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김충한(수유너머N회원)





1.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이언 해킹의 Why is there philosophy of mathematics at all,(2014)[도대체 왜 수리철학이란 것이 있는가?]는 수학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들이 순수한 연역적 추론으로 구성된 것들이 아님을 보여준다. 수학의 이론들이 응용으로 뻗어나가는 식이 아니라 거꾸로 응용분야에서 시작한 것들이 기존의 이론 속으로 삽입된다. 그래서 지난 글에서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수학의 외부에서 온다는 결론을 내렸다.(지난 글 http://nomadist.tistory.com/entry/%EC%88%98%ED%95%99%EC%9D%84-%EC%88%98%ED%95%99%EC%9D%B4%EA%B2%8C-%ED%95%98%EB%8A%94-%EA%B2%83%EC%9D%80-%EB%AC%B4%EC%97%87%EC%9D%B8%EA%B0%80#)


해킹의 작업은 어떤 철학사상과 연결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의 순수성을 보존하려는 태도(순수수학)가 아니라, 이질적인 것들과의 상호작용이 수학을 풍부하게 만든다는 해킹의 주장에서 떠올린 것은 들뢰즈의 유목사상이었다. 들뢰즈가 말하는 유목은 물론 초원에서 양떼를 치며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삶의 양식을 지칭하지 않는다. 각자가 살고 있는 곳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각주:1]삶의 양식을 가리킨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해보면, 자본주의 안에서 그것의 공리계로부터 벗어나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시도들을 이어나가는 삶이라 할 수 있다. 수학으로 이런 유목을 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획기적인 경제학 이론을 수학을 통해 만드는 이런 것을 뜻하는 걸까?




     +           = ?





2. 유목수학이란?


들뢰즈는 [천의 고원]이란 책에서 과학사에서 발견되는 두 가지 상이한 과학이 있다고 언급한다. 하나는 왕립과학(royal science)이고 또 하나는 유목과학(nomadic science) 혹은 소수적 과학(minor science)이다. 우리는 유목과학의 특징을 통해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힌트를 얻을 수 있다.(들뢰즈는 과학과 수학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쓰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도 같이 쓰도록 한다.)


유목과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유체와 흐름의 이론을 다룬다.

둘째, 생성과 이질성의 모델을 만든다.

셋째 소용돌이형 모델을 만든다.

넷째, 문제설정적(problematic)이다.


 




유목과학은 유체와 흐름을 다룬다. 반면 왕립과학(국가과학)은 유체조차도 고체를 통해 사고하려고 한다. 유목과학은 생성과 이질성의 모델을 만들고자 하지만 국가과학은 불변의 모델을 구축하고자 한다. 유목과학은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문제 속에서 그것에 대한 답을 고민하지만, 국가과학은 이미 만들어진 이론들을 모아 분석하고 그것들을 공리(axiom), 정리(theorem)들로 체계화시킨다. 그래서 유목과학이 문제설정적(problematic)이라면 국가과학은 정리적(theorematic)이다.


구체적으로 들뢰즈가 제시한 예들은 아르키메데스(BC287~212), 베르누이(1654~1705)의 유체역학과 데자르그(Girard Desargues, 1591~1661)의 사영기하학이다. 그런데 첫 번째 특징인 유체와 흐름을 다룬다고 말할 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유목수학이라는 것은 유목적 사유양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지, 수학의 특정 분야를(가령 유체) 다루는 내용으로서 구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다면 지금도 기계공학과와 수학과에 종사하는 십만 유체역학 전공자들이 모두 새로운 삶,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유목을 실천하고 있다는 말인가.



        흐름 ≠  




유목수학의 첫 번째 특징으로 언급되는 흐름을 들뢰즈는 물질적 의미의 흐름으로 보고 기체와 액체를 다룬 과학을 유목과학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설사 진의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실제 책에서 제시하는 예는 아르키메데스, 베르누이의 유체역학이다. 그것은 차라리 비유나 철학적 의미의 흐름으로 읽어야 한다. 철학적 의미에서의 흐름이란 미규정성 상태의 순수 질료적 흐름, 현실화 될 수 있는 잠재성(virtuality)의 최대치를 뜻한다. 갑자기 어려운 말들이 등장했는데 다시 써보면, 유목수학은 수학의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룬다는 말이다. 무엇의 잠재성일까? 바로 수학의 잠재성이다.



3. 잠재적 수학: 잠재성(Virtuality)



학창시절 과학 시간에 보존 법칙(conservation law)들을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량 보존 법칙 등. 혹시 이과였다면 각 운동량 보존 법칙도 들어봤을 테고.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에너지 보존 법칙은 라이프니츠로부터, 운동량 보존 법칙은 데카르트로 부터 유래한다. 300년이 넘은 이 법칙으로부터 우리는 지금도 던진 공의 궤적을 시각화 하고, 전기 도선에 전류가 얼마나 흐르고 전압이 얼마나 될지를 계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각각의 보존 법칙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없을까?


20c 여성 수학자 에미 뇌터(Emmy Noether,. 1882~1935)는 대칭성(symmetry)이란 개념으로 이 보존 법칙들 사이의 '관계'를 찾아낸다. 뇌터는 위 법칙들을 하나로 묶는 '정리'를 증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에미 뇌터(Emmy Noether, 1882~1935) 

아인슈타인이 "여성의 고등 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주목할 만한 창조적인 수학 천재이다." 라고까지 말한 바 있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어떤 시스템이 연속적인 대칭 성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 대칭인 것에 대응하는, 시간 안에서 불변인(invariant) 양이 있다"


물리학에서 대칭성이란 어떤 변환하에서 보존되고 불변하는 것(!)을 지칭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두 개의 공이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고 해보자. 공들은 운동에너지를 가지고 있고 이 둘을 더하면 총 에너지가 나온다. 시간이 지나 충돌이 일어나고 공들은 과거와 다른 궤적으로 운동할 거다. 그런데, 만일 충돌시 에너지 손실이 발생하지 않는 완전 탄성충돌이라고 가정하면, 총 에너지는 충돌하기 전이나 충돌 후나 같을 것이다. 이런 경우 에너지는 시간에 대해 대칭이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뇌터는 아래의 수식이 운동에 대해 불변임을 증명하는데,, (일단 아래의 동영상을 먼저 보시면 쉬울 겁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CxlHLqJ9I0A






\left(\frac{\partial L}{\partial \dot{\mathbf{q}}} \cdot \dot{\mathbf{q}} - L \right) T_r - \frac{\partial L}{\partial \dot{\mathbf{q}}} \cdot \mathbf{Q}_r   = constant (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이 식을 이용해서 시간에 변화(t → t + δt)를 주면, 위 식의 좌변에 에너지 수식이 등장한다.


에너지=상수(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즉 에너지 보존 법칙이다.

직선 위치에 대한 변화(qk → qk + δqk )를 가하면 운동량이 등장한다. 

운동량= 상수(운동에 대해 변하지 않는 값), 즉 운동량 보존 법칙이다.

회전 위치에 대한 변화(\mathbf{r} \rightarrow \mathbf{r} + \delta\theta \mathbf{n} \times \mathbf{r}.)를 주면 각 운동량이 등장한다.이는 각운동량 보존 법칙이다. 



뇌터의 정리를 통해 이제 우리는 에너지 보존 법칙, 운동량 보존 법칙, 각 운동량 보존 법칙 사이의 '관계'를 알 수 있게 된다. 


에너지 보존 법칙= 시간에 대칭인 물리량.

운동량 보존 법칙=직선 이동에 대칭인 물리량.

각 운동량 보존 법칙= 회전 이동에 대칭인 물리량.  


운동량 보존 법칙(데카르트), 에너지 보존 법칙(라이프니츠) 같은 서로 상이한 사상으로부터 유래한 법칙조차 이제 우리는, 대칭이라는 하나의 시점 속에서 조망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운동량 보존법칙은 보다 근원적인 대칭성의 직선 이동에 대한 표현일 뿐이다. 잠재성을 '경험적 사실이나 사건이 펼쳐지는 양상을 선규정하는 '초험적'(transcendental) 조건'[각주:2] 이라고 본다면, 뇌터의 정리는 우리가 경험적으로 확인하는 법칙들을 선규정하는 초험적 조건을 가시화 한다. 




에셔의 [말씀]1942

어떤 이론 물리학자들은 복수의 물리 법칙을 설명할 단 하나의 수식이 있을 거라 믿는다.  








각 보존 법칙들이 경험적인데 반해, 뇌터의 정리는 경험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마따나 정리(theorem)여서 연역적 추론을 통한 수학적 전개로 얻어진다. 초험적 조건이라고 부르는 이유 그리고 뇌터를 물리학자가 아니라 수학자로 구분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것은 곧 수학의 잠재성이 가진 최대치를 다룬다는 것이다. 개별적인 법칙들에 머물지 않고 이를 추상화하여 보다 근원적인 잠재성의 장을 드러내는 것.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것은 이런 의미인 것일까?


여기서 조금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흐름이란 것을 물리적 유체들의 운동 양상이 아닌 철학적 의미에서의 질료적 흐름으로 본다면, 사실 위의 예는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철학적 의미에서의 질료적 흐름은 미규정성 상태에서 무엇이든될 수 있는 잠재적 상태를 나타내는 반면, 위의 예에서 등장한 잠재성 개념은 특정한 것들(운동량, 에너지, 각운동량등)이 출현하도록 선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잠재성과 될 수 있는 것을 선규정하는 초험적 장으로서의 잠재성. 이 둘은 모두 잠재성이란 같은 말로 쓰이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사뭇 다르다. 우리는 다른 개념어가 필요하다.  




4. 잠재적 수학: 잠재화(Virtualization)


힌트는 이진경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그린비,2009)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들뢰즈가 구조주의의 영향하에 쓴 [차이와 반복], [의미의 논리]와 후에 가타리와 함께 쓴 [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잠재성을 구분한다(물론 [의미의 논리]에서는 확연히 구분이 안 되는 지점도 있지만)[각주:3]. 앞의 두 저작들에서는 잠재성이 선규정 되어 있어서, 그때그때 현행화되는 조건에 따라 그 구조에서 생겨날 수 있는 것이 현실로 드러난다. 가령 수정란을 떠올려보자. 아직 소화기관, 호흡기관 같은 분화가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그렇게 될 잠재성을 수정란은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특정 조건들(단백질 분자)과 만나 개별 기관들로 분화가 된다. 뇌터 정리도 이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뇌터의 정리 수식 안에 시간에 대한 변화를 조건으로 대입하면 에너지 보존 법칙으로 바뀐다. 직선 위치 변화를 대입하면 운동량 법칙으로 바뀐다. 회전 위치 변화는 각 운동량 법칙으로 바뀐다. 다시 개별적 법칙들로 분화되는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발생은 특정계열의 개념들의 발생을 함축한다. 가령 수정란에서 팔, 다리는 나올 수 있을지언정 돌덩어리가 분화될 순 없는 거고, 뇌터의 정리에서 뜬금 없이 슈뢰딩거 방정식이 나올 순 없는 노릇 아닌가.



[잠재성으로서의 알]



이와 달리 [천의 고원]에서 등장하는 잠재성 개념은 선규정 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사후적으로 확인된다. 무슨 말이냐면, 예를 들어 붉은 깃발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복잡한 사거리에서는 교통신호로 사용되지만, 치어리더 손에 들리면 응원도구가 된다. 하지만 그것이 시위대의 손과 만나면, 적기가 된다. 이렇게 다양한 양상들로 변이될 수 있었던 것은 깃발 안에 그런 잠재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깃털로 깃발을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허나, 이때의 잠재성이라는 것은 선규정 되어 있는 구조 같은 게 아니라, 접속과 계열화를 통해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 확인되는 것들이다. 깃발의 물리적 구조를 암만 들여다 본다한들, 혹은 수학으로 추상화 한다해도, 거기에서 응원도구라든가 적기라는 잠재성이 찾아질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깃발의 잠재성은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사후적으로 규정된다. 이 과정을 기존의 잠재성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 잠재화(Virtualization)라고 명명한다.


어떤 것의 잠재화는 그것의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앞서 보았듯 깃발이 어떤 맥락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드러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잠재성이 역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깃발에 이런 용도가 있었다니...) 뿐만 아니라 다른 것과의 접속을 통해 무언가 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제한되어 있지 않다. 교통신호, 응원도구, 적기 이 뿐이겠는가. 그것이 어떤 맥락, 배치에 끼여들어가느냐에 따라 깃발은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 깃발은 외부와의 접속을 통해 거의 무엇이든될 수 있다. 이것이 [차이와 반복]에서 나타나는 선규정되어 있는 잠재성과 [천의 고원]에서 나타나는 잠재성(잠재화)의 차이다.




       [ 중요한 것은 배치다.]



이제 유목수학이 흐름을 다룬다는 문제로 돌아가 보자. 유목수학을 한다는 것은 수학이 가진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루려는 태도를 말한다. 잠재성의 최대치를 다루려는 것은, 이미 나온 결과들을 모아 추상화시켜 그것들을 선규정하는 구조를 찾고, 잠재성의 장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뤄질 수 없다. 그 안에서 분화될 수 있는 것은 이미 선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잠재화로서 이뤄질 수 있다. 잠재화라고 하여 수학적 식들을 와해시켜 어떤 것도 규정되지 않은 상태의 미규정적 상태로 만드는 것은 부적절한 것 같다. 왜냐하면, 잠재화라는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며', '현행화의 필름을 거꾸로 돌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각주:4]


오히려 반대방향으로, 끊임없이 현행화로, 구체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미' 주어진 식들을 추상화시켜 그것들 사이의 관계와 구조를 찾고, 이마저도 더 추상화시켜 아무것도 규정되지 않은 미규정적 상태에 도달하는 것은 잠재적인 것으로 되돌아가는 식의 잠재화다. 정 반대로 상이한 배치, 맥락에서 제기된 구체적인 문제들을 푸는 과정을 통해 기존에 주어진 식들에 새로운 것들을 덧붙여 나가고, 이 식들을 추상화시킨 관계와 구조조차 새로 등장한 수식과 개념들로 인해 다르게 규정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일. 이것이 "초험적 장 조차 내재성의 평면위에서 결정화되는 것으로 이해하고자 했던"[각주:5] 말년의 들뢰즈의 입장에 가깝지 않을까. 





에셔, [해방](1955)

 잠재성의 최대치는 추상화가 아니라 구체화로 나아가는 방향이지 않을까?


 



4. 수학의 외부: 리좀적 수학사


상이한 배치, 맥락과의 접속을 통해 만들어진 수학의 예를 생각해보자. 첫 번째 예는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Tensegrity theory(건축물의 요소들을 직접적으로 연결하지 않으면서 견고한 형태를 유지할 수 있는 원리에 관한 이론)이다. 어떻게 하면 강한 힘을 받아도 도형이 찌그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은 사실 수학자보다는 건축가, 토목공학자들의 것이다. 이 이론을 처음 제안한 이는 버스뮌스터 풀러(Buckminster Fuller). 발명가, 건축가, 시인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풀러는 어떻게 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고, 재료가 적게 들어가면서 튼튼한(찌그러지지 않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지난 글에 등장한 지오데식 돔이다. 이 돔의 구조에 대한 연구는 수학과 결합(=접속)하면서 Tensegrity란 분야를 만들어내고 순수수학의 주제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두 번째 예는 사영기하학(projective geometry)이다. 때는 바야흐로 17세기. 유럽의 건축에서는 바로크 건축 양식이 시작된다. 바로크 건축의 특징은 비정규곡선을 사용하고 선을 구부러뜨리는 투영기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이 투영의 기술을 사용해 바로크 건축 양식은 2차원 공간이 마치 3차원인 듯 비현실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돌을 비스듬히 깎아 내는 기술인 절석술]




그러기 위해선 2차원 도형들을 적절히 변환하는 계산과 돌을 비스듬히 깎아내는 기술(절석술)이 필요한데 이 가운데서 생겨난 기하학이 사영기하학이다. 물론 사영기하학은 투시법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브루넬레스키(1401~1472)때부터 만들어졌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보다 체계적인 기하학을 만든 이는 지라르 데자르그(1591~1661)이후부터다. 건축가이자 수학에도 능했던 데자르그는 자신이 알던 기하학적 지식과 케플러의 연속성 정리, 사영이란 요소를 결합해 사영기하학이란 분야를 만든다. 사영기하학의 발명은 수학(기하학)과 그 외부적인 것(투시법, 바로크 건축)의 접속의 사례를 보여준다.




[2차원인 종이를 3차원으로 만드는 원근법처럼 공간을 구성하면 2차원상의 꽤 복잡한 증명식도 매우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다. 사영기하학을 이용한 대표적 사례인 '데자르그의 정리']




사실 너무 생소한 데서만 찾을 필요도 없다. 지금은 수학의 핵심분야인 해석학(미적분)을 떠올려 보자. 운동하는 물체의 기술이란 물리학적 관심사 없이 수학의 내적 논리에서 어떻게 미분법이 만들어 질 수 있었을까? 또 통계학도 마찬가지다. 잘 알려진대로 통계학은 근대국가의 출현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이런 실천적 요구 없이 통계학이 그저 지적 유희의 결과로서 만들어 졌을리는 없다. 좀 더 최근으로 오면, 컴퓨터 과학은 어떨까? 알고리즘을 최적화하는 수학 이론, 통신 상 오류를 자동으로 정정하는 코드 이론,  컴퓨터로 계산해 내는 이론에 관련한 수치 해석. 컴퓨터 보안과 관련된 암호론 등. 현대 공학기술의 집적체인 컴퓨터가 없었어도 이런 수학 이론들이 만들어졌겠는가.


 더 나아가 이렇게 만들어진 새로운 분야들은 그 자체로 머물지 않고 기존에 있던 분야들과 결합해 또 다시 새로운 분야(미분기하학, 미분위상수학, 확률미적분학 등등)를 파생시켜 나간다. 


이런 의미에서, 수학을 수학이게 하는 것은 수학의 외부에서 온다는 주장은 수학사 연구를 통해 더 탄탄하게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내적 논리에 따라 발전해나가는 수목적 형상으로서의 수학사가 아닌, 다른 분야와의 접촉면에서 발생한 것들이 이리저리 뒤섞이고 그물처럼 얽힌 리좀적 형상으로서의 수학사.







5.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외부에 의한 사유.


수학으로 유목한다는 것. 즉 수학의 잠재성을 최대로 펼치고자 함은, 수학이라 불리던 것들을 추상화하고 보이지 않던 관계와 구조를 가시화 하는것으로 성취되지 않는다. 반대로 수학이라 불리지 않던 것들과의 접속을 통해 그것은 달성된다. 

흑인은 흑인이다. 특정한 관계에서만 그는 노예가 된다란 말이 있다. 이는 어떤 것의 내적 본성을 가정하지 않고, 이웃항과 맺고 있는 관계가 그것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생각이다. 이를 '외부에 의한 사유'라고 부른다.[각주:6]수학에 대해 조금 바꿔서 대입해보자. 수학은 수학이다. 특정한 관계에서 그것은 사영기하학이 되고, 미적분학이 되고, 통계학이 되고, 암호론이 된다.  

수학을 모두 관통하는 어떤 내적 구조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 않고, 그것이 다른 분야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복수의 수학들이 발생한다는 생각. 이 생각은 우리가 이제껏 찾아온 수학의 잠재성을 최대로 펼치고자 하는 태도, 즉 유목 수학에 해당함이 드러난다, 따라서 수학을 그것의 외부에 의해 사유하는 것은 유목과학 혹은 소수적 과학의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진경, 노마디즘1, p.295 [본문으로]
  2.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25 [본문으로]
  3.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29~142 [본문으로]
  4. 이진경, [외부 사유의 정치학], p.130 [본문으로]
  5. 같은 책, p.142 [본문으로]
  6. 같은책, p.15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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