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월 동안 발터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읽는 단기세미나를 진행합니다.

 

작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벤야민프로젝트>세미나를 통해 발터 벤야민 선집 1~5, 수잔 벅 모스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등을 읽었습니다.

이 책들을 읽는 동안 벤야민의 여러 개념들 사적 유물론, 꿈과 깨어남의 변증법, 구제비평, 성좌 –에 익숙해지면서 예술과 철학을 넘나드는 벤야민의 매력에 푹 빠졌던것 같습니다.

 

하지만 벤야민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초기작이자, 교수자격 논문이었던 (이해 불가능한 논문으로 평가되어 교수자격은 신청 거부 당하지요^^;)

독일 비애극의 원천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서 벤야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과 독일 바로크 비극을 구분하며 알레고리' 개념을 제시합니다. 이는 벤야민의 이후 저작들에도 계속해서 등장하고, 발전되는 개념이지요.

 

독문과에서도 매니악한 취향을 갖지 않으면 읽지 않을 것 같은 바로크 드라마가 소재이고, 이해 불가능한 논문으로 평가되었다는 점이 아주 사알짝(?) 걸리긴 합니다만^^; 힘들더라도 읽어 놓으면 다른 많은 벤야민의 저작들을 읽고 감동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서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미나 장소와 일정>

언제 : 714~ 825, 7주간 매주 30~40 페이지씩

몇시 : 매주 목요일 3~ 5

어디서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에서 진행됩니다.

문의 : 꾸냥 010 4515 2725

: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 김유동 옮김 한길그레이트북스

 

 

함께하실 분들은 아래에 댓글 달아주시고, 7143시에 인식비판적 서론 (p.35 ~ p.80) 부분을 읽고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으로 오시면 됩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세미나 게시판 원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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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벤사이드(Daniel Bensaid, 1946-2010)

 

 

몇 해 전 모스크바에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늦은 밤, 모스크바에서 가장 화려한 대로 중 하나인 트베르스카야 거리에 수많은 인파(주로 노인들)가 몰려드는 것을 보았다.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던 그들은 붉은 깃발을 들고 있었고, 그 가운데는 책이나 영화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레닌의 사진도 걸려있었다. 한 피켓에는 “레닌의 당, 인민의 힘”(구 소련 국가의 가사)이란 문구도 적혀 있었다. 러시아 공산당의 기념 행진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 날이 10월 혁명 기념일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잠시 흥분과 감흥에 사로잡혔던 내게, 그 광경을 함께 지켜보던 어느 러시아 젊은이의 한 마디는 우리 시대의 아이러니를 증명해 주는 것 같았다.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레닌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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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조국’ 러시아에서도 레닌의 복귀는 아주 느린 속도로, 때론 구식 공산주의자들의 생경한 구호 속에, 때론 당과 무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충실한 이론가들 사이에서만 대단히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사정은 트로츠키도 마찬가지다. 소비에트 연방이 공식적으로 소멸되면서 트로츠키의 저작들이 속속들이 복간되고 관련 서적들이 출판됐지만, ‘체제화된 혁명’이 남긴 피로는 혁명에 관해서라면 그 어떤 기억도 상기시키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다.

 

레닌도 트로츠키도 기억하기 ‘난감한’ 지난 역사일 뿐이다. 그런 러시아가 까마득히 잊고 지내던 ‘혁명의 추억’을 되살려낸 것은 바로 얼마 전부터이며, 지젝을 위시한 서구의 새로운 좌파들이 러시아에 소개된 이후의 일이다. 올해 사망한 다니엘 벤사이드의 이름도 그 곁에서 자그마한 반향을 자아내고 있다. 이들과 더불어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혁명의 오랜 추억들이 혁명의 조국에서 ‘낯선 기억’의 딱지를 붙인 채 재조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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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이라는 사건

 


다니엘 벤사이드는 프랑스 트로츠키 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이미 열여섯 살에 공산주의 운동에 투신한 후 줄곧 좌파 혁명 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런 벤사이드에게 레닌을 되살려낸다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은, 이제껏 그가 몸담아 왔던 혁명 운동의 당연한 대의에 해당하는 일이다. 물론, 혁명의 ‘빛나는 추억’을 되풀이하고 기념하는 것으로서 레닌의 반복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벤사이드가 되풀이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의 추억’이 아니라 ‘레닌이라는 사건’, 레닌을 통해 재점화되고 불러일으켜질 수 있는 혁명이라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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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으로서의 혁명을 사유하기 위해 벤사이드가 참조하는 것은 발터 벤야민이다. 벤야민은 <역사 철학 테제>(1940)에서 근대의 시간을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라 정의했는데, 이는 현실을 계량 및 예측 가능성을 통해 파악하려는 근대적 사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빈 상자를 쌓듯 시간을 적절히 배분하거나 이어붙일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 과정이 응축점 없이 단순히 산술적으로 조합되는 매개물이란 표상에 기초해 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모순들이 아무리 결집되더라도 혁명이라는 사건은 일어날 수 없다. 왜냐하면 무너질 정도로 높게 쌓인 블록들을 해체시켜 바닥에 깔면 위험성이 제거되듯 시간적으로 응집된 모순들도 개별적으로 해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의 과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누적되고 중첩되는 모순들은 쉽사리 해소될 수 없이 뒤얽혀 폭발의 순간을 향해 진전한다. 그것은 미리 계산할 수도, 예고할 수도 없는 순간의 사건이다. 혁명을 통과하는 현실은 이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시공(時空)을 열어젖힌다. 그러므로 벤사이드에게 혁명은 ‘정상적인’ 현실 과정을 갑작스럽게 폭력적으로 중단시키고 변형시키는 급변의 순간을 말한다.

 


벤야민의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1921)나 데리다의 <법의 힘>(1990)을 접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굳이 벤사이드를 통하지 않고도 이해할 것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좌파 진영에서 나왔던 비판적 반성의 일부는 1917년 혁명을 제도나 당조직, 국가 형태의 차원이 아니라 사건의 형태로 되돌려야 한다는 데 바쳐졌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을 스탈린의 관료제 국가 장치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취해진 불가피한 판단이기도 했다. ‘실패한’ 혁명을 되살리기 위해 혁명의 기원으로 소급해 들어가 ‘실패한’ 지점들을 캐물었을 때, 늘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제도와 조직, 국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미처 다루지 못했고 스탈린이 실효적으로 작동시켰던 지점이며, 레닌은 그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었다. 국가를 타도하고 소멸시키기 위해 활동했던 레닌이 국가를 떠맡아 운영해야 하는 위치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지난 90년대에 좌파 진영에서 레닌에 대한 언급이 금지되었던 까닭이 여기 있다. 그러나 벤사이드는 좌파의 좌초 지점 역시 바로 거기, 레닌의 이중적 입장을 분석하고 읽어내기보다는 사유하지 않고 회피해 버렸다는 사실에 있다고 역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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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알랭 바디우는 역사적 공산주의의 실패를 경직된 일당 전제주의로부터 찾는다. 하지만 군대같은 규율로 무장한 당조직은 내부의 민주적 요소들을 갉아먹고 고사시킴으로써 결국 공산주의마저 파멸시켰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자크 랑시에르는 민주주의를 국가의 형태로부터 찾지 않는다. 정치의 모든 제도화된 형태는 일종의 자격 부여 체제로서 ‘배제’를 통해 운영되기에 부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바디우나 랑시에르는 혁명과 민주주의를 사건적 계기 속에서 사유한다는 점에서 벤사이드와 다르지 않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조직과 형태, 국가 등의 제도적 차원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태도가 혁명을 구체적으로 사유하는 것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소련의 경험을 반성하며 좌파가 모든 책임을 당과 국가에 미루고 한발 물러서는 동안, 우파는 그 ‘오물의 한 가운데’에 들어감으로써 결국 권력을 장악해 버렸다(그 치명적 결과가 신자유주의의 전성시대다). 제도를 비판하며 실패의 교훈을 되새기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비판과 성찰의 '의연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혁명은 어느새 신기루가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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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정치를 시작하라

 


좌파의 이런 태도는 역사적으로 유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놀랍게도 멘셰비키가 취했던 이중 혁명론 역시 이런 논리 속에서 재구성된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1단계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를 이룰 때까지 부르주아지에 조력한 다음 궁극의 2단계 혁명, 공산주의 혁명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입장에서 우리는 좌파의 현실 회피주의를 찾아낸다. 1905년 당시, 혁명은 예측 가능한 역사적 수순이므로 부르주아지가 그 밑바탕을 마련해 줄 때까지 기다리라는 입장은 현재의 좌파가 취하는 의연함과 얼마나 멀리 있는가. 적들에게 권력을 순순히 양도하고 ‘혁명의 이론에 따라’ 역사의 컨베이어 벨트가 혁명을 전달해 줄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고 있어야 하는가. 벤사이드는 말한다. “당의 매개를 제거하라. 그러면 당신은 무(無)-당의 일당인 국가를 갖게 되리라!”(<영원한 스캔들>) “당(운동, 조직, 연맹, 당 등 주어진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이 없는 정치란 대부분의 경우 정치 없는 정치로 귀결한다.”(<도약! 도약! 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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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사회주의의 좌절은 분명 경화된 당조직과 부패한 관료제 국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당과 국가를 전혀 배제해 버린다면 그것은 정치의 파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일상의 모든 곳에서 정치가 작동한다고 외치는 좌파들의 목소리가 옳은 것과 마찬가지로 전통적 정치의 장인 제도에서도 정치는 여전히 작동 중이기 때문이다. 레닌이 호출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혁명을 향해 달려간다면 그 어떤 곳도 빼놓아서는 안 된다. 정치는 현실의 모든 지점에서 고려돼야 하고, 어떤 순간에서도 터뜨려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연구하는 가운데 이뤄진다. 혁명이라는 사건, 도약을 마주치기 위해 우리는 임의적으로 방기하는 어떤 순간과 장소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벤사이드의 이 주장에서 우리는 연속 혁명(트로츠키)의 반향을 듣는다.

 

 


지금 좌파는 대중을 조직화하는 문제에서 물러나 관조적 태도를 취하는 데 익숙하다. 당과 국가라는 골치아픈 문제와 만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좌파가 사건으로서의 혁명을 근본에서 다시 사유해야 한다면, 어째서 당과 국가는 예외로 두어야 할까. 특히 조직화의 첨점으로서 당에 관해, 좌파는 처음부터 다시 사유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레닌을 불러내, 다시 그와 마주쳐야 하는 절실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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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 2010년 12월 중앙대학교 대학원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제목과 구성을 약간 바꾸어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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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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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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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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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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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연구실 회원 뿐만이 아니라 해당 주제에 관심 있으신 모든 분들에게 열린 토론의 자리입니다.

 

 

벤야민의 독특한 이론구성 방법론에 대한 고찰!

이번에는 ‘이론가는 왜 바보여야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홍중 선생님께서 발표해주십니다. 김홍중 선생님은 2009년에 출간된 『마음의 사회학』으로 인문사회학계와 문학계, 그리도 독서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촉발한 탁월한 연구자이십니다. 다음 화요일(26일) 김홍중 선생님께서 발표해주실 글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논문은 이론가로서 발터 벤야민이 보여준 독창적 이론구성의 가능성, 즉 미학적 이론의 가능성을, 개념의 체제와 대비되는 감각의 아나키에 대한 그의 방법론적 고려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개념의 체제’와 ‘감각의 아나키’를 대립시키고, 벤야민의 사유가 후자에 기초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차원을 설명함으로써 보여준다. 첫째, 벤야민의 개념들이 갖고 있는 풍경적 성격. 둘째, 벤야민의 성좌적 제시의 방법. 셋째, 상상력이 아닌 파상력의 체험에 기초한 이론적 체험. 요컨대 벤야민에게 이론적 체험이란, 세계의 다양성의 개념적 정리가 아니라 그것의 혼돈과 직관적으로 대면하면서 그 혼돈을 감성ㆍ미학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벤야민은 이론가의 ‘몸’을 주요한 이론적 체험의 매체로 설정한다. 이론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감각적 체험으로 하는 것이며, 바로 이런 이론가의 표상이 ‘역사의 천사’로 형상화된 바보의 형상이다. 우리는 이론의 진정한 체험이 세계 앞에서의 경악, 혼돈, 위기, 파국과 같은 부정적인 체험인 동시에, 이념이나 개념의 수준이 아닌 감각적 체험임을 이를 통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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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도서관에서 문헌을 뒤지는 벤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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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 <백치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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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읎다:....(응? 이건..왜...? --;)

 

시간: 2011년 4월 26일 화요일 저녁 7시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희동 소재)



발표자 : 김홍중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토론자 :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참가비 :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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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2가 출시된 11일, 뉴욕 피프스 애비뉴 애플스토어는 밤 늦은 시간까지 인산인해를 이뤘다. 두 시간 넘게 줄을 서야 매장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인파는 계속 몰려들었다. 애플에 따르면 일부 매장에서는 아이패드2를 사기 위해 늘어선 줄이 지난해 아이패드 출시 때보다 두 배 이상 길었다고 한다. 이날 아이패드2를 가장 먼저 구입한 사람은 러시아에서 온 정보기술(IT) 전문가였는데, 그의 행운이 단지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 사실 그는 전날 낮부터 비를 맞아가며 28시간 동안 줄을 선 결과였다는 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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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플을 선두로 하는 디지털 아이템들에 사람들이 미친 듯이 열광하고 있다. 그 작고 앙증맞은 기기들은 가볍고 편리한데다가 또 어찌나 섹시한지! 콤팩트한 디자인, 쉽게 흠집이 나지 않는 강철 유리 커버에, 매끄럽고 광택이 흐르는 피부의 감촉은 부드럽게 손안에 감겨오기에 충분하다. 아! 만지고 싶어, 소유하고 싶어! 널 내 품에 넣고야 말겠어! 한 달 치 월급을 쏟아부어 마침내 손에 쥔 그 소중한 것을 지하철 무릎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마치 보들레르의 ‘여행으로의 초대’에 응답하듯, 온통 보랏빛과 금빛의 세상, 사치와 고요, 관능뿐인 세계로, 그 환상적인 판타스마고리아로 넋을 잃은 채 빨려들어간다.

 

차가운 금속성이 뿜어내는, 공장의 조립라인에서 막 건져올린듯한 기계 생산물의 아름다움에 이토록 매혹당한건 우리가 처음은 아니었다. ‘신즉물주의’라고 불리었던 1920년대 독일의 사진가들은 이 기계의 외관에서 새로운 시대의 미학을 발견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는 1차 대전이 끝난 1919년부터 히틀러에게 권력을 내주게 된 1933년까지의 시기, 즉 ‘바이마르’ 시기의 독일이었다. 독일의 산업화는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나 프랑스와 같은 다른 서유럽의 국가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늦은 시기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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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의지가 충만했던 온건 좌익의 사회민주당은, 여러 새롭고 긍정적인 정치제도들을 도입해 신생국 독일의 좌표를 정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정치제도의 개선이 아니라, 시급한 경제문제의 해결이었다. 1,320억 마르크의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패전국 독일이 아니라 승전국이었어도 갚지 못할 금액이다. 공화국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돈을 찍어’ 해결하는 최악의 방식을 선택했고, 그에 따라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인플레에의 늪에서 허덕이는 공화국을 건져주었던 구세주는 미국이었다. 미국이 독일에게 돈을 빌려줌으로써 경제가 살아나도록 도와주면, 독일은 그 돈으로 공장을 돌리고 산업을 일으켜서 영국과 프랑스에 배상금을 갚아나갈 수 있도록 하자는 것. 미국은 유럽 경제를 살려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고자 했고, 유럽 경제가 살려면 독일이 살아나야 했으니, 모두들 만족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으리라. 1923년 미국의 경제적 원조로 독일은 ‘통화 안정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동시에 여러 분야에서 미국의 강한 입김이 독일에 영향을 주었다. 이런 경향은 구체적으로는 ‘과학기술 낙관주의(Technikoptimisumus)’로 발전했다.

 

특히 미국에 대한 긍정적 시각은 헨리 포드(Henry Ford, 1863-1947)의 자서전을 통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열광적 반응을 유도하기도 했다. 전쟁을 겪은 독일인들은 처음에는 기술, 과학, 산업 등에 적개심을 지니고 있었으나, 포드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도입된 ‘과학낙관주의’로 지난날 지녔던 과학부정론이 눈 녹듯 사라졌을 뿐 아니라, 본격적인 과학숭배로 발전했다. 사진기는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환상 속에서 도시주의와 기술적 유토피아니즘’을 탄생시키는 주요 매체였다. 이 사진들에는 그 때까지 기술을 대하는 적대적인 태도, 공포의 그림자가 이젠 거의 행복감에 가까워진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즉물주의를 대표하는 사진가 랭거 파치(Albert Renger-Patzsch, 1897-1966)는 이 작품들을 담은 사진집 『세상은 아름다워 (Die Welt ist schön)』(1928)를 출간했다. 그의 사진들은 기술적 풍경을 대상으로 하여, 그 일부분을 극단적으로 자르거나, 날카로운 초점으로 형태를 묘사하고, 혹은 다양한 부감법을 사용하거나, 명암을 극대화시킨 드라마틱한 구성 등을 지닌 독특한 기법을 통해 산업화되어가는 근대 세계를 ‘객관적으로’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치는 각 소재의 독창적 형태에 관심을 쏟으면서, 자연은 물론 산업에서도 그런 미학을 추구하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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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기계의 낭만적 풍경화’라고 불린 이 사진들은, 공장과 나란히 배치되어 자연스러운 풍경화처럼 생명성을 부여받았다. 공장에서 생산된 기계의 외관이 또 하나의 자연처럼 아름다움을 발산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 매끄러운 감촉에 이끌렸다. 당시 지배 이데올로기인 산업 발전과 테크놀로지는 이 사진들에서 다시 재현되면서 아름다운 테크놀로지의 풍경화로 자리매김 되었다.


유기적 자연의 옛 정물화, 풍경화의 자리에 이제 테크놀로지에 의해 매일 얼굴을 바꾸는 두 번째 자연, 새로운 자연의 풍경화와 정물화가 자리잡았다. 산업과 테크놀로지가 이루는 새로운 자연 풍경이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주며 위용을 자랑하고, 대중들은 여기에 도취되고 매혹당했다. ‘진보’라는 믿음이 대중들 사이에 확산되는 현상이 이 신즉물주의 사진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날개를 타고 파급되었던 것도 충분히 상상할만하다.

 

그러나 역사가 전진할 때 자연스러운 것은 없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이 허구적 진보 개념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어떤 노동자의 모습도 드러내지 않은 채 기술이 일구어낸 낭만적인 도시풍경의 등장! 벤야민이 랭거 파치의 사진들을 분석하면서 ‘비참한 상태를 소비의 대상으로 만드는 유행적 사진술의 방법’에 관한 지적은 잘 알려져 있다. 신즉물주의에 담겨있던 정치적 의미는 많은 경우 혁명적 반영들을 전환시킴으로써, 소비수단으로 전락되었다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산업과 테크놀로지라는 새로운 풍경은 생산수단의 차원에서 실제적인 진보를 보여준다. 그러나 자연과 역사의 혼동은 오류를 낳는다. 산업의 진보가 출발점으로 간주된다면 자연에서의 발전을 역사의 발전으로 오해하는 신화적 오류가 발생한다. 생시몽주의자들이 ‘진보가 가까운 미래의 전망이라는 동화 속에서 모든 사회적 대립이 사라진다’라고 외쳐도 생산관계의 차원에서 계급착취는 변하지 않는다.


벤야민의 후기 논문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의 주장에 따르면, 독일 노동계급은 테크놀로지의 진보와 역사의 진보를 같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치적 목표를 설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우리는 이 기술적 유토피아 속에서 모두가 행복한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 땅에서 인류의 행복한 지상낙원이 실현될 수 있을까? 독일 노동계급의 오류는 여기에 있었다.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방향과 자기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이 일치한다고 생각했던 오류와 착각!

 

이런 생각은 공장노동 자체가 정치적 성과라는 환상으로 이어졌다. 공장 노동은 기술적 진보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노동자의 것이 아닌 (공장의) 생산물이 노동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간과되었다. 이들은 자연에 대한 통제력이 진보했음을 인정할 뿐 사회가 퇴행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 사회적 퇴행이 2011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 또한 마치 기술의 발전이, 우리 자신의 계급이 움직이는 방향과 일치한다는 과대망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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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http://blog.naver.com/prologue님의 블로그 ‘강남역’ 모습

 

 

‘대도시가 발하는 근대성의 광채가 진보의 물질적 증거를 눈앞에 들이대고 있었는데, 이런 환등상의 정체를 어떻게 간파할 수 있었을까? 공적 담론에 침투한 진보의 신화적 비유가 대중의식의 신비화임을 어떻게 폭로할 수 있었을까? 반증을 기록한 사료를 뒤지면서 벤야민은 모든 학문적 상상력을 동원하여 진보의 의미론을 거스르는 저항 이미지(counter-image)를 발견하려 했다.’ (수잔벅모스, <아케이드 프로젝트>) 불행히도 나는 아직 저항 이미지를 발견하지 못했다. 판타스마고리아에 도취되어 달콤하고 매혹적인 꿈의 세계를 허우적 댈 뿐, 아직 그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글 / 유정아(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웹진 <Weekly 수유너머>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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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한 계보

 

우리에게 주권에 관한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는 사상가로 알려진 아감벤에게 영향을 미친 사상가는 매우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단연 주목해야할 이름은 발터 벤야민일 것이다.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아감벤의 사유는 슈미트의 주권론과 대결 속에서 전개되고 있으며, 이 대결의 과정에서 벤야민은 아감벤에게 끊임없이 사유의 영감을 제공하는 원천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정치에 대한 사유에서 벤야민의 계보에 서있는 것이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벤야민이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8번테제에서 언급하고 있는 ‘진정한 예외상태’라는 문구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진정한 예외상태를 도래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제”라는 벤야민의 구절은 사실상 “주권자란 예외상태를 결정하는 자”라는 슈미트의 테제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벤야민은 어디에서도 그 ‘진정한 예외상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세하게 기술한 바가 없다. 그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것이다. 바로 이 수수께끼를 해명하는 과정사에서 아감벤은 사도 바울에 주목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도 바울이야 말로 최초의 ‘진정한 예외상태’의 이론가인 것이다. 그래서 주권과 법에 대항하는 독특한 정치적 사유의 계보가, 그러나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주목한 바 없는 은밀한 계보가 성립하게 된다. 바울-벤야민-아감벤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말이다.

 

 

주권자와 메시아 : 예외상태를 둘러싼 거인들의 전투

아감벤의 정치적 사유에서 핵심을 차지하는 개념은 무엇보다도 예외상태일 것이다. 그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호모사케르』는 주권에 의해 권리를 박탈당한 채 단지 생물학적 생명의 지대로 던져진 존재들, 즉 벌거벗은 삶의 비극에 주목하는 책이 아니라 이러한 벌거벗은 삶을 언제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주권의 작동방식에 대한 책이며, 그러한 주권의 근본구조가 바로 예외상태임을 밝히는 책이다. 그리고 ‘호모사케르’ 연작의 두 번째 책인 『예외상태』는 예외상태의 구조를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아감벤이 그토록 주목하는 예외상태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예외상태란 일상적인 주권적 질서 혹은 법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법질서를 중지하고 그 사태를 종식시킬 때까지 기존의 법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특수한 권력이 활동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예외’라는 말을 쓰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는 일반적으로 정상을 벗어난 사태이자 매우 특수하고 특별한 사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아감벤은 그것이 정상으로부터 벗어난 특별한 사례라거나 비정상적 이탈이 아니라 사실상 정상적인 법질서를 떠받치는 은폐된 근간이라고 주장한다. 아감벤에게 예외상태란 오히려 일상의 법질서 자체를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 힘이다. 이렇게 은폐된 예외상태가 전면적으로 현실화되는 것은 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질서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을 때이다. 그리고 이때 입법기관의 권력이 실질적으로 행정기관으로 이양되는 양상이 나타나게 된다.

 

예외상태는 전쟁이나 내전 등과 같은 비상사태의 발발로 인해 정상적인 법질서가 붕괴될 위기에 처하였을 때 선포된다. 물론 표면적으로 예외상태는 그러한 위기 상황을 다루기 위해 통치 권력이 취하는 형태이다. 하지만 아감벤에 의하면 예외상태가 다루는 보다 심층적인 대상은 전쟁이나 내전과 같은 소요사태가 아니라 그 소요사태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이다. 그렇다면 그 공포의 성격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통치 권력이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되는 무질서에 대한 공포이다. 다시 말해 법이 통제할 수 없는 혼돈, 즉 아노미아(anomia)에 대한 공포인 것이다. 예외상태란 근본적으로 이러한 아노미아를 법의 형식, 혹은 주권적 질서의 외부에 두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과 질서 안으로 포함시키기 위해 권력이 작동하는 형태이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현대 국가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이 시기를 통해서 “예외 상태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 중의 하나 -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의 구분을 일시적으로 폐기하는 일-가 통치의 영속적인 실천으로 전환되는 경향”(『예외상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치 이후 ‘항구적인 비상 상태의 자발적 창출이 현대 국가의 본질적 실천이 되었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물론 소위 민주주의 국가까지도 포함해서’ 그렇다. 예외상태란 통치질서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벤야민이 말하는 ‘진정한 예외상태’란 바로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에 맞서기 위해서 제시된 개념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정한 예외상태는 메시아와 더불어 도래한다. 메시아 역시 현실적인(actual) 법을 중지시키는 자이다. 흥미롭게도 아감벤은 메시아가 도래시키는 ‘진정한 예외상태’ 역시 주권자의 예외상태와 동일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남겨진 시간』에서 아감벤은 예외상태의 일반적 특징을 ‘1)법률의 외부와 내부의 식별불가능성 2)법률의 이행불가능성 3)법률의 정식화불가능성’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특징은 주권적 예외상태나 메시아적 예외상태에서나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양자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이 지점에서 바울의 사유가 중요해진다. 바울에게 메시아의 도래는 언제나 율법(법,nomos)의 중지를 의미한다. 하지만 바울은 율법의 중지가 곧 율법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메시아는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완성한다. 중지가 의미하는 것이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란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감벤은 바울이 중지를 의미하기 위해 사용한 고대 헬라스어 동사 ‘카타르게인’(katargein)의 의미에 주목한다. 아감벤에 의하면 이 동사의 의미는 ‘작동하지 못하게 하다, 비활성화 시키다, 효력을 멈추게 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감벤은 ‘카타르게인’이 바울이 자신의 사유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전문용어임을 환기시켜 이 용어가 ‘작동/행위/현실태’의 뜻을 담은 에네르게이아(energeia)의 대착점에 있다는 것을 밝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네르게이아가 현실태를 의미하는 헬라스 철학의 용어이기도 하다는 것이며, 이 용어는 가능태를 의미하는 ‘듀나미스’(dynamis)와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용어분석을 통해 아감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메시아의 도래를 통한 법의 중지(카타르게인)란 현실태(에네르게이아)로 작동하는 법을 다시 그 가능태(듀나미스)로 되돌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메시아적인 것이란 율법의 파괴가 아니라 비활성화이며 수행불가능성이다.”(『남겨진 시간』)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현실태의 법을 가능태의 법으로 변용하는 것이며 이 변용이 바로 법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슈미트의 주권이론, 즉 주권자가 창출하는 예외상태론은 메시아가 도래시킨 법의 중지에 맞서 여전히 법을 현실에서 작동시키기 위한 주권권력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메시아의 도래는 주권권력에게는 법이 위기에 처하는 아노미아를 의미하며 주권권력이 창출하는 예외상태는 바로 이 아노미아를 여전히 법의 형식 속에 붙잡아두기 위한 역설적인 법의 대응-법질서의 중지를 통한 법질서의 유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과 삶, 그리고 정치

아감벤의 다른 글들이 그렇듯이 『남겨진 시간』역시 그에게 던져지는 최종적인 질문에는 답변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법의 중지, 법을 비활성화하고 수행불가능하게 만드는 법의 가능태화란 우리의 정치적 현실에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은 여전히 모호하다. 다만 주권이라는 괴물에 의해 조건지워진 오늘날 우리의 정치적 삶이 처한 근본적 한계를 아감벤의 논의는 다시금 성찰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현실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더 좋은 법을 만들고, 그러한 법을 만들 수 있는 더 좋은 주권자를 선출하는 것에 온통 정치적 관심이 쏠려있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 아감벤은 주권질서 속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언제든지 주권적 예외상태에 내던져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권자가 창출한 예외상태를 일상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문제는 주권자의 법을 넘어 법을 삶의 구성을 위한 가능성들의 조합으로 만드는 것이다. 아감벤의 메시아적 정치학은 우리에게 이 문제를 사유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하고 있다.




글 /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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