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5월 22일 새벽 2시 15분입니다. 요번 주에 축제도 있고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아서 이제야 글을 쓰는 게 제 잘못이기 하지만 너무 피곤하네요.

제가 구체적으로 체험한 공동체중에 무엇을 쓸까 하는 것은 요번에 매우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 제가 들어간 동아리 일을 하다가 이제야 마쳤기 때문입니다. 요번에 대학에 입학해서 난생 처음으로 동아리에 들어갔습니다. 저희 동아리는 SCAA라고 하는데 통신홍보국으로서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데 그 중에서 지금 주력으로 하고 있는 것은 학교의 인터넷 잡지인 ‘성균웹진’ 운영입니다. 기자가 될 생각은 없지만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남는 것을 해보고 싶어서 이 동아리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모르는 것도 많고 서투른 것도 많지만 HTML, Coding, 포토샵 등을 배우고 기사도 쓰면서 새로운 경험에 흥미를 느끼고 있습니다. 대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동아리에 들어갈 기회가 없어서 못해본 것이 매우 안타까웠었는데 지금 동아리에 들어가서 매우 만족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동아리에 들어갔을 때 여러 과를 전공하는 학생들을 만나서 새롭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좋아서 지금은 과 친구들 보다도 더 친하고 편해졌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불만인 점이 있습니다. 바로 호칭과 권위에 대한 문제입니다. 제가 속해있는 철학과는 호칭을 ‘합의제’로 하고 있습니다. 선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 후배나 나이가 적은 사람한테 무조건 반말을 하고 후배나 나이 적은 사람이 무조건 존댓말을 쓰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그런 것에 관계없이 서로를 높여 말하다가 둘의 합의에 의해서 호칭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는 적어도 호칭에 관하여서는 모두가 기분 나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희 과는 선배나 나이가 많다고 해서 후배나 나이가 적은 사람한테 어떤 것을 강제로 시키거나 권할 수 없고 모든 책임과 권리를 평등하게 가지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반면에 SCAA는 매우 권위적이고 서열적입니다. 이 동아리에서는 호칭을 ‘학번제’로 하여 무조건 선배는 후배에게 반말을 하고 후배는 선배에게 존댓말을 해야 합니다. 또한 청소나 여러 가지 일들은 아래 기수 일수록 책임이 더 지워지며, 위 기수로 올라갈수록 아래 기수에게 뭔가를 강요하거나 시키거나 잔소리하는 등의 권위를 행사합니다. 저는 이러한 문화에 매우 거부감을 가지고 있으며 싫어하는 것에서 머물지 않고 그러한 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더 노력할 것입니다. 한 선배에게는 제가 동아리를 나가기 전에 이러한 문화를 바꾸고 말 거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제 바로 위 기수는 이러한 것이 자신들도 좋지는 않지만 오랜 전통이라서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은 정말 비겁한 변명일 뿐입니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면 바꿔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이라는 권위를 작동시켜 자신들의 논리를 정당화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전통과 위계에 대해서 찬성하는 사람들은 예의와 질서를 운운합니다. 하지만 이는 제가 생각하기에 허위적이고 위선적인 말일 뿐입니다. 그런 예의와 질서는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물론 그것 빼고는 저는 지금 제 동아리가 너무나도 좋습니다.


저는 사람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공동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여러 행복과 협동, 갈등과 다툼이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 공동체 속에서 지내오면서 때로는 행복에 겨워도 봤고 상처를 입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공동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성숙시키고 풍부하게 만듭니다. 또한 대부분의 공동체는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성원들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목적을 달성했든 못 했든 간에 그 과정 속에서는 얻는 것이 있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는 거기에 있을 것입니다.


글 / 박정준 (수유너머N <대학생을 위한 이진경의 철학교실> 수강)

* 이번 학기 <철학교실>을 수강하는 친구들이 '국가'와 '공동체'를 주제로 쓴 글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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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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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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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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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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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말처럼 좋은 철학이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삶을 긍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일 것이다. 삶이 ‘편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편한 삶, 좀 더 잘 벌고 좀 더 잘 쓰는 삶으로 대체되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해지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은 절실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좋은 학교, 좋은 집, 많은 돈이 그것을 가려간다. 이제라도 다시 눈을 돌려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황금빛 장막을 걷어치우고, 거기 가려진 삶을,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야 한다. 철학을,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직업학교가 되고, 돈의 장막을 몸에 덮어씌우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강의는 ‘큰 배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되었다.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대적 삶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사유할 수 있는 촉발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을 배우긴 쉽지만, 그런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은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연속강의를 통해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강좌는 크게 2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이진경이 주도하는 강의는 길을 가기위한 지도를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세미나인데, 이는 스스로 지도를 읽고 찾아가는 훈련의 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의와 세미나를 모두 참여하셔야 합니다.
(문의: 유심 ㅇ11-9571-15ㅇ9)


[토요일] 강의: 노마디즘 1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예언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그게 사실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들뢰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요. 잠시 시작되는 듯하다 중단되고 만 것은 무엇보다 그의 책이 갖는 난해함 탓일 겁니다. 사유의 깊이를 잴 수 없게 하는 난해함. 이번 강의는 들뢰즈 사상의 개요에서 시작하여 <노마디즘 1>을 함께 읽으며 그의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면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유목민의 전차를 모는 사유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개강: 5월 7일


[일요일] 세미나: 인디언의 사상

“유목민은 역사를 쓰지 않는다.”(들뢰즈/가타리)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화나 제의 등이 그것이었다. 백인들과의 적대적 만남, 혹은 인류학자들과의 우호적 만남을 통해 그것들은 부분적이나마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디언은 이런 유목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번 세미나는 인디언 추장의 말이나 인류학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사유와 만나고자 하며, 그것을 통해 근대와 다른 종류의 삶에 접근하고자 한다.

개강: 5월 8일


[등록 방법] 

1. 강좌신청 게시판에 신청글을 남깁니다.    (http://nomadist.org/xe/apply)

2.  길잡이에게 확인 문자를 한 통 보냅니다. (ㅇ11-9571-15ㅇ9)

3. 송금을 합니다. (우리은행    588-000927- 02-101,  예금주 명: 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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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문학, 공동체에 대해 관심있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시간: 2011년 4월 12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희동 소재)

 

발표자 : 화

토론 : 김은영

우정의 간식 : 최진석

참가비 : 무료

 

 

 

Dulac_Edmund_Orpheus_And_Eurydice-swwyang.jpg

[Edmund Dulac]Orpheus and Eurydice]

 

 

 

 

 

발표 안내 :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

 

문학은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문학이 만들어낸 공동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민족문학·세계문학이 만들어낸 하나의 중심이 있는 공동체. 다른 하나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 낭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무위(無爲)의 공동체’다. 맑스가 꿈꾸고 낭시가 ‘무위(無爲)의 공동체’에서 다시 언급한 이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인, 즉 자유가 진정으로 군림하는 것인, 인간적 역능의 개화가 시작되는’곳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질적 생산의 영역 저 너머에’ 위치하는 어떤 공동체”다.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그려내는 문학은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소통과 통합은 고정된 개체성을 깨는 데서 시작하기에 더욱 본질적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한국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이 타자를 만나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분명히 도래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문학과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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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굴다리 밑의 눈이 녹았다. 얼었던 지면이 물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며칠 전 시원하게 쏟아 붓던 빗줄기도 모두 어디론가 스며들어 길을 적셨다. 한겨울 같았으면 생각도 못했을 일이다. 지난 겨울, 자전거라도 탈라치면 날리는 바람에 얼굴은 깨질 듯했고, 입김은 목도리에 성에를 남기곤 했다. 그때 땅은 얼어붙어 무엇 하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개의 오줌도,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아스팔트의 잿빛 물도, 지면은 천천히 빨아들인다. 나는 문득 사랑을 떠올렸다.


2.

 성년이 되기 위해 사냥 훈련을 나간 인디언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 그는 어떤 여성을 만나 사랑을 하는데, 이 여성은 염소 가죽을 둘러쓰자 염소가 되었다(!) 남자도 염소 가죽을 뒤집어써보니 그도 염소가 되었다. 여성과 결혼한 그는 모든 염소와 가족이 됐다. 꿈에서 깬 남자는 동료들과 염소 사냥을 하러가 자신의 아내와 아이였을 암염소, 새끼 염소를 제한 숫염소를 필요한 만큼만 잡았다. 죽인 숫염소에 대해서도 이들은 다양한 절차와 의식을 거행, 마지막으로 내장과 뼈를 흐르는 물에 가라앉혔다. 그 넋이 다시 자연 속에 편안히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동물에 대한 이런 세심한 배려는 특히 동물을 죽이는 장면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습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최고의 경의와 성실함을 갖춘 태도가 요구됩니다. 동물과 인간은 완전히 대등한 존재가 되어, 인간끼리의 결투에서와 똑같은 ‘아름다운 행동’이 요구되었던 겁니다.” *1)


3.

 책 <<곰에서 왕으로>>는 신화적 사고에 깃든 인간과 자연간의 대칭적 관계를 보여준다. 종교학자이자 철학자인 저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아메리카 서해안부 인디언의 이야기를 통해 국가 이전의 공동체적 사고가 어떤 원칙으로 구성되었는지 이야기 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가 출현하기 이전 인간은 곰, 야생염소, 연어, 범고래 등과 자신을 자연 안에서 대칭적인 관계로 파악했다. 이들은 다른 종을 동일화의 논리로 포섭하지 않고, 적대의 논리로 배척하지 않았다. 신화 속에서 그들은 다만 서로가 증여의 관계를 통해 종을 오간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대칭성의 사고는 국가의 출현과 함께 무너진다. 인간과 인간 아닌 것들이 공생하던 자리에는, 인간을 더 ‘고귀한’ 인간들이 지배하는 국가가 들어선다. 사랑, 문화, 대칭성 대신 적대, 야만, 비대칭성이 들어선 것이다. 저자는 대칭성에 기반을 둔 신화적 사고를 통해 현재의 삶을 분석할 수 있는 ‘머나먼 시선’(레비 스트로스)를 다시 끌어들이고자 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대칭성의 사회 원리를 자꾸만 사랑의 원리로 포개어 보게 되었다.


책이미지.jpg


4.

 사랑이라 할 때, 우리는 쉽게 개인과 개인의 만남, 그 중에서도 하필이면 이성간의 만남을 떠올리곤 한다. 나는 이 관계가 연대의 쾌감을 맛보는 극히 제한된 형식이라 생각한다. 이성간의 사랑마저 아우르는 연대의 쾌감이란 뭘까? 그것은 ‘나’라는 닫힌 존재가 타자와 접속하려는 추동력의 다른 말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무장해제하려는 마음이다. 동일시와 연민, 이 두 가지 모두이면서 둘 모두 부정하는 낯선 힘. 나 아닌 자와 내가 연결돼 있다는 근본 없는 믿음과 자신감. 그래서 기꺼이 공명하고 변화를 감수하려는 태도. 이러한 힘이 연인 사이에서 발현될 때 서로의 손길을 허용하고, 타액의 긍정하며, 온몸을 울려 평소와는 다른 호흡과 신체를 작동시킨다. 타자에 대한 총체적인 관심과 연속성에 대한 욕망은 우연을 받아들이고, 개인을 넘어서려는 체험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신화 속에서 인간은 곰이 되고, 야생염소가 되고, 연어가 되었으며 그들 역시 인간의 몸이 되어 사랑을 나눈다. 사랑을 통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신체를, 온갖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감히 도전한다. 타자를 향해 열린 신체, 타자와 깊이 감응할 수 있는 신체, 그로 인해 내가 변하며, 변화된 신체를 기꺼이 준비하는 것. 그것은 대칭적 사고 속에서 가능했다.


5.

 나는 사랑이 대칭적 사고에서 나아가 연대를 향한 삶의 추동력이라 생각한다. 개인에서 벗어나 관계를 증식하려는 욕망으로 사랑을 정의한다면, 그것은 항상 공동체를 향한 추동의 힘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철학이 바탕에 깔린 인디언의 삶을 나는 그 자체로 사랑하는 삶의 기술, 기예로 읽는다. 그리고 그러한 추동이 어디에서 오는가가 굳이 궁금하다면 다음 뒤라스의 소설이 이를 잘 보여줄 것이다.
 

당신은 사랑의 감정이 어떻게 불시에 솟아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 여자는 당신에게 대답한다: 우주의 운행질서가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라고 할까요. 그 여자는 말한다: 예컨대 실수에서. 그 여자는 말한다: 결코 의지로부터는 아니죠. 당신은 묻는다: 사랑의 감정이 다른 곳으로부터 솟아날 수 있소? 당신은 말해달라고 애원한다. 그 여자는 말한다: 모든 것에서, 밤새의 비행에서, 잠에서, 잠자면서 꾸는 꿈에서, 다가오는 죽음에서, 단어에서, 범죄에서, 그냥 저절로, 왠지 모르게 갑자기 *2)


6.

 나는 오늘도 나의 말과 나의 경험을 다른 이와 나누고 싶다. 다른 무엇과 접속하려는 사랑의 실천. 그것은 항상 나 아닌 자를 필요로 하며, 우연이 수반할 고통마저 긍정한다. 그것은 “잠에서, 잠자면서 꾸는 꿈에서, 다가오는 죽음에서, 단어에서, 범죄에서, 그냥 저절로, 왠지 모르게 갑자기” 언제나 찾아온다.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를 긍정하는 일 뿐이다.

 굴다리 밑의 눈이 녹았다. 겨우내 물이 없어 얼음을 핥으며, 목이 말라 죽던 고양이는 더는 없을 것이다. 



** 이 글은 <위클리 수유너머> 3월 8일자에 <굴다리 밑의 눈이 녹았다>라는 제목으로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1) 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 김옥희 역, 동아시아, 116쪽.

*2) 마르그리트 뒤라스, <죽음에 이르는 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인사미술공간, 65쪽.




글 / 유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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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2011. 2. 24-25. 수유너머N 국제워크샵 <대중의 주체화와 문화정치학>은 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과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을 비롯해서 오사카 대학에서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한 자리였습니다. 특히 25일의 프로그램에서는 수유너머N과 오사카 분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것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말들이어서, 그날의 토론을 매우 거칠게나마 옮겨봅니다. 오후와 저녁 내내 통역을 담당한 하지메상과 오하나양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중 제 기록에서 틀린 부분과 빠진 부분들에 대해 더 정확하고 자세한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의 보충을 기다립니다.

기록 / 홍서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indooa at gmail.com / twitter@seedv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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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의 저서 <전장의 기억>과 <폭력의 예감>에 대한 논평에 앞서

 

도미야마 : 올바르지 못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회의하면서 올바름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올바른 설명'이 오키나와에 계속 따라붙었다. 오키나와를 말할 때 올바르게 논의하는 것과는 다른 대상 접근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휘말려들일 수 있는 힘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올바른 설명이 올바른 연대로 이어진다는 말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 말은 내게, '나는 그런 연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보였다. 연대, 지원을 말하면서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서, 감히 휘말려들 수 있게 하는 말이 있는 곳에 운동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폭력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신체성의 증거들이 있다. 나는 휘말림을 축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휘말림을 확보하고 싶다. 휘말리지 않았으나 꼭 휘말릴 것 같은 사유들이 있다. 이러한 사유는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사유다. 이것이 바로 "예감"이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남의 일이 아닌 것에 대한 것이다.

타자와 내가 포개지는 신체감각으로서의 예감을 사유하고 싶었다.

휘말려들인다는 것은 곁에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 혼재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치가 있다.

이러한 신체성 속에 가능성이 숨겨져 있고, 현행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초점과 확장주의(expansionism)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대상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을 휘말려들게 하는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정치는 혹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다초점 확장주의'는 독일에서 있었던 사회주의 환자 동맹[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하이델베르크 환자 공동체’(SPK). 68이후 나타난 소수자 운동을 말씀하시는 듯]이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다. 확장주의란 연구에서 복수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올바름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상황적이고 복수적인 복수성으로 향한다. '분야'와 관계해서 복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서 단서를 확보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는 복수성을 말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연구를 생각하고 싶다.

그런 행위의 방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과연 강령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러한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자본주의 속에 오키나와를 위치짓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재구성하려고 생각 중이다. 그것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정행복, 최진석의 토론문을 읽은 후 도미야마 선생님의 토론

 

도미야마 : … "전장의 기억은 정치다!"라고 표현한 정행복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 방어태세를 설명하는 것과 연관된다.

폭력의 예감. 무장해제를 안정화시키는 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행복의 요청(일상을 지배하는 무신경한 내셔널리즘에 전율을 일으키는 '발견되어야 할 폭력의 예감'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이야기를 들려달라는)에 대해 응답하겠다. 오키나와에서의 정신의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존의 논의들과는 다른 논의를 원했다. 전쟁을 둘러싼 트라우마들을, 질병의 이름(병명)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행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가능성들을 찾는 것, 이것이 내 문제의식이다.

69-70년대에 오키나와에서 활동했던 집단들을 볼 때, 70년대에 오면서 정신의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왔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 병, 거기에 있는 권력을 어떻게 비판하는가가 그 집단들의 문제의식이었다. …

오키나와의 경제는 식민지 경제 속에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붕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standing policy, 개발, 부흥 등이 오키나와에서는 20년대부터 있었는데, 그러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세계 각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점으로 오키나와를 연관시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외부로 나간 사람들을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 제도, 시스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진석이 논평의 말미에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으로 가면 안 되지 않을까? 그것을 비판하고 싶다. 주디스 버틀러의 멜랑콜리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of Subjection. University Press of Stanford, 1997.] 상처를 계속 끌어안고 가는 것, 그 지점에 멜랑콜리가 있다. 정신분석이 갖는 한계가 거기에 있다. 개인이 설정되어 있고, 개인과 개인이 맺어져 연대가 된다고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오키나와의 정신의료가 문제된다. 펠릭스 가타리가 제기한, 언표행위의 집단행위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객석 질문과 토론

 

유선 : 올바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올바르지 못한 것을 물리치고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적어 놓지 않은 탓에 기억에 의존하여 매우 거칠게 재구성했다. 죄송 ;ㅁ;]

 

도미야마 : 내가 말한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휘말려들어가는 것이 문제된다.

최진석이 말한 영속성에 대한 것과 연결된다. 집단과 집단 간의 싸움을 빼놓고 네트워크 간의 것으로만 얘기하면 얘기가 아주 부족하다.

 

서연 : 선생님께서는 <폭력의 예감>에서, 관찰대상뿐만 아니라 연구자(관찰자) 또한 브리콜뢰르, 공작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연구자도 관찰자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워진 목적 하에서의 전체적인 조망을 가질 수 없고 언제나 만들고 있는 와중에 있다.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연구자가 관찰대상이 되는 현지인의 언어를 접할 때, 그들의 고유어, 예를 들어 '마나'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가 했듯이 '제로치'와 같은 말로 번역하거나 '무의식'으로 환언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단지 관찰자에게 외국어인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해결책은 아닐 텐데, 어떻게 새로운 말을 창조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 : 새로운 이야기는 번역이 정확하게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마나는 달아나고픔, 두려운 감정과 같은 신체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 생겨나는 감각들에서부터 말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사회성, 사회적 프로세스가 나오는 것이다.

기술되지 못한 것, 잘 모른 채로 만든 것. … 실제대로 기록하는 것, 여기에서 시작된다. 마나와 말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점을 볼 수 있다.

 

사카이 : 마나는 상품, 상품어(상품에 결부된 말들)이기도 하다. 상품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 마나는 어디에나 있다.

 

 



 

타카하시 아츠토시의 발표 <수유너머에게: 카페 커먼즈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에 대한 토론

 

[앞부분을 듣지 못했음]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 대해).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있는데, 히키코모리들은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사회를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부끄럽다는, 이러한 신체감각 말이다.

 

꾸냥 :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게 오타쿠는 멋진 존재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타쿠는 이인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는 혼자다.

(야오이 연구를 하고 있는 아지마상에게 요청).

 

아지마 : 오타쿠는 동료가 있고 사교적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원하는 것을 사고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의 발표문 <지금 여기로부터의 사회개혁론>에 관련된 토론

 

[앞부분을 적지 못했음].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님이 올바름으로써 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이너리티의 입장에 있는 말이다. 마이너리티가 마이너리티인 것은 자기책임을 지겠다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상품의 폐지, 화폐의 폐지를 말한다. 상품, 화폐가 무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권력이나 법으로 금지해 봤자이다. … 그러므로 본능적 공동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써 우회하자는 것이다.

 

이진경 : 선생님은 대화관계, 대면관계에서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하셨다. 그것들은 2자관계인데, 3인칭이 되면, 즉 3인 이상의 여럿이 모여 사람 수가 많아지면 2자관계는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가? 집단성은 (2자관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집단성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카이 : 그것은 내가 생협운동의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조합원은 듣는 입장을 취하고, 상대편은 말하게 만든다. 나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발표에서, 여기에는 국가론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본론>의 아날로지를 빌리자면, 간단한(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전체적(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가치형태, 화폐형태가 있다. 처음부터 권력이 거기 개입하고 있다. … 

공동성이란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이것은 보여지는 쪽,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쪽이 어떤 식의 이니시어티브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수동적인 입장은 소수자이고, 그들은 다수자의 … (?)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도미야마 선생의 연구에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복잡한 구조에 대해 말했다.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 앞에서 그들이 이니시어티브를 갖게끔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도미야마 : 상품을 팔게 하는 동력이 무의식이라 하셨고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신 데에 동의한다. … 그런데 그걸 그대로 남겨 두면 그것은 국가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다. … 무의식을 그대로 남겨 두면 국가를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제도라 할 수 있다. … 우리가 무의식적 흐름에서 벗어나고 바꾸려 할 때 우리가 똑같은 것-국가-이 되어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가치형태론에서 … 될 수 있다고 하지만… )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이 말한, '강령을 만들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공통적인 토대를 만드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 결국, 우회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관점이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폐기시키는가. 말로는 쉽다. 그러나… 고용되어 노동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1997년 쯤에 지역통화제의 예. … 이것은 시장을 대체하는 강제라 생각한다. 시장에서는 지불하고 결재하는 기능을 은행이 한다. 지역통화는 각각의 회원이 계좌를 만들어, 마이너스가 되어도 괜찮다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플러스가 되어도 이자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은행에서 이자가 생기는 형태는 장사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이용해서 이것 없이 장사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1997년 단계에서는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한 장의 그림을 들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을 그걸 보고 '안되겠지?'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보다가 어쩌다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애국투쟁, 엘리트가 되어 (사람들을) 지도하면 엎어진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다. 소련체제 하에서 관료제가…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권력이 무너져도 다른 권력이 장애물로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고정된다.

 

와타나베 : 도미야마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겠다. 사카이 선생님과 도미야마 선생님 사이에서도 당파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지역통화 등에 대해서도 둘의 말하기 방식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데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이다.

 

타카하시 : (그분들이 당파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다르겠다. 구체적, 추상적으로… 지역의 차이, … 등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친구'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었다. 친구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관계다. 차이를 언제나 전제하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사카이 : 옛날의 나 같았으면 정치적 의사통일을 주장하며 싸웠을 지도 모른다. 유일성과 공통성을 어떻게 함께 (기능하게) 할 수 있나 생각하고 있다. 유일성을 갖고 있는 개개인이 공동관계를 만든다. 이런 것을 조합운동에서 볼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고 할 때 개개인이 뭘 생각하는가는 한계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나의 입장은, 사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입장이다. 그것은 코뮨 같은 공동체에서, 외부의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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