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되기는 참 쉽다

박찬욱 아저씨의 <아가씨>(2016)





박 상 빈 / 수유너머N 회원





통쾌하고 명랑한!

 

<아가씨>는 한국영화로서는 4년 만에 칸느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개봉 전부터 난리였다. 칸느에서는 평이 대체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딱히 좋은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팬도 아니고 <핑거 스미스>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영드로도 만들어 졌는데, 그것도 보다가 말았다), 그저 한국영화계에서 간만에 신선한 영화가 나온 걸까 싶은 마음에 개봉하자마자 달려가서 봤다(물론 인디포럼에서 <문영>을 보고 난 뒤 김태리 배우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한 탓도 있었다).

 

나는 퀴어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 같은 게 있는 편도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단지 신선한 감각을 즐기는 편이다. <아가씨>는 확실히 신선한 명랑함을 선사한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인물들의 무거운 마음, 사명감 같은 것, 그리고 철저히 파멸시켜버려야 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인물이 느끼는 자책 같은 것들, 이런 무거운 감정들은 그 속성상 확실히 포스트 모던이전 시기의 감정들일 텐데, 이런 감정은 <아가씨>1부에만 국한되는 감정들이다. 이처럼 1부는 과거 한국영화가 일제 식민지시기를 다룰 때의 여성 인물들의 캐릭터들을 그 전형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방식으로 빚어졌다. 아마도 결말 부분의 통쾌함과 명랑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영화 특유의 비장함과 사명감을 지닌 캐릭터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들에 관객들은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간다.

 

속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편이 오히려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2부와 유토피아적인 결말을 향해 기존의 억압적 장치들을 재기 넘치게 때려 부수는 3부는 통쾌함이 주된 정서가 된다. 1부에서는 형식 자체로 드러났었고 2부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의 행동으로 가시화되었던 남성적 판타지를 3부가 산산히 깨부숴버린다. 마치 야마가타트윅스터의 이단 옆차기처럼 통쾌하다. 힘 관계의 역전, 전복은 언제나 흥분을 수반하는 사건이다.

 


박찬욱의 인장

 

지난 호 <씨네21>에 실린 박찬욱의 긴 인터뷰를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이 있다. 해외 비평가들이 발견한(발견했다고 주장했던)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올드보이>의 낙지가 <아가씨>에서는 춘화 속 문어로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꼭 그렇게 낙지에 집착했어야 했냐는 부분이었다. 피식하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찌되었건 그들은 어떤 영화를 보든 간에 언표된 것과 언표행위자의 관계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아주 성실한 태도임에 분명한, 바로 그런 방식으로 텍스트들을 나름의 아카이빙 목록 속에 기입하고 카테고리화 하는 작업이 비평의 기본인 걸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나질 않는다.

 

아무튼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박찬욱에 관해 논의할 때 그의 인장을 잔혹 이미지나 익스트림 이미지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아무래도 아시안 익스트림 시네마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감독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홍진이 그랬으면 그랬지, 박찬욱은 오히려 그런 익스트림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올드보이>의 이빨 뽑기 장면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조리돌림 복수 장면 등에서 피는 살벌하게 튀기지만 카메라는 언제나 고개를 돌린다. <아가씨>에서도 코우즈키(조진웅)가 백작(하정우)을 고문하는 그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익스트림 이미지들이 전시되긴 하지만,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들이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잘게 썰린 산낙지의 다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 바로 박찬욱 특유의 장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잘려나간 손가락이 썰어놓은 산낙지처럼 보이기 때문에 잔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박찬욱은 나름의 선을 지켜가며 익스트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재현된 익스트림 이미지를 그 이미지가 지시하는 바로 그것 자체로 보이게끔 하는 노력에 관하여, 박찬욱은 한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오히려 박찬욱의 인장이라 할만한 것은 영국식-일본식-한국식이 뒤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실내공간과 로코코 양식 소품들이 주는 강박증적인 반복의 모티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올드보이>의 도입부분에서 천사 날개의 깜찍함과 오대수의 찌든 얼굴의 조합, <친절한 금자씨>에서 법구경과 그 속에 그려진 로코코 양식의 권총 설계도, <박쥐>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즐기는 한복집 같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박찬욱 특유의 능청스러운 모더니스트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아가씨>에서 역시 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홍진의 <황해>에서의 마작과 <박쥐>에서의 마작을 비교해 볼 때 이 두 작품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기나긴 선 끄트머리에 각각 놓여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언급한 것들에서 개별 요소들은 모두 진부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들이지만, 조합 속에서 그 요소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재기발랄한 아저씨적 귀여움을 뿜어내게 된다(굳이 쥐어 짜 내어 조어를 해 보자면 큐티저씨 찬욱정도가 되려나? , 이런 짓도 아저씨같군).

 

 

시각의 대의민주주의

 

이제 <아가씨>의 정사씬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고 이 두서 없는 리뷰를 끝내고 싶다. 언급하고 싶은 장면은 2부의 가위자세 정사씬과 영화를 닫으면서 보여주는 배 위에서의 은방울 정사씬이다. 박찬욱은 남성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사디즘적이고 페티시화된 비대칭적 성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성관계를 그려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도상적으로 대칭적이고, 누가 누구를 주도하거나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위에 올라 타거나 하지 않는 바로 이 에로틱한 이미지들은 따라서 성공적인(전복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도식적인 역전은 언제나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아가씨>의 정사씬 이미지들이 성공적이고 전복적인 이미지이기 위해서는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이 이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박찬욱은 이미지의 자유로움을 위해 관객의 정체성을 남성성으로 고정시켜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남성성)을 흐트려 놓는 데는 성공했다.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여성적 쾌락을 재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남성성을 보잘 것 없는 것, 매 맞는 것, 거세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박찬욱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남성적 시선으로는 늘 파악하는 데 실패해 왔었던 여성 성애의 쾌락들을 남성성을 징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나름 해방시켜 놓았기에, 적어도 <아가씨>(들뢰즈가 사용하는 의미로) 매저키즘적이라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지는 잘리지 않아 다행인 백작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가미카제식 죽음일 뿐이다.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었을 박찬욱은 이와 같은 방식의 남성성 전복을 즐거워했을까? 짐작컨대 아마 대단히 그랬을 것 같다.


 

<아가씨>를 보고 이틀 뒤, 신촌에서 있었던 여성영화제에서 몇 편의 영화를 봤다. 여성 감독들이 만든 박력있고 카와이한 영화들은 <아가씨>와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여성영화제 영화들을 통해서 <아가씨>가 지닌 귀엽고 섬세한 아저씨 감성은 그 나름의 장점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그 나름의 한계도 분명했다는 그런 느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 한계란 바로 위에서 서술한 그 남성성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가씨>를 옹호하고 싶다. 비단 김태리 배우라는 활력 넘치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 정말 즐거운 일이라서 뿐만은 아니다. 여성영화제의 트레일러 영상이 말하듯, 한국의 2015년 백 만 관객 이상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참여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10년 전에 허문영 평론가가 소년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15년 전에 김소영 평론가가 사라지는 여성들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한 한국 영화의 어떤 흐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점점 더 고도화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작년에는 전문직 남성들이 등장해 벌거벗은 여성들의 수난들을 해결해 주는 영화들(<내부자들>, <베테랑>, <극비수사>, <검은 사제들> )이 스크린을 죄다 점령했지만, 그 남성들은 단지 데덴찌를 잘 해서 편을 잘 만나 처벌당하지 않고 있을 뿐, 그들의 안타고니스트들과 동일한 방식의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타자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커녕 그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아이로 변할 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언제 어디서나 아이이고 싶다는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뷰티 인사이드>, <국제시장> ).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가씨>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다. 비록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현시함으로서 남성 판타지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남성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할지는 몰라도, 그게 어디인가. 이 정도 만큼이라도 한 것은 시각문화의 대의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재현 시스템 속에서의 나름의 성과이다. 아마도 박수를 대략 세 번쯤 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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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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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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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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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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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1.jpg

 

<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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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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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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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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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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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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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수유너머N에서 3-4월에 진행한 초중급 불어강독 중 8회에 읽은 텍스트를 강독에 참가한 김민우님이 번역한 것입니다.
들뢰즈의 파리8대학 스피노자 강의를 녹취한 원문 중 처음부터 9번째 문단까지의 번역입니다.
(DELEUZE / SPINOZA Cours Vincennes - 24/01/1978 원문 바로가기)
들뢰즈의 스피노자 해석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알기 쉽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 명강의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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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연속된 변이(variation continue)에 대해 [이제껏] 다루었던 것을 잠시 미루고, 철학사 수업을 위하여 매우 분명한 어떤 사항에 대해 임시로 되돌아가겠습니다. 이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하는, 어떤 중단 같은 겁니다. 매우 분명한 사항이란 이것과 관계있는데요. 즉, 스피노자에게 관념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감정이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게 있어 관념과 감정(Idée et affect chez Spinoza). 오는 3월에는, 여러분 가운데 몇 사람의 요청으로, 칸트에게 있어 종합의 문제와 시간의 문제에 대해서도 또한 [강의를] 잠시 중단할 겁니다. 철학사로 되돌아온다는 것은 제겐 조금 이상한 일인데요. 저는, 여러분이 철학사의 이 부분을 그저 단순히 하나의 역사로 생각해주기를 바랍니다. 요컨대 철학자란 단지 개념들을 발명하는 사람일뿐만 아니라, 그는 아마 지각하는 방식들 또한 발명하죠. 저는 거의 순번 매기는 방식으로 강의를 진행하려는데요. 우선은 용어법에 관한 고찰로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우리 강의실이 [많은 분들로] 상당히 뒤섞여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철학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모든 철학자들 중에서 스피노자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 속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가 자신의 책 속에 들어온 것들과 관계하는 방식은 필적할 만한 게 없으니 말이죠. 여러분이 그를 읽었든 읽지 않았든 상관없습니다. 저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하니까요. 일단 용어법에 대한 예비 고찰로 시작해보죠. <윤리학>이라고 불리고 라틴어로 쓰인 스피노자의 주요 저작 속에는, 두 가지 단어가 발견됩니다. 아펙티오(affectio)와 아펙투스(affectus). 몇몇 번역가들은 매우 이상하게도 [이 단어들을] 똑같이 번역합니다. 이건 최악이죠. 그들은 그 두 용어를, 아펙티오와 아펙투스를, “아펙시옹(affection)”으로 번역하고 있죠. 저는 이게 최악이라고 말하는데요. 왜냐하면 철학자가 두 개의 단어를 사용할 때는 원칙적으로 그는 어떤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프랑스어가 우리에게 아펙티오와 아펙투스에 엄밀히 대응하는 두 개의 단어를 손쉽게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펙티오에는 아펙시옹이 있고, 아펙투스에는 아펙트가 있으니까요. 몇몇 번역가들은 아펙티오를 아펙시옹으로 번역하고 아펙투스를 상티망(sentiment)으로 번역하는데, 이는 똑같은 단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프랑스어가 아펙트란 단어를 보유하고 있는데 굳이 상티망이란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러므로 제가 아펙트란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아펙투스를 가리키는 것이고, 아펙시옹이란 단어를 말할 때는 이것은 아펙티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하의 번역문에서 아펙시옹은 ‘변용’으로 옮기고, 아펙트는 ‘감정’으로 옮깁니다.]


첫 번째 사항: 관념이란 무엇인가? 관념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걸 알아야] 스피노자의 가장 단순한 명제들이라도 이해할 텐데요. 이 점에 관하여 스피노자는 독창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로 관념이란 낱말을 이해하려 하죠. 철학사에서 세상 사람들이 언제나 이해하던 의미에서 우리가 관념이라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를 표상[재현]하는 사유 양태입니다. 표상적인 사유 양태. 예컨대, 삼각형의 관념은 삼각형을 표상하는 사유 양태죠. 용어법의 관점에서, 중세 시대 이래로 관념의 이런 측면이 “객관적 실재”(réalité objective)라 불리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면 매우 유용합니다. 17세기 혹은 그 이전의 텍스트에서 우리가 관념의 객관적 실재와 마주칠 때, 그것은 항상 이것을 의미합니다. 즉, 어떤 것의 표상으로 생각된 관념 말이죠. 관념은, 그것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해집니다. 관념과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의 관계인 것이죠.


따라서 아주 단순한 것에서 시작해보죠. 관념이란 자신의 표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사유 양태입니다. 이 정의는 이미 관념과 감정(아펙투스)을 구별하기 위한 첫 번째 출발점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는 사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누구든지 감정이라 부르는 것을 아무거나 취해봅시다. 가령 기대, 불안, 사랑 같은 것들, 이것들은 표상적이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것에 대한 관념은 물론 존재하고, 기대되는 어떤 것에 대한 관념도 물론 존재하지만, 기대는 그 자체로서 또는 사랑은 그 자체로서 아무것도 표상하지 않습니다. 전혀 아무것도.


비표상적인 한에서 사유의 모든 양태는 감정이라 불릴 것입니다. 의지력, 의지는 엄밀히 보면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한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 이건 표상의 대상입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어떤 관념 속에 주어지죠. 하지만 의지한다는 사실 자체는 관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비표상적인 사유 양태이기에 감정인 거죠. 잘들 따라오고 있죠. 어려운 게 아니에요.


이로부터 즉각 관념이 감정보다 우위에 있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그리고 이는 17세기의 모든 사람들에겐 상식이었죠. 하지만 우리는 스피노자만의 고유한 것에는 여전히 들어가 보지도 못한 상태입니다. 관념은 감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한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그러하죠. 원하기 위해서는 원하는 것에 대한 관념이, 그 관념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아무리 미규정적이라도, 있어야만 합니다. “나는 내가 무얼 느끼는지 모르겠어.”라고 말할 때, 대상에 대한 어떤 표상이,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럽더라도, 있는 것입니다. 혼란스럽긴 해도 어떤 관념이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감정보다 관념이, 다시 말해서 비표상적인 양태들보다 표상적인 양태들이 시간적으로, 논리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입니다. 만일 독자가 이런 논리적 우위를 환원으로 바꾸어버린다면, 아주 불행한 오해가 생길 겁니다. 감정이 관념을 전제한다는 것, 이는 무엇보다도 감정이 관념으로, 혹은 관념들의 조합으로 환원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즉 관념과 감정이란, 본성상 서로 다르고, 상호간에 환원될 수 없으며, 다만 감정이 관념을, 그것이 아무리 혼란스러울지라도, 전제하는 그러한 관계 속에서 받아들여질 뿐인 두 가지 종류의 사유 양태들이라는 점에서 출발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첫 번째 사항입니다. 관념-감정의 관계를 제시하는 보다 덜 표면적인 두 번째 방식. 우리가 관념에 대한 아주 단순한 성격에서 논의를 시작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세요. 관념은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입니다. 표상적인 한에서의 사유 양태이죠. 그리고 바로 이런 의미에서 사람들은 관념의 객관적 실재를 말할 겁니다. 관념은 단지 객관적 실재만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인정된 용어법에 따르면 그것은 또한 형상적 실재도 갖고 있습니다. 일단 객관적 실재란 관념이 무엇인가를 표상하는 한에서 그 관념의 실재라고 한다면, 관념의 형상적 실재(réalité formelle)란 무엇을 말할까요?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문제가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고 그래서 더욱 흥미로워지는데요― 관념이 그 자체로 어떤 것인 한에서 관념의 실재라고 말해질 것입니다. 삼각형 관념의 객관적 실재는 삼각형으로 된 사물을 표상하는 것으로서의 삼각형 관념이지만, 이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입니다. 더욱이, 그것이 어떤 것인 한에서, 나는 그것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습니다. 나는 언제나 그 관념에 대한 관념을 만들 수 있죠. 그러므로 저는 모든 관념은 단순히 어떤 것의 관념인 것만은 아니라고 ―모든 관념이 어떤 것의 관념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모든 관념은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모든 관념은 무엇인가를 표상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겠습니다. 저는 또한 관념은 그것이 그 자체 관념으로서 어떤 것이기 때문에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이 수준에서는 더 멀리까지 계속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따로 제쳐둘 필요가 있죠. 관념의 이러한 형상적 실재란, 스피노자가 관념이 관념으로서 지닌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라고 매우 자주 이름 붙인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곧바로 덧붙여만 합니다. 개개의 관념은, 관념으로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어떤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아마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는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관계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혼동되지 않습니다: 관념의 형상적 실재, 즉 관념이라는 사물 내지 관념이 자기 안에 소유하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란 그것의 내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객관적 실재, 즉 관념이 그것이 표상하는 대상과 맺는 관계란 그것의 외재적 성격입니다. 관념의 외재적 성격과 내재적 성격은 근본적으로는 서로 연결되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것들이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관념과 개구리의 관념은 상이한 객관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즉 그 관념들은 동일한 것을 표상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그것들은 동일한 내재적 실재를 갖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은 동일한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즉 한 관념은 ―여러분은 그것을 잘 느끼고 있을 텐데요― 다른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실재의 정도를 갖고 있는 것이죠. 신의 관념은 어떤 형상적 실재를 갖고 있습니다. 유한한 사물의 관념인 개구리의 관념보다 무한하게 큰 내재적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갖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걸 이해했다면 거의 모든 걸 이해한 셈입니다. 그러므로 관념의 형상적 실재가 있습니다. 즉 관념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이고, 이런 형상적 실재는 내재적 성격이며, 관념이 자기 자신 안에 포함하고 있는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입니다.


조금 전에 제가 관념을 그것의 객관적 실재로 혹은 그것의 표상적 성격으로 규정하였을 때, 감정은 정확히 표상적 성격을 갖지 않은 사유 양태라고 말하면서 저는 곧바로 관념을 감정에 대립시켰죠. 이제 저는 관념을 이렇게 규정하고자 합니다. 즉, 모든 관념은 어떤 것이다, 단지 어떤 것의 관념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어떤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에 고유한 실재 혹은 완전함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번째 수준에서 저는 관념과 감정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해야만 합니다. 삶에서는 과연 무엇이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을까요? 두 가지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기하학적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서 흥미로운데요. 여러분은 <윤리학>이 명제, 증명 등등의 형식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책은 더욱 수학적인 만큼 비범할 정도로 더욱 구체적이기도 하죠. 제가 말한 모든 것은, 그리고 관념과 감정에 대한 모든 주석들은 <윤리학>의 2, 3권에 관련됩니다. 이 2, 3권에서 스피노자는 우리 삶에 대한 일종의 기하학적 묘사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그림은 제게 아주 설득력 있게 보입니다. 이 기하학적 묘사는 우리의 관념들이 끊임없이 서로 이어진다는 점을 대략적으로나마 우리에게 말해주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내쫓습니다. 한 관념은 다른 관념을 대체합니다, 예컨대 순식간에 말이죠. 지각은 특정한 유형의 관념인데요, 우리는 곧바로 그 이유를 보게 될 겁니다. 좀 전에 나는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강의실 구석을 보았죠. 다시 고개를 돌립니다. 또 다른 관념이 있죠; 나는 길거리를 산책합니다. 거기서 사람들을 알아보기도 하죠.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서서 폴에게 인사합니다. 또는 변화하는 것은 [지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물들입니다: 나는 태양을 쳐다봅니다. 그러다 태양이 점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있습니다. 이는 따라서 일련의 연속들, 관념들의 일련의 공존들, 관념들의 일련의 연속들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우리의 일상적 삶은 연속되는 관념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스피노자는 “아우토마톤”(automat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그는 우리[인간]이 정신적 자동기계라고 이야기하죠. 다시 말해서 우리가 관념들을 갖고 있다기보다는 관념들이 우리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뚜렷이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념들의 연속들을 제외하고, 또 어떤 것이 일어나고 있을까요? 다른 것이 있습니다. 즉, 내 안의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것이죠. 관념들 그 자체의 연속과 동일하지 않은 변이(variation)의 체재가 있는 것입니다. 변이들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위하여 우리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스피노자가 [변이라는]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인데요... 이런 변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든 예를 다시 취해보면. 나는 길에서 내가 매우 싫어하는 피에르와 마주칩니다. 그를 지나치면서 피에르에게 인사합니다. 혹은 그걸 꺼림칙해 하면서 곧이어 내가 매우 좋아하는 폴을 봅니다. 그리고 폴에게 인사하죠. 거기에 내심 안도하고 만족해하고요. 자. 이것은 무엇일까요? 한편으로는 두 개의 관념, 즉 피에르의 관념과 폴의 관념의 연속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것도 있죠. 내 안에서 어떤 변이가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스피노자의 말은 매우 정확한데, 저는 그걸 인용해보겠습니다. “나의 실존하는 힘의 (변이)”, 또는 동의어로서 그가 사용하는 또 다른 말인 “비스 엑시스텐디”(vis existendi), 즉 실존의 힘, 혹은 “포텐샤 아겐디”(potentia agendi), 즉 행위 능력―그리고 이 변이들은 영원합니다. 



번역 / 김민우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초중급 불어강독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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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말처럼 좋은 철학이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삶을 긍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일 것이다. 삶이 ‘편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편한 삶, 좀 더 잘 벌고 좀 더 잘 쓰는 삶으로 대체되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해지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은 절실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좋은 학교, 좋은 집, 많은 돈이 그것을 가려간다. 이제라도 다시 눈을 돌려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황금빛 장막을 걷어치우고, 거기 가려진 삶을,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야 한다. 철학을,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직업학교가 되고, 돈의 장막을 몸에 덮어씌우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강의는 ‘큰 배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되었다.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대적 삶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사유할 수 있는 촉발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을 배우긴 쉽지만, 그런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은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연속강의를 통해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토요일] 강의: 노마디즘 1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예언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그게 사실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들뢰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요. 잠시 시작되는 듯하다 중단되고 만 것은 무엇보다 그의 책이 갖는 난해함 탓일 겁니다. 사유의 깊이를 잴 수 없게 하는 난해함. 이번 강의는 들뢰즈 사상의 개요에서 시작하여 <노마디즘 1>을 함께 읽으며 그의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면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유목민의 전차를 모는 사유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개강: 5월 7일




 

[일요일] 세미나: 인디언의 사상

“유목민은 역사를 쓰지 않는다.”(들뢰즈/가타리)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화나 제의 등이 그것이었다. 백인들과의 적대적 만남, 혹은 인류학자들과의 우호적 만남을 통해 그것들은 부분적이나마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디언은 이런 유목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번 세미나는 인디언 추장의 말이나 인류학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사유와 만나고자 하며, 그것을 통해 근대와 다른 종류의 삶에 접근하고자 한다.


개강: 5월 8일



이 강좌는 크게 2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이진경이 주도하는 강의는 길을 가기위한 지도를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세미나인데, 이는 스스로 지도를 읽고 찾아가는 훈련의 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의와 세미나를 모두 참여하셔야 합니다.  (문의: 유심 ㅇ11-9571-15ㅇ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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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봄, 콜레기움 들뢰즈의 『시네마』드디어~!

4월9일 토요일에 시작 됩니다.


콜레기움 반장 꾸냥과 주몽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들뢰즈~ 변성찬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해 보았습니다.



사진. 인터뷰 / 꾸냥, 주몽 

                                                                                           

 

꾸냥, 주몽(이하 꾸,주) : 콜레기움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 지 궁금합니다! 강사가 강의를 주도하나요? 아니면? 연구실에서 하는 세미나처럼 진행되나요?

변성찬 선생님(이하 변쌤) : 콜레기움의 기본형식이 세미나에 가까운 거지만 이번 시네마는 강의가 중심이라고 일단 생각하면 된다. 짧은 시간에 분량도 좀 많고, 압축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의를 중심으로 할 생각이다. 강의가 한 발 앞서 나가고, 가령 2회차 때 읽고 발제할 부분을 1회 차 때 미리 강의를 하고, 텍스트 읽고 강의를 하는 것이 일종의 안내의 개념이 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텍스트를 발제하는 게 복습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꾸,주 :『시네마』읽을 때 베르그송과 퍼스를 같이 읽는 게 특이한 것 같아요. 어떻게 연결시켜서 읽는 건가요?

변쌤 :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시네마』는 영화와 베르그송의 지속 또는 이미지의 철학, 퍼스의 기호론, 이 세 가지가 종합되어 있는 책이다. 『시네마』를 펼쳐보면 알지만, 1, 2권 각각 두 번에 걸쳐서 챕터 제목이 아예 베르그송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 있다. 그 주석달기의 방식이 친절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들뢰즈에게는 일종의 재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차라리 주석을 달고 있는 특히, 베르그송 같은 경우는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차라리 소화를 하고 나서 들어가는 게 부담은 되지만, 오히려 더 지름길이다. 안내문에 나간 것처럼 꼭 필요한 부분들을 선택해서 먼저 읽고 들어가려고 한다. 한마디로, 그거 안보고 어떻게 해볼까 하고 하면 더 고생한다.


 

꾸,주 : 들뢰즈의 저작들, 특히 『시네마』,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선생님이 들뢰즈의 저작들을 공부하게 된 계기와 들뢰즈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변쌤 : 나한테는 『시네마』를 읽어야 될 필요성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 필요성이 동시적인 것이었는데, 우연적인 거고, 더 솔직히 말하면 반강제적이었던 거고, 심지어는 매체에다가 글로 쓰기도 했지만, 출판사에서 리라이팅이라는 기획이 나왔고 필자를 구하던 중 연구실에서 영화와 관련된 책 중 “뭐하나 해라!”는 이진경`고미숙의 요구가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시간-이미지가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었는데, 그래서 하기 힘들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어 강사'니까 원서 보고 쓰라고 부추겼다. 그런데, 그렇게『시네마』를 보면서 오히려 내 공부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공부를 하다 보니 영화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들뢰즈에 더 매력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그래서 그게 무려 8년 세월인데... 아, 이런 건 쓰지마!!! (일동 웃음 ㅋㅋ)


 

변쌤 : 들뢰즈 공부를 왜 계속하냐 그러면, 진짜 알고 싶어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연철학적인 예술철학적인 측면, 직접적으로 『시네마』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갖고 있던 비평개념자체가 마음에 들고 내 스타일에 맞았다. 뭐냐하면,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척도를 가지고 등급을 매긴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말이다.) 비평은 창조라는 게 핵심개념인데, 어떤 예술적 작품으로부터 촉발 받은 것을 토대로 자기 사유를 하고, 창조를 하는 것, 뭔가 거기에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자체를 어떤 의미에서는 변용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고, 들뢰즈에게 있어 창작과 비평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철학하는 것 자체도 늘 개념의 창안이라고 하지만, 그런 그 비평개념, 이런 것이 개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비평적인 태도와 잘 맞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시네마』와 들뢰즈의 시각을 통해서, 모든 사유나 철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거지만,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뭔가 새롭게 창작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새로운 비젼 같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비평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작품에서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심적인 담론 틀에서는 비가시적인 거였거나 보이지 않았던 의미, 이런 것들을 다시 부여하는 것인데, 들뢰즈를 공부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철학적 예술비평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의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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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주 : 들뢰즈가 한 때 알콜중독자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들뢰즈를 본받아 우리 콜레기움도 술자리를 많이 가지나요?(^^)

변쌤 : 글을 쓸 때 음주상태로 썼다는 것은 정설화 되어 있다. 들뢰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삶’이다. 술 마셨을 때 진정한 삶이 해방된다는 식. 예를 들면 실제로 68즈음해서 앙리 미쇼 같은 경우 스스로 마약실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니체가 광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철학이 시작됐다라고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명석 판명한 사유 지성의 작동을 위협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층위, 그런데 진정한 사유를 강제하는 힘은 거기에 있는 거고 그것의 힘을 죽이면 새로운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출발점이다. 들뢰즈가 강한 니체주의라고 할 때는 그런 맥락을 받아들이는 거고, 말 그대로 실험을 하는 건데, 미쇼 같은 경우 마약하고 그 상태에서 글을 쓰고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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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vs 변성찬

(*이번 봄! 이 두 분과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호호호)

 

들뢰즈의 문학 예술적 취향을 보면, 그런 것들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나 모델이나 돌파구나 이런 걸 찾아야 하는 게 새로운 철학의 임무라고, 바깥의 사유라고 하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통상적 의미의 ‘나’라고 하는 인격성 외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거고, 그러니까 내안에 있는 외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데카르트 칸트적인 어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외부인 그리고 그것의 폭력을 통해서만 새롭게 사유를 한다라는 것, 짐작컨대, 음주하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그런 말을 한다. 데카르트의 명석판명을 꼬집어서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는 애매판명하고 애매할수록 판명하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합되고 배치 되는냐에 따라서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의지해서 된다 보다는 삶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재배치의 결과이다. 언제나 결과인 것이고, 근데 그 오히려 코기토라는 층위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의식의 층위에서는 그것들이 행하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반동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로, 그것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명확히 들뢰즈에게는 도덕인 것이다. 삶을 억압하는 도덕이라고 할 때,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동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거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인 것이고 파괴를 통해서 들어나는 잠재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삶의 해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일단 해방이고, 실험이고, 실험한다는 것은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고, 예를 들면 그런 식의 입장이니까, 들뢰즈의 철학이 일정하게 예술철학적 지향을 갖는 측면도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반도덕적이면서 윤리적인... 그런 의미에서 술자리도 많이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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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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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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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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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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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예고 해 드린 대로 [불온 통신 1호]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기사입니다^^

지난 기사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79462

 

 

이번 기사는 불온한 인문학 1기 강의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강의는 1트랙은 맑스의 자본,

2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세미나 소개도 조만간 업뎃할 예정입니다.

 

 

이기자 : 20주 동안 진행 되는 커리에 맑스의 『자본』이 있던데. 자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솔직히 언뜻 생각하기엔 ‘불온함’과 ‘자본’의 만남 이럴 줄 알았단 생각도 드는데?

 

정훈: 그런 반응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자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을 그저 좋은 책으로 고전으로 읽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자본을 쉽게 풀어 쓴 책을 읽거나 자본을 그저 고전으로 읽는 움직임들이 느껴져서다. 그런 모습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자본』이 이 사회에 아무런 위해요소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지. 이건 문제다.

 

진석 : 러시아에서는 자본론 번역이 처음 됐을 때 검열자가 읽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허가를 내줬다고 한다. 뭐 설마 이렇게 어려운 걸 얼마나 이해하겠나. 이런 생각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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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떡볶이를 파는 이 시대에 자본을 읽는다는 것.

 

정훈 : 어렵지만 유명하니까 읽고 그게 꼭 나쁘진 않지만 역으로 드는 생각이 자본주의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데 요즘은 대기업이 떡볶이 까지 판다는데 이런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이 하나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간혹 지금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과 동떨어져서 ‘헤겔, 리카르도 등등을 나는 다 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전문가주의적으로 읽는 경우. 혹은 말랑말랑하게 소화가 다 된 상태로 강사가 알려주는 데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문제다. 이게 다 맑스의 『자본』을 무기력한 낡은 유산으로 읽어서다. 내가 보기엔 그럼 맑스도 싫어할 것 같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전화로 해고를 통지하고, 청소 노동자에게 식비 300원을 주는 이런 세상에서 자본을 읽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해피 : 맑스의 자본은 누구랑 어떤 입장에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지난 가을 연구실에서 맑스 콜레기움하면서 느꼈다. 맑스의 자본을 정치·철학과 같이 읽으니까 자본이라는 책이 주는 폭발력이 더 강렬했다.

 

(*콜레기움 : 정정훈 선생과 함께 ‘맑스와 정치, 혹은 혁명과 코뮨의 정치철학에 관하여’ 라는 주제로 2010년 10월 부터 12주 동안 맑스의 저작을 함께 읽었던 프로그램이다. http://nomadist.org/xe/collegium/28937)

 

이기자 :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 읽는 자본 역시 각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읽는다면 더 재밌어 질 것이라는 말인 것 같은데? (좌중 동의^^) 그런데 설마 자본 5권을 다 읽어야 하나?

 

정훈 : 모든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도 된다. 오히려 자본을 읽기 위한 사전 오리엔테이션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강의를 충분히 듣고 스스로 읽을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듣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좋겠지. 필요하면 별도의 세미나를 꾸려서 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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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 :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다. 어떤 책인가.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의 고전이다. 그런데도 자본이랑 비슷한 운명을 밟는 것이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자본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학 나올까 걱정 돼서 못 읽고.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려고 해도 아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말도 있더라.

 

원제목은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이다. 이때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정신 분열증이 아니다. 이건 분열증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보통 사람들은 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 분열증 생긴 갑다.. 이렇게 이해도 하더라. 그런데 아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때 지나가던 한 세미나 회원 ‘아~ 나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분열증 생긴단 소린 줄 알았어~헤헤’ (웃을 때가 아니지요. 공부하세요^^)

 

진석 :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임상적인 의미의 정신 분열증이 아니라 분열증, 분열자가 되자는 말이다. 들뢰즈의 개념어에 익숙한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체를 지향한다든가 다양체를 만드는 것, 특수한 회로를 벗어나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관과 태도 지배적인 시선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분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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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분열증자가 되자.

 

진석 : 흔히 정신병이 있으면 이야기하기 힘들다 생각 하는데,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합쳐 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내 의식 감정에서는 불편하지만 일상생활은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 산다. 그래서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가장 강력한 힘은 아예 다른 언어 논리로 맞장을 뜨는 것이다.

사실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양상은 달라지겠지만. 믿고 따르고 의식하던 일상의 규율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상이한 논리 언어가 스쳐 갈 때 지속적으로 잡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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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자본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두 권 모두 만만치 않은 책이다.

꼭 한 번 독파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놓고 길을 잃었던 이라면 이번 기회에 '불온한 인문학'을 접속해보면 어떨까.

 

다행히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강사와 튜터가 도와준다고 한다.

 

설령 이 두 권의 책 모두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문제적인 두 권의 책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첫 만남을 하는 것도 큰 행운 아닐까.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 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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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 ‘불온’을 고민하다.

 

 

2011년 새해가 밝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당신의 2011년 새해 계획은 무엇인가. 매일 쳇바퀴 돌듯 지나가는 일상을 탈피하고자 뭔가 새롭고 신나는 일을 계획하진 않았는지. ‘올 해 만은 살을 빼겠다. 영어를 정복하겠다.’ 등등. 1월만 되면 돌아오는 뻔한 결심을 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헬스클럽, 영어학원은 일 년 중 일월이 가장 성수기라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시간이 지날수록 결심은 희미해지고 계속 다닌다 해도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은 계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당신의 활동 영역을 살짝 바꿔보면 어떨지. 여기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이 야심차게 준비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있다. ‘불온한 인문학’ 1기! 기존의 인문학 강좌와는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불온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인지. 이것 저것 궁금한 것이 많다. 이번 인터뷰는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 연희동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불온한 인문학 1기를 준비하는 주요 멤버는 정정훈, 최진석, 정행복, 문화 이다.

이날 인터뷰는 몇 가지 질문에 네 사람이 난상 토론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하 정훈, 진석, 해피, 화)

 

이기자 : 불온한 인문학이라고? 왜 불온한 인문학인가. 딱 봤을 때 ‘불온한’이라는 단어에 먼저 방점이 찍힌다.

 

진석 : 연구실이 확장 되면서 대외적인 강좌를 많이 나가게 됐다. 그런데 외부 강좌를 나가면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맞 부딛힌 일들이 많았고 불온성의 사유를 촉발했다. 한 번은 도서관 강좌를 기획했는데 강좌 중 하나가 ‘종교와 파시즘’ 이었다. 그런데 사전 강의 계획서를 보고 강의를 청탁한 기관이 정정 요청을 했다. 이유는 현 국가 시책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대학 교양강좌를 나가서다. 거기서는 ‘가족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할 일이 있었는데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국가와 사회가 통합적인 부르주아 지배 체제가 성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가부장주의가 성립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매춘이나 동성애에 대해 언급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대학생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매춘이나 동성애가 대학생들하고는 무관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듯이 말이다.

 

이기자 : 많이 당황했겠다. 그런데 외부 나가서 강의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정말 많을 것 같다.

 

진석 : 그렇다. 하지만 연구실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소통한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대중과 소통하고 알고 있는 앎과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명분으로 모든 것을 희석화 평준화 타협하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사실 이런 경험들은 당시엔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많은 반성이 됐다. 우리 역시 잘 조리되고 소화하기 좋게 다져진 그런 인문학을 제공하는 문화센터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 다른 인문학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이기자 : 외부의 자극이 ‘불온’을 촉발 시켰군요. 그런데 수용자 입장에서는 왜 ‘불온’해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화 : 사실 지금 말하는 인문학 열풍에 나 역시 끼어 있다. 처음 연구실을 알게 된 것도 직장 생활 하면서 뭔가 부족하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시작한 공부였다. 그런데 ‘그냥 무작정 인문학이 좋은 것이니까 해야 한다’ 는 말로는 부족하더라. 단순히 위로 받고 다음 날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것 보다는 지금 내 일상의 괴로움이 어떻게 어디서 온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또 남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이건 나 뿐만이 아니다. 직장 동료, 친구들 역시 일상에 지쳐서 뭔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인문학 강좌를 시도하더라. 물론 개인 사정도 있겠지만 인문학 강좌가 그들의 고민을 뚫어주질 못하더라. 그래서 일까. 실망하고 그만 두는 경우 많더라.

 

진석 : 벌써 인문학 강좌에도 일정한 회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스펙을 만들어야 하니까. ‘~가 대세’ 니까.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작동한다. 중국어가 대세니까, 글쓰기 기술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니까. 이런 식이다. 물론 필요할 땐 배워야 한다. 하지만 스펙을 위한 스펙이 될 때 특정한 차원의 앎에 국한되기가 쉽다. 
 

정훈 : 인문학 열풍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거다. 나도 굉장히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 그래서 잘 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면 각박한 세상에 살다가 좋은 얘기도 듣고 위안 받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돈을 더 많이 벌고 잘 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것 처럼 인문학 강좌라는 것도 고전을 읽으면서도 심지어 맑스를 읽으면서도 그냥 읽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걸 보고 혹시 ‘신(神) 대신 인문학을 찾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여러 곳에서 많이 공부한다는 건 좋다. 읽으면 좋겠지. 그런데 근본적으로 사회 속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나. 지금 당장 홍대 노동자들 해고 되는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도피처가 돼서는 안된다.

 

이기자 : 모두들 ‘인문학이 도피처가 되선 안된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 같다.

 

해피 : 맞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우리도 고민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연구실 오는 분들 중에도.. 여기서 하는 공부가 몸담고 있는 종교 단체와 비슷하다... 별로 불온하지 않고... 판단을 못하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진석 : 한편으론 이해는 된다. 가령 뭐 연구실에 대해서 ‘종교 단체 아니냐..’ 는 말도 들었다.

 

화 : 우리 식구들도 그래요.. (좌중 웃음)

 

진석 : 우리가 알고 있는 앎의 특정 회로가 있잖아. 시집가고 장가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을 봤을 때 비정상적으로 보는 건 당연해.  

 

이기자 : 이제 막 해피쌤이 지적한 것 같은데 너무 온건하다는 질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진석 : 나 역시 책만 읽으면 나중엔 뭐할래? 이런 질문을 많이 들었다.

때때로 박차고 (거리로)나가자. 이런 생각도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공부와 거리...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일이 아니다.

 

이기자 : 일상생활과 이 불온함의 만남, 어떻게 수위 조절을 해야 할까. 사람에 따라선 이 ‘불온한’이란 수식어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훈: 일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중요한 건 거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우스개도 있다. 우리는 혁명이 일어나도 밖에 못 나간다는 말이... 세미나도 해야 되고 밥 시간엔 밥도 해야 하니까.

 

정훈: 또 텍스트 해석 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현장에서 질문을 가지고 부딪히고 충돌해야지. 정확하게 ‘이런 말씀.. 따라 합시다.’ 하고 읽는다면 교회에서 성경 읽는 거랑 같다.

 

진석 :나도 모르게 순응하고 있는 동의하고 있는 사회적인 국가적인 기치에서 되물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대학 들어가고 시집 장가가고 이런 것들에 대해 ‘꼭 그렇게 살아야 돼?’ 그런 작다면 작고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질문이나 문제의식이 출발점이 될지 않을까. 짱돌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 이런 거 당장은 어렵잖아. 

 


 

이 때 지나가는 한 영화사 세미나 회원은 “밥 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이 날 정정훈 회원은 저녁 당번이었다.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은 직접 밥을 해 먹는다. 회원들이 자율적으로 돌아가면서 밥을 한다. 저녁 5시 30분부터 6시 30분 까지가 저녁 식사 시간이다. 한 끼 식사는 2천원. 이 날 메뉴는 계란찜, 감자 튀김, 콩나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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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 우리도 안 그러는 데 뭘.

 

화 : 그리고 이 ‘불온함’을 아주 길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뭘 가져다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사실 매일 공부가 업이 아닌 사람들은 시작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결단이다. 원래 하던 일과 병행하려면 바빠지고 또 가족이나 친구들이 너 변했다고 힐난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안고 함께 하다 보면 이 불온함이라는 게 나에게 또 다른 길을 열 수 있는 어떤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계속)

 

 * 이날 인터뷰는 세 시간 넘게 진행됐습니다. 모두들 불온한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많은터라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인터뷰 내용을 중간에 끊어서 올립니다. 다음번에는 불온한 인문학의 구체적인 진행 방식 커리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커밍 쑨!!!

 

 

 

(글/이기자, 사진/김기자)

 

<강사 소개- 왼쪽 위 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

 

최진석 : 전공은 러시아 문학과 문화로 이번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 평론가 바흐친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요즘은 프로이트의 저작을 읽으며 정신분석을 횡단하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코뮨주의 선언』(공저),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등을 쓰고 옮겼다.

 

정행복 : 맑스와 푸코를 공부하고 있다. 현장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 수요일에는 노들 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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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 이주노동자의 정치적 주체성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던 시절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접속한 이후 이곳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코뮨주의 정치철학과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이론적 해석이다.

현재 후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준비중이다.

『부커진 R』(공저),『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코뮨주의 선언』(공저) 등을 썼다.

 

문화 : 문학 사회학에 관심이 많다. 언젠가 ‘맑스와 함께 소설을’ 이란 책을 쓰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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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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