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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문명과 야만 사이


시작하며

 

문명화란 것이 야만의 정복과 서구문명의 이식과정에 다름이 아님은 주지의 사실이다. 또한 지난 500여 년 간의 세계의 문명화와 서구 지배의 역사의 배경에는 이성과 합리주의라는 사상의 흐름이 뚜렷이 새겨져있다는 것도 이젠 상식이 되었다.

 

인간의 보편적 특성과 능력의 총체를 문화라고 하고, 그 문화의 능력으로 산출된 모든 유산을 문명이라고 하는 하나의 정의(定義)가 있다. 이 정의를 따르자면 근대이후의 전 세계적 문명화과정과 그 산물은 서구인의 특성과 능력으로 만들어진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근대 서구의 역사는 이성과 합리주의를 바탕으로 계몽주의와 진화론을 양식으로 삼아 야만의 타자들을 정복해온 역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서구가 아닌 세계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점철된 역사이며, 그 기조는 지금까지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서구가 주도한 문명화과정을 통해 비서구인들도 이 과정을 보편적인 인류의 발전과정으로 당연하게 인식하고, 서구인과 동일시된 시각에서 자신의 문화와 전통을 야만적이고 신비한 것으로 바라보는 오리엔탈리즘에 빠지게 되는 강력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볼 때 비서구의 우리들은 근대문명이라는 것이 특수성의 보편성이라는 환상이 아닌지, 문명과 야만의 관계라는 것이 서구인의 잣대로 잰 자의적인 평가가 아닌지를 한번 사유해 볼 필요가 있다.

 

본래 야만이라는 뜻의 세비지(savage)라는 말은 삼림 또는 숲이라는 뜻의 라틴어인 실바(silva)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로마의 지방 행정구역 명칭이자 도시에서 사는 시민이라는 뜻의 키비타스(civitas)가 곧 문명(civilization)이라는 말의 기원이 된 것처럼 세비지는 무식한 농촌 사람들, 이성과 합리성을 결여한 천하고 불결한 부족민들을 일컫는 말로 전용(轉用)되었다. 이 의미는 또 다시 확대되어 서구인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이질적인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렇게 서구의 문명과 문화와 비서구의 원시와 야만이라는 대립적 개념이 성립되어, 야만적 세계에 대한 착취와 정복이 정당화되었다. 서구는 야만을 최초로 벗어난 문명의 상징이 되었고, 비서구는 서구 문명의 빛이 도래하길 갈망하는 어둠이 되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있다. 근대의 문명은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넓혀나갔지만 자신 안의 어두운 그림자를 완전히 지울 순 없었다. “문명의 야만성은 그것이 문명 자체에 내재된 가능성임을 간파할 때만 그 완전한 의미가 드러난다.”고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에서 말한다. “공포와 일상, 파괴와 건설은 문명에서 상보적인 것이다.” 문명의 유지는 엄청난 억압과 스트레스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진보는 언제나 퇴행을 포함한다. 어쩌면 문명이란 환상이고 야만이 현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문명이란 환상이 없이는 우리는 일상을 잠시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문명의 진보는 합리화의 과정이자 죄의식의 내면화 과정”이라고 마르쿠제는 말한다. 여기서의 죄의식이란 비합리성의 다른 이름인 야만성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인은 문명과 야만 사이에서 흔들리는 시계추와 같은 존재이다. 상반되는 두 극 사이를 왕복하는 불안한 존재의 운동, 그것이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현대 문명의 갖가지 폐해와 병적 징후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이성과 그 억압적 이성에 의해 짓눌린 본능의 끊임없는 회귀 사이에 던져져 있는 현대인의 초라한 모습을 냉철하고 용기 있게 주시해야 한다.

 

우리는 성본능과 파괴본능이라는 야만적인 일차적 본능들의 충족을 끊임없이 연기(延期)하고 억압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억압의 도가 지나칠 때, 우리는 이성을 잃고 광기에 빠진다. 이성이라는 틀을 벗어나서 야만이라는 다른 극단으로 튕겨져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예외로 둔다면, 우리의 대다수는 문명을 완전히 떠날 수도, 야만성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도 없다. 야만은 정복되지 않는다. 우리의 내면에는 문명과 야만이 공존한다. 그 공존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파멸과 죽음만이 기다릴 것이다. 서구의 수많은 축제도 그 공존의 균형을 위한 문명의 고육책, 즉 야만성의 정기적인 배출구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문명 안에서 본능의 자유로운 해방은 문명의 반대극인 야만으로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 문명인(?)은 야만을 견딜 수 없다. 문명의 붕괴를 원치는 않기 때문이다. 마르쿠제는 야만의 승화로서 예술이 있고 놀이로서의 일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 이전, 문명 이전의 과거가 아닌 성숙한 문명이라는 미래 안에서 문명의 병을 치유할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마르쿠제에 따르면, 에로스의 해방을 프리섹스의 수용과 성도착에 대한 관용으로 여기는 자들은 그것을 방종과 타락의 지표로 삼아 반대하는 자들과 마찬가지로 문명화된 에로스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일부일처제와 성기중심주의에 매몰되어 있으면 그것에 대한 반대 또한 에로스로부터 그 이상을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때 에로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생식을 위한 성욕으로부터 모든 성감대에서 쾌락과 기쁨을 얻는 에로스로의 개안(開眼)이 필요하다. “에로스는 성욕의 질적·양적 확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몸 전체가 성욕의 바탕이 된다. 본능의 목적은 특수화된 기능, 즉 성교기능에서 벗어나 유기체 자체의 생명이 된다. 이를 마르쿠제는 성욕의 개념이 에로스로 변형된 것이라고 말한다. “에로스의 본성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충동의 확장이 신체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을 정당화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체는 “성기 우위에 억제된 성욕을 개성 전체의 에로스화로 변형하는 것이다. 그것은 리비도의 폭발이 아니라 리비도의 확장이다. 억압된 현실원칙에 의해 생긴 개인과 사회의 간격에 다리를 놓음으로써 리비도는 개인적인 동시에 사회적인 관계로 확장되는 것이다.” [마르쿠제, 김인환 역, <에로스와 문명>, 237-8]

 

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타이유를 불러낸다. 밝혀지지 않은 바타이유의 에로티즘을 마르쿠제의 에로스와 함께 조명해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을 금기와 위반을 축으로 이론화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자면 금기는 인간의 삶을 구속하는 반면 인간을 동물성이라는 야만으로부터 떼어놓는 문명의 본질이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감출 수 없는 야만성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이성의 지배에 무한정 복종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이성의 세계를 건설하지만. 인간의 내부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폭력이 도사리고 앉아 있다. 본래부터 난폭한 것이 자연이 아니던가! 우리는 아무리 합리적이려고 해도, 폭력은 다시 머리를 쳐들곤 한다. 이성을 갖춘 인간은 이성에 복종하려고 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충동에 복종하고 만다.” [바타이유, 조한경 역, <에로티즘>, 42]

 

우리는 문명이 요구하는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문명의 억압과 불안을 이 왜소한 육체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순간 우리에게는 에로티즘이 찾아온다. 에로티즘은 인간의 본질이며, 문명의 본질이다. 에로티즘은 질서의 전복이자 과잉된 축적의 소모이다. 우리는 에로티즘을 통해 존재의 근본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바타이유를 소환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야만이라는 ‘출입금지구역’이 문명의 필수품으로 우리의 일상의 바다에 섬처럼 흩어져 있다. 때로는 공간적으로, 때로는 시간적으로, 우리의 위반을 기다리며. 우리는 그 섬에 가고 싶다. 바타이유와 함께 그 섬으로 가는 여정을 관심 있게 지켜봐주길 바라며 닻을 올린다.

 


글/ 조성천(노마디스트 수유너머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