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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이진경 칼럼] 경쟁의 생물학, 경쟁의 교육학

원래 후진국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디서나 세계 최고아시아 최고같은 순위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시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다던 남산타워(지금은 아니겠지만)를 비롯해 이런 순위 자랑성 발언이 유난히도 많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은 자랑할 게 없어선지, 그런 거 자랑하는 게 남들보다 잘난 게 없음의 징표임을 알아서인지 많이 뜸해졌다. 약간은 후진성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에서 최고의 순위를 얻은 게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은 시민들의 행복도나 복지예산비율 등이 OECD 국가 최저라는 것 등이 그것인데, 자살율도 그렇다. 2003년 이후 헝가리와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OECD 최고의 자살율을 감춘 국가가 되었다.

자살은 이제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고 수준이 된 듯하다
. 지난해 서울대생 가운데 5명이 자살했다고 하더니, 올해는 몇 달 안되는 사이에 카이스트 학생 4, 급기야 교수도 1명 자살을 했다. 잘나가는 엘리트들이 앞장서 자살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드러난 카이스트의 현실은 자살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징벌 등록금, 예외없는 영어강의, 등록연한 제한, 교수들의 실적주의 등등 단 한순간도 경쟁에서 피할 수 없는 제도로 학생은 물론 교수들을 토끼몰 듯 쪼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끼몰이 제도들이 한때는 총장이름을 따 서남표 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찬양되었다고 한다.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이 많은 이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하긴 그리 쪼아댄 덕분에 카이스트는 순위가 많이 올라갔다고 한다
. 훌륭한 대학-기업(!)이 된 것이니, 찬양할 만 했던 셈이다. 그 경쟁이나 개혁이 학생을 위한 것이었을까 학교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접어두자. 경쟁에서 버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총장님과 개혁을 지지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왜 자살했다고 생각할까? 경쟁에 져서? 무능해서? 의문을 접는 순간 편치 않은 감정이 일어난다. 생존자들의 안도일까? 아니면 승리자들의 자긍심일까?

사람을 잡는 이
서남표 개혁을 보면서 일본의 고이즈미 개혁이 떠올랐다. ‘일본사회의 개혁이란 깃발 아래 이른바 민영화’, ‘기업화등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성공이냐 죽음이냐로 경쟁적 상황을 극단화하고, 패배자들의 각성을 위해 실업이나 비정규직이라는 죽음의 늪을 전사회로 확대했던 점에서, 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경쟁의 힘으로 생기 잃은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발상이 둘 다 확연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남표 씨는 고이즈미처럼 정치적 센스가 없어서인지, 학생들이 연이어 자살한 상황에서도 미국대학에선 더 많이 죽는다며 아직 피가 부족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개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너무 쉽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멀쩡한 소 돼지가 잔계산의 경제학 때문에 턱도 없이 죽는다면
, 멀쩡한 학생들이 경쟁과 도태의 생물학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다윈의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스펜서의 사회학이나 멜서스의 경제학에서 기원한 것임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물의 세계를 상호부조라는 말로 요약했던 크로포트킨의 오래된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상이한 박테리아들의 공생체임을 증명한 마굴리스의 유전학적 연구는 경쟁이란 말로 세계를 이해하는 게 얼마나 일면적인 단순화인지를 보여준다. 경쟁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협력과 공생이 있음은, 생물학을 모른다면, 역시 생물이기도 한 우리 자신의 삶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좀 더 나쁜 것은 경쟁과 도태에 대한 단순화된 관념이다
. 다윈에 따르면 가령 마데이라 지역에는 날개가 퇴화되었거나 있어도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가 반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유는 잘 나는 놈들은 바람에 날려 바다에 떨어져 쉽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선 생존경쟁과 도태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완전한것들에게 불리했고, ‘불완전한것들이 '적자(fittest)'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하나의 특별한 예가 아니다. 두 앞발이 퇴화된 장수풍뎅이 등 많은 사례를 다윈 자신이 언급하고 있다. 살아남아 진화하는 것들, 그것이 좀 더 진보된, 좀더 완전한것은 아니다. 환경에, 조건에 잘 맞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을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경우에조차
,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즉 어떤 경쟁인가를 보는 것이다. 성적이 징벌적 등록금까지 이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재능이 있거나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개체들이 아니라 성적관리를 잘하는 개체들이다. 성적관리를 위해 흥미와 열정을 죽이며 좋아하는 강의를 포기할 줄 아는 지혜’, 배울 것도 별로 없고 매력도 없지만 성적을 잘 주는 과목을 선택하는 지혜’, 그것이 그런 경쟁에선 살아남는 비결이다. 스펙관리를 포함해, 자기개발만큼이나 자기관리가 생존의 전략이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이런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자는 그런 계산과 관리에 능란한 자일 것이다. 그런 자들이 재능 있는 창조적 연구자가 될까? 그보다는 관리자 계통의 직업을 택하는데 다음번 경쟁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일정 비율의 탈락자를 무조건 내야 하는 성과급 체계가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를 선별할 거라고 가정하는 경쟁체제에선 어떨까
? 생존이 달린 그 경쟁에서, 애써 논문이야 쓰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령 새로운 교수를 선발하면서 경쟁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은 미련한 짓이 되지 않을까? 경쟁과 성과 간의 선형적 관계만을 고려하는 경쟁의 생물학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경쟁자들을 조절하는 인간의 이러한 피드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이 있고 이성이 있는, 즉 계산하는 동물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의 자살 또한 이런 피드백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경쟁의 생물학에 기초한 교육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 모든 대학을 겨냥하고 있는 경쟁이 어떤 학생, 어떤 교수가 생존하게 하여 어떤 대학을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경쟁이 모든 것을 진보하게 하리라는 믿음이 아둔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보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