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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사회'의 완성


전주희 /수유너머N 회원



공분의 장소


하나. 1988년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어느 여름날, ‘수은중독 15살 공원 숨져’라는 짤막한 기사가 신문 한귀퉁이에 실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기사를 발견하지 못한 채 그 여름을 났을 것이다. 서울의 온도계를 만드는 공장 '협성기계'에 취직한 15살의 문송면 군은  1988년 7월2일, 수은과 유기용제 중독으로 사망했다. 충청도 가난한 농가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중학교를 마치고 자력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한지 두달 만의 일이다. 


다시 하나. 2014년 대우조선에 입사한 19세 청년이 입사 2주만에 산재로 사망했다. 이 청년은 자신이 작업해야할 대형 플랜트에 대한 구조나 작업에 대해 안전교육을 미처 받지 못했다. 회사가 작업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사전 교육없이 무리하게 현장에 투입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을 포함해 그해가 지나기 전에 3명의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가 중대재해로 사망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의 죽음을 목도한다. 앞선 15세 ‘공돌이’의 죽음이나 19세 조선소 사내하청 노동자의 죽음들은 공장 안의 죽음, 사회 바깥의 죽음이었다. 언제나 위험한 일은 존재하며, 누군가는 위험한 일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회적 묵계가 짙게 깔려있기에, 이 죽음들은 작업장의 담벼락을 쉽게 넘어서지 못했다. 


스크린도어 청년 노동자의 죽음은 어떻게 다른가? 무엇보다 사회가 그 청년노동자의 죽음에 깊이 공감한다. 구의역에 앞서 강남역에서 촉발된 '나는 오늘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여성들의 공분이 있다. 그리고 구의역 사건이 잇따라 일어났다. 낯모르는 젊은 시민들이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다’는 사건의 자리에 기꺼이 자신을 포개어 놓았다. 공분들의 내선순환.

 

문송면 군의 죽음이나 조선소 하청 노동자의 죽음에도 물론 분노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가난한 나이 어린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이었고, 저멀리 바닷가에서 풍문으로 들리는 위험한 작업장의  사고였다. 나의 삶과 타자의 죽음에 대한 거리를 좁히지 않고서도 분노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불의에 대한 분노, 인류애에 대한 정신으로 말이다. 반면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공분’은 수천장의 포스트잇으로 출현했다. 이 사회에서 추모와 애도를 넘어 공분의 장소가 형성된 것이다. 검은 리본과 국화꽃을 넘어서는 포스트잇은 각자 자신의 삶을 또 다른 삶이 갑작스레 중단된 장소인 스크린도어에 덧붙였다. 





우리사회의 안전의 ‘현재’


이러한 변화는 두 가지 방향으로부터 나온 듯 하다. 하나는 불안정노동의 일반화, 그리고 메르스와 세월호 '이후' 위험의 사회화. 이 두가지 서로다른 요소는 결합되어 또 다시 두가지 방향으로 분기한다. 


첫번째 방향은 신자유주의 안전권력이 추구하는 것이다. 

 '정비 노동자가 정규직이 아니어서 업무 소통에 문제가 있었다', '2인 1조 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는 당시의 언론보도는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시키는 전형적인 태도다.

201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수원에서 조선족 중국인 남성 오원춘이 한국인 여성을 토막살해한 사건이 일자, 정부와 언론은 이주노동자들 일반에 대해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며 사회에 공포와 외국인 혐오를 유포했다. 피해자가 살해당하기 전에 112신고를 했고, 이에 대해 늑장대응이라는 비난이 거세어졌지만 결국 '안전한 밤거리'를 만들기 위해 조선족을 몰아내야한다는 여론으로 수렴되었다. 여론을 등에 엎은 공권력은 위험한 요소들-조선족 노동자-에 대한 치안의 강화를 해법을 들고 시민지킴이를 자처하며 귀환했다. 

강남역 여성살해에 대해서도 대응은 동일했다. 위험은 예외적이고 일탈적이어야만 한다. 치안에 대한 정당성의 회로는 위험사회가 아니라 안전사회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강남역 사건을 두고 경찰이 정신질환자의 일탈적 행위라고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안전사회에 대한 신화에 기반한다. '우리 사회는 안전하다.' 왜? 국가는 시민의 안전을 위해 설립되었다는 근대적 정당성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존립한 이상 국민은 안전해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때때로 위험은 예외적이고 일탈적으로 간주된다. 국가는 이러한 예외적 위험에 대해 예방하거나 처벌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예방과 처벌은 치안의 강화로 귀결된다. 


위험이 예외적이고 일탈적일수록 위험은 반사회적 개인의 일탈로 지목된다. 시스템은 안전하기 때문에 위험은 시스템의 바깥에서 발생한다. 그 개인은 주로 이주노동자이거나 일거리가 마땅치 않은 불안정 노동자 이거나 정신질환자이다. 이들은 사회에 불만을 품기에 '충분히' 불안정하다. 시민안전의 바깥에 노동의 일부, 하찮은 노동, 불안정한 노동이 분리된다. 그리고 이는 최하층계급(underclass)이라는 잠재적 불안요소이자 잉여의 삶들이 된다.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안전의 외주화다. 


그런데 메르스와 세월호 이후 '안전한 한국사회'에 균열이 발생했다. 신자유주의적 안전권력이 배제해 왔던 위험이 사회안으로 역류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역류의 방향이다. 


메르스 확산의 진앙지가 된 삼성서울병원에서 한 청원경찰이 메르스 확진판정을 받았다. 이 청원경찰은 근무 당시에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개인의 안전 불감증에 대해 여론의 지탄이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삼성서울병원에는 300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구급차 운전노동자, 청원경찰, 간병노동자, 청소노동자 등 병원의 모든 곳에 존재했다. 이들 모두를 예외적인 현상이라고, 일부 노동자들의 안전 불감증으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모두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관리대상에서 제외되었고, 메르스는 그 구조하에서 전파되었다. 다시, 정확히 말해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배제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안전사회의 유지를 위해 안전이 외주화된 결과다. 


근대사회이래 안전은 국가 설립을 정당화시켜주는 보증물이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효율성을 추구하며 안전의 일부를 시장을 통해 외주화했다. '의료시장화'라는 외주화된 안전은 메르스를 만나 삼성서울병원이라는 위험의 진앙지를 탄생하게 했다. 안전이 외주화되면서 안전은 위험의 요소들로 역전된다. 안전업무가 3000명이라는 거대한 잠재적 위험으로 고일 때까지 의료의 민영화는 안전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선전되었다. '효율성은 안전을 보장한다.' 

메르스로 인해 이 외주화된 안전이 사실 위험의 진앙지였음이 드러났다. 이것은 불안정 노동이 일반적인 노동이 되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극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효율성이 아니라 위험이 사회'안으로' 역류했다. 위험이 사회화된 것이다. 안전의 외주화와 위험의 사회화. 


여기에 세월호 유족들의 목소리가 역류의 방향을 틀었다. 

<푸코 이후>에 실린 세리자와 가즈야의 글, '생존에서 생명으로, 사회를 관리하는 두 개의 장치'에서는 일본사회에서 규율권력이 안전권력으로 전환하게 되는 계기를 피해자 유족의 등장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범죄의 가해자를 일종의 사회적 피해자로 교정받아야할 주체로 인식된 것에서 유족들의 적극적인 피해의 목소리는 사회가 범죄자에게 가졌던 온정적인 태도를 변화시켰다. 사회는 극적으로 "피해자화" 되었으며 가해자의 교정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처벌주의가 강화된 계기가 되었다.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불안과 공포는 치안에 대한 의구심과 비판이 아니라 더욱 강한 치안을 요구하고, 이는 사회내에 잠재해 있는 위험요소의 적출을 요구한다. '수상한 자'가 도대체 누구인지 명확한 정의 따위는 없지만 사회적으로 안정적인 위치에 있지 않은 모든 자들이 수상한 자가 될 가능성에 놓여있으며 안전사회의 내부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안전사회의 신화를 되불러오며 더욱 강화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초래한다. 


하지만 세월호 유족들은 사회의 내부에서 수상한 자를 찾지 않고 곧바로 국가의 역할을 의문에 부친다. 구조과정에서 국가의 무능이 드러났기 때문에 필연적인 경로이기도 했지만 유족들의 의문은 사회'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그 의문이란 국가가 그동안 추구했던 안전에 대한 의문이었다. '배가 뒤집어졌는데 왜 국가를 걸고 넘어지느냐'는 일부 비난은 기실 어불성설 비난만은 아닌것이다. 

유족들의 '진상규명'을 둘러싼 행위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것은 '위험이란 늘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어떻게 피할 것인가'와 같은 위험의 회피 전략 혹은 리스크의 관리 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위험은 시한폭탄이 아니다. 누군가의 품에서 반드시 터질 수 밖에 없는 돌려막기 게임의 클라이막스가 아니다. 오늘날 위험은 안전이 사회의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순간, - 자본의 이윤 때문이든, 효율성의 차원이든 - 안전은 위험으로 역전된다. 그러니까 '진상규명'이라는 유족들의 행위는 안전권력이 추구하는 안전사회의 신화를 의문에 부친다. 


안전사회의 완성


구의역 스크린도어 노동자의 유족은 비정규직이어서 업무매뉴얼을 지키지 않았다는 메피아의 책임전가에 이의를 제기했다. '진상규명'은 안전의 외주화가 그 원인임을 지목했다. 더이상 안전한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사회를 잠식하는 대신 근본적인 원인에 접근해가고 있다. '공분'의 힘은 피해자화된 사회를 넘어 '생존자-사회'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국가의 안전이 아니라 삶들의 생존이다. 구체적 삶들의 안전한 생존을 다루지 않은 추상화된 안전사회는 치안적 질서가 작동하기 위한 신화에 불과하다. 


몇 년전 현대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에게 비정규직들의 정규직화에 대한 의견을 물었더니, 대뜸 ‘그럼 위험한 일은 누가하는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보다 훨씬 더 몇 년전으로 거슬로 올라가면 그 위험한 업무는 정규직들이 하던 일이었고, 그들은 그 위험을 위험으로 놔두지 않고 안전한 업무가 되기 위해 제도적 장치를 고안했을 것이다. 

늘 존재하는 위험이 안전사회의 바깥으로 내몰아지는 것이 아니라, 안전이 외부화될 때 위험은 발생한다. 위험의 외주화가 아니라 안전의 외주화인 것이다. 안전이 외주화될 때 우리 사회에서 약자의 생존은 배제된다. 오늘날 ‘안전사회’라는 신화는 사회가 약자의 생존에 대한 배려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될 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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