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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대의 정치선동



전 주 희 / 수유너머N



‘일코’라는 신조어가 있다. 어떤 연예인의 팬이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닌척 하는 ‘일반인 코스프레’의 준말이다. 연예인의 팬 뿐만 아니라 덕후들이 자신의 존재를 사회화시키고 싶지 않을 때 일코를 선택한다. 작년에는 심형탁이 무한도전에 나와 자신 도라에몽 덕후라는 것을 밝히기 전까지 그는 일코였다. 왜? 편하기 때문이다. 나이에 맞춰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애낳는 생애주기가 신념처럼 떠받들어지고 있는 사회에서, ‘그게 왜 좋아?’라는 성의없는 질문에 애써서 답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요즘 한창인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는 일코가 득실거린다. 바로 운동권 덕후들이 마치 일반인 마냥 촛불을 들며, 파도타기도 하고 이승환, 전인권의 노래에 촛불물결도 만든다. 물론 좋다. ‘깃발 대오’들은 얼마나 거리에서 대중들을 기다려왔던가. 때문에 깃발을 휘날리며 대중들과는 이물감을 형성하면서까지 오랜만에 조우한 대중들의 반감을 살필요는 없다. 그나마 이번 촛불집회는 ‘민주묘총’ 등의 패러디 깃발들이 함께 하면서 깃발을 드는 것 자체가 문제시되지는 않는 모양새다. 


2008년 한미 FTA 반대 촛불집회때는 깃발을 최대한 자제했다. 늘 갖춰입던 투쟁조끼도 벗고 ‘조용히’ 일반인 행세를 하며 촛불을 들었다. 2002년 미선-효순 사건 촛불집회 때는 ‘깃발’을 들고 나타난 노동자들에게 일반 촛불 시민들이 직접적인 반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니까 ‘촛불’과 ‘깃발’이 함께 뒤섞이는 데에는 갈등의 마주침들이 있었던 것이다. 


촛불과 깃발이 공존하는 시대에 ‘유인물’과 ‘촛불’은 함께 할 수 없는가? 한 손에는 촛불을, 한 손에는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단 8글자가 들어간 손피켓만으로 100만명이 넘게 참여하는 ‘민심’은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을지언정, 그러한 촛불들이 앞으로 보여주어야 할 “미래의 시대”를 선명하게 드러내주지는 않는다.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우리는 지금 역사의 영역으로부터 나와 현재의 영역,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미래의 영역을 지나가고 있다.”라고 현재를 규정한다. 

조선일보와 의회세력은 ‘질서 있는 퇴진’으로 결집하고 있고, 촛불정국을 정권 재창출을 위한 도구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그들은 ‘87년 6월’이라는 역사를 반복하고자 하며, 현재의 힘을 이용해 역사를 소환한다. 대중들의 숫자만큼 요구와 욕망은 다양하기 때문에 최소한 합의되는 수준에서 ‘현실적인’ ‘실현가능한’ 판단을 하자는 것이야말로 파탄난 민주주의를 복원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이와 함께 촛불은 통치질서의 한 부분이 되며, 정치의 정당성에 대한 물음 ‘이게 나라냐’는 ‘공화국’이라는 정통성의 복구로 변질된다. 



지난 11얼 26일 민중총궐기 사진. 경찰들이 차벽에 플랭카드를 걸었다. "평화로운 집회, 성숙한 시민의식, 여러분이 지켜주세요" 출처. : 페이스북


때문에 ‘최소합의’가 진정 다양한 대중들의 실질적인 요구의 수렴점인지, 그리고 미래를 성급하게 나타내는 우리의 새로운 삶의 형식들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실질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레닌은 그것을 “도시들 간의 진정한 접촉”을 위한 정치신문의 역할이라고 보았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긴급하게 필요한 것은 영역을 넓히고, 정기적, 공동적 작업의 기반 위에서 도시들 간의 진정한 접촉을 확립하는 것이다.”

-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페이스북으로 시시각각 사람들의 의견과 반응이 올라오는 상황에서, 종편이나 인터넷 뉴스 등에서 모든 정보들과 봉기의 이미지들이 종합되는 촛불시대에 ‘유인물’은 너무 낡았다고 생각하는가? 하지만 실시간으로 집회영상을 볼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광장으로 나오지 않았는가? 여전히 깃발이 올려지며, 구호를 외치지 않는가? 


‘퇴진’의 한 목소리는 현재의 다양한 영역들과 부분적으로 당도한 미래의 영역들로 분기해 나가기 위한 교차로일 뿐이다. 의회세력들은 지금 그 교차로를 관통해 자기들의 정치적 계획을-질서있는 퇴진이라는 정치적 계획에 맞추어 선전하고 선동하며 조직하고 있다. 

반면 우리 안에 존재하는 퇴진을 둘러싼 다양한 정치적 입장은 광장에서 아직 제대로 선동되고 있지 못하다. 우리 안에 존재하는 쟁점들을 선명하게 드러날 때 촛불은 분열되는 ‘민심’이 아니라 다양한 입장들을 지닌 정치적인 주체로서 피와 살을 갖추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단 하나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질서 있는 퇴진’은 혁명 속에 개입하는 반혁명의 실천이다. 레닌은 혁명을 “다소간 완전한 침묵의 시기와 급속히 교체되는 일련의 강력한 폭동들”이라고 정의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침묵의 시기에도 필요하고 강력한 폭동의 시기에도 필요한 본질적인 정치선동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삶의 모든 측면을 조명해주며, 가능한 한 광범위한 계층의 대중 사이에서 수행되는 정치선동의 작업”이어야 한다. 


벌써 오래된 이야기지만, 메이데이 집회 전에 개최되었던 청년학생 전야제와 노동자 대회 전야제 그리고 당일 대회들은 수십, 수백종의 유인물들이 넘쳐났다. 대회는 늘 무대위에서 문화공연과 투쟁발언들이 이뤄졌지만, 대회장 주변에는 밤새 인쇄기를 돌린 각종 투쟁 현안들, 노동운동 단체들이 내건 정치정세에 대한 입장들이 담긴 유인물들이 ‘거리의 연단’을 만들었다.

촛불집회에서 다양한 현실의 영역들과 미래의 영역들이 실질적인 접촉면을 만드는 것은 촛불의 숫자로만 우리의 ‘요구’가 표현되는 방식을 훨씬 뛰어넘을 것이다. 언제 꺼질지 모르는 촛불앞에 가장 두려운 것은 분열이지만, 곧 다가올 다소 침묵의 시기를 건너게 해주는 것은 무수하게 난립하는 유인물, 그 하찮은 것이 가져오는 정치적인 입장일 것이다. 


페미니즘 시국선언



이는 추상적인 정치적인 구호가 아니다. 그런면에서 이번 촛불집회에서 진행된 ‘페미니즘 시국선언’은 페미니스트들의 시국선언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현실의 다양한, 하지만 분산되어 전개되었던 요구들이 광장에서 실질적인 접촉면들을 형성하면서 새로운 운동으로 분기할 수 있는 조건은 광장의 한 가운데서, 봉기의 와중에 벌어진다. 

그래서 제안한다. 운동 덕후들은 더 이상 일코 하지말고 일코 해제하라! 지금의 정세에 개입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수많은 거리의 연단들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폭력-비폭력의 프레임이 깨질 수 있는 대중적 토양이 형성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토록 거리에서 기다리던 대중들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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