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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 네 번째: 규칙의 입안자로서의 작가

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코너 소개-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 네 번째





꽁꽁이/수유너머N회원






  이 주에도 역시 수유너머N은 말(강연) 하나와 글 하나를 소개하려 합니다. 본 코너가 TED 동영상 소개코너처럼 보인다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TED가 짧고 흥미로운 동영상 강의를 많이 (그것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말-강연은 주로 TED의 강의들을 찾아볼 수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소개할 강의에서 마이클 한스마이어의 직업은 디자이너입니다. 하지만 그가 디자인하는 것들은 그 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입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담아내지도 못할만큼 복잡하고 정교한 작품을 만들고 있습니다. 작가도 통제할 수 없는 작품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현가능하다는 것이 이 강의의 흥미로운 점입니다. 그의 기둥 디자인을 보시면 알겠지만 프랙탈 구조를 입안하여 만들고 있어, 인간의 상상에서 나올 수 없는 디자인입니다.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버려 약간 기괴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이러한 디자인은 알고리듬이 만들어낸 결과입니다. 

  과거같았으면 이런 디자인은 그저 가상의 시뮬레이션 속에서나 존재했을 테지만, 단면을 아주 잘게 잘라내어 겹겹이 출력 후 쌓는 방식으로 구현가능해졌습니다. 이러한 작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프로그램밍으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디자인을 만들게 되었다.", "컴퓨터 상에만 존재하는 복잡한 디자인을 실사로 출력할 수 있는 기술이 마련되었다." 이런 정도의 결론이 나올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작가는 창조하지 않고 규칙을 입안하는 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두 번째는 소개할 글은 최동호가 쓴 『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서정시학, 2012)입니다. 저는 위에서 소개한 강의와 동일한 맥락에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즉 예술과 규칙의 문제입니다. 

  저자의 의하면 極서정시는 황동규의 劇서정시와도 다르고, 단형의 하이쿠와도 다르며, 직관에 의해 선적 깨달음을 다룬 선시들과도 다릅니다. ‘극서정시’에서는 ‘압축적인 극적구조’, ‘단형의 양식’, ‘직관적 수법’ 등이 그 특징으로 제시됩니다. 제가 ‘극서정시’의 개념에서 주목한 것은 이 점 때문입니다. ‘제약’과 ‘규칙’의 재도입문제. 하지만 최동호 자신도 밝히고 있듯이 그가 단지 고전적 취향을 반영하거나 옹호하기 위해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이러한 처방을 내린 것은 ‘무제약’과 ‘무규칙’의 폐해가 크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제게 떠오른 것은 체스터턴의 저서 『정통』이었습니다. 체스터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느끼기 시작하는 평범한 심미적 무정부주의자가 결국에는 느끼는 것 자체를 막는 역설적 상황에 빠지게 된다. 그는 가정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시를 좇는다. 그러나 가정의 테두리를 느끼는 것이 중단되면서 더 이상 ‘오디세이’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중략) 이런 문학가는 한 마디로 모든 문학의 바깥에 있다. 그는 고집불통이기보다는 죄수에 더 가깝다.” (G. K. 체스터턴, 홍병룡 역, 『정통』, 상상북스, 2010, 196쪽.)

  그가 보기에 법과 조건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의 필수조건입니다. 그것은 경계를 만들어내지만 그 경계 안에서 무한한 쾌락을 맛보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경계를 벗어난 자는 구속력이 없는 자유를 만끽하는 듯싶지만 준거 없이 표류한다는 점에서 노예에 가깝습니다. 이는 방종을 경계하자는 식의 논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체스터턴은 정통이 가장 이단적이라는 역설을 발견합니다. 때문에 ‘가장 이단적이기 위해서는 정통을 따르라’라는 명제가 도출됩니다. 

  ‘극서정시’는 형식적으로는 “수사의 양적과잉”에 맞서는 극도의 제약성을, 내용적으로는 파편적 인식에 맞서는 총체성의 기획 즉 “정신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는 최동호 개인의 창작론으로 아직은 실행되지 않은 기획입니다. 하지만 앞으로 예술가가 방종한 창작보다 규칙의 입안자가 되길 원한다는 점에서 흥미롭고, 앞서 언급한 마이클 한스마이어의 경우처럼 의외의 방식으로 그 말이 맞아떨어져 놀랍습니다. 

  단 최동호의 경우,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제할 수 있게 해주는 규칙을 말하고, 마이클 한스마이어는 통제가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규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 쉽게 결론 내리지 말고 계속 고민해보도록 합시다.


 (최동호,『디지털 코드와 극서정시』, 서정시학,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