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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_철학.사회

[이슈_이진경 칼럼]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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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맞아’라는 감탄보다 강했던 것은 가슴이 뜨끔한 느낌이었다. 특히 이 말은 우파가 부패로 망한다는 것보다는 좌파가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겨냥하고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맞다. 좌파는 끝없는 분열로 인해 망했다. 이론적 관점이나 노선의 차이가 조직적 분열로 이어지고, 전술이나 정책의 차이가 조직내 분열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힘은 약화되고, 애초에 상대하던 ‘적’ 이상으로 대립하게 된 과거의 동지들과의 대결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다.


이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했던 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건설노조에서 20년 이상 일을 해온 한 활동가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인생을 몽땅 ‘바쳤던’ 그 운동을 떠나려고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온갖 정파들이 들어와서 이젠 어떤 것도 하기 어렵게 되어서다. 가령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이 지금 내려와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14시간씩 논쟁을 해도, 누구도 양보하지 않기에, 더구나 그 뒤에는 어디나 정파의 주장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기에,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는 게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투쟁이란 적과 대결하며 그때마다 무언가를 결정하며 출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인데, 사실은 내부에서 지치는 논쟁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안에 대해 과감하게 협상을 해서 밀고 나가면,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이런저런 비난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나서서 문제를 풀어갈 수도 없고, 의욕도 점차 사라져갈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매우 신실한 감응의 이 헌신적 활동가는 이제 자신이 20년 이상 해온 운동을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을 게 틀림없음에도 인생을 걸고 활동하던 것을 그만두려는 한다는 얘기에서 가슴 아픈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노동운동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 운동에 어떤 희망이 남을 것인지 알기 어렵다.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둘러싼 적대적 감정과 논쟁이 그것을 대신한다면, 노동운동이 노동자나 민중들의 희망이 되기는커녕 노동운동 자신마저 희망을 갖기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정말 ‘니힐한’ 감정이 밑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상황이 건설노조나 비정규직 운동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새삼 가슴 아프게 돋아났던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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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따지고 보면 좌파의 분열은 오래된 이론(!)과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랫 동안 혁명운동의 전범으로 삼았던 러시아 혁명의 경우, 당 규약을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되면서 시작되었고, 그 대립은 혁명이 끝나도록 지속되었다. 맑스에 대한 해석조차 이런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 같다.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철학과 리카도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경제학, 그리고 오웬이나 푸리에 등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사상, 이 셋은 레닌이 명시적으로 지적한 이래,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자 구성요소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른바 ‘정통적’ 맑스주의는 맑스의 사상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를 유물론적 발전시킨 철학적 적자임을 강조해왔다. 또한 그 이상으로 맑스가 과학으로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킨, 그런 점에서 스미스와 리카도의 적자임을 강조해왔다. 반면 오웬이나 푸리에 등에 대해 말할 때는 그들의 사회주의가 갖는 공상성과 맑스의 그것이 갖는 과학성을 대비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왔다. 아니, 그들의 비과학성을 비난(!)해왔다. 헤겔철학이나 정치경제학에 대해선 맑스의 연속성이 강조되었다면, 이전의 사회주의에 대해선 그 불연속성이, 단절이 강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계급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려고 함을 생각하면, 여기서 보이는 거리감각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헤겔이나 리카도의 사상이 부르주아적임에 반해, 오웬이나 푸리에는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동자들의 입장, 혹은 백보 물러나 말해도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에 선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맑스주의가 발 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에서 보자면 거기가 멀 뿐 아니라 적대적이라고 해야 할 철학이나 경제학에 대해선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 근친성을 주장하는 반면, 그로부터 거리가 가까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선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단절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맑스 자신은 자신의 작업이 ‘정치경제학 비판’임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그런 제목의 책을 썼고, 심지어  「자본」의 부제 또한 그런 제목을 붙여놓았지만, ‘정통 맑스주의’에서는 맑스를 정치경제학의 완성자로 위치지웠다. 또한 「헤겔 법철학 비판」 등에서 보이듯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이 맑스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음에도, ‘정통 맑스주의’는 그를 헤겔 변증법의 계승자로서 철학자 안에 위치지웠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선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며 축소되어선 안될 거리를 만들었다.


이는 물론 계급을 떠나서 배울 것이 있다면 누구든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 계급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여부와 사유가 얼마나 깊은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론이나 사상을 계급과 무관하게 실증적인 어떤 ‘과학성’이나 깊이 등만으로 따지는 통상적인 철학이나 이론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계급성을 척도로 보고자 하는 사상이라면 이는 생각할수록 기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레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레닌의 글은 항상 누군가 구체적인 비판의 대상을 겨냥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령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것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글의 양으로나 비판의 강도로나 가장 많고 격렬한 것은 대개 계급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멘셰비키처럼 한때 자신이 동료였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 역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의 글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기에, 논란은 항상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다른 견해를 비판하며 자신의 논지를 세워야 했을 것이고, 그 다른 견해들이 유사해보일수록 자신의 주장이 더 타당함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주장일수록 더욱 강하게 비판해야 했던 것일 테고, 계급적으로 다른 주장은 크게 반박할 이유도, 가치도 없었던 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에서 견해의 차이가 일종의 ‘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게다. 견해 차이, 생각의 차이를 적대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혹은 무의식적 사고방식이 전면적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맑스주의적 좌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나아가 이런 전통은 레닌주의의 ‘성공’으로 인해 맑스주의의 ‘정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맑스의 사상에 대해서조차 가까이 있는 입장일수록 더욱 선명한 선을 그으려는 태도로 귀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에서 ‘적’을 보는 적대의 정치학이 좌파들 내부에 정상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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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정파의 난립을 그저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또한 각각의 정파들은 그 나름대로 존재하게 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존재하는 한 계속 존속하려는 힘을 갖고 있기에, 비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무력감과 니힐리즘이 찾아오는 것은 역으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좌파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어디나 그런 집단의 분할과 분열, 대립과 적대는 있게 마련이다. 난점은 정파적인 대립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이나 자기 정파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고 바꾸려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견해를 ‘관철시키는’ 문제로, 자신 주장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문제로 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좀 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한 재료로 삼기보다는 자기 주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혹은 ‘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토론이 적절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이견을 격파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그러나 상대 역시 그렇기에 끝날 수 없는 논쟁의 장이 되어버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립이나 분열 없는 세계, 화해와 조화로 가득찬 세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만큼, 이런 대립과 비판 없는 운동이 있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역으로 이런 대립과 분열이 부딪치면서 융합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운동의 중요한 자원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와 대립, 분열을 에너지로서 긍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차이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밀고나가려 할 때에만,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좀 더 적절한 길을 찾는 계기로 생각할 때에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 차이와 대립을 자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능력의 문제기도 하다. 능력이란, ‘수용능력’을 표시하는 capacity란 말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무엇보다 자신과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폭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보자면, 정파적인 대립과 적대로 인해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그 정파들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수용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고, 그릇이 그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차이나 이견, 비판이나 대립을 척결하고 제거해야 할 적으로,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는 한, 대립이나 비판은 적대로 귀착될 수 있을 뿐이다. 그 경우 비판은 분열의 이유가 되고 분열은 분산과 고립, 궤멸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 같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가슴 아프게 박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게다.

 


글/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