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인문학 집중세미나란?

 

인문학의 불온성은 몇 마디 구호가 아니라 꾸준한 탐구와 현실 모색 속에 있습니다. 집중세미나는 그런 탐구와 모색을 실천하는 작은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집중 세미나 시간에는 강의와 연구 관련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해서, 20주 동안 함께 부대끼며 읽고 질문하고 토론할 것입니다. 혼자라면 외롭고 힘든 공부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어려움도 기쁨과 보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튜터 박은선, 유영선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신학정치론.jpg        에티카.jpg         정치론.jpg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튜터 김은영, 권은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사회를보호해야한다.jpg       통치성과 자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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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2기를 모집합니다!

 

* 주요 프로그램

 

I. 스피노자 -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만나기

 

강의 주제

강의 내용

교재

1

9. 22

회차/일자강의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

2

9. 29

신에 대하여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1부

3

10.6

자유의지와 목적론

4

10.13

정신과 신체

평행론

『에티카』2부

5

10.20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6

10.27

정서와 예속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3부

7

11. 3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4부

8

11. 10

인간의 자유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5부

9

11. 17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10

11. 24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II. 푸코 -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불온한 탐험가 되기

 

 II-1 푸코 읽기

회차/일자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비고

1

12.1

담론과 권력

타자의 사유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

12.8

지식의 고고학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3

12.15

권력의 미시정치학

지식-권력-신체

『감시와 처벌』

4

12.22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훈육권력

5

12.29

생명권력

『성의역사1』

 

 II-2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와 정치

회차/일자

강의제목

내용

기본참고자료

6

1. 5

1강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 변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출현과 그 기본 축적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제라르 뒤메닐 외,

『자본의 반격』

7

1. 12

2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1)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성립과정과 그 사회적 효과들 주체화의 맥락에서 규명한다.

미쉘 푸코,

『안전, 영토, 인구』

8

1. 19

3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2)

9

2. 2

4강 배제사회와 공안체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분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경향신문특별취재팀,

『한국의 워킹푸어』

10

2. 9

5강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의

몇 가지 길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활동을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을 살펴본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자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진경, 『코뮨주의』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o 강 사 : 손기태, 정정훈, 정행복

o 세미나 튜터 : 박은선, 유영선, 김은영, 권은혜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9. 22.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한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정치학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 8. 8. 월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신한은행 434-04-354206 (예금주 : 김은영)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김은영 010-8334-4389, 권은혜 010-4515-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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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올해부터 우리 시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씹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기 위해 강의, 심포지움, 총서를 통해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불온한 인문학' 카테고리 바로가기)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12일에 심포지움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총서의 첫번째 책입니다.

휴머니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책소개를 여기에 옮깁니다.
(원글 바로가기)
 







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2.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3. 지은이 소개 및 차례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문 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차례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장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 문 화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 최진석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 정정훈
4장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 이진경
5장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 박정수
6장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 손기태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5.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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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두 번째 트랙은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다. 연구실에 자주 접속한 친구들이라면 들뢰즈·가타리 이름은 번쯤 들어봤을터인데... 그의 다른 저작 중에서도 『안티 오이디푸스』를 선택한데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

지난 트랙 1에서 맑스의 『자본』을 읽고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데는 뭔가!? 깊은 뜻이 있지 않을까? 맑스의 『자본』을 읽고 풀리지 않는 질문들이 들뢰즈·가타리를 만나면 조금은 해소가 되지 않을까? 혹은 어떻게 증폭이 될까? 여기저기서 트랙 2 강의에 대한 질문들이 들린다.

 

그동안 좀처럼 본색을 드러내지 않고 학자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열심히 강의 준비(?)와 집필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는 최진석 선생님을 만나 궁금하지만 차마 묻지 못했던 것들, 이들테면 “왜 하필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입니까? 절판되서 책 찾기도 힘든데용?” 같은 기초적인 질문부터 던졌다.

 

왜 지금 우리는 들뢰즈·가타리의『안티 오이디푸스』를 읽어야 할까?

 

 

인터뷰어 / 화 (불온한 인문학 튜터)

인터뷰이 / 최진석 (불온한 인문학 강사)

 

 

 

: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읽는 선택한 이유는 뭔가? 들뢰즈의 다른 책들도 많은데~ 그 중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를 고른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진석 : 들뢰즈·가타리가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제목으로 책을 두 권을 냈다. 첫 번째가 『안티 오이디푸스』 (L'Anti-oedipe : capitalisme et schizophr nie)고 두 번째가 『천개의 고원』(Mille Plateaux: Capitalisme et Schizophr nie 2)이다. 들뢰즈는 워낙 전방위적인 철학자이기 때문에 책 마다 특별한 제목이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분열증이란 시리즈로 나온 것은 사회철학에 해당하는 책이다.

내가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다. 『안티 오이디푸스』가 들뢰즈의 사회철학책이라고 해서 읽었는데.. 내가 기대하던 사회철학과 이미지가 다르더라.

 

 

화 : 그 때가 대략 몇 년 전?

 

진석 : 90대 중반에 처음 읽으니까... (자세한 건 묻지 말라... ㅠ)

어쨌든 그 당시 사회철학 하면 마르크스나 헤겔을 생각하거나 좀 세련된 사람이라면 하버마스의 의사소통 행위이론 들을 이야기 했다. 그런 책들의 특징은 굉장히 논리정연하고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고 피아를 분명히 구분한다. 그런데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상당히 깨더라.

 

 

 <그것>은 도대체 뭐란 말이오???

 

 

 

: 뭐가 그렇게 깼나...?

  

진석 : 무엇보다도 전혀 이해할 수 없더라. (웃음) 재밌는 것은 『안티 오이디푸스』 첫 문단에서 ' <그것>은 어디서나 작동하고 있다. 때로는 멈춤 없이, 때로는 중단되면서. <그것>은 숨쉬고, <그것>은 뜨거워지고, <그것>은 먹는다. <그것>은 똥을 누고 성교를 한다. 그것이라고 불러버린 것은 얼마나 큰 잘못인가. 어디서나 그것들은 기계들인데, 결코 은유적으로가 아니다.' 라고 한다. 여기서 <그것>은 어떤 대명사가 아니라 사실은 이제 사회전체 혹은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을 감싸고 존재하도록 만들면서 움직이도록 만들어주는 힘 즉 생성력에 대한 이야기 이다.

 

 

: 그래도 『안티 오이디푸스』읽으려고 시도 했다가~ 문단 보고 뭔말이야? 하고 덮었단 친구들도 많더라. 도대체 그 <그것>이 뭔지 도통 감이 안온다~

 

진석 : 프로이트로 따지면 리비도(Libido) 같은 것이다. 사실은 그런 힘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힘의 장 힘의 무대를 어떤 방식으로 구축하는 가가 바로 사회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안티 오이디푸스』는 사회철학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사실 이런 걸 안 건 굉장히 나중의 일이다^^)

 

 

: 들뢰즈·가타리가 사회를 바라보는 독특한 방식이 있을 것 같다.  다른 사회철학과는 어떻게 다르던가?

  

진석 : 사회철학이나 역사철학이란 관점에서 이 책을 볼 때 들뢰즈와 가타리가 전제하는 것이 있는데 삶이나 사회의 역사에서는 항상 중심화하는 힘이 있고 그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힘이 같이 있다는 거다. 전자를 구심력 후자를 원심력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두 가지 힘의 상호관계가 특정한 사회형태를 결정짓기도 하고 사회가 다른 사회로 변화하게 하는데 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특이한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확장적인 측면을 가지면서 모든 것을 중심적으로 끌어들이는 강력한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이때 이 자본주의를 중심화하는 힘, 사회의 모든 방면으로 확장하는 힘이라는 것이 자본의 힘이다.

 

예를 들어 설명한다면 봉건사회다. 봉건사회에서는 신분이라는 규칙이 절대적이었다. 가령 양반과 상민은 결코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분리돼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 중에도 있다. 돈 많은 상민이 양반 신분을 산다. 그리고 그는 양반 행세를 한다고 큰 갓도 써 보고 기와집도 올린다. 그렇게 해 봤는데 양반들이 인정을 안하고... ‘저 놈은 원래 상민 출신이다.’ 결국 별로 재미를 못 봤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바로 신분이라는 규칙(코드)다. 이 신분이라는 규칙(코드)은 봉건사회에선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었지 않느냐. 과거로 가면 갈수록 신분을 규정하는 벽이라는 것은 더 두텁고 강했다. 한 사회가 통일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와서는 완전히 변한다. 잘 알다시피 ‘돈’이면 안되는 게 없지 않느냐. 내가 물건을 파는데 ‘양반한테만 팔고, 상민한텐 안판다?’ 아니지 않느냐. 돈은 이전의 신분 관계를 해체 시키는 힘이다. 또한 과거에 있었던 유기적인 공동체 역시 다 파괴한다. 씨족 공동체, 지역 공동체가 화폐가 도입되면서 무의미하게 됐다.

 

화폐라는 것이 교환형태가 되면서 돈에 의해 모든 것이 평등하게 환원되어 버리는 이런 상황이 자본주의 체제의 보편성이다. 돈이라는 규칙. 신분이 아니라 돈이라는 규칙이 자본주의 사회를 재패했다. 이것을 들뢰즈·가타리는 초코드화 라고 했다. 자본주의는 굉장히 모순적인 양면성을 갖는다. 자본은 모든 것을 평등하고 공평하게 만들어주지만. 자본이 없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화폐 없이는 그 무엇도 존재를 규정할 수 없다.

 

겉보기에는 자본주의는 평등하고 이상사회로 보인다. 그러나 자본 사회에서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돈이라는 규칙.. 그 누구도 화폐를 통하지 않고선 세상에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돈을 벌지 않을 수 없고.. 돈을 벌어야 하는 규칙에 종속되지 않고선 살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화폐에 대한 중심화이다. (이 내용에 대해선 “불온한 인문학” 트랙 1『자본』 강의에서 열심히 배웠지요? ^^)

 

 

 

 

 

목요일엔 『안티 오이디푸스』를 토요일엔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 “불온한 인문학”은 목요일 강의와 함께, 토요일엔 함께 책을 읽는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는 목요일 강의를 통해서 만난다면 토요일 세미나에서는 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읽는다. 권의 책이 어떻게 연결되는 지도 궁금하다.

 

진석 : 빌헬름 라이히는 20세기 초에 독특한 정신분석 학자였다. 그는 대단히 이상한 현상을 목격하게 되는데 당시에 사회 하층부를 형성하고 있었던 노동자 계급이 분명히 계급의 해방을 위해선 무엇을 해야 할 지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다.

 

 

: 한국 정치에서도 자주 나오는 말이기도 하다. 왜 계급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가?

 

진석 : 그렇다. 빌헬름 라이히도 아는 것과 실천이 확연히 분리되는 현상 목격한 것이다. 더군다나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세상에서 노동자들도 돈의 규칙을 따르는 한에서 그들이 품고 있었던 계급 해방의 욕망이라는 것은 사실 자본가들의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반대했지만 그들의 욕망에 있어서는 자본가들에게 타협하거나 종속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라이히가 던진 질문이 “왜 대중은 혁명적이지 않는 가” 다.

 

들뢰즈·가타리는 질문을 이어받아서 이렇게 대답한다. “문제는 대중이 혁명적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욕망이 혁명적인가 아닌가” 다. 혁명의 열쇠 혹은 해방에 대한 잠재력은 어느 누구에게 어떤 계급에게 본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초월적인 법칙이라도 받아들이지 않고 빠져나가지 않는 힘 종속되지 않겠다는 욕망 자체에 있는 것이다.

 

말은 굉장히 간단하지만 사실 우리의 욕망을 사회적으로 건전하다든지 바람직하다는 기준과 분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좋은 학교 가고 좋은 회사 입사하고 잘 먹고 잘 살라.’ 는 사회의 요구는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을 따르지 않을 때 죄의식을 갖게 한다든가 혹은 잘못된 삶을 살지 않나. 하는 불안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이 욕망은 어디서 온 것이란 말인가?

 

 

: 그 불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이 거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욕망이 혁명적일 수 있을까?’ 를 궁금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들처럼 사는 걸 욕망하는 게 그렇게 나빠요?’ 하고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더라. 어떻게 해야 할까? 단순히 욕망을 줄여라. 이런 문제는 아닌 거 같은데?

 

진석 : 보통 우리가 욕망하는 것들을 보자. 이것들은 사실 대부분이 타자의 욕망이고.. 사회가 나에게 명령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타자의 욕망이 다 나쁘냐’ 그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우리의 활동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다. 어느 누구의 활동도 동일한 것이 아니다. 각자가 놓여 있는 맥락 상황은 서로 다르다. 거기에서 욕망의 선이 나에게 주어질 선을 따를 때와 아닐 , 각각의 경우가 다르다. 원칙에 따라 다른 것이다.

 

문제는 동일하게 ‘이것은 좋은 것이다.’ 하고 다른 욕망의 가능성을 꺾어버릴 때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타성적인 존재니까 ‘정말 그래’ 하고 쉽게 길들여지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번 강의를 듣다보면 타성적인 우리의 존재에서 ‘야성“을 끌어 낼 수도 있을까?

 

진석 : 하하~기대하시랏~

 

 

 

: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혁명, 욕망~ 그리고 야성? 이런 단어가 나오니 흥미가 돋긴하는데~ 문제는 너무 어려워보인다! 『안티 오이디푸스』와 친해질 있는 좋은 방법 없나?

 

진석 : 『안티 오이디푸스』는 읽어 보는 것이 좋은데 쉽지 않다. 현재 나와 있는 판본은 절판인데다가 최선의 번역본도 아닐 뿐 더러 원래 내용 자체도 쉬운 내용이 아니다. 일단 빌헬름 라이히의『파시즘의 대중심리』를 토요일 집중세미나에서 읽으면서 강의 예습을 하시고, 목요일 강의를 듣고,『안티 오이디푸스』를 직접 읽으면서 복습을 하면 어떨까. 중간 중간 읽어야할 프로이트 논문도 몇 편 있다. 그것도 조만간 공지할 예정이다. 이렇게 읽는다면 아마도~! 그 어렵다는 『안티 오이디푸스』의 출구를 찾기가 한결 쉬울 것이다.

 

 

 

: 혹시 출구만 있고 나가는 문은 없는 거 아닌가?

 

진석 : 하하^^ 그건 책임 못지겠다~~

 

 

 

10주동안 강의를 맡아줄 최진석 선생님~ 기대하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를 마디로 한다면?

 

진석 :『안티 오이디푸스』는 욕망의 해방에 관한 책이다. 욕망의 해방은 결코 범죄도 아니고 살아있는 존재에겐 필연적인 충동이다. '욕망해도 좋다.' 라는 것이 이 책의 중심테마다.

 

 

 

 

 

빽빽한 메모로 가득한 최진석 선생님의 『안티 오이디푸스』. 그가 풀어낼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벌써 부터 기대가 된다.

 

 

[5월 21 개강-10주 과정]

Ⅰ 트랙 2 강의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트랙 2 강의 안내는 요기!

http://nomadist.org/xe/bulin/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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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지난 3월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

20주 동안의 긴 여정 중 10주간의 트랙 1이 끝나고 있다.

불온한 인문학을 통해 수유너머 N에 접속한 후

월요일에는 이진경 선생님의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강좌를 듣고

목요일에는 ‘불온한 인문학 강의-자본론’을

토요일에는 ‘불온한 인문학 세미나’로..

불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유진님을 만나봤다^^

인터뷰어/ 화 (불온한 인문학 튜터)

인터뷰이/ 유진 (불온한 인문학 1기)

 

 

*이 인터뷰 기사는 불인강 튜터의 질문에 유진님이 직접 글로 답변하는 형태로 이뤄졌습니다.

 

 

 

불온한 인문학을 처음 신청할 때 가장 기대했던 것이 있다면요?


으하하...처음 신청할 때 기대했던 마음에 대한 역사를 읊어보면 줄줄이 사탕처럼 정말 길고도 길어요. 마치 이진경 선생님 강의에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기대어 있는 모든 것이, ‘우주’ 전체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구절처럼 말이지요.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체적 발단이라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요, 고등학교 때 윤동주의 ‘쉽게 씌여진 시’를 읽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네요. 시 자체도 아름다웠지만, 시를 쓰는 이의 강직함을 높게 평가하고 있던 저로써는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제가 살아가야 할 여러 가지를 고민하였던 것 같아요.

이를 테면 지금도 그렇죠. 예술 분야에 종사하게 되면서 저의 삶과 작업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작업을 하느냐는 어떻게 살아가느냐와 직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단한 작업들(그림들)은 많지요. 매체에 구애되지 않기 때문에 저의 의지가 들어갔다면 어떠한 것도 작업이 될 수 있으며, 작품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모든 것이 제 자신의 제어에 달려있었어요.

 

그러나 그것들이 내 안에서 너무나 쉽게 나오는 것이 괴로웠어요. 자아 내면의 상처 같은 유아적 감성표현의 표출 등 한정적 영역에서도 답답함을 느꼈고요. 그리고 학교를 졸업하며 작업을 하는 것을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평생 내가 지향해야 할 점이 어디인지가 고민스러웠습니다.

저는 작업 활동과 병행하기 위해 일을 적게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어요. 그렇게 고생을 하며 생활비와 씨름하면서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다양한 작업을 하는 것이 무엇을 위해서인가. 나는 결국 잘나가는 작가, 소위 작업이 잘 팔리는 작가, 부와 명성을 가진 작가라는 ‘공리’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렇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탐구가 피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라는 의문이었지요.

 

그 밖에 종교적인 문제에서도 자본주의와 부딪혔고, 또 홍익대 청소부 아주머니 사건도 큰 몫을 하였습니다. 모교였기 때문에 학교생활 내내 마주쳤던 아주머니들이 학교를 점거하신 모습을 직접 보게 되면서 느끼는 충격과 무기력함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내 힘으로 생각할 수 없는 무지를 더 돋보이게(?) 하였습니다.

 

10주 동안 불온한 인문학을 하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요?


 

처음 소개글을 보았을 때는 좀 거창하다는 생각을 하였었던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불온한 사람이 될 수 있을지가, 강좌를 수강하는 우리 모두가 불온한 사람들이 될 수 있을지가 참 의문스러웠어요. 무슨 만화 <20세기 소년>의 한 장면이 떠올랐었지요! 그렇지만 그저 저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보자.’라는 마음으로 신청을 하였었습니다.

그러나 트랙 1을 마치는 지금 이 시점에서 느끼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으면서 개인으로서의 삶이나 사회를 바라보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불온한 인문학> 강좌로 끝나는 것이 아닌, 앞으로도 꾸준히 공부해야 하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여러 가지의 얼굴로 우리 생활에 너무나 많이 침투해있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론적으로 ‘자본주의가 어떠한 것이다.’라고 습득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생각이 될 정도에요.

 

이론적인 학습으로 끝나지 않고 매주 토요일에 가졌던 세미나의 시간들도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는 데에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또 저와 직업이 다른 다양한 분들과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개인적으로 제게 참 즐거운 시간들이었고, 생각이 넓어지는 멋진 순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트랙 1에서 맑스의 자본을 공부하면서 미술 학원 알바도 하고..

또 미술 작업도 하고 있는 유진님~세미나 시간에 얼핏 듣기론 고민도 많은 것 같아요..?

 

헤헤헤! 이러한 글들을 적었다가 저의 직장(?)에서 보게 되면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좀 무서운데요?

학원 선생님으로 지내다 보면 원장님께 이러한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이 학원을 자기 학원으로 생각하고 일해라.’,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있는데, 칼 퇴근하지 말고 수업시간보다 더 미리 나와서 아이들을 가르쳐라.’, ‘아이들이 선생님 바뀌는 것을 힘들어하니 일을 쉽게 그만두지 마라.’ 등... 이러한 저의 윤리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것이죠.

물론 제가 학생이었을 때를 알기 때문에 학생들이 얼마나 간절히 좋은 결과를 원하는 지를 잘 알고 있고, 마치 제 동생들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스스로 가지는 신념들인 것이지 원장님께서 저를 윤리적으로 공격하시면서 노동시간 외의 업무를 강요하실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에 합당한 돈이 지불되면 원장님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 윤리적인(?) 저의 희생으로 마무리 됩니다.

 

사실 원장님이 경쟁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의 미래도 그렇게 생각해주실지 짚어 보면 뻔히 알 수 있는 문제이지요. 단체 회식을 하여서 단결력을 높인다거나, 큰 학원 같은 경우는 높은 직위의 선생님들에게 지분을 투자하게 하여서 발목을 붙잡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지요. 그러한 내막들이 속속들이 보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 <불온한 인문학>을 수강하면서 생기는 매력이라고나 할까요? 하하.

 

현재 수유너머N에서 이진경 선생님 강의도 듣고 있고..최근엔 [죽음의 식탁]이나... [코뮨주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등등 책도 부지런히 읽는 것을 봤는데요? 생명에 대해 다른 친구들 보다 굉장히 예민한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아요?

 

얼마전 대형마트에서 2만원 주고 산 토끼 두 마리를 키우다가... 그 중 한 마리가 죽었어요. 약하게 태어난 토끼여서 잔병치레가 많았고, 병원 입원비가 하루 5만원이었는데 수입이 거의 없는 학생인 제 힘으로 키우고 있었기 때문에 입원을 시키지 못하고 약만 먹이다가 죽게 ‘내버려’두었던 것이었습니다. 정말 제가 한심스러웠습니다.

한편으로 제가 100만원 하는 고양이를 키웠어도 그랬을지 생각하면 이미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제 자신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전 동물을 키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참회하기위해 동물 보호 단체에 가입하여 후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동물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강아지나 고양이와 같은, 인간이 애완동물로 사랑하는 대표적인 동물들에만 연민을 느끼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생각에 미치자, 제가 무심결에 죽이거나 먹고 있는 여러 생명들을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행여나 직접 죽이지는 않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안락사 없이 잔인하게 살육되는 동물들의 죽음에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가 한 몫 한다는 사실이 참 슬프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이진경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 인간이 자연의 주인이기 때문에 단순히 동물에 대해서 어떠한 ‘자비심’으로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든지, 자연적인 삶이라는 것에 대해 목가적인 생활을 떠올리고, ‘그곳으로의 회귀’라는 식으로 환경을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우스운 관점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에 물건을 쉽게 샀다가 쉽게 재 팔아버리는 습관이 있는데, 그러한 태도 또한 자연을 도구로 생각하는 것과 별 다름이 없다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죠. 또 그러한 행동 사이사이에서도 은연중에 가치를 ‘값’으로 매기고 행동하는 제 자신이 신기할 정도로 자본주의에 물들어있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을 직시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해보는 부분에서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변의 친구들에게 불온한 인문학을 소개한다면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더라도, ‘자본주의’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며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고 다가가는 첫 스타트 장소로서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독파해보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지신다면 더 좋고요. (스스로 책을 많이 읽으시게 될 겁니다.) 단순히 <불온한 인문학>과정을 수강하면 자본주의에 관련된 모든 것이 마스터되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혼자서 더 공부해보고 싶은 것들이 하나 둘 생기는 것이 제게 가장 좋았습니다. <불온한 인문학>을 하면서 자발적으로 여러 가지 책들을 읽게 되었던 것이 그 때문이었어요.

 

공부를 하고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 무슨 ‘운동권’이어야만 한다는 인식은 악성댓글만큼이나 우스운 생각인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에 대해 어떠한 단체로서 세력을 이루고 한 목소리를 내야한다는, 편향된 부분이라는 오해만큼 우스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단순히 옳고 그르다는 흑백논리로 말하기 위해 공부하는 과목 또한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개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태도, 인식 등이 점점 자라날 때 비로소 거대한 자본주의라는 틀 또한 여러 형태로 변형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틈틈이 일과를 쪼개 자본주의를 공부하였기 때문에 쫒기는 시간들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직장인이시라면 공감하실 것 같습니다. 헤헤!) 좀 더 끈기를 가지고 꾸준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또 맑스의 ‘자본론’에서 등장하는 생소한 용어들 또한 아직은 오래된 친구처럼 익숙하지는 않고요. 하지만 꾸준히 공부하게 되면 제 몸에 점차 익숙해질 것 같습니다. ^^

 

욕망에 대해서 다루는, 트랙 2도 정말 기대가 됩니다. 들뢰즈는 미술 분야에서도 중요한 인물 중에 하나인데, 미술인들이 아닌 다양한 사람과 그의 책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참 기대됩니다! ^.^

 

불온한 인문학 트랙 2 가 궁금하시다면~~!

클릭!!

 

http://nomadist.org/xe/bulin/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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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 /불온한 인문학 1기! 미술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학부를 졸업한 후 지금은 이것저것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작업도 간간히 하는) 하면서 어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꽃다운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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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불온한 인문학"은
“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불온한 사유를 위하여” 라는
야심찬 포부를 밝히며 시작된 대중의 공동 학습의 장이다.

함께 하는 친구들도 다양하다. 20대 부터 시작해서~ 30대, 40대... 끝은 어디일지 정확하게 몰라요 무한대~^^
매일 매일 출근 도장 찍는 성실한(물론 겉으로만 속으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모르는!) 직장인도 있고
과감하게 학교도 직장도 싫다~ 수상한 일을 작당 모의하는 이도 있고
새내기 직장생활 하랴 공부하랴 매번 강의 시간 빠듯하게 뛰어오는 이도 있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슴 깊은 곳에 "불온성" 이 만큼은 가지고 있다는 것!

목요일 개강 이래로 매주 목요일은 "자본" 강의를 듣고 토요일에는 관련 책을 함께 읽으며
집중 세미나를 하고 있는 불온한 인문학 수강생들...
20주간의 과정 중 맑스의 "자본"을 읽는 첫 번째 트랙이 끝나는 즈음...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화창한 5월의 토요일...
가족, 직장, 친구... 여기 저기 부르는 곳도 많고..
설령 아무도 안 불러도
봄바람 부는데로 방황하고도 싶었지만...

그들에겐... 맑스의 "자본"을 공부하는 것이.. 혹은... 지금 내 삶에 대한 "고민"을 풀어갈 "방법"을 찾는 것이 더 우선이라는데...

불온한 인문학을 함께 하는 친구들은 도대체...! 뭐가 그렇게도 고민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더냐.. 한번 들어나 보자^^

 

인터뷰어 : 튜터 해피, 화

인터뷰이 : 석관, 승원, 봄, 근배, 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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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관님은 어때요? 원래 작년 가을에 했던 맑스 콜레기움으로 연구실에는 처음 접속했는데요?
그때 보다 훨씬 밝아지신 듯??

 

 

석관 : 그땐 정말 연구실이 낯설고 어색했어요~ 다들 아는 사이 같은데, 나만 모르는 사이 같고.. 그래서 사실 많이 노력했고요~ 그래도 불온한 인문학 친구들은 거의 다가 연구실에 처음 온 분들이라 덜 어색하더라고요. 아예 처음 부터 시작이니까.
처음엔 공지 뜨자 마자 너무 반가워서 얼른 신청할려고 했어요. 그런데 자기 소개 같은 거 쓰라 그래서..
이거 어쩌나.. 못쓰겠는데.. 하고 며칠 고민하다가 짧게 올렸답니다. 하하.

 

근배 : 저도 공지 뜨고 나서 바로 올리려고 했는데... 자기 소개 때문에 안 올렸어요. 그런데 석관님이 엄청 짧게 신청글 쓴 거 보고 그냥 올렸어요. '아 이렇게 해도 되나?' 하고 말이예요..

 

화: 정말 나쁜 본보기를 보이셨군요. ㅜ 괜찮아요. 그래도 신청했으니 뭐 용서~ ㅎ ㅎ

 

 

석관님은 콜레기움 끝날 때도 에세이도 쓰셨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데. 맑스를 읽으면서 어때요? 벌써 한 육개월 읽으신거 같은데요?


 

석관 : 원래 제가 고민하는 것은... 존재와 의식, 혁명과 정치..! 이런 거예요.
그런데 이게 워낙 폭이 넓고 깊기 때문에...쉽게 이야기 하기가 어렵고요..
맑스를 읽으면서 자본이 가지고 있는 모순.. 나 역시도 자연을 착취하고 있구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고..

 

미숙: 저는 백수로 지냈던 시간이 좀 길기도 길었고.. 저희 아부지는 평소에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마라" 이런 말씀 자주 하셨거든요..
저도 사실 이 말이 싫긴 했지만 '돈을 버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몽사 쌤이 강의 중에
"왜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아야 하느냐"고 이야기를 들었을때...'아 그렇구나. 나는 왜 그 생각 못했지.' 하고 생각했어요.
자본을 배우다 보니 이전에는 내가 왜 힘든 줄 몰랐는데..
아 이래서 힘들었구나.. 뭐 이런 걸 알게 됐어요. 내 고민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을 안거죠.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안에 있는 모순들을 알게 되면서 일을 하는게 더 힘들어졌어요.
그래서 요즘 가장 큰 고민은.. '일을 하면서 자본론을 배우고 동시에 한다는게 힘든 것같다.'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힘든 와중에도... 하고 싶은 게 있긴 해요. 구체적인 계획은 아직 없지만요..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무슨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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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숙 : 아직 구체적인 건 모르겠고.. 그냥 순수 미술이요.. 사실 직장 생활 하면서 생긴 꿈인데요. 아무래도 직장생활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않으니까 뭔가 다른 일이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림에 대한 꿈으로 이어진 것 같아요.

 

석관 : 저는 이런 게 자본주의 안에서 생기는 분열 같아요. 미숙님도 그렇고..
보통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열증을 안겪을 수가 없어요..  '내가 하는일이 이런 일이었어?' 하는 배신감있잖아요. 내 행복이 아니라 착취를 당하고 있는 사실...
사실 저요. 예전엔 아침마다 회사에서 하는 체조를 당연히 했는데요. 요즘은 마음이 달라졌어요. 자꾸 하기 싫고 대충하게 되요. (좌중 웃음^^)
이 분열을 극복하거나, 정리하거나.. 종합해야 하지 않을까요? 저는 그러고 싶은데 그게 쉽지는 않은 것 같아요. 여건이 닿는 한 계속 가봐야겠지요?

 

정답을 다 알고 계시네요?!



해피 : 사실 이런 고민이 직장을 그만 둔다고 바로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임금 노동자, 비임금 노동자 모두 자본주의 안에서 고민을 안고 사는 거지요..

 

화 : 모든 사람들이 분열을 가지고 산다고 생각해야하지 않을까요?


봄 : 각자의 삶에서 만나는 맑스를 다 안고 사는것 아닐까요?

 

 

승원님은 어때요?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와 연구실에서 공부할 때의 느낌이 많이 다를 것 같은데요?



승원 :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다른다 이런 것 보다는.. 연구실에 오면 다른 공간에 비해 획일적이지 않은데서 오는 생기가 느껴져서 좋아요. 
대학원은 사실 사람도 적고.. 토론을 해도 몇 몇만 하고 뭘 해도 참여한단 느낌이 안들거든요. 그에 비하면 연구실은 모두들 참여한다는 느낌이 든달까요?
그런데 사실 지난 학기엔 계획했던 것 보다 자본 공부를 많이 못했어요~ 다음 학기엔 열심히 할래요~ ㅎ


미숙: 저는 이제껏.. 내가 왜 힘든지 모른채 살아 왔는데... 대부분 그게 사는거라고 생각하지 내가 왜 힘들까 그렇게 생각하지를 않으니까...
수업을 들으면 힘든 이유가 정리가 되요..
요즘 저는 과도기를 겪는 기분~~~ 공부를 더 하면 아마도 힘이 생기겠지요?

 

근배님은 어때요? 근배님의 고민은 다른 분들 보다 철학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던데요?



근배 : 저는 다른 분들하고 좀 다른데요.. 사실...불온한 인문학에서 만난 친구들은 모든 문제를 자본주의 때문이라고 하는게 꼭 그것만은 아니란 생각도 들어요.
항상 이야기하지만 뭐가 맞는건지 모르겠어요.. 뭐랄까.. 저는 좀 더 확실한 데이터를 가지고 근거를 찾아가는 작업에 더 끌리는데요.
자본에선 그걸 찾지 못해서...

 

 

불온한 인문학 처음 신청할 때 근배님이 풀고 싶은 질문은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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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배 : 왜 사는가? 왜 살아야되나...현재 내가 어떤 형태로 어떤 곳에서 존재하고 있는가...여러가지의 질문들을 풀고 싶었어요. 다른 곳에선 이런 고민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접해볼 수 없었고 그래서 오게 된 거죠..
지금 우리 삶의 강제들이 사라질 수 있을까. 강제하는 외부의 힘은 살아가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것이 아닌가? 완벽하게 강제하는 힘이 없는 게 가능할까.
이런 저런 의문들이 생기고 배우면 배울 수록 의문만 많아져요.


해피: 자본이 모든것에 대한 문제라기보다는
세미나를 통해서 풀어내고자 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강제하는 힘이 있다면 무엇일까..'하는 건데요..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고민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화 : 맑스가 정확하게 어떤 상을 보여준 것도 아니고... 우리가 할 일은 강제하는 힘을 넘어서는 새로운 삶을 창조를 하라고 이야기 하는것 같아요. 전 그래서 매력적인데요.


석관:  자본론을 읽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본론을 선물하고 싶었어요. 사실 저는 읽으면서 제가 가졌던 맑스에 대한 오해도 많이 풀었어요. 지금까지 맑스가 읽히는 것은 자본의 본질을 밝혔기 때문이 아니예요? 그래서 유용한 것 같은데. 그런데 가끔 근본주의자들은 저 보고 뭐 자본을 아직도 읽냐?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실망했죠. (격한 말씀은 %^&^**$##$# 삐리리 처리 하였습니다^^)

  

봄님은 평소에 들뢰즈와 맑스라는.. 인생의 숙제를 이 커리큘럼에서 발견하고 기뻤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어때요?



봄: 사실 전요.. 제가 쓴 석사 논문을 다시 쓰고 싶었고.. 거기에 딱 맞는 커리큘럼이기도 했고.. 제 인생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클리어하게 확 풀고 싶었어요! (이기적인 생각이지요?^^) 하지만 사실이 그래요. 좀 더 단순화 시키려고 시작했던게 불인강이었는데..점점 지나면서 생각이 많이 복잡해지고 있어요. 저는 구조에 대한 문제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했었어요. 자본이라는 거대한 구조가 모든 인간의 삶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자꾸 그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근본적인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런데 또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하고 질문을 해보면...또 자본이라는 구조안에서 사고되기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은건가 싶기도 하고, 여튼 좀 많이 복잡해진게 사실이예요.

 

봄님이 꿈꾸는 세상은? 가끔 농담처럼 하는 노후 계획도 재밌는데요?



봄: (아~ 그건 나중에^^ 오늘은 좀 진지하게 이야기 해보면요...)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하면 제가 꿈꾸는 사회는 막연하게 비국가사회예요. 비국가라는 것이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 아니라 ‘국가’가  지금 우리에게 느껴지는 부정적인 권력의 모습으로 느껴지지 않은 어떤 구심체로서의 비국가의 모습이지요. 그런데요 토요일마다 집중세미나를 하면서 그 상이 구체화되기보다는 좀 더 복잡해지고,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요.

그리고 처음에 열심히하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작했는데...커리큘럼을 다 따라가기가 쉽지 않다는걸 느껴요. 다른 분들은 되게 열심히 하는데..나만 덜 열심히 하는 것 같아서 자극도 많이 받게 되요..
저요~ 들뢰즈는 열심히 할래요..^^ 앙띠 오이디푸스는 좀 더 열심히 읽고 생각을 넓혀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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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터 해피, 화 도 트랙 2에선 더 열심히 공부할랍니다^^ 아우 벌써 부터 기대 만빵!
이날 함께 하지 못한 다른 친구들...의 목소리도 남은 10주 안에 꼭 들으러 갈테니.. 기다리세요^^
불온한 친구들의 목소리를 담은 인터뷰, 후기는.. 앞으로도 쭉 이어질 예정입니다. 기대하세요.

 

 


트랙 2에선 들뢰즈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쁜 소식이 들립니다!
불온한 인문학 트랙 2 개강 커밍쑨~~ 공지는 요기! 클릭!!!   http://nomadist.org/xe/121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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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대중 공동 학습의 장,

“불온한 인문학” 트랙 2를 개강합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일주일에 강의 1회`세미나 1회의 방식으로 총 5개월 동안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난 10주동안의 트랙 1 과정을 마치고

이제 트랙 2가 시작됩니다.

이번 1기에 한하여 트랙 2 신청을 받습니다.

 

 

 

주요 프로그램

Ⅰ 트랙 2 강의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Ⅱ 트랙 2 세미나 :

대중의 흐름과 욕망의 정치학-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그린비

고병권, 『추방과 탈주』, 그린비

 

강사: 최진석

튜터: 정행복, 문화

일시: 2011. 5. 21(목) ~ 2011. 7. 30(토)

수강료: 3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http://nomadist.org/xe/bulin

문의: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 연구실 대표 번호 (070) 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1.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 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2. “불온한 인문학” 트랙02에서는 10주간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3.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4.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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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오늘은 인터뷰 두번째 시간! 지난번 불온성에 대해 기존 존재자들 사이의 구획을 깨거나 와해시키는 존재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사이보그나 박테리아가 불온한 존재라는 말에 대해서도 설명 부탁드려요. 


A. 물론 정말 그런가 물을 수 있고, 가령 사이보그가 어째서 불온한가 되물을 수 있죠. 통상 우리는 사이보그란 말에서 공상과학영화에 등장하는, ‘기계가 장착된 인간’정도만 떠올리죠. 하지만 사이보그는 그 경우에조차 유기체와 기계의 결합체를 의미해요. 다시 말해 그것은 유기체와 기계의 구분을 와해시키는 존재들이라는 점에서 중간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기계와 도구가 하나의 연속성을 갖는다는 점을 안다면, 그것은 유기체와 도구가 결합된 존재자 모두를 지칭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라면 근본적으로 이미 사이보그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건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이란, ‘정상인과 다른’이란 의미로 쓰지만, 무언가에 기대어 사는 자들, 일본 식으로 표현하면 ‘폐를 끼치며 사는 자’들이라 인식돼요. 헌데 우린 일반적으로 남들에게 언제나 기대 사는 자들입니다. 그건 남들에게 선물을 받는 자들이라는 뜻도 되지요. 이점에서 우린 모두 장애인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자들만이 장애인으로 분류됩니다. 무엇이 그들을 장애인이 되게 만드는가? 이는 장애인을 정상인과 분할하는 현실적 조건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이로써 장애인의 존재론은 자연스럽게 장애인의 정치학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Q. 이번 강의의 다양한 사례들은 평소 관심 있던 것들이셨나요^^? 
아니면 불온성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것인지?


A. 둘 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평소 관심 가던 주제이니 모아서 강의하게 된 것이기도 하죠. 그러나 평소에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이번 주제에 대해 단서 등을 제공했지만, 이를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다루려고 하게 되면서, 그 모든 것이 다른 것으로 되돌아왔지요.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되어서 말입니다. 덧붙이면 장애인이나 비정규직 문제 같은 것은 현실에서 제가 만나고 경험했던 것들을 통해서 제게 끼어든 것이기도 합니다.





Q. 선생님께서는 2009년도 도쿄에서 1년간 일본의 비정규직 운동에 대한 연구를 하셨지요? 일본 비정규직 운동판의 여러 활동가들을 만나며 인터뷰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때의 경험을 이번 강의를 통해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는지요?


A. 한국에서도 비정규직 운동 하시는 분들을 몇 분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그런 경험들이 이 강의를 준비하는 데 또 다른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지요. 가령 비정규직의 경우, 일본이나 한국에서 비정규직 운동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예전에 관심 갔던 노동 운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을 존재론적 차원으로써까지 밀고 올라갔던 거지요.





Q. 수유너머에서 선생님 이름으로 강의를 걸면 매번 사람들이 많이 모입니다. 그건 샘 강의만의 특별함 때문일 텐데요, 어떻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지 물어보면 남세스러우실 테니, 수유너머에서 강의하시는 것에 대한 선생님만의 의미 같은 걸 여쭤볼게요.


A. 학교와 연구실에서 강의를 하지만 그 밖의 곳에서 많이 하는 편은 아닙니다. 공부하고 싶은 것, 쓰고 싶은 것이 많아서 밖으로 안다니는 편이었어요. 강의한다는 것도 활동인데, 요즘 너무 안한다는 생각에 늘리긴 했어요.
연구실에서 강의할 때 들으러 오는 사람들은, 나름 알기도 많이 아시고 기대하는 바도 크기 때문에 강의하는 사람에게 부담을 많이 줍니다. 그래서 어느 강의보다도 가장 긴장을 강하게 하는 강의가 되죠. 그래도 쉽게 하려고는 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으면 안되니까. 무엇보다 같이 생각하고, 촉발한다는 의미에서 긴장이 큽니다.

Q. 그간 선생님의 화두였던 ‘외부’의 사유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A. 외부란, 어떤 문제를 사유하는 방법론적인 전제, 개념이지요. 그것은 모든 것을 외부에 의해 사유한다는 사유의 일반적 방법론입니다. 강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도 외부의 방식으로 불온한 것들의 문제를 사유한다면 어떤 것이 될 것인지에 대한 실험적 시도입니다.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신청글을 올려주셨어요. 개강일이 기대됩니다. 11일 월요일 일곱시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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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 홍대의 작은용산 '두리반' 이진경 샘 특강 풍경은 요기!
강좌를 수강하는 데 도움이 될 책 기사는 요기!
강좌 관련 문의 및 신청은 요기를 클릭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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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Q. 최근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홈페이지를 보면 불온함이 주요 화두입니다. 이번 강좌의 제목도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이고, 3월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도 그렇습니다. 단행본 <불온한 인문학> 총서도 기획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불온함에 대해 간단히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불온성이 없는 인문학은 하지 않는 게 좋다는 문제의식에서 연구실 회원들이 모여 몇 가지 활동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달부터 시작된 <불온한 인문학>은 책 <자본론>과 <안티-오이디푸스>를 통해 가정과 국가, 자본 등 이른바 ‘안정성’의 토대와 대결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6개월간의 세미나와 강의를 통해 스스로 자기 삶에 대해 사유하는 장을 만들고자 모였습니다. <불온한 인문학>이 불온성을 통해 인문학을 재정의하려는 시도라면, 이번 봄강좌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불온성을 사유하고, 이를 통해 불온성을 바탕으로 존재론을 사유하려는 시도입니다. 강좌이다보니 7주간 제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강의하는 형식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수유너머N에서 공동으로 기획한 프로그램들이니 이 둘은 연결되는 점이 있겠지요.


Q. 안녕학세요. 이번 강좌의 반장을 맡게 된 호연입니다. 저는 이제 대학교 2학년이고, 공대생이라 ‘불온성’, ‘존재론’ 등의 용어가 낯설기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이 이야기하시는 맥락에서 이 단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미리 수강을 준비 중인 분들께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한 말씀 부탁드려요.


A. 불온함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닙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 같은 것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것이나 이유, 사고방식이나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어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순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지요. 특히 이번 강의는 존재 자체로부터 불온성을 함축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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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론이란, 가령 휴머니즘을 비판했던 후기의 하이데거의 경우를 보아도 존재의 의미에 대해 관심과 이해를 가지는 인간을 통해서만 접근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차라리 인간에 대해서조차 인간 아닌 것들을 통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인간 아닌 것’을 하나로 묶어 다룬다면, 인간중심적 접근과 대칭적인 것이 되고 말 겁니다.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각각 특이성을 갖는 존재자들을 통해 존재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런 특이한 존재자가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존재의 특이적 요소를 우리를 포함하는 존재 자체의 요소로 사유하려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선택한 특이적 존재자들은 우리가 익숙해있는 것들을 횡단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이는 존재 자체를 익숙한 내부성이 아니라 낯선 외부성을 향해 열어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로써 존재 자체를 불온한 것으로 사유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존재론이란, 저에게 단지 철학적이기만 한 것도, 단지 사변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적이기 이전에 정치적이고, 사변적이기 이전에 현실적입니다. 가령 장애인을 통해 사유되는 존재란 어떤 식으로든 장애인 운동이나 그와 관련된 정치와 처음부터 결부가 되어있지요. 또한 역으로 이런 존재론을 통해 그런 운동이나 정치의 문제를 존재론적 차원으로까지 소급해서 근본적으로 다뤄볼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 먼저 1강에서는 불온함이란 무언지, 우린 언제 불온함을 느끼는지, 그런 질문에서 강의를 시작할 것입니다. 이후 불온이라는 개념에 대해 새끼 치며 설명하기보다는, 불온함을 야기하는 존재, 불온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겁니다.



Q. 각 주의 제목들이 특이합니다. 저마다 이색적인 주제의 강의가 배치돼 있는데요, 장애인, 프레카리아트, 사이보그, 박테리아, 패티시즘. 모두 얼핏보면 특이하고 수적으로도 흔치 않습니다. 게다가 몇 가지 빼고는 한 번도 연결지어 본 적 없는 주제들입니다. 사회적 소수자라고 묶기에는 인간 아닌 것(박테리아)이 끼어 있고, 정치적 연대를 위해 모이기에는 민망한 특이성(패티시즘)이 끼어있습니다. 사실 그 점 때문에 강의가 매혹적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주제들을 선택하고 연결하게 되셨는지요.





A. 이런 것들의 공통점은 일종의 ‘중간적인’ 존재자들이라는 겁니다. 기존 존재자들 사이의 구획에 따라 명료하고 뚜렷하게 구별된 것들이 아니라, 반대로 그런 구별을 깨거나 와해시키거나 중간에 끼어 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에요. 저는 이것이 불온함을 사유하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불온한 자들이지요.


Q. 불온한 자들이 위와 같은 특이성을 가진 이들이라고 하지만, 운동이나 정치에서 누구보다 그들이 주체여야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당사자주의’ 가 떠오르는데요.


A. 전 당사자주의가 잘못된 운동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려는 특이성은 이와 다른 것입니다. 이 특이한 존재자들이 하나같이 나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근본에서 나에 해당되는 것, 바로 나의 문제, 우리 모두의 얘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모든 특이성이 그들만의 특성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특이성, 존재의 특이성을 이룬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할 겁니다. 그래서 그것은 그들에 대한 ‘각론’이 아니라 존재론의 일부로서 다루어질 수 있는 거지요. 이는 제가 ‘존재론적 평면화’라고 명명하는 사고방법을 통해서 밀고 나갈 겁니다. 우리 모두 장애인이고, 우리 모두가 프레카리아트
, 우리 모두가 사이보그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패티시스트가 돼야 한다고도 말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당사자라는 말을 쓴다고 하면, 우리 모두가 당사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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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를 수강하는 데 도움이 될 책 기사는 요기   !  http://nomadist.org/xe/Nzine/104506

(강좌 관련 문의 및 신청은 요기를 클릭하세요!     http://nomadist.org/xe/apply)


며칠 후 두번째 인터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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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서세화, 사진/김작가

 

지난 주 12일 토요일에 불온한 인문학 심포지엄이 있었습니다. 관계자 분들께서 맛있는 인절미를 준비해주셔서 심포지엄 중간 중간에 우적우적 먹었습니다. 뒤풀이도 있었는데 전날 목감기 코감기 원 플러스 원을 겪고 몸 상태가 저질이었던지라 아쉽게도 1부 까지 밖에 참가를 못 했습니다. 아니 그런데 어떻게 후기를?? 하시는 분들. . 나눠주신 자료를 참고해서 쓰고 있습니다. 사회는 고봉준 문학평론가 님이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번 심포지엄에서 처음 뵈었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발표자 분의 발표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능력이 존경스러웠습니다. 너무나 핵심을 콕 콕 집어서 알맹이만 쏙 쏙 시원하게 정리해주셔서 참가자분들이 박수를 많이 쳐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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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발표자 분은 화 님이셨습니다. 수유+너머N에서 가장 재미있는(?) 문학 세미나를 이끌고 계십니다. 화 님의 발표 주제는 <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양상>으로, 인문학 담론이 어떻게 유행하고 있고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지를 발표하셨습니다. 화 님은 책 소개를 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작가를 하고 계셔서 그런지 방송계와 출판계를 넘나들며 방대한 자료들을 예시로 인문학 담론의 유행 양상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인문학 유행 흐름이 어떻게 현재 사회 문화에 미친 영향의 흐름을 한눈에 훑어 볼 수 있었습니다. 화 님의 지적 중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돈을 경멸했던 인문학이 이제는 돈을 벌려면 인문학을 해라!’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돈과 닮으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문학이 하나의 스펙이 되어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쇄신하고, ‘남들보다 열심히 배우고 익혀서 가치를 창출하는 실용 학문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고의 방향을 유도하는 체계적인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무서워 소름이 돋았습니다. 포스코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 강좌를 노골적으로 지식을 통해 생산성 향상을 이끄는 지식근로자를 양성하는 교육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문학마저 기업의 성장을 위해, ‘경제 발전을 위해 더 나은 국가를 위해 쓰여져야 하는 곳. 모든 것이 실용적이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 모든 것을 실용의 논리로 가공하기를 강요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배제 또는 제거해버리는 폭력이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는 현실. 지금 인문학은 껍데기라도 살아남기 위해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기업의 인문학 강좌 등 그 모습을 다르게 변형하면서 소비되는 것으로 생존의 타협을 본 것 같습니다. 반항하지 않는, 얌전한, 무언의 동의로 말입니다.


 

화 님처럼 저 또한 인문학이라는 고고한 이름에 휘둘리는 것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저또한 불온한 인문학과 수유+너머 세미나를 참가하기 위해 적지 않은 것을 투자했습니다. 첫 월급으로 불온한 인문학 수강 신청비를 냈고 강좌를 듣기 위해 퇴근 시간이 다가오면 일이 더 없기를, 회식이 없기를 조마조마해하며 다행히 제 시간에 연구실에 오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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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발표는 술 취하면 러시아어로 말을 하신다는 전설이 있는 진석스키최진석 님의 발표로 <불온한 인문학, 또는 소비 시대의 반인문학>이라는 주제였습니다. 최진석 님은 인문학 위기 담론의 핵심은 인문학의 과소 소비에 대한 논쟁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인문학이 안 팔리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저 또한 취업 시장에서 안 팔리는학과를 나왔고 직접 안 팔린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겪었던 입장이라 이 말이 너무나 와 닿았습니다. 그리고 최진석 님은 대학 안과 밖에서 인문학이 과잉 소비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바야흐로 인문학의 위기입니다. 사실 인문학 위기의 근원은 소비가 아니라 생산, 즉 변화된 시대사적 지형 속에서 다른 생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실패와 무능력에 있음을 지적한 것이죠. 담론 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이 변화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구태의연한 영광만을 재현하려고 애쓰는 인문학 생산자들이 소비자들만을 탓하며 위기를 운위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인문학이 새롭게 달라진 생산 조건을 적시해 주고 있습니다. 인문학의 생산은 다른 생산 즉,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로서의 생산에 대한 물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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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떤 이미지를 통해 생산되고 소비되어 왔을까요? 최진석 님은 이것을 인문학의 휴머니즘문화주의라는 신화를 통해 알려주십니다. ‘휴머니즘의 시대라 일컬어 졌던 르네상스 시대는 사실은 약육강식의 전쟁 시대였으며 보편적 인간애나 인간의 존엄 사상에 이끌리기는커녕 간교한 지략과 냉혹한 열정에 의해 추동된 영웅 시대였습니다. ‘르네상스 휴머니즘이란 어디까지나 근대의 신화요 근대의 휴머니즘이 자신의 기원으로 참칭한 상상적 이미지인 것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휴머니즘이란 근대에 정착된 일단의 이데올로기적 내용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허구적 이미지가 인간의 이름으로 가능한 모든 폭력과 지배, 세계의 소비에 이용되어 인간은 생산과 소비의 주체로서 굳건히 서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문학은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동시에 그가 속한 공동체의 발전을 견인하는 동력원으로 인식된다고 합니다.

 

인문학에 어떤 과대한 목적을 투사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근대 인문학이 밟아왔던 오류를 반복할 것입니다. 지금의 인문학은 건전한 시민 육성의 교육적 프로젝트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그러나 인문학에 쏟아지는 수많은 요구들과 비난들, ‘인간을 찾고 시민으로 변화시키며 공적인 삶에 정착시키는 역할에만 머물 것인가? 인문학은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부하고 희망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통상적인 삶의 관성에 불편하고 낯선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반()문학, 불온한 인문학이 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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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로 수유+너머N의 진중권, 정정훈 님이 <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발표해 주셨습니다. 정정훈 님은 불온한 인문학이란 인문학을 공부하는 자들로 하여금 무엇보다 사유하게 하는 인문학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유란 이미 암묵적으로 전제된 원리나 규칙, 혹은 공준에 따라 논리를 전개하거나 개념을 구성하는 작업이 아니라 사유에 암묵적으로 전제된 공준들의 정당성을 의심하고 그러한 공준의 체계에서 도출 될 수 없는 앎을 구축하기 위한 지성의 고투라는 것입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특정한 양상으로 코드화된 사유의 경로들로부터 벗어나고 그러한 방식과 코드들에 맞서 다른 사유의 길들을 만들어가는 사유 활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과 더불어 조성된 인문학의 위기 국면은 대학 인문학의 성격을 상당히 변화시켰습니다. 인문학적 사유란 국가기관이 인증한 권위 있는 학술지가 규정하는 규칙에 따라 이루어지는 코드화된 사유가 되었습니다. 인문학은 점점 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만이 관심을 갖는 협소한 전문지식을 생산, 가공, 유통하는 폐쇄적 공간이 되어버렸습니다. 대학 바깥의 인문학도 새로운 실용적 지식을 얻기 위한 영감의 원천이나 각박한 삶을 견디기 위한 치유와 위로의 수단, 혹은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양의 의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불온한 인문학은 이와 같은 체계 내에서 생산되고 유통되는 앎을 주조하는 원리들을 와해시키는 폭력을 행사하는 사유의 활동입니다. 불온한 인문학의 과제는 사유를 촉발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최진석 님은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셨는데요. 들뢰즈는 사유는 폭력에 의해서 발생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연하다고 여겨졌던 전제들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어떤 사태에 직면하게 될 때, 기존의 앎의 질서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어떤 사태와 마주칠 때, 우리의 지성은 혼란과 고민에 빠지게 되며 비로소 그것들을 규명하기 위한 사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유를 촉발하는 낯선 사건과의 조우가 바로 폭력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불온한 인문학이란 바로 기존의 지배적인 인문학적 사유의 이미지(창의력을 함양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교양이며 각박한 경쟁사회 속에서 상처입은 마음을 치유하는)에 대한 폭력이라는 것이죠.

 

 

 발표를 들으면서 드는 생각은 인문학만큼 다채롭게 논의 또는 비판받는 학문이 있을까, 였습니다. 고고한 학문으로 취급받아 특수 계층만 접할 수 있었던 학문이기도 했다가 돈 못 벌어온다고 까이고 또 시대 상황에 적응한다고 미필적 고의로 상업에 이용당하면 타락했다고 까이고. 인문학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 참 많아서 인문학은 참 피곤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심포지엄을 통해서 아무 의심 없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인문학의 개념이 좀 더 확장된 듯합니다. 생각할 거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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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신드롬과 불온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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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

 

- 시   간 : 2011년 3월 12일(토) 13: 00 ~ 18: 00

- 장   소 : 대학로 흥사단 강당

- 사   회 : 고봉준(문학평론가)

- 참가비 : 무료

 

 

불온한 인문학을 선언한다!

 

● 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양상 (문화)

 

● 불온한 인문학, 또는 소비시대의 反인문학 (최진석)

 

● 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정정훈)

 

● '희망의 인문학'은 어떤 희망을 가르치는가? (손기태)

 

● 인문학, 그 실수-방황의 현장 (박정수)

 

 

공동주최 : 휴머니스트 출판사

 

 

 

오시는 길

약도

* 지하철

   4호선 혜화역 하차 → 1번 출구와 2번 출구 사이에 위치

* 버스

   파랑(간선)버스 : 101, 102, 104, 107, 108, 109, 140, 143, 149, 150, 151, 160, 161, 162, 273, 301, 407

   초록(지선)버스 : 2112

   혜화역 또는 서울대병원 정류장에서 차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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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작년 말 튀니지에서 처음 시민들의 ‘반역’이 시작되었을 때만해도 한국인들의 반응은 그리 진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잊을 만하면 간간이 이어지던 ‘그 동네’의 작은 소요라는 생각이 대부분이었고, 이런 인식의 나이브함은 국내 언론이 ‘반정부 소요’나 ‘무질서 상태’라고 묘사할 때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이 흐름이 점차 아랍권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어, 무바라크의 퇴진을 이끌어내고, 카다피를 끝장낼 정도로 진행되고서야 비로소 ‘정신이 번쩍 들 정도의’ 현실감을 얻게 된 듯하다. 인터넷 뉴스는 트리폴리에서 날아온 속보로 가득차고, 기민한 블로거들은 다양한 경로로 입수한 현지 사정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있다. 진정 ‘아랍의 봄’이 찾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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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멀리,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땅에서 벌어지는 민주화와 혁명의 불길에 어떻게든 말 한마디로라도 거들고자 하는 열혈 블로거들, 누리꾼들의 활약을 보면서, 침묵에 잠긴 대학의 인문학을 고민해 본다. 물론,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는 인문학자들이라고 왜 역사의 격변에 관심이 없겠느냐마는, 실상 삼삼오오 모여 하루의 진전에 관해 논평하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지 귀청을 울리는 ‘한 소리’는 들리지 않는 게 현실이다. 강의와 세미나, 글을 통해 현실 개입적인 말과 사유를 펼치기 전에 먼저 ‘전공’을 따지고 ‘전문성’을 가늠하며 ‘자격’을 검증하는 게 인문학의 관성인 탓일까? “리비아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자네 정치학이 전공인가?” “아닌....데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실제로 현재 대학에서 양성되는 인문학은 혁명에 인색하다. 인문학은 인문학으로서 소임이 있다는 주장이 그렇다. 인문학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 그 일희일비(一喜一悲)의 순간들로부터 벗어나, ‘더 멀리 더 깊게’ 바라봄으로써 사회의 심층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어진 인문학의 소임은 새롭고 참신한 가치를 창출하고 현실에 유용한 교양이다. 하지만 인문학이 현존 질서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라치면 금세 경고장이 발부된다. “학문은 학문답게, 현실로부터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갖는 위상과 자격은 그것이 현실에 봉사하되 현실 자체로부터는 한 걸음 물러서는 데서 나온다고 한다. 뭔가 이상하고 모순된 소리지 않은가? 현실에 도움을 주는 한에서, 현실에 무관한 한에서만 학문일 수 있다니? 만일 그 ‘현실’이 기성의 질서와 가치관, 지배 체제를 뜻한다면, 이 말은 일관성을 갖는다. 거꾸로 말해, 현재를 지배하는 가치와 통념에 봉사하지 못하는 인문학은 인문학의 자격이 없다. 4대강이 얼마나 국가에 유익한지, 국민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는지를 논하는 인문학이라면 좋다! 하지만 그게 국토를 망치고 민중을 도탄에 빠지게 만든다는 식으로 말할 테면 퇴출이다! 인문학이 삼가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혹자는 당차게 말한다. 인문학의 본령은 원래 현실 개입적이었고, 혁명적이었으며, 따라서 지금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비판의 칼날을 벼려야 한다고. 옳은 말이다. 인문학이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나 가치는 현실의 파도를 건너는 ‘우아한 유람선’이 아니라, 현실을 날카롭게 찌르고, 우리의 안온한 일상을 흠집 내고 피가 날 정도로 벨 정도로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야 진정 ‘새롭다’고 할 것이다. 인문학의 혁명성을 말한다면 아마 그런 것일 게다.

 

 

그런데 실제로 인문학의 역사를 보면,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인문학은 그런 ‘불온’하고 ‘위험’한 역할을 맡은 적이 별로 없다. 오늘날 ‘인문학’이라 번역되는 ‘humanities’나 ‘philology’는 기실 혁명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르네상스 전후로 사용되었던 전자는 중세기의 ‘자유 학문’을 대체하는 것들이었고, 후자는 19세기말의 고전학 연구 경향을 일컫던 것들이다. 오히려 현대의 인문학은 국가가 사회를 일률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지적 강제의 도구로서 발달되었다. 부랑자와 거지, 도둑, 반사회적 일탈자, 비정상인 등을 ‘정상인’으로 만들어 ‘정상적인 삶’을 부과하고 나아가 ‘국가의 정상화’를 위해 스스로 헌신하게끔 개조하려는 목적으로 고안된 장치였던 것이다. 치안을 위해 작동하는 훈육·통제 장치, 그것이 현대 인문학의 기원이며 영토인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인문학에서 혁명을 기대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오늘날의 인문학이 두려워하는 것은 그렇게 다져진 영토를 떠나는 것, 책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가려는 충동이 아닐까?

 

 

나는 인문학을 공부함으로써 견고하게 나를 결박하고 있는 현실로부터 당장 탈출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문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면서 동시에 커지는 위험은 현실을 방기한 채 텍스트의 쾌락에 젖어버리는 일이다. 혁명을 종이 위의 글자로 만들고, 날마다 부대끼며 살아가는 친구와 가족, 타인들을 인간(人間)이라는 추상 속에 가둬두는 일이다. 인문학의 효용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는 그만큼 온순해지고 순응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인문학에 절망이 있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고이 남겨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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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의 군중들, 트리폴리의 시민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들에게 인문학이 모자라거나 과도해서가 아니었다(수천 년 누적된 아랍의 방대한 문헌학적 전통을 고려할 때 그들이 무지몽매하다고 비웃는 자들은 자는 본인의 무교양부터 부끄러워할 일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거리로 이끈 것이 순수하게 생계에 대한 절망만은 아닐 것이다(그런 나이브한 인식 따위로 아랍 민중을 모욕하고, 혁명을 폄하하지 말도록 하자!). 인문학은 인문학이다. 종이 위의 전통, 텍스트의 쾌락. 맞다! 그들에게, 나아가 우리에게 인문학이 의미와 가치를 갖는 것은, 인문학이 그것의 영토를 떠날 때, 묵독(黙讀)의 자아도취를 벗어날 때, 거리에서 울리는 목청이 될 때다. 아니, 적어도 거리를 바라보고, 거리를 욕망할 수 있을 때다. 그래서 학문이 아닌 인문학, 인문학이 아닌 인문학이 될 때다. 과거에 인문학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인문학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문학이 더욱 두려워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인문학이 인문학으로 남는 것이다. 묘비의 인문학. 돌 위에 새겨진 글자는 죽은 자의 이름을 가두는 감옥일 테지만, ‘짱돌’이 되어 던져지는 문자는 혁명의 초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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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1일(화)

 
설 연휴를 앞둔 2월 첫날, 고향 나들이만큼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작년에 출판사에서 걸어서 20분 거리인 연희동으로 이사를 와서 기뻤던 수유너머N이 그 이상으로 반갑고 고마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한다. 아니 그들의 새로운 시도를 흔해 빠진 ‘프로젝트’라는 말로 대신할 수는 없다. 최소한 ‘운동’이라 해야 맞다. 이 운동의 이름은 ‘불온한 인문학’이다. 거두절미하고 수유너머N이 최근 발표한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으로 설 인사를 대신한다. 부디 인문학과 사회과학이 우리 삶의 현장에서 새롭게 만나 인문학의 부흥이 아닌, 인간적 삶의 부흥의 씨앗들이 싹트길 기대한다.

  이 선언을 읽고 나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수유너머N 홈페이지(http://www.nomadist.org)를 방문하면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2011년 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1기생도 모집한다. 맑스의 <자본> 입문,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세미나와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도 열린다. 20011년 다시, 아니 새롭게, 불온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실천들을 시작해보자.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바야흐로 ‘인문학의 부흥 시대’가 왔다! 고고한 상아탑에 파묻혔던 대학이 대중 계몽의 현장을 자처하는 한편으로 인문학 최고위 과정을 신설해 CEO들을 입학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 또한 은행과 백화점, 문화 센터와 각종 공공 기관이 앞다투어 고전 강좌를 개설하면서 지식과 교양에 목마른 대중에게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국가는 ‘인문 한국’이라는 거창한 부흥 프로젝트를 내세우며 연간 400억 원에 달하는 재정을 투입함으로써 위기를 외쳐대던 이들에게 자본의 ‘생명수’를 부어주고 있다. 박사 실업자를 면치 못하던 수많은 시간 강사들, 대학원생들은 열심히 연구 계획서와 보고서를 작성하고 실적을 증명해줄 논문들을 마구 찍어낸다. 여기 인문학이 부활했다! 고독하게 고사(枯死)하는 꼬장꼬장한 학자가 아니라 프로젝트의 수주에 목숨을 건 유능한 매니저가 오늘날 인문학 연구자의 이상이 되었다! 마이더스의 손을 가진 국가라는 막강한 파트너도 얻었다! 인문학이 새로운 국학, 21세기 국풍(國風)의 기치 아래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한때 인문학의 위기가 운위되고 그 사멸의 징조가 우려스럽게 진단되던 시절이 있었다. 취업 전문 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서 인문학이 힘겹게 투병하며 죽어가던 때가 있었다. 아카데미의 수장들이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국가와 기업, 사회의 도움을 애타게 호소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언제 그랬느냐 싶게 인문학은 화려한 재탄생을 노래하고, 도처에서 부활의 종소리를 울려댄다. 상품 광고의 아이디어 속에서 인문학은 ‘돈이 된다’는 찬사를 얻고, 텔레비전에 출연한 신(新)지식인들은 인문학이 이제 지식 시장에서 유통되는 최신의 상품임을 자랑한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는 ‘인문학의 부흥’이라는 시대 현상이야말로 역으로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임을 냉정히 직시한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인문학의 좀비화를 부추기는 바닥없는 진창에 다름 아니다. 국가와 자본의 월급쟁이가 되자마자 인문학은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되어 버렸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이란 무엇인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인문학을 논하기 전에 먼저 지금-여기의 삶을 돌아보라. 대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들이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하고 있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태연하게 ‘인간’과 '문화'를 떠드는 인문학이 도대체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단 말인가?

  상황은 명확히 문제적이다. 작금의 지배 질서와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과 문제 제기를 그만 둔 인문학은 기껏해야 교양 있는 시민의 육성을 필생의 소명인 듯 껴안고 있다. 정보 산업 사회의 유능한 인재들을 키우기 위해 인문학적 창의성이 투입되고, 각박한 경쟁 사회에서 인간적 여유를 찾아주기 위해 인문학적 교양을 제공하며, 부랑인과 노숙자 같은 사회 부적응자들을 정상적인 시민으로 되돌리기 위해 인문학적 지식이 동원되고 있다. 사회적 유용성과 적응성의 배양, 혹은 순응하는 시민의 양성이야말로 진정 인문학의 사명인가? 인문학이 감옥이나 병원에서 수인과 환자들을 '정상인'으로 교육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어느 철학자의 통찰이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오히려 인문학은 그 탄생의 목적과 소명을 지금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라고 말해야 옳을 성싶다.

  다른 한편에는 인문학의 ‘실용주의적 유행’에 반대하며 인문학적 본질이 현실을 넘어선 것, 지고한 정신적 가치에 있노라고 강조하는 인문주의자들도 있다. 그들은 인문학이 실용적 효용이나 실리적 이득을 얻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고 세계의 원리를 궁구하여 인격을 완성하는 지고한 삶의 안내자라고 주장한다. 오래된 안내자로서 ‘고전’이 강조된 이유도 그런 까닭일 것이다. 따라서 인류의 오랜 지혜가 담긴 책, 고전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이야말로 인문학의 존재 이유라는 게 이상주의적 인문주의자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모든 견고했던 것들도 대기 중에 녹아 없어지는 이 세계에서 어떤 고전이 감히 영원을 구가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의고주의적 인문학이 보여주는 몰역사성과 탈사회성에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격조있는 생활의 품격을 누리기 위해 고전을 읽는다는 CEO들의 진심도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그들이 사원들에게 고전을 ‘읽으라’고 내미는 순간, 고전은 그것이 등장했던 역사와 사회의 맥락을 벗어나 지금-여기서 강제와 폭력, 순응과 체념의 도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공부를 순수한 인성의 도야란 차원에서 기대하지 않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 숭앙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물신주의적 숭배와 멀리 있지 않다. 고전을 불멸의 정전으로 만들고 현재적 삶의 척도로 삼을 때, 지식과 권력, 자본의 삼자연대가 승리하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

  자본과 국가의 이해에 편승한 덕분에 호의호식하는 순응주의자의 인문학. 대중적 삶의 지평에서 유리되어 고전에만 칩거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인문학. 양자는 하나같이 현실 직시를 거부하고 자기만의 환상에 몰두한 채 인문학이라는 영토에 자기 깃발을 꽂는 데 열중하는 불모의 인문학에 다름 아니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명분으로 세상을 속이고 자신을 기만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다.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데 있지 않으며,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데서 성립하지도 않는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다시 갈라놓는 것도 물론 아니다.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넣는 것만이 우리들의 탐구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탐구의 여정에 붙일 만한 적절한 이름을 아직 모른다. 우리는 인문학에서 출발했지만 그 도착지는 인문학이 아닐 것이다. 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낯선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인문학과는 다른 새로운 종(種)이며, 어디선가 항상-이미 시작된 낯선 출발점을 가리키는 지표이다.

  ‘부흥 시대’의 인문학은 세상을 바꾸는 전복의 힘도, 익숙한 것도 낯설게 바라볼 수 있는 불온성도 거세당한 박제에 불과하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점화시키는 급진적 비판, 안일하게 수용하고 반복하면 그만인 습속의 도덕에 등 돌리고 당당히 떠날 수 있는 사유의 용기, 배제되고 학대받는 자들을 괄호쳐버린 교양의 기름진 바다에 불쏘시개를 던져넣는 과감한 행동력, 이것이야말로 ‘이미 와버린’ 인문학이 아니라 ‘도-래할’ 인문학, 혹은 아직은 이름붙일 수 없는 새로운 사유와 활동의 단초가 된다.

  지금-여기서 우리에게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문학 부흥의 깃발을 높이 쳐드는 게 아니다. 지금은 차라리 그 깃발을 꺾어버리고, 현행의 인문학에 대한 반대를 선언해야 할 때다.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에 대결을 선포할 때다. '위기'를 떠들며 자금과 보호를 구걸할 게 아니라, 오히려 위기를 더 멀리 밀고나가 마침내 폭파시켜버리는 것. 그때야 비로소 인문학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던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들여진 영토를 떠나려 한다. 그 첫걸음은 현행의 ‘인문학의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이로써 우리는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의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재전유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삶과 앎의 방식을 창안하는 활동은 문제의식을 공명하는 또다른 고민들과의 만남 속에서 더욱 첨예해지고 증식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이 만남을 기다린다. 이 만남을 통해서 우리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사유가, 우리의 활동이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되고 또다시 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에 우리는 혼돈과 불안을 낳고 마침내 전복의 위험한 함성을 불러올 ‘불온한 사유’를 기다린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정녕 그 날을 위한 찰나의 섬광에 불과하리라.




글 / 휴머니스트 대표 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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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자본주의 비판과 불온한 사유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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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이 대중의 공동 학습의 장, “불온한 인문학”을 시작합니다.


한때 운위되던 인문학 위기담론이 무색하게 오늘날 인문학은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인문학 지원을 위하여 대학에 연간 수백억의 예산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또한 도서관을 비롯한 공공기관, 문화센터, 그리고 심지어는 기업이 개최하는 다양한 인문학 강좌에 수많은 수강생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인문학의 부흥을 넘어서 인문학의 유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와 같은 인문학 유행 현상은 인문학이 처한 심각한 위기의 다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CEO 인문학’과 ‘백화점 인문학’이 보여주는 바는 이제 인문학이 자본의 이윤창출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며, 연간 394억원의 국가예산이 지급되는 ‘인문한국’ 정책은 국가정책에 인문학이 더욱 깊이 종속되고 있다는 현실을 알려줍니다. 지식정보 자본주의 시대의 가치증식을 위한 새로운 수단이자 국가경쟁력 강화의 도구로서 인문학은 화려하게 부활하였고, 이 부활은 인문학의 시대를 도래시켰습니다. 아주 세련되고 교양 있지만 자본과 국가의 권력에 의해 극도로 순치된 안온한 인문학의 시대를 우리는 지금 목도 하고 있습니다.


시대의 지배적 통념을 논쟁의 대상으로 만드는 비판의 급진성, 사회의 지배적 가치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상의 전복성, 세상의 지배적 삶의 방식을 뒤엎는 사유의 불온성을 거세당한 채 인문학은 기름진 교양주의의 지적 장식물로 퇴락하거나, 협애한 전문가주의의 실적물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문학의 시대는 인문학의 몰락과 함께 도래하고 있습니다.


‘인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앎이 여전히 유의미한 것이려면, 이런 시대에 정작 필요한 것은 인문학의 깃발을 드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인문학에 반대하고 그것과 대결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정상화'하는 지식으로서의 인문학과 대결하는 것. '위기'란 이름으로 경제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위기를 차라리 더 멀리 밀고 가 폭발하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때 비로소 '인문학'이라 불리는 지식은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으로의 길을 촉발하는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본의 이윤창출을 위한 도구나 국가 발전전략의 수단으로서 인문학, 삶의 현장과 유리된 맹목적 전문지식으로서 인문학, 자기만족적 교양주의 인문학을 거부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있는 인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불온한 인문학’ 1기를 시작합니다. ‘불온한 인문학’ 1기를 통하여 우리 시대의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맞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기획하며, 지성의 공동성, 공동의 지성을 함께 만들어 갈 동료들을 만나고자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욕망이요 힘이며, 불온성으로부터 인문학을 다시 사유하려는 의지입니다. 이 과정을 함께할 친구들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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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프로그램

 

I. 맑스의『자본』 입문 ― 다시, 반(反) 자본주의의 깃발을 들자!

 

 

II.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 읽기 ― 가족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o 강          사 : 정정훈 · 최진석

o 세미나 튜터 : 정행복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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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온한 인문학”은 2011.3.3.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욕망 이론과 대중 정치를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1.20.목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우리은행 1002-043-230955 (예금주 : 문화)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정행복 010-9404-8403, 문화 010-6210-3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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