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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우리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한병철, 『피로사회』

우리 시대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 한병철, 피로사회(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박기형 / 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성과사회, 우리는 여전히 피로하다

 

2014년을 돌아볼 때, 우리는 무엇을 떠올릴 수 있을까? 지난해를 기억할 여러 중요한 단어들이 있지만, 여기서 필자는 드라마 <미생>을 꼽고자 한다. 드라마 <미생>은 직장인과 대학생을 비롯해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고충을 인상 깊게 그려냄으로써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대학생인 필자가 취업준비 중인 친구들,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은 드라마 속의 인물들에 자신들을 대입하여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어려움과 각종 불만들을 토로하였다. 이렇듯 드라마 <미생>은 끊임없이 경쟁의 장에 내몰리는 한국인들의 우울한 자화상에 대한 자각과 비판적 성찰의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하지만 2015년을 맞이한 현 시점에서 여전히 우리는 성장에 사로잡혀 있다. 새해 벽두부터 경제침체에 대한 우려와 경제성장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신년사들이 각종 미디어를 장식했고, 심지어 경제민주화 논의를 무색하게 할 만큼, 경제 활력을 위해서는 경제범죄를 저지른 재벌인사들을 사면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보란 듯이 언급되고 있다. 또한 지금도 수많은 직장인들과 대학생들이 자기계발과 성과창출을 위해 노력하며, 스펙 쌓기 및 구직활동에 전념하고 있다. 비록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살아남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경쟁의 장 속에 뛰어들어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요컨대, 무한한 경쟁에 따른 불안감에 대한 사람들의 자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완생이 되지 못한 채 미생으로 머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더욱 높은 수준의 성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 즉 한국 사회는 경제가 좋은 성과를 내야, 기업이 발전해야, 국가가 성장해야 우리도 행복할 수 있다는 도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삶의 불안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이 만연한 가운데에서도 무한경쟁과 경제성장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이 사회를 우리는 무슨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왜 우리는 성장과 발전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 - 새로운 자본주의 이윤창출 방식

 

한병철은 그의 저작 피로사회에서 최근 한국 사회의 단면을 피로성과라는 표현을 통해 포착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현재의 사회를 피로사회라고 명명하면서, ‘성과사회의 구조적 성격 상 우리는 끊임없이 자기계발과 경쟁 그리고 성장의 압력에 내몰린다고 말한다. 즉 저자는 현재의 사회상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전환되었다고, 또는 전환되는 과정에 놓여있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사회의 변화를 부정성의 패러다임(금지, 강제, 규율, 의무, 결핍, 타자에 대한 거부 등)이 긍정성의 패러다임(능력, 성과, 자기 주도, 과잉, 타자성의 소멸 등)으로 바뀐다는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그의 논의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과사회에서는 긍정성의 과잉이 나타나고, 자아는 끊임없는 자기착취 속에 빠져, 다시 말해 자기 자신을 뛰어넘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마모시키는 쳇바퀴에 놓인다. 이에 따라 자아는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는 당위보다는 할 수 있음이라는 능력에 따라 행동하지만, 완전하고 무한한 자유의 약속은 오히려 그에게 무기력함과 낙오자라는 자책감을 안길 뿐이다.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성과사회의 주체들은 우울증에 허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오늘의 주체는 오히려 금지, 강제, 억압의 철폐와 타자에 대한 관용의 확대로 보장받은 무한한 자유의 무게에 짓눌려 자신을 소진하고 있다. 따라서 피로는 성과주체의 만성질환이 된다.

특히 한병철에 따르면, 이러한 성과사회의 요구와 자기착취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이윤축적 방식이다. 즉 전일적 지배를 확립한 자본주의가 보다 많은 이윤창출을 위해서, 더욱 생산적이기 위해서 지배와 강제에 의한 타자 착취보다는 자유와 선택에 의한 자기 착취로의 전환을 이루었다는 말이다. 그 결과, 피로사회에서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며, 그러므로 피로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인 것이다.



 

성과사회에서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 멈춰서기, 머뭇거리기, 사유하기

 

저자는 성과사회의 압력에 따른 우울증의 확산을 방지하고, 성과주체를 쳇바퀴에서 내려오게 만들기 위해서는 깊음 심심함’, ‘보는 법이 교육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다시 말해, 성과사회에서는 자극, 정보, 충동의 과잉으로 말미암아 멀티태스킹 능력이 요구되는데, 이로 인해 성과주체는 사색과 같은 깊은 주의, 깊은 심심함을 상실하고 산만한 주의, 분주한 활동성에 빠지게 된다. 그리하여 성과사회의 자아는 과잉활동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착취하는, 주인 스스로 노동하는 노예가 되는 노동사회 속으로 빠져든다. 즉 활동적 삶이 절대화됨에 따라 사색적 능력이 상실되었고, 그로 인해 근대적 활동사회의 히스테리와 신경증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보고, 생각하고, 듣고, 말하는 법에 대한 교육이라고 본다. 공포가 아닌 불안을, 짜증이 아닌 분노를 느끼기 위해서는 보다 심층적이고 전체적인 상황에 대한 성찰과 진단이 요청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저자는 돌이켜 생각하기’, ‘계속 생각해나가기가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들이닥치는 성과 사회의 요구에서 한발 물러서서, 무위로서 이를 부정하고 나아가 모든 목적 지향성에서 해방되기 위한 막간의 시간, 놀이의 시간을 영위할 것을 주장한다. 쉽게 말해, 자기계발, 자기발전을 통해 완결 없는 자기 착취를 요구하는 성과사회의 성공을 향한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이라는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멈춰 서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머뭇거림 속에서 자기가 놓인 상황을 직시 및 사유해야 한다는 말이다.

 

규율사회에 기반 한 성과사회

 

하지만 성과사회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그가 놓치고 있는 지점이 있다. 물론 저자 또한 인식하고 있지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냥 언급만하고 지나가버렸던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를 탈피하거나, 규율사회를 철폐했다는 것이 아니라 규율사회를 졸업했다는 점, 즉 여전히 규율사회를 기반으로 한 채로 성과사회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저자도 지적하고 있듯이, 성과주체는 규율에 단련된 상태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성과주체는 복종적 주체보다 더 빠르고 더 생산적이며, 능력을 당위에 바탕을 둔 채 추구한다. 그리하여 능력은 규율의 기술과 당위의 명령을 통해 도달한 생산성의 수준을 더욱 상승시킨다.

우리는 이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성과사회가 규율사회의 연속선상에 놓여있다는 것은 어떤 함의를 갖는가? 이에 대해서 자본주의의 이윤창출이 성과사회가 규율사회보다 낮아서 능력과 자유 그리고 선택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지점은 저자가 말하는 사유와 반성 그리고 자각 뒤에 나타난다. 즉 성과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 이후에 이를 비판하고, 그 억압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에서 배후에 가려져 있던 규율사회의 기제나 드러난다는 말이다.

성과사회가 개별 자아들에게 부여한 꽉 짜인 질서, 이른바 성공을 향한 무한한 자유과 선택의 공간을 거부하고, 질서의 바깥으로 나가려는 자들과 이미 질서의 바깥에 놓인 자들에 대해서, 사회는 우선적으로 합의와 포섭의 기제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들이 저항할 경우에는 배제와 억압의 기제를 함께 사용함으로써, 그들의 목소리를 들리지 않도록 만들거나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불순한 세력으로 낙인찍어 버린다. 이후 이들이 지치고 버틸 수 없게 될 때쯤 다시금 합의와 포섭의 손길을 내민다. 예컨대, 대학입시라는 교육경쟁의 장을 거부하는 이들, 비정규직의 확대를 비판하는 사람들, 탈규제라는 미명하에 시행되는 민영화 경향에 반대하는 세력들 등등 성장과 이윤추구에 반대하는 모든 목소리들에 대해서 이러한 양면적 기제가 작동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병철은 성과사회에만 집중한 나머지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의 중요성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지 못했다. 성과사회가 규율사회에 기반하고 있으며, 성과사회가 위협을 받을 때에는 언제나, 자신에게 부과된 자리를 박차고 나온 성과주체들에 대해서 배후에 숨겨져 있던 규율사회의 기제가 작동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는 오히려 현재 사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의 목소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거나 가시적이고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한국 사회의 사회상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이라고 평가하기보다는, 성과사회의 면모가 현대 사회에서 형성되고 있지만, 이는 규율사회로부터의 탈피가 아니라 양자의 공존, 즉 성과사회와 규율사회가 시공간에 따라 공존하기도 하고 개별적으로 존재하기도 하며 어느 하나만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해, 활동적 삶의 절대화에 따라 깊은 심심함이 사라졌다는 한병철의 이야기는 일면 타당하나, 이는 성과사회가 드러나는 영역에 대해서만 맞는 이야기이다. 오히려 규율사회가 작동하는 시공간에서는 성과사회에 대한 사색적 주의가 작동함에도 불구하고, 사유의 움직임 및 비판적 목소리에 대한 억압과 배제라는 규율사회의 부정성이 다시금 회귀한다. 요컨대, 2015년의 대한민국은 규율사회에서 전환한 성과사회가 아니라 규율사회에 기반 한 성과사회이다.

 

자기반성을 넘어, 연대에 바탕을 둔 저항으로

 

이상의 논의를 통해 살펴볼 때, 한병철이 제시하는 사유의 힘만으로는, 여전히 규율사회의 부정성에 기반하고 있는 성과사회에서 성과주체가 앓는 이 시대의 질병, 이른바 우울증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가 불가능하다. 또한 한국 사회의 성장과 발전의 도식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이는 성과사회가 규율사회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사유의 힘이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개인적인 자각과 반성만으로 사회가 변화할 수 있다고 낙관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머뭇거림을 멈추고 비판적 목소리를 광장과 거리에 내는 순간 규율 사회의 억압과 배제의 기제가 성과주체들을 옥죄어 오기 때문에, ‘머뭇거림은 진짜 멈춰서버리고, 사유는 주체의 머릿속에만 남아있게 된다. 따라서 한병철이 성과라는 목적지향적 행위로부터의 해방을 위해 제시하는 무위의 피로, 그것을 넘어서는 적극적인 행동을 수반하지 않고는, 이른바 아무것도 산출하지 못하는 무위의 피로에 머무르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서는, 우리가 완생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요청되는가? 사색과 반성 그리고 자각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과 실천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러한 행동과 실천이 자리할 공간은 규율사회의 기제로 인해 보장받지 못한다. 대의제를 기반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사회문제를 논의하고 해결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공간은 제도 바깥에 놓인 자들에게는 허락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정상적인 질서 속에서 자리하고 있는 자들이 이탈하는 순간 합의와 포섭의 기제는 억압과 배제의 기제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즉 사색을 통해 깨달은 문제의식을 비판적 목소리로 내뱉는 순간, 성과주체는 면역학적 관점에서 타자가 된다. 성과사회의 질서를 병들게 하는 부정성을 가진 타자가 되어버린다. 그때 성과사회는 심층에 자리한 규율사회의 면모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따라서 한병철이 이미 지나간 해결방안이라고, 구시대적 유물로 치부하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저항이 돌아와야 하지 않을까. 언제나 타자의 강제가 인간을 옥죄고 있던 규율사회는 아니지만, 언제든 규율사회로 전환할 준비가 되어있는 성과사회, 규율사회를 기반으로 움직이는 성과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성찰을 넘어서는 실천적 행동이 필요하다. 자기반성을 넘어서 숙의와 토론 그리고 연대에 바탕을 둔 저항적 움직임이 중요하다. 억압과 배제를 이겨내는 폭력적 저항, 즉 정치적 계쟁을 통해서, 우리는 합의와 포섭으로 닫힌 공간을 열어젖혀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성과주체가 행했던 반성과 자각을 보다 근본적인 성찰과 비판으로 발전시킬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적 주체들의 활동성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이들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지적 작업을 이어나가야 한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한병철이 제기한 피로사회에 대한 번뜩이는 사유를 보다 발전적,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것이며, 지난해 우리가 느낀 자각과 반성을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