겪지 않은 자’, 새로운 연대를 꿈꾸다

- 도미야마 이치로,유착의 사상』(심정명 옮김, 글항아리)

 

 

 

 

노 의 현/수유너머N 회원

 

 

 

 

지난 125, 평택에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농성장에 찾아갔다. 이들은 2009년에 이뤄진 사측의 부당 해고에 반발하며 7년째 농성을 이어가고 있었다. 내가 갔을 당시는 이창근, 김정욱 두 명의 해고자가 44일째 쌍용자동차 공장의 굴뚝 위에 올라가 농성을 하고 있던 때였다. 공장 입구는 그 높은 굴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농성장과 멀었기 때문에, 우리는 지나가던 금속노조 조끼 입은 아저씨의 뒤를 쫓았다. 농성장에 도착하니 한진중공업의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도 보였다. 어젯밤 시청에서 범국민대회를 마치고 이곳에 와 밤새 농성장을 지켰다고 했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자들과 함께 불을 쬐고 은행을 까먹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그게 다였다. 내가 쌍용차 투쟁 현장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들의 옆에 있어주는 일뿐이었다. 나는 이들에게 무슨 힘이 되는가? 나는 이들의 투쟁에 대해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는 내가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도 되는 것일까? 이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평상시에는 책을 보고 간간히 하는 알바로 먹고 사는 의 시선으로,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수년간 춥고 더운 곳에서 꿋꿋이 투쟁하고 있는 이들에 대해 섣불리 글을 써내도 되는 것일까? 투쟁 현장에 가면 으레 그랬듯, 나는 이 간극에 다시 한번 당황하고 만다.

 

 

 

오키나와 문제에 갇힌 사람들

 

도미야마 이치로가 오키나와 문제라는 단어로 표현했던 것 또한 이러한 간극이었다. 이는 본토인의 입장에서 오키나와 식민지 문제를 사죄하고 보상해야 할 것으로, 오키나와인들을 구제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도미야마는 본토의 지식인들이 가진 이러한 태도를 외부의 수다스러운 해설이라고 표현하며, 이것이 오히려 오키나와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히로쓰 가즈오의 소설 <떠도는 류큐인>과 오키나와 청년동맹 사이에 벌어졌던 논의가 그 예이다. 이 소설은 일본 본토에 살고 있는 주인공이 오키나와에서 온 인물과 함께 살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고 있다. 문제는 여기에 등장하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묘사가 굉장히 부정적이라는 점이었다. 오키나와 청년동맹은 히로쓰의 소설이 본토 사람들로 하여금 오키나와인들을 모두 범죄자로 인식하게 할 우려가 있다며, 그의 작품을 폐기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히로쓰는 이러한 비판을 수긍하고 오키나와 청년동맹에 사과하며 자신의 작품을 철회한다. 하지만 도미야마는 오키나와인에 대한 히로쓰의 부정적인 묘사에서 오키나와의 문제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목격한다. 폭력적이고 신의와 도덕을 결여한 그들의 모습은 본토 사람인 히로쓰가 한때 본토인에 의해 오키나와에 가해졌던 폭력을 현재 자신의 일상 속에서 감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오키나와의 문제를 저 멀리 떨어진 작은 섬의 문제가 아닌, 자신의 일상 속에서 발견해내고 있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그가 오키나와 청년동맹에게 사과함으로써 이러한 가능성은 “‘오키나와 문제가 자신이 사는 세계를 쓰러뜨리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으로 고정되며, 이는 당신들을 구하고 싶다는 지식인의 양심과 포개어진다. 이로써 오키나와는 또 다시 오키나와 문제에 갇혀버리고 만다. 히로쓰는 오키나와 청년동맹과 화해하였고, “그리고 결렬했다

 

 

 

 

오키나와현과 일본 본토 사이의 '거리'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

 

오키나와에 대한 또 다른 묘사를 담은 글, 구시 후사코의 <망해가는 류큐 여인의 수기>를 둘러싼 논쟁은 이와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구시 또한 오키나와와 본토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다뤄내고 있는데, 이 글을 통해 비참한 오키나와인과 그에게 금전적 원조를 제공하는 본토라는 구도가 가시화된다. 즉 그녀는 오키나와 문제에 직접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설 또한 본토인에게 안 좋은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이유로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받게 된다. 하지만 구시는 이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긴 해명 글을 통해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반박한다.

 

도미야마는 이 해명 글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내용보다 말하고 있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이야기한다. 이 글을 쓴 구시는 오키나와 사회 안에서 학식 없는 사람’, ‘교양 없는 여자로 취급받아 왔다고 한다. 때문에 구시의 해명 글은 공적 세계에서 버젓한 한 사람의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는 사람들이, “민족 혹은 토착과 관련된 문제를 말할 때 발생하는 문제를 드러내 준다. 따라서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은 결국 당신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구시는 해명 글을 통해 외려 그 자격을 묻는다.

 

 

이를 통해 구시의 글은 히로쓰와는 달리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선다. 이처럼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그들의문제가 나의 세계를 쓰러뜨릴 수 없다는 확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이 폭력으로부터 내가 당신들을 구해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함을 인식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도 오키나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음을, 즉 그 자격을 증명하려면, 또 한 명의 당사자가 되는 것, 자신의 일상에서 폭력을 예감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다. 구시는 오키나와 현인 학생회의 비판을 폭력으로서 감지하며 소리 높여 저항했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도미야마가 말하는 유착을 발견하게 된다. 유착(流着)이란 유랑하는 토착이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타자의 장소에의 이동을, 공간을 재구성하는 시작으로서 확보하는 지각이다. 유착이라는 이름의 토착은 자신의 공간을 떠나 타인의 장소로 흘러들어감으로부터 시작되고, 그를 통해 자신의 공간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구시의 글은 본토로의 이동을 통해 구제법 속에 있는 오키나와라는 경계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공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유착이다.

 

 

나는 무엇을 예감하는가

 

하지만 오키나와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우리들은 이러한 폭력을 어떻게 예감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는 한 발표문에서 알제리의 식민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 프란츠 파농의 텍스트를 분석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파농은 각각의 상황에 입각해서 읽혀졌으며, 그런 의미에서 복수의 파농이 있는 것이다... 보편적인 위치에서 개별적인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경험을 움직일 수 없는 근거로 삼는 앎이 아닌, 개개의 구체적인 현상을 묻고 바꿀 수 있는 복수의 상황으로서 함께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다. 파농의 개개의 상황적 앎으로서 읽혀야 한다.

 

즉 알제리인도, 그를 점령했던 프랑스인도 아닌 우리들의 이름은 파농의 메시지의 수신자로 쓰여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의 가짜 독자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파농의 가짜 독자가 됨으로써, 각자의 상황에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복수의 파농을 만들어낸다. 도미야마 이치로의 글 또한 이렇게 읽혀야 한다. 우리는 도미야마의 텍스트에서 오키나와를 그저 오키나와의 문제로서가 아니라, 나의 구체적인 상황에 질문을 던질 수 있고 그를 바꿔낼 수 있는 앎으로서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도미야마의 가짜 독자가 됨으로써 복수의 도미야마를, 복수의 오키나와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히로쓰와 구시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들이 현실을 예감하고 변화시켰던 방식이다.

 

 

 

  

 

지난 2월 열린 수유너머N 국제워크샵에서 강연 중인 저자 도미야마 이치로.

 

 

 

앞선 질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내가 느꼈던 쌍용자동차 해고자들과의 간극은 어떻게 극복 될 수 있을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은 나는 왜 그것을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즉 당사자가 아님에도 왜 그것을 문제 삼는가이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도 그 폭력의 대상이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시작할 것이다. 알바 노동자라는 나의 일상 속에서 폭력을 감지하는 것, “사실 1~2월에는 손님이 많지 않아서 의현 씨가 별로 필요 없어요. 사실 잘라도 되는데... 일을 잘해서 3월 달에도 쓰려고 그동안 써준 거니까 2월 말에 그만두거나 하면 안돼요. 그럼 완전 배신이야.”라고 생색내며 이야기하던 사장의 태도에서 나 또한 폭력의 대상임을 감지하는 것.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미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 사건에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다. 연대의 가능성은 이로부터 생겨난다. 그리고 평택 공장에 버티고 있는 쌍용자동차 농성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알바생이라는 나의 상황과 공간 또한 새롭게 구성될 것이다. ‘유랑하는 토착은 이러한 운동을 일컫는다.

   

 

이어지는 질문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이 연대를 통해서 나는 과연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일까? 오히려 오키나와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유착이라는 하나의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은 연대의 견고한 출발점을 만든다. 그런데 이 운동은 에게서 출발해서 그들에게 가지만, 결국엔 다시 에게로 돌아오는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유착을 통해 나의 공간은 변화의 가능성을 획득하지만, 쌍용자동차 해고자들, 더 나아가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어떤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어떤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일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고, 나의 자리에서 나의 투쟁을 만들어가는 일뿐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각자의 문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물론 겪지 않은 자들의 연대는 구제의 대상과 구제자라는 이분법을 무너뜨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이 연대가 본토의 지식인들이 하고자 했던 것과 이어질 수 있을까? 본토의 지식인들이 결과적으로는 오키나와의 식민지 문제를 오키나와 문제라는 구제법에 갇혀버린 문제로 만들어버리긴 했지만, 사실 이러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오키나와의 식민지라는 역사는 문제화조차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내가 나로부터 연대의 가능성을 찾아냈다고 해서 과연 침묵하며 펜스 옆에서 살아가는 자들의 꾸중에 반박할 수 있을까.

 

 

 

 

구시가 자신에 소설에 대한 꾸중에 반발하며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설 수 있었던 이유 또한 그녀가 오키나와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오키나와 안에 있기에 누가 오키나와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목소리 물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당사자가 아닌 이가, 오키나와 밖에 있는 이가 오키나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오키나와 문제를 넘어서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 것일지 질문을 던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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