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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기본소득 : 대안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

기본소득 : 대안사회에 대한 새로운 상상

- 바티스트 밀롱도, 조건 없이 기본소득(권효정 옮김, 바다출판사, 2014)

 

 

 

 

정 우 준/ 수유너머N 회원

 

 

 

 

올해 725,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기초연금이 처음으로 지급되었다. 박근혜 후보의 공약이었던 기초연금은 기존의 기초노령연금과 다르게 65세 이상 노인에게 자산 조사 없이’, ‘급여 수준을 확대하는 제도이다. 보편성이 보다 확대된 것이다. 물론 지난달 말 지급된 기초연금은 계속되는 말 바꾸기로 원안과 다르게 자산 조사와 급여 수준의 축소가 이루어진 수정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복지 제도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하지만 송파 세 모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여전히 우리나라는 형편없는 복지제도를 가지고 있으며, 수많은 복지 사각지대가 존재한다. 2000년대 이후 복지제도 확충은 좌파와 우파에게 공통과제가 되었으나 끝나지 않은 보편, 선별 논쟁처럼 복지를 얼마나, 어떻게, 누구에게행할 것인가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눈앞에 놓여있다.

 

어떤복지인가의 갈림길 선 우리에게 바티스트 밀롱도’(1980~)조건 없이 기본소득은 새로운 길을 제시해준다. 그가 21세기형 복지 패러다임으로 제시하는 기본소득(basic income)’이 그것이다. 기본소득은 우리 사회가 어떤 길을 가야하는지의 물음 속에 사민주의, 조합주의, 자유주의로 대표되는 복지국가 유형과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안내한다.

 

 

 

<경제학자이자 정치철학자인 밀롱드는 현재 프랑스에서 가장 주목받는 좌파 지식인이다. 

'조건없이 기본소득''은 그의 책 중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책이다>  

 

 

 

1. 보편적 복지의 완성, 기본소득

 

제도의 포괄성을 기준으로 보편과 선별이 분류될 때 보편의 제일 끝, 즉 가장 보편적인 제도의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은 제도를 수급하기 위한 복잡한 원칙이 없다. 기본소득은 매우 간단하게 정의될 수 있다. “모두 주자! 그냥 주자!” 그리고 충분히 주자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선별적 복지제도 하에 있다. 선별적 제도에서 빈곤, 노령, 질병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노동, 자산, 노동력, 가족의 유무와 같은 것들을 심사당해야 한다. 왜냐하면 심사를 통과해야만 복지 혜택을 받을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다. 자격이 생겼다고 모든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열등처우의 원칙에 의해 복지 수혜자는 언제나 노동자의 임금보다 적은 금액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다보니 복지 수혜자는 살기에 충분하지 않은 금액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복지 제도는 수준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과 연계된 복지이자 불충분한 선별적 복지이다.

반면 기본소득은 기존 복지 제도의 특징적인 면인 노동과의 연계, 자산조사라는 선별적이고 조건적인 형태를 거부한다. 이는 더 많은 사람에게 효율적으로 복지를 제공할 수 있게 해준다. 왜냐하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주는 것이기에 사회복지 전담공무원의 확충과 같은 불필요한 행정 비용을 줄일 수 있고, 부정수급이나 사각지대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일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의 돈을 모두에게 조건 없이 지급하는 기본 소득은 여타의 복지 제도보다 효율적이고 포괄적이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람에게 조건 없이 준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유일한 보편적 복지제도이다>

 

 

 

2. 왜 기본소득인가 :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

 

보편적 복지제도로서 기본소득은 더 많은 사람에게 복지를 제공함으로서 보다 많은 삶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즉 복지 제도로서 보다 포괄적이고, 효율적인 것이다. 하지만 기본소득의 여정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기본소득은 단순히 복지 제도로서의 포괄성과 효율성의 측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밀롱드는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통해 기본소득이 자본주의의 주요한 문제인 노동의 문제와 소비의 문제를 새롭게 환기하는 개념임을 알려준다.

 

기본소득은 좌파적인 개념이다 (...) 기본소득을 우파와 좌파에서 모두 지지한다고 해도 별 의미는 없다. 형식은 같아도 계획 자체는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양측은 지향점이 전혀 다르므로, 같은 제도라고 생각할 수 없다. 속을 보편 완전 색이 다르다.”(조건 없이 기본소득29~30)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살아간다. 그렇지만 우리의 월요일은 즐겁지 않다. 왜냐하면 휴식을 멈추고 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사회는 우리에게 어쩔 수 없이 회사에 가서 일을 해서 돈을 벌라고 강요한다. 그렇기에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과 활동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기본소득을 통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의 돈을 받을 수 있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싶은 다양한 활동을 할 것이다. 고로 기본소득의 일하지 않고 살아도 될 만큼이란 조건은 단순히 복지 제도로서의 보장성이 확충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아 살아가느라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본소득은 노동력의 상품화라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자유로운 개인으로서의 삶을 상상하게 만들어 주는 제도인 것이다.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충분한 급여는 또 우리에게 또 다른 측면을 환기시켜준다. 그것은 바로 소비사회이다. 우리가 충분하다고 느끼는 소득과 욕망의 기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로 점철된 우리의 삶은 아무리 많은 돈을 줘도 충분하다 느끼지 못할 것이다. 결국 소비사회를 유지하고서는 기본소득은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제도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더 많은 소비를 위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임금 노동을 계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사회 속에서 기본소득은 소비를 위한 용돈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소비해야하고, 그동안 얼마나 많이 소비해왔는지를 검토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본소득은 덜 소비하고, 덜 생산하는 생태적 이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은 과잉 생산과 과잉 소비로 점철된 소비 사회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정의되어야 한다. 정리하자면 기본소득은 효율성과 포괄성으로 가장 보장성이 높은 복지 제도인 동시에, 자본주의를 지속시키는 두 가지 요소인 노동과 소비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제도이다.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를 비롯해 여러 나라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는 운동과 논의가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3. 기본소득은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지금까지 기본소득의 장점과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근본적으로 환기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이 같은 측면에서 기본소득은 필요하며, 정당하며,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기본소득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가? 전자도, 후자도 쉽사리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답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충분히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본소득의 해야 하는 바는 그 문답들에 충분히 답해야 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의 낮은 인지도와 낮은 수준의 복지 제도 속에서 기본소득 지지자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알리고 우선 낮은 수준의 복지 제도를 끌어올리는 것을 주요 전략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형태는 기본소득에 대한 근본적인 전략의 부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보편적 복지제도의 증가 -> 기본소득의 도입 -> 탈노동, 탈소비의 대안사회라는 이행 전략은 마치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 -> 프롤레타리아 계급 혁명 -> 공산주의 사회라는 전략과 와 동일한 형태를 보인다. 다시 말해 계급 혁명의 자리에 기본소득 도입만을 바꿔 넣은 것이다. 기본소득을 이행기 전략이라고 부르는 일부 기본소득 지지자의 말은 이를 더욱더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상황은 하나의 의문을 낳는다. 정말 기본소득이 도입된다면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자신의 소비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있을까? 단언컨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탈노동과 탈소비는 기본소득을 정의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밀롱드 역시 단순히 그것을 고려할 뿐, ‘탈노동과 탈소비의 사회가 기본소득을 통해 기계적으로 이행될 것이다라는 부정확한 가정에 머물러 있다. 그 역시 인과를 거꾸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소득으로 인해 탈노동, 탈소비가 가능한 것이 아니라 탈노동, 탈소비의 경향과 운동 속에서 기본소득이 하나의 제도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지금의 논의들은 기본소득이 탈노동과 탈소비를 가능하게 해주기에 정당하고 필요하다고 외칠 뿐, 기본소득의 전제이자 목적인 탈노동과 탈소비를 어떻게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기본소득은 탈노동과 탈소비라는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사회를 이행하게 만들어내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본소득의 도입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