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0일, 금요일. ‘반값등록금’을 주장하는 대학생들의 집회가 청계광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집회신고를 거부하여 처음부터 불법집회로 만들어 놓고는, 불법집회 저지를 명분으로 장소를 미리 경찰이 점거했지만,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해 맴돌던 분노는 거대 대중이 되어 둘러싼 경찰의 벽을 흘러넘쳤고, 거꾸로 집회장소를 점거한 경찰대열이 포위되는 양상으로 바뀌어버렸다. 덕분에 불법집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었다. 경찰은 그 집회대중을 경찰벽으로 이리저리 막았지만, 흘러넘치는 대중은 그 벽을 넘어 거리로 다시 흘러넘쳤고, 금지된 ‘행진’, 혹은 ‘질주’를 아슬아슬하게 할 수 있었다.

바로 그 시간, 150일 이상 타워크레인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 김진숙 씨와 한진중공업을 경찰의 호위 아래 회사가 고용한 용역업체가 덮쳤다고 한다. 다행히 다음날 용역업체가 점거한 현장을 ‘희망의 버스’를 타고 내려간 700명가량의 ‘외부세력’들이 밀고 들어가 다시 탈환했다. 그러나 멀리 서울 근방에서 내려간 그 버스는 다음날 되돌아와야 했기에, 희망은 잠시, 다시 권력에 포위되고 말 것이다.

점거와 탈환, 포위와 이탈이 겹치며 반복되는 이 교착 속에서, 우리는 정리해고를 눈앞에 둔 노동자와 등록금 때문에 고통을 겪는 대학생들이 뒤섞이는 기이한 혼성의 지대를 발견한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알바를 하려고 뭐 하러 가는 건지도 모르는 채 나섰다가 한진중공업에 용역으로 투입되었다는 부산 모 대학교 대학생이었다. 아마도 해고와 대결하고 있는 한진중공업의 노동자는 대학생 자식의 등록금을 벌기 위해 정리해고와 필사적으로 맞서 싸우고 있는 분들일 것이다. 개인적인 관계는 없다고 해도, 아마도 그런 노동자의 아들일 수 있을, 등록금의 일부라도 벌기 위해 알바를 해야 하는 대학생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압하는 용역으로 고용되어 그 자리에 투입된 것이다.

노동자와 대학생이 만나는 방식은 70년대 이래 여러 가지 경우가 있었다. ‘대학생 친구가 하나만 있었다면’이라는 전태일의 가슴 아픈 유언에 휘말려 노동자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가 그들과 만나는 방식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80년대에는 조직된 학생운동과 아직 충분히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의 형태로 만나는 방식이 있었다. 이후 대학생과 노동자가 만나는 지대는 크게 줄어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80년대말~90년대 전반, 노동자들은 전노협이라는 강력하고 전투적인 조직으로 발전한 반면, 대학생들의 주류는 노동운동에서 멀어져 통일운동 등의 다른 운동으로 옮겨갔다. 90년대 후반 이후,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이라는 ‘안정적인’ 조직으로 성장한 반면, 학생운동은 쇠락을 거듭하여 학생회조차 장악하지 못하게 되면서 운동의 장에서 만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대학생들은 이제 단지 취업에 목을 건 취업준비생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97년 이후 비정규직의 확대와 대학등록금의 증가는 노동자와 학생을 불편하고 기이한 방식으로 다시 만나게 하는 것 같다. 노동자들이 비정규직이라는, 취업과 실업의 중간 상태에서 떠돌고 있었다면, 대학생들은 턱없이 오른 등록금을 벌기 위해 방학은 물론 학기 중에도 알바를 해야 하는,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한 학기에 500만원을 전후하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서, 대학생들은 이제 수업시간을 피해가며 알바를 하는 게 아니라, 알바 시간을 피해가며 수업을 들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것은 그들이 학생이기 이전에 알바로 돈을 벌어야 하는 노동자임을 뜻한다.

전체 시간의 일부만을 노동할 수 있는 노동자가 비정규 노동자라면, 알바에 일정한 시간을 할당하고 그것을 피해가며 수업을 듣는 대학생, 즉 학교에 다니지만 전체 시간의 일부만을 수업을 듣고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은 ‘비정규 대학생’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고액등록금에 목을 잡힌 채, 알바 없이는 대학을 다닐 수 없게 된 대학생, 그들은 대학생이지만 비정규 대학생이고, 노동자이지만 비정규노동자인 것이다. 대학생과 노동자가 비정규성이라는 하나의 공통성을 갖고 하나의 신체에 동시에 거주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아니, 이중의 비정규성이 그들의 삶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지난 2008년 촛불시위 때에도 조직적으로 참가하지 않았던 대학생들이 반값등록금을 요구하며 집회를 하는 바로 그 시기에,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에 대한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던 것은, 물론 시간적인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단지 우연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쫓아내고 비정규직으로 몰아세우는 과정과 미친 등록금으로 대학생들을 비정규 대학생으로, 비정규 노동자로 몰아세우는 과정이 하나의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비정규 노동자로 내모는 기업에 대한 저항과, 대학생을 학교 밖으로, 비정규 대학생으로 내모는 대학에 대한 저항이 사실은 하나의 동일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노동자와 대학생의 새로운 만남, 새로운 관계가 출현하리라는 징후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 새로이 상상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정규 노동자와 비정규 대학생이 합류하면서 만드는 새로운 종류의 연대의 방식에 대한 상상이.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위클리 수유너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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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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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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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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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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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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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우리는 뜻하지 않은 존재자가 있음을 알고 놀라게 된다. 예전에 그것은 네스호의 괴물이나 UFO, 혹은 영매의 몸에 갑자기 내려 앉은 귀신처럼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 있던 것들,혹은 과학의 시선 바깥에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과학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것이 별로 남아나지 않게 된 지금, 그런 신비한 사실 자체도 별로 남아 있지 않거니와, 어쩌다 귀에 들어온다 해도, 일축의 감탄사와 함께 쉽게 묻혀버리고 만다.


그래도 종종 당혹을 야기하는 뜻밖의 존재자들이 있다. 전에 태평양의 어딘가에 있는, 인간들이 버린 쓰레기가 떠돌다 모여 만들어졌다는 거대한 쓰레기의 섬 얘기를 인터넷서 보았을 때 그랬다. 이때의 놀라움과 당혹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던 것이었다는 점에서 전과 달랐다. 그래, 이렇게 먹고 쓰고 버려대는데, 그게 어딘가 그렇게 모여 있는 건 당연한 거 아니겠어? 그럼에도 그런 것이 있음을 알았을 때, 당혹하게 되는 것은, 그 정도까지 였나, 이후에는 더 할 텐데 어쩌지 라는,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쉽게 보여주는 미래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일본 후쿠시마 지역을 대지진이 덮쳤을 때, 우리를 놀라고 당혹하게 했던 것은 지진이나 쓰나미라는 거대한 자연의 힘이 아니었다. 그건 비록 인간의 힘에서 벗어난 것이지만, 이미 과학의 시선 안에 있다. 정작 놀라게 했던 것은 과학과 기술이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냈던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되어 걷잡을 수 없게 된 사실이었다. 실은 그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고하던 것이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제로 구체적으로 지적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경악은 그렇게 지적되던 일이 정말 일어났다는 점에서 연유했다.


거기에 더해, 무기로든 에너지로든, 과학의 첨단지식의 산물인 원자력이 사실은 지진 이상으로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거리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당혹을 주었던 것 같다. 아무리 보호복을 입어도 인간이 다가갈 수 없는 거리. 그래서 사고의 확대를 막기 위해 투입된 사람들--비정규직 노동자였다!!--은 죽음을 각오해야 했고, 그래서 한때는 영웅으로 칭송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처리할 수 있는 한계선은 분명했다. 더 놀라운 것은 원전 주변에서 사고로 죽어 방치된 수천 명의 사람들이 방사능에 오염되어 있는데, 이들 시신을 처리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땅에 묻으면 땅이 오염되고, 태우면 방사능이 분진이 되어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원전의 폐기물이 모두 그런 것 아닌가? 폐기장이 있지만, 그것이 잠시 안보이게 치워두는 것일 뿐, 실제로는 폐기한 것이 아니며, 이번 경우처럼 사고로 인해 인간의 세계 속으로 되돌아오고 만다. 체르노빌처럼 시멘트로 묻어둔다 해도,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알 수 없고 보이지 않을 뿐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방사능, 아니 원자력은 과학이든 뭐든 인간의 손이 아무리 해도 가 닿지 못하고 처리할 수 없는 어떤 한계지대를 보여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는 단지 원자력 같은 극단적인 것만이 아니다. 태평양에 떠있다는 거대한 쓰레기의 섬도, 중국 연안의 서해 바다를 메우고 있다는 엄청난 양의 배설물도 정도는 다르지만 마찬가지일 것이다. 바다를 확장하거나 지구를 늘려갈 수 없는 한 그것은 조만간 처리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이번에 알려진 미군의 고엽제도 그렇다. 한숨이 나오지만, 베트남의 정글을 오염시킨 수천만 리터의 고엽제, ‘식물통제계획이라는 과학적 작전명으로 한국의 비무장지대에 뿌려진 고엽제야 목적에 맞게 쓰여졌다고 치자. 다 쓰지 못한 것들이 폐기물로 남았을 때, 그것을 계속 보유하고 있을 게 아닌 한,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을 것이다. 지금 문제가 된 지역이 아니라도 어딘가 묻어가 바다에 버리거나 등등 해야 했을 것이다. 오염된 지역만 달라질 수 있을 뿐, 어딘가 오염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일 게다. 이는 고엽제만이 아니라 모든 화학적 폐기물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간의 힘으로 손쓸 수 없는 어떤 한계, 제거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가 있는 것이다.


예전에 딜타이는 인간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의 의지 바깥에 있기에, 인간의 의식이 저항으로 느끼는 사물의 물질성을 저항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의지의 바깥에 있다는 점에서 나는 이를 외부라고 명명한다. 사고로 드러난 원전의 방사능이나 고엽제, 쓰레기 등은 모두 인간의 의지대로 변형되어 사용되고 남은 것이다. 이런 사고들은 인간이 과학의 힘을 써서 사용한 것조차 이렇게 처리할 수 없는 물질성을 가짐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물질은 이처럼 인간의 의지에 저항한다. 문제는 처리할 수 없는 한계가, ‘저항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그것이 있음을 부정하고 모두 인간의 뜻대로 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아니었을까? 거꾸로 그런 저항과 한계가 있음을 알고 그것을 인정할 때, 모든 것을 인간의 뜻대로 사용할 순 없음을 수긍하고 물질성의 영역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을 때, 물질성의 사후적인 저항이나 복수를 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재난이야말로, 정복할 수 없는 어떤 불가능성의 도래야 말로 우리가 사물, 자연과 맺은 관계를 근본에서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기회가 아닐까? 학인의 머리를 후려치는 선사들의 방망이질 같은.



글 /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법보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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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후진국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어디서나 세계 최고아시아 최고같은 순위에 집착하는 것이다. ‘아시아 최고의 높이를 자랑한다던 남산타워(지금은 아니겠지만)를 비롯해 이런 순위 자랑성 발언이 유난히도 많았던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지금은 자랑할 게 없어선지, 그런 거 자랑하는 게 남들보다 잘난 게 없음의 징표임을 알아서인지 많이 뜸해졌다. 약간은 후진성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에서 최고의 순위를 얻은 게 적지 않다. 대표적인 것은 시민들의 행복도나 복지예산비율 등이 OECD 국가 최저라는 것 등이 그것인데, 자살율도 그렇다. 2003년 이후 헝가리와 일본을 제치고 한국이 OECD 최고의 자살율을 감춘 국가가 되었다.

자살은 이제 양적으로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최고 수준이 된 듯하다
. 지난해 서울대생 가운데 5명이 자살했다고 하더니, 올해는 몇 달 안되는 사이에 카이스트 학생 4, 급기야 교수도 1명 자살을 했다. 잘나가는 엘리트들이 앞장서 자살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드러난 카이스트의 현실은 자살의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징벌 등록금, 예외없는 영어강의, 등록연한 제한, 교수들의 실적주의 등등 단 한순간도 경쟁에서 피할 수 없는 제도로 학생은 물론 교수들을 토끼몰 듯 쪼아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토끼몰이 제도들이 한때는 총장이름을 따 서남표 개혁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찬양되었다고 한다. 카이스트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자살이 많은 이유를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하긴 그리 쪼아댄 덕분에 카이스트는 순위가 많이 올라갔다고 한다
. 훌륭한 대학-기업(!)이 된 것이니, 찬양할 만 했던 셈이다. 그 경쟁이나 개혁이 학생을 위한 것이었을까 학교를 위한 것이었을까 하는 의문은 접어두자. 경쟁에서 버틴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총장님과 개혁을 지지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동료들이 왜 자살했다고 생각할까? 경쟁에 져서? 무능해서? 의문을 접는 순간 편치 않은 감정이 일어난다. 생존자들의 안도일까? 아니면 승리자들의 자긍심일까?

사람을 잡는 이
서남표 개혁을 보면서 일본의 고이즈미 개혁이 떠올랐다. ‘일본사회의 개혁이란 깃발 아래 이른바 민영화’, ‘기업화등으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성공이냐 죽음이냐로 경쟁적 상황을 극단화하고, 패배자들의 각성을 위해 실업이나 비정규직이라는 죽음의 늪을 전사회로 확대했던 점에서, 극히 유사했기 때문이다. 경쟁의 힘으로 생기 잃은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발상이 둘 다 확연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남표 씨는 고이즈미처럼 정치적 센스가 없어서인지, 학생들이 연이어 자살한 상황에서도 미국대학에선 더 많이 죽는다며 아직 피가 부족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개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너무 쉽게 드러냈다는 점이다.

멀쩡한 소 돼지가 잔계산의 경제학 때문에 턱도 없이 죽는다면
, 멀쩡한 학생들이 경쟁과 도태의 생물학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다윈의 적자생존이나 자연도태라는 개념이 스펜서의 사회학이나 멜서스의 경제학에서 기원한 것임을 안다면, 쉽게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물의 세계를 상호부조라는 말로 요약했던 크로포트킨의 오래된 연구뿐만 아니라,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가 상이한 박테리아들의 공생체임을 증명한 마굴리스의 유전학적 연구는 경쟁이란 말로 세계를 이해하는 게 얼마나 일면적인 단순화인지를 보여준다. 경쟁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것 이상으로 협력과 공생이 있음은, 생물학을 모른다면, 역시 생물이기도 한 우리 자신의 삶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좀 더 나쁜 것은 경쟁과 도태에 대한 단순화된 관념이다
. 다윈에 따르면 가령 마데이라 지역에는 날개가 퇴화되었거나 있어도 날지 못하는 딱정벌레가 반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유는 잘 나는 놈들은 바람에 날려 바다에 떨어져 쉽게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 조건에선 생존경쟁과 도태는 형태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완전한것들에게 불리했고, ‘불완전한것들이 '적자(fittest)'로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는 단지 하나의 특별한 예가 아니다. 두 앞발이 퇴화된 장수풍뎅이 등 많은 사례를 다윈 자신이 언급하고 있다. 살아남아 진화하는 것들, 그것이 좀 더 진보된, 좀더 완전한것은 아니다. 환경에, 조건에 잘 맞는 것이 살아남는 것이다.

따라서 경쟁을 당연하다고 가정하는 경우에조차
,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가를, 즉 어떤 경쟁인가를 보는 것이다. 성적이 징벌적 등록금까지 이어지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은, 재능이 있거나 새로운 것을 창안하는 개체들이 아니라 성적관리를 잘하는 개체들이다. 성적관리를 위해 흥미와 열정을 죽이며 좋아하는 강의를 포기할 줄 아는 지혜’, 배울 것도 별로 없고 매력도 없지만 성적을 잘 주는 과목을 선택하는 지혜’, 그것이 그런 경쟁에선 살아남는 비결이다. 스펙관리를 포함해, 자기개발만큼이나 자기관리가 생존의 전략이 되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이런 경쟁체제에서 살아남을 자는 그런 계산과 관리에 능란한 자일 것이다. 그런 자들이 재능 있는 창조적 연구자가 될까? 그보다는 관리자 계통의 직업을 택하는데 다음번 경쟁에서도 살아남는 방법일 것이다.

일정 비율의 탈락자를 무조건 내야 하는 성과급 체계가 열심히 공부하는 교수를 선별할 거라고 가정하는 경쟁체제에선 어떨까
? 생존이 달린 그 경쟁에서, 애써 논문이야 쓰겠지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가령 새로운 교수를 선발하면서 경쟁력 있는 사람을 뽑는 것은 미련한 짓이 되지 않을까? 경쟁과 성과 간의 선형적 관계만을 고려하는 경쟁의 생물학에서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경쟁자들을 조절하는 인간의 이러한 피드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의식이 있고 이성이 있는, 즉 계산하는 동물에게만 고유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의 자살 또한 이런 피드백의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이는 경쟁의 생물학에 기초한 교육학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지금 모든 대학을 겨냥하고 있는 경쟁이 어떤 학생, 어떤 교수가 생존하게 하여 어떤 대학을 만들 것인지를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경쟁이 모든 것을 진보하게 하리라는 믿음이 아둔해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법보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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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말처럼 좋은 철학이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삶을 긍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일 것이다. 삶이 ‘편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편한 삶, 좀 더 잘 벌고 좀 더 잘 쓰는 삶으로 대체되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해지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은 절실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좋은 학교, 좋은 집, 많은 돈이 그것을 가려간다. 이제라도 다시 눈을 돌려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황금빛 장막을 걷어치우고, 거기 가려진 삶을,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야 한다. 철학을,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직업학교가 되고, 돈의 장막을 몸에 덮어씌우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강의는 ‘큰 배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되었다.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대적 삶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사유할 수 있는 촉발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을 배우긴 쉽지만, 그런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은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연속강의를 통해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 강좌는 크게 2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이진경이 주도하는 강의는 길을 가기위한 지도를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세미나인데, 이는 스스로 지도를 읽고 찾아가는 훈련의 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의와 세미나를 모두 참여하셔야 합니다.
(문의: 유심 ㅇ11-9571-15ㅇ9)


[토요일] 강의: 노마디즘 1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예언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그게 사실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들뢰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요. 잠시 시작되는 듯하다 중단되고 만 것은 무엇보다 그의 책이 갖는 난해함 탓일 겁니다. 사유의 깊이를 잴 수 없게 하는 난해함. 이번 강의는 들뢰즈 사상의 개요에서 시작하여 <노마디즘 1>을 함께 읽으며 그의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면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유목민의 전차를 모는 사유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개강: 5월 7일


[일요일] 세미나: 인디언의 사상

“유목민은 역사를 쓰지 않는다.”(들뢰즈/가타리)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화나 제의 등이 그것이었다. 백인들과의 적대적 만남, 혹은 인류학자들과의 우호적 만남을 통해 그것들은 부분적이나마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디언은 이런 유목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번 세미나는 인디언 추장의 말이나 인류학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사유와 만나고자 하며, 그것을 통해 근대와 다른 종류의 삶에 접근하고자 한다.

개강: 5월 8일


[등록 방법] 

1. 강좌신청 게시판에 신청글을 남깁니다.    (http://nomadist.org/xe/apply)

2.  길잡이에게 확인 문자를 한 통 보냅니다. (ㅇ11-9571-15ㅇ9)

3. 송금을 합니다. (우리은행    588-000927- 02-101,  예금주 명: 오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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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말처럼 좋은 철학이란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고자 한다. 삶이 어려워질수록 삶을 긍정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것은 아니다. 반대일 것이다. 삶이 ‘편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고, 편한 삶, 좀 더 잘 벌고 좀 더 잘 쓰는 삶으로 대체되고, 삶이 힘들어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망을 강해지고,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은 절실해진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사랑하게 되는 출발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라면서 삶을 긍정하는 법을 점점 잊어간다. 좋은 학교, 좋은 집, 많은 돈이 그것을 가려간다. 이제라도 다시 눈을 돌려 삶을 긍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황금빛 장막을 걷어치우고, 거기 가려진 삶을, ‘새로운’ 방식의 삶을 찾아야 한다. 철학을, 좋은 철학을 배워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학이 ‘큰 배움’의 장이 아니라 직업학교가 되고, 돈의 장막을 몸에 덮어씌우게 된 지금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이 강의는 ‘큰 배움’을 꿈꾸는 사람들이 좋은 삶을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되었다. 하여,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근대적 삶과 근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살고 사유할 수 있는 촉발을 제공하고자 한다. 어떤 철학적 사유의 결론을 배우긴 쉽지만, 그런 사유의 방법을 배우는 건, 그리하여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배우는 것은 적지 않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일련의 연속강의를 통해 함께 사유하는 철학의 장을 만들고자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토요일] 강의: 노마디즘 1

 

“언젠가 20세기는 들뢰즈의 세기로 기억될 것이다.” 푸코의 예언입니다. 이미 아는 사람은 그게 사실일 것임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들뢰즈의 시대가 되었다고 하기는 힘들지요. 잠시 시작되는 듯하다 중단되고 만 것은 무엇보다 그의 책이 갖는 난해함 탓일 겁니다. 사유의 깊이를 잴 수 없게 하는 난해함. 이번 강의는 들뢰즈 사상의 개요에서 시작하여 <노마디즘 1>을 함께 읽으며 그의 가장 중요하고 풍요로운 면을 따라가 보고자 합니다. 유목민의 전차를 모는 사유의 여정에 함께 하시길!


개강: 5월 7일




 

[일요일] 세미나: 인디언의 사상

“유목민은 역사를 쓰지 않는다.”(들뢰즈/가타리) 또한 기록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 또한 자신들이 옳다고 믿는 삶의 방식과 사상을 가르치고 전수하는 방법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신화나 제의 등이 그것이었다. 백인들과의 적대적 만남, 혹은 인류학자들과의 우호적 만남을 통해 그것들은 부분적이나마 문자로 기록되었다. 인디언은 이런 유목적 삶의 방식과 사고방식에 대해 알려준다. 이번 세미나는 인디언 추장의 말이나 인류학자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이들의 사유와 만나고자 하며, 그것을 통해 근대와 다른 종류의 삶에 접근하고자 한다.


개강: 5월 8일



이 강좌는 크게 2부분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이진경이 주도하는 강의는 길을 가기위한 지도를 제공합니다. 또 하나는 세미나인데, 이는 스스로 지도를 읽고 찾아가는 훈련의 장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강의와 세미나를 모두 참여하셔야 합니다.  (문의: 유심 ㅇ11-9571-15ㅇ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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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갑자기 수백마리의 새떼들이 죽어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땅에선 천만에 가까운 동물들이 죽어, 그 핏물이 대지에 흘러넘치도다. 거대한 지진이 전에 없이 반복되고, 그로 인해 육지가 이동하며 지구의 지축이 흔들려 밤낮의 행로가 틀어지도다. 근대과학의 정수가 집약되었다는 원자력 발전소가 붕괴되고 폭발하여 방사능이 물과 음식은 물론 전세계의 대기로 퍼져가 죽음의 재가 되어 인간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그 미래마저 잡아삼키리라.” 정말 종말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첫 번째 것이 인간이 자행한 업보가 죽음의 인과로 되돌아오는 종말을 뜻한다면, 두 번째 것은 자연이 자신의 신체와 균형을 바로 잡기 위한 정화의 종말을, 세 번째 것은 과학이 만든 합목적적 세계가 그 근저에서 붕괴하는 종말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런 종말적 현상들 앞에서 종말론의 전문가들인 목사님들은 어떤 종말의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 다만 우상을 숭배하거나 여호와에 대한 신앙과 복종의 결여에 대한 신의 복수를 확인하고, 그로부터 사함을 받은 자신들의 복락을 축복하고 있다. 반대로 종말론이라는 종교적 관념에 대해 비판하고 혐오하던 나 같은 사람들이, “이게 종말이지 종말론이 아니야라며 농반진반 종말론자 흉내를 내고 있다. 이 역시 종말적 징후의 하나인지도 모를 일이다. 

구제역에서 감지한 종말적 느낌이 이른바 
생명과학에 의한 생명의 거대한 학살이라는, 다분히 생물학적인 형상을 수반했다면, 지금 일본 후쿠시마의 원자력 발전소의 붕괴는 양자역학 내지 원자핵공학의 자기붕괴, 아니 자살이라는 물리학적 형상을 수반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단지 동물만의 죽음, 원자력발전소의 붕괴만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죽음의 선을 그리게 될 것이다. 이미 방사능 물질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이르고 북극을 지나 다시 일본 인근의 한국과 중국에서까지 발견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이를 자연재해가 아니라 인재라고 입을 모아 말하지만, 그 말이 단지 관리자들이나 당국자들의 잘못만을 지칭하는 것이라면, 그 또한 타당하지 않다. 그것은 관리상의 잘못 이전에, 방역을 위해 감염의 위험이 있는 동물을 죽여야 한다는 과학적 발상, 효율적이고 거대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원자력을 이용해야 한다는 과학적 사고 자체와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말적 현상에 직면하여 나는 종말에 대해
, 그리고 종말론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믿는다. 신의 예정이나 분노에 의해 뜬금없이 닥쳐오는 그런 종류의 종말론처럼 종말에 대해 사고하지 못하는 것은 없다. 그것은 전국의 대지를 피로 흘러넘치게 한 종말적 비참에 대해, 전세계의 대기를 방사능 물질이 떠돌게 만든 이 종말적 사태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할 수 있는 어떤 단서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종말이란 무엇인가
? 내가 죽는 것이다. 다시 말해 를 구성하는 수백조개의 세포들의 공동체가 붕괴하는 것이고, 산소와 이산화탄소, 영양소와 배설물 등을 서로 주고받는 하나의 거대한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하나의 공동체가 종말을 맞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과 소, 돼지, , 벼와 콩, 물과 대지, 미생물 등이 서로에게 무언가를 주고 서로에게서 다른 무언가를 받는 하나의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하나의 세계가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 세계를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들의 순환계가 해체되는 것이고, 더 이상 스스로 지속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종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금의 세계가 거대한 폭발 같은 걸로 소멸하거나 모든 생명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계를 존속하게 하는 지구적인 순환계가 해체되고 붕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종말이란 종교적이고 신학적 현상이기 이전에 자연적이고 자연학적 현상이다.

물론 자연적인 것이든 인공적으로 변환된 것이든
, 어떤 순환계도 그저 국지적인 변환이나 절단에 의해 해체되지는 않는다. 끊어지거나 소멸된 무언가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를 잉여성이라고 한다)이 있다면 그것은 변형된 형태로 지속된다. 잉여성이 부족하면 심지어 남의 장기까지도 끼워넣으면 살지 않던가? 종말이란 그 잉여성을 초과하는 강도의 순환계 파괴에 의해 닥쳐온다. 

그렇다면 
종말론이란 의식적이진 않아도 그런 종류의 종말을 필연적으로 함축하는, 그런 점에서 강한 의미로 그런 종말을 예정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입론, 그런 사고, 그런 발상들을 뜻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어떤 순환계가 계속하여 생존하고 지속할 수 있는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오직 특정 목적을 위해 순환계 내부에 존재하는 어떤 요소를 이용/착취(exploitation)하려는 발상이나, 순환계의 지속조건을 초과하면서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개발하고 바꾸어버리려는 사고방식, 그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종말론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단지 
생존과 지속을 고려하지 않고 순환계를 착취하려 한다는 말을 하는지 확인하는 문제가 아닐 것이다. 심지어 그런 말을 강조표시를 달아 강변할 경우에도 실제론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에 약간 과학적 방식의 조작적 정의를 덧붙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것은 목적과 수단을 연결하는 관계 속에 네거티브 피드백이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경우, 혹은 그 관계에 반작용하는 항이 없는 선형적 관계 속에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 정의되고 작동하는 경우, 그 이론은 종말론적이다. 왜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의 이용과 그것을 통한 개발 내지 변환이,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든 내부적 요인에 의해서든 그 개발의 속도를 제한하고 브레이크를 걸며 때로는 마이너스의 방향을 향하게도 할 수 있는 되먹임의 구조나 비선형적 항들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어떤 입론도 실제로는 자신의 목적에 따라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주어진 모델을, 즉 착취와 개발을 그대로 밀고 갈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방사능처럼 뒤먹임하고 싶어도 처리는커녕 접근조차 난감한 경우라면, 이론적 되먹임이 실제로는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이론 종말론적 구조를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사고방식이 순환계의 
운명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 순환계는 종말론적 순간 이전에 이미 예정된 종말을 갖게 될 것이며, 종말 이전에 이미 종말을 맞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종말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종말론이라는 관념 또한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런 종류의 종말론은 대개의 경우 종말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니 종종 그런 종말이 생각되고 말이 되어 나올 경우에도, 그런 종말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부정한다. 종말에 대해 말하지 않는 종말론, 종말을 부정하는 종말론이다. 그런 방식으로 종말론은 종말을 만들어내고, 그런 종말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종말이란 말이 종말론을 규정하는 게 아니라, 종말론이 종말이란 사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 근자에 빈발하고 있으며, 얼마전 일본의 거대한 재난을 야기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거대한 재해들은, 심지어 그것이 어떤 순환계의 종말을 야기할 경우에조차 종말론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종말을 함축하는 어떤 변환의 기획도, 순환계의 착취/이용도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종말은 단지 우연일 뿐이다.반면 구제역으로 인한 동물들의 학살처분, , 돼지의 멸종이라는 종말을 포함하지 않고 있음에도 명확히 종말론적이다. 심지어 그것은 방역이라는 방어와 보호의 논리를 명시적으로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적이다. 왜냐하면 그 방역조차 사실은 판매나 수출을 통해 인간들이 얻을 이익의 계산적인 목적을 위해, 동물들의 순환계를 파괴하는 것을 매뉴얼화된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면, 생산성을 위해, 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공장 같은 좁은 축사 속에 집어넣고 사료를 투입하여 고기를 생산하는 기계로 만들어버린 공장형 목축 자체 또한 종말론적이다. 거기에선 소나 돼지가 다른 것들과 맺는 순환계를, 투입하는 요소와 산출하는 요소 간의 이항적인 관계 속에 집어넣는 방식으로 근본에서 해체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폭발적 힘을 제거하지 못했고
, 앞으로도 그 종말적인 힘을 제거할 수 없을 일본 원자력 발전소의 경우는 종말론이 어떤 식으로 종말을 만들어내는지를 종합적인 형태로 아주 잘 보여주는 경우라고 할 것이다. 효율적이고 값싼’(이는 극히 믿을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용이 인근의 생명체들의 다양한 순환계를 파괴할 가능성은 이미 이론적으로 명확한 것 아니었던가? 그것을 저지할 수 있는 기계적 및 건축학적 장치의 안전성이, 거기에 함축된 파괴와 종말의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연기할 수 있을 뿐임 또한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거기에 더해 시공과 운영상의 오류, 노화 등에 따른 종말의 가능성에 대해 말하던 것들에 대해,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으며, 그럴 일 없다며 반복해서 부정해 오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 3만명에 가까운 일본의 인민들을 죽음으로 밀어넣은 것은 쓰나미가 아니라 바로 그 안전한 원자력 발전소 아닌가? 그리하여 일본 전체를 종말적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는 것은, 그리하여 거기 살고 있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조차 종말론적 상황으로 떠밀어 넣고 있는 것은 바로 현대과학의 秘典과도 같은 원자력의 과학 아닌가? 

이미 방사능 물질로 
오염된 자연과 대지, 대기는 물론, 오염되어 죽은 시체조차 어찌 처리해야 할 줄 모르고 있다는 사태에서 종말론적 상황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직 어떤 큰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거대한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재해가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모든 종말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원자력 과학이나 관료들의 발상에서, ‘원자력 르네상스를 내걸고 그걸 전세계로 팔러다니겠다는 장사꾼 대통령의 태도에서 종말론적 상황을 보는 것은 아직도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그것 또한 종말론의 일부, 종말론적 상황의 일부일 것이다. 

어떤 사태가 닥쳐오기 전에 그것의 징후를 알아보는 자를 선견지명이 있다고 하고
, 사태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알아보는 자를 지혜롭다고 한다. 사태가 닥쳐왔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보지 못하는 자를 눈멀었다고 한다. 그러나 닥쳐올 사태, 아니 이미 닥쳐온 사태를 보고 말하는 자의 입을 막고 그걸 듣는 자의 귀를 가리는 자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까?




(이 글은 수유너머 Weekly에 실린 글입니다.)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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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좌파’, 아마 지금 한국의 보수층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의 하나인 듯하다. 며칠전 동아일보의 한 논설위원은 서울대 조국 교수를 명시적으로 거명하면서 강남좌파를 비판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분당 우파여, 강남좌파에 속지 말고, 자신이 속한 계급을 지지하라!”는 것이 그 글의 결론이었다. 다른 한편 지난달 초순 ‘B급 좌파를 자처하는 한 논객이 조국 교수의 <진보집권플랜>을 비판하면서, “먹고살 걱정 없는 중산층 엘리트가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대다수 인민을 위한 변화라고 과장하여 주장한다며 비판한 바 있었다. 당신은 중산층 엘리트고, 당신이 주장하는 건 민주집권플랜이지 진보집권플랜이 아니라고, ‘진보는 우리 땅이니 저기 당신들 땅(강남!)으로 가라고 비판한 것이니, 단어는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강남좌파에 대한 좌익적 비판이었던 셈이다.

강남좌파 때문에 분당의 중산층이 왼쪽으로 몰려가면 어쩌나 근심하는 우파 논객과 강남좌파의 거짓
진보때문에 진짜 진보를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면 어쩌나 근심하는 좌파 논객, 입장은 상반되지만 강남사람이면, 혹은 중산층 엘리트면, 아니 돈 많은 부르주아 자본가라면 우파적인 입장을 주장하거나 지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것 같다. 그러나 돈 없고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보수당을 지지한다. 노동자들 역시 대부분 진보정당이 아니라 보수당을 지지한다. 반면 맑스나 레닌, 게바라 등 유명한 좌익들은 모두 변호사나 의사 등 돈 있는 집에서 태어나 많이 배운 엘리트들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돈 있는 사람들이 우파가 되는 건 사실이다
. 예전에 강남출신 서울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통계조사에서, 대개 돈 있는 집 자식인 그들의 관심이 주로 돈을 버는 것이었음을 한탄한 적이 있다. 물론 돈 없는 집 자식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돈 없는 사람들이 돈 버는데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 듯하다. 돈 있는 사람들이 돈 버는데 미쳐 있는 것처럼 멍청한 것도 없지 않을까? 돈 있으면, 그 돈으로 인생을 어떻게 잘살까 고민해야 하는 게 좋은 삶 아닌가? 혹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이제 돈 없는 사람들 걱정도 좀 해주고, 그들 위해 좋은 일이 뭘까 고민하고 하는 게 좋은 인생 아닐까?

그저 돈만 아는 부자들이 돈을 더 버는데 좋은 입장으로 쉽게 끌려가는데 반해 그래도 생각 있는 부자들이
강남좌파가 되는 건 이런 이유에서 아닐까? 그래서 나는 강남좌파는 돈 있는 사람 가운데 삶에 조금이나마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사람들을 뜻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생각에 몸이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그러려고 하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또한,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나 이중인격자라기보다는 좋은 생각에 힘들게 맞추어가려고 애쓰는 사람이라고 믿고 싶다. 사실 생각에 몸이 완전히 따라주는 것이야 부처님처럼 완전히 각성한 도인들의 경지 아닌가! 우리 같은 범인들이야 저렇게 사는 게 좋은 것이려니 믿고 생각날 때마다 따라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물론 그저 폼만 재며 자신과 이웃을 속이는 위선도 있을 것이다
. 그런 허세와 위선을 어찌 좋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가리고 숨어서 하려는 위선적 시도조차 없이 노골적으로 자기집단의 이익을 취하는 이명박 정부 주변 우파들의 솔직함이나, 최소한의 품위마저 포기한 채 노골적으로 이익을 탐하는 기업이나 언론사, 대학들의 솔직함을 생각하면, 문제는 그런 위선이 아니라 그마저 사라진 세태에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돈 없는 자 또한 이런 의미에서
좌파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돈 없는 사람들의 삶에 항상 시선을 주는 것을 좌파라고 믿기 때문이다. 못사는 사람이 못사는 사람들의 삶에 항상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자기가 못살아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돈이 있는 없든, 나 아닌 사람들, 못살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이 잘 살기를 바래야 하는 것은, 그게 타인은 물론 자신 또한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는 삶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강남에 살기는커녕 강북에 집도 한 채 없지만
, 그래서 좌파가 된 건 아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집을 사고 강남에 이사를 가도 우파는 하고 싶지 않다. 돈벌고 신세 좀 폈다고, 돈 없는 자들 무시하고 돈만 챙기는 천한 인생처럼 불행한 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 /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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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늘은 인터뷰 두번째 시간! 지난번 불온성에 대해 기존 존재자들 사이의 구획을 깨거나 와해시키는 존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이보그나 박테리아가 불온한 존재라는 말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려요. 


A. 물론 정말 그런가 물을 수 있고, 가령 사이보그가 어째서 불온한가 되물을 수 있죠. 통상 우리는 사이보그란 말에서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기계가 장착된 인간’정도만 떠올리죠. 하지만 사이보그는 그 경우에조차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체를 의미해요. 다시 말해 그것은 유기체와 기계의 구분을 와해시키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중간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계와 도구가 하나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안다면, 그것은 유기체와 도구가 결합된 존재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면 근본적으로 이미 사이보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이란, ‘정상인과 다른’이란 의미로 쓰지만, 무언가에 기대어 사는 자들, 일본 식으로 표현하면 ‘폐를 끼치며 사는 자’들이라 인식돼요. 헌데 우린 일반적으로 남들에게 언제나 기대 사는 자들입니다. 그건 남들에게 선물을 받는 자들이라는 뜻도 되지요. 이점에서 우린 모두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자들만이 장애인으로 분류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장애인이 되게 만드는가? 이는 장애인을 정상인과 분할하는 현실적 조건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장애인의 존재론은 자연스럽게 장애인의 정치학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Q. 이번 강의의 다양한 사례들은 평소 관심 있던 것들이셨나요^^? 
아니면 불온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인지?


A. 둘 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평소 관심 가던 주제이니 모아서 강의하게 된 것이기도 하죠. 그러나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이번 주제에 대해 단서 등을 제공했지만, 이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다루려고 하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이 다른 것으로 되돌아왔지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서 말입니다. 덧붙이면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것은 현실에서 제가 만나고 경험했던 것들을 통해서 제게 끼어든 것이기도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2009년도 도쿄에서 1년간 일본의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연구를 하셨지요? 일본 비정규직 운동판의 여러 활동가들을 만나며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이번 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는지요?


A.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운동 하시는 분들을 몇 분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이 강의를 준비하는 데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지요. 가령 비정규직의 경우, 일본이나 한국에서 비정규직 운동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관심 갔던 노동 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존재론적 차원으로써까지 밀고 올라갔던 거지요.





Q. 수유너머에서 선생님 이름으로 강의를 걸면 매번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건 샘 강의만의 특별함 때문일 텐데요, 어떻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지 물어보면 남세스러우실 테니, 수유너머에서 강의하시는 것에 대한 선생님만의 의미 같은 걸 여쭤볼게요.


A. 학교와 연구실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 밖의 곳에서 많이 하는 편은 아닙니다. 공부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이 많아서 밖으로 안다니는 편이었어요. 강의한다는 것도 활동인데, 요즘 너무 안한다는 생각에 늘리긴 했어요.
연구실에서 강의할 때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나름 알기도 많이 아시고 기대하는 바도 크기 때문에 강의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보다도 가장 긴장을 강하게 하는 강의가 되죠. 그래도 쉽게 하려고는 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으면 안되니까. 무엇보다 같이 생각하고,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긴장이 큽니다.

Q. 그간 선생님의 화두였던 ‘외부’의 사유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A. 외부란, 어떤 문제를 사유하는 방법론적인 전제, 개념이지요. 그것은 모든 것을 외부에 의해 사유한다는 사유의 일반적 방법론입니다. 강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도 외부의 방식으로 불온한 것들의 문제를 사유한다면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실험적 시도입니다.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신청글을 올려주셨어요. 개강일이 기대됩니다. 11일 월요일 일곱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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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최근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홈페이지를 보면 불온함이 주요 화두입니다. 이번 강좌의 제목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고, 3월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도 그렇습니다. 단행본 <불온한 인문학> 총서도 기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불온함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불온성이 없는 인문학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문제의식에서 연구실 회원들이 모여 몇 가지 활동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은 책 <자본론>과 <안티-오이디푸스>를 통해 가정과 국가, 자본 등 이른바 ‘안정성’의 토대와 대결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6개월간의 세미나와 강의를 통해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사유하는 장을 만들고자 모였습니다. <불온한 인문학>이 불온성을 통해 인문학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면, 이번 봄강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불온성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불온성을 바탕으로 존재론을 사유하려는 시도입니다. 강좌이다보니 7주간 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강의하는 형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유너머N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프로그램들이니 이 둘은 연결되는 점이 있겠지요.


Q. 안녕학세요. 이번 강좌의 반장을 맡게 된 호연입니다. 저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이고, 공대생이라 ‘불온성’, ‘존재론’ 등의 용어가 낯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맥락에서 이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미리 수강을 준비 중인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A. 불온함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 같은 것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것이나 이유, 사고방식이나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어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특히 이번 강의는 존재 자체로부터 불온성을 함축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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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이란, 가령 휴머니즘을 비판했던 후기의 하이데거의 경우를 보아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가지는 인간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차라리 인간에 대해서조차 인간 아닌 것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인간 아닌 것’을 하나로 묶어 다룬다면, 인간중심적 접근과 대칭적인 것이 되고 말 겁니다.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각각 특이성을 갖는 존재자들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 특이한 존재자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존재의 특이적 요소를 우리를 포함하는 존재 자체의 요소로 사유하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선택한 특이적 존재자들은 우리가 익숙해있는 것들을 횡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존재 자체를 익숙한 내부성이 아니라 낯선 외부성을 향해 열어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로써 존재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저에게 단지 철학적이기만 한 것도, 단지 사변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기 이전에 정치적이고, 사변적이기 이전에 현실적입니다. 가령 장애인을 통해 사유되는 존재란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 운동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와 처음부터 결부가 되어있지요. 또한 역으로 이런 존재론을 통해 그런 운동이나 정치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소급해서 근본적으로 다뤄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먼저 1강에서는 불온함이란 무언지, 우린 언제 불온함을 느끼는지, 그런 질문에서 강의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후 불온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끼 치며 설명하기보다는, 불온함을 야기하는 존재, 불온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겁니다.



Q. 각 주의 제목들이 특이합니다. 저마다 이색적인 주제의 강의가 배치돼 있는데요, 장애인, 프레카리아트, 사이보그, 박테리아, 패티시즘. 모두 얼핏보면 특이하고 수적으로도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몇 가지 빼고는 한 번도 연결지어 본 적 없는 주제들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묶기에는 인간 아닌 것(박테리아)이 끼어 있고, 정치적 연대를 위해 모이기에는 민망한 특이성(패티시즘)이 끼어있습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강의가 매혹적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을 선택하고 연결하게 되셨는지요.





A.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일종의 ‘중간적인’ 존재자들이라는 겁니다. 기존 존재자들 사이의 구획에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구별을 깨거나 와해시키거나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에요. 저는 이것이 불온함을 사유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불온한 자들이지요.


Q. 불온한 자들이 위와 같은 특이성을 가진 이들이라고 하지만, 운동이나 정치에서 누구보다 그들이 주체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당사자주의’ 가 떠오르는데요.


A. 전 당사자주의가 잘못된 운동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특이성은 이와 다른 것입니다. 이 특이한 존재자들이 하나같이 나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에서 나에 해당되는 것, 바로 나의 문제,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모든 특이성이 그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특이성, 존재의 특이성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에 대한 ‘각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일부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거지요. 이는 제가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하는 사고방법을 통해서 밀고 나갈 겁니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고, 우리 모두가 프레카리아트
,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패티시스트가 돼야 한다고도 말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당사자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당사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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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두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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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은 설두 중현 스님이 선사들의 화두 100개를 골라 송(頌)을 붙인 것(『설두 송고』)에다, 원오 극근 스님이 수시와 착어, 평창을 달아 만들어진 책이다. 수시는 각 ‘장’의 요지를 간결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부분이고, 착어는 화두나 송의 구절마다 논평을 한 것이며, 평창은 화두와 송에 대한 설명이다. 통상 벽암록에 대한 해설을 자처하는 책들은 거기서 다루는 화두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건 『벽암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긴 하지만, 원오 스님이 쓴 수시나 착어, 평창을 보지 않고선 『벽암록』이란 책을 보았다고 하긴 어렵다.

내가 『벽암록』에 대해 가진 인상은 여러 가지지만 모두 극단적이다. 그 책은 “송대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들 하는 평처럼,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아름다운 책이었다. 또한 가장 심오한 책이며, 가장 고준하며, 가장 유머러스한 책이었다. 동시에 그 책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황당한 책이었다. 황당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너무도 강한 감동 내지 감응을 주는 책--이런 책이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모습입니까?”([착어]하북이라 해도, 하남이라 해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 있지 않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열렸구나.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 침 뱉으려면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까지 퍼다 줄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로다. 알겠는가?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여기서 앞의 스님은 조주스님에 대해 물었는데, 조주는 조주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웬 썰렁한 농담?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불법을 파멸할 뿐이다. 마치 물고기 눈알을 구슬에 비하는 것처럼, 닮기는 닮았겠지만 같지는 않다.” 질문에는 원오의 착어대로 가시가 있고, 조주는 이 가시를 품은 이 질문을 슬며시 받아넘기며 외통수를 날린 것이다. 조주 자신의 본래면목이 무언지 묻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시피 조주성(城)의 네 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이 대답이 지엽말단이나 동문서답이라고 생각할까 싶은 노파심에 원오는 덧붙인다.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하고. 그러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화두)”라고 하면서도 다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주장자로 후려친다. 아니,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거다. 어쩔 도리가 없게 만드는 것. 이런 식으로 선사들의 말들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깨주고,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뽑아버린다. 추리하고 생각하는 모든 근거들, 모든 분별의 근거를 뭉둥이로 후려치고 고함소리로 깨버린다. 혹은 조주나 원오처럼 우주적인 스케일의 유머로 날려버린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은산철벽 앞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떠민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그 기준이 무언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근거나 기준이 되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어째서 옳은 것일까? 그것의 근거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다른 근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 출발점은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나의 생각, 나의 믿음이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선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내가 옳다고, 아니 좀더 격하게 표현하면, 나만이 옳다고 하는 믿음.

부처가 말하는 ‘정견(正見)’이란 내 견해를 올바르게 세우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생각에 귀기울이고, 다른 판단, 다른 가치에 마음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내 기준을 떠나서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상’을 버리는 것, 혹은 ‘무아(無我)’가 지혜(般若)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자신에게 묻는 학인들에게 그들이 옳다고 믿는 모든 교의나 견해, 근거를 깨주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가령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땐 “없다”고 대답하고, 없다고 믿는 사람이 물을 땐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는 묻고 대답하는 말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이 아마도 원오로 하여금 『벽암록』을 쓰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가장 근본이 되는 성스런 진리를 묻는 양무제의 물음에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답한 달마의 대답에다가 “꽤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땅으로 날아가 버렸구나. 매우 명백하다”면서 착어를 붙이고 있는 것일 게다(물론 다시 “명백하다”고 덧붙이지만). 이런 점에서 『벽암록』은 그 어느 책보다도 노파심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선 어느 하나의 확실한 근거나 교의에 안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경전 안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경전에 기대어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의 말에 기대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가라”고 했고, 조주는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라”고 했다. 사실 경전이나 훌륭한 책들에 안주하려 할 때, 그 책들이 거대한 장애가 되고 위대한 저자들이 독단의 원천이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종지를 보고 문자를 넘나들지 못하면 문자는 어느새 죽은 문자(死句)가 되고, 가르침은 죽음의 소식이 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불법을 묻는 질문에 손가락 하나를 펴는 것으로 대답하던 구지선사는, 자기 대신 손가락을 들어 말하던 동승의 손가락을 무참하게 잘라버린다. 그리곤 불법이 무언지 다시 묻는다. 무심코 없는 손가락을 들어 말하려는 순간 그 동승은 깨달음을 얻는다. 『벽암록』이 수많은 선사들의 말들을 다시 전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던 그들에게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하고 소리치고 방망이를 날리면서도, 그 종지가 드러나는 지점을 슬며시 알려주는 것은, 그 말들을 죽은 문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구(活句)로 만들고 싶은 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선가(禪家) 최고의 보물’로 만든 이유였을 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아무 맛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저 선사들의 세계로 무지한 우리 중생들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무언가 강밀한 힘을 방사하며 험준한 절벽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이해할 순 없지만 강한 감응을 주는 책이란 말을 실감한다면, 좋든 싫든 이미 그 힘의 자장 안에 들어간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은 그 철벽을 오르는 밧줄이 되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이 책은 스스로 자기가 제거하려던 것이 되고 마는 역설적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원오의 제자였던 대혜 종고는 ‘종문의 보물’이라는 스승의 이 책을 불살라버린다. 이, 이런 과격한···-.-;; 물론 다행히(!) 다른 필사본이 남아서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로 하여금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벽암록』은 읽고 이해하려 해선 안되는 책, 선가의 말로 ‘알음알이’로 헤아려선 안되는 책이다. 이해할 수 없는 감응 속에서, 이해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의문과 의정(疑情)만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을 증폭시키고 응축시켜 ‘아상’을 넘어서는 에너지로 변환시켜야 하는 책인 것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 다리만 볼 뿐, 돌다리는 보지 못하는구먼.” “어떤 것이 돌다리인가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말해보라. 그대는 어느 다리를 건너고 있는가?


글 /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책 속으로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쇠 가시로다.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동산스님이 말했다.
“삼(麻) 세 근이다.”
---분명히 떨어진 짚신이다. 괴목나무를 가리켜 (악담을 하고는) 버드나무를 꾸짖는 꼴이구먼. 저울질을 하는구나.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입을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답변을 제법 많이 했다. 어떤 이는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삼십이상을 갖춘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장림산 밑에 있는 대나무 지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 근”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혓바닥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말저말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때에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 하는데 어떤 스님이 이를 물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하기도 하고, “동산스님이 동문서답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에 동산스님이 우회해서 대답했다”하기도 한다. 더 썩어빠진 놈들은 “이 삼 세 근이 바로 부처다”하니, 전혀 관계가 없다 하겠다.

너희들이 만일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참구하여도 꿈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말이란 도를 담는 그릇인데 옛사람의 뜻은 전혀 모르고 다만 말만 따지니 어찌 핵심이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옛사람의 “도란 본디 말이 아니나 말로 말미암아 도가 나타나는 것이니, 도를 깨닫고 나서는 곧 말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하략)(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벽암록』, (상), 장경각)



추천도서

원오 극근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벽암록』, (상)(중)(하), 장경각(『벽암록』의 완역본.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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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우파는 부패로 망하고,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맞아’라는 감탄보다 강했던 것은 가슴이 뜨끔한 느낌이었다. 특히 이 말은 우파가 부패로 망한다는 것보다는 좌파가 분열로 망한다는 말을 겨냥하고 있어서 더 그랬을 것이다. 맞다. 좌파는 끝없는 분열로 인해 망했다. 이론적 관점이나 노선의 차이가 조직적 분열로 이어지고, 전술이나 정책의 차이가 조직내 분열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직적이고 정치적인 힘은 약화되고, 애초에 상대하던 ‘적’ 이상으로 대립하게 된 과거의 동지들과의 대결에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그랬고, 다른 나라에서도 그랬다.


이 말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했던 한 인터뷰 때문이었다. 비정규직 노동운동에 대한 관심에서, 건설노조에서 20년 이상 일을 해온 한 활동가의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인생을 몽땅 ‘바쳤던’ 그 운동을 떠나려고 한다고 한다.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온갖 정파들이 들어와서 이젠 어떤 것도 하기 어렵게 되어서다. 가령 타워크레인에 올라간 사람이 지금 내려와야 하는지 여부를 두고 14시간씩 논쟁을 해도, 누구도 양보하지 않기에, 더구나 그 뒤에는 어디나 정파의 주장이 그림자처럼 버티고 있기에,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는 게 흔한 일이라고 한다. 그래서 투쟁이란 적과 대결하며 그때마다 무언가를 결정하며 출구를 찾아가야 하는 것인데, 사실은 내부에서 지치는 논쟁만 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또 어떤 사안에 대해 과감하게 협상을 해서 밀고 나가면, 거의 모든 정파로부터 이런저런 비난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나서서 문제를 풀어갈 수도 없고, 의욕도 점차 사라져갈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매우 신실한 감응의 이 헌신적 활동가는 이제 자신이 20년 이상 해온 운동을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을 게 틀림없음에도 인생을 걸고 활동하던 것을 그만두려는 한다는 얘기에서 가슴 아픈 안타까움을 느끼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노동운동을 떠난다고 했을 때, 그 운동에 어떤 희망이 남을 것인지 알기 어렵다. 정파적인 이해관계를 둘러싼 적대적 감정과 논쟁이 그것을 대신한다면, 노동운동이 노동자나 민중들의 희망이 되기는커녕 노동운동 자신마저 희망을 갖기 어렵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정말 ‘니힐한’ 감정이 밑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상황이 건설노조나 비정규직 운동에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새삼 가슴 아프게 돋아났던 것은 그래서일 것이다.


 

2

사실 따지고 보면 좌파의 분열은 오래된 이론(!)과 역사를 갖고 있다. 오랫 동안 혁명운동의 전범으로 삼았던 러시아 혁명의 경우, 당 규약을 둘러싸고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되면서 시작되었고, 그 대립은 혁명이 끝나도록 지속되었다. 맑스에 대한 해석조차 이런 관점에 의해 지배되었던 것 같다. 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철학과 리카도를 정점으로 하는 정치경제학, 그리고 오웬이나 푸리에 등으로 대표되는 ‘공산주의’ 사상, 이 셋은 레닌이 명시적으로 지적한 이래, 맑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이자 구성요소이라고 간주되어 왔다. 이른바 ‘정통적’ 맑스주의는 맑스의 사상이 헤겔의 변증법적 사유를 유물론적 발전시킨 철학적 적자임을 강조해왔다. 또한 그 이상으로 맑스가 과학으로 정치경제학을 발전시킨, 그런 점에서 스미스와 리카도의 적자임을 강조해왔다. 반면 오웬이나 푸리에 등에 대해 말할 때는 그들의 사회주의가 갖는 공상성과 맑스의 그것이 갖는 과학성을 대비하면서, 그들과의 차이를 강조해왔다. 아니, 그들의 비과학성을 비난(!)해왔다. 헤겔철학이나 정치경제학에 대해선 맑스의 연속성이 강조되었다면, 이전의 사회주의에 대해선 그 불연속성이, 단절이 강조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맑스주의가 계급성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려고 함을 생각하면, 여기서 보이는 거리감각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헤겔이나 리카도의 사상이 부르주아적임에 반해, 오웬이나 푸리에는 프롤레타리아적이라고 하긴 어려울지 모르지만 적어도 노동자들의 입장, 혹은 백보 물러나 말해도 소부르주아적인 입장에 선 것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즉 맑스주의가 발 딛고 있는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에서 보자면 거기가 멀 뿐 아니라 적대적이라고 해야 할 철학이나 경제학에 대해선 연속성을 강조하면서 그 근친성을 주장하는 반면, 그로부터 거리가 가까운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선 불연속성을 강조하면서 단절하고자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맑스 자신은 자신의 작업이 ‘정치경제학 비판’임을 반복하여 강조하면서 그런 제목의 책을 썼고, 심지어  「자본」의 부제 또한 그런 제목을 붙여놓았지만, ‘정통 맑스주의’에서는 맑스를 정치경제학의 완성자로 위치지웠다. 또한 「헤겔 법철학 비판」 등에서 보이듯이 헤겔 철학에 대한 비판이 맑스적 사유의 출발점이 되었음에도, ‘정통 맑스주의’는 그를 헤겔 변증법의 계승자로서 철학자 안에 위치지웠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에 대해선 공상적이고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로 비판하며 축소되어선 안될 거리를 만들었다.


이는 물론 계급을 떠나서 배울 것이 있다면 누구든 친구로 삼아야 한다는 것, 계급적으로 얼마나 가까운가 여부와 사유가 얼마나 깊은가 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론이나 사상을 계급과 무관하게 실증적인 어떤 ‘과학성’이나 깊이 등만으로 따지는 통상적인 철학이나 이론이라면 모르겠지만, 모든 것을 계급성을 척도로 보고자 하는 사상이라면 이는 생각할수록 기이하고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유심히 살펴보면 레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레닌의 글은 항상 누군가 구체적인 비판의 대상을 겨냥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령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에 대한 것은 별로 찾아보기 힘들다. 글의 양으로나 비판의 강도로나 가장 많고 격렬한 것은 대개 계급적으로 그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 멘셰비키처럼 한때 자신이 동료였던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이 역시 생각해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긴 하다. 그의 글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반적’ 비판을 하려는 게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확히 하려는 것이었기에, 논란은 항상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다투던 다른 견해를 비판하며 자신의 논지를 세워야 했을 것이고, 그 다른 견해들이 유사해보일수록 자신의 주장이 더 타당함을 설득해야 했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가까이 있는 주장일수록 더욱 강하게 비판해야 했던 것일 테고, 계급적으로 다른 주장은 크게 반박할 이유도, 가치도 없었던 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글들에서 견해의 차이가 일종의 ‘적’으로 취급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게다. 견해 차이, 생각의 차이를 적대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태도, 혹은 무의식적 사고방식이 전면적임 또한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맑스주의적 좌파의 중요한 전통이 되었다. 나아가 이런 전통은 레닌주의의 ‘성공’으로 인해 맑스주의의 ‘정통’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역으로 거슬러 올라가 맑스의 사상에 대해서조차 가까이 있는 입장일수록 더욱 선명한 선을 그으려는 태도로 귀착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견해의 차이에서 ‘적’을 보는 적대의 정치학이 좌파들 내부에 정상적이고 정당한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3

그렇지만 정파의 난립을 그저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또한 각각의 정파들은 그 나름대로 존재하게 된 이유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일단 존재하는 한 계속 존속하려는 힘을 갖고 있기에, 비난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무력감과 니힐리즘이 찾아오는 것은 역으로 이 때문이다). 그리고 좌파만이 아니라 인간들이 모여 사는 어디나 그런 집단의 분할과 분열, 대립과 적대는 있게 마련이다. 난점은 정파적인 대립을 넘어서 자신의 생각이나 자기 정파의 입장을 다시 생각하고 바꾸려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견해를 ‘관철시키는’ 문제로, 자신 주장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문제로 본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좀 더 나은 결론을 얻기 위한 재료로 삼기보다는 자기 주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혹은 ‘적’으로 생각한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토론이 적절한 답을 찾는 게 아니라 이견을 격파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는, 그러나 상대 역시 그렇기에 끝날 수 없는 논쟁의 장이 되어버리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나는 대립이나 분열 없는 세계, 화해와 조화로 가득찬 세계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 만큼, 이런 대립과 비판 없는 운동이 있을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역으로 이런 대립과 분열이 부딪치면서 융합될 때 발생하는 에너지가 운동의 중요한 자원이 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차이와 대립, 분열을 에너지로서 긍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차이나 대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밀고나가려 할 때에만,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좀 더 적절한 길을 찾는 계기로 생각할 때에만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그 차이와 대립을 자신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능력의 문제기도 하다. 능력이란, ‘수용능력’을 표시하는 capacity란 말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무엇보다 자신과 다른 것, 이질적인 것을 수용할 수 있는 폭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보자면, 정파적인 대립과 적대로 인해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란, 그 정파들의 무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수용능력이 그것밖에 안 되는 것이고, 그릇이 그 정도 크기밖에 안 되는 것이다).


반대로 차이나 이견, 비판이나 대립을 척결하고 제거해야 할 적으로,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는 한, 대립이나 비판은 적대로 귀착될 수 있을 뿐이다. 그 경우 비판은 분열의 이유가 되고 분열은 분산과 고립, 궤멸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 같다. “좌파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가슴 아프게 박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을 게다.

 


글/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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