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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프로이트 환상 횡단하기-『우상의 추락』

프로이트 환상 횡단하기

-『우상의 추락』(미셸 옹프레, 전혜영 역, 글항아리, 2013) 




문화/수유너머N 회원






프로이트를 믿으시나요?

“프로이트 이론들 어디까지 믿으세요?” 지난해에 한국에서 출간된 미셸 옹프레(1959~)의『우상의 추락』에 관한 기사의 제목이다. 이 질문에는 프로이트(1856~1939)의 이론에 대한 ‘의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이론은 왜 여전히 ‘의심’의 대상일까. 현재 국역판으로 나온 프로이트 전집만도 15권이며 그의 난해한 이론에 대한 주석서나 해설서도 꽤나 많다. 이를 보면 그는 대중적으로도 꽤나 잘 알려져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뿐인가. 프로이트는 현대철학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는 자신의 이론의 결점에 대해 변명할 의무가 있는 이로 소환되는 것이 현실이다.


프랑스 철학계의 이단이면서 한국에서도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소개된 바 있는 미셸 옹프레 역시 프로이트의 이론에 대해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는다. ‘우상의 추락’이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에서 그는 프로이트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의문을 제기하는 방식은 매우 실증적이다. 마치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을 객관화하지 못한 비과학적인 작업의 산물이었다는 것을 비판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는 청소년기부터 프로이트를 탐독했다는 이 답게 프로이트의 방대한 모든 저작은 물론이거니와 프로이트의 전기적 자료들에서 찾은 근거를 바탕으로 ‘우상’이 된 프로이트의 민낯을 드러낸다. 그가 말하는 프로이트의 민낯이란 이런 것들이다.



미셸 옹프레vs지그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가 거짓말쟁이라고?

프로이트가 자신의 ‘무의식’발견의 독창성을 주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엄청나게 감화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니체나 쇼펜하우어와 같은 동시대의 다른 사상가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동료이자 친구인 플리스의 연구 성과를 가로챘다는 등의 이론가로서의 결점. 뿐만 아니다. 자신의 연구 성과에 대해 미심쩍은 부분들을 없애기 위해 자신의 연구 작업에 관련된 자료나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를 없애버리는 소심한 행동. 사실 이 역시 프로이트 자신이 약혼녀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자주 언급되었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이렇게 편지들을 모두 없애버리면서 얄밉게도 “지난 14년간의 모든 메모만이 아니라, 편지, 논문 발췌문, 내 작업의 원고도 없애버렸습니다. 편지 가운데 가족 간의 편지만 남겼습니다.”(1885년 4월 마르타 베르나이스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말한바 있다. 거기다 한술 더 떠서 “전기 작가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일하게 해야죠. 우리는 절대 그들을 편하게 해주지 않을 겁니다.”라는 말까지 덧붙인 바 있다.


거기다 프로이트가 치료한 환자들은 모두 다시 재발했다는 것. 그리고 개인적인 치부들... 처제와 바람을 피웠다는 소문을 뒷받침하는 근거들.. 그리고 죽을 때까지 노벨상을 기다렸으나 받지 못해 실망했다는... 뭐 이런 저런 내용들. 사실상 프로이트의 이론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를 우상화하는 프로이트교(?)의 신자들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프랑스 사회에서는 워낙에 정신분석이 학계에서 비중있게 다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옹프레의 프로이트 비판은 큰 파장을 가져왔다고 한다.


하지만 한국의 독자에게 이러한 옹프레의 폭로는? 프랑스만한 파장이 있는 것 같진 않다. 오히려 옹프레의 이 책을 읽고 재밌어 하는 것은 프로이트에 관심이 있는 소수의 인문학 독자이다. 그런데 이들은 이러한 옹프레의 폭로전이 그리 새롭거나 놀랍지도 않고 그렇게 기분 나쁜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옹프레가 말하는 프로이트의 민낯이라는 것은 프로이트에게 관심이 있어서 전기 몇 권 들쳐봤던 사람들에게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닐 수 있다. 물론 이들이 프로이트교(?) 신자들이 아닌 한에서.


그렇다면 이러한 민낯 드러내기는 누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일까? 프로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국역본으로 700쪽이 넘는 이 책을 프로이트에 관심이 없거나 프로이트를 별로 좋아하지 않은 사람이 읽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책을 읽어야 할까. 앞서 말했듯 프로이트의 전기적 사실에 대한 폭로가 주는 충격적 성격은 사실 이 책에서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만 주목한다면 프로이트의 독자나 독자가 아닌 사람에게나 의미있는 책이 아니다.


《우상의 추락:프로이트, 비판적 평전》《Le crépuscule d’une idole. L’affabulation freudienne》



니체주의자의 프로이트 읽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프레의 이 비판적 평전이 재밌는 것은 옹프레가 이 글을 쓰는 방식에 있다. 이 책의 프랑스어 판 제목은 니체의 《우상의 황혼》에서 따온 것으로 《Le crépuscule d’une idole. L’affabulation freudienne》이다. 국역본은 《우상의 추락:프로이트, 비판적 평전》이지만 원래 제목을 옮겼다면 《우상의 황혼 : 프로이트의 허황》쯤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명법에서도 알 수 있듯, 그리고 그 자신이 여러번 밝히기도 했듯, 옹프레는 니체주의자이다. 그는 니체주의자 답게 프로이트에 대해 역사상 손에 꼽힐만한 뛰어난 적수가 되어 그를 읽는다. 니체가 말하지 않았던가.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옹프레는 프로이트주의자들에게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으로 메스를 들이댄다. 사실 이러한 옹프레의 작업이 재밌는 것은... 옹프레라면 인정하기 싫을지도 모르지만, 나와 같은 프로이트의 이론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보기엔 프로이트가 온갖 얼룩으로 오염된 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옹프레가 적수로 삼고 있는 대상 역시도 꽤나 매력적인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옹프레의 이 책은 2010년 프랑스에서 출간되자 마자 프로이트 주의자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최근에까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의 주제가 될 정도라고 한다. 옹프레의 이 책이 프랑스에 가져온 파장이 정신분석이 대단한 숭배를 받고 있는 프랑스의 풍토 때문이기도 하고, 또 ‘유태인’이라는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되는 금기를 건들여서 일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프랑스 현지의 그간의 사정을 감안한다해도 한국에는 프로이트라는 매력적인 적에 맞설만한 인물이 별로 없는 것도 사실이다. 프로이트를 진정 우정의 대상으로 여기는 사람도, 프로이트에게 ‘증오할 가치가 있는 적’이 되어주는 사람도 없는 것이다.




프로이트 덕후의 프로이트 비판

옹프레가 프로이트에게 맞장 뜨는 이 책이 매력적인 것은 사실 그가 원래 누구보다도 프로이트를 열심히 읽었던 ‘프로이트주의자’였던 데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프로이트를 열심히 읽었던 데에는 프랑스의 교육 환경 탓이 컸다고 말 한다. “프랑스 교육부가 프로이트를 철학계의 귀중한 자산으로 여긴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프로이트의 책을 자유롭게 읽을 수 있었다”는 옹프레의 말을 읽으면서 재밌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입시교육에서 프로이트를 읽힌다면? 아 정말 난감하다. 프로이트의 난해한 문장들은 물론이거니와 하나로 잘 꿰어지지 않은 그의 사상을 어찌 한단 말인가. 물론 요즘은 언어영역과 논술 교재로 프로이트의 글을 많이 읽는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말이다. 어찌되었건 청소년기에 프로이트를 열심히 읽었던 한 남자 아이는 학교 선생이 되어 수업 커리큘럼에 넣고 프로이트를 가르치면서 그 자신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가 되어버린 프로이트의 이론의 탄생에 얽힌 비화를 낱낱이 밝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옹프레의 프로이트 비판은 수긍한다쳐도 여전히 남는 의문이 있다. 옹프레가 자신을 ‘프로이트-맑스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일단 이 책에서 옹프레는 이와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선명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과대평가된 원인에 대해 정리하는 결론 부분에서 조심스럽게 추측할 수는 있다. 그가 프로이트가 과대평가된 원인 중 하나로 말하는 프로이트-맑스주의자들... 라이히나 마르쿠제 같은 이들의 프로이트에 대한 이해 혹은 기대가 우리에게 암암리에 프로이트에 대한 오해를 낳았다는 것이다. 옹프레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프로이트-맑스주의자들이 기대한 만큼 ‘인간 무의식의 해방’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이 그들이 처한 봉착을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해석한 것일 뿐. 오히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해방 보다는 억압과 승화에 기초한 문명사회론에 더 가까웠다는 것이다. 이러한 옹프레의 프로이트 해석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프로이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하지만 프로이트와 프로이트-맑스주의자들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연유로 옹프레는 프로이트라는 우상의 신화를 파해치면서도 맑스주의가 봉착한 문제를 프로이트-맑스주의라는 기획은 시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미셸 옹프레의 작업의 목적은 사실상 프로이트가 모두 틀렸다고 선언하고, 그의 이론을 무효화시키는데 있지 않다. 오히려 프로이트의 이론이 ‘프로이트’라는 인간 개인의 자전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을 세상에 알리는데 있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의 이론은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물음을 던지고 해답을 구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인류의 보편적 무의식을 풀 수 있는 마스터 키라도 되는 것처럼 오해했다는 것. 


프로이트가 ‘작가의 환상’에서 말했듯이 어쩌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프로이트 그 자신이 자신의 삶을 견딜만 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프로이트의 이론을 그가 만들어낸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작가와 환상’에서 작가들의 ‘환상’을 현실에 대한 부차적인 것, 위계적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았듯이, 프로이트의 이론을 폄하하기 위한 표현이 아니다. 프로이트 관점에서 보자면 어떤 철학이나 사상이든 혹은 예술 작품이든 인간 존재가 세계를 보는 하나의 틀이라는 점에서 ‘환상’이다. 이 환상을 그대로 경전처럼 욀 것이냐, 아니면 환상을 횡단하는 모험을 기꺼이 감내할 것이냐는 우리에게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