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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다섯 번째 부분

**본 코너는 근간 예정인 이진경 선생님의 [파격의 고전] 원고 중 일부를 출간 전에 미리 보내드리는 코너입니다.



<이진경의 "파격의 고전">






2장 구미호와 인간의 대결, 혹은 변신술의 유형들





이진경



네 번째 부분에 이어 계속 (첫 번째 부분 보기 / 두 번째 부분 보기 / 세 번째 부분 보기 / 네 번째 부분 보기)




7. 유희적-반국가적 도술: <전우치전>



이제까지 우리는 발생적인 기원을 통해서 구미호나 용왕 아들의 변신술이나 전우치의 변신술, 홍길동이나 박씨부인이 다루는 도술, 그리고 금방울전에서 금방울의 도술이 상이한 기원과 ‘본성’을 갖는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불어 그 변신술이나 도술이 나아가는 방향과 목적을 통해 그것들이 다른 성격을 갖는다는 점 또한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용왕 아들의 변신술과 전우치의 변신술은 같은 방향을 갖는다고 했지만, 같은 성격을 갖지는 않습니다. 전자는 노인의 ‘집’을 빼앗으러 오는(그렇다고 믿는) 구미호로부터 집을 지키려는 것이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경계를 횡단하며 흐리는 것을 저지하려는 것이란 점에서 ‘보수적’이라면, 전우치의 변신술은 인간의 손 안에 장악된 동물적 능력임에도, 인간세계의 경계를 흐리고 넘나드는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횡단적’입니다. 전자가 왕수재를 통해 왕건으로, 즉 인간세계의 통치자인 왕으로 이어지는 것이란 점에서 ‘통치’에 속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통치자를 희롱하고 통치자가 할당한 자리에서 벗어나는데 사용된다는 점에서 ‘정치’에 속하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전우치전>에서 전우치가 호정을 먹고 천서의 술법을 여우에게 배운 뒤 가장 먼저 그걸 써먹은 것은 왕을 속여 황금대들보를 얻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왕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됩니다. 전우치는 선관으로 변신하여 오색구름에 상서로운 기운까지 만들어 임금에게 옥황상제의 명령이라면서 궁궐을 손질하려 하니 황금대들보를 하나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그리곤 그 금을 팔다 (일부러) 잡혀가지만 임금 앞에서 가서도 먹병을 이용해 어이없는(!) 장난을 칩니다. 그 뒤에도 가난한 백성에게 호조의 돈을 꺼내 쓰게 해준다거나 호조의 창고에 있던 돈을 청개구리와 뱀으로 바꾸어 버리며, 내전의 궁녀들의 족두리를 까마귀로 바꾸어버린다거나 궁녀를 호랑이에 태워 희롱합니다. 전우치를 잡을 수 없음을 알고 벼슬을 내려 포섭하지만, 궁 안에 들어가서도 자신의 동료 내지 상관인 선전관들을 속이고 희롱합니다. 역모를 했다는 누명으로 잡혀죽게 되자, 임금을 속여 ‘그림’ 속으로 도망칩니다. 그 뒤에 조정은 전우치를 잡아들이지만 잡혀 들어간 전우치가 360명이었습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우니 모두 죽여버리자는 도승지 왕연희의 말을 따라 사람들을 베기 시작하자 왕연희를 전우치로 바꾸어 칼 앞에 서게 합니다. 임금이 한탄합니다. “국운이 불행하여 요괴가 이처럼 장난하니, 종사를 어찌 보전하겠는가? 역적 하나를 죽이려고 죄없는 신하와 억울한 백성만 수없이 죽이겠도다.” 하여 심문을 중지합니다. 그 사이 전우치는 왕연희로 변신하여 진짜 왕연희를 구미호로 바꾸어 가두게 합니다.


전우치의 도술은 일관되게 왕이나 관리 같은 통치자를 희롱하고 엿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먼저 임금을 속이는 것으로 변신술을 써먹었음에서 분명합니다. 통치자가 아니라 지나가다 알게 된 일들에 끼어들면서도 거만한 관리나 잘난체 하는 선비 등 ‘권력’의 성분을 포함하는 이들을 보면 참지 못하고 엿을 먹입니다. 인간세계 안에 이런저런 구획선을 만들고 그것으로 분할된 자리들을 관리하며 유지하는 통치자에 맞서, 그 선들을 흐리고 가로지르며 무력화시키는 것이란 점에서 정확하게 통치에 반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게 전우치의 도술입니다. 반통치적이고 반국가적인 도술인 셈입니다. 홍길동과 달리 그걸 써서 얻고자 하는 게 딱히 없습니다. 임금의 회유책에 따라 관리가 되어 활동한 적도 있지만, 그에 대한 애착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거만한 선전관들을 골탕먹이는 데서 보이듯, 권력에 반하는 그의 유희는 관리가 된 뒤에도 계속되며, 도둑 염준을 잡으러 가선 혼을 내준 뒤엔 제멋대로 풀어주고 돌아옵니다. 즉 국가 안에 들어가서도 국가화되는 일이 없습니다.



최근에도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되곤 하는 전우치는, 저자에 따르면 원작에서도 장난스럽고 유머러스한 인물이었다. 사진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48227



전우치가 도술을 사용하는 데서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원칙이 있습니다. 왕연희를 구미호로 바꾸어 가두어 놓았지만 ‘며칠 더 속이면 살지 못하리라’ 생각하여, 그에게 가서 말합니다. “네 나와 원수진 일이 없는데, 나를 죽여 나라에 공을 세우려 하기에 내가 먼저 너를 죽여 한을 씻으려 했으나, 내 평생 살생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기에 너를 용서하니, 너는 마땅히 다시는 이런 행실을 하지 말라.”(121) 도적떼를 이끌던 염준을 진압하러 가서도 “내 평생 살생을 안 했으나 제가 이제 천명을 거역하기에 마지못해 죽이나니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해놓고도 ‘내 어찌 쉽게 살생을 하리오. 마땅히 이 놈을 사로잡으리라’ 생각하며, 결국 잡았다가 풀어주곤 고향으로 돌려보냅니다. 변신술을 쓰고 여러 가지 술법으로 임금 이하 온갖 사람들을 골탕먹이지만 끝내 살생은 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우치의 도술이 유희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우치전>은 어떤 작품보다 도술의 사용이 빈번하고 전면적이지만, 그가 도술을 사용하는 것은 목적이나 방법이나 모든 면에서 장난스럽고 유희적입니다. 임금에게 잡혀가 먹병에 들어가 먹병 조각이 되어 장난을 치는 것부터 시작해, 호조의 돈을 청개구리와 뱀으로 바꾸어버리기도 하고, 선전관의 아내들을 기생으로 바꾸어 그들의 연회장에 끌어들인다거나, 거만한 선비의 고환을 없애고 그 옆 기생의 음문을 배꼽 있는 곳으로 옮겨 놓는다거나 하는 식입니다. 물론 이런 장난은 단지 장난만은 아닙니다. 장난스런 익살을 통해 임금이나 관리들, 거만한 선비 등 권력자나 그걸 등에 업은 이들을 명시적으로 진흙탕 속에 처박습니다. 


그러면서도 전우치가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확고한 원칙으로 삼고 있는 것은, 그것이 말 그대로 ‘유희’임을, 즉 즐겁기 위한 것임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런 능력이나 술법이 죽음을 야기해선 안된다는 것, 그것은 그의 도술이 삶을 위한 것임을, 삶을 즐기기 위한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가 임금을 속여 황금대들보를 얻는 것도, 재물을 얻기 위한 것처럼 씌어져 있으나, 그 또한 그렇게 얻은 황금은 팔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재물을 얻기 위해 임금과 신하 전체를 속이는 것은, 단지 축재를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것은 임금 이하 신하들 전체라는, 누구도 감히 속이거나 골탕먹이려 생각하지 못하는 이를 대놓고 희롱하려는, 유희적 쾌감의 극대화를 위한 장난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금을 잘라서 성안에서 팔려다가 포교가 보고 의심하자 집과 이름을 정확하게 알려주곤 태수가 오길 기다리는 것도 그 다음 장난을 위해서임을 보여줍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은 먹병 속에 일부러 들어가 잡혀가선, 임금에게 “답답하니 병마개를 빼주소서” 외칩니다.


이런 유희적 성격이 반국가적이고 반통치적인 도술과 아주 잘 부합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국가나 통치자는 언제나 엄숙하고 진지한 얼굴로 명령하고 집행합니다. 임금의 얼굴이나 관리의 얼굴이 그렇습니다. 엄숙함과 진지함만이, 죽음마저 종종 동반하는 국가적 명령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명령 앞에서 장난을 치고 웃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그 명령의 힘은 웃음거리가 되고, 임금의 행동조차 웃어넘길 수 있는 가벼운 것이 되고 맙니다. 웃음과 가벼움이 갖는 정치적 힘을 이토록 직접적으로, 이토록 멀리까지 밀고 간 작품은 어디에서도 보기 힘듭니다. 이런 점에서 <전우치전>은 흔히 평가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고 비판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통치자나 지배계급에 속한 이들이 이를 얼마나 못마땅하게 여겼을 지는 불문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양반들이 양반들 읽으라고 썼을 <한문본 전우치전>은[각주:1] 한글본 <전우치전>과 완전히 다를 뿐 아니라 한글본에서 천방지축 장난을 치며 날뛰는 전우치를 엄숙하고 진지한 양반 술사들이 진압하여 꼼짝 못하게 가두는 것이란 점에서 한글본에 대한 대항텍스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한문본 전우치전>은 한글본 <전우치전>에 대항하고 반대하는 <반-전우치전>입니다. 고전 소설들이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발산하는 이본들을 많이 갖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처럼 원래 소설에 대항하는 식으로 쓰여진 것은 아마도 이것이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단 한글본에서 전우치는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지만, 한문본에서는 “문장에 능하고 여러 가지 재주를 지녔는데, 과거에 수차례 응시했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떨어졌다”고 쓰고 있습니다. 주인공이니 재주가 있다고 하긴 해야겠는데, 과거엔 붙지 못했다고 하여, 아예 자신들이 선 자리에서 배제된 무능한 자로 매김합니다. 전우치가 도술을 배우는 과정도, 그것이 보여주는 도술의 본질도 한글본과 완전히 다릅니다. 


전우치가 절에 앉아 『주역』을 공부하는데 여우가 본색인 소년이 찾아옵니다. 전우치가 여인으로 변신한 여우들과 같이 자는 일종의 결연을 통해 동물적 도술에 접근하게 되는 한글본과 달리, 한문본에서는 ‘소년’이 ‘찾아와서’ 『주역』에 대해 논하다가, 의심을 한 전우치에게 붙잡히는 것입니다. 앞서 대비했던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의 차이를 안다면, 여기서 전우치가 『주역』을 공부한다고 하는 것은 처음부터 크게 다른 길로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여우가 『주역』을 논하며 전우치와 맞먹는 이해를 갖고 있다는 것은, 동물과 인간의 도술이 갖는 상이한 본성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전우치에게 잡혀 여우는 위기에 처하는데, 변신능력을 가진 그가 변신술로 빠져나가지 않는 것은 어이없는 일입니다. 소년으로 변신할 수 있다면 당연히 다른 작은 동물로 변신해 벗어날 수 있을 것이기에, 여우를 잡으려면 또 다른 장치가 필요합니다. 한글본에서는 부적과 특별한 끈이 있었으나, 한문본에선 그게 없습니다. 그냥 바보 같이(!) 잡혔을 뿐입니다. 이는 여우의 재주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졸로 보고 있음을 뜻합니다. 한글본처럼 호정을 빼앗아 먹는 일도 없습니다. 


죽게 된 소년은 천서 세권을 주겠다고 합니다. 천, 지, 인으로 된 세 권의 천서를 받아서 전우치는 ‘혼자’ 읽고 배웁니다. 이 역시 여우의 도움 없인 읽을 수 없었던 한글본과 배우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소년이 준 책이 인간의 책과 구별되지 않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세 권을 다 읽는 것도 한글본과 다릅니다. 나중에 천서를 다시 가져가지만 세 번째인 ‘인’ 권을 못 가져간 것은 그가 읽으며 붉은 물감으로 점을 찍으며 읽어서 그렇다는 것도 허술한 얘기입니다. 이는 전우치가 혼자 읽지 못해 여우의 힘을 빌어야 했고(또 다시 ‘결연’입니다), 그나마도 한 권밖에 못읽었으며, 도술로 천서를 되찾아간 여우를 쫓아가려다 안되겠다 싶어 포기했던 한글본이 동물적 변신술의 외부성에 대해, 자신의 힘 밖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아주 일관되게 쓰고 있었음을 역으로 확인토록 해줍니다.


그렇게 도술을 익힌 전우치가 그걸 써먹으며 다닌 일은, <전우치전>의 가장 중심적인 내용이어야 마땅함에도 한문본에서는 단 한 문단으로, 아니 반 문단으로 쓰고 있습니다. 



“전우치가 그 책을 밤낮으로 익혀 묘리를 터득하매 변화무쌍한 요술을 부릴 수 있게 되어 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대부의 집이나 궁궐 안을 출입하며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벌이고 다녔으나,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전우치는 이제 온 세상에 아무도 두려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한문본 전우치전>, 『낯선 세계 속으로』, 72)



이 얼마나 놀라운 요약입니까! 그나마 전우치의 그 모든 행실을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짓”이라고 하여, 징치해야 할 대상임을 명시합니다. 그리고 제어할 이 없는 전우치가 꺼림칙하게 여기는 인물이 둘 있다면서, 윤군평과 서화담을 거론합니다. 이후의 내용은 전우치가 윤군평과 서화담을 찾아가 도술을 겨루다 피박살나는 것으로 일관됩니다. 이 텍스트에서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이유는 단지 “자기 재주를 자랑하고 싶어”서입니다(73). 그들의 언사를 빌어 한마디로 말하면, ‘까불고 있는 것’입니다. 겨루는 도술은 대부분 부적을 던져 동물을 다루는 것입니다. 부적을 사용하는 도술, 이는 동물적 도술이 아니라 인간적 도술입니다. 그래서일 겁니다. 전우치는 도술을 쓰는 족족 윤군평에게 당하고 서화담에게 깨집니다. 그들이 던진 부적은 전우치가 부적으로 부린 동물을 전우치에게 다시 덤벼들게 하는 것이란 점에서 반사적 도술입니다. 대결의 양상 또한 아주 빈곤한 상상력을 보여줍니다.  


불쌍하게도 도술을 ‘자랑하려’던 전우치는 매번 반사적 도술에 당합니다. 임금이나 관리를 희롱하던 전우치 대신, 윤군평의 도술에 눌려 옴짝달싹 하지 못한 채 사헌부의 관리들의 형벌을 받으며 괴로워하는 전우치만 있을 뿐입니다. 인륜에 어긋나고 의롭지 못한 전우치는 정확하게 ‘사헌부’라는 ‘치안(police)’의 장소로 보내집니다. 윤군평은 막되먹은 전우치를 잡아 징벌의 장소로 보내는 ‘경찰(police)’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도술은 ‘인륜적’ 도술이고, 치안의 도술이며, <한문본 전우치전>은 이 치안의 도술을 통해 <한글본 전우치전>의 ‘유희적’ 도술을 제압하고 굴복시키는 치안의 서사인 것입니다.  


도술을 자랑하려 고수 앞에서 까불다 제압당한 전우치는 반복하여 상대의 도술에 감복하였다고, “앞으로는 감히 다른 마음을 먹지 않겠다”고 반성을 합니다. 서화담에게 맞붙어보려다 깨진 후 전우치의 대사는 진지한 반성문입니다.



“선생의 도술이 이처럼 높으신지 헤아리지 못하고 작은 재주를 펴 보였으니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한 것은 요사스런 도술에 불과합니다. 그저 세상 사람들을 우롱하는 데나 쓰일 뿐이니, 선생께서 지니신 신선의 도술과는 감히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78)



한글본 <전우치전>의 동물적 기원을 갖는 도술이야 애시당초 등장하지 않았으니 동물적 도술과 인간적 도술의 차이를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문본을 쓴 이도 전우치와 윤군평/서화담의 도술 간의 차이는 구별하고 싶었던 듯합니다. 그것은 통치에 반하는 유희적 도술과 진지한 치안 내지 통치의 도술 간의 차이였지만, 어느새 거기에 양반들의 가치판단이 부적처럼 달라붙으며 ‘요사스런 도술’과 ‘신선의 도술’이라는 도덕적인 분할을 따라 명명됩니다. 그리고 전우치의 반성적 자백을 빌어, 요사스런 도술이 신선의 도술을 애시당초 이길 수 없다는 항복선언을 받아냅니다. 이 무력한 반성의 고백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전우치 자신의 그런 도술이 “세상 사람을 우롱하는 데나 쓰일 뿐”이라는 사실이지만, 이는 양반들의 눈에 비친 전우치의 행동이 유희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 반성의 말에 서화담은 점잖게 대꾸합니다. 



“이른바 ‘신선의 도술’이니 ‘요사스런 도술’이니 하는 게 무언지는 잘 모르겠소. 나는 다만 올바름으로 사악함을 제압했을 뿐이오. 듣자니 당신이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며 의롭지 못한 짓을 많이 벌이고 다닌다고 하더구료. 앞으로 서울에 있지 않고 멀리 깊은 산속에 숨어 살며, 다시는 함부로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지 않는다면 이쯤에서 그치겠지만, 만일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것이오.”(78~79)



신선의 도술과 요사스런 도술의 차이를 모르겠다면서 어느새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며’ 다니는 것을 비난하는 것을 앞뒤 안맞는 소리라고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겠지요. 이 텍스트는 요사스런 도술과 신선의 도술이란 구별을 사악함과 올바름이라는 명시적인 도덕적 범주로 대체해 버립니다. 전우치의 도술은 요사스런 도술이며 그것의 본질은 사악함이라는 말입니다. 서화담은 그런 자가 있어야 할 자리는 ‘깊은 산속’, 도술이라곤 쓸 일 없는 그런 장소라고 명시합니다. 거기 들어가 얌전히 살라고, 다시 그 자리를 이탈해 요사스런 도술을 부리고 다니면 ‘죽여버리겠어!’라고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로부터 전우치는 자취를 감추어 세상에서는 그 종적을 알지 못했다”(79)라는 문장은 ‘일사소설(逸士小說, 숨어사는 선비가 되는 걸로 끝나는 소설)’의 마지막에 흔히 보이는 문장이지만, 현실세계를 떠나 다른 세계를 찾아가는 이의 행적이 아니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지정된 자리에 유폐되어 버린 반인륜적 범죄자의 행적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리곤 난데없이 전우치의 문장실력을 칭찬하며 그가 지은 시들을 나열합니다. 하지만 다시 “시의 격조는 지극히 높았지만 요사한 도술 때문에 사람과 문장까지도 버려지고 말았”다며 뻔한 교훈을 적어놓습니다. “서화담이 전우치의 술법을 제압하여 굴복시킨 일”은 주자가 도교의 연단술을 다룬 『참동계』를 풀이하는 글을 지은 것과 마찬가지라며, 두 가지 술법을 새로이 주자와 도교, 군자와 술사의 대립으로, 양과 음의 대립으로 바꾸어 놓곤, 음이 양을 이기지 못한다는 설교를 덧붙입니다. 


이는 양반층이 한글본 <전우치전>을 읽으며 꿈꾸었던 상상적 복수라고 할 만합니다. <전우치전>이 얼마나 못마땅했으면, 같은 제목의 한문본을 만들면서, 완전히 반대되는 내용으로 ‘소설을 썼던’ 것일까요! 이는 역으로 <전우치전>이 갖는 유희적이고 반국가적인 성격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당시 양반층 전체에게 지극히 부담스럽고 불편한 작품이었음을 반증하는 것 아닐까요? 이는 <전우치전>의 유희적 도술이 반통치적이고 반국가적 도술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1. 한문본 전우치전은 『잡기유초』에 실려 전해지는데, 이 역시 박희병이 교합하여 박희병/정길수가 번역한 텍스트를 이용했습니다(『낯선 세계로의 여행』, 돌베개).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