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다. 연구실에 자주 접속한 친구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 이름은 번쯤 들어봤을터인데... 그의 다른 저작 중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선택한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지난 트랙 1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고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데는 뭔가!?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맑스의 『자본』을 읽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들뢰즈·가타리를 만나면 조금은 해소가 되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증폭이 될까? 여기저기서 트랙 2 강의에 대한 질문들이 들린다.

 

그동안 좀처럼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학자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강의 준비(?)와 집필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는 최진석 선생님을 만나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이들테면 “왜 하필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입니까? 절판되서 책 찾기도 힘든데용?” 같은 기초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왜 지금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어야 할까?

 

 

인터뷰어 / 화 (불온한 인문학 튜터)

인터뷰이 / 최진석 (불온한 인문학 강사)

 

 

 

: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선택한 이유는 뭔가? 들뢰즈의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진석 :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제목으로 책을 두 권을 냈다. 첫 번째가 『안티 오이디푸스』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 nie)고 두 번째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2)이다. 들뢰즈는 워낙 전방위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에 책 마다 특별한 제목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시리즈로 나온 것은 사회철학에 해당하는 책이다.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들뢰즈의 사회철학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사회철학과 이미지가 다르더라.

 

 

화 : 그 때가 대략 몇 년 전?

 

진석 : 90대 중반에 처음 읽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라... ㅠ)

어쨌든 그 당시 사회철학 하면 마르크스나 헤겔을 생각하거나 좀 세련된 사람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들을 이야기 했다. 그런 책들의 특징은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피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상당히 깨더라.

 

 

 <그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 뭐가 그렇게 깼나...?

  

진석 : 무엇보다도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 (웃음) 재밌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 첫 문단에서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라고 한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대명사가 아니라 사실은 이제 사회전체 혹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존재하도록 만들면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주는 힘 즉 생성력에 대한 이야기 이다.

 

 

: 그래도 『안티 오이디푸스』읽으려고 시도 했다가~ 문단 보고 뭔말이야? 하고 덮었단 친구들도 많더라. 도대체 그 <그것>이 뭔지 도통 감이 안온다~

 

진석 : 프로이트로 따지면 리비도(Libido) 같은 것이다. 사실은 그런 힘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힘의 장 힘의 무대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 가가 바로 사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걸 안 건 굉장히 나중의 일이다^^)

 

 

: 들뢰즈·가타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다른 사회철학과는 어떻게 다르던가?

  

진석 : 사회철학이나 역사철학이란 관점에서 이 책을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삶이나 사회의 역사에서는 항상 중심화하는 힘이 있고 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같이 있다는 거다. 전자를 구심력 후자를 원심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힘의 상호관계가 특정한 사회형태를 결정짓기도 하고 사회가 다른 사회로 변화하게 하는데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확장적인 측면을 가지면서 모든 것을 중심적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 이 자본주의를 중심화하는 힘,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장하는 힘이라는 것이 자본의 힘이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봉건사회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이라는 규칙이 절대적이었다. 가령 양반과 상민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분리돼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도 있다. 돈 많은 상민이 양반 신분을 산다. 그리고 그는 양반 행세를 한다고 큰 갓도 써 보고 기와집도 올린다. 그렇게 해 봤는데 양반들이 인정을 안하고... ‘저 놈은 원래 상민 출신이다.’ 결국 별로 재미를 못 봤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신분이라는 규칙(코드)다. 이 신분이라는 규칙(코드)은 봉건사회에선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 않느냐. 과거로 가면 갈수록 신분을 규정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 두텁고 강했다. 한 사회가 통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완전히 변한다. 잘 알다시피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않느냐. 내가 물건을 파는데 ‘양반한테만 팔고, 상민한텐 안판다?’ 아니지 않느냐. 돈은 이전의 신분 관계를 해체 시키는 힘이다. 또한 과거에 있었던 유기적인 공동체 역시 다 파괴한다. 씨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가 화폐가 도입되면서 무의미하게 됐다.

 

화폐라는 것이 교환형태가 되면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평등하게 환원되어 버리는 이런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성이다. 돈이라는 규칙. 신분이 아니라 돈이라는 규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패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초코드화 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자본은 모든 것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만들어주지만. 자본이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화폐 없이는 그 무엇도 존재를 규정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자본주의는 평등하고 이상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자본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돈이라는 규칙.. 그 누구도 화폐를 통하지 않고선 세상에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벌지 않을 수 없고.. 돈을 벌어야 하는 규칙에 종속되지 않고선 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화폐에 대한 중심화이다. (이 내용에 대해선 “불온한 인문학” 트랙 1『자본』 강의에서 열심히 배웠지요? ^^)

 

 

 

 

 

목요일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토요일엔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 “불온한 인문학”은 목요일 강의와 함께, 토요일엔 함께 책을 읽는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목요일 강의를 통해서 만난다면 토요일 세미나에서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다. 권의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궁금하다.

 

진석 : 빌헬름 라이히는 20세기 초에 독특한 정신분석 학자였다. 그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당시에 사회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노동자 계급이 분명히 계급의 해방을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 지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가?

 

진석 : 그렇다. 빌헬름 라이히도 아는 것과 실천이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 목격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노동자들도 돈의 규칙을 따르는 한에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계급 해방의 욕망이라는 것은 사실 자본가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반대했지만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타협하거나 종속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히가 던진 질문이 “왜 대중은 혁명적이지 않는 가” 다.

 

들뢰즈·가타리는 질문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는 대중이 혁명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욕망이 혁명적인가 아닌가” 다. 혁명의 열쇠 혹은 해방에 대한 잠재력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계급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법칙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빠져나가지 않는 힘 종속되지 않겠다는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사실 우리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건전하다든지 바람직하다는 기준과 분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학교 가고 좋은 회사 입사하고 잘 먹고 잘 살라.’ 는 사회의 요구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죄의식을 갖게 한다든가 혹은 잘못된 삶을 살지 않나. 하는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 그 불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욕망이 혁명적일 수 있을까?’ 를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사는 걸 욕망하는 게 그렇게 나빠요?’ 하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욕망을 줄여라. 이런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진석 : 보통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보자. 이것들은 사실 대부분이 타자의 욕망이고.. 사회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타자의 욕망이 다 나쁘냐’ 그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우리의 활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느 누구의 활동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놓여 있는 맥락 상황은 서로 다르다. 거기에서 욕망의 선이 나에게 주어질 선을 따를 때와 아닐 , 각각의 경우가 다르다. 원칙에 따라 다른 것이다.

 

문제는 동일하게 ‘이것은 좋은 것이다.’ 하고 다른 욕망의 가능성을 꺾어버릴 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성적인 존재니까 ‘정말 그래’ 하고 쉽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번 강의를 듣다보면 타성적인 우리의 존재에서 ‘야성“을 끌어 낼 수도 있을까?

 

진석 : 하하~기대하시랏~

 

 

 

: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혁명, 욕망~ 그리고 야성? 이런 단어가 나오니 흥미가 돋긴하는데~ 문제는 너무 어려워보인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친해질 있는 좋은 방법 없나?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는 것이 좋은데 쉽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판본은 절판인데다가 최선의 번역본도 아닐 뿐 더러 원래 내용 자체도 쉬운 내용이 아니다. 일단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토요일 집중세미나에서 읽으면서 강의 예습을 하시고, 목요일 강의를 듣고,『안티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으면서 복습을 하면 어떨까. 중간 중간 읽어야할 프로이트 논문도 몇 편 있다. 그것도 조만간 공지할 예정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아마도~! 그 어렵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구를 찾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 혹시 출구만 있고 나가는 문은 없는 거 아닌가?

 

진석 : 하하^^ 그건 책임 못지겠다~~

 

 

 

10주동안 강의를 맡아줄 최진석 선생님~ 기대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마디로 한다면?

 

진석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해방에 관한 책이다. 욕망의 해방은 결코 범죄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에겐 필연적인 충동이다. '욕망해도 좋다.' 라는 것이 이 책의 중심테마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한 최진석 선생님의 『안티 오이디푸스』. 그가 풀어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5월 21 개강-10주 과정]

Ⅰ 트랙 2 강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트랙 2 강의 안내는 요기!

http://nomadist.org/xe/bulin/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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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불온한 인문학"은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불온한 사유를 위하여” 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며 시작된 대중의 공동 학습의 장이다.

함께 하는 친구들도 다양하다. 20대 부터 시작해서~ 30대, 40대... 끝은 어디일지 정확하게 몰라요 무한대~^^
매일 매일 출근 도장 찍는 성실한(물론 겉으로만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직장인도 있고
과감하게 학교도 직장도 싫다~ 수상한 일을 작당 모의하는 이도 있고
새내기 직장생활 하랴 공부하랴 매번 강의 시간 빠듯하게 뛰어오는 이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슴 깊은 곳에 "불온성" 이 만큼은 가지고 있다는 것!

목요일 개강 이래로 매주 목요일은 "자본" 강의를 듣고 토요일에는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며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는 불온한 인문학 수강생들...
20주간의 과정 중 맑스의 "자본"을 읽는 첫 번째 트랙이 끝나는 즈음...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창한 5월의 토요일...
가족, 직장, 친구... 여기 저기 부르는 곳도 많고..
설령 아무도 안 불러도
봄바람 부는데로 방황하고도 싶었지만...

그들에겐... 맑스의 "자본"을 공부하는 것이.. 혹은... 지금 내 삶에 대한 "고민"을 풀어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데...

불온한 인문학을 함께 하는 친구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고민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더냐.. 한번 들어나 보자^^

 

인터뷰어 : 튜터 해피, 화

인터뷰이 : 석관, 승원, 봄, 근배, 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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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님은 어때요? 원래 작년 가을에 했던 맑스 콜레기움으로 연구실에는 처음 접속했는데요?
그때 보다 훨씬 밝아지신 듯??

 

 

석관 : 그땐 정말 연구실이 낯설고 어색했어요~ 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나만 모르는 사이 같고.. 그래서 사실 많이 노력했고요~ 그래도 불온한 인문학 친구들은 거의 다가 연구실에 처음 온 분들이라 덜 어색하더라고요. 아예 처음 부터 시작이니까.
처음엔 공지 뜨자 마자 너무 반가워서 얼른 신청할려고 했어요. 그런데 자기 소개 같은 거 쓰라 그래서..
이거 어쩌나.. 못쓰겠는데.. 하고 며칠 고민하다가 짧게 올렸답니다. 하하.

 

근배 : 저도 공지 뜨고 나서 바로 올리려고 했는데... 자기 소개 때문에 안 올렸어요. 그런데 석관님이 엄청 짧게 신청글 쓴 거 보고 그냥 올렸어요. '아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말이예요..

 

화: 정말 나쁜 본보기를 보이셨군요. ㅜ 괜찮아요. 그래도 신청했으니 뭐 용서~ ㅎ ㅎ

 

 

석관님은 콜레기움 끝날 때도 에세이도 쓰셨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맑스를 읽으면서 어때요? 벌써 한 육개월 읽으신거 같은데요?


 

석관 : 원래 제가 고민하는 것은... 존재와 의식, 혁명과 정치..!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워낙 폭이 넓고 깊기 때문에...쉽게 이야기 하기가 어렵고요..
맑스를 읽으면서 자본이 가지고 있는 모순.. 나 역시도 자연을 착취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미숙: 저는 백수로 지냈던 시간이 좀 길기도 길었고.. 저희 아부지는 평소에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이런 말씀 자주 하셨거든요..
저도 사실 이 말이 싫긴 했지만 '돈을 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몽사 쌤이 강의 중에
"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느냐"고 이야기를 들었을때...'아 그렇구나. 나는 왜 그 생각 못했지.' 하고 생각했어요.
자본을 배우다 보니 이전에는 내가 왜 힘든 줄 몰랐는데..
아 이래서 힘들었구나.. 뭐 이런 걸 알게 됐어요. 내 고민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거죠.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안에 있는 모순들을 알게 되면서 일을 하는게 더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일을 하면서 자본론을 배우고 동시에 한다는게 힘든 것같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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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 : 아직 구체적인 건 모르겠고.. 그냥 순수 미술이요.. 사실 직장 생활 하면서 생긴 꿈인데요. 아무래도 직장생활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니까 뭔가 다른 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림에 대한 꿈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석관 : 저는 이런 게 자본주의 안에서 생기는 분열 같아요. 미숙님도 그렇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열증을 안겪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일이 이런 일이었어?' 하는 배신감있잖아요. 내 행복이 아니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실...
사실 저요. 예전엔 아침마다 회사에서 하는 체조를 당연히 했는데요. 요즘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자꾸 하기 싫고 대충하게 되요. (좌중 웃음^^)
이 분열을 극복하거나, 정리하거나.. 종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건이 닿는 한 계속 가봐야겠지요?

 

정답을 다 알고 계시네요?!



해피 : 사실 이런 고민이 직장을 그만 둔다고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임금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고민을 안고 사는 거지요..

 

화 : 모든 사람들이 분열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야하지 않을까요?


봄 : 각자의 삶에서 만나는 맑스를 다 안고 사는것 아닐까요?

 

 

승원님은 어때요?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와 연구실에서 공부할 때의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승원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다른다 이런 것 보다는.. 연구실에 오면 다른 공간에 비해 획일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생기가 느껴져서 좋아요. 
대학원은 사실 사람도 적고.. 토론을 해도 몇 몇만 하고 뭘 해도 참여한단 느낌이 안들거든요. 그에 비하면 연구실은 모두들 참여한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그런데 사실 지난 학기엔 계획했던 것 보다 자본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다음 학기엔 열심히 할래요~ ㅎ


미숙: 저는 이제껏.. 내가 왜 힘든지 모른채 살아 왔는데... 대부분 그게 사는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왜 힘들까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으니까...
수업을 들으면 힘든 이유가 정리가 되요..
요즘 저는 과도기를 겪는 기분~~~ 공부를 더 하면 아마도 힘이 생기겠지요?

 

근배님은 어때요? 근배님의 고민은 다른 분들 보다 철학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근배 : 저는 다른 분들하고 좀 다른데요.. 사실...불온한 인문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하는게 꼭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항상 이야기하지만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어요.. 뭐랄까.. 저는 좀 더 확실한 데이터를 가지고 근거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끌리는데요.
자본에선 그걸 찾지 못해서...

 

 

불온한 인문학 처음 신청할 때 근배님이 풀고 싶은 질문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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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배 : 왜 사는가? 왜 살아야되나...현재 내가 어떤 형태로 어떤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가...여러가지의 질문들을 풀고 싶었어요. 다른 곳에선 이런 고민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접해볼 수 없었고 그래서 오게 된 거죠..
지금 우리 삶의 강제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강제하는 외부의 힘은 살아가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완벽하게 강제하는 힘이 없는 게 가능할까.
이런 저런 의문들이 생기고 배우면 배울 수록 의문만 많아져요.


해피: 자본이 모든것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세미나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제하는 힘이 있다면 무엇일까..'하는 건데요..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화 : 맑스가 정확하게 어떤 상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일은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창조를 하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아요. 전 그래서 매력적인데요.


석관:  자본론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본론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사실 저는 읽으면서 제가 가졌던 맑스에 대한 오해도 많이 풀었어요. 지금까지 맑스가 읽히는 것은 자본의 본질을 밝혔기 때문이 아니예요? 그래서 유용한 것 같은데. 그런데 가끔 근본주의자들은 저 보고 뭐 자본을 아직도 읽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실망했죠. (격한 말씀은 %^&^**$##$# 삐리리 처리 하였습니다^^)

  

봄님은 평소에 들뢰즈와 맑스라는.. 인생의 숙제를 이 커리큘럼에서 발견하고 기뻤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어때요?



봄: 사실 전요.. 제가 쓴 석사 논문을 다시 쓰고 싶었고.. 거기에 딱 맞는 커리큘럼이기도 했고.. 제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클리어하게 확 풀고 싶었어요! (이기적인 생각이지요?^^)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좀 더 단순화 시키려고 시작했던게 불인강이었는데..점점 지나면서 생각이 많이 복잡해지고 있어요. 저는 구조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어요. 자본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모든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자꾸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또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하고 질문을 해보면...또 자본이라는 구조안에서 사고되기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은건가 싶기도 하고, 여튼 좀 많이 복잡해진게 사실이예요.

 

봄님이 꿈꾸는 세상은? 가끔 농담처럼 하는 노후 계획도 재밌는데요?



봄: (아~ 그건 나중에^^ 오늘은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면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하면 제가 꿈꾸는 사회는 막연하게 비국가사회예요. 비국가라는 것이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국가’가  지금 우리에게 느껴지는 부정적인 권력의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은 어떤 구심체로서의 비국가의 모습이지요. 그런데요 토요일마다 집중세미나를 하면서 그 상이 구체화되기보다는 좀 더 복잡해지고,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요.

그리고 처음에 열심히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했는데...커리큘럼을 다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걸 느껴요. 다른 분들은 되게 열심히 하는데..나만 덜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자극도 많이 받게 되요..
저요~ 들뢰즈는 열심히 할래요..^^ 앙띠 오이디푸스는 좀 더 열심히 읽고 생각을 넓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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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 해피, 화 도 트랙 2에선 더 열심히 공부할랍니다^^ 아우 벌써 부터 기대 만빵!
이날 함께 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도 남은 10주 안에 꼭 들으러 갈테니.. 기다리세요^^
불온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 후기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하세요.

 

 


트랙 2에선 들뢰즈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불온한 인문학 트랙 2 개강 커밍쑨~~ 공지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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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대중 공동 학습의 장,

“불온한 인문학” 트랙 2를 개강합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일주일에 강의 1회`세미나 1회의 방식으로 총 5개월 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주동안의 트랙 1 과정을 마치고

이제 트랙 2가 시작됩니다.

이번 1기에 한하여 트랙 2 신청을 받습니다.

 

 

 

주요 프로그램

Ⅰ 트랙 2 강의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강사: 최진석

튜터: 정행복, 문화

일시: 2011. 5. 21(목) ~ 2011. 7. 30(토)

수강료: 3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http://nomadist.org/xe/bulin

문의: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구실 대표 번호 (070) 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1.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 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2. “불온한 인문학” 트랙02에서는 10주간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3.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4.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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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말처럼 좋은 철학이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삶을 긍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일 것이다. 삶이 ‘편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편한 삶, 좀 더 잘 벌고 좀 더 잘 쓰는 삶으로 대체되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해지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은 절실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좋은 학교, 좋은 집, 많은 돈이 그것을 가려간다. 이제라도 다시 눈을 돌려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황금빛 장막을 걷어치우고, 거기 가려진 삶을,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야 한다. 철학을,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직업학교가 되고, 돈의 장막을 몸에 덮어씌우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강의는 ‘큰 배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되었다.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대적 삶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사유할 수 있는 촉발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을 배우긴 쉽지만, 그런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은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연속강의를 통해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토요일] 강의: 노마디즘 1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예언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그게 사실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들뢰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요. 잠시 시작되는 듯하다 중단되고 만 것은 무엇보다 그의 책이 갖는 난해함 탓일 겁니다. 사유의 깊이를 잴 수 없게 하는 난해함. 이번 강의는 들뢰즈 사상의 개요에서 시작하여 <노마디즘 1>을 함께 읽으며 그의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면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유목민의 전차를 모는 사유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개강: 5월 7일




 

[일요일] 세미나: 인디언의 사상

“유목민은 역사를 쓰지 않는다.”(들뢰즈/가타리)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화나 제의 등이 그것이었다. 백인들과의 적대적 만남, 혹은 인류학자들과의 우호적 만남을 통해 그것들은 부분적이나마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디언은 이런 유목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번 세미나는 인디언 추장의 말이나 인류학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사유와 만나고자 하며, 그것을 통해 근대와 다른 종류의 삶에 접근하고자 한다.


개강: 5월 8일



이 강좌는 크게 2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이진경이 주도하는 강의는 길을 가기위한 지도를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세미나인데, 이는 스스로 지도를 읽고 찾아가는 훈련의 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의와 세미나를 모두 참여하셔야 합니다.  (문의: 유심 ㅇ11-9571-15ㅇ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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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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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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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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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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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이 선택한 두 권의 뜨거운 책

 

-맑스의 『자본』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예고 해 드린 대로 [불온 통신 1호]

'내 친구, 불온한 인문학 강사팀을 소개합니다.’에 이은

두 번째 인터뷰기사입니다^^

지난 기사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79462

 

 

이번 기사는 불온한 인문학 1기 강의를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강의는 1트랙은 맑스의 자본,

2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를 중심으로 이뤄집니다. 

 

세미나 소개도 조만간 업뎃할 예정입니다.

 

 

이기자 : 20주 동안 진행 되는 커리에 맑스의 『자본』이 있던데. 자본을 선택한 이유가 있다면? 솔직히 언뜻 생각하기엔 ‘불온함’과 ‘자본’의 만남 이럴 줄 알았단 생각도 드는데?

 

정훈: 그런 반응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이야 말로 자본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자본을 그저 좋은 책으로 고전으로 읽는 건 아니다. 이런 말을 굳이 하는 이유가 있다. 최근 자본을 쉽게 풀어 쓴 책을 읽거나 자본을 그저 고전으로 읽는 움직임들이 느껴져서다. 그런 모습은 미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런 움직임은 『자본』이 이 사회에 아무런 위해요소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때문에 가능한 것은 아닌지. 이건 문제다.

 

진석 : 러시아에서는 자본론 번역이 처음 됐을 때 검열자가 읽었는데 너무 어려워서 그냥 허가를 내줬다고 한다. 뭐 설마 이렇게 어려운 걸 얼마나 이해하겠나. 이런 생각이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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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이 떡볶이를 파는 이 시대에 자본을 읽는다는 것.

 

정훈 : 어렵지만 유명하니까 읽고 그게 꼭 나쁘진 않지만 역으로 드는 생각이 자본주의가 계속 지속되고 있는데 요즘은 대기업이 떡볶이 까지 판다는데 이런 시대에 자본을 읽는 것이 하나도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간혹 지금 권력이 작동되는 방식과 동떨어져서 ‘헤겔, 리카르도 등등을 나는 다 안다. 그러니까 나는 이 정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지나치게 전문가주의적으로 읽는 경우. 혹은 말랑말랑하게 소화가 다 된 상태로 강사가 알려주는 데로 받아들이는 것. 이 두 가지 방식 모두 문제다. 이게 다 맑스의 『자본』을 무기력한 낡은 유산으로 읽어서다. 내가 보기엔 그럼 맑스도 싫어할 것 같다.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전화로 해고를 통지하고, 청소 노동자에게 식비 300원을 주는 이런 세상에서 자본을 읽는 행위에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해피 : 맑스의 자본은 누구랑 어떤 입장에서 읽는 것도 매우 중요하단 생각이 든다. 지난 가을 연구실에서 맑스 콜레기움하면서 느꼈다. 맑스의 자본을 정치·철학과 같이 읽으니까 자본이라는 책이 주는 폭발력이 더 강렬했다.

 

(*콜레기움 : 정정훈 선생과 함께 ‘맑스와 정치, 혹은 혁명과 코뮨의 정치철학에 관하여’ 라는 주제로 2010년 10월 부터 12주 동안 맑스의 저작을 함께 읽었던 프로그램이다. http://nomadist.org/xe/collegium/28937)

 

이기자 :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 읽는 자본 역시 각자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읽는다면 더 재밌어 질 것이라는 말인 것 같은데? (좌중 동의^^) 그런데 설마 자본 5권을 다 읽어야 하나?

 

정훈 : 모든 사람들이 자본을 안 읽어도 된다. 오히려 자본을 읽기 위한 사전 오리엔테이션이라 생각하면 된다. 이 강의를 충분히 듣고 스스로 읽을 때는 그렇게 어렵지 않게 자본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걸 듣고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을 읽는 기회를 갖게 된다면 좋겠지. 필요하면 별도의 세미나를 꾸려서 해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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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자 :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다. 어떤 책인가.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현대의 고전이다. 그런데도 자본이랑 비슷한 운명을 밟는 것이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거다. 읽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자본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수학 나올까 걱정 돼서 못 읽고.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려고 해도 아예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는 말도 있더라.

 

원제목은 ‘안티 오이디푸스: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énie’ 이다. 이때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정확하게 번역하면 정신 분열증이 아니다. 이건 분열증이라고 번역하는 게 맞다. 보통 사람들은 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 분열증 생긴 갑다.. 이렇게 이해도 하더라. 그런데 아니다. 자본주의와 분열증은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때 지나가던 한 세미나 회원 ‘아~ 나도 자본주의 때문에 정신분열증 생긴단 소린 줄 알았어~헤헤’ (웃을 때가 아니지요. 공부하세요^^)

 

진석 : 스키조프레니(schizophrénie) 는 임상적인 의미의 정신 분열증이 아니라 분열증, 분열자가 되자는 말이다. 들뢰즈의 개념어에 익숙한 사람은 알겠지만 다양체를 지향한다든가 다양체를 만드는 것, 특수한 회로를 벗어나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관과 태도 지배적인 시선 이런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게 분열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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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분열증자가 되자.

 

진석 : 흔히 정신병이 있으면 이야기하기 힘들다 생각 하는데, 논리가 서로 대립되고, 합쳐 질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로 그 점이 이 책을 이해하는 포인트라 생각한다. 내 의식 감정에서는 불편하지만 일상생활은 자본주의가 지시하는 그대로 따라 산다. 그래서 이 사회가 무너지지 않고 유지되는 것이다. 반대로 자본주의에 맞선다는 것. 가장 강력한 힘은 아예 다른 언어 논리로 맞장을 뜨는 것이다.

사실 실천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양상은 달라지겠지만. 믿고 따르고 의식하던 일상의 규율에 의문을 품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논리가 스쳐 지나가는 순간, 상이한 논리 언어가 스쳐 갈 때 지속적으로 잡을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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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의 자본과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두 권 모두 만만치 않은 책이다.

꼭 한 번 독파해야겠다는 의무감에 사놓고 길을 잃었던 이라면 이번 기회에 '불온한 인문학'을 접속해보면 어떨까.

 

다행히 이번 '불온한 인문학' 강의에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잘 읽을 수 있도록 강사와 튜터가 도와준다고 한다.

 

설령 이 두 권의 책 모두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더라도 괜찮다. 문제적인 두 권의 책을 좋은 친구들과 함께 첫 만남을 하는 것도 큰 행운 아닐까.

 

 

글/이기자

 

 

 

 

 

<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 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 http://nomadist.org/xe/bulin )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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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 ‘불온’을 고민하다.

 

 

2011년 새해가 밝은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당신의 2011년 새해 계획은 무엇인가. 매일 쳇바퀴 돌듯 지나가는 일상을 탈피하고자 뭔가 새롭고 신나는 일을 계획하진 않았는지. ‘올 해 만은 살을 빼겠다. 영어를 정복하겠다.’ 등등. 1월만 되면 돌아오는 뻔한 결심을 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래서 헬스클럽, 영어학원은 일 년 중 일월이 가장 성수기라고 한다. 하지만 번번이 시간이 지날수록 결심은 희미해지고 계속 다닌다 해도 뭔가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은 계속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예 당신의 활동 영역을 살짝 바꿔보면 어떨지. 여기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이 야심차게 준비한 인문학 프로그램이 있다. ‘불온한 인문학’ 1기! 기존의 인문학 강좌와는 어떻게 다르며 그리고 ‘불온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무엇인지. 이것 저것 궁금한 것이 많다. 이번 인터뷰는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 연희동 연구실에서 진행됐다.


불온한 인문학 1기를 준비하는 주요 멤버는 정정훈, 최진석, 정행복, 문화 이다.

이날 인터뷰는 몇 가지 질문에 네 사람이 난상 토론 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이하 정훈, 진석, 해피, 화)

 

이기자 : 불온한 인문학이라고? 왜 불온한 인문학인가. 딱 봤을 때 ‘불온한’이라는 단어에 먼저 방점이 찍힌다.

 

진석 : 연구실이 확장 되면서 대외적인 강좌를 많이 나가게 됐다. 그런데 외부 강좌를 나가면서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맞 부딛힌 일들이 많았고 불온성의 사유를 촉발했다. 한 번은 도서관 강좌를 기획했는데 강좌 중 하나가 ‘종교와 파시즘’ 이었다. 그런데 사전 강의 계획서를 보고 강의를 청탁한 기관이 정정 요청을 했다. 이유는 현 국가 시책과 충돌할 수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또 한 번은 대학 교양강좌를 나가서다. 거기서는 ‘가족의 역사’에 대해 강의를 할 일이 있었는데 근대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국가와 사회가 통합적인 부르주아 지배 체제가 성립하는 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이었다. 여기서 가부장주의가 성립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매춘이나 동성애에 대해 언급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대학생에게 하지 말라고 했다. 매춘이나 동성애가 대학생들하고는 무관한 다른 세상의 이야기인 듯이 말이다.

 

이기자 : 많이 당황했겠다. 그런데 외부 나가서 강의 하다 보면 이런 일이 정말 많을 것 같다.

 

진석 : 그렇다. 하지만 연구실 바깥에서 일반 대중과 소통한다는 건 중요한 문제다. 우리가 대중과 소통하고 알고 있는 앎과 지식을 공유해야 한다. 하지만 그 명분으로 모든 것을 희석화 평준화 타협하면 안되겠다고 느꼈다. 사실 이런 경험들은 당시엔 황당한 사건이었지만 많은 반성이 됐다. 우리 역시 잘 조리되고 소화하기 좋게 다져진 그런 인문학을 제공하는 문화센터 역할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생각, 다른 인문학이 필요하단 생각을 했다.

 

 

이기자 : 외부의 자극이 ‘불온’을 촉발 시켰군요. 그런데 수용자 입장에서는 왜 ‘불온’해야 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요.

 

화 : 사실 지금 말하는 인문학 열풍에 나 역시 끼어 있다. 처음 연구실을 알게 된 것도 직장 생활 하면서 뭔가 부족하단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냥 무작정 시작한 공부였다. 그런데 ‘그냥 무작정 인문학이 좋은 것이니까 해야 한다’ 는 말로는 부족하더라. 단순히 위로 받고 다음 날 다시 일상을 시작하는 것 보다는 지금 내 일상의 괴로움이 어떻게 어디서 온 것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고 또 남들에게 설명하고 싶다. 이건 나 뿐만이 아니다. 직장 동료, 친구들 역시 일상에 지쳐서 뭔가 다른 일을 해보려고 인문학 강좌를 시도하더라. 물론 개인 사정도 있겠지만 인문학 강좌가 그들의 고민을 뚫어주질 못하더라. 그래서 일까. 실망하고 그만 두는 경우 많더라.

 

진석 : 벌써 인문학 강좌에도 일정한 회로가 만들어 진 것이다. 스펙을 만들어야 하니까. ‘~가 대세’ 니까. ‘배워야 한다’는 식으로 작동한다. 중국어가 대세니까, 글쓰기 기술이 직장생활에 도움이 되니까. 이런 식이다. 물론 필요할 땐 배워야 한다. 하지만 스펙을 위한 스펙이 될 때 특정한 차원의 앎에 국한되기가 쉽다. 
 

정훈 : 인문학 열풍을 보면서 드는 느낌이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거다. 나도 굉장히 오랫동안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 그래서 잘 안다. 보통 일주일에 한 번 교회 가면 각박한 세상에 살다가 좋은 얘기도 듣고 위안 받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돈을 더 많이 벌고 잘 살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이런 것 처럼 인문학 강좌라는 것도 고전을 읽으면서도 심지어 맑스를 읽으면서도 그냥 읽는다는 느낌이 든다. 그런 걸 보고 혹시 ‘신(神) 대신 인문학을 찾나’ 하는 생각도 들더라. 여러 곳에서 많이 공부한다는 건 좋다. 읽으면 좋겠지. 그런데 근본적으로 사회 속에서 많은 일이 일어나지 않나. 지금 당장 홍대 노동자들 해고 되는 상황이고. 이런 상황에서 인문학이 도피처가 돼서는 안된다.

 

이기자 : 모두들 ‘인문학이 도피처가 되선 안된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것 같다.

 

해피 : 맞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우리도 고민이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연구실 오는 분들 중에도.. 여기서 하는 공부가 몸담고 있는 종교 단체와 비슷하다... 별로 불온하지 않고... 판단을 못하겠다는 이야기도 한다.

 

진석 : 한편으론 이해는 된다. 가령 뭐 연구실에 대해서 ‘종교 단체 아니냐..’ 는 말도 들었다.

 

화 : 우리 식구들도 그래요.. (좌중 웃음)

 

진석 : 우리가 알고 있는 앎의 특정 회로가 있잖아. 시집가고 장가가야 하는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을 봤을 때 비정상적으로 보는 건 당연해.  

 

이기자 : 이제 막 해피쌤이 지적한 것 같은데 너무 온건하다는 질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진석 : 나 역시 책만 읽으면 나중엔 뭐할래? 이런 질문을 많이 들었다.

때때로 박차고 (거리로)나가자. 이런 생각도 했는데. 지금도 그런가. 공부와 거리...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일이 아니다.

 

이기자 : 일상생활과 이 불온함의 만남, 어떻게 수위 조절을 해야 할까. 사람에 따라선 이 ‘불온한’이란 수식어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훈: 일상을 버리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역시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중요한 건 거리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을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런 우스개도 있다. 우리는 혁명이 일어나도 밖에 못 나간다는 말이... 세미나도 해야 되고 밥 시간엔 밥도 해야 하니까.

 

정훈: 또 텍스트 해석 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히려 현장에서 질문을 가지고 부딪히고 충돌해야지. 정확하게 ‘이런 말씀.. 따라 합시다.’ 하고 읽는다면 교회에서 성경 읽는 거랑 같다.

 

진석 :나도 모르게 순응하고 있는 동의하고 있는 사회적인 국가적인 기치에서 되물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부모님 속 썩이지 말고.. 대학 들어가고 시집 장가가고 이런 것들에 대해 ‘꼭 그렇게 살아야 돼?’ 그런 작다면 작고 소박하다고 할 수 있는 질문이나 문제의식이 출발점이 될지 않을까. 짱돌을 드는 게 아니라. 사실 이런 거 당장은 어렵잖아. 

 


 

이 때 지나가는 한 영화사 세미나 회원은 “밥 하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하고 인사를 했다. 이 날 정정훈 회원은 저녁 당번이었다. 노마디스트 수유 너머 N은 직접 밥을 해 먹는다. 회원들이 자율적으로 돌아가면서 밥을 한다. 저녁 5시 30분부터 6시 30분 까지가 저녁 식사 시간이다. 한 끼 식사는 2천원. 이 날 메뉴는 계란찜, 감자 튀김, 콩나물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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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 : 우리도 안 그러는 데 뭘.

 

화 : 그리고 이 ‘불온함’을 아주 길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지금 당장 뭘 가져다 주는 그런 것이 아니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 사실 매일 공부가 업이 아닌 사람들은 시작 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결단이다. 원래 하던 일과 병행하려면 바빠지고 또 가족이나 친구들이 너 변했다고 힐난하기도 하고. 하지만 그걸 안고 함께 하다 보면 이 불온함이라는 게 나에게 또 다른 길을 열 수 있는 어떤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계속)

 

 * 이날 인터뷰는 세 시간 넘게 진행됐습니다. 모두들 불온한 인문학에 대한 고민이 많은터라 당초 예상했던 것 보다 길어졌습니다. 그래서 읽는 이들의 편의를 위해 인터뷰 내용을 중간에 끊어서 올립니다. 다음번에는 불온한 인문학의 구체적인 진행 방식 커리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커밍 쑨!!!

 

 

 

(글/이기자, 사진/김기자)

 

<강사 소개- 왼쪽 위 부터 시계 반대방향으로 >

 

최진석 : 전공은 러시아 문학과 문화로 이번 겨울에는 러시아 문학 평론가 바흐친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요즘은 프로이트의 저작을 읽으며 정신분석을 횡단하는 작업에 매진 중이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코뮨주의 선언』(공저),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등을 쓰고 옮겼다.

 

정행복 : 맑스와 푸코를 공부하고 있다. 현장 인문학에 관심이 많다. 수요일에는 노들 야학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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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 이주노동자의 정치적 주체성을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던 시절

「연구공간 수유+너머」에 접속한 이후 이곳에서 계속 공부를 하고 있다.

주된 관심사는 코뮨주의 정치철학과 현대 자본주의에 대한 문화이론적 해석이다.

현재 후자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문화연구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준비중이다.

『부커진 R』(공저),『문화정치학의 영토들』(공저), 『코뮨주의 선언』(공저) 등을 썼다.

 

문화 : 문학 사회학에 관심이 많다. 언젠가 ‘맑스와 함께 소설을’ 이란 책을 쓰고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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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

* 불온한 인문학 1기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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