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고요를 좋아한다. 숲의 나무들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를 들을 때는 이러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선 쥐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괴롭다.

-1796년 펜실베니아 주지사에게 인디언 추장이 한 말

 

 

대학을 다니며 삶에서 잊어선 안 될, 언제나 가슴 속에 간직해야 할 것이 생겼다. 그건 사랑도 아니요 우정도 아니요 진리를 향한 지적 욕구도 아니었다. 그건 바로 원금 상환일과 통장의 잔고였다. 대학 재학 시절, 나는 더 이상 부모님을 착취할 수 없게 되자 정부 보증 학자금 대출에 ‘손을 댔다’. 그땐 대출이자만 냈기에 생활은 그럭저럭 견딜 만 했다. 하지만 졸업 후 원금도 상환하는 지금, ‘그 날’이 오면 탈수기를 강으로 놓고 돌리기라도 한 듯 통장에선 돈이 탈탈 빠져나간다. 그렇게 다달이 나는 가슴 한 구석이 텅 비는 경험을 해야 한다. 채무자의 삶은 언제나 비굴한 법, 빚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증발되었으면, 새하얗게 잊혀졌으면 싶다. 저 학자금 대출액 말이다.

 
 

1. 가난을 부르는 빚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라 했던가? 그러나 지난날을 돌아보면 수중에 돈이 없다는 건 언제나 부끄러운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빚지는 건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렇지만 요즘 빚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싶다. 오히려 빚이 많을수록 은행에선 우량 고객으로 대접하는 시대 아닌가? 어쩌다 홈쇼핑에 낚여 넋을 놓고 화면을 바라보면 12개월 할부로 얻지 못할 건 세상에 없을 것만 같다. 빚 권하는 사회. 특히 대학진학률이 80퍼센트가 넘는 대한민국에서 등록금을 감당해야하는 학생과 그 부모들은 모두 이 빚쟁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하지만 누구나 안다. 이 빚은 누구도 대신 갚아줄 수 없다는 것을. 어떤 생산수단도 갖지 않은 이가 시장에 내놓을 것이라고는 노동력밖에 없을 터. 그러니 우리 빚쟁이는 언제나 누군가로부터 착취 받아야만 범죄자가 되지 않고 살 수 있다. 빚, 그 중에서도 화폐로만 상환 가능한 빚은 오직 삶의 목적을 화폐에 두게 한다.
 

‘빚’이란 결국 아직 생겨나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위한 수속이다. 많은 학생은 졸업 시 졸업증서와 맞바꾸게 될 장학금[학자대출금] 반환 계약서를 쓰면서 연대보증인인 부모와 형제들의 이름을 확인한다. 임노동의 치욕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 것이다. (나카타 노리히토-블랙리스트 zine 1호 중)


백번 맞는 말이다. 그리고 졸업 후 당장 갚을 길이 트이는 것도 아니다. 2010년 20대 취업자 수는 1981년 4분기 이후 최저였다. 외환위기 이후 실업이 급증해 2010년 5월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대 대졸 실업자가 20만 4000명을 기록했다. (<한국의 워킹푸어>, 책보세, 142쪽) 그렇게 우리는 일상적으로 빚을 떠안고 살아가야 한다. 하루빨리 청산하지 않으면 불어나는 이자 때문에 우린 평생 빚에 전전긍긍하며 살아야 한다. 맑스는 <자본>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기원, 이른바 본원적 축적의 역사를 밝힌다. 목가주의적 경제학자는 자본주의의 형성 모델을 개미와 베짱이의 예로 설명하겠지만, 맑스가 보기에 자본주의적 시장은 국가와 자본의 물리적, 금융적 폭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개미가 그러모은 것은 판돈이었고, 그것은 늘 누군가로부터 강탈해온 것이라고 봐야 옳다. 강고한 소유권을 중심으로 국가 권력은 저임금의 임노동자와 수많은 부랑인ㆍ아사자를 양산했다. 국가 관료들에 의해 날치기로 임금인하법, 단결금지법, 빈민법, 공유지 인클로저 법이 통과되었고, 보호무역과 국채 전가, 중과세 등은 국민들에게 수많은 빚을 안겼다. 국가 폭력과 함께 인민들은 빚쟁이가 되었고, 이 빚을 갚기 위해 노동자가 안되고는 생존이 불가했다. 이 구조는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상시적 약탈의 조건 속에서 자본주의 역시 유지된다고 해야 할 판이다. 국가가 나서서 정규직의 고용을 ‘유연화’해 ‘비-정규직’의 비중을 높이고, ‘간접 고용’을 양산해 노동자들을 일상적인 반고용 반실업 상태에 빠뜨린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국민에게 일상적인 빚과 불안을 전가한다. 고용노동부에서 발표한 간접고용 법안의 확대 적용 실시, 국민연금의 주식 투자 운용 시도 등은 공적 재산인 세금의 증권화를 부른다. 오늘날 본원적 축적은 더 크고 일반적으로 가동되고 있는 것 같다.
 

이제 삶은 끝났고, ‘살아남는 일’만이 시작되었다. 이 넓은 대지와 하늘은 삶을 살 때는 더없이 풍요로웠지만, ‘살아남는 일’에는 더없이 막막한 곳일 따름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시애틀추장의 연설 중)

 

 

2. 풍요를 부르는 빚

 

 

빚이라고 해서 꼭 화폐로만 갚을 수 있는 빚, 사람을 가난하게 만드는 빚만 있는 건 아니다. 나에게는 ‘갚고 싶은 빚’이란 게 있으며, 그것은 살면서 더 많이 찾아내고 평생 내 방식대로 갚아나가고 싶은 것이기도 하다. 이 빚은 삶을 건강하고, 풍요롭게 만들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고양시킨다. 빚에도 좋은 빚과 나쁜 빚이 있는 것이다. 최근 인디언의 삶과 사상에 대한 공부를 통해 들게 된 생각이다. 인디언들에 대한 수많은 인류학적 보고서가 있지만 나에게 책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는 인디언 추장과 샤먼의 직접적인 육성이 담긴 선언문집이라는 점에서 뜻 깊다. 인디언들은 만물이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에게 서구의 이방인, ‘얼굴 흰 자들’은 너무도 낯선 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땅이나 물건을 배타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친구인 동물을 인간만을 위한 가축으로 사육하고 함부로 죽이는 일 모두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자신들을 있게 한 어머니 자연에 대한 얼굴 흰 자들의 파괴행위는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인디언들은 자연에 대해 언제나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대지는 생명을 사랑하고, 우리에게 자신이 가진 선물을 나눠 준다. 그것에 보답하기 위해, 우리는 이 대지 위에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을 잘 보살펴야만 한다.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델라웨어 족 상처입은 가슴의 선언)

 

당신이 대지로부터 무엇을 취할 때마다, 그것이 음식이든 공기든 옷이든, 당신은 그 답례로 무엇이든 대지에게 주게 된다. 명상은 바로 그런 것이다. 당신의 작고 낡은 자아를 위해 개인적인 어떤 것을 얻는 것이 명상이 아니다. 명상은 일종의 눈뜸이고, 되돌려주는 것이다.( <겨울 눈으로부터 여름 꽃에게로> 체로키 족 구르는 천둥의 선언)

 

이들의 철학에 따르면 나를 존재하게 만든 가장 가까운 원인은 생물학적 부모만이 아니다. 입을 것, 먹을 것, 숨 쉬는 공기도 동등하게 나를 존재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그래서 인디언은 하나하나 감사하는 삶을 살고, 자연에게 진 빚을 갚는 삶을 살았다/살아야 했다. 또한 인디언의 삶은 유약하지도, 고립적이지도 않았다. 그들은 더 나은 정치체에 대한 상을 언제나 고민했고 억압적인 권력의 출현을 언제나 예민하게 감지했다.


나는 스스로 행동하는 것을 좋아한다. 정부와 법, 그리고 소위 체제라는 것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든 것이어야 한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만의 모습을 갖고 있으며, 이 세상에 온 그만의 목적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만의 모습, 그만의 목적을 발견하는 데 필요한 자신만의 방식과 길을 갖고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 길을 방해해선 안 된다. (위와 같은 선언)

 

그들의 부채감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부채감은 만물이 이어져 있다는 일상의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인디언에게 ‘나’란 대지 위의 모카신과 다를 게 없는, 무엇과 견주어도 우월하지 않은 존재였다. 이들의 철학은 단순하고 시적이기에 많은 이들을 매혹시킨다. 또한 이들의 구체적 삶의 면면을 보며 우린 다른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난 무엇보다 가난을 부르는 빚을 단호히 거부하고, 풍요를 부르는 빚을 섬세하게 찾아낼 시야를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자본주의 외부를 사유하는 든든한 무기로도 손색이 없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현재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길이 놓여있다. 하나는 배고픔과 죽음으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저 얼굴 흰 사람들의 삶으로 사는 길이다. 하지만 그 너머에는 저들이 도저히 갈 수 없는 ‘행복한 사냥터’가 있다. (오글라라 라코타 족 여러 마리 말의 선언)




글 / 유심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이 글은 위클리 수유너머 85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에 먼저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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