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밤에 나는 먹으려고 평소보다 멀리 나갔다. 계란 껍질과 말라 비틀어진 사과 심을 발견해 먹고 달을 바라보며 그늘 속으로 걸었다. 목이 말랐다. 길 가장자리에 고인 물 냄새를 맡았다. 그때 뒤쪽에서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순식간에 몸이 들려 자루에 담겼다. 빗물에 젖은 털 냄새가 나는 차에 실려 어딘가로 옮겨졌다. 나처럼 방심한 틈에 잡혀온 짐승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귀 모양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어린 녀석부터 늙은 녀석까지 이 몸 십여 개체가 넘는 동족들과 같이 각종의 분비물로 덮인 철창에 갇혔다. 미지근하게 끓는 듯 좋지 않은 냄새가 났다. 안색 나쁜 인간 두 명이 침침한 불빛 아래서 우리를 들여다보았다.

...

꼼짝하지 못하도록 그들이 이 몸을 약품으로 처리했다. 배가 위쪽을 향하도록 몸을 뒤집어두고 거친 솜씨로 배를 갈랐다. 가르자마자 가른 곳을 먹고 빳빳한 실로 봉한 뒤 공식적으로 네 놈은 이제 불임인 거다, 하며 귀 끝을 가위로 잘라냈다.

마비되어서 눈도 감지 못했다.

찢어질 듯 바싹 눈이 마른 채로 당했다.

그 뒤로 자루에 담겼다가 다시 차에 실려 엉뚱한 곳에 버려졌다.

(황정은, 「猫氏生」, 『2011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과 지성사, p.283~284.)

 

 

 

이 이야기는 다섯 번 죽고 다섯 번 살아남은 ‘몸’이라는 고양이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이 고양이의 배를 가르고 귀 끝에 자국을 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지도 않은 정관수술을 한 표시를 낸 것이다. 배를 가르고 얼기설기 꿰맨 후 아무데나 버려진 고양이. 이 고양이는 흘러 흘러 도시 변두리 장막 안에 들어왔다. 장막 안에는 아직 사람의 냄새가 남아 있지만 살고 있는 이는 없다. 가끔 장막 안쪽을 향해 못 쓰는 물건들을 던져두고 달아나는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꼭 못쓰는 것 죽은 것만 버리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에서 효용이 다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버려진다. ‘형태가 있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먹던 것 입던 것 사용하던 것 때로는 산 것 죽은 것’ 까지도 쌓여가는 장막 안.

 

 

 

누가 사람들이 살았던 곳을 이렇게 폐허로 만들었을까.

 

 

 

 

혹시 이 폐허는 우리의 ‘거친 말’(블랑쇼)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일상적인 언어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온전히 담지 못한다. 그것은 사물들 고유의 특이성을 담지 못하고 때문에 늘 폭력적일 수 밖에 없다. 특히 이런 것들. 누군가에게는 삶의 공간이었지만 누군가는 이것을 ‘슬럼’이라고 간단하게 정의내릴 때 이보다 더한 폭력이 어디 있을까.

 

 

 

 

나는 이 부근을 그런 심정과는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가 없는데 슬럼이라느니, 라는 말을 들으니 뭔가 억울해지는 거예요. 차라리 그냥 가난하다면 모를까, 슬럼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치 않은 듯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라고 무재 씨는 말했다.

언제고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인데, 누군가의 생계나 생활계, 라고 말하면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지니까, 슬럼, 이라고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걸까요.

슬럼, 하고.

슬럼.

슬럼.

이상하죠.

이상하기도 하고.

조금 무섭기도 하고, 라고 말해 두고서 한동안 말하지 않았다.

(황정은, 『百의 그림자』, 민음사, p.114~115.)

 

 

 

 

물론 ‘슬럼’이라는 단어가 이 소설에서 배치되는 양식은 우리에게 다른 감응을 불러일으킨다. ‘슬럼’ ‘슬럼’ ‘슬럼’ 하고 세 번 소리 내어 발음해본다. 이 때의 슬럼은 더 이상 ‘밀어 버려야 할’ 구역이 아니다. 어찌 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 일상적인 말의 폭력에 길들여졌던 우리를 책 바깥으로 이끈다. 이때의 바깥은 일정한 척도로 계량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고유의 특이성이 인정되는 공간이다. 이것은 어떤 위계나 중심이 없고 항상 미결정적인 상태이다.

 

 

 

작품은 ‘인간에게 있어서 말하지 않는 것에, 이름 할 수 없는 것에, 비인간적인 것에, 진리도 정의도 권한도 없는 것에 목소리를 준다.’(블랑쇼) 이제 고양이 ‘몸’의 갈라진 배는 속수무책으로 악화된다. 제대로 꿰매지 않은 틈 사이로 피가 새고 고름이 고인다. 염증이 번져 시력마저 잃고... 일생이 곧 끝나기를 기다린다. 고양이 ‘몸’은 운다. 아파서 울고 외로워서 운다. 바깥에서 모든 것이 사라지기 전 마지막 울음이 들린다.




글 / 화(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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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이번에는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에 대해 토론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해 봤습니다. 문학, 공동체에 대해 관심있는 모든 분들을 초대합니다~!

 

시간: 2011년 4월 12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희동 소재)

 

발표자 : 화

토론 : 김은영

우정의 간식 : 최진석

참가비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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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mund Dulac]Orpheus and Eurydice]

 

 

 

 

 

발표 안내 : “문학의 공동체 공동체의 문학”

 

문학은 언어를 통해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문학이 만들어낸 공동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민족문학·세계문학이 만들어낸 하나의 중심이 있는 공동체. 다른 하나는 중심이 없는 공동체, 낭시의 표현을 따르자면 ‘무위(無爲)의 공동체’다. 맑스가 꿈꾸고 낭시가 ‘무위(無爲)의 공동체’에서 다시 언급한 이 공동체는 “‘그 자체가 목적인, 즉 자유가 진정으로 군림하는 것인, 인간적 역능의 개화가 시작되는’곳에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물질적 생산의 영역 저 너머에’ 위치하는 어떤 공동체”다. 때문에 이런 공동체를 그려내는 문학은 낯설고 불편하게 다가온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하는 소통과 통합은 고정된 개체성을 깨는 데서 시작하기에 더욱 본질적이다. 이번 발표에서는 한국문학 작품을 중심으로 문학이 타자를 만나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분명히 도래할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해보려고 한다.  문학과 공동체에 관심이 있는 이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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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478285.jpg  * 러시아어판 <천 개의 고원>

 

최근 러시아를 다녀온 선배의 블로그를 통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Tysyacha plato : kapitalizm i shizophreniya)이 작년 말 러시아어로 완역되었음을 알게 되었다(Yakov Svirsky 옮김, U-Faktoriya, 2010). 코뮨에서 생활하며 부딪혔던 사유와 삶이라는 문제 외에도, 박사 학위 논문을 제출할 때 들뢰즈와 가타리는 중요한 인용 전거 중 하나였다. 그때 “혹시나 이제라도 러시아어로 번역된다면 직접 번역하는 수고를 덜 수 있을 텐데...”하며 기다렸는데, 늦었지만 반가운 감이 들었다. 이제 <천 개의 고원>이 러시아어로 출판됨으로써, 들뢰즈의 거의 모든 저술들을 러시아 도서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된 듯하다(*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만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들뢰즈와 러시아는 대체 무슨 상관이라고 이런 글을 쓸까,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좀 의아해 할지도 모르겠다. 그 해명을 잠시 늘어놓는 것, 아니 그 해명이야말로 현재의 러시아 지성사적 상황을 조감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들뢰즈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마지막 페이지에 해당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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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위부터 <경험주의와 주관성/칸트의 비판철학/베르그손주의/스피노자>(합본), <차이와 반복>, <주름>, <키노>

 

사실 러시아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낯선 단어가 아니다. 공식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은 구소련의 붕괴와 더불어 유입된 지적·문화적 경향이지만, 많은 문학 연구가들은 러시아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미 1960-70년대 소츠-아트(Sost-Art)로 대변되는 개념주의 예술에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더 멀리는 체호프 등이 활동하던 20세기 초엽으로도 밀고갈 수도 있지만, 대개는 스탈린주의가 균열을 빚은 해빙 이후의 문학과 예술에서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원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입장들에는,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던이 서구보다 ‘앞서’ 존재했다거나, 혹은 적어도 서구와 ‘동시대적인’ 문화적 경향이었다는 주장이 함축되어 있다. 비록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단어가 직접 사용되진 않았어도 러시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그럴 법한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주장들에는 여하한의 문화사적 흐름에서도 결코 뒤지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인들 특유의 자부심과 고집이 느껴지는 듯하다(개인적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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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위부터 <안티 오이디푸스>, <니체>, <니체와 철학>, <의미의 논리>, <프루스트와 기호들(초판)>

 

그러나 철학적인 문제 설정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살펴본다면, 러시아에서 그것은 분명 소련의 붕괴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가 리오타르, 데리다, 들뢰즈, 라캉 등의 이름과 함께 러시아로 밀려들어오고, 그에 대한 반응 및 성찰의 결과로서 포스트모던‘한’ 러시아 사유도 함께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시기 산정의 문제를 갖고 오래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 이 글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들뢰즈, 러시아 현대 사상의 관계만이 관심사인 탓이다.

 

 

2000년대 후반의 유학 시절에 내가 놀랐던 것은, 서구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어느 정도 ‘식상해져 버린’ 포스트모더니즘이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문제적인 것으로 수용되고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가령 서구에 소개된 러시아의 대표적인 두 지성, 미하일 바흐친이나 유리 로트만을 프랑스 철학자들과 연관시켜 논의하려고 할 때마다 부딪히는 흔한 반론이 있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관점으로는 러시아 지성의 고유성을 논할 수 없다”는 강한 반발감이 그것이며, 이에 따라 문제 의식은 언제나 “고전적인가 포스트모던적인가”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로 수렴되곤 했던 것이다. 물론 내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러시아의 아카데미 전통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해야 할 적(敵)이든지 혹은 적극 끌어안고 과거(‘러시아 전통 혹은 소비에트 시대’)와 맞서 싸워야 할 원군이든지 둘 중의 하나였다. 다소간 완고한 아카데미의 철학부들은 전자를 대표했고, 후자는 발레리 포도로가(Valery Podoroga)와 같은 서구 지향적 철학자들로 대표되었다.

 

52629.jpg  * 발레리 포도로가

 

1970년대에 이미 푸코의 <말과 사물>이 소개되었고, 소련의 붕괴 즈음과 그 이후로 현대 서구 철학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분류된 철학서들이 물밀듯이 번역되어 나왔다. 보드리야르는 진작에 거의 모든 저작이 번역되었고, 데리다나 라캉이 그 뒤를 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들뢰즈의 책들은 번역도 느리고 논의도 적어 보였다. 가령 <천 개의 고원>의 1부인 <안티 오이디푸스>는 포도로가의 친구인 미하일 리클린(Mikhail Ryklin)이 90년대 초에 요약본을 선보인 후 거의 20년이 지나서야 완역본이 나올 수 있었다. 서구의 모든 책들이 번역될 이유는 없겠으나, 포스트모던 사회와 사상의 가장 논쟁적인 고전이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이라면, 다른 책들의 번역 속도에 비추어 확실히 늦다는 생각이 든다.

 

ryklin.jpg 8976823257_1.jpg  * 미하일 리클린과 그의 책

 

내게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추정할 만한 경험이 있었다. 유학 초에 러시아 철학의 현재성을 살펴본답시고 우연히 고른 책의 하나가 이고르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Zhil' Delez: vvedenie v postmodernizm, 2005)이었다. 내 호기심을 끈 것은 이 책의 부제가 바로 ‘포스트모더니즘 입문’이었기 때문인데, 한편에는 “러시아에서는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놀라움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등식이 통용된다는 게 굉장히 당혹스러웠던 탓이다. 저자는 들뢰즈 철학이 갖는 심오한 체계성이야말로 비체계적이라고 비난받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도달한 하나의 ‘경지’요, 최종적 결산처럼 묘사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들뢰즈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종착지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말이다.

 

1000262036.jpg  * 카르체프의 <질 들뢰즈: 포스트모더니즘 입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현재적으로 활용하는지 아닌지를 두고 사상의 격차나 우월성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단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짚어본다면,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어떠한 문제 의식을 갖고 통용되는지 한번 점검해 볼 수 있다. 러시아 서점에 <천 개의 고원>을 주문해 두고 아직 받아보지 못한 상태라 단언하기는 이르지만(*오늘 받았다!), 인터넷을 통해 서평이나 리뷰 등을 검색한 결과 이 책이 더 이상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문제 의식과 관련되어 논의되지는 않는 듯해 보인다. 아닌 게 아니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최근의 러시아 논저들도 그리 많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내 지적 흥미를 잡아당기는 부분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애당초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와 등가의 함의를 갖고 러시아로 ‘수입’된 사조였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반대하든 옹호하든, 여기엔 러시아가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서구 콤플렉스가 일정 정도 작용했다고 말할 근거가 있다. 그리고 소련의 붕괴로부터 벌써 20년이 지났다. 아마도 지금의 젊은 러시아 연구자들은 서구에 대한 별다른 콤플렉스 없이도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해 사유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자신들의 사유를 전개시킬 때 이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유학을 마치던 시기에, 꽤나 급진적인 관점에서 서구 사상을 번역·소개하는 잡지를 사본 적이 있는데, 마침 거기 <천 개의 고원> 중 한 장(章)이 번역되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읽다가 원본과는 너무나도 다른 느낌으로 번역되어 있음에 깜짝 놀랐는데, 그것은 ‘잘 다듬어진’ 번역(해석)이었다기보다 사상의 ‘새로운 가공’이라 할 만한, ‘창조적’ 번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현상은 러시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그 유효성이 다했음을 보여주는 징표는 아닐까? 더하여 포스트모던이라는, 소련의 붕괴 이후 맞부딪혀야 했던 서구 콤플렉스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러시아 사유의 향방을 보여주는 징후라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책 한 권 번역되어 나왔다는 소식에 별별 몽상을 다 한다는 망설임이 들지만, 이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의 러시아 사유에 관해 조금씩 지도를 그려볼 수 있지 않겠냐는 생각을 해본다.

 


글 / 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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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돼지 사체가 퍽 소리와 함께 땅 위로 솟았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며칠 전 컴퓨터를 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기사 제목이다. 만약 몇 년 전쯤 이 기사 제목을 봤다면 어땠을까. SF영화나 장르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이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안다. ‘구제역으로 파묻은 돼지 사체가 따뜻한 날씨에 부패하면서 가스가 차 매몰지에서 솟아올랐다’는 설명을 굳이 덧붙이지 않아도 말이다. 2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지금은 하루 종일 비가 오고 있다. 이 비에 매몰지가 붕괴할지 모른다는 우려들이 쏟아지고 있고 어디선가 침출수로 의심되는 폐수가 쏟아졌다는 소문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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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서는 매주 월요일 문학 세미나가 열린다. 이 세미나에서는 주로 ‘문학은 현실을 어떻게 반영하고 묘사하는가’를 주제로 문학사회학을 공부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누군가는 한물 같다고 말하거나, 그거 예전에 다 읽은 거 아니야? 하고 말하는 책들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 ‘에리히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를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두 텍스트는 관점은 조금은 다르지만 문학 혹은 예술이 현실을 어떻게 묘사하고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그 형식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살핀다. 특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리얼리즘 문학이 태동하고 부흥하던 19세기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이 세미나 내내 우리의 머릿속에는 ‘리얼리즘’이란 뭘까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발자크, 스탕달, 플로베르 이들 모두 대표적인 리얼리즘 작가로 소개되고 있지만 우리가 알기론 너무나 다른 작가들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이들은 그렇다고 치고 우리가 흔히 한국 소설에서 리얼리즘 작가라고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또 어떤가. 다 같은 리얼리즘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극이 크지 않는가. 이런 고민에 딱 맞는 대답이 하나 있긴 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는 ‘리얼리즘은 확인되고 고정되어 전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는 말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를 한마디로 말할 수 없다는 곤란함을 표현했다.

 

눈을 뜨면 공통된 한 세계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리얼리즘이 단순한 기록의 과정이며,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문자 그대로 우리가 보고 있는 세상을 창조해내며, 이 인간적 창조는 필연적으로 적극적이다. 그러니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은 이제는 굳어버린 관습에 불과하다.  -레이몬드 윌리엄스, <기나긴 혁명>

 

그렇다. 리얼리즘은 그냥 관찰하고 세상의 표면을 그리는 낡고 정적인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그래서 누군가는 문학이 현실 세계에 일어나는 일들을 신문기사마냥 묘사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리얼하다고 생각했고, 이런 기준 때문에 쓸데없는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다. 기존의 통념들에서 한 치 앞도 나가지 못하는 문학들이 때때로 ‘지금 우리 사는 이야기잖아’라는 말로 ‘리얼한 문학’, ‘좋은 문학’으로 치켜세워지기도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과거형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레이몬드 윌리엄스의 말처럼 ‘수동적인 관찰자의 낡고 정적인 리얼리즘’을 뛰어넘어 새로운 리얼리즘을 창조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리얼리즘은 바로 이런 소설이 아닐까. 아직 표면에 드러나진 않았으나 분명히 있는 것. 잠재적인 것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리얼리즘이 아닐까.

 

시커먼 개구리들이 비에 섞여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은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쓰레기가 쌓여 있었다. 개구리들은 대부분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아스팔트에 떨어져 머리가 깨지거나 지나가던 소독차에 깔리기도 했다. 그러면 아스팔트는 붉은 꽃을 피웠다. 어두운 거리에 그들이 흘린 피와 찢어진 살갗이 불빛처럼 빛났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편혜영의 <아오이가든>의 도입부이다. 나는 요즘의 구제역 사태를 묘사하는 신문 기사를 볼 때마다 편혜영의 소설이 자꾸 떠오른다. 이 단편이 실린 동명의 소설집 <아오이가든>은 2005년 7월에 나왔다. 소설집이 나온 것이 이 때이니 아마 이 단편이 쓰인 지는 그보다 1~2년 앞설 것이다. 사실 편혜영 소설만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이런 재앙을 예고했던 작품이 많다. 아직 가시화되지 않았거나 이미 지금 이 순간의 일이어도 너무 어리석어 미처 알아채지 못한 현실의 어떤 패턴을 낯선 공간에 옮겨 구체화시킨 것이다.

 

이 단편 소설에 나오는 ‘아오이가든’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희미하다. 주인공은 이름도 없고 나이는 몇 살인지 언제부터 집 밖에 나오지 못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그냥 아오이가든이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 마을에 알 수 없는 역병이 돌면서 사람들은 모두 집 안으로 숨는다. 문을 열면 역병에 걸린 개구리 사체가 우루루 쏟아지고 주인 잃은 개와 고양이는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맨다. 누군가 아파도 비밀로 해야 한다. 바로 어딘지 알지 못하는 곳으로 격리 조치를 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우리가 정체 불명의 역병과 싸울 때 얼마나 나약해지는지, 그것을 봉합하기 위해 얼마나 비열한 수단들을 쓰는지. 그리고 그 괴물 같은 역병은 얼마나 걷잡을 수 없는지. 시체들이 나뒹구는 현실이 서 있는 토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같은 소설집에 있는 <맨홀>이라는 단편의 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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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각장을 뒤지는 동안 가장 두려운 것은 혹시 얼어 죽은 아이의 시체를 건드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거리에서 얼어 죽은 아이들은 소각장에 그냥 버려졌다. 소각장에서는 다른 냄새에 섞여 시취를 맡지 못할 때가 많다. 쓰레기를 뒤적이다가 시커멓게 썩은 몸통과 얼굴을 만날 때면 우리는 결국 우리가 또 하나의 쓰레기가 되어 소각장에 던져질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편혜영, <맨홀>


처음 이 소설을 읽었던 몇 년 전. 나는 이 소설을 ‘특이한’ 작품 혹은 세상의 끔찍함을 동물의 시체들로 ‘은유’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은 이 소설을 완전히 잘못 읽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아직 도래하지 않았으나 분명한 현실을 그린 리얼리즘 소설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중요한 리얼리스트는 누구나 다 객관적 현실의 합법칙성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리고 깊숙이 감추어진 채 매개되어 있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없는 사회현실의 제반 연관관계에 도달하기 위하여 추상기법을 써서까지도 자신의 체험내용을 가공’해야 한다고 한다. 이때 작가가 드러낸 현실이라는 표면구조는 ‘삶의 표면구조를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요인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순히 보이는 것을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게 리얼리즘이라면 수천만 달러를 들인 헐리우드 영화나 자극적인 영상을 담은 텔레비전 뉴스 보도 화면이 가장 리얼리즘에 가까울 것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의 이 현실이란 표면이 어떻게 지탱되고 있는지 모든 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표면’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작업이다. 매 순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우리가 보는 것은 많은 순간 왜곡된 것이거나 그저 정말 말 그대로의 ‘표면’일 때가 많다. 때문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는 리얼한 문학은 필수적이다. 아래에 인용한 소설의 마지막 부분을 보라. 왠지 낯익은 풍경 아닌가.

 

그녀는 베란다 유리창을 열었다. 거리의 냄새가 밀려 들어왔다. 나는 구역질을 참지 못하고 뱃속의 것을 게워냈다. 붉은 내장들이 계속 쏟아졌다. 고양이의 것인지 내 것인지 헛갈릴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꿰맨 자국이 있는 뱃가죽이 튀어나올 때까지 구역질이 멎지 않았다. 그녀는 누이의 뱃속에서 나온 수십 마리의 붉은 개구리들을 바깥에 쏟았다. 바깥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나는 개구리들을 따라 발돋움질을 했다. 그것들은 내 누이의 아이들이었다. 베란다를 넘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가늘고 단단한 다리를 접었다가 훌쩍 튀어 오르니 바깥에 닿았다. 이윽고 거리의 냄새가 느껴졌다. 냄새만으로 아오이가든 너머로 나뭇가지처럼 가벼운 다리를 벌린 채 비강을 활짝 열었다. 죽은 새끼들이 썩은 몸을 일으켜 긴 소리로 울며 낙하하는 나를 마중하였다. -편혜영, <아오이가든>


 

 

글/화(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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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고


작년 중순부터 노들 현장인문학에 합류했다. 내가 합류하기 전에 맑스의 자본을 읽었다고 했고, 내가 결합할 즈음에는 푸코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나서 작년 말경부터 '루쉰'의 소설과 잡감을 비롯해서 그의 전기를 읽고 있다. 물론 노들의 활동가분들과, 노들 야학학생들, 그리고 수유너머가 함께 세미나를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사실 루쉰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이 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소개 받은 책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람의 평론집이었다. 그런데 이 분이 말하는 '루쉰'이라는 사람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작년에 연구실에서 하는 “국제워크숍”에서 다니가와 간이라는 노동운동가이자 시인을 공부했었는데, 다케우치 요시미가 말하는 “루쉰”은 내게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던 다니가와간이라는 인물을 쏘옥~ 빼닮아 있기도 했다. 그는 루쉰을 그저 설명하지 않고, 루쉰을 찾아내거나 만들어 낸다. 그렇다고 아주 없는 루쉰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충분히 루쉰이지만 루쉰 자신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것들을 찾아주는 사람. 갑자기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마저도 달리 보이는 책이었기에 다른 사람들과 조금 나누고 싶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일단 루쉰 스스로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질문하고 대답했던 문제에서 시작해서 루쉰을 찾아낸다. 그런 질문과 고민이 잘 드러난 루쉰의 텍스트로 선택한 것은「나는 어떻게 소설을 쓰게 되었는가?」(1933)라는 글이다.

 

물론 소설을 쓰게 된 이상 내가 주장하고 싶은 바가 없을리는 없었다. 이를테면 '무엇 때문에' 소설을 쓰느가라는 말에 답하자면 나는 역시 십수 년 전의 '계몽주의'를 마음에 품고서 반드시 '인생을 위해서'가 아니면 안 되고, 나아가 인생을 계랑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소설은 '심심풀이 책' 이라고 하는 예로부터의 주장을 싫어했고, '예술을 위한 예술'을 '심심풀이'의 또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나는 되도록 병든 사회의 불행한 사람들에게서 제재를 찾으려 했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글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 문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루쉰 스스로가 ‘무엇을 위해’라고 물었기 때문에 굳이 ‘인생을 위해’라고 대답한 꼴이 되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강요된 대답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그에게 글을 쓰겠다고 응답했다. <외침의 서문 중>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의 ‘인생을 위해’라는 일종의 강요된 대답은, 위에서 인용한 <외침> 서문의 글에 나타난 ‘내 나름의 확신’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한다고 본다. “병고를 폭로함으로써 치료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조의 말. 그가 자신의 문학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그가 ‘예술을 위한 예술’을 끝내 무시했던 것도 분명하지만, 따라서 그 때문에 설명을 위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도 이해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 그 스스로를 밖에서 해석한 듯 한 이런 대답에 의문을 품는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이후에 씌여진 「자선집(自選集)」(1932)에 씌여진 글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나는 당시 솔직히 '문학혁명'에 대하여 어떠한 열정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신해혁명을 보고, 제2혁명을 보고, 위안스카이의 제제와 음모와 장쉰의 복벽을 보고, 그 밖에 여러가지를 보아오다가 아주 회의적으로 되어 실망한 나머지 무기력해진 상태였다. ---- 다만 나는 내가 이렇게 실망하고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내가 본 인간이나 사건은 지극히 한정된 것이므로, 그 생각이 내게 붓을 들 힘을 주었다.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 ----- 직접적인 '문학혁명'에 대한 정열이 아니면 무엇때문에 붓을 들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열정적인 사람들에 대한 공감 때문이었다. 이러한 전사들은 적막 속에 있지만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함께 큰 소리로 외쳐 도움을 주어도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것 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낡은 사회의 병근을 폭로하여 어떠한 방법이든 치료법을 강구하도록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키려는 희망도 섞여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여기서 많은 중요한 시사점들을 찾아낸다. 일단 루쉰은 이 글에서 자신이 문학혁명에 냉담했다고 그 자신의 입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 주목하면서, 대체로 루쉰이 새로운 운동에 대해서 처음부터 찬성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며 그것은 루쉰이 ‘선구자’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두 번째 주목하는 점은 ‘신해혁명을 보고’에서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 그의 실망 및 무기력과 관계있는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그가 소설을 쓴 데에는 ‘열정적인 자들에 대한 동감’이 주요한 원인이 되고 있으며 ‘구 사회의 병근을 폭로해서 사람들의 주의를 촉구하고자’한 것은 앞의 원인과 ‘뒤섞여’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이 말한 ‘인생을 위한’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가 무슨 의미를 갖고 있다기 보다는 비(非) ‘예술을 위한’이란 쪽의 의미가 강하다고 본다. 루쉰이 해석한 ‘예술을 위한’이 ‘심심풀이’를 상징하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인생을 위한’은 ‘심심풀이가 아닌’의 의미로 해석되어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다시금 나의 서목들을 검토해 보니, 그것들의 내용이 실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창작에서는 나에게 위대한 재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여태것 장편을 한 편도 쓰지 못했다는 것이며....  

 

자선집과 같은 해에 씌여진 「나의 번역과 저서 목록」(1932)의 글이다. 이 글에서 루쉰은 작품을 쓰지 못한 것을 자신의 무능력으로 귀결시켰다.  다케우치 요시미도 루쉰이 근대 문학의 자기 붕괴의 과정에 처했던 유럽의 현대 작가들처럼 작품의 세계를 근본적으로 의심하지는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런 면에서 루쉰의 이런 자기평가를 사실로 인정한다. 그러나 다케우치 요시미가 보기에 루쉰은 자신이 진실로 쓰지 못했던 것, 동시에 쓸 수 없었던 것에 충실했다. 그의 ‘빈약한’ 작품에서 넘쳐 나오는 충실함. 이것이 다케우치 요시미가 루쉰을 그 차제 ‘루쉰’인 채로 재발견 해 내려고 애쓰는 지점이자 내가 느끼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그런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절망이 허망한 것은 바로 희망이 그러함과 같다.”라는 문장은 루쉰 문학을 설명하는 점에서 말 이상의 것이다. 그는 이 문장을 상징적인 말 이라기 보다는 루쉰 문학의 태도, 행위라고 평가한다. 그는 사람이 절망과 희망을 설명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각을 얻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불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일종의 태도이기 때문인데, 루쉰이 그 태도를 부여한 것이 <광인일기>라고 지목한다. 다케우치 요시미는 <광인일기>가 근대문학의 길을 열었던 것은 그것에 의해 구어가 자유롭게 되었기 때문도, 작품세계가 가능케 되었기 때문도, 하물며 봉건사상이 파괴되었기 때문도 아니며, 이 유치한 작품 때문에 어떤 근본적인 태도가 자리 잡혔다는데 가치가 있다고 평가한다. ‘길은 아득히 멀기도 하나니’ ‘나는 장차 오르내리며 찾아보려 하노라’는 태도의 문학가. 그에게 중국 근대 문학의 최초의 기념비로서의 <광인일기>는 일종의 ‘비극의 탄생’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주장이 오래도록 남는다.

 

물론 루쉰을 '읽어야 했던' 시기이기도 했지만,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론집은 내게 루쉰 소설을 '읽고 싶게' 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해서, 오늘은 루쉰 소설집의 마지막 소설을 읽는 날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 한참을 그의 잡감들을 읽어 갈 것이다. 반쯤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시선을 한 채로 내가 읽은 루쉰 소설의 매력 중의 하나는, 그의 소설이 그가 안고 있는 시대적 고민과 번뇌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려고 하지 않는다. 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을 그가 살던 시대로 완전히 끌어들여버리지 않는다. 루쉰 자신은 자신의 시대를 치열하게 고민하서면도, 루쉰을 읽는 이들이 ‘여기, 이곳’에서 ‘여기, 이곳의 문제’로 사유할 수 있는 여유를 빼앗아 가지는 않는다. 아마 나와, 노들의 활동가들, 그리고 야학 학생들이 그의 소설대해 그렇게 생기 넘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클 것이다.

 

혹시 “루쉰”에게 관심을 갖고, 그의 글을 읽으려고 하는 분들이 있다면, 다케우치 요시미의 『루쉰』을 읽어보라고, 아주 좋은 길벗이 될 거라고 간단히 권하려던 글이 너무 길어졌다. ^^;;; 부디 참고가 되셨기를....^^


글 / 정행복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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