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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1 다케우치 요시미와 루쉰의 만남 (1)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고


작년 중순부터 노들 현장인문학에 합류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맑스의 자본을 읽었다고 했고, 내가 결합할 즈음에는 푸코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작년 말경부터 '루쉰'의 소설과 잡감을 비롯해서 그의 전기를 읽고 있다. 물론 노들의 활동가분들과, 노들 야학학생들, 그리고 수유너머가 함께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사실 루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소개 받은 책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람의 평론집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루쉰'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하는 “국제워크숍”에서 다니가와 간이라는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을 공부했었는데,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루쉰”은 내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다니가와간이라는 인물을 쏘옥~ 빼닮아 있기도 했다. 그는 루쉰을 그저 설명하지 않고, 루쉰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루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루쉰이지만 루쉰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주는 사람. 갑자기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마저도 달리 보이는 책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나누고 싶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단 루쉰 스스로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질문하고 대답했던 문제에서 시작해서 루쉰을 찾아낸다. 그런 질문과 고민이 잘 드러난 루쉰의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라는 글이다.

 

물론 소설을 쓰게 된 이상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가 없을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느가라는 말에 답하자면 나는 역시 십수 년 전의 '계몽주의'를 마음에 품고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되고, 나아가 인생을 계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소설은 '심심풀이 책' 이라고 하는 예로부터의 주장을 싫어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심심풀이'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되도록 병든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제재를 찾으려 했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글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루쉰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라고 물었기 때문에 굳이 ‘인생을 위해’라고 대답한 꼴이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대답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외침의 서문 중>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인생을 위해’라는 일종의 강요된 대답은, 위에서 인용한 <외침> 서문의 글에 나타난 ‘내 나름의 확신’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본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조의 말. 그가 자신의 문학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끝내 무시했던 것도 분명하지만, 따라서 그 때문에 설명을 위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그 스스로를 밖에서 해석한 듯 한 이런 대답에 의문을 품는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후에 씌여진 「자선집(自選集)」(1932)에 씌여진 글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솔직히 '문학혁명'에 대하여 어떠한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해혁명을 보고, 제2혁명을 보고, 위안스카이의 제제와 음모와 장쉰의 복벽을 보고, 그 밖에 여러가지를 보아오다가 아주 회의적으로 되어 실망한 나머지 무기력해진 상태였다. ---- 다만 나는 내가 이렇게 실망하고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인간이나 사건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므로, 그 생각이 내게 붓을 들 힘을 주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 ----- 직접적인 '문학혁명'에 대한 정열이 아니면 무엇때문에 붓을 들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사들은 적막 속에 있지만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큰 소리로 외쳐 도움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것 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낡은 사회의 병근을 폭로하여 어떠한 방법이든 치료법을 강구하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희망도 섞여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여기서 많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찾아낸다. 일단 루쉰은 이 글에서 자신이 문학혁명에 냉담했다고 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체로 루쉰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루쉰이 ‘선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 번째 주목하는 점은 ‘신해혁명을 보고’에서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 그의 실망 및 무기력과 관계있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소설을 쓴 데에는 ‘열정적인 자들에 대한 동감’이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구 사회의 병근을 폭로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촉구하고자’한 것은 앞의 원인과 ‘뒤섞여’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이 말한 ‘인생을 위한’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비(非) ‘예술을 위한’이란 쪽의 의미가 강하다고 본다. 루쉰이 해석한 ‘예술을 위한’이 ‘심심풀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생을 위한’은 ‘심심풀이가 아닌’의 의미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금 나의 서목들을 검토해 보니, 그것들의 내용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창작에서는 나에게 위대한 재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태것 장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며....  

 

자선집과 같은 해에 씌여진 「나의 번역과 저서 목록」(1932)의 글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귀결시켰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루쉰이 근대 문학의 자기 붕괴의 과정에 처했던 유럽의 현대 작가들처럼 작품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루쉰의 이런 자기평가를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은 자신이 진실로 쓰지 못했던 것, 동시에 쓸 수 없었던 것에 충실했다. 그의 ‘빈약한’ 작품에서 넘쳐 나오는 충실함.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그 차제 ‘루쉰’인 채로 재발견 해 내려고 애쓰는 지점이자 내가 느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라는 문장은 루쉰 문학을 설명하는 점에서 말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 문장을 상징적인 말 이라기 보다는 루쉰 문학의 태도,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이 절망과 희망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각을 얻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태도이기 때문인데, 루쉰이 그 태도를 부여한 것이 <광인일기>라고 지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광인일기>가 근대문학의 길을 열었던 것은 그것에 의해 구어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도, 작품세계가 가능케 되었기 때문도, 하물며 봉건사상이 파괴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이 유치한 작품 때문에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자리 잡혔다는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하나니’ ‘나는 장차 오르내리며 찾아보려 하노라’는 태도의 문학가. 그에게 중국 근대 문학의 최초의 기념비로서의 <광인일기>는 일종의 ‘비극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주장이 오래도록 남는다.

 

물론 루쉰을 '읽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론집은 내게 루쉰 소설을 '읽고 싶게'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오늘은 루쉰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을 읽는 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한참을 그의 잡감들을 읽어 갈 것이다. 반쯤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시선을 한 채로 내가 읽은 루쉰 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는, 그의 소설이 그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과 번뇌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그가 살던 시대로 완전히 끌어들여버리지 않는다. 루쉰 자신은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서면도, 루쉰을 읽는 이들이 ‘여기, 이곳’에서 ‘여기, 이곳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아마 나와, 노들의 활동가들, 그리고 야학 학생들이 그의 소설대해 그렇게 생기 넘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혹시 “루쉰”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글을 읽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어보라고, 아주 좋은 길벗이 될 거라고 간단히 권하려던 글이 너무 길어졌다. ^^;;; 부디 참고가 되셨기를....^^


글 / 정행복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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