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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시몽동X번역기계] 시몽동과 빅데이터-2번째

시몽동과 빅 데이터 #2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번역: 최유미 (수유너머 N 회원) 

 




 

개방 시스템들과 과잉목적(Open systems and Hypertelia)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빅데이터와 관련된 주장들의 신념이다. 과연 그것만이 최선일까?>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데이터, 특히 사회물리학과 관련해서 고안된 주장들을 볼때, 이들의 주장에는 논의 중인 시스템들의 개방성의 정도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는 점이 첫번째 논평이다. 펜트랜드(Pentland, 2012; 2014, p. 203)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서 낙관적인데, 그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은 사회 효율성, 운영 효율성과 회복력을 갖춘 설계를 통해서 안전성이 개선될 수 있는 구체화된 기술-사회 메커니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술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빅데이터의 약속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더 나은 시스템들을 만들 수 있다. 그 약속은 멜트-다운 되지 않는 금융 시스템들,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정부들, 제대로 작동하는 헬스 시스템들, 등등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제안에 있어서 한 가지 위험한 점은, 그것이 과잉 목적적인 사회 구조들의 개발을 노린다는 점이다. 이것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개체화가 수행하는 중심적 역할에 대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현상들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실재론자의 형이상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은, 완벽하게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들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존재론은, 개체 발생적 작용들에 의해 개체들이 구성되기에 이르고 그리고 계속해서 개체화하는 것에 관해 더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몽동에게 있어서는, 시스템의 개발과 지속적인 개체화는, 연관환경( associated milieu)과 그가 부르는 바로서의 전-개체(pre-individual) 양쪽에 대한 이중적 관계의 유지 때문에 일어난다. 시몽동이 그의 개체화의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지점들 중의 하나는 기술적 개체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러한 개체화는, 기술적 존재가 그 자신의 주위에 창조하는 환경 속에서의 인과성의 회귀 때문에 가능한데, 이 환경이란 기술적 존재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자신이 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는 그런 환경이다. 이 환경은 이것은 동시에 자연적이고 기술적인데 연관환경(associate milieu)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을 수단으로 해서 기술적 존재는 그 자신의 작동에 조건 지어진다. 이것은 제작된 환경(fabricated milieu)이 아니고, 혹은 적어도 전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을 둘러싼 자연적 요소의 한정된 시스템이다. 연관환경은, 제작된 기술적 요소와 그 속에서 기술적 존재들이 기능하는 자연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관계의 매개자이다. (Simondon, 1980, p. 60).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의 일관된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적 개체의 개체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작동이 자신의 지속적 작동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적 대상을 위한 만족스런 환경은 자연세계의 일부에 대한 얼마간의 변형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 개체들은 외부환경에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개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수준의 비결정성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점.

 

     연관 환경에 관한 명기에 더해서, 추상적인 기술적 대상과 구체적인 것과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개발은 증가하는 구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시몽동이 구체화의 예로 들고 있는 갱발 수력발전기 도해: 터빈과 발전기가 모두 물속에 들어있는 수력발전기다. 물과 전기라는 양립불가능한 성질이 발명에 의해 하나의 해를 찾은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란 요소들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해를 찾으면서 진행된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의 본질은 기능적 하위 시스템들을 전체적 기능성 속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각 구조는 다수의 기능들을 수행 한다; 하지만, 추상적 기술적 대상에서 각 구조는, 전체의 기능성 속으로 통합되는 단 하나의 중요하고 적극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반면에, 구체적 기술적 대상에서는 어떤 특정한 구조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기능들은 적극적이며 중요하고, 기능하는 전체 속으로 통합된다 (Simondon, 1980, p. 31).

 

 

     그 차이는, 작동에 필요한 추상적 구조들을 포함하는 기술적 대상은 작동 상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각자 단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하는 다수의 시스템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작동 상에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들의 작동은 종종 충돌한다. 구체화의 과정은, 그러한 추상적 구조들이 어떠한 단일 구조를 이용하는 해법에 의해 극복될 때 일어나는데, 일관된 수준의 다기능성(pluri-functionality)을 가지고 작동한다.

 

 

     시몽동이 제시하는 하나의 예는 두 개의 추상적 시스(엔진과 수냉 시스템)으로 구성된 수냉식 연소엔진의 예인데, 그것의 구체화된 솔루션은 피스톤 실린더 상에 냉각핀(gill)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냉각핀 구조는 한편으로는 실린더를 위한 구조적인 지지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공기의 흐름을 통한 냉각 문제를 또한 해결한다. 하나의 대상은, 그것의 발생과 기능의 추가적인 발전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양쪽 모두로부터 추상화될 정도로 닫혀 있을 때 과잉 목적적(hypertelic)이라고 기술된다. 과잉 목적적인 도구는 어떤 계통의 완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발전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냉각기와 엔진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는 공냥식, 냉각핀에 의해 냉각과 구조적 보강이라는 다기능성을 확보하면서 구체화된다.>

 

 

 

      비록 지금까지의 기술(description)은 기술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특정되어 왔지만, 이 일반적인 스키마는 또한 시몽동에 의해서 다양한 범위에서 광범위한 현상들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인간 진보의 한계들 The Limits of Human Progress(2010, p. 230)에서, 시몽동은 기술적 발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것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문화적 진보 (‘인간이 생산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에 의해 구성된 활동과 존재의 전체 시스템’)를 서술한다. 즉 불일치(disparity)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도메인들 (예를 들면, 언어, 윤리학, 종교, 기술) 사이의 구체화하기라는 진보적 작용으로서 말이다. 어떤 도메인이든지 그 도메인 속에서의 진보는, 그것이 포화되지 않고 (과잉 목적적이지 않고), 추가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그리고 다른 도메인들과 함께, 어느 정도의 공명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발전은 또한, 도메인들의 분열과 그들 관계의 변형을 포함하는 상전이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의 양식에 관한 설명을 다른 도메인, 예컨대 생명체와 심리적 개체들 같은 도메인에서의 그 설명으로 너무 급하게 옮겨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이것들의 개체화가 이해되는 방법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를 들면 생명개체의 개체화는 기술적 개체의 그것으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생명의 개체화는 연속적인데 비해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는 불연속적 도약 속에서 일어난다. 이 차이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현재 작동하는 일반 공리적인 이해만을 요구하는 여기서는 이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없다.

 

    심리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관한 시몽동의 설명 또한 이러한 공통의 관점들 몇몇을 공유하고 있는데, 주체와 그 환경(milieu)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이나 문제의 극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하나 추가되는 관점은 의미화의 역할을 포함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시몽동(1989, p. 126)은 신호와 의미화간의 차이점을 작동시킨다. 개체화는 문제해결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가 되는 불일치의 극복을 수반하는데, 이 해결 과정의 결과는 어떤 개체(개별화, individualization)의 출현이다. 혹은 어떤 새로운 체계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의미화가 또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의미화는 어떤 새로운 체계의 문제해결적 개체화를 수반하는 의미 혹은 감각의 동시적 전개이다. 반대로 신호들은, 재현적이고 전통적 정보 이론에서의 개별화된 개체들 간에 오가는 메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화는 그것의 환경과 그 자체 내부와 관련해서 어떤 개체가 개체화하는 시공간적인 현실적 성취를 표시한다.

 

여기서 시몽동이 사용하는 신호와 의미화는 펜트랜드가 사용하는 정보와 사고 사이에 외견상의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 관한 펜트랜드의 이해가 단지 사고와 정보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지점에서 시몽동은 의미화와 관련하여, 개체화의 중심적인 역할, 즉 심리적 개체와 집합적인 개체 양쪽 모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몽동은 펜트랜드의 설명이 쉽게 영향을 받는 과잉 목적성에 저항한다.

 

만약 우리가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 데이터에 관한 사회학적 주장들을 따져 물어볼 것이라면 질문 되어야 할 문제다. 이 주장들이 의지하는 사회시스템들에 대한 가정, 즉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서 조절되는 평형상태에서 사회시스템의 지속적인 운영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추상적인 가정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는지 혹은 반대로, 아마 더 곤혹스럽겠지만, 그렇게 제안된 관리가 사회가 과잉 목적적이 될 것을 어느 정도로 요구할 것인가?

 

펜트랜드의 사회물리학이 질문들에 응답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으나, 그 응답들은 제한적이다. 그의 책에서 논의된 시스템들의 대부분은 비교적 추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시스템의 예들로서, 금융 투자, 헬스 모니터링, 마케팅 그리고 기업체의 생산성 증대와 같은 것에 관계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뿐 아니라 이 모든 예들 역시 어느 정도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라도, 펜트랜드는 그것들을 비교적 닫힌 시스템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는 마투라나, 바렐라 그리고 루만의 이론 같은 오토포이에시스의 이론화와 가깝다.

 

 

<오토포이에시스의 닫힌시스템>

 

 

 

 

그 자체로서 사회 물리학의 주된 관심은 시스템들의 자기유지(self-maintenance), 혹은 구조적 커플링과의 관계에서 흐트러짐 없는 작용에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공익 사업 시스템들의 보호와 향상을 포함할 때 이해 가능한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전을 총괄적으로 사회의 더 크고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대하는 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일까? 그런 목적은 사회의 과잉 목적적인 생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설정된 목적을 항상성 조절의 목적에 맞추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은 기술자주의를 지지하여 정치적인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권장한다.

 

이것이 개체가 유지하는 다른 관계, 그것의 전-개체에 대한 관계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간단한 용어로 하자면 시스템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의 그런 것이 아닌 무엇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개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적 대상과 관련해서 시몽동은 아래와 같이 쓴다:

 

 

 

   기술적 대상의 존재는 이중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편으로는 그것의 지리적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환경과의 관계. 기술적 대상은 두 환경들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고,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환경들 양쪽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여전히, 이 두 환경들은 같은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세상이고, 서로 간에 반드시 완전하게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Simondon, 1980, p. 54).

  

 

     이 2차적인 관계가 없이는 어떤 시스템도 불완전하고 과잉 목적적이 될 위험에 처하는데 그것은 확고한 단일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빅 데이터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문제는, 더 넓고 자주 변화하는 환경과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인데, 변화하는 환경은 비결정론의 원천이 될 공산이 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치의 역할인데, 펜트랜드 (Pentland, 2014, p. 203)의 책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주제다. 그것은 사회의 핵심적인 목적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유용한 행위 규범을 개발하도록 개체들을 부양하는 환경에서의 테크노크라트적인 효율성과 회복력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속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또한 총체적으로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원한다. 만약 사회가 그런 통제에 복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전술한 베니거(Beniger)의 프로그래밍의 문제인데, 그것은 목적성에 관한 사이버네틱스의 관심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질문은 펜트랜드에 의해 생략된다. 그리고 시몽동의 관점에서 중요했던 것과 같은 발명의 역할도 생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