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가 되기는 참 쉽다

박찬욱 아저씨의 <아가씨>(2016)





박 상 빈 / 수유너머N 회원





통쾌하고 명랑한!

 

<아가씨>는 한국영화로서는 4년 만에 칸느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개봉 전부터 난리였다. 칸느에서는 평이 대체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딱히 좋은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팬도 아니고 <핑거 스미스>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영드로도 만들어 졌는데, 그것도 보다가 말았다), 그저 한국영화계에서 간만에 신선한 영화가 나온 걸까 싶은 마음에 개봉하자마자 달려가서 봤다(물론 인디포럼에서 <문영>을 보고 난 뒤 김태리 배우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한 탓도 있었다).

 

나는 퀴어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 같은 게 있는 편도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단지 신선한 감각을 즐기는 편이다. <아가씨>는 확실히 신선한 명랑함을 선사한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인물들의 무거운 마음, 사명감 같은 것, 그리고 철저히 파멸시켜버려야 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인물이 느끼는 자책 같은 것들, 이런 무거운 감정들은 그 속성상 확실히 포스트 모던이전 시기의 감정들일 텐데, 이런 감정은 <아가씨>1부에만 국한되는 감정들이다. 이처럼 1부는 과거 한국영화가 일제 식민지시기를 다룰 때의 여성 인물들의 캐릭터들을 그 전형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방식으로 빚어졌다. 아마도 결말 부분의 통쾌함과 명랑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영화 특유의 비장함과 사명감을 지닌 캐릭터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들에 관객들은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간다.

 

속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편이 오히려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2부와 유토피아적인 결말을 향해 기존의 억압적 장치들을 재기 넘치게 때려 부수는 3부는 통쾌함이 주된 정서가 된다. 1부에서는 형식 자체로 드러났었고 2부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의 행동으로 가시화되었던 남성적 판타지를 3부가 산산히 깨부숴버린다. 마치 야마가타트윅스터의 이단 옆차기처럼 통쾌하다. 힘 관계의 역전, 전복은 언제나 흥분을 수반하는 사건이다.

 


박찬욱의 인장

 

지난 호 <씨네21>에 실린 박찬욱의 긴 인터뷰를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이 있다. 해외 비평가들이 발견한(발견했다고 주장했던)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올드보이>의 낙지가 <아가씨>에서는 춘화 속 문어로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꼭 그렇게 낙지에 집착했어야 했냐는 부분이었다. 피식하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찌되었건 그들은 어떤 영화를 보든 간에 언표된 것과 언표행위자의 관계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아주 성실한 태도임에 분명한, 바로 그런 방식으로 텍스트들을 나름의 아카이빙 목록 속에 기입하고 카테고리화 하는 작업이 비평의 기본인 걸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나질 않는다.

 

아무튼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박찬욱에 관해 논의할 때 그의 인장을 잔혹 이미지나 익스트림 이미지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아무래도 아시안 익스트림 시네마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감독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홍진이 그랬으면 그랬지, 박찬욱은 오히려 그런 익스트림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올드보이>의 이빨 뽑기 장면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조리돌림 복수 장면 등에서 피는 살벌하게 튀기지만 카메라는 언제나 고개를 돌린다. <아가씨>에서도 코우즈키(조진웅)가 백작(하정우)을 고문하는 그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익스트림 이미지들이 전시되긴 하지만,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들이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잘게 썰린 산낙지의 다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 바로 박찬욱 특유의 장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잘려나간 손가락이 썰어놓은 산낙지처럼 보이기 때문에 잔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박찬욱은 나름의 선을 지켜가며 익스트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재현된 익스트림 이미지를 그 이미지가 지시하는 바로 그것 자체로 보이게끔 하는 노력에 관하여, 박찬욱은 한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오히려 박찬욱의 인장이라 할만한 것은 영국식-일본식-한국식이 뒤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실내공간과 로코코 양식 소품들이 주는 강박증적인 반복의 모티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올드보이>의 도입부분에서 천사 날개의 깜찍함과 오대수의 찌든 얼굴의 조합, <친절한 금자씨>에서 법구경과 그 속에 그려진 로코코 양식의 권총 설계도, <박쥐>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즐기는 한복집 같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박찬욱 특유의 능청스러운 모더니스트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아가씨>에서 역시 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홍진의 <황해>에서의 마작과 <박쥐>에서의 마작을 비교해 볼 때 이 두 작품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기나긴 선 끄트머리에 각각 놓여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언급한 것들에서 개별 요소들은 모두 진부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들이지만, 조합 속에서 그 요소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재기발랄한 아저씨적 귀여움을 뿜어내게 된다(굳이 쥐어 짜 내어 조어를 해 보자면 큐티저씨 찬욱정도가 되려나? , 이런 짓도 아저씨같군).

 

 

시각의 대의민주주의

 

이제 <아가씨>의 정사씬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고 이 두서 없는 리뷰를 끝내고 싶다. 언급하고 싶은 장면은 2부의 가위자세 정사씬과 영화를 닫으면서 보여주는 배 위에서의 은방울 정사씬이다. 박찬욱은 남성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사디즘적이고 페티시화된 비대칭적 성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성관계를 그려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도상적으로 대칭적이고, 누가 누구를 주도하거나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위에 올라 타거나 하지 않는 바로 이 에로틱한 이미지들은 따라서 성공적인(전복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도식적인 역전은 언제나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아가씨>의 정사씬 이미지들이 성공적이고 전복적인 이미지이기 위해서는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이 이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박찬욱은 이미지의 자유로움을 위해 관객의 정체성을 남성성으로 고정시켜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남성성)을 흐트려 놓는 데는 성공했다.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여성적 쾌락을 재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남성성을 보잘 것 없는 것, 매 맞는 것, 거세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박찬욱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남성적 시선으로는 늘 파악하는 데 실패해 왔었던 여성 성애의 쾌락들을 남성성을 징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나름 해방시켜 놓았기에, 적어도 <아가씨>(들뢰즈가 사용하는 의미로) 매저키즘적이라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지는 잘리지 않아 다행인 백작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가미카제식 죽음일 뿐이다.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었을 박찬욱은 이와 같은 방식의 남성성 전복을 즐거워했을까? 짐작컨대 아마 대단히 그랬을 것 같다.


 

<아가씨>를 보고 이틀 뒤, 신촌에서 있었던 여성영화제에서 몇 편의 영화를 봤다. 여성 감독들이 만든 박력있고 카와이한 영화들은 <아가씨>와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여성영화제 영화들을 통해서 <아가씨>가 지닌 귀엽고 섬세한 아저씨 감성은 그 나름의 장점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그 나름의 한계도 분명했다는 그런 느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 한계란 바로 위에서 서술한 그 남성성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가씨>를 옹호하고 싶다. 비단 김태리 배우라는 활력 넘치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 정말 즐거운 일이라서 뿐만은 아니다. 여성영화제의 트레일러 영상이 말하듯, 한국의 2015년 백 만 관객 이상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참여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10년 전에 허문영 평론가가 소년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15년 전에 김소영 평론가가 사라지는 여성들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한 한국 영화의 어떤 흐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점점 더 고도화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작년에는 전문직 남성들이 등장해 벌거벗은 여성들의 수난들을 해결해 주는 영화들(<내부자들>, <베테랑>, <극비수사>, <검은 사제들> )이 스크린을 죄다 점령했지만, 그 남성들은 단지 데덴찌를 잘 해서 편을 잘 만나 처벌당하지 않고 있을 뿐, 그들의 안타고니스트들과 동일한 방식의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타자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커녕 그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아이로 변할 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언제 어디서나 아이이고 싶다는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뷰티 인사이드>, <국제시장> ).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가씨>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다. 비록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현시함으로서 남성 판타지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남성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할지는 몰라도, 그게 어디인가. 이 정도 만큼이라도 한 것은 시각문화의 대의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재현 시스템 속에서의 나름의 성과이다. 아마도 박수를 대략 세 번쯤 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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