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20110610214053633.jpg

<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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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사진1.jpg 

 

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7438126-.jpg hijacking+hotspot.jpg

<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1.jpg

 

<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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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0 1 1  여 름 강 좌 안 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은 매 분기별로 강좌를 열고 있습니다. 여러 강좌를 통해 강사와 학생들이 함께 소통하며 새로운 지식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경험을 쌓아가고자 합니다. 공부뿐만 아니라 삶을, 그리고 삶으로부터 다시 공부를 길어내는 느리지만 부지런한 여정! 배움을 통해 삶을 풍요롭게 가꾸려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개강일: 2011년 7월 4일 월요일

 

∙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218-23 이스턴빌 2층 수유너머N | 전화 (070)8263-0910 | http://www.nomadist.org

 

∙ 접수계좌: 우리은행 011-9571-1509 (휴대 전화번호와 동일) 예금주 명: 오하나

 

∙ 강좌문의: 오하나(011-9571-1509), 문화(010-6210-3021)

 

∙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위의 접수계좌에 입금하신 후, <강좌 신청 및 확인> 게시판에 강좌명과 입금자명을 남겨주세요.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수강생명과 입금자명이 다를 경우 꼭 게시판을 통해 알려주세요.)

 

∙ 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에서 진행하는 모든 강좌의 수강료는 환불되지 않습니다. <강좌신청> 게시판의 공지를 참조해주세요.

 

 

 

 

 

01 예술 강좌| 20세기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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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4일 (월)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초현실주의자들은 ‘현실의 외부’를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초현실주의’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을 다시 사유해 보려는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꿈과 무의식’을 생각해 보는 것은 ‘깨어나는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20세기의 가장 매력적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이 꿈꾸었던 혁명의 예술, 초현실주의를 만나본다.

 

 

1. 상징주의, 매혹적인 상상과 허구의 세계 _유정아

보이는 현실의 재현에 몰두했던 인상주의를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한 상징주의자들. 그들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사상과 작품세계.

 

 

2. 다다이즘, 째깍거리는 정치적 폭탄 _유정아

무정부주의적이었던 다다이스트들의 등장과 활동, 부르주아 예술을 비판하고, 정치, 철학적 전제들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던 이들의 재기발랄한 반미학!

 

 

3. 초현실주의 선언,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_유정아

비이성적인 것을 사유할 또 다른 권리, 1924년 ‘인간의 권리에 대한 새로운 선언’을 했던 초현실주의 운동의 태동과 무의식의 탐구!

 

 

4. 초현실주의 그룹과 “섹스 토킹” _박수진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초현실주의자들이 말하는 사랑과 섹스, 욕망과 쾌락과 도덕, 무의식과 충동.그 거칠고 흥미진진한 논쟁!

 

 

5. 벤야민과 초현실주의, 대중문화라는 꿈나라 _유정아

발터벤야민이 초현실주의자들의 눈을 통해 바라본 상품물신의 세계,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열정적인 매혹과 비판

 

 

6. 아우라의 흔적, 초현실주의 귀환과 현대미술 _박수진

초현실주의 전시를 통해 만나는 타자성과 재현의 문제, 20세기 후반의 전시와 비교하며 새롭게 조명하는 초현실주의의 영향과 흔적.

 


 

 

02 인류학 강좌|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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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강일 : 07월 06일 (수)

 

강좌회비 : 10만원 (6강)

 

 

경계를 넘나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류학적 상상력이다. 자연과 문화, 환경과 인간, 권력과 자유, 개인과 집단이라는 이분항의 긴장을 가로지르자. 그리고 새로운 사유의 방향을 탐색하자! 우리는 인류학의 여섯 가지 모멘트를 통과하며 교환 없이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공리주의, 그 실용주의의 철벽을 내파할 것이다. 우리 안의 낯선 외부들을 발견하기 위하여!

 

 

1. 섹슈얼리티 :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원시사회의 성과 억압> _홍서연

말리노프스키는 모권제 사회인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가족관계를 통해 원시사회의 섹슈얼리티를 기술한다. 문제는 성적 억압의 존재 여부가 아니다! 자, 그렇다면 모권제는 어떻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분열시키는가?

 

 

2. 선물 : 마르셀 모스, <증여론> _오하나

“아주 최근에 인간을 ‘경제동물’로 만든 것은 우리 서양사회이다. 그리고 아직 모두가 그러한 종류의 존재가 된 것은 아니다.” 모스는 합리적 교환 대신 선물을 택한 공동체를 분석한다. 강의를 통해 우리의 삶의 비자본주의적 요소, 인간과 사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한다.

 

 

3. 신체와 언어 : 앙드레 르루아-구랑, <몸짓과 언어> _홍서연

태초에 몸짓이 있었다! 몸짓은 인류학에서 의례와 테크닉의 기본단위이다. 르루아-구랑의 선사시대 고고학을 통해 기술과 언어, 인지능력과 사회성의 상관적 발달 궤적을 추적해 보자.

 

 

4. 국가 : 피에르 클라스트르,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 _문화

클라스트르는 추장제 사회 속 전사들의 잇단 전쟁과 무모한 행동에 주목한다. 폭력적인 이들의 모습에서 국가 없는 미개 사회가 떠오를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중심적인 권력의 출현을 막는 국가 방지 메커니즘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국가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5. 주술 : 마르셀 모스,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 _홍서연

주술(magic) 최초의 사유 형태이며 인간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인간행위를 사법적 행위, 기술적 행위, 종교적 의례로 나누는 모스에게 주술은 관례 이외의 것을 산출하는 창조적 힘을 지닌 것이었다. 주술사는 어떤 사람인가? 주술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가

 

6. 야생성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야생의 사고> _정정훈

새로운 사유는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사유의 방식과 삶의 방식이란 단지 하나의 삶의 체제에 불과하다. 레비스트로스의 저 유명한 책, <야생의 사고>을 통해 새로운 사유와 삶의 체제를 모색한다.

 

 

 

 

 

03 철학강좌 | 히치하이커의 정치학 - 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들을 탐사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개강일 : 07월 08일 (금)

 

강좌회비 : 10만원 (6강)

 

 

 

촛불을 거치며 정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어느 때보다 고취됐다. 하지만 이 관심이 복지국가론으로 축소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는 국가의 운영방식으로 환원될 수는 없는 법. 이 강좌를 통해 우리는 현대정치철학의 이론적 공간을 탐사하는 히치하이커가 되고자 한자. 국가권력의 지반을 넘어서는 철학자들의 기발한 해방의 사유에 탑승하기.

 

1. 한나 아렌트 : 오이코스와 폴리스 _이진경

폴리스로부터 오이코스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빈민을 몰아내려는 정치적 사유에 히치하이킹! 오이코스를 통해, 정치로부터 배제된 자들을 통해 폴리스를 전복하는 정치를 사유한다.

 

 

2. 자크 랑시에르 : 평등의 정치학 _이진경

치안과 정치의 대비 속에서 자격 없는 자의 정치학을 제안하고, 보이지 않는 자들을 보이게 만드는 감성의 정치. 랑시에르의 사유에 히치하이킹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평등성의 정치학까지 밀고 가본다.

 

 

3. 미하일 바흐친 — 유혈 낭자한, 도래할 사건으로서의 혁명 _최진석

용산참사를 겪은 우리 눈에 ‘성숙한 민주주의’는 폭력을 독점 행사하는 자들의 미사여구일 뿐이었다. 미하일 바흐친을 통해 혁명과 정치, 폭력의 난맥상을 돌파한다. 혁명은 정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므로!

 

 

4. 자크 데리다 — (불)가능성의 윤리와 정치 _최진석

정치의 윤리, 혹은 윤리적인 정치의 불가능성! 정치의 잠재성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한계를 돌파하는 데서 비롯된다. 데리다의 <법의 힘>을 통해 불가능에 도달하는 행위, 그 속에서 실현되는 정치를 발견한다.

 

 

5. 에티엔 발리바르 : 이데올로기의 전화와 인권의 정치 _정정훈

스마트폰과 SNS로 표상되는 첨단의 세계 한 복판에서 오히려 배제된 자들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인종, 종교의 이름으로 무의미한 폭력을 휘두르고... 우리는 정치의 가능성 자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한 시대에 살고 있다. 정치의 복원을 고민하는 발리바르의 정치 철학을 따라간다.

 

 

6. 질 들뢰즈 : "소수정치, 또는 정치의 소수화" _변성찬

들뢰즈의 ‘소수성’ 개념을 중심으로 ‘들뢰즈의 정치학’을 재구성해보는 것, 이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다. 들뢰즈가 구분한 ‘고전적 정치영화’과 ‘현대적 정치영화’의 차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보다 분명하고 풍부하게 밝혀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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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봄, 콜레기움 들뢰즈의 『시네마』드디어~!

4월9일 토요일에 시작 됩니다.


콜레기움 반장 꾸냥과 주몽이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들뢰즈~ 변성찬 선생님을 모시고 인터뷰를 해 보았습니다.



사진. 인터뷰 / 꾸냥, 주몽 

                                                                                           

 

꾸냥, 주몽(이하 꾸,주) : 콜레기움이 어떤 형식으로 진행되는 지 궁금합니다! 강사가 강의를 주도하나요? 아니면? 연구실에서 하는 세미나처럼 진행되나요?

변성찬 선생님(이하 변쌤) : 콜레기움의 기본형식이 세미나에 가까운 거지만 이번 시네마는 강의가 중심이라고 일단 생각하면 된다. 짧은 시간에 분량도 좀 많고, 압축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의를 중심으로 할 생각이다. 강의가 한 발 앞서 나가고, 가령 2회차 때 읽고 발제할 부분을 1회 차 때 미리 강의를 하고, 텍스트 읽고 강의를 하는 것이 일종의 안내의 개념이 되고, 그걸 바탕으로 해서 텍스트를 발제하는 게 복습이 되는 그런 방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꾸,주 :『시네마』읽을 때 베르그송과 퍼스를 같이 읽는 게 특이한 것 같아요. 어떻게 연결시켜서 읽는 건가요?

변쌤 : 개인적 경험으로 보면 그게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시네마』는 영화와 베르그송의 지속 또는 이미지의 철학, 퍼스의 기호론, 이 세 가지가 종합되어 있는 책이다. 『시네마』를 펼쳐보면 알지만, 1, 2권 각각 두 번에 걸쳐서 챕터 제목이 아예 베르그송에 대한 주석으로 되어 있다. 그 주석달기의 방식이 친절한 설명이라기보다는 들뢰즈에게는 일종의 재창조를 의미하기 때문에 차라리 주석을 달고 있는 특히, 베르그송 같은 경우는 개념이나 문제의식을 차라리 소화를 하고 나서 들어가는 게 부담은 되지만, 오히려 더 지름길이다. 안내문에 나간 것처럼 꼭 필요한 부분들을 선택해서 먼저 읽고 들어가려고 한다. 한마디로, 그거 안보고 어떻게 해볼까 하고 하면 더 고생한다.


 

꾸,주 : 들뢰즈의 저작들, 특히 『시네마』, 어렵고 난해하기로 유명한데요, 선생님이 들뢰즈의 저작들을 공부하게 된 계기와 들뢰즈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이유는 뭔가요?

변쌤 : 나한테는 『시네마』를 읽어야 될 필요성과 들뢰즈를 읽어야 할 필요성이 동시적인 것이었는데, 우연적인 거고, 더 솔직히 말하면 반강제적이었던 거고, 심지어는 매체에다가 글로 쓰기도 했지만, 출판사에서 리라이팅이라는 기획이 나왔고 필자를 구하던 중 연구실에서 영화와 관련된 책 중 “뭐하나 해라!”는 이진경`고미숙의 요구가 있었고, 그 당시만 해도 시간-이미지가 번역이 안 되어 있는 상태였었는데, 그래서 하기 힘들다 그랬더니, 옆에서 '영어 강사'니까 원서 보고 쓰라고 부추겼다. 그런데, 그렇게『시네마』를 보면서 오히려 내 공부의 중심이 바뀌어 버렸다. 공부를 하다 보니 영화와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들뢰즈에 더 매력을 느끼고 가까워지는, 그래서 그게 무려 8년 세월인데... 아, 이런 건 쓰지마!!! (일동 웃음 ㅋㅋ)


 

변쌤 : 들뢰즈 공부를 왜 계속하냐 그러면, 진짜 알고 싶어서다.


구체적으로 얘기하자면, 자연철학적인 예술철학적인 측면, 직접적으로 『시네마』와 관련해서 들뢰즈가 갖고 있던 비평개념자체가 마음에 들고 내 스타일에 맞았다. 뭐냐하면, 어떤 작품을 비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척도를 가지고 등급을 매긴다거나 이런 게 아니다. (많이들 그렇게 알고 있지만 말이다.) 비평은 창조라는 게 핵심개념인데, 어떤 예술적 작품으로부터 촉발 받은 것을 토대로 자기 사유를 하고, 창조를 하는 것, 뭔가 거기에 그런 의미에서 텍스트 자체를 어떤 의미에서는 변용시키는 과정일 수도 있고, 들뢰즈에게 있어 창작과 비평은 그렇게 명확하게 구별되어 있지 않다. 철학하는 것 자체도 늘 개념의 창안이라고 하지만, 그런 그 비평개념, 이런 것이 개인적으로 내가 갖고 있는 비평적인 태도와 잘 맞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시네마』와 들뢰즈의 시각을 통해서, 모든 사유나 철학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거지만,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창작의 측면에서는 진정으로 뭔가 새롭게 창작한다는 것이 근본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새로운 비젼 같은 것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영화를 중심으로 예술작품을 수용하거나 비평하는 관점에서 보자면, 그 작품에서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시각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중심적인 담론 틀에서는 비가시적인 거였거나 보이지 않았던 의미, 이런 것들을 다시 부여하는 것인데, 들뢰즈를 공부 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일반적으로 철학적 예술비평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의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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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주 : 들뢰즈가 한 때 알콜중독자였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사실이라면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들뢰즈를 본받아 우리 콜레기움도 술자리를 많이 가지나요?(^^)

변쌤 : 글을 쓸 때 음주상태로 썼다는 것은 정설화 되어 있다. 들뢰즈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삶’이다. 술 마셨을 때 진정한 삶이 해방된다는 식. 예를 들면 실제로 68즈음해서 앙리 미쇼 같은 경우 스스로 마약실험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니체가 광기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니체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의 철학이 시작됐다라고 할 때는, 그 이전에는 명석 판명한 사유 지성의 작동을 위협하거나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층위, 그런데 진정한 사유를 강제하는 힘은 거기에 있는 거고 그것의 힘을 죽이면 새로운 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게 기본 출발점이다. 들뢰즈가 강한 니체주의라고 할 때는 그런 맥락을 받아들이는 거고, 말 그대로 실험을 하는 건데, 미쇼 같은 경우 마약하고 그 상태에서 글을 쓰고 그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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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vs 변성찬

(*이번 봄! 이 두 분과 함께 하지 않으시렵니까. 호호호)

 

들뢰즈의 문학 예술적 취향을 보면, 그런 것들 좋아했던 것 같다. 어떤 사유의 가능성이나 모델이나 돌파구나 이런 걸 찾아야 하는 게 새로운 철학의 임무라고, 바깥의 사유라고 하는 것이, 들뢰즈가 말하는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 통상적 의미의 ‘나’라고 하는 인격성 외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는 거고, 그러니까 내안에 있는 외부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거라고 생각을 하고, 그것이 ‘나’라고 하는 데카르트 칸트적인 어떤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는 외부인 그리고 그것의 폭력을 통해서만 새롭게 사유를 한다라는 것, 짐작컨대, 음주하고 술을 먹은 상태에서 글을 쓴다고 하는 것은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차이와 반복』에서 들뢰즈가 그런 말을 한다. 데카르트의 명석판명을 꼬집어서 오히려 삶의 층위에서는 애매판명하고 애매할수록 판명하다. 그리고 그 이질적인 것들이 서로 어떻게 조합되고 배치 되는냐에 따라서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 새로운 것이 된다는 것은 내가 의지해서 된다 보다는 삶의 층위에서 일어나는 재배치의 결과이다. 언제나 결과인 것이고, 근데 그 오히려 코기토라는 층위도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는데, 의식의 층위에서는 그것들이 행하는 새로운 것의 출현을 반동적으로 억압하는 기제로, 그것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명확히 들뢰즈에게는 도덕인 것이다. 삶을 억압하는 도덕이라고 할 때, 니체식으로 말하면 반동적으로 새로운 것의 출현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는 거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파괴인 것이고 파괴를 통해서 들어나는 잠재성이라고 얘기하는 것이 삶의 해방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일단 해방이고, 실험이고, 실험한다는 것은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고, 예를 들면 그런 식의 입장이니까, 들뢰즈의 철학이 일정하게 예술철학적 지향을 갖는 측면도 그런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반도덕적이면서 윤리적인... 그런 의미에서 술자리도 많이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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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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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는 1988년 일본에서 발생했던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을 실화적 모태로 하는 영화이다. 한 엄마와 각기 다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출생신고가 되어 있지 않아 공식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 그나마 어렵게 마련한 전셋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큰아이를 제외한 나머지 세 아이는 말 그대로 그곳에 없는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 어느 날 엄마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그 아이들을 떠나버리고, 아이들은 끝내 비극적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 6개월 동안 아무도 모르는 그들만의 삶을 살아낸다. 그곳에 있지만 그곳에 없었던 아이들의 유령 같은 삶.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실화는, 한동안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 떠들썩함 속에는,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연민, 아이를 버린 무책임한 어미에 대한 분노, 결국 그 어미와 함께 아이들을 방치한 공범이 되어버린 사회-어른들 자신의 부채의식, 이 모든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했던 대도시의 익명적 삶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 또는 반성이 있었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15년 만에 세상에 나온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이 모든 소란에서 한 걸음 비켜서 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아이들의 삶이 생각만큼 온기없는 유령 같은 삶은 아니었음을 보여줄 만큼 충분히 사실적이지만, 또한 아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그 어미에 대한 섣부른 도덕적 분노와 단죄로 변질되게 하지 않을 만큼은 충분히 허구적이기도 하다.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결코 이 영화가 ‘재현 드라마’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 사건을 모태로 하고는 있지만, 세부적인 디테일은 1년간 배우인 아이들과 함께 발견하고 창조해낸 것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실, 그 단호함은 현실과 영화에 대한 감독 자신의 조심스럽고 근본적인 윤리적 질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대상에 대한 연민은,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쉽사리 그 대상을 영원히 타자화시킬 위험에 빠진다. 터무니없는 일로 인한 충격과 분노는, 특히 그것이 폭발적이고 집단적인 것일 때, 도덕적 단죄라는 폭력이 되어 자신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힘을 소진시켜버린다. 문제는 연민과 분노라는 감정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쉽사리 출구를 찾아 스스로를 해소하려고 하는 그 완강한 관성 또는 자동운동 속에 있다. 그것을 막는 또는 그 힘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끊임없는 삶에 대한 탐색과 윤리적 질문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제로 수행하는 일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외줄타기와도 같이, 고도의 균형감각과 끊임없는 긴장을 요구하는 일이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가 많은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영화와 구별된다면,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바로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큐와 픽션, 선과 악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잡기


영화 <아무도 모른다>에는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이 흐른다. 그것은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공간적인 거리 감각이 낳는 긴장이기도 하고, 촬영과 편집 사이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시간적 리듬의 공존에서 비롯되는 긴장이기도 하다. 카메라는 대상을 향해 최대한 가까이 다가가지만, 끝내 그 인력에 함몰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무한한 인내심으로 대상의 진실이 드러나기를 기다리지만, 일단 포착된 대상의 진실은 과잉에 이르기 이전에 냉정하게 편집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카메라와 편집 리듬에는, 대상을 향한 자연스러운 인력과 대상으로부터의 의식적인 척력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물리적 긴장이 실려 있다. 그 물리적 긴장은 감독 자신의 윤리적 질문의 필연적인 결과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두 가지 의미에서 다수화된 ‘이분법’에 질문하고 도전하는 영화이고, 그 이분법의 경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순수한 아이들과 오염된 어른들이라는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고자 하고, 그것을 위해서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 사이의 경계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을 잡고 있다.


아무도 모르는 아이들이 만든 유사 가족 생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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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른다>는 아이들의 그 6개월을 고난과 참상으로 재현하려 하기보다는, 그 6개월을 살아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삶의 의지와 생의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려고 한다. 아이들을 트렁크에 넣어 옮겨야만 하는 삶의 절박함은, 유키(시미지 모모코)의 천진난만한 질문(“여기는 몇층이야?”)과 시게루(기무라 히헤이)의 천진난만한 미소로 스릴 넘치는 비밀 작전, 즉 유희가 된다. 비밀 작전의 무사한 성공을 자축하는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이들보다 더 아이 같은 철없는 엄마가 제시하는 터무니없는 의무의 법칙은, 아이들의 웃음과 함께 게임의 규칙이 된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엄마가 사라진 뒤에도 막연한 기다림 속에서 삶을 낭비하지 않는다. 엄마보다 더 어른스러운 아이였던 장남 아키라(야기라 유야)는 이미 아빠이고, 이사한 집에서 제일 먼저 세탁기가 놓인 곳을 확인하는 장녀 교코(기타우라 아유)는 이미 엄마이며, 시게루와 유키는 아빠 엄마의 사정을 충분히 헤아려 보채거나 칭얼대지 않는 착한 아이들이다. 이 자발적인 유사 가족은, 위기의 순간을 삶의 영역을 확장하는 계기로 만드는 놀라운 생명력을 보여준다.

생활비(식비)의 고갈을 새로운 연대(먹을 것을 챙겨주는 편의점 직원)의 기회로 삼고, 단수로 인한 고통을 공원으로의 진출 기회로 삼는다. 엄마와 함께 금지의 규칙은 사라졌다. 공원과 거리로 자신들의 삶의 영역을 확장한 아이들은,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사키-간 하나에)를 사귀고, 그곳에서 발견한 새로운 생명의 싹에 감응하며, 그것을 데려다가 소중하게 키운다. 시게루는 자판기와 공중전화에서 동전을 모으는 생활의 지혜를 터득한다. 그리고 그 6개월 동안 아이들은, 자신들이 키우는 화분 속의 식물처럼, 실제로 자라난다. 13살이 된 아키라는 변성기가 시작되고, 5살이 된 유키는 이제 예전의 작은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만큼 그렇게 자랐다. 물론 그 생명력과 성장력은 축복이라기보다는 비극이다.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키라의 고집(아키라는 이미 성을 바꾸어버린 엄마에게 더이상 도움을 호소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들을 뿔뿔이 흩어놓을 것이 분명한 사회에도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너무나 빨리 자라버린 유키의 싸늘해진 몸은 한순간 우리의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충격이 된다. 유키의 죽음을 확인한 뒤 거리로 나간 아키라의 눈에 세상은 더이상 현실감을 갖지 않는 공허가 되고, 그 초현실적 공허감은 우리의 오감을 얼어붙게 한다. 아키라의 발걸음은 자동반사적으로 그를 경찰서 앞으로 이끌지만, 그는 끝내 돌아선다. 유키에게 모노레일을 타고 가서 비행기를 보여주겠다고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아키라는 아이와 어른의 경계를 훌쩍 넘어서 있으며, 그리하여 세상의 상식을 향하여 무기력하지만 끈질긴 질문을 던진다.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탐색


어쩌면 이 영화가 그 제목을 통해 말하려 했던 것은, 아이들의 존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아무도 몰랐던’ 어른-사회의 무책임에 대한 반성의 촉구 같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정작 아무도 몰랐던 것 그리고 지금까지도 아무도 잘 모르고 있는 것은, 그 아이들이 보여준 놀라운 삶에의 의지와 삶의 감각(감독은 그것을 “삶의 리얼리티를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기억”이라고 표현한다)일 것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영화는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느꼈었는가를 질문하고 탐색한다. 마치 <말아톤>이 초원이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도덕적 다그침이 아니라, 초원이가 바라보는 세상과 삶의 감각이 무엇인가를 포착함으로써 새로워질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아무도 모른다>는 새로운 영화가 된다. 그것은 영화가 영화를 넘어서는 놀라운 기적의 순간들이다.

그때 영화는 사실과 허구, 다큐와 픽션의 경계를 넘어선 화법으로, 쉽게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해낼 수 없는 삶의 진실에 이야기한다. 도덕적 폭력이 되지 않아야 할, 그저 끊임없는 새로운 윤리적 질문의 출발점이기만 해야 할 연민과 분노만을 낮고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환기시킨다. 고레에다 감독의 전작 <원더풀 라이프>(1999)에는, 또 하나의 아이-소녀가 등장한다. 기억하고 싶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으로 습관적으로 디즈니랜드를 떠올렸던 소녀는, 그것이 이미 많은 아이들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일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소녀가 대신 찾아낸 가장 행복했던 기억은 “무릎에 누이고 귀를 파주던 엄마의 살냄새”였다. 상식적이고 자동화된 우리의 반응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질문은 이렇듯 늘 새로운 삶의 감각과 함께 비로소 작동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 새로운 윤리적 질문, 새로운 삶의 감각으로 충만해 있는, 아름답고 새로운 영화이다. 다음과 같은 고레에다 감독의 진심어린 연출의 변은, 그 새로움을 찾는 모든 감독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다짐일 것이다. “소년의 옆에서 어깨를 다독여주고자 했다. 안아주는 건 안 된다… 나도 카메라도 거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글 / 변성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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