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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번역작업

[가게모토 츠요시] 한국전쟁 시대의 '공작자'들의 문화=정치

[아무도 번역 안해줄거 잖아]



한국전쟁 시대의 '공작자'들의 문화=정치






 

가게모토 츠요시/수유너머N 세미나 회원







 

미치바 치카노부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 시대 1950년대 서클 문화운동의 광망>(미스즈 쇼보, 2016, 411, 3800세금)



원제목:道場親信, 下丸子文化集団とその時代 1950年代サークル文化運動光芒, みすず書房, 2016.


 

1. 서클 운동 연구

 

일본에서의 서클 운동을 언급할 때, 50년대 말 다니가와 간에서 논의를 하는 사례를 들어본 적도 있다. 그러나 다니가와 간이 그것을 언급하기 시작하는 것은 서클 운동이 한 단계를 마무리한 시기의 일이다. 서클 운동이 처음에 활발해진 시대는 50년대 초반이다. 그런데 그것의 생생함을 일본현대사는 제대로 조명하지 못해왔다. 물론 당사자들이 남긴 책은 꾸준히 출판되어 왔으며, 부분적/단편적으로는 계속 접해왔다고 할 수 있다.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2007년에 잡지 <현대사상>에서 특집으로 기획된 '전후 민중 정신사'라는 책자였다. 이는 서클 운동을 새롭게 논의하는 시도였으며, 여러 필자들이 50년대 초반에 대한 논문이나 회고를 다수 실었다.


약간 개인적인 이야기가 되는데, 당시 학부생이었던 나는 식민지 조선 출신이고,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소설을 썼던 고바야시 마사루(小林勝1927-1941)의 소설을 읽고 있었다. 나중에 이 작가로 학부 졸업논문을 쓰게 되는데, 고바야시의 소설의 배경에 대해 알기 위해 이것저것 먼지가 쌓인 책을 뒤지고 있던 시절이었다. 고바야시는 50년대 초반의 공산당 무장투쟁에 대한 소설을 썼기도 했는데, 이러한 운동은 일본공산당의 공식적 역사에서는 '극좌폭력노선'으로 일괄 부정되고 있다. 그러한 공산당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간행된 잡지를 봐야 했다. 그러한 가운데 접하게 된 것이 <인민문학>이라는 잡지이다. 지금으로는 연구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극좌폭력노선'의 문학잡지로 별로 평가되지 않았던 잡지이다. 그런데 <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의 저자를 비롯한 몇 명의 꾸준한 연구로 인해 이제는 <인민문학>에 대한 편견은 없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째든 당시 도바 코지의 <운동체 아베 고보>(鳥羽耕司, 運動体 安倍公房, 一葉社, 2007)라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 경험을 중심으로 한 연구서도 읽었으며(이건 매우 재미있는 책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나이 많은 일본문학 연구자에게 이 책에서 받은 충격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 연구자는 '우리 시대는 아베 고보의 공산당경험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지'라고 웃더라고), 50년대 초반의 정치의 복잡함은 공산당의 공식역사에서 지워진 만큼 흥밋거리가 되었다. 물론 아직 조선총련이 출범 이전이기도 하며, 재일조선인 활동가들이 공산당에 속해 있었으며, 더욱 무장투쟁이나 한국전쟁 반대운동 등, 다양한 층위에서 50년대를 바라보고 있던 무렵에 <현대사상>의 특집에 접하게 된 것이다. <현대사상>특집에서 읽은 것은 50년대 초 도쿄 남부 지역의 풍부한 서클 운동에 대한 사례들인데, 내가 그때까지 읽은 적이 없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들이었다. 이는 많은 기록을 남기고 온 사람들이 있던 덕분에 가능한 연구였다(<시모마루코 문화집단과 그의 시대>에서는 어떻게 자료가 계승되었는지에 대한 논의도 있다).


''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한 정치사 서술에서는 절대적으로 부각되지 않은 영역에 있는 것이 당과 일정정도 거리를 두면서 움직이던 서클운동들이다. 그것에서는 정치적인 문구도 쓰였기 때문에 문화주의자들에게는 '정치적'이라고 부정되어, 정치진영에서는 '문화적'이라 부정당해왔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서 새삼 느꼈던 것은 문화적/정치적이라는 부정의 언어가 아무것도 대상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함께, 정치적인 수사로 무엇이 표현되었는지를 육박하려는 내재적 이해의 시도이다. 자연발생성이나 목적의식성으로 정리함으로 지워져버린 영역에 있는 것이 바로 50년대 서클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바로 그 와중에서 표현된 것들, "그것은 '정치''문학'이냐는 이자택일 중에서 설정된 논쟁 틀을 벗어나는 것이며, 제도적 '문학'을 다시 정의하도록 할 가능성을 내포한"(207)것이었다.

 

2. 한국전쟁 후방에서의 시 쓰기

 

일본어로 '전후'라고 할 때 1945년 이후를 일반적으로 말한다. 그런데 '전후'일본은 한국전쟁을 통해 '부흥'해갔을 만큼 일본은 한국전쟁의 일부분을 구성했다. 즉 미국의 전쟁기계 속에 있으면서 미군이 정한 법의 외부에서(비합법영역에서) 싸우는 것이 50년대 초의 '운동'이던 것이다(14). 그 비합법성은 바로 한국전쟁반대운동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도쿄 남부 공장지대는 서클 운동이 활발한 곳이면서 동시에 조선특수로 은혜를 받고 있는 곳이다. 이 겹침은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도쿄 남부지역의 당대 성격이다. 즉 최악의 방식으로 조선과 연결되면서 그와는 다른 관계성을 실현하려 하는 시도로서 운동이 있던 것이다. 이곳에서의 저항은 탄압을 받기 일쑤였다. 그러한 저항 가운데에서 다양한 요소가 겹치면서 시모마루코 문화집단은 생긴 것이다.


이 지역에 모이던 대소 공장들은 인접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도보로 오가면서 서클 운동을 만들었다. 이 서클은 기업체나 공장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지역적 공간으로 운영되었다. 거기에서 시도된 것이 '()'였다. 시는 노동자들이 쓰기 쉬운 장르였으며, 시를 쓰는 것을 통해 노동자들의 시각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작업이 시도되었다. 인용을 해보자. "시는 '집단창작'하기 쉽고, '나도 쓸 수 있었다'는 체험을 그다지 고생하지 않아도 손에 놓을 수 있는"(228)문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시는 가장 문턱이 낮은 문학이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턱을 넘은 경험을 통해 문학표현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시가 사회운동과 직결된 시대였다. 이러한 시 쓰기를 노동자들에게 권유한 자가 바로 문화공작자들이었다(이 가운데 아베 고보도 있었다). 이는 제도적인 의미에서의 '문학'과는 다른 언어표현을 실현하려 한 것이었다. 서클에서 시도된 이러한 '쓰기'를 잡지<인민문학>은 적극적으로 흡수하려고 했다. 이러한 '쓴다'는 것이 정치운동에 영향을 미쳤을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문학/정치라는 기존의 코드를 계속 바꾸면서 표현을 창출해내는 존재가 바로 '공작자'이다. 철학자이자 아나키스트이던 츠루미 슌스케는 일본 쇼와 사상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서클 문제를 전향문제와 같은 층위에서 논의해야 한다고 했다. 이는 복잡하면서 수많은 표현자가 나오게 되는 이 서클의 시대야말로 일본에서 '주체'가 어떻게 가능할지를 극한으로 보여준 사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을 건드리는 존재가 '공작자'인 것이다.


그런데 50년대 후반, 서클 운동은 점점 침체되면서 도쿄 남부에서는 '문학'을 지향한 단체로 수렴해간다. 이는 문학적인 부분이나마 집단성을 유지하려는 시도로 평가된다(200). 서클이 문학 서클로 되어갔을 시절의 사례에서 흥미로운 것은 나가사키현의 오무라 수용소(조선인 '범죄자'를 수용하는 곳으로 여기에 수용된 조선인은 이승만 정권 하의 '한국'에 강제추방이 되기도 했다)'오무라 조선 문학회'와의 교류이다. 거기에서 잡지의 가리판을 대신해서 해주지 않을까라는 요청이 와서 도코 남부의 문학집단이 대신해주었으며, 교류가 시작한 것이다. 오무라 수용소에서 온 편지에는 "오무라 수용소 내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 공민자치회 오무라 문학회"(159-160)라고 서명되어 있었다.


결국 도쿄 남부의 서클 운동은 59년에 해산되기에 이른다. 55년 체제의 성립은 일본공산당의 단일화도 포함하는데, 당일화되기 전에 <인민문학><신일본문학>에 흡수된다. 이 과정에서 '공작자'라는 개념 역시 진지한 검토 대상이 되지도 못한 채 청산되어버린다. 그 후 얼마 시간을 두고 50년대 말에 바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 규슈 지방의 <서클 마을>이던 것이다. 도쿄에서 좌절된 <공작자>라는 개념을 감히 가지고 나타난 것이 다니가와 간이었다.

 

3. 공작자, 에지마 히로시

 

이 책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며, 더군다나 필명이나 무서명의 기사에서는 '개인'이 보이지 않을 경우도 많다. 그런데 특별히 강조된 인물이 에지마 히로시(江島寛)이다.


본명은 호시노 히데키. 식민지 조선에서 1933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우편 관련의 일을 했기 때문에 조선 각지에서 자랐다. 경성중학 재학 중 일본 패전으로 일본으로 인양했다. 그는 활동가이면서 동시에 계속 조선을 대상으로 한 시나 소설을 썼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고등학교를 방교처분당해 도쿄로 건너갔다. 야간고등학교에서 배우면서 서클 활동을 활발하게 벌었다. 노동자들과 연결되어 공작자로 '운동으로서의 문학'을 실천해 나간다. 즉 표현을 통해 대중의 의식을 변혁하며, 거기에서부터 현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코드를 창출하는 운동/표현활동을 벌었다(304).


한국전쟁 휴전 후 일본은 고도경제성장의 길로 나아가게 되어 '부흥'해 가는데, 부흥 속에서의 대중사회의 도래는 '공작'의 목표를 보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길을 열어야 했던 그였지만, 548, 21세로 죽고 만다. 장례식에서는 앞에서 언급한 에지마보다 5살 위인 고바야시 마사루도 방문했다(342).


그의 시는 도쿄 남부와 전쟁터인 조선을 연결하는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단지 군수공장이나 하네다 군용 비행장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과 연결된 이미지는 실체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을 넘어가는 상상력이다(322). 전쟁과 미군으로 연결된 도쿄와 조선을 노동자의 연대로 또 다른 '연결'을 만들어냄으로써 그는 해방된 동아시아를 꿈꾼 것이다. 한국전쟁 휴전 후에는 서로의 관계가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도쿄와 조선은 전쟁에서만 연결된 상태였다. 그것과는 다른 상상력을 마음에 가지면서 죽고 만 에지마의 사상을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이 책을 통해 '조선'과 대면하려 한 일본의 사상가를 더 한 명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 죽음과 관련해서 저자인 미치바 치카노부 역시 이 세상을 떠나버렸다는 것을 추가해두어야 한다. 책 후기를 보면 2016년 초에 암이 발견되어 스스로의 작업을 다시 검토하면서 편집자의 도움을 받아 기존의 논문을 정리해 이 책을 출판되기에 이루었다고 한다. '후기'가 쓰여진 20169, 그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