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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_철학.사회

[피케티와 21세기 불평등] 종말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불평등' 경제의 탈출구 모색하기-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피케티와 21세기 불평등] 기획을 시작합니다. 이슈&리뷰 팀에서 토마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고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주제와 이슈들을 엮으려고 합니다. 



종말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불평등' 경제의 탈출구 모색하기

-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장경덕 외 옮김, 글항아리, 2014




문화/수유너머N 회원 



토마스 피케티는 ‘부의 분배’가 어떻게 변화해왔는지에 대해 질문한다. 19세기 맑스가 믿었던 것 처럼 불평등한 구조로 갈 것인가? 아니면 쿠즈네츠가 생각했던 것처럼 발전된 단계에서 성장, 경쟁, 진보에 따라 균형을 잡아가는 힘 덕분에 불평등이 줄어들 것인가. 이 책은 바로 이 질문들에 대해 대답하기 위한 책이다. 그는 논의를 시작하기 전에 기존의 부와 소득에 대한 논의의 양상을 비판한다. 피케티가 관심있게 보고 있는 18세기 이후의 부와 소득에 대해 기존의 논의들은 대체로 정확한 자료들을 제시하고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다. 사실상 오늘날 우리는 굳이 경제학을 전공하였다거나, 관련 지식들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누구나 부와 소득에 대해 한마디쯤은 할 줄 안다. 하지만, 피케티는 이러한 대충의 직관으로 아는 것 말고 실증적인 자료를 토대로 하여 정밀한 분석을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피케티는 18세기 이후의 부와 소득의 진화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를 동원한다. 피케티가 비판하는 맑스의 분석은 통계나 실증적 자료 부분에서는 취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맑스 시대의 조건이 지금 이 시대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만 해도 현재만큼 실증적 자료가 충분치 않았으며(물론 현재는 많은 국가나 기업이 세금이나 각종 경제적 자료들을 은폐하고는 있지만) 이를 분석할 통계학도 갖춰지지 않았다. 하지만, 21세기 통계학은 이러한 광범위한 자료를 넣고 잘만 돌린다면 피케티가 원하는 분석을 얼마든지 낼 수가 있다.



왜 우리는 여전히 ‘불평등’ 할까.

이렇게 실증적 자료와 통계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피케티답게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자료들은 참으로 방대하다. 피케티는 18세기 이후 부와 소득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알기 위해 3세기에 걸친 20개국 이상의 역사적 자료를 모으고 이를 분석한다. 사실 그가 제시하는 수많은 통계와 분석들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그것이 얼마나 적절한 통계이냐에 대해 하나하나 따져보는 것은 내 능력 밖이기도 하거니와 그다지 중요한 작업도 아닐 것 같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는 잠시 제처두기로 하자. 대신 피케티가 문제 삼고 있는 ‘불평등’문제를 가속화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사실 이것은 피케티를 읽으면서 내가 가졌던 기대이고 의문이었다. 나 역시도 피케티가 말하는 대충 ‘감’으로 현재의 불평등 문제를 느끼고는 있지만, 도대체 이것이 어디에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왜... 특별히 방탕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지도 않는데 나를 비롯한 우리의 이웃은 늘 불평등한가.


종말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먼저 ‘불평등’을 바라보는 피케티의 입장이 어디에 있는 지 알 필요가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종말론과 낙관론이라는 시차를 통해 바라본다. 한편으로는 불평등으로 자본주의가 붕괴할 지도 모른다는 리카도나 맑스의 분석과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그는 이것을 멈출 수 있다는 낙관을 가지고도 있다. 그의 낙관론의 근거는 쿠즈네츠 곡선인데, 이에 따르면 불평등이 심화되다다가도 적정한 수준 이상의 성장을 이루게 되면 이 불평등은 자연히 완화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파이가 커지면 분배되는 몫도 자연히 커진다는 것. 물론 결과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케티가 쿠츠네츠를 언급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분석이 철저한 통계 작업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어떤 이상적인 가능성이나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칼 맑스Karl Heinrich Marx(1818~1883)와 사이먼 쿠즈네츠Simon Smith Kuznets(1901~1985) 사이에서


피케티는 이러한 종말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불평등’ 문제를 바라본다. 선배들이 했던 실수들은 적절히 비판하고 쳐내면서 말이다. 그에 따르면 불평등은 점점 더 심해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걷잡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현재의 자본의 동학을 철저히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피케티가 현재의 자본의 동학의 특징으로 제시하는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r>g공식이다. 자본 소득률이 경제 성장률보다 높다는 것. 간단히 말해 노동이 아니라 자본을 이용해 돈을 버는 자본 소득률이 경제 성장률 보다 높기 때문에 자본 축적의 비율이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식을 제시하는 것은 불평등의 가장 큰 요소 중의 하나인 저 꼭대기에 있는 최고 부유층의 부의 축적이 급속도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렇게 불평등이 가속화 될 때 노동 소득만으로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점점 더 가난해 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달라진 소득 비율의 변화와 불평등의 가속화를 설명하면서 피케티는 화려한 통계를 제시하는 한편으로 고전문학의 예를 든다. 마치 맑스가 화폐의 의미를 말하면서 세익스피어, 괴테를 동원했던 것 처럼 3세기 동안에 나타난 자본의 변화를 발자크, 제인 오스틴 등의 프랑스 고전소설을 동원시키는 것이다. 그가 상기하듯이 발자크의 소설에는 구체적인 금액으로서의 돈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한다.


라스티냐크는 파리의 사교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만일 파리에서 좀 행세하려면, 말 세 필 이외에도 낮에 탈 수 있는 이륜마차와 밤에 이용하는 이인승 사륜마차가 필요하지. 거마비로만 적어도 구천 프랑이라네. 게다가 의상 값으로 삼천 프랑, 향료 값으로 육백 프랑, 구두 값으로 삼백 프랑, 모자 값으로도 삼백 프랑이 들게 마련이네. 그 비용을 쓰지 않으면 행세를 못하네. 게다가 세탁집 여준인에게 천 프랑을 지불해 줘야 되네 유행을 좇는 젊은이들이면 내복 종류도 모두 다 갖추어야 하네. 그것들이 남의 눈에 띈다고들 안하나? 연애와 교회는 모두 멋진 제단보를 필요로 하거든. 이제까지 계산한 것만도 일만 사천 프랑이나 된다네. 자네가 도박이나 선물 사는 데 필요한 돈은 계산에 안넣고 말일세. 용돈으로 이천 프랑은 준비해야지 않겠나? 나도 전엔 그런 생활을 했단 말일세. 지출하는 건 알고 있었지. 그렇게 꼭 필요한 것 외에도 애완동물 사료 값으로 삼천 프랑, 개집 값으로 천 프랑을 보태보게. 자 여보게, 일 년에 꼭 이만 오천 프랑은 옆구리에서 나와야 된다는 말일세. 안 그러면 곤경에 빠져 남한테서 비웃음을 사지. 미래와 성공과 정부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네. 잊고 있었군. 말을 끄는 인부나 하인도 필요하지! 연애 편지를 나르는 일을 크리스토프가 할 수 있겠나? 자네가 지금 쓰는 종이로 연애 편지를 쓸 수 있겠나? 그런 짓을 하다간 끝장나 버리고 말지. 경험 많은 늙은이 말도 들어야지!”(오노레 발자크, 『고리오 영감』, 민음사)

위의 긴 인용문에만 해도 ‘프랑’이라는 프랑스 화폐를 나타내는 단어가 총 11번이나 등장한다. 고리오 영감 전체에서는 모두 83번이나 등장한다. 쉴 새없이 등장인물은 돈, 돈, 돈 해댄다. 에둘러 말하는 법 없이 구체적으로 얼마를 외치면서 말이다. 이 때 당시 연평균 소득은 약 400~500프랑! 이를 감안한다면, 파리에 올라온지 얼마 안되는 라스티냐크에게는 성공까지의 길이 너무나 험난하다. 품위 있는 생활을 위해 평균 소득의 20~30배의 비용이 드니까 말이다. 피케티는 이러한 발자크의 소설에서 당시의 화폐가 가지는 상징성이 엿보인다고 말한다. 이렇게 발자크가 소설을 쓰면서 구체적인 화폐 단위를 넣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소설을 쓰던 19세기만 해도 화폐의 지표가 안정적이었던데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주인공의 지위를 나타내는데 화폐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데 효과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피케티가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발자크의 소설은 당대의 파리를 ‘리얼’하게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왔다. 뿐만 아니다. 그의 소설에서는 노동 소득과 자본 소득의 갈등도 일찌감치 묘사한다. 라스티냐크가 파리에서 겪는 기대나 좌절, 그리고 고리오 영감의 최후도 역시 이렇게 당대의 자본의 풍속사와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이때만 해도 화폐 가치가 아직은 안정적이었다는 것. 때문에 풍속 묘사에 있어 탁월한 지표가 되어 주었다. 그런데 이제는 화폐의 지위는 발자크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르다. 전후 1차 대전 이후 주요 참전국은 자국 통화의 금태환을 끝냈으며, 공공부채를 처리하기 위해 화폐를 그야말로 ‘찍어’내었다. 그 결과 20세기 중반에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도래했고, 다시 1990년대 이후로는 2퍼센트대에 머무르고 있다. 이렇게 화폐는 안정적인 통화가치를 상실했으며 이것이 다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문학 전방위에 영향을 주었다. 실제로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 세계문학 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이기도... 이렇게 화폐의 지위가 불안정해진 현실이나 자본의 역동성을 함께 고려하면서 ‘불평등’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한다는 것이 피케티의 주장이다.

“피케티를 급진화”한다는 것

그렇다면, 라스티냐크와 같은 촌뜨기는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 직장을 잡을 수도 없고, 설령 잡는다쳐도 파리의 한다한 사교계에 진출도 못할 때. 반면, 고리오 영감은 면을 만드는 일을 시작으로 해 파스타 제조와 곡물 거래로 큰 돈을 벌고, 지분을 팔고(요즘으로 하면 스톡옵션) 그리고 다시 이를 국채에 투자할 때... 이렇게 역동적으로 움직이면서 증식하는 자본과 그 자본으로 인한 양극화를 어떻게 완화할 수 있을까.



'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을까?


거칠게 요약하자면, 피케티가 들고 있는 대안은 누진세나 글로벌 자본세이다. 물론 이러한 피케티의 대안에 대해 말들이 많을 줄로 안다. 그걸 몰라서 안하느냐, 어떻게 하느냐. 쉽지 않다. 뭐 이런 비판이 실제로도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이러한 피케티의 분석과 대안에 대해 무작정 그게 가능해?라고 하는 비판은 좋은 비판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피케티가 제시하는 분석이나 대안이 우리에게 무엇을 상기시키는지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 가지 예로 그가 자본소득의 비율이 높은 상위 1%나, 소득 10%에 대한 분석은 정교하게 하면서도 그는 나머지 90%나 혹은 하위 50%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석을 하지 않는다. 그가 문제로 삼고 있는 불평등은 혹시 상위 10%내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글로벌 자본세나 누진세 역시 이것이 어느 정도의 소득 수준에까지만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그가 제시하는 통계자료에서도 나왔던 것처럼 두 번의 세계대전 직후에 불평등 지표가 낮아졌을 때를 반복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떠올리기에는 여전히 ‘불평등’했던 그 순간에 불평등 지표가 낮아 진 것은 자본 소득 비율이 높았던 최상위 10%가 전쟁으로 인해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지표상으로는 조금은 ‘평등’해진 것 같지만, 중상층 이하의 삶은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모든 경우에서 우리는 가장 부유한 10퍼센트가 자신의 몫 일부를 잃으면서 주로 ‘세습중산층’이 혜택을 입었고, 인구의 가난한 50퍼센트에게는 혜택이 돌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위 50퍼센트가 전체 부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일반적으로 5퍼센트 정도로 항상 아주 낮았고, 심지어 스웨덴에서도 10퍼센트를 넘은 적이 없었다.(토마 피케티,『21세기 자본』, p.416)


피케티의 불평등에 대한 분석과 이를 완화하고자 제시하는 대안들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제시하는 대안의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너무 온화하게 불평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을 읽을 후에 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수많은 논거와 주장들 대신에, “피케티를 급진화하라”는 피케티 비판서의 카피가 와 닿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이 글의 서두에 언급했듯이 그는 종말론과 낙관론 사이에서 '불평등' 경제의 탈출구를 모색한다. 이를 위해 가지고 오는 갖가지 지표들 매우 흥미롭다. 그간 성역으로 간주된 최상위 부자들을 논란의 핵심으로 끌어들인 공도 있고, 세금 논의에 대해 이렇게 전세계 부자들이고 정치인들이 너도나도 떠드는 것 몹시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논의가 상위 1% 그들만을 위협하는 것이 될까 우려된다. 그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불평등 경제'만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이라 생각하고, 종말론에 빠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피케티가 제시하는 무기가 현실적으로 '불평등' 경제를 해소하는데 유효할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