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내적과 내란
결정적인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는 엄청난 권한을 한 손에 집중하고 있다. 즉, 전쟁을 수행하고 또한 그것에 의해 공공연하게 인간의 생명을 좌지우지할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교전권은 이런 자유롭게 처리할 권능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국민에 대해서는 죽음의 각오를, 또한 살인의 각오를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적의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도살한다는, 이중적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상적인 국가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국가 및 그 영토의 내부에서,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며, ‘평정∙안전∙질서’를 확립하고, 그것에 의해 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며, 모든 규범이 정상적인 상태를 전제로 하며, 거꾸로 완전히 비정상적인 상태에는, 그 어떤 규범도 적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이 정상적인 상태는, 무릇 법규범이 타당할 수 있기 위한 전제인 것이다.
[*홍철기 : 척도가 되는 정치통일체로서의 국가는 엄청난 권한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그것은 전쟁 수행의 가능성이며 이 가능성으로써 인간 생명에 대한 자유로운 재량권을 갖게 된다. 전쟁의 권리는 그러한 권한을 포함하기 때문에 이는 이중의 가능성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자국민의 구성원에게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살해할 준비도 되어 있기를 요구하며 적의 편에 선 인간을 살해하는 가능성이 그것이다. 그러나 정상 국가의 과업(Leistung)이란 국가와 그 영토 내적으로는 완벽한 평화[울타리]를 가져오고 ‘평화, 안보, 질서’를 확립하며 그를 통해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데 있는데, 이 상태는 법규범이 정말로 효력[타당성]을 지닐 수 있기 위한 전제가 된다. 왜냐하면 모든 규범은 정상 상태를 전제로 하며 어떤 규범도 완전히 비정상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효력을 지닐 수 없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정치적 단위’인 ‘국가’는 ‘교전권’을 갖고 있기에 국내외의 많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고 있습니다만, 그 힘에 의해 자신의 ‘내부에서 innerhalb’ ‘정상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가 필요한 것은 ‘정상적인’이라는 말입니다. 원어는 <normal>입니다. 『정치신학』에서도 비슷한 말장난이 있었습니다만, ‘규범’을 뜻하는 명사의 형용사형입니다. 이 말의 연결에서 보면, ‘정상적인’이라는 것은 ‘규범적인’이라는 것입니다. 보통 생각하면, ‘정상/비정상 abnorm’이라는 것은 사실관계이며, 규범과는 차원이 다른 듯한 느낌이 듭니다만, 슈미트와 푸코는 [Norm-normal]의 말장난에 의해 ‘규범’과 ‘정상적인’(이라고 사회적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 사이에 불가분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적’을 분리하고, ‘친구’에게 있어서의 ‘정상적인 상태’를 만듭니다. ‘그 정상적인 상태’ 속에서 ‘규범’이 통용되는 셈입니다. 신칸트학파 등이 상정하고 있듯이, 선험적으로 통용되는 ‘규범’이 있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 단위’인 ‘국가’가 ‘규범’을 ‘규범’답게 하는, 좌표축으로서의 ‘정상성’을 창출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의 슈미트의 말투에서 알 수 있듯이, 그런 ‘규범=정상성’을 창출하는 것과 ‘친구/적’을 분리하는 것은 표리일체의 관계에 있습니다. ‘친구/적’을 분리한다는 것은 ‘규범’이 통용되고 ‘정상성’의 기준이 정하는 ‘내부’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국가 내부에서의 평화의 불가결성으로부터의 결론으로서, 위기적 상황을 맞아,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가 존속하는 한, 그것은 주체적으로 ‘내적’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그리스 공화국의 국법이 내적 선언으로서, 또한 모라의 국법이 내적 선언으로서 인정한 것이, 어떤 식으로, 모든 국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홍철기 : 이러한 국내적 평화의 필요성은 위기상황에서 국가가 정치통일체로서 존속하는 한에서 또한 스스로 ‘내부의 적’을 확정하도록 야기한다. 모든 국가에는 따라서 그리스 공화정 국법은 폴레미오스-선포라 하고 로마 국법에서는 호스티스-선포라고 할 수 있는 것이 그 어떤 형태로든 존재한다.]
‘결정적인 정치단위’인 ‘국가’는 ‘교전권’을 갖고 있기에, 내외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규범=정상성’을 창출하는 것과 ‘친구/적’을 분리하는 것은 표리일체의 관계 ⇓ ‘친구/적’을 분리하는 것은 ‘규범’이 통용되고 ‘정상성’의 기준이 정하는 ‘내부’ 공간을 만들어내는 것 |
‘내적’이란 국내에서의 ‘적’을 가리킵니다. ‘내적’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만, 원어의 그리스어는 <polemios>, 로마어는 <hostis>로, 지난번에 읽은 대목에서는 모두 ‘공적’으로 번역된 말입니다. 내용을 생각해서, 번역어를 결정한 것이죠. 국가의 외부에 있는 적의 경우, ‘공적’이라는 것이 알기 쉽습니다만, 이 경우는 국가의 주권을 쥐고 있는 권력이, 이 놈이 바로 국내에 숨어 있는 ‘적’이라고 공적으로 선언하는 셈입니다. 참고로, ‘그리스 공화국’이라고 나오고 있고, 한 순간 현대 공화국처럼 들립니다만, 고대 폴리스를 가리킵니다. 원어로는 <Republiken>이라는 복수형이며, 50頁부터 51頁에 걸친 글자가 작아지는 주 같은 대목에서도,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얘기를 쓰고 있기에, 고대 폴리스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참고로 그리스는 1830년에 왕국으로서 독립하고, 1924년에 한 번 공화제가 되며, 35년에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기에, 슈미트가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쓰던 무렵에는 그리스 공화국이 현실에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헷갈리네요.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그리스 공화국들의 국법’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내적 선언은 국가의 적으로 선고된 상대방이 하기 나름에 따라, 내란의 조짐 … 이 된다. 이어서, 내란에 의해 이 단위의 장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것은 입헌적 부르주아 법치국가에 있어서, 헌법에 의한 국가의 제약들에도 불구하고, 모든 다른 국가들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아니 오히려 그것 이상으로, 당연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로렌츠 폰 슈타인이 말하듯이, ‘입헌국가’에 있어서는 헌법이 ‘사회적 질서의 표현이며, 공민적 사회의 존재 자체이기 때문에, 그래서 헌법이 침해될 경우, 싸움은 헌법과 법들의 외곽에서, 즉 무기의 폭력으로, 마무리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홍철기 : 이는 국가의 적으로 선포된 자들의 행동에 따라서 내전의 징후, 즉 그 내부에 평화가 달성되고 영토적으로는 배타적이며 이방인이 침투하기 어려운, 조직화된 정치통일체로서의 국가해체의 징후가 된다. 그 경우에 내전에 의해 이 정치통일체의 미래의 운명이 결정될 것이다. 이는 입헌적인 부르주아[시민적] 법치국가에 있어서 모든 헌법조항 상의 국가에 대한 기속에도 불구하고 모든 다른 국가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혹은 오히려 훨씬 더 자명한 타당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헌법국가[입헌국가]’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Lorenz von Stein)이 말한바 헌법이란 ‘사회질서의 표현이자 공민사회(staatsbürgerliche Gesellschaft)의 실존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헌법이 침해받는 경우에 싸움은 헌법과 법의 외부에서, 따라서 무기의 폭력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슈타인은 지난번에도 이름이 나온 독일어권의 헌법학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 선언을 하고, ‘내란’으로 매듭짓는 것이 ‘정치적 단위’로서의 국가의 일체성을 유지하는 데에도 불가결해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상대방이 하기 나름에 따라, 국가가 붕괴될 위험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무기나 전쟁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입헌적 부르주아 법치국가 ein konstitutioneller bürgerlicher Rechtsstaat’에서조차도, 아니 오히려 이런 국가야말로 ‘헌법=국가 체제 Verfassung’를 지키기 위해서는 헌법을 필두로 하는 법들의 제약을 넘어선 곳에서 무력을 행사하는 ‘결단’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는 겁니다. 이는 슈미트가 독재나 「라이히 대통령의 독재」에서 주장한 것입니다.
51頁의 끝을 보세요.
… 교전권 내지 내전 선언의 권능은 정치적 단위가 정치적 단위로서 존재하는 한, [다른 단체에] 귀속되는 일은 없다.
[*홍철기 : … 정치통일체 자체가 존재하는 한에서 전쟁의 권리, 혹은 호스티스-선포의 권리는 그런 권한일 수 없다.]
자신의 ‘체제’를 지킬 수 있도록 안과 밖에 대해, ‘(공)적’이 누구인지 선언할 권한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 ‘정치적 단위’가 정치적 ‘단일체’로서 존속하기 위한 요건이며, 그것은 가족이나 씨족 등 다른 단위에 위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양하면, 그 시점에서 ‘정치적 단위’가 아니게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정치적 단위’는 아니더라도, 자신의 구성원에게 목숨을 건 싸움을 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단체도 있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만, 그 점에 대한 대답을 52頁에서 볼 수 있습니다.
종교적 공동체라고 하면 교회는 그 구성원에게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을 것을, 또 순교적 죽음을 참아낼 것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구성원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인 것이지, 현세에 있는 권력기구로서의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정치적 단위가 된다. 그 성전이나 십자군이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결정에 기초한 행동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
[*홍철기 : 종교공동체, 즉 교회는 그 구성원에게 자신의 신앙을 위해 죽는다는 순교자의 죽음을 감수할 것을 요구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그의 영혼의 구제를 위한 것이지 교회공동체가 현세에 존재하는 권력집단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게 될 경우 교회공동체는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며 교회의 성전(聖戰)과 십자군은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적을 확정하는 결정에 근거를 두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는 기독교적 순교가 화제네요.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교회가 신도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일은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당신 자신의 혼을 위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공적’과 싸우라고 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공동체’의 방어를 위해 싸우라고 명한다면, 이름은 교회라고 해도, 실체는 ‘정치적 단위’가 된다. 교전권과 내적 선언권을 가진 시점에서, 교회는 ‘정치적 단위’가 되지요. 성전과 십자군 파견을 결정할 때의 ‘교회’는 ‘정치적 단위’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이렇다면, 보통은 종교단체로서 기능하는 것이 때로는 ‘정치적 단위’가 된다는 것이기에, 조금은 편의주의적인 설명 같다는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 “경제적으로 규정되는 이익 사회 eine ökonomisch bestimmte Gesellschaft”에는 그 구성원더러, 사회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라고 명할 수는 없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이런 것을 확인함으로써 슈미트는 그 ‘단위’의 존속 자체를 위해, 구성원에게 목숨을 건 싸움을 명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단위’뿐이라고 시사하는 것입니다.
정전론(正戦論)
55頁에 정전론 얘기가 나옵니다. 정전론은 슈미트가 1930년대 후반 이후, 대지의 노모스등에서 중심적으로 파고드는 테마입니다.
참고로 ‘정전’론은 근래에는 9∙11 이후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화제가 됐습니다. 공동체주의 철학자 마이클 왈쩌(1935-)가 정전론의 관점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의를 전개했습니다. 왈쩌는 그동안 사회민주주의자, 공동체주의적 좌파로 생각됐기에, 그의 전쟁 지지를 배신이라고 받아들인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논의의 문맥에서, 왈쩌가 1977년에 낸 정의로운 전쟁과 부정의한 전쟁이 다시 화제가 됐습니다. 이 책은 게이오대학의 하기와라 요시히사(萩原能久, 1956-) 씨 등의 번역으로, 風行社로부터 간행됐습니다. 다만, 왈쩌는 부시정권의 대외정책을 전면적으로 지지했던 것이 아니며, 이라크 전쟁에는 반대했습니다.
정의가 전쟁의 개념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은 그로티우스 이후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 정전을 요구하는 [논리]구조는 그 자체가 평소 정치적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통합된 국민에게 공정한 이유에 기초해서만 전쟁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결국 이것이 그저 현실의 적에 대해서만 전쟁을 하라는 의미라면, 전혀 자명한 것이 아니며, 그렇지 않다면 그 배후에는 교전권의 행사를 타자의 손에 맡기는, 정의의 규범을 발견하고, 그 내용이나 적용은 개별 사례에 있어서, 국가 자신이 아니라 어떤 제3자가 결정하는, 즉 제3자가 적을 정하도록 한다는 정치적 요구가 숨어 있는 것이다.
[*홍철기 : 전쟁개념에 정의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그로티우스(Grotius) 이래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바이다. 정의로운 전쟁을 요구하는 이론은 보통 그 자체로 다시 어떤 정치적 목적에 대해 봉사한다. 정치적으로 통일된 국민에게 단지 정의로운 근거에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이 국민이 단지 현실의 적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해야만 한다면 완전히 자명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그것은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정치적 노력을 감추고 있다. 그 노력이란 전쟁의 권리에 대한 재량권을 타국의 손에 쥐어주면서 정의로운 규범을 발견하기 위한 것인데, 그 내용과 적용에 대해서는 개개의 경우에 국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다른 제3자가 결정하며, 그 제3자는 그러한 방식으로 누가 적인지 확정한다.]
‘정의’가 ‘전쟁’과 원래 양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현대의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당연한 얘기 같습니다만, 서방 국가들에는 ‘정전’이라는 개념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세요. 그래서 [일본어의 경우에는] ‘성전’과 발음이 같으니까 혼동하지 마세요. ‘성전’은 적어도 겉으로는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행해지는 전쟁이고, ‘정전’은 국가 간의 전쟁입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슈미트의 논의에 따르면, ‘성전’을 행하는 주체로서의 종교는 ‘정치적 단위’가 되는 거니까 약간 복잡해집니다만.
‘정전’은 영어로는 <just war>, 독일어로는 <der gerechte Krieg>입니다. <just>나 <gerecht>는 ‘정의에 적합하다[정의롭다]’는 것입니다. ‘정전’은 ‘정의에 적합한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로티우스 등의 입장에서 보면, ‘정전’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어법일 뿐입니다만, 슈미트에게 이 개념은 결코 무의미한 게 아닙니다.
그러면 전쟁이 ‘정의에 적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세 번째 문장에 나오는 “공정한 이유 an gerechter Grund”가 관건입니다. 여기서도 <gerecht>라는 형용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공정한(정의로운) 이유’에 기초하여 수행되는 전쟁이 ‘정전’이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있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동어반복 같지만, 슈미트는 이것을 ‘현실의 적(ein wirklicher Feind)에 대해서만 전쟁을 한다’라는 의미로 취합니다. 즉,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적»으로 보고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친구들로 구성된 ‘정치적 단위’가 존속되기 위해, 현실에서 ‘친구’를 위협하고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정의로운 이유’에 근거한 ‘정전’이라는 것입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자위를 위해 싸우는, 자위권을 근거 삼아 싸우는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슈미트 자신이 말하듯이, 어떤 의미에서는 자명한 이치네요. ― 일본국 헌법 9조의 해석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자명한 이치가 아닙니다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좀 까다롭지만, 요점은 한쪽 당사자가 자기 마음대로 ‘정의로운[올바른] 전쟁’이라고 단언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규칙을 따라 누군가 제3자에게 ‘이 경우에는 전쟁을 해도 좋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교전권을 행사해도 좋다고 정해주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엔 같은 기관을 상정하면 좋을 겁니다.
슈미트는 거기에 ‘정치적 요구 das politische Bestreben’ ― <Bestreben>은 ‘의도’나 ‘기획’이라는 뜻입니다 ― 가 숨어 있다고 말하는 것인데요, 이것이 어떤 것인지 감이 오지 않네요. 조금 뒤에 나옵니다만, 슈미트가 유엔이나 베르사유 체제에 반발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슈미트는 개별 국가로부터 ‘교전권’을 빼앗는 국제체제가 만들어지고 있다고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획’ 자체는 개별 국가로부터 교전권을 빼앗고, 자신이 그것을 사실상 독점하려고 하는 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교전권’을 빼앗긴 국가는 ‘정치적 단위’가 아니게 됩니다.
정전 | <just war>(영어) |
<der gerechte Krieg>(독일어) | |
‘공정한 이유 ein gerechter Grund’가 열쇠 누구인지 가리지 않고 «적»으로 보고,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친구들로 구성된 ‘정치적 단위’가 존속하기 위해, 현실에서 ‘친구’를 위협하고 있는 ‘적’과 싸우는 것이 ‘정전’. ‘정의로운[올바른] 이유’에 근거하여 자위를 위해 싸우는, 자위권을 근거로서 싸우는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 ⇓ 그렇지 않은 경우 한쪽 당사자가 자기 마음대로 ‘정의로운[올바른] 전쟁’이라고 단언하는 게 아니라, 미리 정해진 규칙을 따라, 누군가 제3자에게 ‘이 경우에는 전쟁을 해도 좋은 정당한 이유가 있다’, 교전권을 행사해도 좋다고 정해준다 그러나 ‘정치적 요구 das politische Bestreben’가 숨어 있다 |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한에서, 가장 단적인 사례에 관해서일 뿐이지만 ― 더욱이 실제로 이 사례인지 여부는, 국민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지만 ― 친구∙적의 구별을 국민 자신이 정해야 한다. 이 점에서, 국민이, 정치적인 것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본질이 있다. 이 구별을 할 능력 또는 의지가 결여되어 있을 때, 국민은 정치적인 존재이기를 그치게 된다. 자신의 적이 누구인지, 누구에 대해 자신은 싸워야 할지에 대해, 만약 타자의 지시를 받는다고 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국민이 아니라 다른 정치체제에 편입되고 종속되고 있는 것이다.
[*홍철기 : 어떤 국민이 정치적인 것의 영역에서 실존하는 한에서 그 국민은 또한 단지 극단적인 경우―그러한 경우의 존재 여부 자체에 대해서도 그 국민은 스스로 결정해야 되는데―가 존재할 때, 친구와 적을 스스로 구분해야만 한다. 여기에 그 국민의 정치적 실존의 본질이 존재한다. 이 국민이 더 이상 이러한 구분에 대한 능력이나 의지를 갖지 않는다면 그 국민은 정치적으로 실존하기를 중단할 것이다. 이 국민이 누가 자신의 적인지, 그리고 누구에 맞서 싸워야 하고 누구와 싸우지 말아야하는지를 타국에 의해 지시를 받는다면 그 국민은 더 이상 정치적으로 자유로운 국민이 아니며 다른 정치체계에 편입되거나 종속되는 것이다.]
‘국민’으로 번역되어 있지만 원어는 <Volk>입니다. <Nation>와 혼동하지 않도록 ‘인민’이라고 번역하는 편이 좋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민’이 자립적인 ‘정치적 단위’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조건은 ‘친구/적’의 구별을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것을 누군가에게 물려준다면, 물려주는[양보하는] 명목이 뭐가 됐든, 이미 ‘인민’으로서의 요건을 잃고 있으며, 다른 정치적 단위에 편입되거나 아니면 복종하고 있는(ein-oder untergeordnet) 비정치적 집단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슈미트에게 ‘친구/적’ 구별은 ‘인민’의 독립이라는 조건이기도 합니다.
전쟁이라는 것의 의의는, 그것이 이상이나 법적 규범을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의 적에 대해 이뤄진다는 점에 있다. 친구∙적이라는 이 범주의 불명확화는 모두 어떤 추상화라든가 규범이라든가의 혼합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홍철기 : 전쟁의 의미는 이상이나 법규범을 위해 수행되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의 적에 맞서 수행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친구와 적의 이러한 범주 사이의 모든 불명확함은 그 어떤 추상화나 규범과의 혼동으로부터 설명된다.]
‘친구/적’ 구별은 이상이나 규범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라는 거네요. 감이 오지 않지만, 우선 이상과 규범에 근거한 ‘친구/적’ 관계의 알기 쉬운 패턴에 관해 생각해 봅시다. “정전의 아군 vs 악당”이라는 도식이 가장 전형적이죠. ― ‘아군’을 영어로 표현하면 <friend>가 됩니다. 이 경우 ‘정의’의 편인 ‘친구’가 ‘악’인 ‘적’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게 됩니다. 반면 슈미트는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자신들=친구에게 현실에서 위협이 되기 때문에 ‘적’이라고 구별하게 되는 것이 ‘정치적’인 ‘친구/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이나 규범을 들여오면, 그것이 애매해져버린다는 것이 슈미트의 입장입니다.
56頁부터 57頁까지는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민이 현실의 위협에 직면해서 ‘친구/적’을 구별하는 것은 불가피하기에, 국제분쟁의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을 단죄하고 국제적 정책의 도구로서의 전쟁을 포기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선언하는 켈로그조약이 이상하다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네요. 주 (17)에서 ‘단죄하다’에 상당하는 표현으로, 영어의 조문에서는 <condemn>, 프랑스어에서는 <condamner>, 독일어로는 <verurteilen>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고 지적되고 있습니다. <condemn>과 <condamner>는 ‘유죄 판결을 내리다’는 의미도 있습니다만, 단순히 ‘비난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verurteilen>은 단어 속에 ‘판결=판단’을 의미하는 <Urteil>이라는 철자가 들어 있기도 해서, 대부분의 경우 유죄판결이라는 강한 의미가 포함됩니다. 슈미트는 의도적으로 그런 단어 선택이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그런 후에 영국과 프랑스를 위한 유보조건(Vorbehlt)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켈로그조약이 중립적인 게 아니라 제1차대전의 전승국의 ‘정치적’인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고 있는 것입니다.
슈미트가 보기에, 켈로그조약의 “전쟁 추방 Ächtung des Kriegs”은 그 의향과는 반대로 전쟁을 하는 나라에 대한 국제적인 “적 선언 hostis-Erklärung”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Ächtung>이라는 독일어는 기독교용어로서는 ‘파문’을 의미합니다. 혹시 모르니까 말해두면, <Ächtung>는 독일에서의 통칭적인 말투이며, 조약의 본문에 이에 해당되는 표현이 직접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 테면, 켈로그(1856-1937)는 프랑스 외교부장관 브리앙(1862-1932)과 공동으로 조약을 작성하고 조인한 법률가 출신의 미국 국무부 장관입니다. 두 명의 이름을 담아 켈로그-브리앙 조약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본에서는 ‘부전조약(不戦条約)’이라 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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