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번역문을 올리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다른 일들에 쫓기다 보니 까마귀즘(^^;;) 때문에 시간이 한참 흘러가 버렸네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는 3-4월 두 달간 조성천, 홍서연 선생님과 함께 프랑스어 강독 세미나를 했었는데요. 3월 17일에 읽은 3회차 강독 텍스트를 김민우님이 번역해 주셨습니다. 미셸 푸코의 유명한 텍스트입니다.

Michel Foucault, "Qu'est-ce qu'un auteur?", in Dits et écrits, tome I, Paris, Gallimard, 1994[1969], p. 789-821.


이 중 강독/번역된 부분은 텍스트의 내용상 핵심적으로 보이는 부분들입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블로그 운영자





미셸 푸코, "저자란 무엇인가?"


 

(789쪽)

뱅센느 실험대학 연구소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미셸 푸코 씨는, 프랑스 철학회의 회원들 앞에서 다음의 논의들을 펼칠 계획이었다.


“누가 말하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이러한 무관심 속에서 우리 시대의 글쓰기가 지닌 윤리적 원칙, 아마도 가장 근본적일 원칙이 명확히 드러난다. 저자의 소멸은 비평의 영역에서는 이젠 평범하고 일상적인 주제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저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 아니다. 비어 있는 공간으로서, 무관심한 동시에 강제적이기도 한 공간으로서, 저자의 기능이 실행되고 있는 자리들을 탐지하는 일이 필요한 것이다.


(790쪽)

학술 모임의 보고


이 모임은 콜레쥬 드 프랑스의 6호실에서 오후 4시 45분에 열렸고, 사회는 장 발 씨가 맡았다.


장 발 : 오늘 여러분과 함께 미셸 푸코 선생을 만나게 되다니 정말 기쁩니다. 우리는 선생께서 여기에 와 주시기를 매우 기다려왔었죠. 혹시 늦으실까봐 걱정도 많이 했었고요. 하지만 선생께선 지금 이 자리에 와 계십니다. 따로 그 분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진짜” 미셸 푸코 선생이십니다. <말과 사물>을 저술하고, 광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한 바로 그 분입니다. 선생께 바로 마이크를 넘기겠습니다.


(796-7쪽)

푸코 : 하지만 저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공허한 주장처럼 반복하여 외쳐대는 것으로는 분명 충분하지 않죠. 마찬가지로, 신과 인간이 공통된 죽음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무한정 되풀이하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고요. 필요한 것은 저자가 사라짐으로써 빈자리로 남게 된 공간을 찾아보는 일, 여기 저기 분포되어 있는 결여와 균열들을 눈으로 쫓아가보는 일, 그리고 저자의 사라짐이 출현케 한 자리들을, 자유로운 기능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입니다.


저는 우선 저자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들을 짧게 몇 마디 말로 환기해보고 싶은데요. 저자의 이름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그 이름은 어떻게 기능 작용할까요? 여러분께 해답을 제시해주는 대신, 저는 저자의 이름이 불러들이는 난제들 몇 가지만 지적하고자 합니다.


일단 저자의 이름은 고유 명사입니다. 그것은 고유 명사와 똑같은 문제들을 제기하죠. (여기서 저는 여러 가지 분석들 중에서 존 설의 분석을 참조합니다.) 분명히, 고유 명사를 순전히 지시작용만 하는 것으로 만드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고유 명사는 (저자의 이름도 그러합니다만) 지시적인 기능 이외의 다른 여러 기능들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고유 명사는 지시, 몸짓, 누군가를 가리키는 손가락의 역할로 축소시킬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는 기술[記述]과 동등한 역할을 한다고도 말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가 “아리스텔레스”를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기술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혹은 일련의 규정된 기술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낱말은 “<분석론>의 저자” 또는 “존재론의 창시자” 등의 기술들과 동등한 역할을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게 다는 아닙니다. 여기서 논의를 그칠 수는 없습니다. 고유 명사는 순전히 한 가지 의미만 갖는 건 아니기 때문이죠. 랭보는 <영혼의 사냥>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해서, 이 고유 명사에 혹은 이 저자의 이름에 의미의 변화가 일어났다고 억지 주장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고유 명사와 저자의 이름은 기술과 지시라는 양극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는 것입니다. 고유 명사와 저자의 이름은 그것들이 지명하는 자와 틀림없이 어떤 관계를 맺고 있지만, 지시의 방식으로도 기술의 방식으로도 그러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또한 저자의 이름에 특유한 어려움들이 나타나는 것은 바로 여기에선데요― 고유 명사가 지명된 개인과 맺는 관계와 저자의 이름이 그것이 지명하는 자와 맺는 관계는 동형적이지도 않고, 똑같은 방식으로 기능 작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798쪽)

결국 저자의 이름이란 담론의 어떤 존재 양식을 성격지우기 위하여 기능 작용하는 것입니다. 어떤 담론이 저자의 이름을 갖는다는 사실, 우리가 “이것은 이러이러한 사람이 저술하였다”거나 “이러이러한 사람이 저자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점을 의미합니다. 즉, 그 담론은 일상적이고 무관심한 말, 없어지는 말, 나타났다 사라지는 말, 즉각 소비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는 점을. 하지만 어떤 방식 속에서 수용되어야만 하고 주어진 한 문화 안에서 어떤 지위를 수용해야만 하는 어떤 말이 여기서 문제되고 있다는 점을 또한 말이죠.


우리는 결국 다음과 같은 관념에 이르게 됩니다. 곧 저자의 이름은 고유 명사가 그러하듯이 담론의 내면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생산한 구체적이고 외적인 개인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는 관념에 다다르는 것이지요. 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저자의 이름은 어떤 의미에선 텍스트들의 경계/한계로 달려간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을 절단한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의 멈춤을 따라간다는 관념, 그것은 텍스트들의 존재 양식을 드러내거나 적어도 그 양식을 특징짓는다는 관념에 다다르는 것이죠. 저자의 이름은 담론의 어떤 집합이라는 사건을 드러냅니다. 또한 그것은 어떤 사회와 문화 내부에서 담론이 갖는 위상과 관계합니다. 저자의 이름은 사람들의 주민등록/호적 속에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작품의 허구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죠. 그것은 담론의 어떤 집합과 자신의 독특한 존재 양식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단절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것과 같은 문명에는 “저자”의 기능을 갖춘 일군의 담론이 존재한다고, 반면에 다른 문명들에는 그런 기능이 부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죠. 사적 편지에는 서명자는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계약서에는 보증인은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길거리 벽에 낙서된 익명의 텍스트에는 작성자는 있겠지만 저자는 없습니다. 따라서 저자 기능의 성격이란 한 사회 내부에서 어떤 담론이 갖는 존재 양식, 순환, 기능 작용을 뜻하는 것입니다.


(814절)

루시앙 골드만의 질문 :

저 역시 미셸 푸코 선생께서 강조하신 어려움과 맞부딪쳤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은데요. 작품을 정의 내리는 것의 어려움 말입니다. 개별적 주체와 관련지어 작품을 정의하는 일은 사실상 어렵고 또한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푸코 선생이 말씀하셨듯이, 니체 또는 칸트가, 라신 또는 파스칼이 문제가 될 경우, 작품의 개념은 과연 어디서 끝이 날까요? [어디까지가 그들의 작품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요?] 그 개념은 발표된 텍스트에서 끝나야만 할까요? 아니면 그것은 세탁소 영수증까지 포함하여 발표되지 않은 모든 문서들을 포함해야만 할까요?


(817쪽)

미셸 푸코의 대답 :

게다가, 저는 저자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진 않았습니다.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죠. 제 담론이 그러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는 것을 보고 좀 놀랬습니다. 이 모든 사항을 잠깐 다시 살펴보기로 하죠.


저는 작품들에서나 비평에서 찾아낼 수 있는 어떤 주제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요컨대 담론에 고유한 형식들을 위하여 저자는 삭제되거나 소거되어야만 한다는 주제 말입니다. 이걸 인정한다면, 제가 던졌던 물음은 다음과 같은 물음이었습니다. 작가 혹은 저자가 사라질 때의 규칙은 과연 무엇을 발견하게끔 하는가? 이 규칙은 기능-저자의 유희를 발견하게 해줍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참가)

 

신고
Posted by 노마디스트
이전버튼 1 이전버튼

블로그 이미지
노마디스트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516)
이슈&리뷰 (51)
빌린 책 (43)
개봉영화 파헤치기 (15)
풍문으로 들은 시 (13)
장애, 그리고... (4)
4040 (5)
칼 슈미트 입문 강의 (32)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 (4)
시몽동X번역기계 (6)
과학 X 철학 토크박스 (2)
해석과 사건 (6)
화요토론회 (24)
기획 서평 (34)
과거글 (272)
Yesterday303
Today96
Total1,686,406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