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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2.06 [이진경 서평] 벽암록,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책

벽암록은 설두 중현 스님이 선사들의 화두 100개를 골라 송(頌)을 붙인 것(『설두 송고』)에다, 원오 극근 스님이 수시와 착어, 평창을 달아 만들어진 책이다. 수시는 각 ‘장’의 요지를 간결하게 요약해서 보여주는 부분이고, 착어는 화두나 송의 구절마다 논평을 한 것이며, 평창은 화두와 송에 대한 설명이다. 통상 벽암록에 대한 해설을 자처하는 책들은 거기서 다루는 화두들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그건 『벽암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긴 하지만, 원오 스님이 쓴 수시나 착어, 평창을 보지 않고선 『벽암록』이란 책을 보았다고 하긴 어렵다.

내가 『벽암록』에 대해 가진 인상은 여러 가지지만 모두 극단적이다. 그 책은 “송대 최고의 문학작품”이라고들 하는 평처럼, 내가 읽은 책 가운데 아름다운 책이었다. 또한 가장 심오한 책이며, 가장 고준하며, 가장 유머러스한 책이었다. 동시에 그 책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황당한 책이었다. 황당한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하나도 없었지만, 무언가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응을 주는, 그래서 결코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지만 너무도 강한 감동 내지 감응을 주는 책--이런 책이 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가령 이런 식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조주의 모습입니까?”([착어]하북이라 해도, 하남이라 해도 전혀 설명할 수 없다. 부드러운 진흙 속에 가시가 있구나. 하남에 있지 않고 바로 하북에 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다.”(열렸구나.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 침 뱉으려면 뱉어라. 침이 모자라면 물까지 퍼다 줄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이로다. 알겠는가? [원오스님은] 후려쳤다.)

여기서 앞의 스님은 조주스님에 대해 물었는데, 조주는 조주성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웬 썰렁한 농담? 그러나 이렇게 이해한다면 “이는 불법을 파멸할 뿐이다. 마치 물고기 눈알을 구슬에 비하는 것처럼, 닮기는 닮았겠지만 같지는 않다.” 질문에는 원오의 착어대로 가시가 있고, 조주는 이 가시를 품은 이 질문을 슬며시 받아넘기며 외통수를 날린 것이다. 조주 자신의 본래면목이 무언지 묻는 질문에, “있는 그대로”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보다시피 조주성(城)의 네 문에 대한 것일 뿐이다. 이 대답이 지엽말단이나 동문서답이라고 생각할까 싶은 노파심에 원오는 덧붙인다. “욕하려거든 해라. 새주둥이라도 빌려주마”하고. 그러나 “있는 그대로 드러난 공안(화두)”라고 하면서도 다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을 주장자로 후려친다. 아니, 어쩌라는 거야!

그런데 바로 그거다. 어쩔 도리가 없게 만드는 것. 이런 식으로 선사들의 말들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깨주고, 내가 부여잡고 있는 것을 뽑아버린다. 추리하고 생각하는 모든 근거들, 모든 분별의 근거를 뭉둥이로 후려치고 고함소리로 깨버린다. 혹은 조주나 원오처럼 우주적인 스케일의 유머로 날려버린다. 그리하여 아무 것도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은산철벽 앞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고 떠민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무엇이 옳고 그른가는 그 기준이 무언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근거나 기준이 되는 것,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은 어째서 옳은 것일까? 그것의 근거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다른 근거 때문이다. 이렇게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그 출발점은 역시 ‘내가 옳다고 믿는 것’이다. 결국 나의 생각, 나의 믿음이 내가 옳다고 판단하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불교에선 ‘아상(我相)’이라고 한다. 내가 옳다고, 아니 좀더 격하게 표현하면, 나만이 옳다고 하는 믿음.

부처가 말하는 ‘정견(正見)’이란 내 견해를 올바르게 세우는 게 아니라 반대로 그것을 내려놓는 것이다. ‘나는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다른 생각에 귀기울이고, 다른 판단, 다른 가치에 마음을 열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내 기준을 떠나서 판단할 수 있고, 그래야 무엇이 옳은가를 올바로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상’을 버리는 것, 혹은 ‘무아(無我)’가 지혜(般若)를 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서 선사들은 자신에게 묻는 학인들에게 그들이 옳다고 믿는 모든 교의나 견해, 근거를 깨주는 방식으로 대답한다. 가령 조주는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하고 물을 땐 “없다”고 대답하고, 없다고 믿는 사람이 물을 땐 “있다”고 대답한다. 그렇지만 이는 묻고 대답하는 말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할까 하는 노파심이 아마도 원오로 하여금 『벽암록』을 쓰게 했을 것이다. 그래서 가령 가장 근본이 되는 성스런 진리를 묻는 양무제의 물음에 “텅비어 성스럽다 할 것도 없다”고 답한 달마의 대답에다가 “꽤 기특한 줄 알았더니만, 화살이 저 멀리 신라땅으로 날아가 버렸구나. 매우 명백하다”면서 착어를 붙이고 있는 것일 게다(물론 다시 “명백하다”고 덧붙이지만). 이런 점에서 『벽암록』은 그 어느 책보다도 노파심이 가득한 책이다.

이 책에선 어느 하나의 확실한 근거나 교의에 안주하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다. 경전 안에서 가르침을 구하지 않고, 경전에 기대어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의 말에 기대는 것조차 그냥 두지 않는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가라”고 했고, 조주는 “부처가 있는 곳도 그냥 지나가라. 부처가 없는 곳은 얼른 지나가라”고 했다. 사실 경전이나 훌륭한 책들에 안주하려 할 때, 그 책들이 거대한 장애가 되고 위대한 저자들이 독단의 원천이 되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종지를 보고 문자를 넘나들지 못하면 문자는 어느새 죽은 문자(死句)가 되고, 가르침은 죽음의 소식이 된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그래서 불법을 묻는 질문에 손가락 하나를 펴는 것으로 대답하던 구지선사는, 자기 대신 손가락을 들어 말하던 동승의 손가락을 무참하게 잘라버린다. 그리곤 불법이 무언지 다시 묻는다. 무심코 없는 손가락을 들어 말하려는 순간 그 동승은 깨달음을 얻는다. 『벽암록』이 수많은 선사들의 말들을 다시 전하면서 깨달음을 얻었던 그들에게 “이 늙은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거냐”하고 소리치고 방망이를 날리면서도, 그 종지가 드러나는 지점을 슬며시 알려주는 것은, 그 말들을 죽은 문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구(活句)로 만들고 싶은 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선가(禪家) 최고의 보물’로 만든 이유였을 터이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아무 맛도 없고” 아무런 의미도 감을 잡을 수 없었던 저 선사들의 세계로 무지한 우리 중생들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무언가 강밀한 힘을 방사하며 험준한 절벽으로 우리를 잡아당긴다. 이해할 순 없지만 강한 감응을 주는 책이란 말을 실감한다면, 좋든 싫든 이미 그 힘의 자장 안에 들어간 것이다. 심지어 이 책은 그 철벽을 오르는 밧줄이 되어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경우 이 책은 스스로 자기가 제거하려던 것이 되고 마는 역설적 사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원오의 제자였던 대혜 종고는 ‘종문의 보물’이라는 스승의 이 책을 불살라버린다. 이, 이런 과격한···-.-;; 물론 다행히(!) 다른 필사본이 남아서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로 하여금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으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벽암록』은 읽고 이해하려 해선 안되는 책, 선가의 말로 ‘알음알이’로 헤아려선 안되는 책이다. 이해할 수 없는 감응 속에서, 이해할 수 없음에서 나오는 의문과 의정(疑情)만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 이해할 수 없는 감응을 증폭시키고 응축시켜 ‘아상’을 넘어서는 에너지로 변환시켜야 하는 책인 것이다.

어느 스님이 조주에게 물었다. “조주의 돌다리 소문을 들은 지 오래인데, 막상 와보니 외나무다리뿐이군요.” “그대는 외나무 다리만 볼 뿐, 돌다리는 보지 못하는구먼.” “어떤 것이 돌다리인가요?” “나귀도 건너고 말도 건너지.” 말해보라. 그대는 어느 다리를 건너고 있는가?


글 / 이진경(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책 속으로

어떤 스님이 동산스님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쇠 가시로다. 천하의 납승들이 뛰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

동산스님이 말했다.
“삼(麻) 세 근이다.”
---분명히 떨어진 짚신이다. 괴목나무를 가리켜 (악담을 하고는) 버드나무를 꾸짖는 꼴이구먼. 저울질을 하는구나.

이 공안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다. 이는 참으로 씹기가 어려워 입을 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담박하여 맛이 없기 때문이다. 옛사람들은 부처에 대한 답변을 제법 많이 했다. 어떤 이는 “대웅전 안에 계신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삼십이상을 갖춘 분이다”라고 하였고, 어떤 이는 “장림산 밑에 있는 대나무 지팡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산스님은 “삼 세 근”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옛사람의 혓바닥을 옴짝달싹 못하게 했다고 하겠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말저말 둘러대어 “동산스님이 그때에 창고에서 삼을 저울질 하는데 어떤 스님이 이를 물었기에 이렇게 대답했다”하기도 하고, “동산스님이 동문서답을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또 “그대가 부처인데 다시 부처를 물었기에 동산스님이 우회해서 대답했다”하기도 한다. 더 썩어빠진 놈들은 “이 삼 세 근이 바로 부처다”하니, 전혀 관계가 없다 하겠다.

너희들이 만일 이처럼 동산스님의 말을 더듬거렸다가는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참구하여도 꿈에도 깨닫지 못할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말이란 도를 담는 그릇인데 옛사람의 뜻은 전혀 모르고 다만 말만 따지니 어찌 핵심이 있겠는가? 듣지 못하였는가? 옛사람의 “도란 본디 말이 아니나 말로 말미암아 도가 나타나는 것이니, 도를 깨닫고 나서는 곧 말을 잊어야 한다”라는 말을.(하략)(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벽암록』, (상), 장경각)



추천도서

원오 극근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벽암록』, (상)(중)(하), 장경각(『벽암록』의 완역본. 번역이 아주 훌륭하다).
원오 극근,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원오심요』, (상)(하), 장경각(원오스님의 편지 모음집).
만송 지음, 선림고경총서 간행위원회 역, 『종용록』, (상)(중)(하), 장경각(『벽암록』과 동일한 형식으로 씌어진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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