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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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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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사진1.jpg 

 

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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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1.jpg

 

<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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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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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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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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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가 돌아왔다!” 1980년대 한국 비평계와 지성계에 민중 문화 담론을 촉발시키고서 홀연 사라졌던(?!) 바흐찐이 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라는 휘장을 감고서. 물론, ‘문화의 시대’를 선언하던 1990년대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군주가 지배하던 2000년대에 그가 온전히 종적을 감췄던 것은 아니다. 그의 최대 주저(主著) 중 하나인 <프랑수아 라블레의 작품과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아카넷, 2001)가 번역되었고, 몇 권의 전문 연구서들이 간간히 번역·출간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문예 미학의 ‘태두’였던 루카치와 나란히 거론되고, 한때 구미권에서 ‘바흐찐 산업’이라는 표현이 떠돌 정도로 명성과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 비한다면, 지난 20년간 바흐찐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그가 ‘돌연’, 혹은 ‘마침내’ 귀환했다! 국내 초역인 <예술과 책임>과 오래 전 절판되었던 <프로이트주의>가 그 시작이란다. 그저 빛바랜 신화의 추억일까, 아니면 미처 소진되지 않은 사유의 잠재력일까?

<예술과 책임>은 학문적 이력을 갓 시작하는 청년 바흐찐의 문제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두 편의 논문들을 담고 있다(정확히 말한다면, 표제 논문인 "예술과 책임"은 몇해 전 <말의 미학>(길,
2006)에서 소개된 적이 있었고, "행위 철학"만이 유일한 초역이다). 1919년 작성된 "예술과 책임"은 불과 세 페이지에 불과하지만, 바흐찐의 사유 전체를 추동하는 본원적 모티브를 담고 있다. 알다시피, 칸트의 3대 비판서를 통해 과학과 윤리, 예술이 상호 독립적으로 분과학문의 길을 간 이래, 근대인의 삶은 성찰의 거울을 상실한 채 유전(流轉)을 거듭해 왔다. 달리 말해, 윤리적 반성 없이 과학과 예술이 가능하고, 윤리는 그저 선택과 맹목의 대상으로 유폐되거나, 예술 지상주의의의 미명 아래 미(美)의 자족적 실존이 가능해진 것이다. 근대의 발전은 과학과 예술, 윤리가 각자 ‘제 갈 길을 떠나버림으로써’ 성취한 역설적인 성과였고, 그 파국적 결과가 우리가 알고 있는 ‘세기 말·세기 초’의 혼돈과 착종이었다(백년 전의 이야기지만, 불과 십년 전에도 다르지 않았다). 20세기를 전후한 유럽의 시대 정황은 고스란히 바흐찐에게도 이어져, <예술과 책임>의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구성했다. 문화와 삶의 분열을 어떻게 다시 통일할 수 있을 것인가?

"행위 철학"은 이와 같은 물음에 대한 바흐찐 나름의 응답으로 작성된 글이다(스포일러가 될 만한 내용 요약은 그만두겠다). 그런데 이 텍스트를 둘러싼 사연이 대단히 흥미롭다. 바흐찐이 자신의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저서는 1929년의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오자마자 불확실한 혐의로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되었고, 5년 후 간신히 돌아와 외국어 교사나 문학 강사 등을 전전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잔혹했던 스탈린 시대를 살아남은 그를 기다렸던 것은 화려한 복권이었다. 50년대 이후 그가 학계에 되돌아오자마자 그의 저술들은 우후죽순처럼 재출간되는 호기를 맞는다. 1963년 <도스토예프스키 시학의 문제들>이 증보·출판되었으며, 40년대에 작성된 박사학위논문 <리얼리즘 역사에서의 라블레>는 1965년에 현재의 제목으로 발간되었다. 그와 동시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나 츠베탕 토도로프 등을 통해 바흐찐은 삽시간에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고, 마침내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과 함께 전세계적 ‘유행’이 되었던 것이다. 그 후로도 꾸준히 발간된 바흐찐의 저술들은 ‘문학 이론의 시대’였던 20세기 후반기를 장식하며 널리 연구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에게 선보였던 바흐찐의 모습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에 놓여 있었다.
 즉, 러시아에서 나온 바흐찐의 저술들은 먼저 서구에 소개·번역되고, 그것이 다시 한국에 수입되면서, ‘민중 문화 및 문학 연구가’ 바흐찐의 이미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1980년대에 접어들어, 바흐찐의 초기 원고들을 뒤적거리던 연구자들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1920년대의 청년 시절에 바흐찐이 썼던 원고들이 불완전하게나마 아직 남아있었으
며, 이때의 원고들은 문예학에 정진하던 후반기 원고들과는 상당히 다른 주제 의식이나 성찰적 태도들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른바 ‘철학적 미학’이라고 이름 붙여진 청년기 저술들 가운데 최대의 논쟁거리는 바로 1986년 공간(公刊)된 "행위 철학"으로서, 바흐찐이 학문적 기원이 (그간 알려졌던 바대로 문학이 아니라) 철학에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로 간주되었다. 토도로프는 바흐찐의 문예학 연구는 그의 철학을 문학이라는 풍요로운 사례들로부터 입증하는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 적이 있는데, "행위 철학"의 발견은 마치 토도로프의 이 말을 입증이나 해주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이때부터 러시아에서는 바흐찐을 ‘철학자’나 ‘사상가’로 다루는 분위기가 형성되었으며, 한국을 포함해 서구의 바흐찐 연구가 시들해졌던 지난 20년간 이 부문에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예컨대 현재 러시아에서 간행 중인 <바흐찐 저작집>의 제1권이 바로 이 시기를 다루고 있는데, 총 950여 페이지 중 600페이지에 달하는 주(註)가 청년 바흐찐의 철학적 문제의식을 규명하고 입증하는 데 바쳐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 철학"의 내용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거의 백년 전에 수기(手記)로 작성된 문서인데다, 출판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청년기의 자유로운 사유와 실험이 녹아있는 텍스트이며, 많은 부분들이 훼손되거나 간략한 메모의 형태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미적 활동에서의 작가와 주인공"(<말의 미학>에 수록)과 연관되지만, 온전히 행위와 윤리라는 문제를 철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텍스트로서 사유의 치밀함보다는 자유로운 도약과 상상력이 더욱 돋보이는 이 글은 ‘번역 불가능하다’라는 딱지를 떼지못할 운명이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 번역은 사실 그 자체로 어느 정도 ‘실험적’이며 피치못하게 ‘문제적’인 운명을 밟아갈 듯하다. 가령, 제목부터 그러한데, 그간 국내 러시아 학계에서 통용되던 이 텍스트의 제목은 ‘행동 철학’이었던 것이다. 또한 학문과 사유, 활동 사이의 규정된 범주나 경계를 넘나듦을 지칭하는 (‘위반transgression’과 관련된) ‘transgredientnyi’는, 그간 ‘경계 이월적(移越的)’이라는 번역어가 사용되어 왔음에도 불구하고 ‘외재적(外在的)’이라는 단어로 옮겨졌다. 번역어의 선택에는 언제나 번역자가 짊어진 사유의 노고가 뒤따른다는 생각을 하지만, 이 경우 말 그대로 ‘외재적’으로 옮겨져 왔던 ‘vnenakhdimost'(exteriority, outsideness)'와는 앞으로 어떻게 구별해 갈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모든 잠재적인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바흐찐의 저술들이 다시금 빛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은 더 없이 소중하다. 바흐찐이 일단의 지적 유행에 밀려 적절히 소비되고 말 ‘박제된 이론’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더구나 "행위 철학"은 그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논란의 근원이며 바흐찐 신화의 기원에 해당하는 텍스트지만, 실제로는 거의 읽히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번 한국어 번역본의 출간이 그 ‘신화’의 진상을 밝혀주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한다. 이로써 바흐찐은 누군가에게 사유의 새로운 심화나 전화(轉化)를 촉발하겠지만,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실망과 환멸을 주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신화가 그저 신화로 남겨지지 않았다는 데 있는 게 아닐까? 직접 만나고 읽을 수 있는 신화! 하늘을 봐야 별을 딴다는데, 사유의 ‘전화’든 ‘실망’이든 일단 맞부딪혀보고 판단할 일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계간 <자음과 모음> 2011년 여름호(제1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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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와 바흐찐, 첫 번째 만남

우리나라에 바흐찐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80년대였다. 루카치로 대표되던 맑스주의 문예이론의 엘리트주의를 넘어서는 한편으로, 문학과 예술의 민중적 토대에 대한 모색이 활발히 진행되는 가운데 집중적으로 소개되었던 것이다. 바흐찐은 문화를 루카치처럼 ‘해방’과 ‘진보’의 위대한 이념이 전개되는 과정이 아니라, ‘대화’와 ‘웃음’을 통해 인간의 상상력이 종합되고 역사 속에 풀려나오는 과정으로 묘사했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평범한 민중들의 삶 자체가 일으키는 사건에 다름 아니었고, 이는 ‘민중문화’를 노래하던 80년대의 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더구나 혁명의 고향인 러시아 출신의 이론가라는 사실은 바흐찐을 ‘신화적’ 위광 속에서 조명하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90년대에 접어들며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문화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은 홀연 사라져 버렸다. 그의 책들은 절판도서의 목록에 올라갔고, 세간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효용이 다한 걸까? 그리고 2011년, 돌연 그가 되돌아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어 완역본’이란 꼬리표를 달고서. 그저 철지난 이론의 반복일까? 혹은 아직 소진되지 않은 신화의 귀환일까? 그의 이름이 낯선 독자들을 위해 간략한 소개부터 해보자.




바흐찐, 신화와 삶의 이력

1895년에 태어난 바흐찐이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혁명의 격랑이 러시아 전역을 휩쓸던 때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빈궁하던 시절이었지만, 그는 서클을 조직해 강의와 연구, 세미나를 하며 그 시간을 버텨냈다. <문예학의 형식적 방법>(1928), <프로이트주의>(1927), <마르크스주의와 언어철학>(1929) 등은 이 무렵 바흐찐이 서클 친구들의 명의로 출판한 책들인데, 진짜 저자가 누구인지는 여전히 논란중이지만 적어도 바흐찐의 영향아래 쓰여졌을 것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정식으로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저작은 1929년에 나온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이었고, ‘대화주의’라는 개념을 낳은 이 책은 후일 그에게 불멸의 명성을 안겨다 준다.

우연하게도, 첫 저작이 나온 직후 바흐찐은 소비에트 당국에 체포되어 카자흐스탄 유형길을 떠나게 된다. 이유는 분명치 않은데, 아마도 스탈린의 대숙청 와중에 ‘미심쩍은’ 지식인들에 대한 숙청작업의 일환이었던 듯하다.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중앙아시아 황무지로의 유배는 거의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새옹지마랄까, 유형의 댓가로 바흐찐은 잔혹한 시대에서 살아남게 된다. 이 시기 그의 청년시절의 벗들은 대부분 총살되거나 실종되었던 것이다. 유형이 끝난 후엔 지방에서 교사생활을 하며 연구를 이어나갔다. 30년대의 괴테론(크로노토프론)이나 40년대의 민중문화론이 이 시절의 성과들이다. 특히 <프랑수아 라블레와 중세 및 르네상스의 민중 문화>(40년대 집필, 65년 출간)는 시간이 갈수록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대작으로 현대철학과 문화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탈린 사후, 정식으로 복권된 바흐친은 6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대단한 환영을 받게 된다. 그의 저술들이 속속 발굴·번역되었고, 1980년대에는 ‘바흐찐 산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현대 인문사회과학에서 중요한 흐름을 형성한 것이다. 한국에 그의 이름이 소개되었던 것도 이런 맥락을 통해서였다.


바흐찐과 한국사회의 두 번째 만남. ‘귀환’의 의미

짐작했겠지만 80년대에 영미권을 통해 소개된 바흐찐은 어느 정도 이론적 기성품의 형태에 가까웠다. 바흐찐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서구에서 생겨난 문제의식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었고, 그의 저작들 역시 중역본들이 유일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시절 한국사회와 바흐찐의 만남이 ‘신화’와 뒤이은 ‘망각’으로 기록된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열광이든 망각이든 우리 자신의 체화된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에 출간된 바흐찐 선집 두 권, <예술과 책임>과 <프로이트주의>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바흐찐 신화가 이미 한물간 지금 그의 저작들이 원어로부터 출간되었다는 사실은, 어쩌면 객관적인 관점에서 그의 사유를 우리 내적 문제들과 부딪히게 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생산하게 만들 기회일지 모른다. 유행하는 이론이 아니라, 빛바랜 신화일지언정 고전으로서 바흐찐을 읽게 된다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유의 새로운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이번에 나온 선집은 이른바 바흐찐 사유의 ‘기원’에 해당하는 글들이다. 1920년대 초엽에 집필된 ‘예술과 책임’, ‘행위철학’은 번역의 난해함과 어려움 때문에 지금껏 제대로 읽히지 못했다. 이런 텍스트가 한국어로 초역됨으로써 전공자뿐만 아니라 여타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 또한 바흐찐의 초기 사상에 접근할 통로가 생겨난 것이다. 아직 두 권에 불과하지만 한국어판 선집 간행의 가장 큰 의미는 여기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바흐찐과 우리의 두 번째 만남은 더 이상 ‘신화’라는 후광 속에 있진 않을 듯하다. 신화는 제대로 알지 못할 때나 피어나는 이미지니까. 하지만 신화의 휘장을 걷어냈을 때 비로소 현실을 생산하는 사유의 가능성이 나타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만남을 문화라 한다면, 바흐찐도 언급했듯, 역사 속의 문화는 신화가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나날의 실천 속에서 형성되는 사건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에 다소간의 매혹을 느꼈다면, 서둘러 도서관으로가 바흐찐의 글들을 넘겨보길 바란다. 그것이 사유와 실천으로서 문화의 시작인 것이다.



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이 글은 2011년 3월 27일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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