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매를 자처한 복화술사: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를 읽고

 




인문학 협동조합/한영인

 




 마르크스의 저작이라곤 선언을 비롯해 선집의 몇몇 글들만을 접한 문학도가 마르크스와 이진경의 철학적 대결에 끼어 토론(討論)’한다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불성설인 것만 같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오게 된 것은 한 명의 독서 대중의 입장에서 이 책을 읽고 느낀 바를 나누는 것 역시 어떤 의미를 갖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서였다. 따라서 토론은 응당 대상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일이어야 하겠으나 모자란 깜냥 상 나의 부족한 공부를 메우는 자리가 될 것 같아 송구스럽다. 이만 각설하고 책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이 책은 두 가지 다른 흐름이 교차한 자리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불어 닥친 마르크스 열풍이 있다. 주지하듯 2008년 미국발 금융 위기 이후부터 마르크스가 새롭게 조명 받는 분위기가 생겨났고 국내에도 다시 마르크스의 이론과 사상을 소개하는 책들이 여럿 출간된 바 있다. 저자가 이를 명확하게 의식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이 책이 2008년 이후 맑스 르네상스의 흐름 위에 위치해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저자 역시 이 책의 7<현대 자본주의>를 시작하면서 이를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흐름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진경의 일관된 관심사다. 이진경은 맑스주의와 근대성(1997), 자본을 넘어선 자본(2004), 미래의 맑스주의(2006) 등의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마르크스의 작업과 치열하게 대면해왔다. 이 책에는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온 이진경의 이론적, 실천적 관심사가 집약되어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두 가지 흐름이 교차되면서 기대되는 효과는 마르크스의 현재성/적실성에 대한 검토와 이진경의 작업이 갱신되고 있는 양상이라고 할 것이다. 적어도 한 명의 독서 대중으로서의 나는 이 책을 통해 위의 두 가지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 기대에 값하게 책을 통해 많이 배우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뭔가 아쉽고 의아한 느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걸 풀어내기가 쉽지 않아 피치 못하게 횡설수설 중언부언하게 된 점 양해 부탁드린다.





책을 시작하며 저자는 영매를 자처한다. 마르크스를 현재의 대한민국으로 초대해 지나간 그의 이론과 저자의 이론적 관심사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나는 이 책의 이러한 형식을 보고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가 떠올랐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대화. 거기서 진중권은 그 둘의 이론에 입각해 대립점을 설정하여 논의를 풀어 나갔다. 하지만 이 책은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마르크스를 발화하는 발화자가 대화의 직접적인 상대방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커다란 위험성이 뒤따른다. 내가 A의 이야기도 하면서 나의 이야기도 한다는 것은, 나의 서사 속에 A를 편의적으로 배치시킬 가능성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미학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까지나 그 자신들이 남긴 저작에 근거하는 서술자이자 논평자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의 마르크스는 어떤 사안에 대한 그 자신의 논평을 가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진경의 주장에 대한 인위적인 변증법적 대립물 - 곧 합으로 화할 -의 기능을 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마르크스는 말할 수 있는가?’ 이진경 역시 이 위험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서문>을 통해 이에 대해 긴 부연을 달아놓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책을 읽는 내내 다음과 같은 의문은 떠나지 않았다. 어떻게(혹은 언제) 마르크스는 이진경이라는 복화술사의 손 위에 덧입혀진 봉제인형이기를 그칠 수 있는가? 이진경은 영매를 자처했지만 실은 복화술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책을 읽다 보면 어느 샌가 MY의 구별이 무화되는 것을 여러 번 경험했다. 목소리의 다성성이 어느 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세기를 잇는 철학의 대결이라고 하기에는 분명 아쉬운 면이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먼저 다루는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근대의 교양인답게 마르크스는 - 비록 슬쩍 스치듯 지나갔다 하더라도 - 다방면의 문제를 거론했다. <예술>도 물론 그에 포함된다. 하지만 주지하듯 마르크스는 그의 일관된 예술론을 남긴 바 없다. 문학에서의 리얼리즘론도 엥겔스가 마가릿 하크네스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에서 촉발되었을 뿐, 그것을 만들어간 것은 루카치를 비롯한 이후의 이론가들이었다. 그렇기에 마르크스는 여기에 길게 대화를 할 계제가 아니다. 그렇다보니 예술란은 코뮨주의’, ‘역사와 혁명’, ‘노동과 계급’, ‘현대 자본주의등과는 다르게 마르크스와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이진경의 일방적인 강의가 펼쳐지는 장이 된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4장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보자. 여기서 이진경은 정치적 예술예술에서의 정치를 구분한다. ‘미학의 정치를 논한 랑시에르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이진경은 마르크스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예술에서의 정치란그와 달리 예술 자체에서 작동하는 정치를 통해 정의되어야 합니다. 예술이 정치적인 대상을 다루면 된다는 생각은 정말 안이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예술은 아주 쉽습니다. 남들이 정치적이라고 말하는 주제를 다루면 되니까요. 그 경우 정치적 선언문, 삐라, 정치포스터가 가장 정치적인 예술이 될 겁니다. (중략) 중요한 건 예술 자체를 정치적인 것으로 포착하고 정의하는 겁니다.” 이 말은 마르크스의 말이지만 마르크스가 왜 이런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필연성은 없다.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이러한 인식의 싹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면 독자는 의아한 기분에 처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가 저자의 복화술에 따라 움직이는 장면이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저 말 자체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진경은(마르크스가 한 말이지만 실은 이진경이 한 말이라고 보는 것이 옳으니) “예술 자체라는 말을 쓴다. 그러면서 선언문과 삐라, 포스터의 예술성을 아주 쉬운 정치적 예술성으로 폄훼한다. 그런데 이 책의 121페이지에 나오는 대중은 대중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만 그들은 혁명적이 된다.”라는 말을 패러디해본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삐라는 삐라다. 특정한 국면 속에서만 그것은 예술이 된다.” 실제로 벽의 낙서, 선언문, 삐라, 노동자들의 수기 등은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도 문학이나 예술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것은 단지 아주 특정한 순간에만 예술이 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순간은 우리가 기억하듯 정치적 혁명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순간이었다. (물론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예외다.)


가령 1980년대 민중문학론자들의 투쟁은 이 예술의 고답적인 성채를 부수고 저 너절한 글들을 예술로 편입시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문제는 삐라나 선언문이 본질적으로예술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이진경이 대중에 대해 한 말을 우리는 그대로 예술에도 적용할 수 있다. 대중이 흐름이라면 예술 또한 흐름이다. 그것은 예술 자체와 같은 굳은 본질을 갖지 않는다. 어떤 것을 예술로 받아들이게 만들것이냐 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혁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어째서 뒤샹의 변기는 예술로서의 자격이 없던 것을 예술 작품 안으로 밀고 들어간 것의 한 예가 되면서 삐라나 선언문 노가바는 안된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어쩌면 이진경은 1980년대의 혹은 그 시대로 대표되는 레닌주의(스탈린주의)를 비판하고 부정하기 위해 너무 쉽게 미학적 모더니즘의 손을 들어 주는 것은 아닐까? <외부에 의한 사유>가 곧 유물론이라면, 너절한것들이 유물론적 시야에 의해 예술로 포착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다시 돌아오면, 이 책은 이제까지 이진경이 펼쳐왔던 사유를 마르크스와의 대결이라는 형식을 통해 사실상 추인 받는 자리인 듯하다. 여기서 그것은 코뮨주의’, ‘외부성’, ‘프레카리아트등의 개념이다. (이 개념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코뮨주의(2010), 외부, 사유의 정치학(2009), 만국의 프레카리아트여, 공모하라(2012)를 읽으면 된다. 3대중에 대해서는 대중과 흐름(2012)를 참고.) 그런데 문제는 각각의 개념들의 대화적 상대로 불려나온 마르크스가 독자를 긴장시키는 팽팽한 적대적 관계를 구축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이 책을 읽으며 저자의 전작들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저자의 이론적, 실천적 관심과 논의를 한 눈에 살피기에는 매우 적합한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펼치면서 가졌던 어떤 기대 - 이진경 사유의 갱신 -를 충족시키기에는 뭔가 미진함이 남는 것 같다.


과문한 탓에 이 책을 읽으며 사소한 의문들이 많이 들었다. 그것은 논리적 결함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 실천적 모호성에서 연유된 것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코뮨이 아닌가 싶다. 이 자리에서 코뮨주의의 대가를 만났으니 만난 김에 좀 더 여쭙고 싶다. “코뮨주의란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만들어가는 현행적 실천 속에 있는 것”(60p)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어쩌면 이렇게 실천과 과정, 행동과 지향 그 자체를 강조하는 말들은 그 모든 비판의 책임으로부터 너무나 쉽게 면죄부를 받는 알리바이로 기능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외부성의 원리가 관철되는 코뮨이라면, 응당 외부로부터의 비판과 이질적인 적대 역시 마주해야 할 텐데, 나는 실천과 과정 그 자체를 중시하는 관점에서 이 이질적이고 적대적인 외부를 어떻게 마주할 수 있을지 감을 잡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런 현재진형형에 대한 비판은 언제나 진행의 형태를 완료나 결과의 형태로 오인하여 행하는 섣부른 것으로 치부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외부에 서 있는 나의 편견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코뮨주의외부성의 조직들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의외의 강고한 자기동일성이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가 활용되는 모습을 보며 그 자기동일성을 다시 한 번 느꼈다면 심한 과장일까? 저자의 일관된 이론적 작업 - 그 자체가 저자의 동일성을 강화시키는 - 에 어떤 파열을 가져오기에 이진경의 몸을 빌린 마르크스는 아무래도 적임자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작업의 동일성과 체계를 교란시키기 위해 저자가 도입해야 할 진정한 외부는 어디/누구일까? (가령 노동중심성에 대한 6장의 비판. 이런 이야기는 죽은 마르크스보다 현재 한국 사회의 그 누군가와 만나 더욱 치열하게 논의해야 하는 부분 아닐까?)





덧붙여. 대중에 대하여. 3장에서 펼치는 저자의 논의를 보면 대중이 긍정정인 정치적 주체의 형상으로 그려지는 듯하다. 저자에 의하면 대중은 주어진 자리나 지위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이탈의 벡터를 지닌 채 끊임없이 유동하는 어떤 흐름이다. 그런데 144~146쪽의 논의처럼 이탈의 벡터를 지닌 대중은 그 자체로 중립적인 것이어서 정치적인 판단의 대상이 되기 힘들다. 파시즘과 문화혁명 때의 대중에 대한 비판은 어쨌든 대중과 군중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말로 넘어가버린다. 저자는 대중을 현재 한국 사회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주체라고 판단하는 지 궁금하다. 그런데 만약 대중은 외부성에 의해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대중일 수 있다고 할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탈의 벡터를 가진 대중이냐 여부가 아니라 그 이탈의 벡터의 방향성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그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힘은 무엇일까



*이글은 4.21 화요토론회("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하였다" 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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