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근대 기술문명의 산물이지만, 또한 탄생의 순간부터 자신의 자궁이자 환경이라 할 수 있는 ‘모더니티’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결해왔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져나간 영화의 ‘새로운 물결들’은 그 질문과 대결의 다른 이름입니다. 우리는 이번 강좌를 통해서, 서구의 정치적 모더니즘에서 동아시아의 뉴웨이브에 이르기까지, 영화와 모더니티 사이의 그 긴장 어린 조우와 대결의 순간들이 지닌 미학적, 정치적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1. 서구 정치적 모더니즘, 사랑과 증오의 연대기 - 신은실

 

1968년 5월 혁명 이후 서구 영화이론과 창작에서의 실천 양상은 확연하게 달라졌습니다. 특히 독립영화, 혹은 제3세계 영화 영역에서 가장 큰 이론적 디딤돌은 이른바 '정치적 모더니즘'이었습니다. 정치적 모더니즘의 장 안에서 당시 백가쟁명하던 서구 이론, 이를테면 모더니즘과 기호학, 언어학, 이데올로기 이론과 구조주의, 브레히트적 형식주의와 해체주의 등은 용광로와 같은 뜨거움을 분출하며 창작과 실천의 기치를 올렸습니다. 누군가에 따르면, '정치적 모더니즘'은 미학적 측면에서 '사랑', 정치적 측면에서 '증오'를 담지하여 표현하고자 했던 사조라 합니다. 이 강의에서는 이와 같은 '정치적 모더니즘'의 이론적 양상과 더불어 이를 실천한 대표적인 감독인 장 뤽 고다르, 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등의 영화를 함께 톺아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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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위예-장 마리 스트로브, 로트링겐 )


 

2. 뉴아메리칸 시네마, 구심력에서 원심력으로- 안시환

 

본 강좌는 로버트 알트만과 마틴 스콜세지를 중심으로 뉴아메리칸 시네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비평가인 로빈 우드는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를 연구한다는 것은 곧 그 세대의 감독들, 즉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의 특징들을 살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물론 로빈 우드는 ‘새로운 할리우드 영화’를 지향했던 로버트 알트만의 영화에서 ‘젠 채 하는 속물근성’을 발견하는 것에 비평의 지면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할 근거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부당한 평가임에 분명합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 감독들(그리고 그들의 작품들)에 내재한 어떤 긴장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속성들로부터 벗어난 자신들만의 표현양식(유럽의 모더니즘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은)으로 강렬한 효과를 추구할 때, 뉴아메리칸 시네마는 ‘구심력’과 ‘원심력’이 충돌하는 긴장 속에 곧잘 분열된다는 것입니다. 본 강좌는 뉴아메리칸 시네마의 주인공들이 지향적 목표를 잃고 해매는 과정에서, 극의 중심을 이루는 추진력과 극적 기제가 어떻게 상실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고전 할리우드 영화에서 추구했던 명확한 동일시와 도덕적이고 사회적인 목표들이 어떻게 부재하게 되는지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들 영화에서 곧잘 발견되는 갑작스럽게 분출되는 폭력의 시퀀스는 이러한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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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쇼헤이, 복수는 나의 것)

 

3. 뉴저팬 시네마, 살부충동의 영화들 - 안시환

 

본 강좌의 제목에서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을 떠올렸다면, 이미 여러분은 본 강좌가 이야기할 내용의 일부를 엿본 셈입니다. 죽어서까지 아버지의 손에 지배되는 것을 거부하는 그 고집스런 몸짓 말입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것은 결코 은유로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에서 드러나는 아버지에 대한 적개심은 이 작품만의 개별적 특징이 아닙니다. 즉, 이마무라 쇼헤이의 살부충동은 그와 함께 시대의 공기 호흡했던 뉴저팬 시네마 감독들이 공유했던 것이자, 그들 작품을 살아 숨 쉬게 한 궁극적인 동력이었습니다. 뉴저팬 시네마는 다양한 방식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요구하고, 그것을 미학적으로 실천합니다. 전통의 거부, 혹은 전통에 대한 단절의 요구. 그리고 그 완고한 몸짓. 본 강좌는 그것이야말로 뉴저팬 시네마의 주제와 형식에서 드러나는 시대정신이었다고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본 강좌가 함께 할 세 명의 감독은, 이마무라 쇼헤이, 마스무라 야스조, 그리고 오시마 나기사입니다.



 

4. 허우샤오시엔, 역사적 삶의 시공간 - 권은혜

 

<펑꾸이에서 온 소년>(1983)에서 <빨간풍선>(2007)에 이르기까지, 허우샤오시엔의 영화들은 영화가 담고자 하는 현실의 변화에 따라, 카메라 워크의 요소들, 즉 카메라와 인물 사이의 거리, 카메라의 움직임 등에서 많은 변화를 보여 왔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롱테이크처럼 여전히 고수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이번 강의에서는 허우샤오시엔 스타일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허우샤오시엔 영화의 카메라와 그에 담긴 시공간들에 대해, 그리고 그 너머에 존재하는 허우샤오시엔의 윤리적 태도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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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샤우시엔, 카페 뤼미에르)


 

5. 홍상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사이 - 변성찬

 

홍상수는 ‘모더니스트’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의 매 순간은 매우 ‘리얼’합니다. 홍상수는 모더니즘과 리얼리즘 사이, 즉 이미 확립된 어떤 ‘ism’의 격자망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또 하나의 세계’를 이루어왔습니다. 그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무엇이고, 그 요소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품고, 홍상수의 영화세계를 다시 여행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거친’ 분류법을 보다 섬세하고 새로운 렌즈로 가공해 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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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6. 그 여자! 그 남자! (여성 영화감독들의 성정치학) - 오현경

 

시선은 순수하지 않다. 그것이 권력이든, 어떤 정서든 항상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로 투사된다. 영화 수사학의 핵심에도 세 가지 시선이 있다. 영화 속 인물의 시선, 카메라의 시선, 관객의 시선. 그런데 여태껏 카메라의 시선, 즉 감독의 시선 중 약 95%가 남성이라면, 그 이미지의 수사학 속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걸까? 이것이 여성으로 바뀐다면? 시각적 쾌락의 정치학을 밝히며 그 횡단 속에 또 하나의 나를 찾는 여정이 되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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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트린느 브레이야, 섹스 이즈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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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썩은 돼지 사체가 퍽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솟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며칠 전 컴퓨터를 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기사 제목이다. 만약 몇 년 전쯤 이 기사 제목을 봤다면 어땠을까. SF영화나 장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 ‘구제역으로 파묻은 돼지 사체가 따뜻한 날씨에 부패하면서 가스가 차 매몰지에서 솟아올랐다’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말이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지금은 하루 종일 비가 오고 있다. 이 비에 매몰지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고 어디선가 침출수로 의심되는 폐수가 쏟아졌다는 소문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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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는 매주 월요일 문학 세미나가 열린다. 이 세미나에서는 주로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묘사하는가’를 주제로 문학사회학을 공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누군가는 한물 같다고 말하거나, 그거 예전에 다 읽은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책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에리히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텍스트는 관점은 조금은 다르지만 문학 혹은 예술이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형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핀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즘 문학이 태동하고 부흥하던 19세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세미나 내내 우리의 머릿속에는 ‘리얼리즘’이란 뭘까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이들 모두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로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가 알기론 너무나 다른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그렇다고 치고 우리가 흔히 한국 소설에서 리얼리즘 작가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또 어떤가. 다 같은 리얼리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극이 크지 않는가. 이런 고민에 딱 맞는 대답이 하나 있긴 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는 말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는 곤란함을 표현했다.

 

눈을 뜨면 공통된 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리얼리즘이 단순한 기록의 과정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을 창조해내며, 이 인간적 창조는 필연적으로 적극적이다. 그러니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은 이제는 굳어버린 관습에 불과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 <기나긴 혁명>

 

그렇다. 리얼리즘은 그냥 관찰하고 세상의 표면을 그리는 낡고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누군가는 문학이 현실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신문기사마냥 묘사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리얼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기준 때문에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기존의 통념들에서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는 문학들이 때때로 ‘지금 우리 사는 이야기잖아’라는 말로 ‘리얼한 문학’, ‘좋은 문학’으로 치켜세워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처럼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을 뛰어넘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창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얼리즘은 바로 이런 소설이 아닐까. 아직 표면에 드러나진 않았으나 분명히 있는 것.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시커먼 개구리들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개구리들은 대부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스팔트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거나 지나가던 소독차에 깔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스팔트는 붉은 꽃을 피웠다. 어두운 거리에 그들이 흘린 피와 찢어진 살갗이 불빛처럼 빛났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의 도입부이다. 나는 요즘의 구제역 사태를 묘사하는 신문 기사를 볼 때마다 편혜영의 소설이 자꾸 떠오른다. 이 단편이 실린 동명의 소설집 <아오이가든>은 2005년 7월에 나왔다. 소설집이 나온 것이 이 때이니 아마 이 단편이 쓰인 지는 그보다 1~2년 앞설 것이다. 사실 편혜영 소설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재앙을 예고했던 작품이 많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거나 이미 지금 이 순간의 일이어도 너무 어리석어 미처 알아채지 못한 현실의 어떤 패턴을 낯선 공간에 옮겨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오는 ‘아오이가든’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희미하다. 주인공은 이름도 없고 나이는 몇 살인지 언제부터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오이가든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숨는다. 문을 열면 역병에 걸린 개구리 사체가 우루루 쏟아지고 주인 잃은 개와 고양이는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누군가 아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바로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격리 조치를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정체 불명의 역병과 싸울 때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얼마나 비열한 수단들을 쓰는지. 그리고 그 괴물 같은 역병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지. 시체들이 나뒹구는 현실이 서 있는 토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같은 소설집에 있는 <맨홀>이라는 단편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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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장을 뒤지는 동안 가장 두려운 것은 혹시 얼어 죽은 아이의 시체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얼어 죽은 아이들은 소각장에 그냥 버려졌다. 소각장에서는 다른 냄새에 섞여 시취를 맡지 못할 때가 많다. 쓰레기를 뒤적이다가 시커멓게 썩은 몸통과 얼굴을 만날 때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편혜영, <맨홀>


처음 이 소설을 읽었던 몇 년 전. 나는 이 소설을 ‘특이한’ 작품 혹은 세상의 끔찍함을 동물의 시체들로 ‘은유’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소설을 완전히 잘못 읽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분명한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중요한 리얼리스트는 누구나 다 객관적 현실의 합법칙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진 채 매개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사회현실의 제반 연관관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추상기법을 써서까지도 자신의 체험내용을 가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작가가 드러낸 현실이라는 표면구조는 ‘삶의 표면구조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요인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것을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게 리얼리즘이라면 수천만 달러를 들인 헐리우드 영화나 자극적인 영상을 담은 텔레비전 뉴스 보도 화면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울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이 현실이란 표면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지 모든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표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매 순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많은 순간 왜곡된 것이거나 그저 정말 말 그대로의 ‘표면’일 때가 많다.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리얼한 문학은 필수적이다. 아래에 인용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왠지 낯익은 풍경 아닌가.

 

그녀는 베란다 유리창을 열었다. 거리의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뱃속의 것을 게워냈다. 붉은 내장들이 계속 쏟아졌다. 고양이의 것인지 내 것인지 헛갈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꿰맨 자국이 있는 뱃가죽이 튀어나올 때까지 구역질이 멎지 않았다. 그녀는 누이의 뱃속에서 나온 수십 마리의 붉은 개구리들을 바깥에 쏟았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들을 따라 발돋움질을 했다. 그것들은 내 누이의 아이들이었다. 베란다를 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늘고 단단한 다리를 접었다가 훌쩍 튀어 오르니 바깥에 닿았다. 이윽고 거리의 냄새가 느껴졌다. 냄새만으로 아오이가든 너머로 나뭇가지처럼 가벼운 다리를 벌린 채 비강을 활짝 열었다. 죽은 새끼들이 썩은 몸을 일으켜 긴 소리로 울며 낙하하는 나를 마중하였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글/화(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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