 여지 따위는 없을 것이다. 또한 여인의 눈에서 시작하든, 하녀의 눈에서 시작하든 상관없다. 시선을 가지고 이리저리 변증론을 펼치는 것은 이제 지성의 영역이 되므로,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이제 해석들 간의 갈등이며, 거기서 어떤 패러다임을 선택하는가가 된다. 그러나 다시 그림을 보자. 어떤 것이 이 그림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충실한 것인가? 충실성(fidelity)은 이 그림의 어디에서 현전하는가? 우리가 어떤 사실을 해석할 때 인정해야 하는 것은 전통이다. 어떤 해석이든 전통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불충분하다. 그래서 해석이 반전통에 기대고 있다고 주장될 때조차 그것은 전통에 반하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이 그림이 어떤 센세이션의 중심에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를 사태라고 해도 상관 없다)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발생한 것은 이 그림 안에 사건의 흔적이 있기 때문이며, 그것은 전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홀림의 방향 아래에서 이 그림의 신체들이 살이 되는 과정 중 하나의 고정점이 되는 저들의 시선을 좇아가는데 익숙하다. 그러면서 경악하며, 그 경악을 해석해 낸다. 당대의 부르주아들이 이 신체를 매춘부라고 명명하고, 지금의 우리가 이 여자를 천사라고 명명할 수도 있다는 것은 그 시선을 해석해 내는 어떤 상대주의적이고 역사적 운동이 우리와 저들 부르주아 그리고 우리와 그림, 부르주아와 그림이 형성하는 깊이 안에서 길항하기 때문이다.[각주:2] 그래서 이 깊이 안에서 저 고정점은 늘 유동한다. 어떤 경우에는 시선은 누운 여인 쪽에서 적분되고, 어떤 때에는 하녀, 어떤 때에는 고양이 쪽에서 그렇게 된다. 이 모든 해석은 그러나 무한하게 분할되어서 미분화된 지점에까지 이를 수는 있지만, 즉 그것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 어디까지나 그것이 적분되어 나가리라는 상상을 할 수는 없다. 그러한 인식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해석에는 언제나 지평이 존재한다. 그 지평은 인간의 유한성, 죽음에 이르러 마침내 폐쇄될 것이다. ‘죽음은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한다. 순간순간이 죽음의 과정이라는 말은 그러한 죽음의 전능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전능함은 그림 안에서 시선으로 응고되기 전의 모든 생성하는 운동들에 편재한다. 사실상 개별성으로서의 이 그림, 그리고 그림 안의 대상들은 이 죽음의 전능성을 거슬러 스스로를 완성하며, 우리의 시선조차 앞으로 힘겹게 나갈 때 그러한 죽음을 항상 곁에 둔다. 바로 이 맥락에서 이 텍스트, 올랭피아는 비로소 예술이며, 하나의 유일한 작품이 된다.


반면 우리의 시선(혹은 그것이 해석이라고 하자)이 멈추고 눈동자가 풀어지면 곧 죽음이 도래한다. 이 이완된 상태는 바로 사실로 응고되기 전, 그리고 응고되고 나서, 배제되는 저 화폭의 나머지들(residuum)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감응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감응하기 위해서는 다시 수동적인 상태로 돌아가야 하며, 그것은 애써 넘어온 문턱을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선을 그렇게 가져가지 않으며, 나아가 삶을 그런 식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그것은 몰락과 파멸을 의미한다. 순전한 데카탕티즘조차 표면적인 몰락과 파멸 안에 견고한 시선의 패턴들을 포함한다. 그래서 우리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잔여를 배제하며, 늘 이해하고 해석하고 반복한다. 이 과정은 어디에나 있다.

 

3. 기계론, 결정론, 목적론의 문제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다. 과연 이와 같은 패턴은 정당한가’? 나는 이 패턴에 대해 현상이라는 명명을 했고, 또한 그것에 홀림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과연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될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패턴은 해석과 사건 안에서 어떻게 기능하는가?


어떤 현상에 대한 파악(apprehension)이란, 우선 주객이분 이전의 감응(촉발, 정동)을 통해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근원으로부터 발생하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한다. 다만 촉발을 통해 생겨나는 전체 구도 안에는 잡다한 현상들이 무분별하게 흩어져 있는데, 그것이 경로를 정하게 되면, 어떤 신체와 감각으로 뭉쳐지고, 어느 순간 지성의 영역에 진입함으로써 비로소, 대상화되어 우리 앞에 명석판명하게 지각되는 것이다. 이 파악의 과정은 사실상 직관의 순간을 펼쳐낸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과정이 지성이 이해할 수 있는 인과적 과정으로 자리매겨질 때조차 그것이 인과성의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지성이란 대상에 대한이해며, 그래서 직관이 최초에 포착해 낸 감응의 질서를 주체화 한다. 즉 주체의 시선 아래로(sub) 던져 놓는다(ject).


그래서 이 주체의 시선은 이전의 직관의 질서에서 드러난 인상들에 중심점을 설정하고, 그로써 인상들을 재정돈하며, 좌표화한다. 직관에 존재하지 않는 인과적 질서를 인상들에 강요함으로써 하나의 체계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고전역학의 결정론(détermisnisme)이다. 17세기에 결정론은 라플라스(P. Laplace)와 뉴턴(I. Newton) 천체역학 그리고 베르나르(C. Bernard)의 생리학에서 절정에 이른다.[각주:3]


바슐라르(G. Bachelard)에 따르면 이런 모든 것은 철학적 결정론에 속한다.[각주:4] 이 관점은 전체성이라는 관념 안에 세계를 재단하는 것으로 일련의 검증되지 않은 일반 원리에 구속되어 있다.[각주:5] 이런 일반원리들은 모두 철학이 상정하는 존재 영역이라는 개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슐라르가 보기에 공간관념에 사로잡힌 것이다. 즉 모든 존재자를 공간으로 환원함으로써 그 범주 외에 있는 존재자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적 묘사에 제한된 보편적 결정론은 비록 단순한 관념론적 가정은 아닐지라도 현상들의 실제적인 연관성을 충분히 그려내지 못한다. 이것은 사실 라플라스의 결정론을 초기저작에서만큼은 공유했던 칸트에 대해서는 전면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칸트(I. Kant)의 경우에 인과성은 특히 시간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는 것인데, 선험적인 인식능력의 도식작용을 의미한다.[각주:6] 즉 이것은 단순히 범주라고 하기보다는 경험적 직관의 형식인 시간을 포함하는 것이다. 칸트는 시간 안에서의 선후관계와 인과성을 구분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시간이 단순한 지각의 순서라면, 인과는 현상 일반의 운동(변화)의 순서에 해당되는 것이다.[각주:7] 따라서 바슐라르가 라플라스 류의 철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당대의 미숙한 과학의 결정론이라고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미숙한과학적 결정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는 바슐라르 자신의 이후 언급들에서도 드러난다. 여기서 그는 철학적 결정론이 아니라, ‘기하학적 결정론에 대해서 말하는 바, 그것은 곧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는 것은 동력학적 결정론에 의해 가능하다고 한다. 이때 동력학적 결정론은 바로 바슐라르가 비판의 근거로 삼는 양자역학의 체계라 할 수 있다.[각주:8] 하지만 이 양자역학의 동력학계는 반드시 데카르트의 기계적 결정론, 즉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포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과학 원리로서의 대응원리를 충족시킬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이제부터 문제는 라플라스류의 기하학적, 기계적 결정론이 설명할 수 있는 거시수준과, 양자역학이 다루는 미시수준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가 될 것이다. 사실상 고전역학의 체계에서 결정론은 기계론 자체에 내재하는 모순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기계론이 원인에 대한 결정론적인 해석을 끝내 성취하기 못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 고전적인 결정론은 무한퇴행의 인과사슬에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가 초월적 변증론에서 말한 이율배반의 한 항목을 형성한다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므로 새로운 결정론은 이 무한퇴행을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은 앞서 바슐라르가 언급한 그러한 것이다. 즉 결정론에서 무한’(apeiron)의 형상을 제거하는 길이 있는 것이다. 무한은 퇴행을 자초하는 사유구도다. 원인의 사슬은 그런 형이상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실험과 증거로 돌아와야한다.[각주:9] 그리고 무한은 이제 불확정성이라는 엄밀한 수학적, 실험적 불가능성으로 대체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을 하나의 제한된 결정론으로 상정할 수 있게 되며, 양자역학적인 위상적 결정론과 더불어 관찰하거나, 수학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된다. 다시 말해 이렇게 해서 동력학계는 하나의 선형적(lineary)인 특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선형성의 유지는 고전역학의 결정론과 위상적 결정론을 기술적으로 확정하는 어떤 실험적 작업에 의해 가능해진다. 실제로 이를 담당하는 기술자나 실험가에게는 관측 가능한 요소들을 통해 불확정성을 체계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 ‘모든 것은 무한하다따위의 형이상학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전문 기술의 목표인 잘 정의된 결정론의 구조를 에워싸고 있는 무제한적인 결정론의 안개를 거두어내면서 점점더 잘 그의 작업을 실현시켜야 한다. 만일 그가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작용한다라는 말을 믿는다면 도구의식을 포기하는 것이며 그의 기술적 확신의 토대 자체를 잃는 것이다”(Bachelard 1998, 294-95)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바슐라르의 결정론을 우회하여 다시 칸트로 돌아오게 된다. 왜냐하면 바슐라르에 따르면 이제 결정론에 서명하는 것은 인간 자신이기 때문이다. 즉 실험가, 또는 그 실험가의 신체의 일부인 실험도구가 결정론적 현상들에 마지막 서명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의지의 자유이며, 인간적 요인이라는 측면에서 칸트가 자유에 의한 인과성이라고 지칭한 그것, 즉 행위와 책임의 원인(규범적 인과성)이라고 말한 그것으로 수렴하기 때문이다.[각주:10] 그러나 이 주체는 일종의 소박한 차원에서 선험적이다. 즉 이 주체는 어떤 고정된 주체을 향유하기보다 실험과 조작의 과정에서 배우는주체라고 할 수 있다. 과정 속에 있는 주체는, 그래서 지식을 소유한 절대적 힘을 소유하기 보다, “지식을 넘어 이해하는 힘을 가진다(Bachelard 1998, 296). 그리고 현상을 이해한다는 것은 원인으로 작용하는 나의 자아, 내가 아는 현상의 인과 관계를 이해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다른 주체와 토론하는 나의 자아, 그런 자아의 일종의 가능성에 현상을 종속시키는 것이다”(Ibid.) 이렇게 원인의 계기 중 하나를 형성하는 국지화된 자아는 이해의 과정에서 전능한 힘을 발휘한다기보다, 이 이해의 과정에서 능동적으로 작용하면서, 실험의 결과에 어떤 불확정성을 분배하고, 그 가운데에서 미숙한 과학적 결정론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체는 개별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임의적이다(Ibid., 298). 그렇다 하더라도 이 주체는 자신의 보편성의 확실함을 분명하게 아는 합리적 주체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주체는 과학자 사회의 주체로 판명난다(Ibid.). 인과관계에 선형적 인과관계를 가져다주는 주체는 이렇게 합리성을 견지하면서도, 자신의 국지성을 자각하고, 그 인과계열에 내재적으로 자신을 위치지우는 과학자라는 집단적 주체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슐라르에게서 결정론은 이해된 결정론이이며, 딱 거기까지의 결정론, 즉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유한한 이해능력 안에서, 불확정성을 증언하는 그런 결정론인 것이다. 라플라스의 근대적 결정론, 전체적 결정론은 이 지점에서 인간적 결정론에 의해 수정되고 이 안에 포괄된다.


과학자 집단의 구성원으로 이 주체의 개입은 고전적 방식의 인과율이 미시적 수준에서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의 연속성은 A의 초기조건이 알려졌을 때, 완전히 예견될 수 있지만, 미시수준에서 a에서 b로의 인과계열은 Δt의 간격 안에서 불연속적인 것이다. 이 불연속성은 사실 인간의 운명과 같다. 그것은 일종의 플라톤적인 설득되지 않는 chora로 보인다.


다시 문제로 돌아오자. 우리가 저 작품을 통해 발견한 일정한 지각의 패턴들은 바슐라르의 결정론 비판에 따르면, 임의성이라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어떤 지각 기호들(또는 표식이라고 하자)은 잡다한 현상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지만, 그것을 질서지우는 작용은 다만 주체또는 집단적 주체의 결정사항에 많은 부분 달려 있게 된다. 그렇다면 주체의 객관성을 어떻게 담보되는가? 아니면 이러한 주관과 객관의 이분 이전에 존재하는 어떤 무한성을 우리는 포기해야만 하는가? 바슐라르는 그러한 무한성을 불확정성으로 대체하고, 그것을 실험과 경험의 준칙 안에 포섭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 어떤 정당하지 못한 전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바슐라르의 입론은 바로 물리적인 실재에 국한된 사안이 아닌가?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은 생물들, 인간이라는 유기체들에게도 곧장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사실 이 방면에서 화이트헤드(N. Whitehead)의 결정론 비판은 새로운 방향을 열어 보인다.[각주:11]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는 결정론을 유물론과 극단적 기계론이라는 견지에서 파악하면서 목적론적인 구도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에게 극단적 기계론이란 분자의 상태들, 운동들을 사물과 인간, 유기체 전체에 적용하는 관점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완화된 기계론조차 일종의 타협일 뿐이다. 이러한 기계론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간격이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심쩍은 것이며, 어딘가 본질적인 이원론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Whitehead 1989, 125). 이러한 모든 학설들은 화이트헤드의 관점에서 유물론이며, 이것은 오직 지극히 추상적인 존재들, 즉 논리적인 식별을 통해 얻어지는 것들에만 적용될 수 있다”(Ibid.) 그에게 구체적인 것은 유기체이며, 이들은 전체 계획에 의해 종속된다.


나는 화이트헤드의 이러한 사유구도와 바슐라르의 그것이 단순히 물리주의와 유기체주의의 대립이라는 식으로 논평하고 싶지는 않다. 그보다 이 둘의 대조되는 지점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우선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가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계론에서 분자단위의 메카니즘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분자적 단위의 역학적 층위는 그대로 유기체적인 전체 계획에 종속되는 것이다. 또한 바슐라르의 결정론에서 불확정성은 거기에 어떤 주체적인 의도가 개입한다는 측면에서 동역학적 체계의 공백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의 사유구도는 어디에선가 분명히 조우할 것이다. 그러한 조우를 가늠할 수 있는 하이트헤드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동물의 경우, 그 정신상태는 그 유기체 전체의 계획 속에 들어가며, 그리하여 종속적 유기체들의 계획을 변경시켜 가는데, 이러한 변경은 순차적으로 하위의 유기체로 계속 이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전자(電子)와 같은 극미한 유기체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생명체 내부에 들어 있는 전자는 신체가 갖는 계획 때문에 생명체 외부에 있는 전자와 다르다. 전자는 신체의 내외를 가리지 않고 맹목적으로 달린다. 그러나 신체 속에서는 그 속에서 그것이 갖게 되는 특성에 따라 달린다. 즉 신체의 일반적 계획에 따라 달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계획 속에 정신상태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존재 방식 변경의 원리는 자연 전체에 걸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며, 생명체만이 갖는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 학설은 전통적인 과학적 유물론을 버리고 유기체설을 그 대안으로 내세우는 일[이다.](Ibid., 125-26)


여기서 화이트헤드는 전자적인 단위에서부터 정신상태에 이르기까지 유기체적 계획이 주도하는 우주론적 설계를 가정하고 있다. 이 계획은 우선 요소적 측면에서 물리적인 실체로서의 분자들(전자들)을 수용하지만 그것의 운동과 같은 존재방식은 이들의 메커니즘에 달려 있지 않다고 본다. 거기에는 존재방식 변경의 원리라는 일반적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메커니즘이라고 부른다(Ibid., 126).

 

나의 이 이론에 따르자면, 분자는 일반 법칙에 따라 맹목적으로 달릴 수 있으나, 각 분자들은 그것들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라는 유기체 전체의 계획에 따라 그 내재적 성격을 달리한다(Ibid.).

 

사실상 이 장엄한 계획은 일반법칙을 포괄하는 섭리의 우주론적 설계도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종교적 경지를 논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가 결정론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슐라르의 그것과 사뭇 다르면서도, 어느 지점에서 만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을 뿐이다.


바슐라르의 경우 제한된 결정론의 범역을 설정하고, 무한성의 지대에 불확실성을 도입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카오스를 도입하지만, 화이트헤드는 유기체적 질서라는 전일적인 기획을 자연에 부과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에 초월적 질서를 도입한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공히 현대과학이 발굴하고, 탐사한 사물의 분자적 층위를 기반으로 논지를 전개한다. 다른 점은 바슐라르가 물리학적 실체로서의 양자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면(bottom-up), 화이트헤드는 생물학적 실체로서의 유기체를 통해 자연의 내재적 평면으로 내려 온다(top-down)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어떤 류의 자연주의에서 만나게 될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현대과학철학의 관점에서 나의 저 기초적인 해석(올랭피아)은 어떤 유기체적 질서의 계획과 양자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결론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의 내적인 구성은 이미 철학사 안에서 물어져 왔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위의 절에서 논의된 올랭피아에 대한 접근은 현상학적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그것은 철학사적인 의미에서의 현상학외에 다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요컨대 이 접근 전체는 패턴의 구성잔여의 배제라는 이항(二項)의 길항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전자에 대해서는 어떤 특별한 정당성을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측면에서 나의 기술(description)은 현상학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을 거스르지 않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러한 기술의 과정을 넘어서는 전제. , 기계론과 결정론, 목적론이 그것이다. 기술의 과정에서 전제되는 이 항목들은 올랭피아를 잠재적 층위에서 현행적 층위에까지 기술하면서 암묵적으로 가정된 것이다. 나는 이 단적인 현상작품으로 인식하기 위해 동시적인 단계들, 다시 말해 그 단계들이 존재하지만 각각의 단계들이 서로를 침투하고, 앞으로 뒤로 관여하는 상황들을 그려낸 것이다. 이러한 상황들은 이미 사용한 개념들을 통해 드러난다. 나는 어떤 무전제의 분석을 행한 것이 아니다. 개념들이란 일차적으로 전통의 집적체이기 때문이다.


이 전제들에 대한 질문은 우선 그것이 경험적이고 자연주의적이라는 함축으로 인해 난해함을 노정한다. 여기서 경험적이란 우리가 저 현상을 작품으로 인식해 가는 과정이 전혀 초재적이며 선험적인 것에 의해 좌우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 하지만 그것이 초재적이지도 선험적이지도 않다면, 과연 전제라는 것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것이 자연주의적이라는 성격을 가지는 것은 여기서 일정한 물리학적인 개념을 전용했다는 것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성격은 전체 분석의 진행이 인간주의적 중심점, 즉 주체성의 관점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대상과의 조우를 마치 주체 없는 과정처럼 그려냈다는 데 놓여 있다. 자연주의란 그런 주객 이분법의 상항(上項)으로 기능하는 어떤 이념(Idea)를 의미하는 것이지 않겠는가?


나는 이러한 난해함이 경험과 자연이 그 자체로 무한성’(Infinitum)을 향유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무한성 안에서 정신은 자신의 특기추상화를 행하며, 그 가운데 대부분은 유실된 실재를 기반으로 자신의 공고한 로고스를 담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논하자면, 우리의 추론적 정신(dianoia)은 이러한 경험과 자연의 세계를 어떤 결정적 인과성으로 포착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치 있는지 아닌지를 결정할 능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각주:12] 이러한 사실은 과학의 영역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과학은 그러한 가치결정력을 가져야 하는지, 또는 가지는 것이 타당한지 등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은 과학의 내부에 있으면서 외부를 형성하는 과학의 철학만이 해낼 수 있다. 한 가지 더해서 과학의 철학, 과학철학은 과학의 실질적 기반에 대해 반성한다. 무한성에 직면하여 그것을 과학적 법칙과 이론이 마땅히 고려해야할 어떤 것으로 상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앞서 행한 현상학적 기술과 과학철학에 대한 논의는 그것의 해석적, 사건적 특성의 설명을 이 과학과 그것의 철학에 의뢰해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 것이다.[각주:13]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우선 문제는 저 패턴들이 어떤 기계론적인 함축을 가지는 것이 아니냐는 점이다. 이것은 원인’(cause)이유’(raison)에 대한 논의를 기반으로 한다. 다시 말해 현상학적 기술, 저 순전한 기술적 성격이 어떤 기계론적, 결정론적 이유나 원인을 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여기서 해묵은 아리스토텔레스의 4원인론에 대한 타당성 논쟁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의 철학적 천재성이 발현된 특이한 경우다.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에 어떤 과학적 전개가 역사 안에 도래한 것이기에 그는 4가지 관건적인 원인(hê aitia)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이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히 대답되어질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이 4원인의 상호간의 관련성과 그것이 그의 형이상학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설명만을 해낼 수 있을 뿐이다.[각주:14]


4원인은 우선 다음의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1. ‘사물은 무엇으로(en quoi) 되어 있는가?’-질료인. 2. ‘이것(사물)은 무엇인가?’-형상인. 3. ‘누가 만들었는가?’-작용인(운동인). 4. ‘무엇 때문에 만들었는가?’-목적인. 하지만 이러한 4 가지 원인들은 따로 분립되어 있지 않다. 특히 이것은 일방에서는 일체성을 노정하는데, 특히 인간의 기술적 행위와는 다른 자연적인 과정에서 이러한 일체성을 볼 수 있다. 형상인과 목적인 운동인이 자연적 과정, 특히 종적인 생식 과정에서는 하나로 일치되는 반면, 기술적 행위에 있어서는 형상인은 인간의 욕구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작용인은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신경생리적, 근육의 작용인 경우가 대부분으로서, 외재적인 원인이 된다. 전자의 경우 일체화된 원인은 으로 환원된다고 본다. 그래서 4원인이 구별되는 것은 인간의 제작적, 기술적 설명에서이며, 자연적인 생성에서는 단지 형상인과 질료인만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이자(二者) 구분도 절대적이라고 볼 수 없다. 이러한 구분불가능성도 기술적 과정보다는 자연적 과정에서 더 두드러진다. 왜냐하면 기술적 과정에서 하나의 침대를 만들기 위한 재료는 목재이며, 그것의 형상은 장인의 개념으로서 초기에는 분리되어 간주될 수 있지만, 자연적인 나무는 그 질료인으로서의 목질과 그 목질을 나무이게끔 하는 나무성은 애초부터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애초의 4원인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게 이루어지다가, 그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일체성을 이루는 단계에서 현실성잠재성이 다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원인의 항목은 4개가 아니라 6개라고 선언된다. 형이상학의 해당부분을 재정리하면 다음과 같다(1013b16-1014a18).

 

원인은 네 가지 방식으로 나뉜다. 구성부분 기체 출처 목적이자 좋은 것. 그런데 원인은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이지만, 동종적인 것들 사이에서도 어떤 것은 다른 것보다 앞서거나 뒤선다. 또한 부수적 원인과 그런 것들의 유들이 있다. 부수적인 것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다른 것들보다 더 멀거나 가깝다. 능력이 있는 것(ὡς δυνάμενα)이라는 뜻에서, 어떤 것들은 현실적으로 활동하는 것(ὡς νεργοντα)이라는 뜻에서 원인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은 수가 여섯이며, 각각 두 가지 방식으로 말해진다. 왜냐하면 (A) 개별자와 유, 부수적인 것과 그것의 유, 연결된 상태로 말해지는 것들과 단순하게 말해지는 것들이 있으며, (B) 이것들은 모두 현실적인 것과 가능적인 것으로 나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점에 차이가 있다. , 현실적인 것들과 개별적인 것들은 그것들을 원인들로 삼는 것들과 동시에 있거나 있지 않다.

 

여기서 잠재적인 것(능력이 있는 것)과 현실적인 것이 구분되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러저러한 원인들이 개별자든, 부수적인 것이든 간에 끊임없는 변형의 과정 안에 있다는 것에 있다. 이 변형의 과정이란 4원인이 일체화되거나, 분리되면서, 유기적 전체를 이루거나 분해되어 사멸하는 그 변화’(metabole)의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잠재태현실태의 범주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물론 질료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의 본성은 형상 혹은 현실태를 만나서 복합체로서의 개별적 실체로 변형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원인에 대한 탐구는 단순하게 4원인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개별적 실체들의 잠재태와 현실태를 따져보는 새로운 과제를 던져 준다. 그러나 우리가 앞서 확인한 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과제를 자신의 연구과제로 적극적으로 안고 가지 않는다. 다만 그는 자연학에서 이미 현실화된 사태들을 분류하고, 위계화하는 데 몰두했다.


이러한 사유의 사태는 근대에 이르러 별 변화 없이 이어졌는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근대의 기계론적 사유를 예비한 것은 이런 의미에서이다.[각주:15] 그는 자신의 체계 내에 진정한 존재론의 근원을 내장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자신의 본류로 설립하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중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측면은 그 전승의 간접적 특성이나, 여러 왜곡된 번역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생할 수도 있었다.[각주:16]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단의 함축을 가진 사상으로 매도되기 일쑤였는데, 아무리 혁신적인 사유를 펼친 수사(修士)라 하더라도 그 시대적 한계를 제대로돌파하기는 힘겨웠던 것이다. 이 무지막지한 비과학적 태도는 이후 스피노자를 죽음의 위협으로 몰고 간 시대 분위기로 이어졌다.


근대는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철학을 이어 받는다. 형상철학이 가지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구도가 그대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수학적 방법론으로의 일원화’(방법론적 일원론)가 그런 구도를 희석시켜 마치 중세의 사변이 일소된 것처럼 여겨졌던 것 뿐이다. 데카르트는 그런 면에서 중세와의 단절을 의식적으로 추구한 인물이 아니다. 데카르트에게서 세계를 설명하는 수학적 방법은 법칙의 지위에까지 승격되었는데,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인이 가진 사유 구도를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제 더 이상 신의 섭리와는 아무런 관련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는데, ‘신앙고백은 그러한 무관함에 어떤 면죄부를 부여했다. 그래서 신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은 그의 섭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의 질서를 이해하는 능력일 뿐인 것이다.[각주:17] 이 질서를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철학과 과학에 남겨진 과제인 반면, 나머지는 신학의 영광으로 돌아간다. 이렇게 되면 인간은 목적인으로 접근하는 것이 제한당하며, 오로지 라는 형상에 따라, 사물들의 작용인(운동)을 파악하는 데 그치게 된다. 기하학은 이렇게 해서 세계라는 기계에 적합한 형상이 되며, 17세기의 자동기계의 발명에 고무 받아 기계를 그리스의 ‘Deus ex machina’ 식의 우발적인 개입자가 아니라 항존하는 세계의 본질로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세계 이해의 지평은 17세기 말에 와서 이미 난점에 봉착하는데, 그것은 힘과 에너지라는 질료적인 형상을 발견하고서 부터다. 이것은 기계가 아니라, 차라리 그것을 움직이는 작용인의 발생과 관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서 질료적 형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이유는 힘과 에너지가 그것의 물리적 성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감각적 실체라기보다는 추론적 실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실체는 예컨대 데카르트가 가정한 기계로서의 우주보다 더 큰 설명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원격적인 힘으로서의 중력은 데카르트의 개체적인 기계조각들(톱니바퀴들)보다 이론적으로 정합적이며, 단순하다.


이 단순성이 여전히 기계적 인과성으로 이해된다면, 우리는 결정론 자체의 인과성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 있다. 게다가 확률적인 비결정성을 반드시 다루어야 하는 미시세계(양자장)에서 이런 결정론은 그 자체의 근거를 찾지 못하고 만다. 하지만 이 근거는 물어질 수밖에 없다. 라이프니츠의 그 충분한 이유는 그래서 그가 언급한 대로 형이상학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각주:18] 만일 우리가 라이프니츠의 그 충족이유율에 따른 신존재증명이라는 노선을 자연주의적인 방향으로 파악한다면, 여기에 어떤 목적론이 반드시 개입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자연은 가장 짧은 길을 통해 작용한다라는 원리를 주장한 것은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모든 가능한 해결 방식 중에서 가장 큰 확률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Gourinat 1969, 104). 이것은 이제 필연성의 원리가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우리가 작용인 또는 물질을 고찰함에 있어 우리 시대에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나 자신에 의해 발견된 이 운동 법칙들만을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내가 알기로는 이를 위해서 우리는 오히려 목적인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법칙들은 논리학적 진리, 대수학적 진리 그리고 기하학적 진리들처럼 필연성의 원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적합성의 원리, 즉 지혜를 통한 선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라이프니츠 2010, 240).

 

이 구절 바로 뒤에 라이프니츠는 이것이 (...) 가장 명백한 신 존재 증명들 중의 하나이다라고 마무리한다. 하지만 내 경우에 이 구절은 단지 화이트헤드가 언급한 유기체의 전체적 계획이라고 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계획이란 바로 자연이 가진 적합성의 원리, 즉 자연의 지혜이며, 그것은 최소 작용의 원리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유명한 양자역학의 간섭실험은 이 최소작용의 원리가 어떻게 작동하며, 어째서 자연에 목적론이 필요해 지는지에 대해 사유할 거리를 던져 준다. 이 실험에서 광자가 장막의 두 구멍 중 어느 쪽으로 어떤 확률에 따라 통과할 것인지는 오직 잠재적으로 결정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일단 광자의 운동이 진행된다면 그것은 최소작용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고 볼 수 있다. 이 원리를 적용하는 것은 최후의 상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또 우리가 이 최후의 상태를 똑같이 확정된 최초의 상태에서 출발하여 도달할 수 있게 하는 변화의 법칙을 규정한다”(Gourinat 1969, 105) 이것은 단적으로 목적인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구도는 물리적인 대상들에 대한 의인적인 파악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보았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렇게 목적인과 형상인이 함께 작용하는 것은 인간이 기술적 체험들에서 더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가 물리적 자연의 법칙이 어떤 거대한 우발성에 의해 침투되어 있다고 보는 것은 매우 불성실한 관점이지 않을까? 여기에는 어떤 사유의 무능력을 포장하는 철학적인 사변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이러한 관점을 피하고 자연에 자연다운 목적론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면, 그것은 결코 의인론적이지 않은 결정론 또는 목적론일 것이다.


우리는 아주 먼 우회로를 통해서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여기서 기계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기계론이야말로 자연에도 인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사이비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기계론은 잘못 제기된 질문, 자연은 기계처럼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리석게도 라고 답하는 것이다.


애초에 우리가 시작했던 분석으로 돌아와 생각하자면, 실제로 우리는 촉발과 지각의 과정이 어떤 목적론적인 과정 하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어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결정론을 형성하는 것이고, 사실상 우리의 인식의 방향도 그렇게 지정되어 상식이라는 것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지금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보다 복잡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우리가 목적론과 결정론, 기계론에 대한 철학사적인 고찰을 진행해 왔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사유의 처지를 다 설명하고, 해석해낼 수 있는 이 될 수는 없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 놓여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현상에 대한 해석은 그 틀을 넘쳐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선은 잠정적으로 지금까지 해 온 논의들을 종합하고, 다음 단계로 진행해야 한다.

 

결정론과 목적론이 하나의 질서 안에 존재한다는 점은 해석과 사건의 존재론 안에서 어떻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인가? 우선적으로 우리가 올랭피아에 대한 공시적,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어떤 흔적이나 표지를 발견한다는 것은 그것에 대한 해석의 기반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반은 직접적으로 어떤 음성적 사태를 지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차라리 지각촉발이라는 보다 넓은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흔적의 확장). 이 과정의 제일 기반은 물론 우리의 지각과 저 작품이 공통적으로 향유하는 분자적이며 요소적인 사태들(bottom-up)일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여기에 어떤 전체성으로서의 목적론적인 계획(top-down)이 개입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자연이라는 일의적인 로고스 안에서 서출적 추론과 정식의 추론이 양면을 이루면서 저 대상을 작품으로 형성한다. 여기서 표지는 직접적으로 서출적 추론의 강제적이며, 폭력적인 성격에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어떤 완연한 해석의 대상이 되어가면서 정식의 추론이 전면에 나서며, 그리고 나머지는 잔여적인 것으로 후면으로 물러난다. 이런저런 무수한 흔적들은 이때 선별된 표지와 배제된 표지로 나눠지면서, 해석주체를 안정적으로 구성하는 바, 선별된 표지들은 이제 지성이라는 한정성과 규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와 설명 그리고 파악이 이루어지며, 재전유가 가능해진다. 그런데 어떤 역방향의 되먹임이 일어난다. 즉 이렇게 파악된 표지들은 배제된 표지들이 다시 흔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완전히 차단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현행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힘들을 소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들이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들이 된다. 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 힘들은 현행화되어 해석의 내용을 이루는 그 선별된(선발된) 이념들보다 더 근원적인 힘을 발휘한다. 말하자면 잠재적인 사태가 현행화되는 사태를 떠받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초의 선별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게 된다. 여기에 바로 목적론적인 구도가 다시 개입한다. 선별은 이렇게 배제되는 표지들의 힘들, 잠재적인 힘들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방식, 최단거리를 가기 위해 ‘()장거리의 궤적들을 배제하는 방식으로 이루진다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역방향의 되먹임은 그래서 해석주체의 실체적 기반을 늘 불안하게 하고, 잔여적인 것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이제 다시 흔적이 출현하며 앞서의 과정들이 새롭게 반복되면서 순환이 이루어진다.


앞 절 마지막에서 했던 질문을 반복해보자. 그렇다면 표지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바로 잔여적인 흔적들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이미 관련되어 있음이라는 존재적인 사태라는 것이 바로 이 흔적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흔적들이란 늘 표지와 관련되어 이해된다. 그러나 그 표지들이란 선별된 표지들일 것이며, 배제된 표지로서의 흔적들은 도대체가 애매모호할 뿐이다. 그것은 단지 힘-운동으로 지칭되거나, 또는 에너지라거나 불확정성이라는 부정적인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제 텍스트가 가지는 특권적 장소성은 흔적들을 선별하는 순간 그것이 특권적인 표지가 된다는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흔적이 출현하는 카오스와 그것을 배제하는 목적론적 질서라는 두 암초 사이를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므로 또 하나의 질문이 구성된다. 현행화된 텍스트를 통해 어떻게 잠재적인 흔적들로 갈 것인가? 또 그 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서 전자의 질문은 해석에서 사건으로의 구도며, 후자는 사건에서 해석으로의 구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제 이 구도들을 사유하기 위해 두 대가의 텍스트들을 들여다 볼 것이다. 그리고 그전에 다음과 같은 문제적(그래서 사건적인) 유명한 구절을 앞에 던져 놓고 시작하고자 한다. 우리는 이후 이 구절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들 안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가능한 한도의 질서와 조화를 가지고 결정적으로 질서 지워져 있고, 최고의 지혜와 선은 완전한 조화를 가지고만 행동할 수 있으며, 현재는 미래를 품고 있으며, 우리는 과거의 사실로부터 미래의 사실을 읽을 수 있고, 보다 멀리 떨어진 것은 보다 가까이 있는 것을 통하여 표현되기 때문이다. 만일, 시간이 경과해야 비로소 감각할 수 있도록 전개되는 그의 주름들을 우리가 모두 펼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든 영혼 속에서 우주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 안에 있는 각각의 판명한 지각들은 전 우주를 포괄하는 무한한 수의 모호한 지각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영혼은 그가 지각하는 사물을, 그의 지각들이 판명하고 고양된 한에서만 인식하며 그 영혼의 완전성은 그 지각의 판명성에 비례한다. 모든 영혼은 무한한 것을 인식하고, 모호한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마치 내가 바닷가를 산책하면서 바다의 굉장한 소음을 들을 때 나는, 물론 서로 구별할 수는 없지만, 전체의 소음을 구성하는 모든 파도의 개별적인 소음들도 듣는 것처럼,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의 모호한 지각들은 바로 전 우주가 우리에게 주는 인상들의 결과이다. 이것은 모든 모나드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Leibniz 2010, 241-42).   


<계속>

  1. ‘홀림’이라는 우리 말에 해당되는 불어단어로는 ‘séduction’이, 영어 단어로는 ‘bewitchment’가 적당하다고 보인다. 이 말에는 어떤 마술적인 유인과 그에 대한 비의지적 복종이라는 함축이 담겨 있다. [본문으로]
  2. 이 4항 관계는 ‘사건’의 맥락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여기서 ‘해석’은 사건과 역사의 지평을 횡단한다. [본문으로]
  3. “우리는 우주의 현재 상태를, 선행하는 상태의 결과와 미래 상태의 원인으로 생각해야 한다. 주어진 순간에 자연에 생기를 주는 모든 힘과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자들 각각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지성이 있다면 그리고 모든 자료를 이 지성이 분석하기에 충분히 폭넓고, 우주의 아주 큰 물체의 운동과 아주 가벼운 원자의 운동을 동일한 형식 안에 포함시킨다면, 이 지성은 불확실한 것을 하나도 가지지 않을 것이며, 과거와 마찬가지로 미래도 그에게는 분명할 것이다” P. Laplace, Essai philosophique sur les probabilités, Paris Bachelier, 1840, p. 3. [본문으로]
  4. 그런데, 바슐라르는 현대 기상학과 물리학의 ‘카오스 이론’까지 이 결정론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분명 지나친 일반화라 하겠다(Gaston Bachelard, 정계섭 옮김, 『현대물리학의 합리주의적 전통』, 민음사, 1998, p. 285). 사실 현대과학에서 카오스 이론과 양자역학은 아직 그 접점이 탐색중이다. 이를테면 ‘양자 카오스’와 같은 개념이 그러한 접점을 찾는 와중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이론 모두 어떤 ‘불확정성’을 전제한다. 초기값의 변화 여부에 따라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모르는 불확정성과, 위치와 운동량을 확률적으로밖에 알지 못하는 ‘불확정성’은 동력학계라는 동일한 계 안에서의 다른 수준(하나는 거시수준, 하나는 미시수준) 간의 이론적 경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는 이 경합의 상황이 어떤 철학적 결론으로 이끌어지느냐에 따라 매우 중요한 세계관의 변화가 생겨날 것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5. 이 일반원리는 다음과 같은 명제들로 표현된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성이 있다.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 무에서는 아무 것도 나오지 않는다. 진공은 실재성이 없다. 존재는 무에 의해 제한될 수 없다. 우주는 연관성이 있는 하나의 전체이다”(Bachelard 1998, 286-87). [본문으로]
  6. 이 도식작용은 순수이성의 수준에서 인과성을 현상에 부여하는 원초적인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도식작용에 대한 문제는 매우 광범위하면서도 관건적인 사항들을 내장하고 있다. 우리는 뒤에서 들뢰즈의 칸트론이 이 도식작용에 대한 비판적 독해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될 것이다. 도식작용에 대해 논한 강영안의 저서도 눈 여겨 봐야 한다. 왜냐하면 강영안은 자신의 책에서 도식작용을 순수이성 뿐 아니라 실천이성과 판단력에 이르기까지 확장하면서, 해석학적 도식론이라고 불릴만한 논의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의 책을 들뢰즈, 리쾨르와 더불어 다시 논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도식, 특히 ‘초월적 도식’에 대해 정리한다. “1. 초월적 도식은 시간과 관련해서 ‘초월적 시간규정’(A138/B177)이며, 범주들의 네 그룹(수량, 성질, 관계, 존재방식)의 순서에 따라 ‘시간 계열, 시간 내용, 시간 순서, 시간 종합’(A145/B185)이다. 2.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경험적 사용을 실현하고 동시에 제한하는 ‘감성의 형식적 순수 조건’(A140/B179)이다. 3.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의 도식’(A140/B179)이다. 4. 초월적 도식은 ‘상상력의 도식’(A141/B180)이며, 직관을 규정하는 ‘상상력의 종합규칙’(A141/B180)이다. 5. 초월적 도식은 그 자체로 늘 ‘상상력의 산물’(A142/B179)이며 경험을 철자화하는 데 쓰이는 ‘상상력의 약자(Monogram)’(A142/B180)이다. 6. 초월적 도식은 경험적인 개념의 그림이나 수학적인 도식과 구별해서 단지 순수종합(A142/B180)에 지나지 않는다. 7. 초월적 도식은 내감 일반의 규정에 관여한다(A145/B179). 8. 초월적 도식은 범주를 대상에 관계시키고 범주가 의미를 갖도록 만드는 조건이다(A145-146/B185). 9. 초월적 도식은 범주의 도식이요 상상력의 도식일 뿐만 아니라 ‘감성의 도식’(A146/B185)이다. 따라서 도식은 현상계에만 적용된다. 10. 초월적 도식은 순수지성개념에게 대상과의 관계, 곧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하고 참된 조건이다(A146/B185). 11. 초월적 도식은 그것을 통해 무엇이 주어질 수 있는 ‘판단력의 조건’이다. 만일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모든 포섭은 실패한다(A247/B304)”(강영안,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 서강대학교출판부, 2009, pp. 133-34). [본문으로]
  7. “그러므로 내가 의식한다고 하는 것은, 나의 상상력이 하나를 먼저 놓고, 다른 하나를 후에 놓는다는 것이지, 객체에 있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에 선행한다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단순한 지각을 통해, 서로 계기하는 현상들의 객관적 관계가 무규정적인 채로 남겨진다. 이제 이것을 규정된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두 상태들 간의 관계가 필연적으로 전후(前後)로 놓여져야만 하는 것으로 규정되어진다는 식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그 역은 아니다. 하지만 이 종합적 통일의 필연성을 담지하는 개념은 지각에 있지 않고, 오직 순수 지성 개념이고, 여기서 그것은 인과관계 개념인 바, 시간 안에서 후자를 결정하는 것은 전자며, 결과적으로 그것이 단지 상상 안에서 선행할 만한 어떤 것(또는 전혀 지각될 수조차 없는 어떤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상들의 계열과 따라서 모든 변화를, 경험이 이에 따라 그 자체로, 특히 현상과 변화의 경험적 인식이 가능한 바, 이 인과율에 종속시키고, 이 법칙에 일치하기만 해야 한다”(B234).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저서 인용은 기본적으로 백종현 판을 따르지만, 번역을 수정해야 할 경우, Guyer-Wood 영역판을 따랐다. Immanuel Kant, trans., Paul Guyer, Allen Wood, Critique of Pure Reason, Cambridge Univesity Press, 1998;2000. [본문으로]
  8. “이처럼 역학을 양자역학이라는 보다 섬세한 수준에 이르게 하자마자 언제나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로부터 일체를 이루는 전(全)공간을 끌어들이는 절대적 결정론은 폐기될 것이다. 미시물리학에서 만들어진 양자역학은 그래서 무제한의 우주라는 나태한 관점에 대해 수정작용을 할 것이다. 힘을 고려한 필요가 없는 직관 속에서 운동학적 관점에 머물러 있는 한, 세계는 가득 메워진 연관성이 있는 덩어리로 생각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는 데카르트 물리학에서처럼 물화된 공간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서는 기하학적 결정론만을 탐구할 것이다. 실세계와 이것이 함축하는 동역학적 결정론은 다른 직관, 즉 동역학적 직관을 요구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새로운 철학 어휘가 필요할 것이다. (...) 동역학적인 직관은 우리를 직접적인 에너지 실재론으로 끌어넣는다. 이 에너지 실재론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기하학적 세계가 아닌 세계에서 합리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게 하며, 현대과학에서 배우고자 하는 철학자에게 비데카르트적인 인식론에 도달할 것을 요청한다”(Bachelard 1998, 289-90). [본문으로]
  9. “무제한적 결정론의 형이상학을 증거의 사실주의로 돌아오게 한다”(Ibid., 293) [본문으로]
  10. “사실 객관적으로 인정되었다고 하더라도 원인이라는 개념은 이 개념이 초래하는 확신의 근원에서 사고하고 활동하는 나, 행동의 대용물로서 하나의 생각을 확인하는 나, 원인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요소를 수집하고 그 원인을 조회하는 신처럼 사용하는 나를 함축한다. 이것이 소박한 차원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과학적 차원에서 하나의 원인의 결정은 배우는 그리고 배우고자 하는 주체, 합리성의 도상에 있는 주체를 요구한다. 그래서 인과 관계의 치밀한 구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하나의 전문기술을 고려해야 한다. 인과관계가 종합 개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이 원인의 요소들을 수집했을 경우 뿐이다”(Bachelard 1998, 295-96). [본문으로]
  11.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지음, 오영환 옮김, 『과학과 근대세계』, 서광사, 1989, pp. 124-26 참조. [본문으로]
  12. M. Gourinat, De la Philosophie, Hachette, 1969, chap. 2 참조. [본문으로]
  13. 더욱이 들뢰즈는 이러한 과학철학의 사유를, 또한 과학 자체를 자신의 철학하기의 중요한 계기로 삼았기 때문에 더 그러하다. 그러나 들뢰즈가 전적으로 과학에 자신의 철학의 근거를 발견했다고 하면 타당하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논할 것이다. 그러니까 다른 측면에서 이러한 과학철학적 접근은 한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로트만(Lautman, A)이 말했듯이 그러한 접근은 결코 존재적인(ontic) 영역의 한계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로트만은 하이데거를 인용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존재론적 평면에서, 엔터티의 존재 구축이 존재적 평면에서, 과학적 지식의 대상들이 생명과 물질을 받아들이는 어떤 영역의 사실적 현존의 결정항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마도 특정한 개념의 본질에 대한 의미를 아는 것은 우선적으로 이러한 개념들의 실현들(realizations)로 향하는 것이 아니지만, 필연적으로 개념적인 분석이, 개념의 예견(anticipation)으로서, 실현되거나 역사화되는 구체적인 관념들을 투사하면서 진행하는 것이다. 본질과 현존[실존]의 구별, 그리고 특정하게 엔터티와 관련된 관념의 발생에서 본질의 분석의 확장은 때로 하이데거의 철학에서 숨겨져 있다. 이것은 실존론적 고려의 중요성으로 인한 것인데, 세계-내-존재와 관련되어, 『존재와 시간』에 등장한다. 하지만 『근거의 본질』(1969[1929])에서, 하이데거는 정확하게 존재론적 관점과 존재적 관점을 구분하면서, 인간적인 실재성(reality)과 세계-내-현존[실존, existence]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에 대해 설명한다. 하이데거에게 세계 개념은 일반적으로 엔터티들의 단순한 총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적(ontic) 관념, 예외적으로 인간적 실재와 연관되어 있고, 세계 안에 있는 인간의 작용(effective) 조건들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인간적 실재의 본질을 세계-존재(bein-the-World)가 합당하게 포함하고 있다는 것에 따른 주제들을 지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어떤 종류의 존재는 … 사실적으로 현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43, 45[67]). 다른 한편, 세계-내-존재는 인간적 실재에 속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Lautman, A. Mathematics, Ideas and the Physical Real, (trans.) Duffy, S., Continuum, 2011, p. 201. [본문으로]
  14. 렇기 때문에 쉽사리 이 네 가지 원인을 폄훼하거나, 부정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기술적 발전이 고도화된 현대세계에 이르러서도 이 네 가지 원인의 목록은 그대로 설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의 논의 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이다. [본문으로]
  15. 이 사태는 단적으로 잠재태와 현실태 쌍 뿐만 아니라 형상인과 목적인이 의도적이고 이론적으로 무시되는 것을 정당화했다. [본문으로]
  16. 대표적으로 둔스 스코투스(Duns Scotus)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제일원리론』II.20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질료 자체는 형상에 대해 모순적 잠세태(potentia contradictionis)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 형상을 통해 현실태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그것은 가능태(potentia, 잠재태)를 현실태로 환원시키는 다른 어떤 것에 의해 현실태에 있다. - 그것이 합성체의 작용인인데, 왜냐하면 ‘합성체를 만드는 것(facere compositum)’과 ‘질료가 형상에 의해 현실태에 있게 되는 것(materim esse actu per forman)’은 동일하기 때문이다. (...) 형상과 질료는 우선 결합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고 그것들을 결합하는 것은 작용인의 성격을 지니므로, 그로부터 형상적 현실화(actuatio formalis)가 뒤따른다”(둔스 스코투스 지음, 『제일원리론』, 박우석 옮김, 누멘, 2010) 이 부분은 결과만이 질료를 구성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첫 번째 부분이다. 여기서 잠재태는 작용인이라는 관점에서 질료인과 형상인을 결합하는 ‘힘’으로 설명된다. 이렇게 ‘잠재태’를 강조하게 되면 피조물들의 구성이 어떤 ‘자율성’을 가지거나, 그러한 내재적인 원인을 신적인 것으로 상정하게 되는데, 이것은 범신론 또는 범재신론의 혐의를 받게 된다. [본문으로]
  17.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섭리에 관여하기를 바랄 정도까지 인간을 생각하지 않는다”(Descartes, Principia philosophiae, ver. Adam-Tannery, Tom VIII, I, 28.) [본문으로]
  18. Leibniz, 윤선구 옮김, 『형이상학 논고』, 아카넷, 2010, p. 23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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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 (5)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Aristoteles(BC.384-322)



3.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

1) ‘해석의 신화적 연원

해석은 서양 사유의 최초의 상태에 해당된다. 이 최초의 상태는 곧 로고스가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그려준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의 그것은 신화적이다. 즉 해석은 곧 헤르메스(Hermes). 헤르메스는 어떤 초월적 지식을 인간에게 전해준다는 뜻에서 신탁과 관계가 깊다. 그래서 헬라인은 델피 신탁의 사제를 헤르메이오스’(hermeios)라고 불렀다. 신비한 신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전환’(transfer)시키는 또는 번역’(translation)하는 역할을 맡은 이 신은 그 어원의 기초적인 의미에서 이동’(trans-) 또는 투과의 역능을 가진다. 신의 전언을 번역하고, 그것을 이쪽과 저쪽으로 이동하면서, 인간의 지성이 투과가능한 언어로 이야기해 주는 것, 그것이 헤르메스(해석)의 의미라고 하겠다. 따라서 헤르메스는 언어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언어와 관련된 작업이며, 이 작업을 해내는 것은 신성한 능력으로서, 신전의 사제들의 직분이며, ‘해석가라는 주체는 애초에 인간의 언어이해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는 존재로 승격된 것이다.


플라톤의 이온에서는 당대의 해석이라는 것이 음유시인’(rhapsode)의 직분으로 묘사된다. 이들은 진정한 시인(poet)들의 언어를 음송하게 되는데, 그러한 음송을 위해서는 반드시 해석의 과정이 요구된다. 해석은 해당되는 시인, 예컨대 가장 위대한 호메로스정신을 그 대상으로 한다. 따라서 음유시인들의 해석과정은 언어와 관련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해석적 실천이라 불릴 수 있는 음송은 암송과는 분명 다르다. 즉 음유시인은 마땅히 시인의 단어를 단지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유를 파악해야 한다. 이와 같은 이해의 과정이 부재한다면, 그는 좋은 음유시인이 아니다.” 위대한 시인들의 언어를 해석한다는 것은 시인들의 말에 대한 이해를 통해 그의 사유를 파악하는 것이다.(530b-c)[각주:1] 그래서 해석의 일차과정, 이동은 이해와 파악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는 않는다. 이차적으로 음유시인은 그 자신을 시인의 사유에 대한 해석자로 그의 청중들에게 설득시켜야 한다. 시인이 의미한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530c). 여기서 해석의 이차과정은 청중으로 해석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이때 음유시인은 스스로를 해석자로 정당화해야 하는데, 이때 반드시 시적 언어의 의미알아야한다. 요컨대 이 과정은 한 쪽에 청중이 있고, 그쪽으로 해석이 이동하면서 의미를 실어나르는 것이며, 이것이 제대로 완수될 때 음유시인은 비로소 해석자가 된다.


이 해석자는 이해와 파악을 통해 청중에게 언어의 본래 원천을 가리키면서, 그것으로부터 오는 전언을 이동시킨다. 그런데 이때 이동은 반드시 변형’(metamorphosis)을 함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즉 시인의 언어가 해석과정에서 설득음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언어가 음성언어로 변형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원초적인 시인의 음성이 해석자인 음유시인의 음성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신탁에 있어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사제는 신의 음성을 인간의 음성으로 변형시킨다.[각주:2] 이런 면에서 해석의 최초의 신념은 문자텍스트가 아니라 음성이라는 물질적인 진동이다. 이 진동은 하나의 힘-운동이다. 따라서 해석자는 청중들에게, 하나의 힘-운동을 또 다른 힘-운동으로 변형시키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고대인들이 어떤 인식론적인 기능과 과정으로 해석을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변형의 과정이며, 인식론적 기능으로서의 이해파악은 종속적인 위치에 머문다. 사실상 이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이러한 변형의 과정에서 청중의 세계의 저 깊이, 즉 지성과 그 아래의 정념에 이르기까지 그들 본성(자연, physis)흔들어 놓는것이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진정한 매개는 바로 언어, 그 중에서도 음성언어며, 문자언어는 부차적이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이 말하기가 하나의 사건이 되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사건은 전달하는 자의 호소또는 선포가 한 개인이나 무리의 영혼을 진동시킴으로써, 예술적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이 일차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의 효과로서의 사건은 단순히 카타르시스를 통해 배출되지 않고, 한 사람의 전생애를 결정짓는 행동과 질문의 원칙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는 플라톤이 전해주는 소크라테스, 또는 소크라테스의 재판에서 울리던 그 진동을 경험한 플라톤 자신으로부터 충분히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의 해석이 제대로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 변형 이후의 언어가 수행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함을 통해 무언가를 강제하고, 비물질적인 관념을 물질적인 흐름즉 발화의 흐름으로 만들어야 한다. 해석이 헤르메스라는 신성한 주체를 요구했던 것은 이러한 수행적 역량을 그에게 부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신성함만이 해석이 단순한 잡담으로서의 이야기로 전락하지 않게 만든다.



2) 이 두 철학자에게서 해석사건

이와 같은 음성의 우선성과 그것의 존재론적인 변형에 대한 해석학적 신념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르가논(Organon)의 한 부분인 해석에 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그런데 음성(φωνή)은 정신[영혼] 안의 정동(παθημτων)의 상징(σύμβολα)이며, 문자(γραφόμενα)는 음성의 상징이다. 그리고 문자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지 않은 것처럼, 음성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최초에 [정신 안의 정동의] 신호(이마쥬, 표지, σημεϊα)라는 것은 모두에게 동일하다. 그리고 이러한 정동이 [현실적인 것들의] 유사성이라는 것도 동일하다(16a4-16a9).[각주:3]

 

여기서 음성은 정신적 경험(정동) 상징으로서 문자적 상징에 앞선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것은 정신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경험(정동)’은 그것이 상징화되었을 때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이 상징적인 것은 경험적으로 어떤 이마쥬가 된다. 이것이 이마쥬에 머무는 이유는 이 책의 뒷 부분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언급하다시피, 음성의 상징적 상태가 아직까지 관습에 의해 결합되지 않았고, 명사화 또는 이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명사가 되고 그것들이 제대로 결합되었을 때에야 그것은 비로소 참과 거짓의 대상으로서의 진술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술이 되기 전의 명사, 명사가 되기 전의 이마쥬는 어떤 것인가?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백하다. 즉 진술로서의 문장이 로고스의 대상이라면, 명사는 아직 그렇지 못한 상태이며, 음성은 더더군다나 명료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의 형이상학에 따르면, ‘로고스란 어떤 정식’(正式), ‘정의’(正義)를 말하는 것이고, 학문적 대상으로서의 언어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진술-명사-음성의 위계 내에서 가장 비로고스적인 상태를 향유하는 것은 분명 이마쥬로서의 음성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책에서 겨냥하는 바는 분명한데, 그것은 이러한 비로고스로서의 음성 상태를 벗어나, 명사와 동사, 그리고 문장으로서의 진술을 참과 거짓이 분명한 상태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짚어 보자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음성이 정신 자체의 상징이 아니라 정신적 경험, 즉 정동의 상징이라고 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방점은 플라톤과는 다른 곳에 찍힌다. 우선은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음성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그것을 존재적인 것으로만 수용할 뿐, 해석의 텔로스로 취급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한갓 이마쥬로서의 음성을 해석의 대상으로나마 취급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전체 존재론적인 틀거리 내에서 이마쥬와 가장 가까운 -운동을 가능태로 취급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을 형상으로 환원하듯이, ‘해석에 있어서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헤르메스는 플라톤이 진입한 그 음성의 영역을 단 한 번만 밟고 지나갈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플라톤에 비해 단편적이라거나 풍부하지 않다고 기각될 수는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해석이 그 풍부한 의미를 띄게 되는 것은 실재로 그가 단순한 단어 차원에 머물기보다 시간성을 도입할 때다.


시간성은 명사와 직접 관련되는 것이 아니라, ‘동사와 관련된다. “동사는 부가적으로 시간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것은 어떤 지속성과 연관된다(16b6-10). 그런데 이때 지속이라는 것은 거기에 명사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11-18). 이 시간은 현재와 현재 바깥의 시간, 즉 과거와 미래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동사로서의 언어가 해석의 시간성을 담지하고 있다는 통찰은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해석의 심장부에 시간을 도입함으로써 존재에 생성의 맥박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특유한 점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성을 사유대상이 되는 어떤 과정으로 이해할 때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지성은 사유대상을 포착함으로써 자기자신을 사유하는데, 그 까닭은 지성은 대상과 접촉하고 사유하는 가운데 사유대상이 되고, 결과적으로 지성과 사유대상은 동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각주:4]왜냐하면 사유대상, 즉 실체를 수용하는 능력이 지성이요, 그것은 사유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용능력보다는 소유가 지성이 가진 것으로 여겨지는 신적인 것이며, 이론적 활동(theōria)은 가장 즐겁고 좋은 것이다(형이상학1072b20).

 

여기서 사유하는 것은 지성이며, 사유대상은 지성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유대상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적인 활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수용능력은 여기서 지성의 진정한 본령이 아니다. 진정한 지성의 활동으로서의 지성적 활동은 사유대상을 소유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사유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신적인 활동은 지성에게 즐거움을 가져다 준다. 그렇다면 이 즐거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을 소유함으로써 스스로를 동화(assimilation)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여기서는 대상과 지성 간의 어떤 주도성의 문턱같은 것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지성의 주도성이 사라지고, 이론적 활동이 신적인 것으로 되는 그런 문턱, 대상과 지성간의 그 불명료한 로고스의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지성과 사유대상은 자기자신을 사유하게 된다. 이것은 해석이 어째서 결과적으로 지성과 대상의 구분 자체를 무화시키는지를 보여주는 텍스트적인 증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이 무화는 모든 것을 비존재의 단계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강도를 누승화하는 과정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이 현실적 활동이 될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현실적 활동은 직접적으로 하나의 사건, 해석의 사건이 된다. 즉 지성과 대상 둘 모두의 변형’(metamorphosis)이 된다.


Augustinus(AD. 354-430)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해석은, 본격적으로 텍스트 자체에 충실하게 된다. 사실상 플라톤에게 있어서 해석은 그의 전체 변증론 체계 내에 종속된 국부적인 것으로서, 일부 저작들의 부분부분에서 다루어질 뿐이었다. 그것은 플라톤 자신이 소크라테스적인 전통 안에서 문자에 대한 불신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이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기록’(écriture)이 가진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기록의 가치는 철학이 대화의 상호성을 해소해가는 과정이면서, 대화 상대자로서의 논적이나 친구를 자신의 내면으로 옮겨 오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서도 음성은 근원적인 해석의 대상이자, 해석의 본래면목으로 남아 있게 된다. 이러한 음성에 대한 강조는 중세에 더욱 강조되는 경향을 노정하는데, 그것은 직접적으로 성경의 창세기가 신의 음성, 즉 로고스에 기반하여 천지창조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히브리 예언자 전통 또한 기록 보다 그들의 직접언술과 선포를 통해 신의 말씀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라 하겠다. 하지만 히브리 전통 안에서 음성은 더 이상 대화 상대자에게 논변을 요구하지 않으며, 오히려 신앙적 회심의 매개, 또는 도구로서 음성을 통해 그들의 실존적 변형을 강제해내고자 하는 목적론적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대화의 친구들은 이제, 오직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만 통용되는 명칭이 되며, ‘불신자들은 성경의 원초적 음성을 들어야 하고, 회심해야 하는 대상으로 자리매겨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대화상대자의 대상화는 때로 반성의 매개를 통해 철학자 자신에게 부과되는데, 이러한 부과를 통해 철학자는 신앙적 회심을 경험하는 사건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에 등장하는 그 음성, “tolle lege, tolle lege”는 그러한 철학자의 신앙적 회심에 성서적 선포가 어떤 변형의 역량을 발휘하는지에 대한 충실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내가 지은 죄에 대하여 마음으로부터 통회하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갑자기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있었습니다. 그 말소리가 소년의 것인지 소녀의 것인지 나는 확실히 알 수 없었으나 계속 노래로 반복되었던 말은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곧 눈물을 그치고 안색을 고치어 어린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할 때 저런 노래를 부르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전에 그런 노랫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나지를 않았습니다. 나는 흘러나오는 눈물을 그치고 일어섰습니다. 나는 그 소리를 성서를 펴서 첫눈에 들어 온 곳을 읽어라 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령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각주:5]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최초의 음성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귀에 신의 음성이 아니라, 어떤 소년, 소녀의 음성처럼 들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적 회심의 최초의 순간에 일어나는 착각이라고 할 수 있다. 착각은 그러나 스스로를 알게 한다(Si fallor, Sum). 다시 말해 이 착각과 실수는 곧 그의 마음에 도달한 신의 음성을 판별하게 하는 시금석이 된다. 이 시금석을 딛고 아우구스티누스는 곧장 성경의 로고스, 즉 마태복음을 상기하게 되고, 마침내 그 말을 쫓아, 다른 로고스, 즉 로마서를 읽게 되는 것이다.[각주:6]


이러한 변형의 사건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학적 작품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 교양에서는 그 표면적인 목차에서도 드러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저작을 사랑에서 시작하여 수사학’(설교론)으로 끝내고 있다. 이러한 목차가 기획하고 있는 바는 매우 분명하게도 해석이 어떤 실천적인 목적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랑과 그 사랑의 선포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의 선포는 마태복음 22장의 구절에서 전거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것의 실천은 해석과정에서 달성된다. 이때 사랑의 최고 대상은 마땅히 신이이어야 한다. 사랑의 네 가지 대상(자기, 이웃, , 육체)은 모두 그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신과 이웃만이 계명을 통해 선포된 사랑의 대상이다.

 

그러므로 사랑할 것이 넷이 있으니, 하나는 우리 위에 있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 자신이요[자기애] 셋째는 우리 이웃에 있는 것[이웃사랑]이요 넷째는 우리 밑에 있는 것[육체]이다. 둘째와 넷째에 관해서는 아무런 계명도 내린 바 없다.(아우구스티누스 1989, 91-92)[각주:7]

 

자신과 자기 몸을 사랑하는 데는 계명이 필요 없다. 왜냐하면 육체에 대한 사랑은 엄연한 자연법칙으로서 필연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짐승도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선포된 사랑은 바로 이웃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다. 이중 신만이 인간이 가장 최상으로 향유해야할 대상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한 성서의 골자다(마태 22,37.39.40.) 따라서 계명의 목표는 사랑이고(디모 1,5) 그 이중의 (사랑),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아우구스티누스 1989, 91-92)


해석에 있어서 신을 사랑하는 것과 그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율법과 성경 전부의 완성이 거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Ibid., 107). 해석의 영혼은 전적으로 두 가지 목적, 즉 이웃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 을 지향한다. “자기의 성서 이해를 오로지 이 점에 귀결시킨다면, 그는 성서해석에 안전하게 접근하기에 이를 것이다”(Ibid., 109)


해석의 목적이 이러하다면, 그 해석의 일차적인 대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표지. 표지란 사물자체가 아니라 감관으로 포착되는 형상(形象) 외의 사물로서, 자기로부터 다른 무엇이 (우리) 사유 속에 출현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Ibid., 119). 그리고 이로부터 의미가 발생한다. 이 표지들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다. 왜냐하면 말이란 다른 모든 표지들보다 그 서술가능성의 측면에서 더 광범위한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Ibid., 123).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 은 특히 문자를 의미한다. 음성이란 그 지속성의 측면에서 문자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표지란 무릇 언어를 눈에 보이게하는 것이며, 이로써 지속성을 확보한다.


하지만 문자로 표현된 성경은 그 자체로 자명한 표지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것은 소위 전의적 표지’(signa translatus)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으며, 이런 경우 해석은 필수적인 과정이 된다. 이렇게 전의적 표지로 충만한 성서를 그 자구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은 일종의 정신의 비참한 예속상태를 초래한다(Ibid., 227). 그래서 해석은 늘 장소와 시간, 상황을 고려하여표상들에 대한 전의적 해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해석의 최상의 원칙은 사랑이다. “그 해석은 반드시 사랑의 왕국에로 수렴되게 하여야 한다”(Ibid., 257)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해석은 전의적 의미를 표지로부터 추출하고, 그것을 통해 사랑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때 표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사나 동사가 될 수도 있지만, 주로 성경이 표명하는 선포의 본뜻, 즉 신앙과 사랑의 본뜻을 의미하게 된다. 이러한 뚜렷한 목적의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로고스(정식)와는 사뭇 다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로고스라는 지향규정성으로서 보편자인 바 존재를 향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지향완성으로서 절대자인 을 향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통해 실체또는 무엇보다도 개별적 실체를 지성의 힘으로 소유하고자 하며, 이를 통해 어떤 변형을 달성해내려고 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신을 소유함으로써 신앙을 확증하고, 지성을 통해서는 그것을 충전하기 위한 과정을 밟아 나가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런 방향은 바로 유명한 알기 위해 믿는다”(Credo ut intelligam)라는 원칙에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변형은 해석 이전에 신앙에 의해 이미 상당히 충족된 것이다.[각주:8]


또한 이 둘은 공히 음성의 원초성과 변형이라는 해석의 책무를 그대로 물려받고 있지만, 아우구스티누스에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보이던 그 음성의 정동적’(경험적) 특징이 드러나지 않는다. 전자에게서 표지란 곧장 음성적인 원초성의 문자적 변형이며, 그 가운데 어떤 경험적 매개도 상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와서 음성이 가진 경험적인 성격, 즉 그 물질성이 문자적인 맥락 안에서 이완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히브리 전통 안에서,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신앙적 회심의 경험 안에서 음성의 그 물질적 특성은 보존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두 질문은 음성이 가진 물질성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과연 아우구스티누스와 히브리 전통 안에서 음성이란 물질적인가? 이 문제는 상당히 심난한 아포리아에 봉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음성이란 사실 신성한 것으로서, 신적인 범역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지, 물질계의 부수적인 효과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히브리 전통에서 이 주장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아우구스티누스의 표지도 비물질적이다. 하지만 표지가 비물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물질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기각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므로 해서 비물질적인 의미즉 전의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적 사건과 창세기의 사건은 이런 비물질적인 의미가 육화되는 그 동일한 과정의 다른 양태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서 해석은 이런 육화 이전의 어떤 초재적 의미를 획득하고 고착시키는 기술(ars)이다. 이러한 결론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플라톤주의적 함축의 필연적 결과라고 보여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동일한 해석과정은 경험적인 정동에서부터 시작되며, 이것은 어떤 물질적 기반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것이다. 그것은 고대 철학 내내 기체라고 불리었던 것이며, 사실상,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로서 정립했던 것, 즉 결국에는 형상철학의 한 지절(支節)로 환원한 그것이다.


결과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해석이란 하나의 표지로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지만 그 세계는 매우 다른 모습으로 해석 자체를 맥락지운다. 그 세계 자체를 무엇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아직 이른 것 같지만, 하나의 뚜렷한 질문이 이런 분석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도대체 표지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해석과 사건의 어디에 위치하는가?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철학사적 맥락에서 공히 조금씩 변용된 모습으로 출몰하는 하나의 대상이 바로 이 표지이기 때문이다.



3) HermaSēmata 해석과 사건의 안팎

우선 우리는 표지가 신화적 차원에서 herma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은 Hermes의 것이며, 해석이라 불리우는 어떤 인격적 신의 흔적 안에서 발견된다. 하지만 그러한 인격성은 곧 인격이 가지는 physis적 성격 즉 자연주의적 특성에 의해 침윤되는데, 고대적 발상 안에서 이것은 하나의 필연적인 결과였다. 왜냐하면 herma는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흔적이지만, 그것이 이동하는 거리는 올림포스의 범역을 넘지 못했으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 쥐었을 때조차 그 생생한 진동은 한낱 유일한 삶 안에서 울릴 뿐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신은 단지 죽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인간과 다를 뿐이었으며, 인간은 오히려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뛰어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각주:9] 이때 신적 표지와 인간적 표지는 영원과 유한성이라는 큰 간격 안에서 끊임없이 서로에게 인접하고 있다. 신이란 단지 신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유한한 삶 안에 영원성의 각인을 늘 새겨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새겨 넣는 것을 통해 신은 자신의 인격성을 인간에게서 빌어오고, 인간은 자신의 신성함을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바로 physis의 지평 안에서 말이다. herma는 이 유일한 지평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고귀한 것이면서도 어렵다. 델피 신전의 사제란 이 어려운 일을 하는 최초의 해석가이고, 그런 면에서 그녀는 보호받는다.


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 herma는 깊은 카오스의 낭하에 뒤둥그러져 있으며 보호받지 못한다. 이때 표지는 어떤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또는 바탕’, ‘수용자로 겨우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는 그저 던져 놓고 지나온 한 질문을 다시 할 필요가 있다. 즉 플라톤적인 판타스마의 해석적 위상에 관해, ‘이것은 어떤 식으로 사유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그 질문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질문 자체는 우선 사유될 수 있는 것이라는 방향에서 그 바탕을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바탕은 사유에 대하여서 있는 것일 뿐 자립적인 위상을 향유하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사유의 대당으로서 플라톤에게 서출적 추론을 강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른 방향에서, 파르메니데스는 이것을 감각되지 않고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음을 앞에서 논하였다. 나는 파르메니데스의 규정으로 간주된 이 대상의 감각되지 않음이름 붙여질 수 없음이라는 특성이 모순적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의 구도 하에서 이런 식의 규정은 로고스의 개입에 의해서도 해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감각되지 않고 이름 붙여지지 않는 것이 어째서 알려지는가?’라는 질문이 여기서 제기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상 이것은 알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파르메니데스적 로고스, 즉 이성의 편에서 존재를 가늠하는 그 로고스를 통해서는 이름 붙여질 수 없다.’


플라톤의 편에서 이것은 서출적 추론에 의해 마련된다. 여기서 서출적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nothos’모순적인이라는 함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각주:10] 다시 말해 플라톤은 이 제3의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인식론적인 모순에 봉착한다는 그 사실 그대로를 서출적이라는 말로 개념화한 것이다. 하지만 보다 엄밀하게 보자면 이것은 이러한 이름조차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이 서출적이고 모순적인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파르메니데스가 봉착한 모순과 거의 흡사한 것이다. 감각되지도 않고, 그렇다고 정식으로 사유될 수도 없는 것이 알려지며, 이것이 우주의 바탕이 된다는 사실은 플라톤 체계 내에서 모순적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 바탕은 질료적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유의해야 하는 점은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질료, hylē와는 다른 위상을 지닌다는 점이다. 플라톤이 물질적인 것을 의미할 때 그것은 somata에 더 가깝다. 즉 그것은 어떤 신체적인 것’, ‘물체적인 것으로 옮길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개념에는 당장 apeiron 또는 그 신화적인 chaeos의 의미가 겹쳐져 있다. 반면 hylē에는 그러한 함축이 다만 흔적’, 그것도 아주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바탕물체는 완전히 같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바탕은 물체적이지만 물체 그 자체는 아니고, 그것을 생성시키는 것이며, apeiron 쪽에 더 가깝다. 하지만 물체는 자신의 형상을 이데아로부터 모방하는 쪽에 더 가깝다. 이데아로부터 형상을 모방하는 이 물체에 대해서 우리는 적절한 추론을 통해 그것을 사유 안으로 설득할 수 있으나, ‘바탕을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설득이 아니라 강제가 수반되며, 이성(noesis)나 지성(dianoia)이 아니라 억견(doxa)을 산출하는 확신(pistis)이나 추측(eikasia)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바탕은 여기서도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것이 어떤 생성의 편에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꼭 플라톤적인 선분의 구도 내에서 확신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확신은 생성(genesis)하되 감각 가능한 것’(aistheta)에 대해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감각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바탕에 대한 서출적 추론은 추측에 가까운 것이 된다. 이는 지성적이거나 이성적인 사유라고 할 수 없고, 단지 어떤 것에 대한 무분별한 직관에 더 밀착된다. 그것은 인식의 극한, 이데아 쪽이 아니라 카오스 쪽의 극한이 아닐까? 게다가 이 바탕에 떠도는 원인(방황하는 원인)은 판타스마다. 즉 단순한 모상(eikones)이 아니라 이마쥬(eidolon)로서의 시뮬라크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무분별한 직관이라고 말한 그 순간에조차, 이 바탕은 직관이 가진 어떤 인식주체로서의 자기 운동적인 성격을 탈각해 버리는 것은 아닌가? 혹시 이 물체적인 판타스마가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떤 폭력적인 인식론적 사태 안에 지성을, 감각을 또는 직관을 개방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상 이런 질문은 플라톤에게서도 파르메니데스에게서도 심지어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으며 제기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우주론적 체계는 로고스, 그것도 이성과 지성 쪽에 가까운 정식화를 목적론적으로 구상하는 것이며, 사유 이미지는 그것에 이끌려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유의 상황이 해석사건안에서 어떻게 자신을 열어 밝히는지 막연하게나마 질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여기서 herma란 그 원초적 사태에 있어서 탐구되고자 하는 것이며, 로고스 쪽으로의 전진적인 해석이 아니라, 보다 회고적인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다. herma는 그러한 회고[각주:11] 안에서 말 건네는 사태, 즉 무분별한 직관으로서의 사유의 폭력적인 개방성 안에서 간취되는 것이다. 여기서 herma와 인식주체는 똑같은 개방성을 노정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개방성은 하나의 존재론적인 사태며, 우주론적인 사태로서 외부적이지 않고 내재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주체든 바탕으로부터 오는 전언으로서의 herma든 간에 그것은 무분별성 안에 놓여 있으면서, 서로의 원초적인 요소들로 분해되고, 단지 휩쓸려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일의적인 힘-운동의 구도 안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또 때로는 감싸 안으면서, 설득하고 설득당하면서, 포획당하고 포획을 회피하면서, 내재적인 평면을 형성한다. 이 혼란한 우주 외에 다른 존재론적 평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주의 외부는 없다. 따라서 가장 유일한 herma는 이름 붙여질 수 없는 이 힘-운동의 생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일한 herma로서의 생성자체는 우선 음성적 사태정동의 표지로 현출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음성 안에서 해석이 어떤 방식으로 물체적인 것과 관련되는지, 또한 그것이 서출적 추론에 의해서 단지 어떤 일의적인 우주론적 사태와 연결되어, 천지창조의 그 전언이자 로고스로 드러나는지 직관할 수 있는 것이다. 음성적 사태는 문자화되기 이전의 텍스트다. 그것은 그래서 고분고분하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령하고 해석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Kerygma)한다.


그런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텍스트 안에서 보이는 그 음성적 사태와 아우구스티누스의 그것은 어떤 면에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파르메니데스의 표지가 외부성을 배제하는 내재적 의미의 herma라기보다 외재적인, 또는 초재적인 sēmata라는 것과 연관되는 것은 아닌가? 표지가 이처럼 이원적인 방식으로 분리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논의된 일의적인 어떤 것으로서의 해석적인 사태에 매우 심대한 난점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닌가? 실재로 우리가 앞 절에서 마지막으로 의구심을 표명한 곳에서는 이에 관한 난점이 나타난다.


동일한 음성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적 음성은 물체적인 것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비물질적 음성과는 다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 표지는 성경의 전의적 의미로서 신적인 음성의 불가해한 상징성을 담지한다. 신앙에 의해서만 해결될 법한 표지의 완결적인 해석과정은 사실상 어떤 확증도 지성에게 사전에 마련해주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플라톤의 표지는 형이상학과 우주론의 체계 내에서 갈음되고, 무분별성, 또는 무한성(aperion)이라는 표지를 획득한다. 전자는 해석의 기반으로 부동의 신을 하늘에 두고 있으며, 후자는 생성하는 카오스를 지하 세계에 놓는다. 그리고 철학사는 전자의 해석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잡으면서, 후자의 세계를 응결시키고 로고스의 범역으로부터 추방하고 선별하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그 결과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는 우주의 조화(taxia),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존재(ousia)대표하는하나의 완결된 총체적 표지가 된다. 그러나 다른 편에서 이 철학사적 궤적은 충분히 기만일 수 있다.


그렇다면 표지란 과연 어디에 있는가? 다시 말해 가장 근원적인 표지는 어디에 있는가? 해석이 이런저런 일상적 역사적 사태가 아니라, ‘사건으로서의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면, 이러한 질문은 해결되어야 할 어떤 관건적인 철학적 상황을 겨냥한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질문은 이 논문의 지금까지의 철학사적 탐구가 애초에 겨냥한 상황으로 되돌아 온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일한 것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분명하다. 이제 해석과 사건의 존재론적 상황은 몇 가지 잠정적이고 매개적인 결론을 내면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할 수 있게 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해석은 어떤 일의적인 로고스적 사태라고 부를 만한 것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로부터 로고스는 정식의 추론(logismos tis horismos)으로 향하거나, 서출적 추론(logismos tis nothos)을 향한다.


둘째, 해석은 추론의 방향을 이원적인 방식으로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초의 로고스적 일의성을 음성적인 방식으로 재전유(reappropriation)한다. 그것은 음성에 대한 파악과 설명, 그리고 그것을 통한 실존적 변형을 달성하는 과정 모두를 거치는 바, 이때 변형은 반성적 매개를 통해 해석자 자신으로 향하거나 타자에게로 향한다. 이해와 선포는 그 원초적인 지점에서 해석의 자기운동적 성격을 일신하고, 명령과 선포의 대상으로서의 수동적인 해석자를 정립한다. 하지만 최초에 이 수동성은 해석 자체의 자기운동적 능동성과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 놓여 있다.


셋째, 해석은 이제 표지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이 되는 사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 해석은 추론적인 과정과 변형의 과정 내에서 사건과 이미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추론과 변형은 반드시 어떤 사건 내부적으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철학사에서 이 이미 관련되어 있음이라는 사태는 앞서의 음성적 일의성을 내재적인 구도와 초재적인 구도로 나눈다. 문자적인 텍스트로서의 철학사와 해석의 철학은 이미 관련되어 있음의 음성적인 사건을 확인하는 것이며, 해석은 사건인 한에서의 사건의 표지를 그 상징적이면서도 물질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 그것을 고립시키고 다른 상황들을 배제한다. 이때 해석은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흔적은 해석에게 뒤늦게 도래한 표지인 것으로 보인다. 흔적은 이런저런 사태 안에서 로서 현현하는데, 텍스트는 그것의 특권적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텍스트의 흔적을 통해 표지로 다가간다.[각주:12]


넷째, 텍스트적 정향으로서의 해석은 이제 완연한 정식의 추론이 된다.해석의 규칙과 범주들이 마련된다. 그러나 해석은 여전히 방법론에만 머물러 있지 않으며, 방법론 자체를 해체하고 구성하며, 그 과정에서 자기 실존의 역량을 확인하고, 어떤 모호한 지대인 자아’(Moi)로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모호한 지대라는 것은 아직 그것이 코기토로 확증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텍스트로 고립된 흔적들이 여전히 어떤 서출적인 상태의 표지들을 가리키면서, 경계를 흩뜨려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지흔적음성을 가리킨다는 그 사태로 인해 텍스트의 격리된 내부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힘-운동으로 돌아가고, 다시 텍스트로 돌아오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로써 텍스트는 반복되는 회귀의 진정한 터전이 되지만, 그것은 늘 문자로 결정화(cristallisation)되지 않는 사건의 터전으로 변형된다. 표지는 텍스트와 어떤 공간(spatium)을 떠돈다.

 

이로부터 나는 몇몇 질문들이 생겨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이 반복되는 해석의 과정과 사건의 과정은 모순적이지만 서로를 앞으로 뒤로 끌어가는데, 이때 어떤 주체, 즉 자아의 역량이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반드시 해석주체와 사건의 주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주체는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이 주체의 대당으로는 반드시 어떤 타자가 놓인다. 과연 이 타자는 또한 무엇인가?


둘째, 표지는 흔적을 통해 추론적인 로고스로 구축되거나, 또는 카오스의 낭하로 되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표지는 이렇게 해석과 사건의 커다란 구도를 경계 없이 돌아다니는 무한한 어떤 들과 같아 보인다. 이라는 가설이 어떤 식으로 정당화되는지와는 상관없이(이에 대해서는 뒤에 논할 것이다), 나는 여기서 어떻게 카오스가 로고스로 구축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고 본다. 서론의 최초 절에서 나는 카오스와 뮈토스, 로고스를 살폈고, 이 질문은 다시 그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된다. 카오스가 로고스로 구축되는 그 과정의 뮈토스는 무엇인가? 하지만 이 질문이 전제하는 편견은 사전에 교정될 필요가 있을 것인데, 그것은 카오스에서 로고스로라는 이 과정의 일방향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이것은 어디에서나 시작되고 어디에서나 마칠 수 있는 과정이다. 이것은 표지의 비경계적인 특성에서 필연적으로 추론된다.

 

나는 이 소결론과 질문들을 거머쥐고, 앞서 절 말미에 예고했던 해석과 사건의 현상학적 적용을 해 나가고자 한다.[계속]

 

 

  1. 플라톤의 대화편 『이온』인용은 Plato(vol. 9) translated by W.R.M. Lamb.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Press; London, William Heinemann Ltd. 1925에서 했다. 이 부분의 헬라어 원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οὐ γὰρ ἂν γένοιτό ποτε ἀγαθὸς ῥαψῳδός, εἰ μὴ συνείη τὰ λεγόμενα ὑπὸ τοῦ ποιητοῦ. τὸν γὰρ ῥαψῳδὸν ἑρμηνέα δεῖ τοῦ ποιητοῦ τῆς διανοίας γίγνεσθαι τοῖς ἀκούουσι: τοῦτο δὲ καλῶς ποιεῖν μὴ γιγνώσκοντα ὅτι λέγει ὁ ποιητὴς ἀδύνατον.; since a man can never be a good rhapsode without understanding what the poet says. For the rhapsode ought to make himself an interpreter of the poet's thought to his audience; and to do this properly without knowing what the poet means is impossible.(Burnet 판: 어떤 사람은 시인이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좋은 음유시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음유시인이란 마땅히 시인의 사유에 대한 해석자로 그의 청자들에게 스스로를 납득시켜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인이 의미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서는 불가능하다.) [본문으로]
  2. 자언어에 대한 해석의 불신에 대해 팔머는 플라톤의 『제7서한』과 『파이드로스』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해석은 모든 언어를 구어적 효과로 변형시키는 임무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언어를 문자화하는 것은 그것의 생명력으로부터의 ‘언어의 자기소외’(alienation of language, Selbstentfremdung der Sprache)이다”(Palmer 1969, 15-16). [본문으로]
  3. 아리스토텔레스 「해석에 대하여」인용은 Complete Works (Aristotle). Jonathan Barnes, Princeton University Press, Princeton, N.J. 1991을 이용했다. 그리스어 대조는 Loeb판을 참고했다. [본문으로]
  4. 아리스토텔레스를 ‘해석학’의 시초 운동자로 본다면, 이 언급은 해석학적 주체를 사유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된다. 리쾨르는 ‘자기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은 텍스트에 대한 해석을 통해 흩어진 코기토를 끌어 모으는 작업으로 본다. [본문으로]
  5. Saint Augustine, Liber VIII, caput 12 참조. 국역 『고백록』12장, 선한용 옮김, 대한기독교서회, 2003. Dicebam haec, et flebam, amarissima contritione cordis mei. et ecce audio vocem de vicina domo cum cantu dicentis, et crebro repentenis, quasi pueri an puellae, nescio: tolle lege, tolle lege. statimque mutato vultu intentissimus cogitare coepi, utrumnam solerent pueri in aliquo genere ludendi cantitare tale aliquid, nec occurebat omnino audisse me uspiam: repressoque impetu lacrimarum surrexi, nihil aliud interpretans divinitus mihi iuberi, nisi ut aperirem codicem et legerem quod primum caput invenissem. 원문에 보이는 ‘interpretans’라는 단어를 특별히 볼 필요가 있다. [본문으로]
  6. “가서 내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마19:21).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 13:13-14). [본문으로]
  7. Saint Augustine, 성염 역주, 『그리스도교 교양』, 분도출판사, 1989, p. 85. [본문으로]
  8. 하지만 사전에 이미 고지된 이 ‘신앙’이라는 변형의 과정은 그 자체로 충분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철학 내내 소환되는 이유는 이러한 불충분함을 증거하는 것이지 않은가? 신앙이란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할 신비’가 아니라면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리’란 감히 인간의 지성이 다가가지 못하는 저 ‘부정성’의 영역에서 도래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9. 인간이 ‘사멸할 존재들(thnētoi)’이라면 신들은 ‘불사의 인간들(anthrōpoi athanatoi)’이다. 그들이 힘이 세다는 것과 불사라는 점을 제외하곤 인간과 다를 것이 전혀 없다. 인간을 닮은 신들은 그들의 처신에 있어서도 적어도 인간적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희랍인들은 죽음과 불가사의한 현상들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렇게 ‘신적이 된 인간’은 사실 그 정신(nous)에 있어서 만큼은 그러한 자신의 자존감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었는데(nous는 그 자체로 ‘신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죽음과 불멸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래서 소포클레스(Sophoklēs)는 인간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면서도(“하고 많은 놀라운 것들이 있지만, 일찍이 인간보다 놀라운 것은 없었거니” Antigonē, 332-3), 그 유한성을 한탄한 것이다(“오직 죽음만을 피할 길 없을 뿐” Ibid., 360-2). [본문으로]
  10. 이에 대해서는 이경직의 논문이 매우 유용하다. 이경직, 「플라톤의『티마이오스』에 나타난 공간 개념」, 『철학』87집, pp. 7-31. [본문으로]
  11. 회고는 어떤 사태를 ‘뒤로부터 끌어 당기는 것’ 또는 상기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시간적인 구도 안에서 과거의 것과 미래의 것, 그리고 현재를 나누는 사태 이전에 존재한다. 그래서 회고는 이미 지나온 것만이 아니라 앞서 달아나는 흔적들과 표지들을 잡아 붙드는 것이다. [본문으로]
  12. ‘흔적’의 주제에 대한 플라톤의 언급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해석의 존재론’에 대한 최초의 언급에 해당된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에서 ‘서출적 추론’에 대한 언급에 이어지는 52d 이하부터 57d에 이르기까지 생성의 과정 중, 원소들(흙, 물, 불, 공기)이 어떻게 발생하고 안정되며, 복합물이 되는가를 이야기한다. 이 과정에서 ‘흔적’은 원소들 이전의 ‘무질서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균형(symmetria)이 없는 상태에 놓인 어떤 것이 ‘흔적’이라는 것이다(69b). 균형이 없다는 것은 곧, “비율(logod)도, 척도(metron)도,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흔적들에서 곧장 원소들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도형’(eidos)과 ‘수’(arithmod)가 등장한다는 점이다(53b). 이러한 수학적 실체들은 흔적의 ‘깊이’(bathos)를 형성하는데, 이 중 삼각형이 바로 가장 ‘그럼직 한 것’으로 제시된다. 과연 ‘해석’에 있어서 이 ‘깊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흔적은 어째서 ‘깊이’ 안에서 수학적 표상이 되어야 하는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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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해석과 사건 (4)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3)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바로 하이데거가 말한 바, ‘아르케는 아페이론이다라는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이 위치지워진다. 하지만 이는 그 본래적인 정위를 벗어나는 방식으로 위치지워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을 크레온, 즉 필연으로 파악하는 데까지 나아갔으나, 애초부터 그것을 동일자로 파악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환원과정의 절반만을 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은 오히려 플라톤에 더 가까워 보인다. 왜냐하면 플라톤은 우주생성의 과정을 묘사하면서, ‘구형의 우주를 논함으로써 동일성의 테마를 중심에 놓기 때문이다. 구형이란 기하학적으로 자기완결적인 형태며, 이것을 플라톤은 최대의 자기 동일성을 지닌 것이라고 한다(33b). 이는 닮은 것(한결 같은 것)이 닮지 않은 것(한결 같지 못한 것)보다 월등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존재’(ousia, 실체)와 타자성(theatron)이 덧붙여진다(35a).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는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F. 릭켄의 견해에 따르면, 존재(Sein)는 결코 사물이나 물성(物性; Dinglichkeit)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현실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때, “현실태”(Wirklichkeit) 개념은 현실화, 즉 현행화로서 작용함”(Wirken), “작용 중에 있음”(am Werke sein)이라고 할 수 있다(Ricken 2000, 241 참조). 그러므로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완전태로서의 구형에서 그 과정을 완결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실태로서의 작용즉 그 힘에 의해 이해되는 어떤 것이다. 플라톤이 우주생성의 과정이 하나의 완결된 결론으로 달려가는 것과는 달리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가능태(잠재태)가 시시각각 간섭하고 있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애초부터 플라톤이 무규정자를 적극적으로 사유했음에도, 그것을 동일자로 환원함으로써, ‘존재를 어떤 부동의 질서로 응고시키는 목적론적인 사유 구도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을 엔텔레케이아에 두고 그것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다루고 있지만, 가능태를 그러한 엔텔레케이아의 원동력으로 삼음으로써, 단일한 완전성으로 응고되는 사유 구도를 상당히 회피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라 하더라도, 이러한 사유구도가 지속되지는 않는다. 그에게도 무규정적인 아페이론이 아니라 규정하고, 비례를 계산하는 로고스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질료적인 아페이론보다 형상철학을 자신의 본령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아페이론은 원동력이긴 하지만, 학문적인 로고스(정식화)의 대상으로는 부적당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철학사적인 부침 안에서 아낙시만드로스를 회고한다고 하겠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구도는 형상(eidos)과 이데아의 편이었고, 이것은 둘의 정도의 차이를 논외로 한다면, 동일성의 철학에 더 가깝다.[각주:1]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본래 의미는 아르케=아페이론의 구도를 획득하기 이전에, 플라톤이 사유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적극적으로 도입했지만, 실패한 그 사유구도의 흔적을 담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때 흔적은 물론 연대기적으로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말하는 흔적은 해석의 흔적이며, 온전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지만, 지금 우리가 그 흔적을 통해 아낙시만드로스를 조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흔적을 통한 해석은 이와 같이 조망을 요청한다. 흔적 자체만으로는 해석의 적합성(adequacy)이 확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차라리 해석은 가장 부박한 어떤 것으로 전락할 것이다.


결국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안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것이 이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런 말 건넴이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 사유 구도에서는 어떤 부정성의 방식, 또는 억압의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즉 아페이론을 존재로 불러 모으는, 그래서 존재 아닌 생성이나 비존재는 흔적 없이사라져 버리는 그런 방식 말이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아낙시만드로스가 아니라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의 계열만을 따른다면, 흔적 없음은 그대로 아페이론에 대한 우리 사유로 응결되었을 것이다.[각주:2] 후자의 계열은 하나의 형상화(figuration)를 가능하게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유에 어떤 사건을 발생시키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해석은 재형상화(configuration)를 완전히 거침으로써만 흔적을 잡아쥘 수 있게 된다.[각주:3]


하이데거를 통한 형상화 과정과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한 재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즉 아르케는 아페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아페이론은 아르케를 감싸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며, 설득되지 않은 잔여’(residuum)로 남아 수동성과 능동성을 향유한다. 이러한 나의 해석은 이 단편에 대한 상식적인 해석 뿐만이 아니라, 마치 하이데거가 제시한 잠언의 뜻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해석을 남김없이 볼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으로부터 시간성을 사유할 때 드러난다. 잠언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χρόνος에 대한 해석에서 하이데거는 올바르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에 대한 해석이 현대적 사유에까지 습관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베르그송도 마찬가지로 지적하는 바인데, 바로 시간의 공간화라는 문제다.[각주:4] 이에 따르면 시간은 오직 그것의 연장에 따라 사유되고 또한 그것은 흘러가는 지금이라는 점들의 계산으로 사유된다(Heidegger 1981:2012, 185:120-21). 하지만,

 

χρόνος는 그리스어로 τόπος, 즉 그때마다 한 존재자가 속하는 자리에 상응하는 것을 말한다. χρόνος는 부적절한 시간(Unzeit)과는 달리 그때마다 호의적인 시간이요 베풀어진 시간이다. τάξις는 결코 지금-점들을 일렬로 배열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때마다 적당하고 알맞게 하며 베풀면서 안배하는 시간으로서의 시간 자체에 존재하는 할당하는 성격을 의미한다. 우리는 시간은 이다라고 말할 때 시간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때가 되었다’(Es ist Zeit)이고, 다시 말해서 무언가가 일어날 때이다라고 또는 무언가가 오거나 갈 때이다라고 말할 때 시간을 포착한다(Ibid.).[각주:5]

 

나는 여기서 하이데거의 시간 해석이 크로노스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비판을 유보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부적절한 시간과는 다른 시간은 크로노스라기 보다 카이로스(Kairos)라는 주장도 지금은 내세울 필요가 없어 보인다. 어쨌든 이러한 비판은 그의 존재와 시간2부와 더불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 제시된 하이데거의 해석은 그러한 비판과는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한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시간, 즉 크로노스를 존재의 할당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호의적으로 베풀어진 시간이며, 매우 능동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래서 우리는 시간을 어떤 지금-점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 다른 말로 적기’(適期)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이를 하이데거는 통제된 겨를(Weile)”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순응된 겨를이기도 하다. 무엇이 순응되는가? 현존하는 것들 즉 존재자가 순응된다.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들이 통제에 순응하고 서로 인정함으로써 그것들은 겨를의 할당에 호응한다. 그때 그때 존재에 있어서 시간에 호응하는 식으로 존재자가 있다는 사실”(Ibid., 185:121), 이것은 하이데거-아낙시만드로스에게 매우 관건적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겨를이 됨으로써 현존은 존재의 본질을 형성하면서, “불응을 뿌리치고 (...) 유일무이한 통제자로서의 하나이자 동일한 것을 구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동일성의 구원 과정은 존재자 자신의 소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바로 존재 자신이 행하는 소거며, 따라서 아페이론 자신이 크로노스를 따라 스스로를 소거하는 것이다. 이때 현존재는 자신의 시간성을 경험하는데, 이는 소거적인 떠오름의 방식을 통해 가능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소거는 통제의 강제적인 필연에 긴박된다. 왜냐하면 존재는 동일자로서 현출과 소거를 통제하고, 그러한 통제함이 강제적인 필연인 그런 식으로 현성하기 때문이다(Ibid., 123:187). ‘아르케=아페이론=존재는 이렇게 시간과 호응하면서, 동일자로 환원된다. 여기서도 남는 것은 바로 생성의 본래면목, 즉 잠재태로서의 운동-힘이며, 잔여 자체다. 이제 이 장에서 고찰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전체 단편을 볼 차례다.

 

무한정한 것(apeiron)은 있는 것들의 근원이자 원소(stoicheion)[이다.] (...) 그것[근원]은 물도 아니고, 원소라고 불리는 것들 중에서 다른 어떤 것도 아니며, [물이나 원소들과는] 다른 무한정한 어떤 본연의 것(tis physis apeiros)이다. 그것에서 모든 하늘(ouranos)과 그것들 속의 세계들(kosmoi)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것들[원소들]로부터 있는 것들의 생성이 있게 되고, [다시] 이것들에로 [있는 것들의] 소멸도 필연(chrēon)에 따라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자신들의] 불의(adikia)에 대한 벌(dikē)과 배상(tisis)을 시간의 질서(taxis)에 따라 서로에게 지불하기 때문이다(DK12A9, B1).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 대한 통제는 한계의 거부이다. (...) 그러나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게 현출이 존재하게 되는 이것(동일한 것으로서의)으로 현존하는 것으로의 소거 역시도 현출하니, 강제적인 필연에 호응하여 그렇다. 말하자면 모든 현존하는 것 자체는 (그 자신으로부터) 적합을 내주고 또한 한 현존하는 것이 다른 현존하는 것에게 존중(인정)을 허락하는데 (이 모든 것이) 시간에 의한 시간적인 것의 할당에 호응하여 불응의 치유로부터 [이루어진다](Heidegger 1981:2012, 94:150).

 

하이데거가 누락하고 있는 부분은 처음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였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우회한 지금에서는 그것이 결정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단적으로 아페이론은 아르케나 스토이케이온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오히려 아페이론은 그러한 원소들과는 달리 어떤 본연의 것, 달리 말해 무규정적인 본성(근원)’(tis physis apeiros)인 것이다. 무규정적인 근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향유하는 작용력과 수용력으로서의 힘-운동이며, 아리스토텔레스가 올바르게 말한 바와 같이 근원이 없는 근원이다. 그것은 가장 적확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본문에 있는 그 단어인 생성’(γενεσις)이다. 원소란 무엇인가? 그것은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질서의 최초 상태, 즉 물, , , 공기다. 그것은 따라서 이러한 존재자들을 가능하게 하는 가능태며, 하이데거의 견해 안에서는 현출과 소거라는 그 크로노스적인 과정에서 소거의 힘일 것이다


나는 하이데거의 해석이 전적으로 옳지 않다고 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하이데거는 아페이론이 곧 아르케라는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을 축자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외의 그의 해석은 매우 온당하다. 하이데거가 누락한 그 부분은 바로 하이데거 자신에 의해 교정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그 자신도 소거적인 떠오름이라는 말에서 소거과정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그는 이러한 과정을 동일성으로 환원한다. 하지만, 소거란 물러남이고, 이러한 물러남의 머무름은 여기’(Da)가 아니라 너머’(Über). 그러나 이 너머는 어떤 초재적인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운동이 현행화하는 내적인 것의 평면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이 원소들의 생성의 근원이 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애초에 고대 헬라스 세계의 자연철학에 대한 설명과 해석에서 시작해서, 대표적인 철학자인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를 거쳐, 아낙시만드로스를 우회하고, 다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하이데거의 아낙시만드로스 해석을 재음미하면서, 해석의 순환이 누승적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지나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을 하이데거와 더불어, 또한 거리를 두면서 재해석했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다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이 글의 지금까지의 해석과정이 텍스트의 문자 그대로를 따라가기보다, 해석과 사건이라는 큰 틀 안에, 고대 세계의 사유가 가지는 어떤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해 음미와 재음미라는 소크라테스적인 물음을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 과정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흔적을 쫓는 과정이며, 그런 의미에서 연대기적인 과정은 아니고, 오히려 일종의 해석학을 위한 텍스트의 재배치와 순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질문은 하나 혹은 둘의 순환이 마무리되면 반드시 되물어져야 하다. 다시 묻자. 그렇다면 사건과 해석이란 자연철학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대립은 해석과정에서 단순하게 바라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철학사 내에서 차라리 길항의 의미를 함축한다. 그것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에서 조우며 보다 논쟁적으로 봤을 때에 교전’(交戰, encounter)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교전은 내재적인 것과 초재적인 것 사이에서 이루어진다.


이 둘 모두에게 중요한 것은 로고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의 편에서 로고스는 단지 존재의 표지며, 헤라클레이토스의 편에서 그것은 자연(원초적 사태, physis)의 표지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앞서 파르메니데스의 표지sēmata로 적었고, 헤라클레이토스의 표지herma 적시했던 것이다. 전자는 천체나 저기 먼 어느 곳으로부터 오는 전언이며, 후자는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며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하는 전언이다. 전자에게서 로고스는 인식의 대상이지만, 존재라는 확고부동한 대상을 통해 사유된다. 후자에게서 로고스는 하나의 원초적 사태로서 사건으로 경험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둘 모두에게서 현자또는 철학자이겠지만, 파르메니데스의 현자는 그러한 로고스의 표지를 비물체적인(asomata) 방식으로 알 뿐이다. 왜냐하면 그에게 감각적인 것은 오로지 오류의 원천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적인 것을 수용하면서, 안에서로고스와 더불어사유한다. 따라서 전자에게 로고스는 초재적이며, 후자에게 로고스는 사유주체와 대상이 구분이 불분명한 내재적인 평면에 있게 된다. 초재적인 상태에서 사건은 운동-힘이 아니라 대상으로 정립되며, 내재적인 상태에서 운동-힘은 애매모호한 기체(hypokeimenon)와 같이 무규정적인 상태에 근접한다.


여기서 자연’(physis)은 무엇임(whatness)으로서의 본질’(essence)로서 사유되기도 하고, 이것임(thisness)로서의 어떤 특개성’(singularité)으로 사유되기 시작하는 과정에 있다. 아낙시만드로스에게 이 사유의 시작, 즉 그 원초적인 상태는 바로 아페이론이며, 잠재적인 무규정자로 드러난다. 아페이론은 비존재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것은 곧 카오스의 상태에서 크로노스의 경로를 따라 시시각각 출몰하는 힘-운동이다. 하지만 그것은 질료적이며, 그렇다 하더라도 감각되지 않고, 추론된다. 여기서 카오스는 비존재의 상태이면서 비시간성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출몰과 소거, 또는 더 일반적인 용어를 사용하자면, 생성은 곧 어떤 애매모호한 지대로부터, 분할가능한 명석판명한 지대로의 우주적 생명의 드러남이자, 자기-제작(auto-poiesis)의 전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는 시간성이라는 차원에서 어떻게 길항하는가? 그것은 매우 심대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즉 크로노스는 여기서 비존재와 존재를 가르는 표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료적인 차원에서 헤라클레이토스가 로고스를 정신적인 대상으로 경험한다면, 파르메니데스는 로고스를 통해 존재라는 형상적 차원을 인식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시간성은 생성의 평면이냐, 존재의 평면이냐가 아니라 운동-힘으로서의 잠재태인가, 아니면 그것이 표현되는 현실태인가라는 문제를 가리키는 것이지 않은가? 결론적으로 생성을 배제하는 파르메니데스와 생성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유 이미지는 각각 하나는 현실태로서 하나는 가능태로서 시간성을 경계로 사건을 경험하거나 인식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이 둘은 각각의 초재적이고 내재적인 평면에서 서로를 돕지만, 다시 서로에게 반발하면서 현출하고 소거되는 그 사유 이미지를 나누어 갖지 않겠는가?


자연은 그래서 카오스에서 로고스로 생성하면서, 생성 자체를 존재와 더불어 향유한다. 이때 존재는 현행화되는 지상의 왕이며, 생성은 지상의 왕의 권위를 가능하게 하면서, 자신을 사라지게 만들지만 그러한 소멸로 인해 똑같이 지하의 왕으로 군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일단의 해석과정을 여기서 멈추고 질문들의 해결을 뒤로 미룰 것이다. 나로서는 이 과정을 단번에 주파하고자 하기보다, 다시 어떤 현상학적인 훈습(이 논문의 II)을 우회함으로써 해석과 사건의 또 다른 측면을 바라볼 필요를 느끼기 때문이다. 남겨진 철학사적 과제는 들뢰즈와 리쾨르를 살피면서 다시 자연스럽게 부각될 것이고, 그것은 그때에야 비로소 완연한 질문과 대답으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학적인 훈습과정을 거치기 전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분석의 전제로 남겨져 있던 해석자체의 철학사적 의미를 묻는 것이다. 과연 해석’(ἑρμηνεία, interprétation) 또는 해석하다’(ἑρμηνεύειν, interpréter)를 우리가 이토록 무책임하게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따라 사건이 다시 어떻게 채색되는가? [계속]





  1.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동일성’(tauta)에 대한 논의의 차이를 분명하게 사유해 보는 것은 매우 힘든 작업에 속한다. 이 둘 모두가 ‘차이’보다 ‘동일성’을 우선적인 어떤 것으로 보았고, 이것을 통해, ‘차이’와 ‘타자’를 환원했다는 것도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텍스트 내에서 짚어 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이 난점은 아리스토텔레스보다는 오히려 플라톤에게서 더 심한데, 이에 관해 논하는 그의 아주 중요한 텍스트인 『파르메니데스』가 아직 충분히 해석되어 있지 않기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현대철학에서 아페이론에 대한 관심은 아마도 시몽동이 불러일으킨 영향사 안에서 관찰될 수 있을 것이다. 시몽동은 Du mode d'existence des objets techniques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양식』, 김재희 역, 그린비, 2011, 이하 EO, 페이지수는 한국어판)에서 본성(nature)이라는 말은 어떤 더 근원적인 것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논하면서, 이것은 인간 안의 인간성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서의 아페이론이며, 개체로서의 인간은 이 자연스러운 고유한 매체를 사용하면서 발명한다고 말한다(EO 356, 강조는 인용자). [본문으로]
  3. 문제는 이 과정이 존재론의 평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가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어떤 암시를 주고 넘어가고 있다. 앞서 인용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 구절을 참조하라. [본문으로]
  4. 베르그송에게서 ‘시간의 공간화’에 대한 비판은 그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ées immédiates de la conscience』참조. 이 중요한 텍스트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본문으로]
  5. “Von woheraus aber der Hervorgang ist de, jeweilig Anwesenden auch die Engängnis in dieses (als in das Selbe) geht hervor entsprechend der nötigenden Not; es gibt nämlich jedes Anwesende selbst (von sich aus) Fug, und auch Schätzung(Anerkennung) läβt eines dem anderen, (all dies) aus der Verwindung des Unfugs entsprechend der Zuweisung des Zeitigen durch die Zeit.”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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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과 사건 (3)

-  우회-아낙시만드로스  -

 






박준영/수유너머N 회원














2) 우회 아낙시만드로스



나는 여기서 앞서 행한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 해석을 바라보면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의 근원적인 경향을 재음미하고자 한다. 이러한 경향에 대한 선구적 해석은 하이데거의 논문과 저서로부터 비롯된다. 하이데거는 이런저런 텍스트들을 통해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하는데, 나는 이 중 몇몇 부분을 재해석함으로써, ‘해석사건이 고대철학 내에서 어떤 근원적이 의미를 함축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탐구작업은 말건넴의 사태를 해석하는 것이다.[각주:1] 하이데거가 문제 삼고 있는 잠언은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해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딜스 번역은 다음과 같다.


Woraus aber die Dinge das Enstehen haben, dahin geht ihr Vergehen nach der Notwendigkeit; denn sie zahlen eiander Strafe und Buβe für ihre Ruchlosigkeit nach der festgesetzen Zeit(DK12A9, B1).

(그러나 사물들은 자기가 생겨난 곳으로 필연적으로 사라져 간다. 왜냐하면 사물들은 자신이 저지른 해악에 대하여 정해진 시간에 따라 서로 벌을 받고 대가를 치르기 때문이다.[각주:2])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우선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잠언의 τχρεών이다. 이것은 필연으로 번역되는데, 이때 필연은 강제의 의미를 함축한다. 이 말은 단적으로 존재자 전체의 존재에 대한 앎으로부터, 실로 존재자의 존재가 그곳으로부터 자신이 출발하고 그리로 되돌아가는 그러한 것에 대한 앎에서 말해진다고 한다[각주:3]. 하이데거는 이 단어의 수수께끼같은 의미를 캐기 위해서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다른 잠언에 기대어야 한다고 하면서, 다음의 짤막한 구절을 인용하는데, 내 생각에 이 구절이야말로 지금의 우리 논의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한 상식적인 번역은 원리는 아페이론이다정도가 될 것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것을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에 대한 통제는 한계의 거부이다라고 번역한다. 아페이론을 한계의 거부로 아르케를 통제로 본 것이다. 아르케의 가장 적합한 번역어가 통제라는 것은 이 논문의 여러 곳에서 밝히고 있다. 이 기본적인 의미 아래에 하이데거는 다시 출발점(Ausgang), 철저히 주재함(Durchwaltung), 영역(Bereich)”이라는 다른 의미들을 덧붙인다(Heidegger 1981:2012, 170:109)[각주:4]. 그러나 이러한 통제이자 출발점인 아르케는 그 뒤에 나오는 아페이론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받지는 않는다. 모든 것이 무규정적인 것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또한 하이데거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페이론은 이때 거부로 해석된다. τὸ ἄπειρον은 통상적으로 해석되듯이 무한자라고 올바르게 번역될 수 있지만,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은 오히려 한계에 저항함이라고 옮길 수 있는데, 하이데거에게 이것은 현존하는 것의 현존에만 관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아페이론은 존재의 아르케가 되며, “τὸ ἄπειρον은 한정의 거부이고 오로지 존재에만, 그리스식으로 다시 말해서 현존에만 관련된다”(Ibid., 110:172). 여기서 하이데거는 겉보기에 역설적인 주장을 하게 된다.

 

통제는 현존하는 것을 출발점, 철저히 주재함, 영역 안으로 순응시킨다(fügt). 통제는 우리가 즉각 존재자라고 부르며 또한 그렇게 불렀던 것을, 그것이 비로소 그 안에서야 그리고 오로지 그 안에서만 각기 그 존재자로 있게 되는 그것, 즉 존재에다 맞추어 통제한다. 통제는 존재 자체이며 통제는 πειρον, 한계의 거부이다(Die Verfügung ist das Sein selbst, und die Verfügung ist ἄπειρον, Verwehrung der Grenze).(Ibid., 111:172-73)

 

통제가 한계의 거부라는 것은 반대자들을 억지로 절충해 놓은 듯한 인상을 강하게 내비치지만, 하이데거는 이 논지를 끝까지 밀어 붙인다. 우선은 τὸ ἄπειρον에서 아페이론의 접두어 ‘ἄ’가 결여태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이것은 곧장 존재의 결여를 의미하게 된다. 이 접두어는 하이데거에게 어쨌든 존재와 연관된다. “ἄπειρον에서 αρχή의 성격, 곧 통제의 성격을 갖는데, 그것도 오로지 존재, 곧 현존과 관련해서만 그러하다”(Ibid., 112:174). 오로지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강조는 그것이 생성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적어도 이 구절에 대한 해석에서는 그렇게 보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아페이론을 존재에 결박시키고 난 후, 이것이 동일자로 회귀하는 과정을 밟아 나간다. 우선 이것은 “ἀρχή, 즉 본질 안으로의 순응(Ausgang der Fügung ins Wesen)”으로 취급된다(Ibid., 115:178). ‘거부는 이제 본질에 순응하면서 그러한 본질을 구제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다시 말해 존재 안에서 아르케와 아페이론은 하나의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통제와 거부는 존재로서 존재자를 존재하게 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다시 맨 처음의 잠언으로 돌아간다. 즉 자신의 출발점으로 되돌아가는 그 움직임은 동일자로부터 현출하여 동일자 안으로 떠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출과 떠남은 반드시 강제적인 필연τχρεών을 따른다. 그래서 이 필연 자체가 동일자이다. 이러한 동일자, 곧 통제(ἀρχή), 이러한 동일자, πειρονχρεών, 곧 필연이자 강제하는 것이다”.(Ibid., 116:179) 아페이론은 아르케의 충만한 본질이며, 이것이 곧 크레온이고, 어떤 시원적인 것을 보존하는 것도 이로부터다.

 

강제적인 필연은 πειρον의 방식으로, 즉 최종적인 항존으로서의 모든 한정을 막는 저항으로서 현성한다. 모든 한계에 저항하는 방식의 통제로서 이러한 강제적인 필연은, 모든 현출함이 그로부터 나오고 모든 소거가 그리로 되돌아가는 동일자이니, 동일자로서의 그것 안에서 이행이, 다시 말해서 항존으로 전락하지 않는 본래적인 현존이 현성한다. (...) 아낙시만드로스의 잠언은 존재를 말한다. 첫 번째 문장은 존재 자체를 동일자라고 명명하는 바, 모든 그때마다의 현존하는 것은 이 동일자의 통제 속에 있다.(Ibid., 117:180-81)

 

그렇다면 존재자의 출현은 이러한 강제적 필연으로 인한 현출과 소거(떠남) 속에 있게 되며, 존재 자체는 당연히 동일자여야 한다. 동일자가 존재 자체이다(Die Selbe ist das Sein selbst)”(Ibid., 117:184). 나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아낙시만드로스 잠언 해석에서 하나의 커다란 누락을 본다. 그것은 바로 생성의 문제다. 여기서 생성의 문제는 아페이론이 현출하고 소거되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문제로 보인다. 하지만 이 운동은 존재의 확고부동성, 마치 일자와도 같은 위력 앞에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만이 전일적으로 보장되고 있는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통상적으로 취급되는 생성의 문제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그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한 설명, 그리고 크레온에 대한 의미파악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론 안에서 그것을 충실하게 강박하고, 불러 세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렇게 존재에만 긴박된 채, 그 부동성만을 향유하기를 강요받는 아페이론이란 그 개념적 강도에 있어서 철저하다 하더라도, 그것의 풍부함이라는 측면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넘어서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아낙시만드로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사(형이상학』I권[Α])에서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킨다. 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는 이런저런 저서들에 흩어져 있다. 사실 나의 이런 관점은 하이데거의 그것과 다르다. 하이데거는 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심을 다음과 같이 논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현자[아낙시만드로스]에 대해 언제나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자주 그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는 아낙시만드로스 안에서 무한자(the indeterminate)에 대한 아이디어, πρτη λη(제일 질료)의 예언자를 발견하려고 한다. ἀλλκαὶ ἐξ ντος γίγνεται πάντα, δυνάμει μέντοι ντος, ἐκ μὴ ὄντος δὲ ἐνεργείᾳ.(모든 사물들은 어떤 것으로부터 나온다. 이 어떤 것은, 잠재적으로 있는 것이지, 현실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각주:5]


우선, 하이데거도 지적하다시피 아낙시만드로스는 형이상학1069b15에 가서야 논의된다[각주:6]. 그 부분은 가능태(잠재태)와 현실태를 논하는 부분인데, 아낙시만드로스 단독으로 논의 되지 않고, 엠페도클레스과 함께 논해진다. 선대의 철학자들을 빠짐없이 다루고자 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스승으로 전해지는 탈레스에 대해서는 그토록 소상하게 소개하는 데 반해 결코 그 비중이 덜하지 않은 아낙시만드로스를 해당 권에서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까? 게다가 아낙시만드로스의 핵심개념인 아페이론(apeiron)은 여기서 관심에 들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러한 경향은 자연학에서도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아낙시만드로스가 단지 천체의 구성과 관련하여 지구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 철학자로 등장한다(DK12A26; 천체에 관하여II, 13. 295b10). 그리고 자연학에서는 대립자들(enantiotēs)이 하나 속에 있다가 거기서 분리되어 나온다고 주장한 철학자로 소개된다(DK12A16; I, 4. 187a12). 혹시 다른 자연철학자들을 질료인의 탐구자들로 파악했던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작 아낙시만드로스의 아페이론에 대해서는 질료인이라는 규정을 내리기가 저어했던 것이 아닐까? 아페이론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다루어지고 있는 자연학의 해당 부분(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그대로 형이상학에 실린다)에서는 우선 아페이론을 물체’(soma)로 놓고, 그것이 결코 하나이거나 단순한 것일 리가 없다고 말한다(DK12A16, 자연학III. 4. 204b22). 여기서 하나도 아니고 단순함도 아니라는 규정은 원리’(archē)와의 상당히 심대한 대비다. 그는 원리를 형이상학V(Δ)의 맨 처음에 다루면서, 그것이 운동과 인식(), 생성첫 출처”(최초의 운동, κινηθείη πρτον)라고 논하는데, 이러한 첫 출처로 그는 φύσις, στοιχεον, διάνοια, προαίρεσις, οσία, τοὗ ἕνεκα라는 여섯 후보를 분명하게 내세우고 있다(1013a20)[각주:7]. 이것들은 모두 하나이자 단순한 것들이다. 그리고 다시 자연학을 살펴보면, 그는 아페이론이 원소’(요소, στοιχεον)와는 다른 것이라고 논한다. 오히려 그것은 그로부터 원소들이 생겨나는 어떤 것이다(DK12A16;자연학III, 4, 204b22). 또 다른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모든 것이 근원이거나 아니면 근원에서 나왔고, 무한정한 것의 근원은 없다. [무한정한 것의 근원이 있다면] 그것이 무한정한 것의 한계(peras)가 될 테니까. 게다가 그것[무한정한 것]은 일종의 근원이기 때문에 생겨나지도 소멸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생겨난 것은 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모든 소멸에도 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말한 것처럼 이것[무한정자]의 근원은 없다. 오히려 그것이 다른 것들의 [근원]이며, 모든 것을 포함하고(periecein) 모든 것을 조종하는 것(kybernan)으로 생각된다. 무한정한 것 이외의 다른 원인들(aitia), 예컨대 지성(nous)이나 사랑(philia)과 같은 것들을 설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이것은 신적인 것(theion)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낙시만드로스와 대부분의 자연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사멸하지 않고(athanaton) 파괴되지 않기(anōlethron) 때문이다[각주:8].


따라서, 아페이론의 근원(원리, archē)은 없다. 그것은 근원의 근원으로서 모든 원리와 원소들을 포함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더불어 신적인 것이다[각주:9]. 헬라스인들에게 신적인 것이란 언설할 수 없는 것, 그것을 넘어선 신성한 것을 의미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에 따르면 헬라스인들에게는 모든 소중한 것들, 즉 덕 중의 덕(arethē)은 바로 신적인 것이다. 아페이론은 사멸하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 그것, 신성한 어떤 근원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법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법칙은 한정(peras)를 가져야 하며, 아르케로서 원리와 원소를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연 이러한 아페이론의 특성을 아낙시만드로스로부터 알아챘음에 틀림없다. 즉 아페이론은 그가 학문의 정식’(logos)으로 설정하고자 한 아르케의 범역을 벗어나는 신적인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중요한 것은 로고스(정의, definition). 아르케를 벗어나는 아페이론은 그래서 이 로고스 안에 정위될 필요가 있다. 이전에 아르케가 인식의 첫 출처라고 한 부분을 상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이자 단순한 것으로서의 아르케는 다름 아니라 인식의 첫 출처이며 이는 인식할 수 없는 것, 즉 아르케가 아닌 것을 배제한다. 그것은 어떤 것들은 안에 내재하고 어떤 것들은 밖에 있다”(1013a20). 이는 바로 원인’(aition)으로 가는 문턱이다. 다름 아니라 4원인 중 내재인과 외재인이 나누어지기 때문이다.[각주:10] 그리고 이러한 원인으로서의 원리야말로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으로 간주된다. 결론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페이론 해석은 아르케를 경유하여 원인으로 동질화되는 아페이론, 로고스로 규정될 수 있는 무규정자만을 수용하는 그 환원의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때 로고스는 헤라클레이토스보다는 파르메니데스의 그것에 더 가깝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하이데거와는 달리 아페이론에게서 생성의 의미를 제거하지는 않는다. 이에 대해 나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탐구작업이 아페이론을 동일자로 환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와 시공간의 거리 어디쯤에 방치하는 것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리고 뒤에 말하겠지만, 방치된 일련의 사건은 그의 형이상학에서 가능태’(잠재태)라는 얼룩(흔적)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경우는 이와는 상당히 상이하다. 플라톤은 이 무규정적인 질료로서의 아페이론을 적어도 그의 티마이오스에서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플라톤에게서 아페이론은 직접적으로 (하이데거와 유사하게) ‘필연’(anankē)과 연관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는 이 연결, 즉 아페이론과 아낭케의 연결은 그렇게 뚜렷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정의(로고스)에서 어떤 흔적(잔여)으로 끈덕지게 남는다[각주:11].


플라톤은 우선 물리적 원인들(, , , 공기)부차 원인’(synaitia)으로 놓는 것에서 시작한다(티마이오스46c[각주:12]). 원인으로서의 권능을 가지지만 이 원인들은 이성(logos)이나 지성(정신, nous)을 가지지 못한다. 이것들은 마땅히 영혼(psychē)라고 불릴 수 없기 때문이다(46d). 이렇게 영혼에 의해 생기는 원인은 일차적 원인이며, 필연적 원인은 이차적 원인이 된다. 원인의 이중성은 사실 매우 특이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원인은 그것의 단일성과 단순성에 의해 정의되며, 4원인 외에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차원인은 가능태에 속하는 특징이다. 어쨌든 부차원인은 어떤 무질서한 일들의 원인인 바, 주로 물질적인 것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신(nous)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부차원인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원인인 한, 정신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이에 대해 일차원인이 정신과 더불어 지혜(phronēsis)를 갖추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정신은 이 두 원인을 모두 추구하되 물질적인 이차원인은 부수적으로만 추구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일차원인은 선(agathon)과 미(kalon)의 편에서 지혜에 의해 찾아지는 비물체적인(asomata, incorporeal) 것이며, 이차원인은 물질적인(somata, coporeal) 것으로서 플라톤 선분의 체계 안에서 감각적인 것(aistheton)과 모상(eikon) 이마쥬(eidolon)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각주:13] 우주의 구성은 물질적인 것과 비물체적인 것의 결합이다. “우주의 탄생은 필연과 지성의 결합에 의해 혼합된 결과라는 것이다(47c). 이때 필연(ananke)은 지성의 설득에 의해 승복하며, 이로써 전체’(to pan)가 구성된다. 그리고 플라톤은 세 번째 종류의 원인을 이야기 한다.


이는 일체 생성(genesis)의 수용자(hypodochē)인 것으로 이를테면 유모(tithēnē)와 같은 것으로 이해해야만 합니다. (...) 그것은 이것이나 저것이란 표현을, 그리고 그것들을 불변의 것들로 있는 것으로 나타내는 하고 많은 표현(phasis)을 기다려 주지 않고 피해버[립니다.] 어쨌든 우리는 이것들을 별개의 것들(hekasia)로 말해서는 안 되고, 각각의 경우에도 그 모두의 경우에도 언제나 유사한 것으로서 반복해서 나타나는(periphenomenon) 이와 같은 것(toiouton)’이라는 식으로 불러야만 합니다. (...) 무슨 성질의 것이든 간에, 그게 뜨거운 것이거나 흰 것 혹은 대립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이건 간에, 그리고 대립되는 것들로 이루어지는 모든 것도, 그 낱말들 가운데 어느 것으로도 그걸 부르지 말아야 될 것입니다(49a~50a, ‘[ ]’는 인용자 보충).

 

플라톤은 이 필연적인 것에 대해서 이름 붙이기를 어려워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인용문에서 파르메니데스를 떠올리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다. 그리고서 그는 반복되는 현상의 세계와는 달리 필연은 그 모든 것의 수용자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단지 유비적인 지칭일 뿐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변화되지 않는 동일자이기도 하지만, 단지 이름으로 그렇게 불릴 뿐이고, 모든 것의 새김바탕(ekmageion)으로서 거기 수용되는 것들에 의해 변동도 하게 되고 모양도 다양하게 갖게 되어, 그것들로 인해 그때마다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50b~50c)[각주:14]. 이렇게 해서 이제 플라톤은 생성의 세 가지 기반에 대해 말하게 된다. 생성되는 것, 그리고 이 생성되는 것이 그 안에서 생성하게 되는 곳인 것, 그리고 또한 생성되는 것이 태어남에 있어서 닮게 되는 대상이 그것이며, 이는 각각 창조물(자연, physis), 어머니, 아버지로 지칭된다(50d).


하지만 이 수용자는 지성에 의해서도 가장 포착하기 힘든 것이며, 이에 따라 지성의 포획에도 좀체 걸려들지 않는 존재가 된다. 이것은 질료적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고(aoraton) 형태도 없는(amorphon) 종류의 것이다(51a)[각주:15]. 그래서 이런 종류의 것은 참된 설명(logos)을 동반하는 일차원인과 이차원인과는 달리 설득에 의해 바뀌지 않는 것이다(51e). 그러므로 플라톤의 설명에서는 일차원인과 이차원인이 정신(지성)에 따라 설득당하거나, 또는 설득하는 요소라면, 수용자는 그렇지 않은 것이 된다. 다시 말해, 하나는 똑같은 상태로 있는 형상”(영혼, 이데아-일차원인)이며 생성되지도 소멸되지도 않은 것이고, 지성에 의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52a). 그리고 두 번째 것은 감각에 의해 지각될 수 있고 생성되는 것이며, 언제나 운동하는 것이요, 그리고 어떤 장소(topos)에서 생성되었다가 다시 거기에서 소멸하는 것이며, 감각적 지각(aisthēsis)을 동반하는 판단(의견: doxa)에 의해 포착되는 것”(설득되는 필연-이차원인)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것은 언제나 존재하는 공간(chora)의 종류로서, [자신의] 소멸은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생성을 갖는 모든 것에 자리(hedra)를 제공한다(52b). 하지만 이것은 감각적 지각으로 포착되는 것이 아니고, ‘일종의 서출적 추론’(logismos tis nothos)에 의해 포착되며, 믿음(pistis)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설득되지 않는 필연-이름붙여질 수 없는 원인[각주:16]). 그리고 이 세 번째 원인은 앞서의 의견의 대상을 이루었던 모상이 아니라, 영상(환영, phantasma)이라고 불린다(52c). 여기서 판타스마, 또는 판타스마타(phantasmata)는 일종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 플라톤이 소피스테스편에서 말했던 바, 바로 그것이다.[각주:17] 여기 매우 중요한 논점이 있는데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 , 플라톤은 이들 세 가지 요건들을 원인이라고 지칭하고 있는데, 이때 플라톤은 어떤 존재자의 존재나 생성의 원인을 사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원인 자체의 생성을 사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원인의 원인, 아르케의 아르케 또는 가장 심원한 생성의 지대, 사유불가능성의 그 지대에 사유를 맞세우고 있다.


여기서 일차적으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앞서 말한 판타스마가 질료적이지만,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서출적 추론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플라톤에 따르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