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일산의 한 번화가에 ‘맛(Taste)’이라는 식당이 문을 연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음식점인 ‘맛(Taste)’은 ‘광고와 다를 바 없는’ 텔레비전 맛집 프로그램들의 실태 고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트다. 영화 <트루맛쇼>는 ‘맛(Taste)'이 맛집 프로그램에 방영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 과정 중에 ‘맛집 전문 브로커 임선생’이 등장한다. 그는 ‘향기 나는 것이 아닌 눈으로 보는 것’이라는 텔레비전 미디어의 속성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는 맛집 프로그램과 맛집에 출연을 원하는 식당을 이어주고, 맛집 프로그램용 메뉴를 개발하며, 맛집 사장으로 분장해 연기까지 한다. 임선생이 대박을 터뜨린 ‘캐비어 삼겹살’ 텔레비전 영상은 상상을 초월하는 사기극에 방송과 시청자가 부화뇌동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뿐 아니다. 영화 속에는 실제 활동 중인 연예인이 자신의 맛집인 양 거짓으로 맛집 프로그램을 찍는 모습이 고스란히 등장하고, 제작진이 맛집 프로그램 가짜손님으로 출현한 에피소드도 등장하며, 무엇보다 이러한 조작을 일삼고 있는 맛집 프로그램 이름을 완전히 노출시킨다. 객석에서는 커다란 웃음소리가 연신 터지는 한편 묘한 긴장의 순간도 있었는데, 이 긴장감은 거칠 것 없이 다 드러내 놓는 <트루맛쇼>의 노출수위에 기인했을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트루맛쇼>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맛집 프로그램 인용 장면들이 영화의 다른 장면들과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트루맛쇼>는 한편의 잘 짜여진 주말오락 프로그램 같이 느껴지는데, 이는 <트루맛쇼>의 형식 때문이다. 그 형식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주로 쓰이는 빠르고 화려한 화면 편집과 CG의 사용 같은 것이다. <트루맛쇼>는 그가 고발하고자 하는 텔레비전 미디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궁금증이 발생한다. <트루맛쇼>의 제작진은 의도적으로 텔레비전 미디어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 방송국 PD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트루맛쇼>의 제작진 상황 상 자연스럽게 텔레비전과 같은 형식이 만들진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영화 초반부의 한 장면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식당 ‘맛(Taste)'이 꾸려지고 방송출연을 위해 방송협찬대행사에 연락을 돌리는 장면에서 뒷면 벽에 붙어 있는 플랭카드는 세 번 바뀐다. 첫 번째는 ‘맛(Taste), 소비자 고발’ 두 번째는 ‘맛(Taste), 불만제로’ 세 번째는 ‘맛(Taste), 그것이 알고 싶다’. 이는 <트루맛쇼>가 세 가지 방송 프로그램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니까 <트루맛쇼>가 하고자 하는 것은 맛집 프로그램의 거짓과 조작을 폭로하는 것뿐만 아니라,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형식을 빌려와 그들이 잃어버린 저널리즘의 집요함으로 그들을 찍어내는 것이다. ‘방송은 시청자를 속이고, (이와 같은 방법으로)<트루맛쇼>는 방송을 속인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트루맛쇼>는 TV 프로그램들이 가지는 한계 또한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트루맛쇼>는 TV 맛집 프로그램의 조작 실태에 대한 다양한 사람들의 고발과 비판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관객들이 보기 편하게 정리하여 전달하는 차원에 머문다. <트루맛쇼>는 관객의 몫에 해당하는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 대신에 커다란 하나의 선택지를 내민다. ‘당신은 트루맛쇼를 계속해서 볼 것인가?’ <트루맛쇼>는 영화를 다 보고 돌아가는 관객들에게 ‘TV를 계속 볼 것인가, 끌 것인가’, ‘파란 약을 먹을 것인가, 빨간약을 먹을 것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트루맛쇼>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트루맛쇼>는 ‘역지사지 퍼포먼스 미디어 3부작’ 중 첫 번째 퍼포먼스 ‘그들의 방식으로 그들을 촬영해 보기’로 제작되었다. 아직 공개되진 않았지만 이어서 나올 두 번째 세 번째 퍼포먼스도 <트루맛쇼> 못지않게 파격적인 작품들이 될 것이다(되기를 바란다). 또한 <트루맛쇼>에 등장하는 연예인이나 인용된 맛집 프로그램들의 이름이 그대로 노출된 것은 이로 인해 빚어질 소송과 피해를 감내하겠다는 감독의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4월 29일, 전주영화제에서의 <트루맛쇼>의 첫 영화 상영이 있었다. 그날 이미 많은 방송관계자들이 다녀갔고, 인터넷 포털과 신문, 블로그들에 <트루맛쇼>에 관한 이야기가 올라왔다. 종편 4사의 방송이 브라운관을 점령할 시점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미디어에 대한 강도 높은 고발을 담고 있는 <트루맛쇼>가 방송사들은 물론이고 한국사회에 전체에 던진 충격이 크고 오래가길 기대해 본다.




글 / 권은혜(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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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울고, 한 번은 웃고


<혜화,동>을 두 번 봤다. 첫 번째 볼 때에는 ‘동일시’가 잘 일어나 눈물도 찔끔 흘렀는데, 두 번째 볼 때에는 ‘반동일시’가 일어나면서 화가 났다. <혜화,동>을 다시 보기까지는 두 달 정도의 기간이 있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이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머리 혼자 멋대로 이 양가감정에 대한 원인을 파헤쳐가기 시작했다.

영화는 감독의 ‘선택과 결단’에 의해 만들어지는 예술이다. 영화를 만들 때에 감독은 소재에서부터 시나리오, 콘티, 카메라의 위치, 쇼트의 크기, 빛의 양, 사운드, 편집에 이르기까지, 매 순간 순간을 ‘감독’으로서 선택하고 결단한다. 이러한 ‘감독의 선택’과 결단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하나는 ‘무엇을’ 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떻게’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선택과 결단 중 비평가의 개입은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할까.

영화를 다른 이론이나 담론에 기대어서가 아닌 영화 자체로서 사유하고자 할 때, 영화는 시각과 청각의 지각매체 혹은 이미지로 사유하는 매체라 여겨지고, 비평은 영화 속으로 들어가 쇼트의 크기와 길이 및 몽타주와 같은 ‘어떻게’에 대한 선택과 결단에 개입한다. 영화를 영화 자체로서 사유하는 것, 이미지로서, 감각으로서 사유하는 것. 그것은 들뢰즈의 말처럼 현재와 같이 개념적 사유능력이 이미지적 사유능력보다 우수하게 평가받는 시대에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영화 그 자체이기 이전에 이 ‘세상’과 그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것들의 ‘삶’을 전제하고 있으며 많든 적든 영화를 보는 관객이 있다. 즉, 영화는 어쩔 수 없이 시대와 공간, 삶에 대한 책임이 있다. 이렇게 영화가 담고 있는 시공간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할 때, 비평은 감독의 ‘무엇을’에 대한 선택과 결단에 개입할 수 있다. 이번 글에서는 <혜화,동>이란 영화의 ‘무엇을’에 대해 개입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칭찬해 마지않는 <혜화,동>의 ‘어떻게’에 대해 짚고 가자.

 

 

웰메이드, <혜화,동>


<혜화, 동>에 대한 몇몇 비평문에서 다루어진 주된 내용은 영화에서 많이 쓰인 클로즈업의 섬세한 포착과 과거와 현실을 별다른 장치 없이 과감하게 넘나드는 몽타주, 여주인공 혜화(유다인분)가 5년 동안 모아온 육화된 슬픔으로서의 손톱무덤 같은 알레고리 같은 것들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아픔이라는 아픔은 다 갖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은 척 애쓰며 억척스레 살아가는 혜화. 그녀의 삶은 사라진지 5년 만에 나타난 한수가 건네준, 죽은 줄 알았던 아이의 입양통지서를 받은 후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리는 혜화의 내면을 표정연기를 통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표현해낸 배우 유다인의 클로즈업은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의 마음을 함께 흔들었다(처음 영화를 봤을 때의 상태).

또한 관객으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헷갈리게 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한 채 별다른 장치 없이 붙여 놓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몽타주는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사고와 행동을 결정하는 ‘기억(과거)의 현재적 작동’을 잘 보여주었다. 실제로 감독이 15년 동안 모아왔다는 손톱을 소품으로 하여 연출된 5년 간 모아온 혜화의 손톱이 쏟아지는 씬은 과거와 현재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혜화의 애환까지도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이렇듯 <혜화,동>은 ‘어떻게’의 관점에서 볼 때, 감각적이고 뛰어난 형식과 장치들을 통해 관객을 매료시키는 웰메이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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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동>에서의 ‘무엇을’에 대한 이의제기 (스포일러가득)


<혜화,동>에서 담아내고자 하는 ‘무엇을’은 여자주인공 혜화다. 23살 혜화는 작은 동물병원에서 애견미용사를 하고 있다. 100만원 안팎일 그녀의 월급으로 어떻게 감당하는지 그녀의 집에는 열 마리가 훌쩍 넘는 유기견들이 그녀와 함께 살고 있다. 그녀의 상처는 2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할머니 같아 보이는 혜화의 엄마는 혜화의 친엄마가 아니다. 혜화는 엄마 나이가 50이 넘었을 때 아버지가 바깥에서 낳아온 자식이다. 고등학교 때 한수의 아이를 임신한 혜화는 학교를 그만두고 네일아트를 배우며 뱃속의 아이를 기다린다. 출산이 다가오고 혜화와 노모는 한수의 엄마를 만나지만 그녀는 아이를 낳는 것에 반대하고 한수 마저 그녀를 떠난다. 혜화는 외롭게 아이를 낳지만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는다. 이 일들을 가슴에 묻고 살기를 어언 5년. 유기견 구조작업을 하고 있던 혜화 앞에 유기견과 함께 구조해줘야 할 것 같이 다리를 절룩이는 한수가 나타난다. 마치 5년 전 과거에 살고 있는 듯 한 한수는 ‘우리 아이 살아 있어’라는 말을 시작으로 아이 핑계를 대며 끈질기게 혜화 곁을 맴돈다. 한수가 내놓은 입양통지서에 흔들리기 시작하는 혜화. 그런 그녀에게 아이를 유괴해서 데리고 온 한수. 출산 당시 입양합의서를 썼으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은 것이 사실이었고, 이 사실을 알았지만 한수는 ‘혜화 너를 위해서’라는 핑계로 조카를 아이처럼 가장해서 데리고 온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유괴해온 아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이 있는 위치를 알려 준 다음 혜화의 행동이었다. 혜화는 한수가 져야 할 유괴에 관한 법적 처벌을 본인이 감당하기로 마음먹고 한수를 집밖으로 내쫓는다. 혜화는 경찰과 함께 도착한 한수의 엄마와 누나에게 실상을 전해 듣는다.

다시, 한수와 재회했던 유기견을 찾던 폐가의 마당. 혜화는 여느 때처럼 유기견을 구한다. 이번에는 새끼들까지 데리고 간다. ‘아이’라는 핑계를 상실해 혜화를 붙잡을 도리가 없어진 한수를 뒤로한 채 차를 몰던 혜화는 백미러로 한수를 본다. 그리고 이내 후진하기 시작한다. 세상의 아픔을 알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라는 것도 알며, 너무나 착하기까지 한 혜화는 그렇게 또 한 번 한수를 구한다. 막장드라마 못지않은 설정들을 가진 혜화의 삶. 이런 혜화의 삶을 통해, 한수를 통해 감독이 보여주고자 한 ‘무엇을’은 과연 무엇일까.

감독의 말을 빌리면 ‘여리여리하고 약해보이지만 강하고 씩씩한 여자, 혜화’를 그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여리여리하지만 강하고 씩씩한 여자, 혜화’라는 캐릭터 속에 들어 있는 메시지는 ‘약하지만 강인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에 대한 판타지’, 다른 말로 ‘모성애적 강인함과 희생에 대한 판타지’로 보인다. 감독은 한수가 계속 아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나 캐나다에 가자고 말하는 것은 어떻게든 혜화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한수의 노력이고, 마지막에 혜화가 후진하는 것은 ‘아이’라는 매개 없이 둘이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다, 어머니가 아니고서야 한수가 가지고 있는 저런 극도의 찌질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영화에서 혜화는 한수 엄마가 해야 할 몫을 혼자서 다 짊어지고 있다. 남편 될 남자는 도망가 버리고 애는 태어나자마자 죽고, 돈은 없는데 유기견들이 자꾸만 눈에 밟혀 열 마리 씩 데리고 사는 혜화에게 그녀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찌질함을 ‘아픔, 건강하지 못함’이라고 포장한 남자를 다시 만나게 하는 건가. 차가 후진해서 혜화와 한수가 다시 만나서 새로 무엇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것인가?

 

 

<혜화,동>의 ‘선택과 결단’, 위험 혹은 판타지


혜화가 처한 비정규직 중졸 여성이라는 사회적 상황. 내겐 이것이 훨씬 더 절박한 문제로 보인다. 감독은 어떠한 사회적 상황에 처해있는 ‘혜화’보다는 한수의 입장에서 한수가 보고 싶은 ‘혜화’를 선택한 것 같다. 세상이 주는 아픔을 알고 있음에도 밝으려 애쓰며 누구보다 강한 여자 혜화. 이러한 선택이 나쁘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약하지만 강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여자’라는 판타지가 위험한 것은 그러한 판타지가 혜화가 처한 상황을 개인이 짊어지고 가야 하는 어찌할 수 없는 비련의 운명인양 보이게 한다는 점에 있다. 2011년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20대 중졸 비정규직 여성을 다루는 영화에서 그녀가 처한 사회적 상황들은 한수의 집착적 사랑과 그것을 받아주는 혜화의 모성적 사랑 속에 모두 녹아 사라져버린다. 중졸 비정규직 여성이라는 혜화의 사회적 계급과 미혼모가 될 뻔 한 상황은 혜화의 ‘착하고 강한여자 혜화’를 더욱 돋보이게 하기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는 감독 본인이 언급한 바 있듯이 TV막장 드라마에서도 수없이 많이 볼 수 있다.

 

 

소재가 막장만 아니었다면


막장드라마가 가진 클리셰를 거의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2시간 채 못 되는 러닝타임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해서 그랬는지, 수수께끼들의 실타래들이 풀리는 순간은 정말 흥미롭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고 흡입력이 있었다. 또한 개장수와 혜화가 같은 개를 두고 찾아다니는 장면 같은 몇몇 씬들에서는 범죄나 스릴러를 보는 듯한 긴장감을 주었다. GV에서 감독은 ‘다음번엔 강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말을 하셨는데,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영화인지는 모르겠지만 <혜화,동>에서 갈고 닦은 사건전개방식을 잘 드러낼 수 있는 범죄 추리 스릴러 영화를 만드셨으면 좋겠다.


글 / 권은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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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


다큐멘터리는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장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에 현실을 담기 위해서는 현실을 선택하고 자르고 붙이는 허구적인 해석을 해야만 하고, 이 역할은 감독이 한다. 다큐멘터리는 어쩌면 극영화보다 감독의 자리가 더 중요한 장르다.

미국의 의료보험제도에 대한 뚜렷한 비판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마이클무어감독은 <식코>에서 수익을 위해 환자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제도의 폐해를 그 특유의 직설화법과 블랙코미디적 방식으로 낱낱이 파헤친다. 마이클무어감독은 영화 속에 직접 등장하여 본인이 의도한 바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간다. 한편 10만 관객을 동원해냈던 <워낭소리>에서 논란을 빚었던 ‘누렁이 눈물 씬’은 극영화 못지않은 감동의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정말 극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편집된 것이고, 이는 이충렬감독의 적극적인 개입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다큐멘터리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연출 없는 기록’ 이라는 사실과 다르게 감독과 연출이 다큐멘터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경계도시2> 역시 그러한데, 놀라운 점은 앞서 말한 영화들과 다른, 심지어 본인의 앞선 영화와도 구분되는 <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의 태도와 위치다. <경계도시2>에서 그녀는 충실한 기록자, 관찰자도 아니고 일방적으로 이끌어 가는 계몽자도 아니다. 송두율교수 입국 후 터져 나오는 일련의 사건들은 그녀를 그 두 자리 중 어딘가에 위치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감독 본인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와 불신 사이를 오가던 그 무렵” 즉, ‘송두율이 김철수냐 아니냐, 거짓말 했냐 안 했냐’는 흑백논리에 말려들고 있던 그녀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는 동시대 진보진영의 한 인간으로서 자신을, 한국 사회를 마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표면상으로는 감독의 자리에 있지만 감독이 가지는 확신과 주도권을 내려놓고 자신이 느끼는 흔들림과 균열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경계도시> vs <경계도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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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은 카메라를 든 그의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 앞에서 카메라와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했다. 이 ‘통제 불가능성’은 6년이라는 후반작업이 있었음에도 고스란히 완성된 영화에 담겨 관객에게 전해진다. 후반작업 동안 감독에게 부여되는 절대적인 편집권을 생각해보면, <경계도시2>는 촬영하는 1년 3개월 동안 감독 본인이 느꼈던 모든 혼란과 모순들을 최대한 솔직하게 담겠다는 홍형숙 감독의 결단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경계도시2>가 만들어지기 7년 전 완성된 <경계도시>는 두 가지 축으로 이뤄진다. 한 축에는 홍형숙 감독이 송두율교수를 만난 2000년 6월 14일부터 33년만의 입국이 무산 결정된 2000년 7월 4일까지의 일련의 사건들과 이에 대한 송두율교수의 입장과 철학이 있다. 다른 한 축에는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송두율교수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행위에 대해, 영화를 폐기처분하고 제작진에게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국정원의 압력이 있다. 촬영을 끝내고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 강석필PD는 국정원에서 조사를 받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홍형숙감독은 ‘대한민국에서는 아직도 (누군가에 대해 말하는)일상적 행위조차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단호한 문장으로 결론을 짓는다.

한편 <경계도시2>가 막 30분을 넘길 즈음 홍형숙감독은 송두율교수가 김일성 사망 당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초청된 사실을 그 스스로 알고 있었다는 언론들의 보도에 보수 진보 할 것 없이 충격에 휩싸인 한국사회와 함께 그녀 또한 송교수에 대해 할 말을 잃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곧이어 2002년 어느 대학에서 <경계도시>상영 이후 ‘송교수가 김철수인가 아닌가가 문제가 아니라, 그가 한국에 들어 왔을 때, 한국이 그를 안을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라고 말했던 본인의 기억을 떠올리며 그녀는 그녀 안의 레드컴플렉스와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한다.

송두율교수는 뒷날 귀국 후 한 달 만에 구속되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틈이 생겼다고 말한다. 이는 송두율교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구속 후, 잠잠해진 언론과 한국사회가 망각의 시간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상황이 되어서야 홍형숙감독을 비롯한 진보진영 또한 생각할 수 있는 틈이 생겼을 것이다. 이는 영화가 거의 끝날 무렵인 1시간 24분이 되어서야 등장하는 이야기다.

<경계도시2>에서 홍형숙감독은 분명하고 확신하는 입장을 갖고 마무리 지은 <경계도시>와 다르게 “2003년 송두율은 스파이였고, 2010년 송두율은 스파이가 아니다. 그때 송두율은 무엇이었을까?”라는 성찰적 질문으로 마무리 짓는다.


 

<경계도시2>가 만들어낸 것


<경계도시2>를 통해 홍형숙 감독은 기존의 다큐멘터리들과는 확연히 다른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냈다. 이는 허구적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선전적 다큐멘터리도 아닌, 연출 없는 기록을 표방한 순진한 다큐멘터리도 아닌 어떤 것이다. 이에 변성찬평론가는 ‘철학보다 먼저 움직이는 예술’이라는 말로, 김영진평론가는 ‘주관적 다큐멘터리 영역에서 내적 파열을 겪으며 도달한 경지’라는 말로 표현했다.

11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담은 400여개의 테입과 그 시간이 주는 압박과 함께 그보다 훨씬 컸을 한국 사회와 진보진영 그리고 감독 본인 안에 있는 ‘실재’와의 대면에서 느꼈을 공포와 당혹을 상상해보면 6년이라는 후반작업의 시간은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다큐멘터리를 주도적으로 이끌고 가겠다는, 방향을 제시하고 결론을 내겠다는 감독으로서의 권위는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강한 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박탈당했고, 그녀 스스로도 벗어던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현실을 앞에 두고 그 갈등과 분열의 시간들을 고스란히 견뎌낸, 다큐멘터리 ‘감독’이면서 솔직한 ‘동시대인’이고자 했던 그녀의 선택과 결단에 박수를 보낸다.



글 / 권은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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