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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04 다니엘 벤사이드: 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정치를 시작하라! (1)


▲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 1946-2010)

 

 

몇 해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모스크바에서 가장 화려한 대로 중 하나인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수많은 인파(주로 노인들)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던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책이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레닌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한 피켓에는 “레닌의 당, 인민의 힘”(구 소련 국가의 가사)이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기념 행진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날이 10월 혁명 기념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흥분과 감흥에 사로잡혔던 내게,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던 어느 러시아 젊은이의 한 마디는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레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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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레닌의 복귀는 아주 느린 속도로, 때론 구식 공산주의자들의 생경한 구호 속에, 때론 당과 무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이론가들 사이에서만 대단히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사정은 트로츠키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소멸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작들이 속속들이 복간되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됐지만, ‘체제화된 혁명’이 남긴 피로는 혁명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기억도 상기시키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기억하기 ‘난감한’ 지난 역사일 뿐이다. 그런 러시아가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혁명의 추억’을 되살려낸 것은 바로 얼마 전부터이며, 지젝을 위시한 서구의 새로운 좌파들이 러시아에 소개된 이후의 일이다. 올해 사망한 다니엘 벤사이드의 이름도 그 곁에서 자그마한 반향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혁명의 오랜 추억들이 혁명의 조국에서 ‘낯선 기억’의 딱지를 붙인 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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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라는 사건

 


다니엘 벤사이드는 프랑스 트로츠키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이미 열여섯 살에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후 줄곧 좌파 혁명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벤사이드에게 레닌을 되살려낸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이제껏 그가 몸담아 왔던 혁명 운동의 당연한 대의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혁명의 ‘빛나는 추억’을 되풀이하고 기념하는 것으로서 레닌의 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벤사이드가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의 추억’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사건’, 레닌을 통해 재점화되고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혁명이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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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혁명을 사유하기 위해 벤사이드가 참조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역사 철학 테제>(1940)에서 근대의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현실을 계량 및 예측 가능성을 통해 파악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빈 상자를 쌓듯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거나 이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 과정이 응축점 없이 단순히 산술적으로 조합되는 매개물이란 표상에 기초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이 아무리 결집되더라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너질 정도로 높게 쌓인 블록들을 해체시켜 바닥에 깔면 위험성이 제거되듯 시간적으로 응집된 모순들도 개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적되고 중첩되는 모순들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이 뒤얽혀 폭발의 순간을 향해 진전한다. 그것은 미리 계산할 수도, 예고할 수도 없는 순간의 사건이다. 혁명을 통과하는 현실은 이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공(時空)을 열어젖힌다. 그러므로 벤사이드에게 혁명은 ‘정상적인’ 현실 과정을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중단시키고 변형시키는 급변의 순간을 말한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나 데리다의 <법의 힘>(1990)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굳이 벤사이드를 통하지 않고도 이해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 진영에서 나왔던 비판적 반성의 일부는 1917년 혁명을 제도나 당조직, 국가 형태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스탈린의 관료제 국가 장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판단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을 되살리기 위해 혁명의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 ‘실패한’ 지점들을 캐물었을 때, 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제도와 조직, 국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다루지 못했고 스탈린이 실효적으로 작동시켰던 지점이며, 레닌은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었다. 국가를 타도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활동했던 레닌이 국가를 떠맡아 운영해야 하는 위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에 좌파 진영에서 레닌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던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벤사이드는 좌파의 좌초 지점 역시 바로 거기, 레닌의 이중적 입장을 분석하고 읽어내기보다는 사유하지 않고 회피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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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알랭 바디우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실패를 경직된 일당 전제주의로부터 찾는다. 하지만 군대같은 규율로 무장한 당조직은 내부의 민주적 요소들을 갉아먹고 고사시킴으로써 결국 공산주의마저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형태로부터 찾지 않는다. 정치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는 일종의 자격 부여 체제로서 ‘배제’를 통해 운영되기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바디우나 랑시에르는 혁명과 민주주의를 사건적 계기 속에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벤사이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조직과 형태, 국가 등의 제도적 차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혁명을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련의 경험을 반성하며 좌파가 모든 책임을 당과 국가에 미루고 한발 물러서는 동안, 우파는 그 ‘오물의 한 가운데’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그 치명적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전성시대다). 제도를 비판하며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비판과 성찰의 '의연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혁명은 어느새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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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정치를 시작하라

 


좌파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멘셰비키가 취했던 이중 혁명론 역시 이런 논리 속에서 재구성된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1단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룰 때까지 부르주아지에 조력한 다음 궁극의 2단계 혁명,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입장에서 우리는 좌파의 현실 회피주의를 찾아낸다. 1905년 당시, 혁명은 예측 가능한 역사적 수순이므로 부르주아지가 그 밑바탕을 마련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입장은 현재의 좌파가 취하는 의연함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적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양도하고 ‘혁명의 이론에 따라’ 역사의 컨베이어 벨트가 혁명을 전달해 줄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벤사이드는 말한다. “당의 매개를 제거하라. 그러면 당신은 무(無)-당의 일당인 국가를 갖게 되리라!”(<영원한 스캔들>)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도약! 도약!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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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좌절은 분명 경화된 당조직과 부패한 관료제 국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당과 국가를 전혀 배제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치의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곳에서 정치가 작동한다고 외치는 좌파들의 목소리가 옳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정치의 장인 제도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작동 중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호출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혁명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곳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정치는 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고려돼야 하고, 어떤 순간에서도 터뜨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혁명이라는 사건, 도약을 마주치기 위해 우리는 임의적으로 방기하는 어떤 순간과 장소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벤사이드의 이 주장에서 우리는 연속 혁명(트로츠키)의 반향을 듣는다.

 

 


지금 좌파는 대중을 조직화하는 문제에서 물러나 관조적 태도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당과 국가라는 골치아픈 문제와 만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좌파가 사건으로서의 혁명을 근본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면, 어째서 당과 국가는 예외로 두어야 할까. 특히 조직화의 첨점으로서 당에 관해, 좌파는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레닌을 불러내, 다시 그와 마주쳐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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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2010년 1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제목과 구성을 약간 바꾸어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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