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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가게모토 츠요시]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농農'의 사상의 투쟁



민주주의와 어긋나는 ''의 사상의 투쟁


후쿠다 가츠히코 <산리즈카 암흙> 읽는다


 


(원서 서지 정보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 4850)

 




가게모토 츠요시/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산리즈카 투쟁, 그리고 농업

 

도쿄 지방의 공항으로 알려진 나리타공항은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커다란 공항이 건설되기까지 현지 농민들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는 것도 일본의 운동사를 조금이라도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몇 년 전에는 오제 아키라의 기념비적인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가 한국어로 번역 소개 되는 획기적인 일이 있었다. 이 만화를 보면 그것이 어떤 투쟁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만화에서도 투쟁에 나선 농민들의 '보수'성은 그려졌다. 농민들이 일본 패전 후 중국 동북지방에서 일본으로 돌아온 소위 '전후 개척자'였다는 점에 대해서도 만화에서 그려졌으며, 그러한 것이 가능했던 이유가 나리타공항이 있던 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 그리고 농민들이 천황에 친화적이었다는 것 등도 이미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 그려진 바 있다.


사실 <우리 마을 이야기>는 일본 학생운동 가운데에서 ''을 지향하지 않는 집단에서 필독서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본공산당을 비롯한 각 당파에 대한 비판이 담겨져 있으며, 따라서 ''을 지향하는 운동에서는 거의 읽힌 바 없는 만화이기도 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마을 이야기>의 독자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자리는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의 다양한 운동 속에서도 매우 특이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만화는 일반잡지에 실린 것이며, 정치적인 의도가 있는 만화가 아니다.


나리타공항 반대 투쟁은 공항의 당시 지명을 가지고 와서 '산리즈카 투쟁'이라고 불린다. 거기에서의 다양한 운동의 움직임, 인간생명의 희생, 운동하는 사람들의 싸움 등에 대해서는 많은 책이 발행되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경제학자 우자와 히로후미 같은 사람도 이 운동과 행정 사이의 갈등 해결에 간여했으며, <나리타란 무엇인가>(이와나미 서점)라는 책을 썼다. 혹은 최근 잇따라 DVD화되어 있는 오가와 신스케 감독의 다큐 영화 가운데 하나인 <산리즈카의 여름>DVD로 발행되어 비교적 쉽게 관련 영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다큐 영화는 촬영중의 카메라맨이 중간에서 체포당하는 등(그래서 화면이 흔들린다), 상당히 생생한 작품이다. 이러한 것들을 보면 어느 정도 산리즈카 투쟁에 대해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하고자 하는 책 <산리즈카 암흙>은 산리즈카에서 과연 어떠한 농업이 시도되었는지, 산리즈카의 ''이라는 관점에서 투쟁에 접근하고자 하는 사상서이자 역사서이다. 심각한 부딪침 이후 많은 사람들이 현장을 떠났으나 현지에 남아 농업을 시도한 사람도 있었다. 원래 있던 농민들과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무엇을 했는지, 거기에서 어떠한 '농업'을 체득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다시 발현시켰는지, 그러한 물음을 통해 일본이라는 것을 근본으로부터 다시 생각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저자인 후쿠다 가츠히코는 책을 완성시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43년 생이며 1998년에 죽었다. 이 책에 실린 저자연보는 '낙서 연보'라고 되어 있으며, 그를 아는 주변 사람들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후쿠다는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후 취직을 했다가 바로 그만두고 다큐 영화 집단인 오가와 신스케 프로덕션에 들어갔다. 그는 산리즈카의 다큐 영화 촬영에 계속 참여했다. 한때는 산리즈카를 떠났지만 기본적으로 산리즈카에서 살았다. 70년대 이후의 산리즈카의 운동에 계속 관여한 것이다. 90년대 들어 산리즈카에 대한 글쓰기를 시작했으며, 결국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야 했다. 남겨진 것이 이 책이다.


그리고 하나 추가해서 말해야 하는 것은 이 나리타공항이 있는 지역, 즉 산리즈카 투쟁 이후에 새로운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농사 현장을 20113.12의 원전 폭발은 오염지역으로 만들었다(자연재해가 아니라 동경전력이 만든 재해라는 것을 명시하기 위해 감히 지진과 쓰나미의 '3.11'이 아니라 원전이 폭발한 날인 '3.12'라는 용어를 쓰겠다). 이렇게 사상과 농업을 열어나간 사람들의 길고 긴 생활과 타 지역과의 연대운동을 원전은 순간적인 폭발로 파괴했다.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잘 조사하지 못해서 자세히 쓰기 어렵다(듣고 알게 된 정보는 있는데 그것을 여기에 밝히기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 책을 중심으로 소개하며, 3.12 이후 사정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을 것이다.

 


福田克彦『三里塚アンドソイル』 平原社, 2001, 622쪽.


2. 보수성에 대하여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 마지막의 백성 봉기였다. 게다가 화산회토(火山灰土)의 백성 봉기였다. 지금 시작하려는 여행은 (중략) 누구나 기술이나 진보에 의문을 던지지 않았던 시대에서 오로지 생활의 보수를 내걸은 산리즈카 투쟁의 의미를 찿는 여행이다. 말하자면 '보수 심층으로의 여행"(14)이다. "산리즈카를 응원한 사람들은 싫어하겠지만 감히 말하자면 산리즈카는 일관해서 보수의 사상이라고 해도 좋다. 다소 변명하자면 보수 반동이 아니라 보수 본류이다."(436)


이 책의 저자 후쿠다는 일본이 세계 최초로 굶주림을 극복한 나라라고 말한다(21). 그런데 그 대가는 '고도경제성장'이었다. '성장' 속에서 계획된 것이 신 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공항) 건설이었다. 일본정부는 현지 농민들에게 '대체지'를 보장한다고 했는데, 이 토지에 관한 생각은 오로지 면적으로서의 토지이며, 농민들이 감각하고 있는 ''은 아니었다. 따라서 투쟁 초기에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농지 사수", "마을을 지키라"라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호소였다. 이 슬로건에 '군사공항반대', '미일안보조약 반대'를 추가한 것은 외부에서 온 사회당이나 공산당, 그리고 신좌파의 각 당들이었다. 외부 정치 세력과 일본국가는 '진보'라는 점에서는 공통되어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농민들이 호소한 것은 진보적인 정치조직이나 당이 내세운 것도 아니며, 일본행정이 내세운 것도 아닌 '보수'인 것이다(25).


그런데 농민들은 어떻게 이 토지에 오게 되었는가. 이곳이 원래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은 만화 <우리 마을 이야기>에서도 그려진 바 있다. 이 땅이 1945년의 일본 패전과 식량위기로 인해 농지로 개방되었다. 공식적으로 허락되기 전부터 농민들은 그곳에 들어갔다. 물론 그 때 일본은 미국 점령하에 있었다. 그 가운데 새로 들어온 사람들 중에는 '전후 개척'이라고 해서 중국동북부 등 일본 밖에서 패전으로 인해 돌아온 농민들이 다수 있었다. 특히 산리즈카 투쟁에서 잘 알려지게 된 촌락들은 새롭게 들어온 그러한 농민들의 촌락이었다. 물론 원래 있던 농민들과 전후개척으로 들어온 농민들의 싸움도 있었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은 그러한  가지 성격을 가지는 마을을 함께 싸우게 만들었다. 농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천황가의 토지였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투쟁 초기인 68418, '노인 행동대'118명으로 천황에게 청원하러 가기도 했다(47). 농민들의 싸움의 논리는 '우리는 천황을 대신해서 지금 정치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농민들은 중국의 모택동을 영웅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이는 확실한 모순으로 들리지만 그 농민들의 마음으로 보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산리즈카는 본래 천황제 농본주의의 풍부한 토양이었다'는 것은 이 투쟁에 대해서 단순한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든다. 즉 공항은 천황의 목장을 대체할 수 있는가 하는 과제를 농민들은 일본국가에 대해 던진 것이다.(52)


"<>이라는 말을 발견하여 그것에 독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투쟁의 키워드로까지 결정시킨 것은 산리즈카가 처음일 것이다."(157) 그러면 산리즈카의 흙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이 책 제목 자체가 '암흙'이다. 이 흙의 문제는 이 책이 투쟁을 바라볼 방법이다. 이 지역이 화산회로 만들어진 지역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농업용지가 아니라 천황가의 목장이었다. 이 땅이 좋은 흙으로 개조된 것은 농민들의 끊임없는 토양개량 덕분이었다. 이 토양개량 과정에서 화학비료도 많이 쓰였다. 바꾸어 말하면 개척자들의 분투한 것은 이 좋지 않은 화산회와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산리즈카가 좋은 농지가 될 수 있던 것은 끊임없이 인간들이 고투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화학비료의 대량공급이 가능해진 일본 전후 경제 성장이었다. 개척농민의 생활은 산리즈카의 풍경에 남아 있다. 바람을 막는 방풍림, 이는 개척농가가 외부 사람을 막아내는 거절처럼 기능한다(62). 이러한 의미로 전후 개척은 '마을'공동체가 되기 전에 파괴된 것이다. 농민들의 집이 파괴된 후 전신주 말고는 아무것도 없어진 마을은 "마치 개척의 최초로 돌아간 것 같"은 풍경이 되었다(146).


저자는 개척자들의 '인간불신'을 읽어내었는데, 그 정신이 좋지 않은 토지를 좋은 토지로 만든 정신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잘 보여준 말이 농민들이 말하는 "흙이 도망간다"는 말이다(67). 항상 풀을 뽑고 흙을 붙잡아야 한다. 그런데 공항 계획은 바로 이러한 개척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농민들의 개척은 과정에 있으며 끝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국가는 빼앗으려 했다. 그들에게 채소란 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밭에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등의 종류가 아니라 자연을 개조하는 것이 그들의 의식이다.


공항 계획 이후 반대파이던 농민들이 조건파로 '전향'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나타난다. 이때 가상적으로 '자족'이나 '마을'의식이 만들어진다. 이는 바뀌어 가는 농민들의 정신적인 지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농민들의 분열상황을 일상생활에서 떠맡아야 했던 것은 여성들이었다(100). 그러면서도 농민들이 인간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방법은 '사상'이나 '믿음'에 두지 않다는 것은 외부자로서의 저자에게 놀라운 부분이다


"서로 100%가 아니라 서로 결락한 부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서로 결락하기 때문에, 서로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관계를 계속하자는 마음이 남는 것이다"(116). 이 말은 공동성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라는 우리가 항상 가지는 과제와 연결된다. 이러한 마을의 사상을 어떻게 육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투쟁 과정에서 다시 옛 마을 전통에서 호출된 것이었다. 이러한 마을의 논리에서 움직이던 청년행동대는 국가에 대항하는 것을 상식으로 인식했다.


동시에 투쟁은 여성의 생활을 바꾸었다. 아무 권리가 허용되지 못했던 여성들에게 발언권이 부여되었다. 전투경찰(기동대)과 싸우는 과정은 젊은 남성과 싸운다는 의미를 가졌다. 어떤 의미에서 '외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말들이 그들에게서 많이 나온 것이다. 이는 동시대 페미니즘 운동과 아무 연결점이 없으면서도 관련된 것이었다.


산리즈카 투쟁에 많은 좌파 활동가들이 관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이 농민운동의 색채를 강하게 띠게 되는 것은 좌파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135). 이런 표현도 이와 관련된다. "농민은 농사 짖기에 돌아가면 흙이라는 불합리한 것과 격투하기 때문에, 합리적인 해석을 아무리 많이 해도 납득하지 않는다. 농민의 세계는 민주주의와 먼 세계인 것이다."(177.) 왜냐하면 농업이란 "식물을 관리하는 기술"(227)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대론적 논의도 할 수 있다. 청년들은 공해가 보도되기 시작한 이후 미나마타 병을 일으킨 '질서'회사의 농약이 집에 있는 것을 발견하며 고민하는데, 부모 세대는 화학비료에 대한 신화를 가지고 있다. 부모 세대에게 그것은 '노동에서의 해방'을 의미했다. 이렇듯 화학비료는 실감을 수반한 신화인 것이다. 이 역시 그들의 투쟁의 논리가 어디에 있었는지 보여준 사례이다.

 

 

3. 민주주의가 아닌 세계

 

청년행동대는 나리타 용수문제에서 절대적인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이는 어중간함이었는데, 이 어중간함이 있었기에 ''의 사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240). 이 어중간함은 '지원'하러 온 학생운동 조직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어떤 논의를 할 때에도 중요한 실마리를 줄 것이다. 절대적 반대를 말하는 절대적 당사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지원/당사자 관계를 절대화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사자 의식이 주인공의식으로 올라갔을 때, '절대치'가 생긴다(237). 절대의 등장, 어떤 의미에서의 신의 등장, "우리는 주인공인데 왜 우리 말을 안들어."(237) 이러한 권위주의 탄생(260)의 지적을 외부자가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저자는 사후적이지만 그것을 썼다. 어떤 사안에 대한 반대를 결정하면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어지는데, 그런데 고민과 고투 가운데에서 사상은 생기며, 그것이 훨씬 사상적이라는 것도 저자의 주장이다(280). 그 사안을 어떠한 농업적인 전망을 가질 것이었는지, 그 점에서부터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적 논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적 논의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지원으로 온 학생 운동단체였다. 그들은 산리즈카에서 대립하는 그룹이 지원하는 농민의 밭을 밤에 공격했다. 옥수수를 다 무너트린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아무리 대립적인 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농민이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립관계에 가슴을 아파하는 농민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대립관계를 이유로 당당하게 상대방을 공격하는 자가 있는 것이다. 후자들은 대립하면서도 함께 농협 여행을 즐기는 농민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원자들이 알 수 없었던 것이 '마을'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마을은 반() 권력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을 환영할 수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과 싸울 수 있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전경들에게 차를 따라준다. 이것을 선악이나 정의감으로 비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을은 항상 마을의 존속만을 의도하며, 그것을 위해 무장하는 것도 무릅쓴 현재에 와서는 거의 보기 드문 집단인 것이다. 마을이 파괴될 때, 마을은 불가사의한 힘을 발휘한다.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싸우는 공동체'로 변혁된 것이 아니다. 신좌파의 여러 당파는 그러한 이론을 전개했지만 그러한 사고방식은 진보파의 기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지 아니라 투쟁이 시작하고 나서 마을은 확실히 래디컬(근원적)으로 소급한 것이다. 오히려 보수 근원과 같은 곳에 회귀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거기에는 자유나 평등을 향한 특이하며 새로운 감각이 싹트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유동적이었으며, 정착하려 하지 않는 뜨거움에 넘치고 있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산리즈카의 미지의 매력에 끌렸을 것이다."(284-5)

 

이러한 지적은 중요하며, 청년행동대와 지원 학생단체의 차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찰 대응에서도 그랬었다. 체포당한 다음, 지원학생들은 완전 묵비를 관철한 경우가 많았는데, 청년행동대들은 경찰의 질문에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버렸다. 혁명을 지향할 활동가들에게 청년행동대는 '나약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경찰한테 활동가가 묵비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이며, 방법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는 내부적이며 전위조직적인 비밀을 가지는 운동을 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지금도 유용한 논의일 것이다. 비밀을 가지는 운동은 그것을 지키기 위해 완고한 조직체를 가져야 한다. ''이 그것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산리즈카 투쟁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그 의미는 강했을 것이다. 그런데 산리즈카 투쟁에서 농민들에게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 이는 결코 '농민운동'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산리즈카의 반대 농민들의 각 파를 명료하게 표현했다. 이는 도식주의에 빠진 이해를 만들기 쉽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름을 여기에서 쓰지 않도록 하겠지만 다음과 같은 것이다.

 

개척의 정신, 일신교, 일원론, 전후 헌법/민주주주의 파.

오래된 마을의 정신, 다원론 다신론, 헌법보다 마을의 룰, 비민주주의의 파(265).

 

저자는 후자에서 '농의 논리'가 나온다고 지적한다. 전자에 해당하는 개척자들에게는 자신의 토지를 담보해주는 것은 이웃 사람보다 국가였다. 국가와 집의 중간항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을이 아직 형성되지 못하고 있다. 바로 개척농민들의 의식은 근대적 토지소유인 것이다. 그들은 '농민'이 아니라 '백성'이며, 그들이 가지는 것은 '토지'가 아니라 ''인 것이다(299). 산리즈카 투쟁의 흐름의 핵심을 '토지에서 흙으로'에서 찾은 저자의 시선이다. 토지는 교환가능하며, 계산 가능하다. 그런데 흙은 교환할 수 없으며, 계산이나 예측도 할 수 없다. 저자는 더욱 밀고나가 '민주주의파''채소인간'의 대립이라고까지 표현하기에 이른다(408).


80년대 산리즈카 투쟁에서 국가와 농민이 직접 이야기를 할 자리를 갖게 된 이후, 정부쪽 관료들 중 전공투 경험자가 많아졌다는 점 때문에 농민들과의 논의가 쉬워졌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적인 방법만으로는 이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민주주의적 해법에 관해서는 산리즈카에 지원을 와서 현지 청년들과 결혼해서 거기에 정착한 여성활동가들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옛 농촌의 사람들과 여성해방운동을 겪은 여성들은 민주주의에 그다지 관심을 기울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농의 논리'라는 이중구조가 있던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산리즈카 투쟁을 '민주주의'라는 말로 봉합해버린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투쟁은 종결할 수 있다. 싸우는 논리는 민주주의에서는 국가와의 대화에서 승화된다. 그런데 '채소인간'들은 그렇지 않는 것이다(435).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공시적인 문제밖에 다룰 수 없기 때문이다(439). 이에 반에 ''의 사상은 통시적이다. 산리즈카가 도달하려던 것은 '전후 민주주의'적이지 않은 자아였다.

 

4. 유기 농업으로

 

백성들이 향한 것이 투쟁과 생산의 양립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화학비료보다 값싼 유기비료 만들기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백성으로 살면서 투쟁한다는 것이다. 산리즈카에서 유기농업을 시작한 계기는 환경사상보다도 이러한 면에서였다. 그리고 산리즈카가 만든 농업시스템 중에 산지 직송 시스템이 있는데, 이것도 체포당한 농민의 지원이라는 측면에서 시작한 것이다. 산리즈카의 흙의 사상을 심화시킨 '흙만들기''투쟁만들기'와 함께 가는 것이었다. 투쟁하는 자끼리의 공동성을 모색하는 것이었다(315).


거기에서 등장한 것이 '원 팩 운동'이다. 산리즈카 채소를 일본 각지에 보내는 시스템이 구축된 것이다. 소비자는 박스 안에 들어갈 채소를 선택할 수 없다. 무조건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매 달 한 박스씩 받아(분량은 선택할 수 있다) 그것을 먹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 박스의 채소로 도시 구매자의 생활은 일부분 산리즈카에 지배되는 것이다. 게다가 번거롭지만 맛난 것을 먹는다는 형식으로 산리즈카에서 나온 채소를 먹는 것은 하나의 운동이 된 것이다.


필자(이 글을 쓰는 사람) 역시 친구가 구매하고 있던 산리즈카 채소를 매달 먹었다. 한 달 한 번씩 배달되는 채소는 무엇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 배달될 날에 친구들끼리 모여서 요리하고 먹고(술도 먹지 않았던 것은 아니고), 이야기를 한다. 같이 설거지를 하고 다시 논의하고(...) 하는 식으로 '산리즈카 채소 모임'이라는 것을 한 달에 한 번씩 가졌다. 몇몇으로 나누어서 먹으면 한 사람 당 비용도 적게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몇 명이 모여서 한 꺼번에 먹기 때문에 채소가 상하기 전에 다 먹을 수 있다. 필자는 간사이 지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나리타 공항이나 산리즈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접하지 못했는데, 이러한 모임을 통해 차차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박스에 들어간 채소는 먹어본 적 없는 것도 많았고, 한마디로 맛있었다. 그런데 3.12 사건 이후 그 채소 구매를 그만둔 사람도 많이 생겼다. 3.12 이후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여기에서 논의하지 않겠다.


어쨌든지 '유기농업'으로 가는 길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것은 '유기농업'은 결코 새롭게 발견된 것이 아니라 메이지 시대 농업으로 '회귀'하는 것이며, 당시 노인들의 눈에서 보면 '복고'였던 것이다(343). 농약을 쓰는 근대농법이 넘어서버린 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는 사고였다. 그리고 산리즈카에서 농업의 중심이 밭이었다는 점에서 보아도 일본적인 ''농업과는 별개의 마을 별개의 농적(農的)인 세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결코 '민주주의'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즉 보수 본류의 투쟁에서 나온 것이었다.

 

5. 나가며

 

매우 난삽한 글이 된 듯하다. 오랜만에 이 책을 보면서 다양한 생각이 났다. 그런데 괜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쓰기보다 이 책이 보여준 사상과 역사, 그리고 투쟁의 방법들을 쓴 것은 우리 삶을 보다 즐겁게 만들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