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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5강 첫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 仲正昌樹, 『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 作品社, 2013.

 

 

 

 

5강. 정치적인 것의 개념 (1) ― ‘친구 Freund / 적 Feind’, 그리고 타자

 


※ 이번 장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번역본은 홍철기의 번역본을 저본으로 삼았습니다. 


정치적 행동이나 동기의 기인이라고 생각되는, 특수 정치적인 구별이란 친구와 적이라는 구별이다. 이 구별은 표식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을 제공하는 것이며, 적나라하지 않은 정의 혹은 내용을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개념 규정이 아니다. 


[홍 : 특정하게 정치적인 구분이란 정치적 행동과 동기들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은 친구와 적의 구분이다. 그 구분은 총괄적[모든 내용을 남김없이 포함하는] 정의나 내용에 대한 서술로서가 아닌 기준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념규정을 제공한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



‘제3제국의 계관법학자 Kronjurist des Dritten Reiches’ / ‘올바른 적 hostis justus’과 ‘유럽 공법 Jus publicum europaeum’ / ‘정치적 politisch’이란 무엇인가? / ‘국가 Staat’와 ‘사회 Gesellschaft’ / ‘판단기준 Kriterien’ / ‘친구/적’의 구별의 본질 / ‘적’ ― ‘공적 öffentlich’ 전투상태에 있는 상대 / ‘국가정치적 staatspolitisch’ / ‘정치적 결정 die politische Entscheidung’ / ‘인류의 최종궁극전쟁 der endgültig letzte Krieg der Menschheit’ / ‘결단’ ― ‘주권’과 ‘정치적인 것’ / 질의응답



‘제3제국의 계관법학자 Kronjurist des Dritte Reiches’



이번 회와 다음 회에 읽는 것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입니다. 미라이샤에서 나온 번역의 ‘범례’에 따르면, Duncker & Humblot 사에서 1932년에 출판된 거의 완역으로, 63년에 같은 출판사로부터 재간행된 것도 참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Duncker & Humblot 사는 전전부터 칼 슈미트의 주요 저작을 계속 내고 있는 출판사로, 현재에도 있습니다. 지금 제 수중에 있는 것은 2009년에 나온 제8판입니다. 

1963년도 판에는 슈미트 자신에 의한 새로운 서문이 붙어 있습니다. 바탕이 된 제2판이 간행된 1932년으로부터 이미 31년이 지났다는 것을 감안해서, 이 책을 쓴 당시의 문제의식과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냉전 상황 속에서 어떤 새로운 이론적 과제가 생겨났는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초판은 1927년에하이델베르크 사회과학·사회정책 논총이라는 학술잡지에 게재되고 그것이 5년 후에 단행본으로서 간행된 것이 제2판입니다. 즉, 책으로서는 초판입니다. 이듬해에 제2판 혹은 제3판에 해당되는 것이 간행됩니다만, 이미 나치가 정권을 잡고 있었기에, 전쟁과 유대인 문제에 관련하여 «정치적» 배려가 꽤 장식된 텍스트가 되고 있습니다. 이 수정에 대해서는 하이데거의 제자로 동북제국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도 있는 유대계 독일인 철학자 칼 뢰비트(1897-1973)가 「칼 뢰비트의 기회원인론적 결정주의」(1935, 60)라는 논문에서 상세하게 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난번에 읽은, 미라이샤에서 나온 정치신학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63년의 재간행에 있어서는 변경 전의 32년판이 사용됐습니다. 슈미트는 33년 판에 관해서는 그런 것이 없었던 것인 양 침묵하고 있습니다만, 슈미트 연구에서는 자주 그런 그의 태도가 문제가 됩니다. 

1932년은 33년의 나치의 정권장악 1년 전으로, 바이마르 공화제의 말기입니다. 정치신학이 간행된 것은 바이마르 초기였습니다만, 이로부터 10년이 지났습니다. 세계공황의 독일 경제에 대한 영향, 정당 간의 대립의 격화에 의한 내각의 불안정화, 연방과 주(州)의 관계의 긴장 등에 의해, 공화국이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가 강해졌습니다. 그런 시기에 쓰인 텍스트입니다. 

이 저작에서 유명한 것은 ‘친구 Freund / 적 Feind’의 구별입니다. 칼 슈미트가 현대사상에서 인용되는 것이 정치신학의 주요 테마였던 ‘결단주의’, 정확하게 말하면 예외상황에 있어서의 주권자의 결단의 문제와 ‘친구/적’ 이론입니다. 나치와, ‘친구/적’이라는 말이 결부되면, 아무래도 아리아인과 유대인의 대립도식을 부추기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거기에 ‘결단’이라는 말이 가미되면, 절멸계획의 결정을 시사하고 있는 듯한 느낌조차 들게 되죠. 

확실히 슈미트는 나치 시대에 반대유주의적 발언을 했기에, ‘친구/적’ 이론에 반유대주의적인 배경이 있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 슈미트와 반유대주의의 관계에 관해서는 사노 마코토 씨(佐野誠, 1954-)의 근대계몽비판과 나치즘의 병리(近代啓蒙批判とナチズムの病理』(創文社)에서 자세하게 논의되고 있습니다. ― 하지만 1강부터 봤듯이, 슈미트는 단순하게 자신의 보수적인 사상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세계관을 해명하는 것을 목표로 논의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만일 반유대주의적인 사고방식이 그에게 강해졌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적당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합니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끝까지 읽으면 매우 추상적인 얘기이기에, 별로 프로파간다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슈미트는 나치의 ‘제3제국의 계관법학자 Kronjurist des Dritten Reiches’라고 불리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슈미트가 나치의 대표적 법학자로서 중요된 것은 1936년 정도까지입니다. 36년 말에 친위대(SS)의 기관지에서 그의 사상의 비나치성이 비판되고 처지가 나빠졌기에, 나치 법수호자 동맹(Nationalsozialistischer Rechtswahrerbund)의 대학교관 전문 그룹의 회장 지위에서 물러났습니다. 베를린 대학의 교수에는 머물러 있었습니다만, 나치의 중추에 사상적 영향을 줄 수 있는 처지에는 있지 않았습니다. 36년은 아직 정권의 초기입니다. 

35년 9월에는 뉘른베르크 법으로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당하고 유대인과의 결혼도 금지되었습니다만, 절멸계획이 결정된 것은 제2차 대전이 시작된 것으로부터 오래 지난, 1942년 1월입니다. 베를린 근교의 반제라는 호수의 호반에서, 나치의 유대인 문제 담당 간부가 모이고, 유대인 문제를 ‘섬멸한다’는 형태로 해결한다는 방침이 결정됐습니다. 그것을 ‘최종 해결 Endlösung’이라고 합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1925, 26) 등에서 유대인은 아리아인의 진화를 방해하는 적이라고 언명하고 있습니다만, 어떻게 유대인과의 싸움에 결말을 낼지를 구체적으로는 정하지 않았습니다. 1938년부터 40년까지는, 유럽의 유대인을 마다가스카르로 이송한다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검토됐습니다. 나치 독일의 현실적인 국가전략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동유럽에 독일인을 진출시키기 위해 유대인을 어딘가로 이동시키는 것 및 값싼 노동력으로서 이용하는 것이며, 절멸시키는 것 자체에는 그다지 큰 장점이 없습니다. 절멸을 전면에 내세우면, 저항이 심해질 우려도 있기에, 더 성가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대량학살을 함으로써 유대인 문제를 해결한다는 방향성이 나온 것은 동유럽에서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점차 점령지의 유대인을 관리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말살함으로써 처리한다는 방침이 부상했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필연이었는가에 관해서는 연구자 사이에서 논란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의 대외적 팽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38년 3월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입니다. 그 후 39년 3월의 체코슬로바키아를 사실상 병합하고 38년 3월의 폴란드 침공에 뒤이어 제2차 대전이 발발하고 점점 전선이 확대됩니다. 

얘기를 슈미트로 되돌리죠. 이 무렵의 슈미트는 정치를 멀리하고, 법학연구에 전념하게 됐습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의 재해석이나, 국제법에 관한 저작차별화하는 전쟁 개념으로의 전환(1938) 등에 씨름했습니다. 

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의 후반에도 국제관계 얘기가 나옵니다만, 슈미트는 30년대에 들어서부터 국제법・국제정치로 작업의 중점을 옮깁니다. 쾰른대학에서 국제법을 담당했던 켈젠과의 대항관계를 의식했던 것이며, 독일을 괴롭혀 온 베르사유 체제나 영미 중심의 국제연맹에 대한 반발도 있었죠. 그래서 국정(國政) 정치나 헌법에 관해 논하면, 나치의 이데올로기와의 차이가 더욱 더 부각될 우려가 있는 반면, 반-베르사유라는 관점에서 국제정치를 논하면, 그렇게 큰 불평(claim)이 따르지 않는다는 판단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제2차 대전 후에는 뉘른베르크 국제법정에서 고발된 경제인의 의뢰를 받고 쓴 감정서에서 전쟁범죄에 관해 논합니다. 1950년에는 그동안의 국제법 연구의 집대성이라고도 말해야 할 대지의 노모스, 63년에는 파르티잔의 이론을 발표합니다.대지의 노모스에서는 그때까지 유럽 국가들 사이의 전쟁을 대등한 ‘적’들 사이의 관계로서 일정한 법적 틀 안에 머물러 있는 “유럽 공법 질서”가 무너진 후, 베르사유 체제 아래서 ‘인류’라든가 ‘보편성’의 이름으로, 인류의 적에 대한 제재를 가하는, 새로운 전쟁형태가 등장했다는 것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파르티잔의 이론에서는 ‘파르티잔’의 등장에 의해 기존에는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만으로 생각되었던 ‘친구/적’ 관계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됐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올바른 적 hostis justus’과 ‘유럽 공법 Jus publicum europaeum’


이런 정치적인 것의 개념 이후의 저작을 보면, ‘친구/적’ 개념이 분명해졌던 것이 전쟁이 틀지어지고 무한하게 확대되는(escalate) 것이 방해받는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 구조가 ‘유럽 공법 Jus publicum europaeum’입니다. 그것은 대항해 시대 이후, 식민지 쟁탈 전쟁을 전개하게 된 유럽 국가들이 상호간의 관계를 제어하기 위해 만들어낸 질서입니다.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는, 이상한 말투입니다만, 서로를 ‘올바른 적 hostis justus’,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규적인 전쟁을 할 자격을 가진 ‘적’으로서 인지한 다음, 규칙을 준수하면서 싸우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반증으로서, 식민지화의 대상이 된 지역은 대등한 상대가 아니라 이들 땅에서는 유럽 국가들도 제약 없는 전쟁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그런 ‘유럽 공법’으로부터, ‘국제법 Völkerrecht’이 발전한 것입니다. 우리는 왠지 그로티우스(1583-1645) 등에 의해 보편적 이념으로서의 국제법이 고안되고, 그것이 20세기가 되어 국제연맹이 생겨난 것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이미지를 막연하게 갖기 쉽습니다만, 슈미트에 따르면 정반대로, 유럽의 대지에 한정된 국가 간 관계의 질서가 있으며, 거기에 전쟁에 관한 법이 갖춰진 것이지만, 19세기부터 미국의 대두에 의해 유럽 공법 질서의 토대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제1차 대전 후에는 전승국을 중심으로 명확한 공간 질서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보편성»을 표방하는 «국제질서»가 수립되며,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 등에 의해 전쟁 금지를 원칙으로 하여 의사적인 평화조약을 만들어내고, 그 «평화»를 깨뜨리는 것을 범죄자 취급하고, 형법적인 의미에서 제재를 가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체제가 만들어졌다. 그 체제가 유럽의 대지의 질서를 무너뜨려버린 것입니다. 

논문 제목이 된 “차별화하는 전쟁 개념”이란 상대를 대등한, ‘올바른 적’으로 인정하는 게 아니라, 무법자로서 처벌하는 «올바른 전쟁»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정의의 친구»로, 상대를 무법자로서 처벌한다는 자세를 취한다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그것은 중세 말기의 십자군 얘기로, 16세기 이후의 유럽에서는 서로를 적으로서 상호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유럽 국가들은 자신들의 ‘대지’에 적합한 ‘법=노모스 Nomos’를 채용함으로써 그 나름대로 잘 해 왔습니다만, 세계 전체를 ― 어느 나라나 지역에 있어서 적합한[유리한] ― «보편적 정의»에 의해 통제하고, 평화를 어지럽히는 악을 정의의 이름으로 쓰러뜨리려고 한다면, 전쟁은 점점 확대된다(escalate). 슈미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범죄자라고 선고받은 쪽이 극단적으로 약하면 금방 [문제가] 수습될지도 모릅니다만, 나름대로 무력이 있고 저항하는 힘을 갖고 있는 나라라면,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습니다. 악마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에, 굴복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철저하게 항전하고 상대방이야말로 악마라고 선언한다. 그래서 전쟁이 고조된다(escalate). 동서 냉전이란 전면 전쟁에는 이르지 않았으나, 서로 선악대립 도식을 그렸던 것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습니다. 슈미트의 이치라면, ‘친구/적’ 구조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무한한 응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의 재미있는 대목입니다. 


그로티우스 국제법          ⇒ 국제연맹          ⇒ 국제연합

‘국제법 Völkerrecht’

슈미트


‘유럽 공법 Jus publicum europaeum’

서로를 ‘올바른 적 hostis justus’, 자신과 마찬가지로 정규적인 전쟁을 할 자격을 가진 ‘적’으로 인지한 뒤, 규칙을 준수하면서 싸우는 구조




유럽의 대지에 한정한 국가간 관계의 질서

제1차 대전 후는 전승국을 중심으로 명확한 공간 질서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보편성»을 표방하는 «국제질서»

(전쟁과 관련된 법)


미국의 대두

켈로그-브리앙 조약(1928) 등에 의해 전쟁 금지를 원칙으로 한, 의사적인 평화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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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대전









슈미트가 1990년대 이후 재평가되게 된 계기 중 하나로 걸프전쟁 등에서 보이는, 미국의 보편주의적 치장 아래서의 일극 지배에 대한 반발이 높아졌다는 것이 있습니다. 보편적 정의의 이름 아래서, 세계질서를 어지럽히는 «무법자»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正戰]을 벌이게 되면, 지역분쟁이 쓸데없이 많아지고, 미국과 현지 무장세력 사이의 끝없는 투쟁으로 발전된다는 것이 말해지게 됐습니다. 그런 미국 보편주의를 비판하는 좌파 사이에서 친구/적 이론의 관점에서 보편적 정의의 문제에 일찌감치 주목한 슈미트가 재평가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정치적 낭만주의와 정치신학에서 슈미트는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만, 대지의 노모스에서 슈미트는 유럽 국가들 사이의 법적 관계를 떠받치는 ‘라움 질서 Raumordnung’에 대해 논하고 있습니다. <Raum>은 ‘공간’이라는 의미이기에, ‘공간질서’로 번역해도 됩니다만, 물리적 공간일 뿐 아니라 지리적, 민속적, 법적, 정치적, 혹은 존재론적 의미도 담고 있기에, 슈미트 연구의 전문가는 ‘라움’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리하면, 30년대 후반 이후의 슈미트는 ‘친구/적’ 도식을 연장하는 형태로, 전쟁을 틀짓는 공간적 질서에 관해 탐구하게 된 것이죠. 물론 근대 유럽에 전쟁을 틀짓는 구조는 정말로 실재했는가, 유럽사의 몇몇 큰 전쟁에 입각해 구체적으로 생각하면, 수상쩍은 기분도 듭니다. 30년 전쟁처럼, 상당히 확산되어 많은 사망자를 낸 전쟁도 있으며, 폴란드처럼 대국(大國)으로 분할되어 소멸한 나라도 있습니다. 다만 유럽대륙에서의 전쟁의 규칙이 만들어지는 구조에 관해 법제사, 법사상사, 군사사, 경제사의 문헌을 구사해 논하기에, 읽어볼만 합니다. 

‘친구/적’의 대립도식은 슈미트 비판의 논의에서 반드시 강조됩니다. ‘친구/적’의 대립을 부추기고 있다고 함으로써 말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슈미트 옹호를 위해 ‘친구/적’ 논의가 인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해하여 하나의 입헌체제를 공유하는 것이 어려운 ‘친구/적’ 대립이라는 현실이 ‘정치’의 근본에 있다는 것을 인식한 위에서, 그것이 섬멸전으로까지 이르게 하지 않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생각하는 것이 법의 역할이며, 그것을 지적한 것이 슈미트의 공적이라는 것입니다. 전지구화된 세계에서 다양한 정체성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는 상황에 있어서 자유주의 좌파처럼, 얘기하면 알 수 있다는 명분을 취하는 게 아니라, 슈미트적인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포스트모던 좌파계의 민주주의론에서는 주장됩니다. 


‘정치적 poitisch’이란? 

그러면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읽어봅시다. 


국가라는 개념은 정치적인 것이라는 개념을 전제로 삼고 있다. 국가는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어느 한 지역 내에 조직된 국민의 정치적 상태이다. 단 이것은 [국가라는 말을] 당장은 [다른 단어로] 치환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며, 국가에 관한 개념 규정이 아니지만, 여기서 이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을 문제라고 할 경우에는 그런 개념 규정은 필요치 않다. 국가란 본질적으로는 무엇인가, 기계인가, 유기체인가, 인격인가 제도인가, 이익사회인가 공동사회인가, 경영체인가 벌집[속의 꿀벌집단]인가, 혹은 오히려 ‘절차의 기본적 계열’인가는 그대로 둬도 상관없다. 


[홍 : 국가의 개념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전제한다. 국가란 오늘날의 용어법에 따르면 영토적 배타성 안에서 조직된 인민의 정치적 상태다. 이는[이로써] 단지 하나의 다른 표현에 불과하며, 국가의 어떤 개념규정도 주어진 것이 아니다. 여기서처럼 정치적인 것의 본성이 관련될 때는 그와 같은 [국가의] 개념규정은 필요치 않다. 우리는 그 본성에 있어서 국가가 무엇인가 하는 것, 즉 국가가 기계인지 아니면 유기체인지, 인격체인지 아니면 조직인지, 사회인지 아니면 공동체인지, 혹은 기업인지 아니면 벌집인지, 혹은 아마도 순전히 “절차의 기본형(Verfahrensgrundreihe)”인지를 결정하지 않은 채로 남겨둬야 할 것이다.]


문장으로서는 비교적 알기 쉽습니다만,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감이 오기 어려운 서두네요. ‘국가’라는 개념은 보통 ‘정치적 politisch’이라는 형용사에 의해 설명됩니다만, 그것은 단순히 다른 말로 치환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국가’의 ‘개념 규정’이 되지는 않는다는 게 포인트입니다. 


다만 여기서는 그 ‘정치적’이라는 형용사가 가리키고 있는 것의 ‘본질’이 주제이기 때문에, ‘국가’를 개념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도 말하네요. 그러면 왜 그럴 필요가 없다고 얘기하는 걸까요? 서두에서부터 일부러 «필요 없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 석연치 않네요. 그 뒤에 적혀 있듯이, ‘국가’가 ‘기계 Maschine’나 ‘유기체 organismus’나 ‘인격 person’이나 ‘제도 Einrichtung’나 ‘이익사회 Gesellschaft’나 ‘공동사회 Gemeinschaft’라든가 등의 흔한 문제설정에 입각해 어떤 정의를 부여하고 설명하면, ‘정치적’이라는 형용사와의 관계가 알기 어렵게 되므로 그런 의미에서의 개념 규정하지 말자, ‘정치적’과의 관계로 좁혀서 얘기를 진행하자는 것입니다. ‘국가’와 ‘정치적’의 본질적 관계라는 슈미트적인 설정에 입각해서 이야기를 해나가려 하는 것입니다.


독일어로 ‘국가’는 <Staat>입니다만, 이것은 영어의 <state>와 마찬가지로 라틴어 <status>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이것의 원뜻은 ‘상태’입니다. 영어 <state>에는 ‘상태’라는 의미도 있네요. ― 독일어 <Staat>에는 그런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한 지역 내에 조직된 국민의 정치적 상태”는 원어로는 <der politische Status eines in territorialer Geschlossenheit organisiertes Volkes>입니다. 즉, <Staat>의 통상적인 정의 속에 그 원래의 의미인 <Status>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정의에는 ‘영역’과 ‘인민 Volk’이라는 두 요소가 덧붙여져 있네요. — 지금까지 몇 번 화제로 삼았습니다만, <Volk>에는 ‘민족’, ‘민중’, ‘인민’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만, 이 경우는 “주권・인민・영토”의 ‘인민’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죠. ‘영역’과 ‘인민’의 특별한 ‘상태’가 ‘국가’라고 하는 거죠. 그럼 어떻게 특별한 상태인가? “정치적으로 조직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이 ‘정치적으로 politisch’가  무슨 말인지 분명하게 하지 못한다면‘국가’의 본질을 모릅니다. 


국가란 그 어의 및 역사적 발생에서부터 보면, 국민의 특별한 상태이며, 더욱이 결정적인 경우에 결정력을 지닌 상태이며, 따라서 대부분이 생각할 수 있는 개인적 및 집합적 상태에 비해서 절대적인 상태이다. 


[홍 : 국가는 그 어의 상으로, 그리고 역사적 현상형태 상으로는 인민이 특정한 성질을 갖는 상태이고, 실로 결정적인 경우에 척도가 되는(maßgebend) 상태이며, 따라서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상태들에 대하여 상태 자체다.]



“결정적인 경우에 결정력을 지닌다”의 원어는 <der im entscheidenden Fall maβgebenden Zustand>입니다. 번역문을 보면 ‘결정 Entscheidung’이라는 말이 여기서 두 번 반복되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Entscheidung>의 형용사형이 한 번 사용되고 있을 뿐 반복되지 않습니다. 다만 반복되고 있지 않더라도, 정치신학󰡕에서 ‘결정’을 둘러싼 논의를 염두에 두면, 이 말이 향후 논의의 방향성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maβgebenden>은 직역하면 ‘척도를 주다’입니다. 󰡔정치신학󰡔에서는 ‘규범 Norm’이 효력을 잃고 ‘예외상태’(=‘통상 normal’이 아닌 상태)에서 ‘결정’하고 ‘규범’을 만들어내는 것의 의미를 논하는 것이기 때문에, ‘척도를 주주’라는 말은 ‘결정’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것입니다. 국가는 “결정적인 상태”인 셈이기 때문에, 개인이나 집단의 다른 ‘상태’가 상대적인 의미밖에 가지지 않는 반면, [국가는]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상기의 모든 표상의 표식 ― 상태든 국민이든 ― 은 심지어 정치적인 것이라는 표식을 가해서 의미를 갖는 것이며,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오해된다고 이해할 수는 없다. 



[홍 :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이 표상—상태와 인민—의 모든 징표들은 정치적인 것의 다음의 징표들에 의해 그 의미가 부여되며, 정치적인 것의 본성을 오해하면 이 표상의 모든 징표들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방금 제가 설명한 것입니다. ‘정치적 politisch’이라는 형용사에 의해 ‘인민’의 ‘절대적인 상태’로서의 ‘국가’가 어떤 상태인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이 텍스트의 제목이 정치라는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묘한 제목이 되는 것은 국가의 정의에 사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이 <politisch>라는 형용사의 의미론적 탐구가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인 것에 대한 명확한 정의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대개 이 말은 그저 소극적으로, 다양한 다른 개념과 대치시켜 ― 예를 들어 정치와 경제, 정치와 도덕, 정치와 법률, 심지어 법 중에서도 정치와 사법 등처럼 ― 이용된다. 이런 소극적이고 대부분은 다시 논쟁적인 대치에 의해서도, 문맥 내지 구체적 상황에 따라 충분히 명확한 것을 특색짓고 있지만, 그래도 아직 특수성의 규정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이란 어떤 의미에서 ‘국가적’과 동일시되며, 혹은 적어도 국가에 관련지어진다. 그 경우 국가는 정치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정치적인 것은 국가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은 분명히 불만족스러운 순환 논법이다.



[홍 : 사람들은 정치적인 것의 명확한 정의를 거의 내리지 못한다. 주로 그 말은 다양한 다른 개념들의 반대말로서, 정치와 경제, 정치와 도덕, 정치와 법과 같은 대립에서, 그리고 법학 내부에서는 다시 정치와 민법 등의 대립에서처럼 단지 부정적으로만 사용된다. 그러한 부정적이고 종종 또한 논쟁적인 대립을 통해, 맥락과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언제나 충분히 명백한 어떤 것을 설명할 수도 있게 되지만, 그것은 여전히 특정한 규정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이라는 말은 어떤 방식으로든 “국가적”이라는 말과 동일시되거나 최소한 국가와 관련된다. 국가는 따라서 정치적인 어떤 것으로, 정치적인 것은 국가적인 어떤 것으로 나타난다—이는 분명히 만족스럽지 않은 순환으로서 [나타난다].]


요컨대 사전 등을 보면, ‘정치적’이 ‘국가적 staatlich’에 의해 정의되고, ‘국가적’이 ‘정치적’에 의해 정의된다는 순환적 관계가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이네요. 일본어사전에는 흔한 일이지만, 의미 분석으로서는 좋지 않습니다. 왜 순환하고 있는지, 정말 호환적인지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와 ‘사법(私法)’의 대비가 다소 감이 오지 않을 수 있지만, 헌법과 행정법 등의 ‘공법’이라면 정치와의 관계가 강한 반면, 사적 개인 사이[私人間]의 관계를 통제하는, 민법이나 상법 등의 ‘사법(私法)’은 일단 법률로서 제정되면, 가급적 정치정세의 영향을 받지 않고, 법관이 객관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중요해집니다. 


법률 전문서에는 정치적이라는 이러한 [다른 단어에 의한] 치환이 많이 보입니다만, 이런 치환[바꿔적기]은 논쟁적・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 아닌 한, 개별 사례의 법률적 내지 행정적 처리라는 실무적・기술적 관점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 때 이것들은 기존의 국가를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운용됨으로써 유의미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결사법에 있어서의 ‘정치결사’ 혹은 ‘정치집회’라는 개념에 대한 판례・학설이 그 예이며, 심지어 프랑스 행정법의 실무가 정치적 동기(‘mobile politique’)라는 개념을 수립하려 하며, 그것에 의해 ‘정치적’인 통치행위(‘actes de gouvernement’)를 ‘비정치적’인 행정 행위로부터 구별하고, 행정 재판 상의 제약으로부터 제외하고 있다는 것도 그 예이다.


[홍 : 전문적인 법학 문헌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인 것에 관한 많은 다른 표현들이 있지만, 그 표현들은 논쟁적-정치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한에서, 개별사안에 대한 법적이거나 행정적 결정의 단지 실용적-기술적 관심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래서 그 표현들은 전혀 문제없이 현존하는 국가를 전제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운동함으로써 그 의미를 부여 받는다. 따라서 예를 들어 결사법에서는 “정치적 결사”나 “정치집회”의 개념에 관한 학설과 판례가 존재한다. 그 밖에도 프랑스 행정법 실무는 정치적 동기(mobile politique)의 개념을 정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그 덕분에 정부의 “정치적” 행위(즉 통치행위 ‘actes de gouvernement’)는 “비정치적” 행정행위와 구분되고 행정재판의 통제로부터 면제된다.]



이 부분도 뭐가 포인트인지 조금 감이 오지 않네요. “개별 사례의 법률적 내지 행정적 처리라는 실무적・기술적 관점”에서 ‘정치적’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즉, 개별 문제에 법률을 적용하거나 행정적인 처리할 때, ‘정치적/비정치적’의 이분법이 취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이 기존의 ‘국가’의 기본적 존재방식, 방향성과 관련된 것을 가리키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는 ‘비정치적’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정치결사’나 ‘정치집회’는 국가의 존재방식에 관한 특정한 의견이나 주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그것을 법적으로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은 ‘국가’의 기본적인 존재방식과 관련된 문제입니다. 국가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이기에, 특별하게 보호하거나 혹은 거꾸로 특별하게 엄중하게 단속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최근 일본에서는 그다지 들리지 않게 됐습니다만, 반체제를 위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을 ‘정치범’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70년대에 좌파 활동이 왕성했던 시기에는 혁명을 위해 폭파사건이나 농성사건 등을 일으키고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을 저널리즘에서는 ‘정치범’이라고 불렀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아직 어렸던 저는 그런 말투에 어딘가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좌파 사람은 정의를 위해 한 것이겠지만, 일본의 법률은 행위를 벌하는 것이고 사상을 벌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그런 명분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 어려운 말로 엄밀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닙니다만. 


8頁의 주석에 일상적 업무와 정치적 업무의 구별에 관해 언급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도 국가의 기본적 존재방식과 관련된 사항과 그렇게까지 중대하지 않기에 법 아래에서의 통상 업무로서 처리할 수 있는 사항을 구별하고 있는 거네요. 이처럼 슈미트는 법학적 텍스트에서의 ‘정치적’이라는 말의 사용방식을 검토하는 것을 통해, ‘정치적’의 의미를 서서히 밝히려고 하는 셈입니다. 일단 ‘국가’의 본질에 관련된 법해석이나 적용이 ‘정치적’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 같다는 것은 알게 된 것입니다만, 그런 텍스트들은 편의적으로 구별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로부터 곧바로 ‘정치적’의 의미가 분명해지지는 않습니다. 


법 실무의 필요에 대응하려 하는 이런 규정은, 요컨대 국가 내부에서의, 그 법 실무에서 생기는 사실들을 구분하기 위한 실무적인 방편을 요구하고 있는 데 지나지 않으며, 정치적인 것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 등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 및 국가의 기구들이 자명하고 확고한 것으로서 전제될 수 있는 한, 이런 규정들은 국가 혹은 국가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또한 ‘국가’에 관련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것도 포함하는 정치적인 것의 일반적인 개념 규정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국가가 현실에서, 명확한 일의적으로 규정된 존재이며, 비국가적인, 바로 그 때문에 ‘비정치적인’ 집단들, 업무들과 대립하고 있는 한, 국가가 정치적인 것을 전유하고 있는 한, 학문적으로 정당하기도 하다. 


[홍 : 법의 실무적 필요에 상응하는 그와 같은 규정들은 사실은 단지 하나의 실용적인 구실, 그것도 하나의 국가 내부에서 그 국가의 법실무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구성요건들의 구획을 위한 구실을 찾는다. 그러한 규정들의 목표는 결코 정치적인 것에 대한 어떤 일반적인 정의를 내리는데 있지 않다. 그 규정들은 국가와 국가제도가 자명하고 고정된 어떤 것으로 전제될 수 있는 한에서 국가나 국가적인 것을 참조하여[기준으로] 도출된다. 정치적인 것의 일반적인 개념규정들도 오직 “국가”에 대한 상위의 준거, 혹은 이중의 준거(Weiter- oder Rückverweisung) 이외에는 아무 것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국가가 진정으로 하나의 명확하고 확실하게 규정된 세력으로서 비국가적이고, 바로 그래서 “비정치적” 집단과 사안들에 맞서는 한에서, 그리고 또한 국가가 정치적인 것의 독점권을 보유하는 한에서 이 개념규정들은 이해할 수 있고 그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정당하다.]


처음 글은 쉽습니다만, 두 번째 이하의 글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기 어렵네요. 우선 “국가 및 국가의 기구들이 자명하며 확고한 것으로서 전제되고 있는 한, 이런 규정들은 국가 혹은 국가적인 것과 관련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문장입니다만, 이것은 어떻게 하면 사물을 잘 정의할 수 있느냐라는 얘기입니다. ‘정의’란 보통 의미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것을 의미가 이미 확실한 것, 안정된 것으로 어떤 형태로 결부시킴으로써 알기 쉽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A보다 B가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A는 ○○한 B이다”라고 정의하면 되는 것은, 잘 생각해 보면, B가 사실 무엇인지 잘 모르게 된다는 것은 자주 있습니다. 그 때문에 사전(辭典)의 순환 정의와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만, 적어도 B와 관계됨으로써 일단은 알았다는 기분이 드는 셈입니다. ‘실정법’이라고 하면 모르겠지만, 입법기관에 의해 제정되거나 재판의 판결에 적용되는 현실의 ‘법’이라고 말하면, 일단 알겠다는 기분이 드는 거죠. 입법이나 재판이나 법 등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분명하다는 전제가 있으면, ‘정치적’을 ‘국가’의 본질에 관계되는 형태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 이상으로 파고들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슈미트는 그것을 알면서 파고들고 싶은 것입니다. 

마지막의 긴 문장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그것은 원문의 구조가 복잡해서 잘 번역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Auch die allgemeine Begriffsbestimmunmen des Politischen, die nichts als eine Weiter-oder Rückverweisungen an den “Staat” enthalten, sind verständlich und insofern auch wissensohaftlich berechtigt, solange der Staat wirklich eine klare, eindeutig bestimmte Gröβe ist und den nicht-staatlichen, eben deshalb “unpolitischen” Gruppen und Angelegenheiten gegenübersteht, solange also der Staat das Monopol des Politisohen hat.


“~하는 한, ~”를 의미하는 <solange> 이하가 그 앞의 부분 전체에 걸리고 있습니다. 두 번째의 <solange> 이하 부분은 이를 바꿔 말한 것입니다. 번역하면, 처음의 “~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라는 부분에는 걸리고 있지 않은 듯 보이네요. 그래서 처음 부분이 당돌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insofern auch wissenschaflich berechtigt>라는 부분의 <insofern>은 영어의 <so far>와 거의 같은 의미로, ‘그런 한에서’라든가 ‘그런 점에서 ~’라는 뜻입니다. ‘그런 한에서’란 그 앞의 부분, 즉 이 인용문의 첫 부분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죠.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처음의 <solange> 이하를 앞으로 내서 다시 번역해보겠습니다. ‘정치적’이라는 형용사의 의미가 문제이므로, ‘정치적인 것’에는 < >를 달아두죠. ‘정치적인 것’이란 “‘정치적’이라는 형용사로 형언되어야 바람직한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또한 국가가 현실에서 명확한 일의적으로 규정된, 커다란 단위이며, 비국가적인, 바로 그런 까닭에 ‘비정치적’인 집단들이나 시도와 대립하는 것이라 한다면, 달리 말하면, 국가가 <정치적인 것>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라면, ‘국가’에 대한 관계 맺음, 혹은 ‘국가’로의 환원 이외의 어떤 것도 포함하지 않는 형태로 <정치적인 것>을 일반적으로 개념 규정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런 한에서 학문적으로도 정당하다. 

[홍 : 국가가 진정으로 하나의 명확하고 확실하게 규정된 세력으로서 비국가적이고, 바로 그래서 “비정치적” 집단과 사안들에 맞서는 한에서, 그리고 또한 국가가 정치적인 것의 독점권을 보유하는 한에서 이 개념규정들은 이해할 수 있고 그 점에서 학문적으로도 정당하다.]


요는 ‘국가’가 ‘정치적’으로 불리는 요소를 독점하는 실체적 단위로서 실재하고 있다면, ‘정치적’을 ‘국가’와 결부시키는 형태로 설명하는 것은 별로 부당한 얘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쟁’을 행하는 것이 오로지 ‘국가’라고 한다면, “전쟁이란 국가가 ○○을 위해 △△하는 행위이다”라는 형태로 정의하는 것은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