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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26 체게바라를 잃어버리다 | 뜨거운 여행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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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이란 일종의 거대한 ’아이러니’와의 조우가 아닐까 싶다. 여행자는 늘 자신의 일상이 아닌 바깥을, 존재해왔던 그대로 보고자 꿈꾸며 떠나기 마련이지만, 여행지가 일상인 현지인들은, 다름아닌 바로 그 여행자들때문에 닥쳐오는 변화들에 온 몸을 부딪쳐야만 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의사소통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욱 더 ‘수줍은 신비’를 지닌 타자일 수 밖에 없는 이 양자는, 그래서 늘 서로에게, 어느 쪽으로든 변용의 계기를 선사하기 마련이다. 이 변용의 과정에서 ‘자신을 무너트리지 않은 채 꾸역꾸역 버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느 순간 밝은 빛에 눈이 노출된 후 눈이 멀게 되는 자’도 있다.

 

 박세열, 손문상의 <뜨거운 여행>은 이 중에서도 후자들의 경험담이라 할 만하다.  1951년의 체게바라가 산 파블로 나환자 촌에서 고통받는 타자의 얼굴을 마주한 후, 타인과의 관계에 대한 일종의 윤리학적 접근으로서 혁명을 꿈꾸게 되었다면, 2008년 이들은 남미라는 절대적인 외부를 맞닥뜨림으로써,무려 체게바라를 ‘분실’하기에까지 이른다. ‘아예 겪지 말았어야 했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의 가짜 비둘기 똥 사건이나, 공포로 채색된 카라카스에서의 일화, 말그대로 아마존을 부유하며 건너야했던 경험들로 이루어진 저자들의 여행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리기 위한 여행’이다. 전자를 레비나스의 ‘변증법적 과정에 충실’한 여행법이라 한다면, 후자는 블랑쇼의 ‘변증법이 깨져버리는 불안한’여행인 것이다. 저자들은 체게바라의 일정을 따라 여행했지만, 그들이 찾은 ‘바깥’은, 체게바라의 그것과는 다른 종류의 ‘무엇’이었다.


 실눈이 떠진 것은, 여행에서 보낸 시간만큼 길어진 수염을 붙이고 서울에 돌아왔을 때였다. 엄청난 촛불이 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2008년 1월 20일, 눈 내리는 풍경을 뚫고 출발했던 여행의 결말 아닌 결말은 거기 있었다. 20세기의 '혁명'과 21세기의 '혁명'의 차이는 촛불의 물결이 출렁이는 정도의, 그 '더딤'에 있지 않을까. 요컨대 내 여행의 종착지는 쿠바가 아니라 광화문이었고, 분실한 체 게바라를 그곳에서 다시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화문에서 마주한 쿠바, 뜨거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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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랑쇼는 ’낮의 광기(La folie du Jour)’라는 자신의 소설을 통해, 밝은 빛에 노출되어 시력을 잃은 후, 예전처럼 책을 읽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맹인이 된 것도 아닌.. 다시말해, ‘보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 것도 불가능한’ 주인공을 묘사한 바 있다. 주인공이 경험한 밝은 빛은 이를테면 삶에 대한 거대한 기쁨같은 종류의 것들.. 즉 기존에 눈이 완전히 보일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을 눈을 멀게 만듬으로서 비로소 보이게 하는 존재다. 광기와 같이 강렬했던 빛이 이전에 보이던 것을 보이지 않게 함으로써, 비로소 보이던 것에 가려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들었던 것이다.

 

 블랑쇼에게 타자(혹은 외부)란 이렇듯,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만드는 그 무엇’이였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기존에 안다고 혹은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게 하는, 즉 ‘바깥으로 내치는 힘’이다. 강한 빛에 눈이 멀게 되는 상황을 블랑쇼는 일종의 ‘죽음’이라 보았고, 이러한 ‘비인칭적 죽음’이란 기존에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이나 이러저러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며, 자신의 외부에 서는 일이라 보았던 것 같다. 나의 표상이나 관념 바깥에서 다가오는 낯설고 이질적인 대상들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대상의 진지함 곁에 설 수 있으며, 온전한 그들의 ‘시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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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서걱서걱 잘라 먹으면서 섣부른 결론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말은 금세 흩어지는 것. 잡아 두지 않으려 했다. 공중에서 풀풀 날려 어디에선가 시가 되었으면 바랐다. 여행이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과정이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우리 모두는 원래 시인이었고 선생이었고 혁명가였고 신이었는데, 다만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렸을 뿐이라고.  (에필로그, 뜨거운 여행)


 블랑쇼에게 대낮의 광기와 같은 빛이 있었다면, 저자들에게는 그들을 부득불 남미로 향하게끔 한 체게바라가 있었다. 하지만, 체게바라는 이들에게 그 어떠한 이정표를 제시했다기보다는 눈을 멀게 만들고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이게 한다. ‘잃어버린 시를 영글게하기 위해 거리를 헤매이’던 로르카마냥, <뜨거운 여행>의 저자들은 기존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보고자하는 노력’을 있는 힘껏 선보인다. “존재의 비결정성, 그 힘에 몸을 맡기고, 존재의 순수한 격렬함에 몸을 내맡기는 과정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하는 것이 시詩”라 했던 블랑쇼는, <뜨거운 여행>과 이렇게 ’시적으로’ 조우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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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가지 더 덧붙이면..  <뜨거운 여행>은 그저 일정과 루트를 소개하는 여행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남미 혹은 체게바라표(?) 여행법에 대한 ‘자세한’ 안내를 기대했던 독자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긴, 세상 어느 여행기가 개별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되풀이시켜줄 수 있겠는가. 대신 <뜨거운 여행>에는, 끊임없는 닥쳐오는 우연들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수 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경험과, 다분히 맛깔스러운 현지에 대한 소위 ’배경지식’들이 가득할 뿐이다. 때문에 ‘남미를 여행할 계획이 전혀 없는’ 나같은 사람까지도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흥미롭게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 가장 먼저 든 질문은, 남미처럼 먼 곳이 아니라 이를테면, 사소한 동네 산책 중에라도 저자들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는 노력’을 시도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세상이란 그리고 내 바깥이란 그 이후, 어떤 의미를 지니게될까? 였다. 지구 반대편, 남미라는 절대적인 ‘외부적 공간’에서 강제되는 변용을 겪어야만 했던 저자들의 이야기는, 신기하게도 읽는 이에게 또다른 공간에서 자신만의 외부와 변용을 탐구하게 하는 힘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글/ 김은영(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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