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정세와 혁명의 주체 - 전쟁과 혁명 사이, 레닌은 무엇을 사유하였나?

- 에티엔 발리바르의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의 계기: 1914년-1916년의 레닌>에 대하여

 

 

이제 레닌의 귀환은 부인될 수 없는 사실이 된 것 같다.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사이먼 클락 외, 2000)가 출간될 당시만 해도 전혀 관심이 되지 못했던 레닌이 어느덧 우리 시대의 지적 스타 지젝의 ‘레닌의 제스처를 반복하자’는 구호와 더불어 대한민국 진보 지식계의 뜨거운 관심사가 되었다. 지젝의 레닌론인 <혁명이 다가온다>(2006) 이후 레닌에 대해 쏟아지는 국내외 저작들,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중심이 된 연구서의 출간이 활발해졌다. 이제 레닌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반자본주의와 혁명을 논의하는 것은 시대에 뒤쳐진 일처럼 보이는 시절이 도래한 것 같다.

 

그러나 레닌의 귀환을 경축하기에 앞서 우리는 ‘어떤’ 레닌이 돌아왔는지 먼저 물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무엇을 하기’ 위해 레닌을 다시 읽어야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발리바르의 <전쟁이 규정한 정치에서의 철학의 계기: 1914년-1916년의 레닌>(<레닌 재장전> 수록)은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정세의 철학자, 레닌

 

발리바르의 텍스트는 1차 대전을 전후하여 레닌의 사유가 변화되는 과정을 추적하며 그 안에 있는 복수적 경향들 -심지어 상호 대립되는 경향들-을 분석한다. 여기서 발리바르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레닌에 있어서 ‘정치’, ‘철학’, ‘전쟁’이라는 세 가지 단어가 서로 관련을 맺는 양상이다. 레닌에 대한 논의에서 많이 다루어졌던 이 주제는 종종 철학(또는 이론)에 대한 정치(또는 실천)의 우위, 전쟁에 대한 정치의 우위라는 테제로 정리되곤 했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레닌의 사유를 보다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 이 세 가지 항(정치, 철학, 전쟁)의 관계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한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 그는 그 동안 레닌에 대한 논의에서 관련되지 않았던 두 항, 즉 레닌에게 있어서 철학과 전쟁이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묻는다. 그리고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1914-16년 사이의 레닌을 주목해야한다고 말한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대전(1914년)이 발발한 이후 러시아혁명(1917년)이 발생하기 바로 직전까지이다.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했던 격변의 사건들이 연속되는 이 시기가 어떻게 레닌의 사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이 시기에 나타난 레닌의 변화는 “모든 혁명은 ‘순수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집약된다. 다시 말해 역사발전 법칙에 따른 순수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1915-16년에 작성된 레닌의 텍스트에는 경제적 진화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발리바르는 1916년 말-1917년초 레닌의 저술에서는 이러한 진화주의적 사고가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고 말한다.

 

어떻게 수정되었는가. “이제는 모든 역사적 발전이 ‘불균등한’ 것으로 이해됐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정치적 영역의 복잡성을 ‘경향들’의 논리로 환원할 수 없음이 드러났다.” 혁명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극점에 도달해 모든 사회적 갈등이 계급투쟁으로 환원된 결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복잡다기한 정세적 조건 속에서 전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레닌의 사유에서] 역사철학의 선험적 전제가 사라진 것은 결코 아니다(특히 레닌 자신이 고수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 이런 전제가 잘 드러난다.) 그러나 이 선험적 전제는 ‘구체적 상황들의 분석’이라는 전략적 ‘경험주의’, 즉 혁명 과정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투쟁이 (‘평화적’이든 ‘폭력적’이든) 다양한 형태로 결합되기 마련이며, 한 투쟁 형태가 또 다른 투쟁 형태로 이행해 간다고 보는(그래서 혁명적 이행에는 고유한 [정세들의] 지속과 연속되는 모순이 문제가 된다) [레닌의] 경험주의와 공존하며 (양자 간의 극단적인 긴장을 감수한 채로) 서로의 결합을 추구했다. -<레닌 재장전> 중에서

 

위의 인용문은 발리바르가 파악하는 레닌 ‘철학’의 요체다. 이 문장에서 레닌은 혁명을 다양한 모순들과 복수의 계기들이 응축된 정세로부터 사유하는 정세의 이론가로 나타난다. 이는 혁명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만들어내는 객관적 운동의 결과로 파악하는 경제주의와 대결하는 사유이며, 또한 자본주의의 모순이 심화되면 사회적 갈등이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계급투쟁으로 환원된다는 단순화된 계급투쟁론과도 맞서는 사유이다. 이것이 바로 발리바르가 레닌을 다시 읽음으로써 오늘날 맑스주의 이론진영으로 소환하고 싶었던 그의 모습이다.

 



 

 

전쟁, 혁명, 대중: 혁명적 상황과 혁명적 주체

 

혁명에 대한 이와 같은 레닌의 사유는 그의 지적 발전을 표시하는 지표인데, 이는 전쟁의 경험을 거치면서 형성된 것이었다. 1914년 이전까지도 레닌은 ‘확고부동한 교리와 철학적 입장을 견지한 인물’이었다고 발리바르는 말한다. 그러나 1914-16년 사이, 즉 전쟁에서 혁명으로 이어지는 독특한 역사적 공간은 레닌의 사유에 새로운 경향을 도입하게 했다. 전쟁의 경험은 레닌에게 혁명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뿌리부터 다시 하도록 강제했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전쟁에 의해 촉발된 혁명의 조건에 대한 레닌의 성찰이 어디로 나갔는지를 분석하기 위해, “철학노트”에서 전개된 레닌의 클라우제비츠 독해를 분석한다. 레닌은 클라우제비츠를 헤겔과의 연관 속에서 읽음으로써, 전쟁과 계급정치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벼려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전쟁은 정세 속에서 사유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정세는 대중이라는 집단적 행위자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이는 혁명적 주체의 문제를 레닌이 다시 사유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세란 단순히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객관적 조건의 효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이다. 정세는 언제나 대중들과 연관되어 있다. 이는 전쟁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대중들의 힘을 이용할 수밖에 없지만, 장기적으로 이 대중의 힘은 국가의 통제를 초과할 수 있는 것이 되기도 한다. 레닌은 이러한 대중적 힘의 가능성으로부터 “제국주의 전쟁을 혁명적 내전으로 전화시키자”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된다. 전쟁 내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계기를 첨예화함으로써 전쟁(제국주의 전쟁)에 맞서는 전쟁(혁명적 내전)을 구성하는 계급정치를 사유한 것이다.

 

 

 

 

대중의 힘이라는 계기를 통해 전쟁을 계급정치의 연장 속에서 파악하게 된 레닌은 전쟁의 생산성에 주목한다. 다시 말해 전쟁이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발리바르는 여기서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던진다. “사회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었는데 전쟁은 어떻게 사회주의를 ‘생산’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하다. 전쟁이 조성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혁명적 상황일 뿐이라는 것이다. 전쟁 속에서 대중이 일으킬 수도 있는 반란은 언제나 잠재적이라는 것, 역사적으로 다양한 계기들의 중층적 결합 하에서만 그것이 혁명으로 이어질 수 있을 뿐이다.

 

발리바르는 전쟁의 경험이 레닌의 혁명 개념 자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파악한다. 발리바르의 레닌 독해는 혁명의 정치를 위해 오늘날 좌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는 효과를 발휘한다. 혁명적 상황은 객관적 토대가 자동적으로 제공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혁명을 실천할 순수한 프롤레타리아트도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정세 속에서 열리는 혁명적 상황을 실제의 혁명으로까지 밀고 가는 혁명적 주체를 어떻게 구성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전쟁의 경험이 레닌을 “혁명적 주체는 (의식화, 즉 즉자적 계급이 대자적 계급으로 ‘변형’되어가는 형태까지 포함해) 이미 확보된 사회경제적 전제조건이 아니라, 복잡한 정치적 구성과정의 결과로 등장하게 된다”는 결론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전쟁에 의해 규정된 정치에서 비롯된 철학적 계기’가 핵심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발리바르가 돌아오도록 만드는 레닌은 누구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정세의 철학자 레닌이며, 혁명을 중층결정된 정세 속에서 구성되어야 할 혁명적 주체의 실천으로 파악하는 레닌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무수한 얼굴로 돌아오고 있는 레닌에게서 발리바르가 발견하고 싶은 그의 얼굴이다.

 



글 /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2010년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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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2. 24-25. 수유너머N 국제워크샵 <대중의 주체화와 문화정치학>은 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과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을 비롯해서 오사카 대학에서 공부하는 분들과 함께 한 자리였습니다. 특히 25일의 프로그램에서는 수유너머N과 오사카 분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서 비슷한 활동을 벌이면서 같은 것에 대해 질문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흘려버리기엔 너무나 아까운 말들이어서, 그날의 토론을 매우 거칠게나마 옮겨봅니다. 오후와 저녁 내내 통역을 담당한 하지메상과 오하나양에게 감사드립니다. 그 자리에 계셨던 분들 중 제 기록에서 틀린 부분과 빠진 부분들에 대해 더 정확하고 자세한 기억을 가지고 계시는 분의 보충을 기다립니다.

기록 / 홍서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indooa at gmail.com / twitter@seedve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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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야마 이치로 선생님의 저서 <전장의 기억>과 <폭력의 예감>에 대한 논평에 앞서

 

도미야마 : 올바르지 못한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대해 회의하면서 올바름에 대해 회의하게 되었다. '올바른 설명'이 오키나와에 계속 따라붙었다. 오키나와를 말할 때 올바르게 논의하는 것과는 다른 대상 접근법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휘말려들일 수 있는 힘의 영역을 확보하는 것이다. 올바른 설명이 올바른 연대로 이어진다는 말들을 많이 보았다. 그런데 그 말은 내게, '나는 그런 연대에 휘말려들고 싶지 않다'는 말처럼 보였다. 연대, 지원을 말하면서 휘말려들지 않으려는 것을 보면서, 감히 휘말려들 수 있게 하는 말이 있는 곳에 운동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특히 폭력에 대한 분석에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신체성의 증거들이 있다. 나는 휘말림을 축으로 생각하고 싶다. 이러한 휘말림을 확보하고 싶다. 휘말리지 않았으나 꼭 휘말릴 것 같은 사유들이 있다. 이러한 사유는 과거, 현재, 미래가 뒤섞인 사유다. 이것이 바로 "예감"이다.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며 남의 일이 아닌 것에 대한 것이다.

타자와 내가 포개지는 신체감각으로서의 예감을 사유하고 싶었다.

휘말려들인다는 것은 곁에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 혼재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정치가 있다.

이러한 신체성 속에 가능성이 숨겨져 있고, 현행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초점과 확장주의(expansionism)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대상과 사람의 관계에서, 사람을 휘말려들게 하는 식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것, 정치는 혹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다초점 확장주의'는 독일에서 있었던 사회주의 환자 동맹[사회주의독일학생동맹(SDS)의 ‘하이델베르크 환자 공동체’(SPK). 68이후 나타난 소수자 운동을 말씀하시는 듯]이 가지고 있었던 입장이다. 확장주의란 연구에서 복수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하나의 올바름을 찾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글쓰기는 상황적이고 복수적인 복수성으로 향한다. '분야'와 관계해서 복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상황에서 단서를 확보하는 행위 속에서 나오는 복수성을 말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연구를 생각하고 싶다.

그런 행위의 방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과연 강령 같은 것과 무관하게 그러한 방향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자본주의 속에 오키나와를 위치짓는 작업을 하고 있고, 그것을 재구성하려고 생각 중이다. 그것이 현재 나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정행복, 최진석의 토론문을 읽은 후 도미야마 선생님의 토론

 

도미야마 : … "전장의 기억은 정치다!"라고 표현한 정행복의 말은 매우 적절하다.

… 방어태세를 설명하는 것과 연관된다.

폭력의 예감. 무장해제를 안정화시키는 얘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행복의 요청(일상을 지배하는 무신경한 내셔널리즘에 전율을 일으키는 '발견되어야 할 폭력의 예감'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이야기를 들려달라는)에 대해 응답하겠다. 오키나와에서의 정신의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나는 기존의 논의들과는 다른 논의를 원했다. 전쟁을 둘러싼 트라우마들을, 질병의 이름(병명)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현행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가능성들을 찾는 것, 이것이 내 문제의식이다.

69-70년대에 오키나와에서 활동했던 집단들을 볼 때, 70년대에 오면서 정신의학과 겹치는 부분이 있어 왔다.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아픔, 병, 거기에 있는 권력을 어떻게 비판하는가가 그 집단들의 문제의식이었다. …

오키나와의 경제는 식민지 경제 속에서가 아니라 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붕괴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standing policy, 개발, 부흥 등이 오키나와에서는 20년대부터 있었는데, 그러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이 세계 각지로 유랑하게 되었다.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어떤 방식이 있을 수 있는지, 어떤 점으로 오키나와를 연관시켜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큰 문제이다. 외부로 나간 사람들을 포함시켜 생각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 제도, 시스템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최진석이 논평의 말미에서 말한 것처럼 프로이트적 정신분석으로 가면 안 되지 않을까? 그것을 비판하고 싶다. 주디스 버틀러의 멜랑콜리를 둘러싼 논의가 있다. [Judith Butler, The Psychic Life of Power: Theories of Subjection. University Press of Stanford, 1997.] 상처를 계속 끌어안고 가는 것, 그 지점에 멜랑콜리가 있다. 정신분석이 갖는 한계가 거기에 있다. 개인이 설정되어 있고, 개인과 개인이 맺어져 연대가 된다고 전제되어 있다. 여기서 다시, 오키나와의 정신의료가 문제된다. 펠릭스 가타리가 제기한, 언표행위의 집단행위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객석 질문과 토론

 

유선 : 올바름을 어떻게 확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올바르지 못한 것을 물리치고 자신의 올바르지 못한 부분을 변화시킬 수 있는가? [적어 놓지 않은 탓에 기억에 의존하여 매우 거칠게 재구성했다. 죄송 ;ㅁ;]

 

도미야마 : 내가 말한 것은, 올바르지 못한 행위를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가 아니라, 휘말려들어가는 것이 문제된다.

최진석이 말한 영속성에 대한 것과 연결된다. 집단과 집단 간의 싸움을 빼놓고 네트워크 간의 것으로만 얘기하면 얘기가 아주 부족하다.

 

서연 : 선생님께서는 <폭력의 예감>에서, 관찰대상뿐만 아니라 연구자(관찰자) 또한 브리콜뢰르, 공작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연구자도 관찰자와 마찬가지로, 이미 세워진 목적 하에서의 전체적인 조망을 가질 수 없고 언제나 만들고 있는 와중에 있다. 이런 과정 중에 있는 연구자가 관찰대상이 되는 현지인의 언어를 접할 때, 그들의 고유어, 예를 들어 '마나'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가 했듯이 '제로치'와 같은 말로 번역하거나 '무의식'으로 환언하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단지 관찰자에게 외국어인 그들의 언어에 익숙해지는 것이 해결책은 아닐 텐데, 어떻게 새로운 말을 창조할 수 있는가?

 

도미야마 : 새로운 이야기는 번역이 정확하게 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마나는 달아나고픔, 두려운 감정과 같은 신체감각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내 안에 생겨나는 감각들에서부터 말이 나온다. 그리고 거기서 사회성, 사회적 프로세스가 나오는 것이다.

기술되지 못한 것, 잘 모른 채로 만든 것. … 실제대로 기록하는 것, 여기에서 시작된다. 마나와 말 사이의 관계에서 시작점을 볼 수 있다.

 

사카이 : 마나는 상품, 상품어(상품에 결부된 말들)이기도 하다. 상품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해하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는 것. 마나는 어디에나 있다.

 

 



 

타카하시 아츠토시의 발표 <수유너머에게: 카페 커먼즈가 어떻게 '존재'하는가에 대해>에 대한 토론

 

[앞부분을 듣지 못했음]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 대해).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있는데, 히키코모리들은 부끄러움이라는 신체감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집밖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에 사회를 접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일원으로서 부끄럽다는, 이러한 신체감각 말이다.

 

꾸냥 : 히키코모리와 오타쿠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타카하시 : 히키코모리에게 오타쿠는 멋진 존재다. 자기 언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오타쿠는 이인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키코모리는 혼자다.

(야오이 연구를 하고 있는 아지마상에게 요청).

 

아지마 : 오타쿠는 동료가 있고 사교적이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 원하는 것을 사고 동료를 만들어야 한다.

 

 


 

사카이 다케시 선생님의 발표문 <지금 여기로부터의 사회개혁론>에 관련된 토론

 

[앞부분을 적지 못했음].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님이 올바름으로써 운동을 한다는 것은 아니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이너리티의 입장에 있는 말이다. 마이너리티가 마이너리티인 것은 자기책임을 지겠다는 데에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상품의 폐지, 화폐의 폐지를 말한다. 상품, 화폐가 무의식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면 권력이나 법으로 금지해 봤자이다. … 그러므로 본능적 공동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으로써 우회하자는 것이다.

 

이진경 : 선생님은 대화관계, 대면관계에서 사회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설명하셨다. 그것들은 2자관계인데, 3인칭이 되면, 즉 3인 이상의 여럿이 모여 사람 수가 많아지면 2자관계는 무효화되는 것은 아닌가? 집단성은 (2자관계가 아니라), 처음부터 집단성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사카이 : 그것은 내가 생협운동의 맥락에서 말한 것이다. 조합원은 듣는 입장을 취하고, 상대편은 말하게 만든다. 나는 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발표에서, 여기에는 국가론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자본론>의 아날로지를 빌리자면, 간단한(개별적인 또는 우연적인) 가치형태, 전체적(또는 전개된) 가치형태, 일반적 가치형태, 화폐형태가 있다. 처음부터 권력이 거기 개입하고 있다. … 

공동성이란 커뮤니케이션이 아닐까. 이것은 보여지는 쪽,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쪽이 어떤 식의 이니시어티브를 가질 수 있는가의 문제다. 수동적인 입장은 소수자이고, 그들은 다수자의 … (?)를 대부분 가지고 있다. 도미야마 선생의 연구에서도, 오키나와 사람들의 복잡한 구조에 대해 말했다. 수동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 앞에서 그들이 이니시어티브를 갖게끔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도미야마 : 상품을 팔게 하는 동력이 무의식이라 하셨고 그것을 폐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신 데에 동의한다. … 그런데 그걸 그대로 남겨 두면 그것은 국가를 만들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를 보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다. … 무의식을 그대로 남겨 두면 국가를 만들어 버릴 수 있는데, 그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이 제도라 할 수 있다. … 우리가 무의식적 흐름에서 벗어나고 바꾸려 할 때 우리가 똑같은 것-국가-이 되어 버리지 않으려 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가치형태론에서 … 될 수 있다고 하지만… )

 

사카이 : 도미야마 선생이 말한, '강령을 만들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공통적인 토대를 만드는가'라는 문제와도 연결된다. … 결국, 우회작전을 벌여야 한다는 관점이다.

자본주의를 어떻게 폐기시키는가. 말로는 쉽다. 그러나… 고용되어 노동하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역을 만들어야 한다. 1997년 쯤에 지역통화제의 예. … 이것은 시장을 대체하는 강제라 생각한다. 시장에서는 지불하고 결재하는 기능을 은행이 한다. 지역통화는 각각의 회원이 계좌를 만들어, 마이너스가 되어도 괜찮다는 시스템이다. 그리고 플러스가 되어도 이자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 은행에서 이자가 생기는 형태는 장사를 하는 것이지만, 이것을 그대로 이용해서 이것 없이 장사를 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1997년 단계에서는 사회혁명을 위해서는 한 장의 그림을 들고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사람들을 그걸 보고 '안되겠지?'라고 볼 것이다. 그런데 그런 그림을 보다가 어쩌다가 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애국투쟁, 엘리트가 되어 (사람들을) 지도하면 엎어진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대로 되지 않았다. 소련체제 하에서 관료제가… 아랍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의 권력이 무너져도 다른 권력이 장애물로 나타난다. 그런 식으로 고정된다.

 

와타나베 : 도미야마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을 말하겠다. 사카이 선생님과 도미야마 선생님 사이에서도 당파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지역통화 등에 대해서도 둘의 말하기 방식이 다르다. 이렇게 다른데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이 (공통적인 토대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이다.

 

타카하시 : (그분들이 당파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럼 나는 정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다르겠다. 구체적, 추상적으로… 지역의 차이, … 등의 차이도 있을 것이고.

'친구'에 대해 발표를 하게 되었다. 친구라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는 관계다. 차이를 언제나 전제하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사카이 : 옛날의 나 같았으면 정치적 의사통일을 주장하며 싸웠을 지도 모른다. 유일성과 공통성을 어떻게 함께 (기능하게) 할 수 있나 생각하고 있다. 유일성을 갖고 있는 개개인이 공동관계를 만든다. 이런 것을 조합운동에서 볼 수 있다. 대화를 통해 사업을 운영한다고 할 때 개개인이 뭘 생각하는가는 한계적인 입장에 놓여 있다. 나의 입장은, 사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외부에 있는 입장이다. 그것은 코뮨 같은 공동체에서, 외부의 사람들과 같이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것과도 연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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