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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_웹진강의

[칼 슈미트 입문 강의] 3강 다섯 번째 부분

칼 슈미트 입문 강의



나카마사 마사키(仲正昌樹)

김상운 옮김

 



仲正昌樹カール・シュミット入門講義作品社, 2013.









3강. 『정치신학』 (1) ― 주권자, 법-질서와 예외상태 (네 번째 부분에 이어서)





주권이라는 이름의 ‘권력 Macht’ 


2장의 「법의 형식 및 결정의 문제로서의 주권의 문제[주권 문제, 그것은 법형식과 결정의 문제]」로 들어가죠. ‘주권 Souveränität’이란 어떤 ‘권력 Macht’인가에 관해 논의됩니다. 슈미트는 우선, “주권이란 법적으로 독립된, 연역할 수 없는 최고의 권력(höchste, rechtlich unabhängige, nicht abgeleitete Macht)이다”라는 옛날부터의 주권의 정의는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버려버립니다. 26頁을 보시죠. 



그것은 현실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최고권력’이라는 최고급을 사용하고 있지만, 사실 인과율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 속에서, 이런 최고급이 드러낼 수 있는 개별 요소를, 무엇 하나 끄집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연법적인 확실함으로 기능하고, 거스르기가 불가능한, 최고의, 즉 최대의 권력 등이라는 것은, 정치적 현실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권력은, 법에 관해 아무런 증거도 안 된다. 더욱이 그것은 루소가 자신의 살았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정리한 평범한 이유 때문이다. 즉, 힘은 물리적 권력이며, 강도가 발사하는 권총도 권력이기(사회계약론, 1편, 3장) 때문에. 사실상의 최고권력과 법적 최고권력의 결합이야말로 주권 개념의 근본문제이다. 이 점에, 주권 개념의 모든 난관이 있으며, 그것은 일반적인 동어반복적인 술어에 의해서가 아니라, 법률학적 본질의 명확화에 의해, 법률학상의 이 근본 개념을 파악하는, 하나의 정의를 발견한다는 과제인 것이다. 


[그것은 현실을 적절히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식, 기호, 신호이다. 그래서 무한히 다의적이며 상황에 따라서는 엄청나게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고 아무런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주권의 실로 엄청난 존재감에 대해 ‘지고의 힘’이라는 최상급 표현을 사용해 왔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그런 힘에 고유한 요소를 아무것도 추출해 낼 수 없고, 따라서 그런 최상급 표현을 부여할 아무런 까닭도 없는데 말이다. 저항할 수 없고 자연법칙적 안정성에 의해 기능하는 지고의 힘, 즉 최대 권력은 정치적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란 법의 존립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는데, 이는 루소가 자신의 시대와 의견일치를 보면서 정식화한 바 있는 범속한 이유 때문이다. 강제력이란 물리적 권력이며, 강도가 쏜 총 또한 권력이라는 명제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사실상의 최고 권력과 법적인 최고 권력을 결합시키는 것이 주권 개념의 핵심 문제이다. 여기에 주권 개념의 모든 어려움이 있으며, 이는 밋밋한 동어반복적 언술로부터 벗어나 법학의 이 근본개념을 법학적인 본질 규정을 통해 파악하는 하나의 정의를 발견해야 한다는 문제인 것이다(31-32쪽).]



여기도 일본어라면 감이 팍 오지 않습니다만, 독일어 〈Macht〉는 영어의 〈power〉과 똑같이, ‘권력’이라는 의미 외에, 물리적인 힘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따라서 ‘주권’을 〈höchste Macht〉라고 말한 경우, 그것이 현실적으로 ‘최고의 힘’이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면, 있을 수 없는 얘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덧붙여, 현실적인 힘, 실력으로서의 〈Macht〉는 “법에 관한 아무런 증거도 안 된다[법의 존립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여기는 의미적으로, “힘은, 법에 관해 아무런 증거도 안 된다[권력이란 법의 존립에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번역]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후에 루소로부터의 인용 ― 원문에서는 프랑스어 그대로 인용되고 있습니다 ― 도, 취지를 파악하기 힘듭니다만, [『사회계약론』의] 1편 3장에서 루소가 논하는 것은, 실력에 의한 사실상의 지배가 아무리 오래 계속되더라도, 법=권리(droit)로는 전화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력지배라면, 다른 더 강한 놈이 나온다면, 교체가 되며, 그 새로운 보스는 윗사람을 타도했다고 해서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점에서는 가장 강한 것이니까요. 그런 실력에 의한 기득 권익 같은 것은 법=권리와는 관계가 없지 않을까, 법=권리의 근거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닐까라고 시사하면서, 그로부터 자발적인 ‘함의’야말로 법=권리의 근거라는 자신의 주장으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힘은 물리적 권력이다[강제력이란 물리적 권력이다]”라고 한 대목의 ‘힘’은 〈force〉라는 프랑스어로, 의미는 영어의 〈force〉와 거의 같으며, ‘능력’이나 ‘역량’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물리적인 힘, 강함, 전력(戰力) 등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리적 힘’의 원어는 〈la puissance physique〉로, 〈puissance〉는 물리적인 ‘힘’이나 ‘강함’의 의미도 있습니다만, ‘권력’이나 ‘지배력’ 같은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이것과 같은 어원의 〈pouvoir〉는 앞의 〈pouvoir constituant(구성적 권력)〉이 그렇듯이, 법적인 권력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힘’은 물리적인 지배력으로는 되더라도, ‘법적 권력’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에서 슈미트가 말하고 싶은 것은, 주권이란 “사실상의 최고권력 faktisch höchste Macht”과 “법적 최고권력 rechtich höchste Macht”이 결합된 것이라는 겁니다. 어느 한 쪽만으로 정의하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겁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오고 있는 상세한 주권 개념의 논공(論攻)에 관해 말하면, 우선 사회학 대 법률학이라는 대립을 세우고, 손쉬운 양자택일로부터 순-사회학적인 것과 순-법률학적인 것을 끄집어냄으로써, 더 간단한 해결을 시도하고 있다. 켈젠은 그의 저서 『주권의 문제와 국제법이론』(튀빙겐, 1920) 및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튀빙겐, 1922)에서, 이런 방향을 좇고 있다. 사회학적 요소를 모두 법률적 개념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규범들에 대한, 또한 궁극적·통일적인 근본규범에 대한 귀속의 체계를 의심의 여지없는 순수함으로 획득하려 한다. 존재와 당위, 인과적 고찰과 규범적 고찰이라는, 옛날부터의 대립이, 이미 켈젠, 옐리넥, 키스차코프스키에서 보이는 이상의 정성과 엄격함으로, 다만 그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증명도 수반하지 않은 자명함으로, 사회학 대 법률학이라는 대립으로 치환되고 있다. 


[주권 개념에 대해 최근에 등장한 가장 상세한 주석은 사회학과 법학을 대립시키고 단순한 양자택일을 통해 순수 사회학과 순수 법학 같은 것을 추출하는 매우 간단한 해결책을 추구한다. 켈젠은 『주권 문제와 국제법이론』 및 『사회학적 및 법학적 국가 개념』에서 이 길을 따른다. 모든 사회학적 요소가 법학 개념 바깥으로 내버려짐으로써, 의심의 여지없는 순수성 속에서 여러 규범들과 궁극의 통일적 근본규범이 귀속된 하나의 체계가 획득된다. 존재와 당위 및 인과적 사유와 규범적 사유 사이의 낡은 대립이 옐리네크와 키스차코프스키가 이미 했던 것보다 강렬하고 엄격하게, 그러나 마찬가지의 논증 없는 자명함을 통해 사회학과 법학의 대립으로 전위된다(32-33쪽).]



여기서 슈미트가 비판하고 있는 최근 수년 동안의 경향이란, ‘주권’에는 사회학에 의해 탐구해야 할 사실적 측면이 있다고 인정한 다음, 그것과 법학적 측면을 분리하여 각각 따로 탐구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근본규범 Grundnorm”이란 켈젠의 ‘순수법학’의 용어로, 수학의 공리처럼 이로부터 모든 법규범이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근본에 있는 규범입니다. 거기에서는 정치나 도덕이나 경제나, 다른 영역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일관된 법의 논리만으로 도출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순수’라고 부르는 겁니다. ‘법실증주의’의 궁극적 형태입니다. 


당연히, 그러면 그런 근본의 ‘근본규범’이란 어떻게 정립[설정]되는가, 주권자의 가치관이나 현상 파악이 반영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이 나옵니다만, 켈젠은 그것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일단 주권자의 의지에 의해 ‘근본규범’이 정립[설정]됐다면, 그 이후는 법 이외의 요소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게오르크 옐리넥(1851-1911)은 19세기를 대표하는 독일의 공법학자로, 국가를 사회학과 법학의 양면에서부터 연구하고, 국가법인설에 기초하여 국가학을 재건하려 한 인물입니다. 국가를 구성하는 세 요소로서, 주권, 영토, 인민을 꼽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보그당 알렉산드로비치 키스차코프스키(Bogdan Aleksandrovich Kistiakowsky, 1868-1920)는 현재는 우크라이나가 된 키에프에서 태어나, 독일과 프랑스에서 배운 러시아 법학자·사회학자입니다. 독일에서는 신칸트학파 계열의 이론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1858-1915)에게 배웠습니다. 러시아로 돌아가서는 모스크바와 키에프에서 교편을 잡고, 러시아의 신칸트학파의 대표격이 됐습니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주권의 핵에는 예외상황에 대해 결정하는 주권자가 있는데, 켈젠의 순수법학에는 그런 인격적 존재는 없고, 그저 비인격적이면서도 수미일관된 체계가 있을 뿐입니다. 



과연 《순수한 법의 논리》는 현실의 질서와 일치할 수 있는가



국가, 즉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이면서 궁극적 규범에 대한 귀속의 체계이다. 국가 내부에서 행해지는 상위 및 하위 질서는 통일적 중심점에서 시작해 최하위 단계에 이르기까지 권한과 권능이 미치는 것에 기초한다. 최고 권능은 한 인격 또는 사회학적 심리학적 권력 복합체에 귀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규범 체계의 통일로서, 주권적 질서 자체에 귀착하는 것이다. 법률학적 고찰에 있어서는 현실의, 혹은 허구의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귀착점만이 존재한다. 국가란 귀속의 최종 도달점이며, 이 ‘점’에서, 법률학적 고찰의 본질인 귀속이 ‘중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점은 동시에 ‘이것 이상으로 연역할 수 없는 질서’이다. 


[따라서 켈젠에게 국가, 즉 법질서는 궁극적 귀속점과 최종규범이 속하고 있는 귀속의 체계인 셈이다. 국가에서 유효한 상위 및 하위 질서는 권한과 권능이 통일된 중심점으로부터 가장 아래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다는 데에 토대를 둔다. 최상위의 권능은 하나의 인격이나 사회학적이고 심리학적인 권력복합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규범체계의 통일체인 주권적 질서 그 자체에서만 비롯된다. 법학적 사유에는 실제적인 인격체도 허구적인 인격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귀속점들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국가는 이 귀속의 최종점이며, 이 지점에서 법학적 사유의 본질인 귀속의 체계가 ‘정지한다.’ 이 ‘지점’은 동시에 ‘더 이상 연역 불가능한 질서’이기도 하다(33-34쪽).]



켈젠의 체계는 수학처럼 통일성·체계성을 추구하고 있으므로 이론적으로 아름다운 느낌이 듭니다. 일본의 법학자에도 그런 켈젠 이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사람이 있습니다. 슈미트는 그게 납득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 (아마 켈젠 같은 법학자가 상정하는 것에 불과한) 《순수한 법의 논리》만으로 만들어진 비인격 체계가 현실의 질서와 일치할 수 있겠는가.



체계적 통일은 켈젠에 따르면 ‘법률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이제 흥미로운 수학적 신화, 즉 점은 질서이며 체계이며, 규범과 동일하다 등의 논의는 차치하고 다음을 물어보자. 즉, 다양한 귀속점에 대한, 다양한 귀속의, 사고상의 필연성 및 객관성은, 만약 그것이 실체적 규정, 즉 하나의 명령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에 기초한 것인가라고 말이다. 마치 자명하고 지극한 것인 양, 거듭 반복하고, 일관된 통일과 질서라는 것이 논해진다. 마치 자유로운 법률학적 인식의 결과와, 다른 한편으로 그저 정치적 현실에 있어서만 통일체로서 결합된 복합체 사이에 예정조화가 성립되는 것이라도 하듯이, 고차의 질서와 저차의 질서라는 단계가 논해지고, 법률학의 도마 위에 올려지는 모든 실체적 규정에, 그것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켈젠에 따르면 체계적 통일성이란 ‘법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이다. 여기서 하나의 지점이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체계이자 하나의 규범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흥미로운 수학적 신화는 무시한다 하더라도, 실정적 규정, 즉 명령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면, 하나의 귀속점으로 수렴된다는 다양한 귀속 층위들의 필연성과 객관성이 어디에 토대를 두어야 하는지를 물어보자. 마치 세계의 자명한 삼라만상이라도 되는 양 일관된 통일성과 질서에 관한 논의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다. 자유로운 법학적 인식의 귀결과 오직 정치적 현실에서 통일체로 결합했을 뿐인 복합체 사이의 전제된 조화가 이미 성립되어 있기라도 하는 양 상위와 하위의 질서로 이뤄진 계층질서가 논의되고 있으며, 여러 실정적 규정들에 관한 법학이론이 논의하는 모든 문제에서 이런 질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34-35쪽).]



‘체계적 통일 die systematische Einheit’이 ‘법률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 freie Tat der juristischen Erkenntnis’라는 것은 직접적으로 알기 어렵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취하면 좋습니다. 판결이라든가 현실사회에서의 법의 운용 등을 조사하고, 경험적·귀납적으로 체계를 추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험적 사실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법률학의 논리를 따라, 통일적으로 체계를 구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랬다면, 체계적으로 통일되어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합니다만, 그런 체계를 논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법이론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켈젠은 보는 셈입니다. “법률학적 인식의 자유로운 행위”라는 얘기는 아까의 『사회학적 및 법률학적 국가 개념』의 9장 「국가 개념으로부터 권력 요소의 배제」에서 ‘국가인격’설을 주장하는 막스 벤첼(Max Wenzel, 1882-1967)이 법질서 자체와 법률학적 인식을 혼동하는 것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나옵니다. 


“점은 질서이며 체계이며, 규범과 동일하다[하나의 지점이 하나의 질서이자 하나의 체계이자 하나의 규범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부분은, 이것만으로는 무슨 말이지 모르겠지만, 이 경우의 ‘점’이란, 방금 나온 “국가란 귀속의 최종도달점”이라고 할 때의 ‘점’입니다. 즉, 법규범 a는 더 상위의 법규범 b에서 도출되고 b는 더 상위의 법규범 c에서 … 라는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없는 근본규범이라는 점에 이르며, 그 연역의 계열 전체가 ‘국가’ 또는 ‘법질서’인 셈인데, 그 ‘점’으로부터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도출된다면, ‘국가’=‘법질서’ 자체가 그 ‘점’이라고 말해도 좋게 된다. 그것은 신화잖아, 라고 슈미트는 시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부분은 비교적 알기 쉽네요. a가 b에 귀속한다는 것에 뭔가 객관적인 필연성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켈젠은 ‘자유로운 인식 행위’라고 말하고 있지만, 당연히 켈젠이나 다른 법률가의 머릿속에 있는 《법규범》의 상호 관계를 논하더라도, 그것은 현실의 법이 아니죠. 왜 ‘자유로운 법률학적 인식의 결과’와 국가의 ‘정치적 현실’이 대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법학이 다루는 개별 규범은 실재하는 법규범이 아니면 안 되고, 그 상호관계도 국가의 정치적 현실에 대응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물리학에서 물리적인 관계들을 수학적으로 표현합니다만, 그런 식들이 수학적으로 맞지만 현실의 물체들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응하고 있음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무의미한 것입니다. 물리학이라면 수식이 있으니까 아직 좋지만, 순수법학의 경우 그것에 상당하는 것조차 없다. 귀속관계를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공식 같은 것이 없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인격적 주체에 의한 의지적인 “(해석 → 적용 →)명령”이 없었다면, 어떤 명제를 다른 명제에 ‘귀속 zurechnen’시키고 그것을 다시 현실에 대응시킬 수 없다. 


마지막의 ‘실체적 규정 positiv Anordnungen’이라는 표현에는 비아냥대는 효과가 있네요. 켈젠 등의 입장은 ‘법실증주의 Rechtspositivismus’로, 명칭에서 보면, 실재적(positiv)인 법만을 문제 삼을 테지만, 실제로는 국가를 현실에서 성립시키는 규범의 복합체와는 대응하고 있다는 보증이 없다. 법규범을 상호 결부시키는 ‘질서’를 파악하지 않았는데, 어디가 ‘실증’이냐는 것입니다. 



켈젠이 법률학을 어디까지나 순수하게 높여서 도달하려 드는 규범적 과학이라는 것은, 법률가가 자기의 자유로운 행위에 바탕을 두고 평가한다는 의미에서의 규범적인 것일 수 없다. 법률가는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실정적으로 주어진) 가치들을 기반으로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에 의해 하나의 객관성이 가능해지는 듯이 보이나, 그러나 실정성과의 필연적 관련은 전혀 가능해져서는 안 된다. 법률가에 기초한 가치들은 역시 법률가에게 있어서 주어진 것이지만, 법률가는 그것들에 대해 상대적 우월성을 갖고 임한다. 왜냐하면 법률가는 ‘순수’ 법률가의 영역에 머무는 한, 자신이 법률학적으로 관심을 기울이는 모든 사안에서 하나의 통일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성과 순수성은 본래 난문을 단호히 무시하고 형식적 근거를 바탕으로 체계와 모순되는 모든 것을 불순한 것으로서 배제한다는 것에 의해 손쉽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켈젠이 법학을 순수성으로 끌어올려 도달하려는 규범 과학은 결코 규범적일 수 없는데, 법률가가 자신에게 고유한 자유로운 행위를 통해 판단을 내린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법률가는 그에게 주어진(실정적으로 주어진) 가치를 활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객관성이 가능한 듯 보일지 모르지만, 실정성과의 필연적 관계는 전혀 가능해지지 않는다. 법률가가 끌어오는 가치는 엄밀히 말해 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그는 이 가치에 비해 우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가 ‘순수하게’ 법률가로 남아 있는 한, 그는 자신이 법률적인 관심을 가지는 모든 것으로부터 하나의 통일체를 구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일성과 순수성은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어야 하는 근본적 어려움을 무시하고 형식적 근거를 내세워 체계를 거스르는 모든 것을 배제하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다(34-35쪽).]



여기에서는 켈젠의 주장의 내재적 모순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켈젠이 지향하는 순수한 ‘규범과학 die normative Wissenschaft’으로서의 법률학에서는, ‘법률가’는 자유로운 인식 행위로서 가치를 평가하고, 규범들 사이의 계층구조를 구성하는 것인데,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행위’일 수가 없다. 왜냐고 말하면, 법률가는 자신이 법적 가치를 창출할 수 없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가치와 보이는 것에 근거하여 법규범의 계층구조를 재구성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그런 주어진 가치를 따라 사고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데도, 그것들을 넘어선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주체로서의 법률가가 스스로 인식의 《대상》이 되는 《법질서》를 구성하기에, 그 인식이 객관적이라고 켈젠은 생각하는 것인데,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실재하는 법질서, 실정법의 체계에 대응한다는 보증은 없다. 결국 순수법학은 실재하는 법질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사상하고, 자신의 관심에만 기초하여, 그것을 재구성함으로써 《통일적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처럼 겉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렇게 법률가가 《자유》롭게 인식한 규범 상호의 논리적 귀속 관계만을 문제 삼은 ‘순수법학’은 규범이 통용되지 않는 예외상태에서 그 본질을 드러내는 ‘주권’ 개념을 다룰 수 없다. 



켈젠은 주권 개념의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그것을 해결한다. 그의 연역의 결론은 ‘주권 개념은 단호히 배제되어야 한다’(주권의 문제, 320페이지)이다. 이는 사실상 원래의 자유주의적인, 법에 앞선 국가를 부인하는 것이며, 법의 실현이라는 독자적인 문제의 부인이다. 이런 생각의 중요한 논술은 H. 크라베에서 찾을 수 있다. 크라베의 법주권설(1906, 재판 1919 증보 독일어판의 표제는 『현대의 국가이념』)은 주권자는 국가가 아니라 법이라는 명제를 바탕으로 한다. 켈젠은 이를 자신의 국가와 법질서 사이의 동일설의 선구를 이루는 것이라고만 보는 것 같다.


[켈젠은 주권 개념이라는 문제를 무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가 연역한 끝에 다다른 결론은 이렇다. ‘주권 개념은 반드시 배제되어야 한다.’ 사실상 이것은 낡은 자유주의가 법을 내세워 국가를 부인하는 일이며, 법실현이라는 독립된 문제를 무시하는 일이다. 크라베야말로 명확하게 이런 주장을 내세운 인물이다. 그의 법주권설(『현대의 국가이념』[1906], 1919년에 독일어로 증보 재판 출판)은 국가가 아니라 법이 주권자라는 테제에 기초해 있다. 켈젠은 이 학설을 국가와 법질서가 동일하다는 자기 이론의 선구자로만 간주하는 듯하다(35-36쪽).]



여기는 비교적 알기 쉽네요. ‘국가’의 ‘법’에 대해 논하려면, 법을 실현하는 ‘주권’을 논할 수밖에 없겠지만, 주권은 물리적 실력을 포함한 개념이므로, 순수 법학은 무시하고 싶다. 슈미트더러 말하게 하면, 그것은 사실상 ‘국가’의 존재를 무시하고 법규범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고 있는 듯한 비현실적인 이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기서 법주권설(Lehre von der Rechtssouveräntät)의 제창자로 소개된 후고 크라베(Hugo Krabbe, 1865-1936)는 네덜란드의 공법학자로, 국가론에 관한 작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켈젠은 크라베를 자신의 선구자로 보고 있는데, 31頁부터 43頁에 걸쳐 슈미트가 해설하고 있듯이, 크라베는 오히려 국가는 다양한 이해관계로 구성된 복합체이며, ‘법’을 만듦으로써 그런 이익들을 법적 가치로서 확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주장한 사람입니다. 법 자체가 가치의 원천이 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의 주권론은 다원적 주권론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34頁에서는 크라베를 국가=단체론의 계보에 자리 매김한 뒤 단체론(Genossenschaftstheorie)을 자세하게 분석합니다. 슈미트에게 단체론은 불충분하지만, 켈젠 식의 법실증주의보다는 봐야 할 곳이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