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몽동과 빅 데이터 #2

Simon Mills(De Montfort University), Simondon and Big Data, Journal of Media and Communication vol. 6, "Simondon: Media and Technics"  

 








번역: 최유미 (수유너머 N 회원) 

 




 

개방 시스템들과 과잉목적(Open systems and Hypertelia)

 

 

<사회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이 빅데이터와 관련된 주장들의 신념이다. 과연 그것만이 최선일까?>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데이터, 특히 사회물리학과 관련해서 고안된 주장들을 볼때, 이들의 주장에는 논의 중인 시스템들의 개방성의 정도에 관해서는 거의 언급된 바가 없다는 점이 첫번째 논평이다. 펜트랜드(Pentland, 2012; 2014, p. 203)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에 대해서 낙관적인데, 그는 빅데이터의 잠재력은 사회 효율성, 운영 효율성과 회복력을 갖춘 설계를 통해서 안전성이 개선될 수 있는 구체화된 기술-사회 메커니즘을 유지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기술 사회를 만드는 시스템들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것, 그것이 빅데이터의 약속이다. 당신이 그것들을 이해하기 시작함에 따라, 당신은 더 나은 시스템들을 만들 수 있다. 그 약속은 멜트-다운 되지 않는 금융 시스템들,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지 않는 정부들, 제대로 작동하는 헬스 시스템들, 등등을 위한 것이다.

 

 

    그러한 제안에 있어서 한 가지 위험한 점은, 그것이 과잉 목적적인 사회 구조들의 개발을 노린다는 점이다. 이것의 함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개체화가 수행하는 중심적 역할에 대해 간략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현상들의 광범위한 영역을 이해하기 위해서이고, 실재론자의 형이상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시몽동은, 완벽하게 이미 구성되어 있는 개체들의 존재를 선험적으로 가정하는 형이상학적 이론들을 비판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그의 존재론은, 개체 발생적 작용들에 의해 개체들이 구성되기에 이르고 그리고 계속해서 개체화하는 것에 관해 더 많이 신경 쓰는 편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시몽동에게 있어서는, 시스템의 개발과 지속적인 개체화는, 연관환경( associated milieu)과 그가 부르는 바로서의 전-개체(pre-individual) 양쪽에 대한 이중적 관계의 유지 때문에 일어난다. 시몽동이 그의 개체화의 개념을 가장 분명하게 설명하는 지점들 중의 하나는 기술적 개체들과 관련해서이다:

  

 

          그러한 개체화는, 기술적 존재가 그 자신의 주위에 창조하는 환경 속에서의 인과성의 회귀 때문에 가능한데, 이 환경이란 기술적 존재 자신이 영향을 주기도 하고 그 자신이 그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는 그런 환경이다. 이 환경은 이것은 동시에 자연적이고 기술적인데 연관환경(associate milieu)으로 불릴 수 있다. 이것을 수단으로 해서 기술적 존재는 그 자신의 작동에 조건 지어진다. 이것은 제작된 환경(fabricated milieu)이 아니고, 혹은 적어도 전적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기술적 대상을 둘러싼 자연적 요소의 한정된 시스템이다. 연관환경은, 제작된 기술적 요소와 그 속에서 기술적 존재들이 기능하는 자연적 요소들 사이에서의 관계의 매개자이다. (Simondon, 1980, p. 60).

 

 

       이것으로 보아, 우리는 하나의 일관된 시스템으로서의 기술적 개체의 개체화가 의미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작동이 자신의 지속적 작동을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을 부분적으로 결정한다는 사실이라고 하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적 대상을 위한 만족스런 환경은 자연세계의 일부에 대한 얼마간의 변형에 의해서 창조된다는 점; 그리고 기술적 개체들은 외부환경에서의 변화와 관련하여 그것들을 더욱 더 개체화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수준의 비결정성을 가지고 작용한다는 점.

 

     연관 환경에 관한 명기에 더해서, 추상적인 기술적 대상과 구체적인 것과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개발은 증가하는 구체화의 과정을 통해서 일어난다:

 

 

<시몽동이 구체화의 예로 들고 있는 갱발 수력발전기 도해: 터빈과 발전기가 모두 물속에 들어있는 수력발전기다. 물과 전기라는 양립불가능한 성질이 발명에 의해 하나의 해를 찾은 것이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란 요소들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해를 찾으면서 진행된다..>

 

 

 

          기술적 대상의 구체화의 본질은 기능적 하위 시스템들을 전체적 기능성 속으로 조직화하는 것이다. 각 구조는 다수의 기능들을 수행 한다; 하지만, 추상적 기술적 대상에서 각 구조는, 전체의 기능성 속으로 통합되는 단 하나의 중요하고 적극적인 기능만을 수행하는 반면에, 구체적 기술적 대상에서는 어떤 특정한 구조에 의해 수행되는 모든 기능들은 적극적이며 중요하고, 기능하는 전체 속으로 통합된다 (Simondon, 1980, p. 31).

 

 

     그 차이는, 작동에 필요한 추상적 구조들을 포함하는 기술적 대상은 작동 상에서 서로 독립적이고 각자 단 한 가지 기능만을 수행하는 다수의 시스템들로 구성된다는 점이다. 그것들은 작동 상에서 통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체로 그들의 작동은 종종 충돌한다. 구체화의 과정은, 그러한 추상적 구조들이 어떠한 단일 구조를 이용하는 해법에 의해 극복될 때 일어나는데, 일관된 수준의 다기능성(pluri-functionality)을 가지고 작동한다.

 

 

     시몽동이 제시하는 하나의 예는 두 개의 추상적 시스(엔진과 수냉 시스템)으로 구성된 수냉식 연소엔진의 예인데, 그것의 구체화된 솔루션은 피스톤 실린더 상에 냉각핀(gill)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 냉각핀 구조는 한편으로는 실린더를 위한 구조적인 지지의 일부로 기능하면서, 공기의 흐름을 통한 냉각 문제를 또한 해결한다. 하나의 대상은, 그것의 발생과 기능의 추가적인 발전의 모든 가능성이라는 양쪽 모두로부터 추상화될 정도로 닫혀 있을 때 과잉 목적적(hypertelic)이라고 기술된다. 과잉 목적적인 도구는 어떤 계통의 완성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대해서 더 이상의 발전은 만들어 지지 않는다.

 

 

<냉각기와 엔진이라는 추상적인 구조는 공냥식, 냉각핀에 의해 냉각과 구조적 보강이라는 다기능성을 확보하면서 구체화된다.>

 

 

 

      비록 지금까지의 기술(description)은 기술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특정되어 왔지만, 이 일반적인 스키마는 또한 시몽동에 의해서 다양한 범위에서 광범위한 현상들에 적용된다. 예를 들면, 인간 진보의 한계들 The Limits of Human Progress(2010, p. 230)에서, 시몽동은 기술적 발전을 서술하기 위해 사용된 것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여 인간의 문화적 진보 (‘인간이 생산하는 것과 인간이라는 것에 의해 구성된 활동과 존재의 전체 시스템’)를 서술한다. 즉 불일치(disparity)를 해소하기 위해서 다른 도메인들 (예를 들면, 언어, 윤리학, 종교, 기술) 사이의 구체화하기라는 진보적 작용으로서 말이다. 어떤 도메인이든지 그 도메인 속에서의 진보는, 그것이 포화되지 않고 (과잉 목적적이지 않고), 추가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그리고 다른 도메인들과 함께, 어느 정도의 공명을 유지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한 발전은 또한, 도메인들의 분열과 그들 관계의 변형을 포함하는 상전이를 통해 일어나는 것으로서 서술된다.

 

     하지만 우리는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의 양식에 관한 설명을 다른 도메인, 예컨대 생명체와 심리적 개체들 같은 도메인에서의 그 설명으로 너무 급하게 옮겨가는 것에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이것들의 개체화가 이해되는 방법에는 많은 유사성들이 있지만, 거기에는 또한, 예를 들면 생명개체의 개체화는 기술적 개체의 그것으로 절대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중요한 차이점들이 있다. 생명의 개체화는 연속적인데 비해 기술적 대상들의 개체화는 불연속적 도약 속에서 일어난다. 이 차이들은 너무나 복잡해서, 시몽동의 존재론에서 현재 작동하는 일반 공리적인 이해만을 요구하는 여기서는 이에 관한 설명을 제시할 수가 없다.

 

    심리적 개체들의 개체화에 관한 시몽동의 설명 또한 이러한 공통의 관점들 몇몇을 공유하고 있는데, 주체와 그 환경(milieu)과의 관계에 대한 중요성이나 문제의 극복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 하나 추가되는 관점은 의미화의 역할을 포함한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시몽동(1989, p. 126)은 신호와 의미화간의 차이점을 작동시킨다. 개체화는 문제해결의 과정을 통해서 문제가 되는 불일치의 극복을 수반하는데, 이 해결 과정의 결과는 어떤 개체(개별화, individualization)의 출현이다. 혹은 어떤 새로운 체계을 통해서 그렇게 하는데, 이것에 의해서 의미화가 또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의미화는 어떤 새로운 체계의 문제해결적 개체화를 수반하는 의미 혹은 감각의 동시적 전개이다. 반대로 신호들은, 재현적이고 전통적 정보 이론에서의 개별화된 개체들 간에 오가는 메시지와 같은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의미화는 그것의 환경과 그 자체 내부와 관련해서 어떤 개체가 개체화하는 시공간적인 현실적 성취를 표시한다.

 

여기서 시몽동이 사용하는 신호와 의미화는 펜트랜드가 사용하는 정보와 사고 사이에 외견상의 유사성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에 관한 펜트랜드의 이해가 단지 사고와 정보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는 지점에서 시몽동은 의미화와 관련하여, 개체화의 중심적인 역할, 즉 심리적 개체와 집합적인 개체 양쪽 모두의 중심적인 역할을 강조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시몽동은 펜트랜드의 설명이 쉽게 영향을 받는 과잉 목적성에 저항한다.

 

만약 우리가 시몽동의 관점에서 빅 데이터에 관한 사회학적 주장들을 따져 물어볼 것이라면 질문 되어야 할 문제다. 이 주장들이 의지하는 사회시스템들에 대한 가정, 즉 데이터의 분석을 통해서 조절되는 평형상태에서 사회시스템의 지속적인 운영이 유지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추상적인 가정에 어느 정도로 의지하는지 혹은 반대로, 아마 더 곤혹스럽겠지만, 그렇게 제안된 관리가 사회가 과잉 목적적이 될 것을 어느 정도로 요구할 것인가?

 

펜트랜드의 사회물리학이 질문들에 응답하는데 전적으로 실패하지는 않으나, 그 응답들은 제한적이다. 그의 책에서 논의된 시스템들의 대부분은 비교적 추상적인 의미에서 이해되는 시스템의 예들로서, 금융 투자, 헬스 모니터링, 마케팅 그리고 기업체의 생산성 증대와 같은 것에 관계된다. 사회의 복잡성이 의미하는 것은 다른 많은 것들뿐 아니라 이 모든 예들 역시 어느 정도 상호 연관된다는 사실이라는 것이다. 비록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라도, 펜트랜드는 그것들을 비교적 닫힌 시스템들로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사고방식에 있어서 그는 마투라나, 바렐라 그리고 루만의 이론 같은 오토포이에시스의 이론화와 가깝다.

 

 

<오토포이에시스의 닫힌시스템>

 

 

 

 

그 자체로서 사회 물리학의 주된 관심은 시스템들의 자기유지(self-maintenance), 혹은 구조적 커플링과의 관계에서 흐트러짐 없는 작용에 있다. 본질적으로 이것은 공익 사업 시스템들의 보호와 향상을 포함할 때 이해 가능한 기획이다. 하지만 그러한 비전을 총괄적으로 사회의 더 크고 더 복잡한 상황으로 확대하는 것이 정말 실현 가능한 것일까? 그런 목적은 사회의 과잉 목적적인 생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것은 설정된 목적을 항상성 조절의 목적에 맞추어 프로그래밍하는 것이다. 그러한 비전은 기술자주의를 지지하여 정치적인 것을 없애버리는 것을 권장한다.

 

이것이 개체가 유지하는 다른 관계, 그것의 전-개체에 대한 관계가 중요해지는 지점이다. 간단한 용어로 하자면 시스템이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의 그런 것이 아닌 무엇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개방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기술적 대상과 관련해서 시몽동은 아래와 같이 쓴다:

 

 

 

   기술적 대상의 존재는 이중 관계에 의해서 유지된다 한편으로는 그것의 지리적 환경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기술적 환경과의 관계. 기술적 대상은 두 환경들이 만나는 지점에 서 있고,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이 환경들 양쪽으로 통합되어야 한다. 여전히, 이 두 환경들은 같은 시스템에 속하지 않는 두 개의 세상이고, 서로 간에 반드시 완전하게 양립하는 것은 아니다(Simondon, 1980, p. 54).

  

 

     이 2차적인 관계가 없이는 어떤 시스템도 불완전하고 과잉 목적적이 될 위험에 처하는데 그것은 확고한 단일 목적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어떤 시스템이든 그것을 통제하기 위해 빅 데이터를 사용함에 있어서의 문제는, 더 넓고 자주 변화하는 환경과 통합하는 문제에 직면한다는 점인데, 변화하는 환경은 비결정론의 원천이 될 공산이 있다. 물론 이것은 항상 정치의 역할인데, 펜트랜드 (Pentland, 2014, p. 203)의 책에서는 거의 주의를 끌지 못하는 주제다. 그것은 사회의 핵심적인 목적이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유용한 행위 규범을 개발하도록 개체들을 부양하는 환경에서의 테크노크라트적인 효율성과 회복력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 속에서 그러하다.

 

     그것은 또한 총체적으로 사회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을 원한다. 만약 사회가 그런 통제에 복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것이 전술한 베니거(Beniger)의 프로그래밍의 문제인데, 그것은 목적성에 관한 사이버네틱스의 관심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질문은 펜트랜드에 의해 생략된다. 그리고 시몽동의 관점에서 중요했던 것과 같은 발명의 역할도 생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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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되기는 참 쉽다

박찬욱 아저씨의 <아가씨>(2016)





박 상 빈 / 수유너머N 회원





통쾌하고 명랑한!

 

<아가씨>는 한국영화로서는 4년 만에 칸느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 때문에 개봉 전부터 난리였다. 칸느에서는 평이 대체로 나쁘지 않은 편이었지만 딱히 좋은 편도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박찬욱 감독의 열렬한 팬도 아니고 <핑거 스미스>를 읽어보지는 않았지만(영드로도 만들어 졌는데, 그것도 보다가 말았다), 그저 한국영화계에서 간만에 신선한 영화가 나온 걸까 싶은 마음에 개봉하자마자 달려가서 봤다(물론 인디포럼에서 <문영>을 보고 난 뒤 김태리 배우에 대한 호감도가 급격히 상승한 탓도 있었다).

 

나는 퀴어영화들을 일부러 찾아보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편견 같은 게 있는 편도 아니다. 어느 쪽이냐면 단지 신선한 감각을 즐기는 편이다. <아가씨>는 확실히 신선한 명랑함을 선사한다. 인생의 향방을 결정하는 인물들의 무거운 마음, 사명감 같은 것, 그리고 철저히 파멸시켜버려야 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인물이 느끼는 자책 같은 것들, 이런 무거운 감정들은 그 속성상 확실히 포스트 모던이전 시기의 감정들일 텐데, 이런 감정은 <아가씨>1부에만 국한되는 감정들이다. 이처럼 1부는 과거 한국영화가 일제 식민지시기를 다룰 때의 여성 인물들의 캐릭터들을 그 전형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방식으로 빚어졌다. 아마도 결말 부분의 통쾌함과 명랑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리고 한국영화 특유의 비장함과 사명감을 지닌 캐릭터들을 전복시키기 위해 마련해 놓은 장치들에 관객들은 기분 좋게 속아 넘어간다.

 

속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편이 오히려 속이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는 2부와 유토피아적인 결말을 향해 기존의 억압적 장치들을 재기 넘치게 때려 부수는 3부는 통쾌함이 주된 정서가 된다. 1부에서는 형식 자체로 드러났었고 2부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의 행동으로 가시화되었던 남성적 판타지를 3부가 산산히 깨부숴버린다. 마치 야마가타트윅스터의 이단 옆차기처럼 통쾌하다. 힘 관계의 역전, 전복은 언제나 흥분을 수반하는 사건이다.

 


박찬욱의 인장

 

지난 호 <씨네21>에 실린 박찬욱의 긴 인터뷰를 읽으면서 웃었던 부분이 있다. 해외 비평가들이 발견한(발견했다고 주장했던)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부분이었는데, <올드보이>의 낙지가 <아가씨>에서는 춘화 속 문어로 등장한 것이 아니냐는, 꼭 그렇게 낙지에 집착했어야 했냐는 부분이었다. 피식하고 웃어넘기긴 했지만, 자꾸만 다시 생각하게 되는 건, 어찌되었건 그들은 어떤 영화를 보든 간에 언표된 것과 언표행위자의 관계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아주 성실한 태도임에 분명한, 바로 그런 방식으로 텍스트들을 나름의 아카이빙 목록 속에 기입하고 카테고리화 하는 작업이 비평의 기본인 걸까. 싶은 생각이 자꾸만 떠나질 않는다.

 

아무튼 박찬욱의 인장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박찬욱에 관해 논의할 때 그의 인장을 잔혹 이미지나 익스트림 이미지에서 찾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아무래도 아시안 익스트림 시네마의 카테고리 속에 포함되어 있는 감독이다 보니 더더욱 그런 것 같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나홍진이 그랬으면 그랬지, 박찬욱은 오히려 그런 익스트림 이미지들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올드보이>의 이빨 뽑기 장면이나, <친절한 금자씨>의 조리돌림 복수 장면 등에서 피는 살벌하게 튀기지만 카메라는 언제나 고개를 돌린다. <아가씨>에서도 코우즈키(조진웅)가 백작(하정우)을 고문하는 그 그로테스크한 공간에서 익스트림 이미지들이 전시되긴 하지만,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들이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분으로 보인다기 보다는 잘게 썰린 산낙지의 다리처럼 보이게 만들었다는 점이 바로 박찬욱 특유의 장기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물론 잘려나간 손가락이 썰어놓은 산낙지처럼 보이기 때문에 잔인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박찬욱은 나름의 선을 지켜가며 익스트림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재현된 익스트림 이미지를 그 이미지가 지시하는 바로 그것 자체로 보이게끔 하는 노력에 관하여, 박찬욱은 한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나 있다.

 

오히려 박찬욱의 인장이라 할만한 것은 영국식-일본식-한국식이 뒤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실내공간과 로코코 양식 소품들이 주는 강박증적인 반복의 모티프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올드보이>의 도입부분에서 천사 날개의 깜찍함과 오대수의 찌든 얼굴의 조합, <친절한 금자씨>에서 법구경과 그 속에 그려진 로코코 양식의 권총 설계도, <박쥐>에서 보드카를 마시며 마작을 즐기는 한복집 같은 사소한 것들 속에서 박찬욱 특유의 능청스러운 모더니스트적 면모가 드러나는데, <아가씨>에서 역시 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홍진의 <황해>에서의 마작과 <박쥐>에서의 마작을 비교해 볼 때 이 두 작품이 얼마나 극단적으로 리얼리즘-모더니즘의 기나긴 선 끄트머리에 각각 놓여 있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언급한 것들에서 개별 요소들은 모두 진부하고 생명력을 잃어버린 것들이지만, 조합 속에서 그 요소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재기발랄한 아저씨적 귀여움을 뿜어내게 된다(굳이 쥐어 짜 내어 조어를 해 보자면 큐티저씨 찬욱정도가 되려나? , 이런 짓도 아저씨같군).

 

 

시각의 대의민주주의

 

이제 <아가씨>의 정사씬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고 이 두서 없는 리뷰를 끝내고 싶다. 언급하고 싶은 장면은 2부의 가위자세 정사씬과 영화를 닫으면서 보여주는 배 위에서의 은방울 정사씬이다. 박찬욱은 남성적 판타지가 만들어 낸 사디즘적이고 페티시화된 비대칭적 성관계가 아닌, 다른 방식의 성관계를 그려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도상적으로 대칭적이고, 누가 누구를 주도하거나 하지 않고,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 위에 올라 타거나 하지 않는 바로 이 에로틱한 이미지들은 따라서 성공적인(전복적인) 이미지라고 평가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도식적인 역전은 언제나 제한된 조건 안에서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해 <아가씨>의 정사씬 이미지들이 성공적이고 전복적인 이미지이기 위해서는 그걸 바라보는 관객들이 이미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으로 상정되어 있어야 한다.

 

즉 박찬욱은 이미지의 자유로움을 위해 관객의 정체성을 남성성으로 고정시켜 버림으로써 자기 자신의 정체성(남성성)을 흐트려 놓는 데는 성공했다. 남성적 시선에서 벗어나는 여성적 쾌락을 재현하기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남성성을 보잘 것 없는 것, 매 맞는 것, 거세당하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었다. 나는 박찬욱이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남성적 시선으로는 늘 파악하는 데 실패해 왔었던 여성 성애의 쾌락들을 남성성을 징벌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나름 해방시켜 놓았기에, 적어도 <아가씨>(들뢰즈가 사용하는 의미로) 매저키즘적이라는 것은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자지는 잘리지 않아 다행인 백작의 죽음은 어디까지나 가미카제식 죽음일 뿐이다. 영화의 첫 번째 관객이었을 박찬욱은 이와 같은 방식의 남성성 전복을 즐거워했을까? 짐작컨대 아마 대단히 그랬을 것 같다.


 

<아가씨>를 보고 이틀 뒤, 신촌에서 있었던 여성영화제에서 몇 편의 영화를 봤다. 여성 감독들이 만든 박력있고 카와이한 영화들은 <아가씨>와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여성영화제 영화들을 통해서 <아가씨>가 지닌 귀엽고 섬세한 아저씨 감성은 그 나름의 장점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그 나름의 한계도 분명했다는 그런 느낌을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그 한계란 바로 위에서 서술한 그 남성성의 문제였다.

 

그럼에도 나는 <아가씨>를 옹호하고 싶다. 비단 김태리 배우라는 활력 넘치는 새로운 얼굴을 발견하게 된 것이 정말 즐거운 일이라서 뿐만은 아니다. 여성영화제의 트레일러 영상이 말하듯, 한국의 2015년 백 만 관객 이상 영화 중 여성 감독이 참여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다. 10년 전에 허문영 평론가가 소년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고, 15년 전에 김소영 평론가가 사라지는 여성들이라는 단어들로 표현한 한국 영화의 어떤 흐름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점점 더 고도화 되고 있는 것만 같다. 작년에는 전문직 남성들이 등장해 벌거벗은 여성들의 수난들을 해결해 주는 영화들(<내부자들>, <베테랑>, <극비수사>, <검은 사제들> )이 스크린을 죄다 점령했지만, 그 남성들은 단지 데덴찌를 잘 해서 편을 잘 만나 처벌당하지 않고 있을 뿐, 그들의 안타고니스트들과 동일한 방식의 논리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타자의 고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커녕 그 시도조차 하려 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무의식의 차원에서 그들은 언제 어느 순간에 보잘 것 없는 아이로 변할 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언제 어디서나 아이이고 싶다는 욕망에 강하게 사로잡혀 있다(<뷰티 인사이드>, <국제시장> ).

 

이러한 흐름 속에서 <아가씨>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다. 비록 당사자가 직접 자신을 현시함으로서 남성 판타지를 전복한 것이 아니라, 매저키즘적 남성에 의해 재현된 것에 불과할지는 몰라도, 그게 어디인가. 이 정도 만큼이라도 한 것은 시각문화의 대의민주주의라 할 수 있는 영화적 재현 시스템 속에서의 나름의 성과이다. 아마도 박수를 대략 세 번쯤 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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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0 : 나이 사십에 제대로 혹하고 싶은 가십거리]


90년대 학교를 다닐때 80년대 운동권 선배들의 준열한 눈빛 앞에 나는 근본없는 X세대였다. 졸업과 함께 IMF 사회에 진입해 나름 힘겹게 한 세월을 보내고 있지만, 20대들의 헬조선 앞에서는 그저 좋은시절 막차 탄 막내 꼰대일 뿐이다. 열심히 살아보려고 하는데 명예퇴직 1순위가 된 40대. 이럴거면 좀 일찍 내보내든가. 치킨집을 하기에도 젊고, 재입사를 하기에는 너무 늙은 나이. 사십이 되고 보니 알겠다. 구려 가럼 볼 것도 많고, 욕할 것도 많은 사십년 묵은 세상. 꽃병을 들기엔 한창 겁먹을 나이지만 꽃다운 욕은 찰지게 하고 싶은 사십. 인생 이모작이라는데 지난 사십년은 망했으니, 앞으로 사십년은 제대로 말아먹겠다. 



“문제는 노동이야” 

- 경제민주화와 최저임금 




전주희/수유너머N 회원




여소야대 총선이후, 첫 번째 선물이 도착하다. 


‘새누리당 참패’로 귀결된 총선 직후 야권에서는 총선내내 제기해 온 ‘경제민주화’의 각론이 아니라 ‘부실기업 구조조정’ 문제를 불쑥 꺼내들었다. 정확히 야권이 아니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그랬다. 그는 총선내내 "문제는 경제"라며 박근혜 정부의 '배신의 경제'를 이번 총선에서 심판해달라고 유권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랬던 그가 선거 후 엉뚱하게 구조조정 문제를 들고 나왔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 중심으로 제기된 ‘선제적 구조조정’은 본격적 구조조정에 앞서 실업대책 등 사회안전망이 전제가 되어야 한다며 IMF 위기 이후 진행되어왔던 구조조정과는 다른 구조조정을 제시하는 듯한 모양새다. 이에 대해 은수미 전 의원은 ‘어제는 경제민주화, 오늘은 구조조정’이라며 비판하고 나섰다. 총선 시기의 ‘배신의 경제’ 심판론과 총선 후의 구조조정의 중심에는 더불어 민주당의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있다. 그에게 구조조정과 경제민주화는 총선 민심에 대한 배신일까, 아니면 김종인표 경제의 동전의 양면일까. 


다시 총선 전으로 돌아가보자. 지난 4월 6일 민주노총을 비롯한 노동계는 2017년 최저임금 투쟁 선포식을 가졌다. 매년 이뤄진 ‘노동계’ 만의 최저임금 투쟁은 20대 국회의원 선거 과정에서 이슈가 되면서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최저임금 인상안에 대한 총선 공약이 쏟아져 나왔다. 세부안은 다르지만 모든 정당들이 9천원~1만원 가량의 인상안을 제시했고, 정의당과 더민주당 등은 노동계와 함께 기존에 주장해왔던 최저임금 1만원안을 제시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반전은 새누리당이었다. 애초에 공약에 없던 최저임금안 이었다. 4월 3일 강봉균 공동선대위원장의 입은 9000원 최저임금 인상안을 탄생시켰다. 물론 애초에 공약에 없었고, 이 마저서도 나중에 번복, 수정되었지만 최저임금 문제가 총선 기간안에 이슈가 되었고,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난 4월 28일 박근혜 대통령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파견법 등의 처리를 거듭 강조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일자리를 잃는 근로자들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며 그에 대한 대책으로 파견법이 포함된 ‘노동개혁 4법’의 국회 처리를 또 한번 힘을 주어 말했다. 

최저임금과 ‘노동개혁 4법’, 더불어민주당의 구조조정과 박근혜 대통령의 구조조정이 총선 이후 국민들에게 각기 다른 포장을 하고 국민들 앞에 도착했다. 어느 선물 포장지를 풀 것인가를 고민하기 전에 가장 허망한 것은 어느 포장지를 풀어도 모두 같은 내용물이 나오게 되는 경우이다. 


선거는 끝났다. 공약으로서 경제민주화도 끝났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는 노동과 자본, 보수와 진보의 각축장 속에서 어떤 내용으로든 채워져야하는 ‘의미화’의 과정이 남아있다. 



지금 어떤 경제민주화?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현행 헌법 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라는 말을 넣었다고 해서 ‘경제민주화의 아버지’로 대접받는 인물이다. 법제정 이전에 법을 가능케 했던 것은 87년 민주항쟁이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의 바람은 경제 영역에서도 시장 혹은 자본에 대한 민주주의적 통제의 요구로 나아갔다. 자유주의적 입장에서는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가 제대로 작동하도록 하는데 있었다. 반면 민족경제론의 입장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국가권력의 민중화였고, 정경유책과 매판적 독접자본의 거부는 사회주의를 전망한 것이었다. 법제정 이전에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적인 의미화가 서로 각축을 벌였다. 어느 세력의 경제민주화가 최종적으로 법의 지위까지 올랐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민주주의를 둘러싼 대중적인 의미화의 과정 자체가 헌법 119조 2항을 구성한 것이다. 



87년 6월 민주화투쟁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87년 이후 민주화 10년은 IMF 협약으로 매듭지어졌고, 그 뒤 10년은 사회양극화로 귀결되었다.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민중들은 일자리를 요구하는 불안정노동자가 되었거나, 대출을 끼고서라도 집을 사야 안심이 되는 불안정소유자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법 제정 이후, 경제민주화는 역대 어느 정부를 막론하고 공약과 약속, 계획과 실행에서 빠진적이 없었다. 하지만 실제 내용을 들여다보면 재벌개혁이 중심이 되었던 경제민주화의 방향은 자본에 대한 규제와 노동의 권리 실현이라기 보다는 시장의 효율성 제고에 있었다. 시장의 흐름에 방해가 되는 독점과 규제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제한되었고, 시장의 효율성을 가로막는 노동이 유연화되었고 강경한 노동조합이 후진적이라는 이름으로 철퇴되었다. 

자본에 대한 규제의 효과가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는 '신한국', '세계화',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의 몫을 체계적인 강탈을 세련되게 추진하기 위한 매너좋은 신사의 얼굴로 등장했다. 시장의 분배를 국가가 개입해 재분배의 정의를 실현하자는 것이 경제민주화의 기초적인 의미지만 국가 개입으로 인한 재분배는 역설적이게도 시장이라는 객관적인 이름 뒤에 숨은 자본에게 추가적인 몫을 재할당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배신의 경제에 대한 심판은 박근혜 대통령 뿐 아니라, 87년 당시 경제민주화의 요구를 가장 약한 수준으로 관철시킨 김종인에게도 해당된다. 따라서 김종인 대표가 2012년 출판한 제목이기도 한 ‘지금 왜 경제민주화인가’는 다시 물어져야 한다. 지금 어떠한 경제민주화인가. 


그런 의미에서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와 구조조정은 선거 이전과 이후의 말바꿈의 처세가 아니다. 그에게는 87년 이후 일관된 하나의 이념에 대한 두 표현이다. 

지난 4월 25일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김종인 대표는 그동안 지녀온 경제민주화 이념과 현실의 구조조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피력했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의 공정한 경쟁룰을 만들자는 게 핵심”이라며 “재벌개혁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번도 재벌개혁을 입에 올린 적이 업다”고 선을 그었다. 

그에게 경제민주화는 성장을 위한 시장의 효율성 제고다. “경제민주화는 시장원리를 보다 더 보완하고 공정하게 경쟁시키자는 것이다.”

국가는 과도한 복지정책으로 인해 시장의 질서를 침해해서는 안되고, 시장의 룰이 잘 지켜지도록 관리하는 ‘정원사’의 역할을 가질 뿐이라는 주장은 정확하게 신자유주의 이념이다. 김종인 대표가 젊은시절 독일로 건너가 배워온 것은 신자유주의의 조상격인 독일 질서자유주의의 이념이었다. 


김종인 대표의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어려운 중소기업 보호라는 온정적인 태도가 아니라 경제 전반의 틀을 다시 짜는 것이다. 시장의 경쟁의 룰을 다시 짜는 것, 곧 구조조정의 다름 아니다. 

1970년대 유럽을 중심으로한 경제민주화의 핵심은 노.사.정을 중심으로한 사회적 공동결정의 제도화였고, 이를 위해 친노동조합 노선이 전제된다. 하지만 김종인 대표의 반노동조합적 정서는 87년 이래 일관된다. 그의 경제민주화론에 소득분배와 노동자의 몫이 고려되지 않는 이유다. 원하청 구조가 개선되고 중소기업을 보호한다고 해서 노동자의 권리와 몫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 알바 노동자들에게 행해지는 갑질은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과 자영업으로 내려갈수록 심각하다. 자영업자들의 삶이 나아진다면 좋은 사장님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낭만어린 착각은 반시대적이기까지 하다. 


노동 문제가 배제된 경제민주화는 더욱 강한 시장화, 자본화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지난 20년의 경험이다. 하지만 노동 배제는 김종인대표의 무능력이 아니라 노동 혐오에서 나온 필연적인 결론이다. 그가 주장하는 양극화 해소는 “빈곤층에게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발동해 집단행동에 나서면 제어하기 힘들어지기 때문”[각주:1]이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경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기 보다는 대중에 대한 지배층의 공포와 배제에 기반한다. 



“문제는 노동이야” : 최저임금을 둘러싼 ‘공정한 룰’의 의미


시장의 공정한 룰을 다시 구성하기 위해서 문제가 되는 것은 87년 이래 체계적으로 배제된 노동의 몫이다. 임금의 경제적인 몫 뿐만 아니라 노동의 정치적인 몫을 둘러싼 싸움, 그것은 권리를 둘러싼 정치다. 

최저임금을 둘러싼 싸움은 이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다. 9천원이냐 1만원이냐 흥정의 문제가 아니고, 2020년까지냐 2019년까지냐 조정할 문제가 아니다. 김종인 대표를 비롯해 정치권에서 이야기하는 구조조정이 또 다시 노동자들의 정치적 배제와 경제적 희생으로 점철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정한 룰을 재구성하기 위해 노동의 권리가 이제야말로 경제민주화의 전면에 등장할 것인지는 지금, 경제민주화를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달려있다.


우리나라 최저임금법에 상응하는 법으로 미국에는 공정근로기준법(Fair Labor Standard Act, 'FLSA')이 있다. 미국 사회는 ‘공정함’(fairness)이 어떤 의미인지 오랜 시간 사회적 논쟁을 벌여왔으며, 그 의미는 시대적 요구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공정함의 의미가 생활임금으로 정의되기도 하고 자본과의 관계에서 불평등한 교섭력의 대등성으로 정의되기도 하였다. 그중 “공정성은 공정경쟁”이라는 의미가 있다. 노동과 자본간의 공정한 계약이 이뤄지려면 자본간의 공정한 경쟁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즉 자본간의 경쟁 격화와 불공정한 경쟁의 피해는 고스란히 노동자들의 장시간 저임금으로 귀결될 뿐만 아니라 이를 강제하는 대자본의 횡포는 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해 경제성장에 해악을 끼친다는 논리다. 장시간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의 건강과 삶의 유지의 비용은 자본이 사회적으로 전가시킨 것-노동손실의 사회화!-이므로 이에 대해 사회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한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김종인 대표와 더민주당, 국민의 당은 구조조정의 선결 전제로 실업수당 등의 사회안전망의 보완을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자본의 손실을 국민들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하다. 물론 복지정책의 전면적인 확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구조조정의 비용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것은 복지의 문제가 아니라 던진 주사위의 어떤 면이 나와도 이길 수밖에 없는 자본불패의  불공정 게임이다. 때문에 공정한 시장의 룰을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구조조정에서 자본의 경영과 주주들의 부당한 이익을 사회적으로 환수하고 법적 처벌을 하는 것이 먼저 전제 되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노동의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한다는 것은 정치적 표절이다. 노동자들이 줄곧 제기해왔던 것은 주주들과 재벌들의 배당잔치에 가려진 기업의 위기였기 때문이다. 기업의 위기를 땜빵하기 위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2차, 3차, 4차 하청 노동자들의 사다리는 점점더 촘촘해졌다. 이미 울산 거제를 중심으로 구조조정은 촘촘해진 사다리를 슬림하게 하는 것으로 진행되고 있다. 노동의 제거는 노동의 몫과 목소리를 제거하는 이중의 배제로 나타났다.


그 동안의 구조조정을 구조조정 하겠다는 김종인표 구조조정에 여전히 노동의 자리는 없다. 배신의 경제는 다시 각색되어 재상연할 준비를 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노동의 권리로 재구성되는 경제민주화는 총선 이후 지금의 문제다. 최저임금과 노동시간 단축, 그리고 고용보장을 둘러싼 노동의 정치는 구조조정 시기에-경제가 어려우니까!-공세적으로 제기해야한다. 더민주와 국민의 당이 박근혜 정부에 대놓고 공세적 구조조정을 선포했듯이. 







* 이글은 오마이뉴스 5월 17일자 원고 편집 전 원본입니다. 



  1. ㅍㅍㅅㅅ, 4월 5일자, “김종인의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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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를 통해 보는 어떤 반전 운동

 

가게모토 츠요

 





[아무도 번역 안 해줄 거잖아!]_연재를 시작하며.-한국에서 소개되지 못할 것 같은 일본의 운동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일본 책들이 번역된다. 이것은 좋은 일이다. 일본에서는 한국 책이 별로 번역되지 않는다. 한국에 관련된 역사책이나 사회학 책은 번역되지만 한국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철학책 등은 아예 번역되지 못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서 생각해 보면 한국에서는 상당히 많은 일본 책이 소개되어왔다. 따라서 한국에서는 일본어 책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일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현대사상이나 애니메이션, 문학 등은 일본어를 몰라도 상당한 수준의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역되지 못할 것 같은 매우 중요한 일본 책들이 있다. 그것은 아마 시장논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역설적인 말인데 그런 책이야 말로 중요하다. 잘 팔리지 않은 책은 발행부수가 적은 만큼 독자에 대한 필자의 책임이 커진다. 잘 팔리는 글쓴이는 누군지 모르는 독자들을 대상으로 글을 쓰지만 단 한 명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애 편지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글쓴이의 힘이 보다 많이 담겨져 있을까? 거칠게 말하면 발행부수가 적을수록 그 책은 연애편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필자의 책임감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잘 팔리지 않는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핵심을 잡을 수 있다. 일본에서도 잘 팔리지 못하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소개되지 않는,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책들을 소개해 보고 싶다는 것이 내 마음이다. 잘 팔리는 책이 가질 수 없는 운명적 만남을 통해서.

 

1. <이웃집에 탈주병이 있던 시대>

이번 글에서 소개하고 싶은 책은 다음과 같다.

 

세키야 시게루, 사카모토 요시에 편, <이웃집의 탈주병이 있던 시대 쟈텍, 어떤 시민운동의 기록>, 사상의 과학사, 1998. (644) (となりに脱走兵がいた時代 - ジャテックある市民運動記録) 

 

 

이 책은 쟈텍(JATEC)이라는 운동의 기록이다. 쟈택이란 Japan Technical Committee의 약칭이다. 무엇을 했던 운동인가? 바로 베트남 전쟁에서 탈주한 미군 병사를 보호하며 제3국에 탈주시킨 운동이다. 쟈텍에 의해 제3국으로 탈출한 어떤 병사의 수기는 일본을 떠나는 순간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결정된 출발의 날, 나는 공항의 모든 곳을 어떤 문제도 없이 통과했습니다. 불안을 안고 출발 게이트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드디어 내 비행기 넘버가 불렸습니다. 밖으로 나와 비행기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기내에 들어가기 전에 계단을 올라가 멈추었습니다. 뒤돌아보아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무사히 기내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려고 온 사람에게 손을 흔들었습니다. 어쩐지 거기 있는 사람 모두가 나의 안전한 여행을 빌며 손을 흔들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자리에 앉아 마지막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를 위한 미리 알려진 지시를 다시 생각했습니다. 기장을 불러달라고 말하며, 정치 망명을 요구하며, 기내에서 나가기를 거부한다는 것. 비행기 내는 기술적으로는 프랑스 영토로 인정되어 기장에게는 마음만 있으면 망명을 허락할 권장이 있다고 합니다. 엔진이 파워를 내며, 비행기는 이륙의 장소를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기 시작하며 지상에서 올라가면서 나의 마음도 비행기와 같이 뛰어 올라갔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떠난 것입니다."(370)

 

미군은 베트남 전쟁 때 일본의 기지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병사들은 다양한 이유로 전쟁터에 나가지 않으려고 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으나 비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자텍은 어떤 이유든 탈주의 의사가 있는 병사를 보호했다. 물론 부대복귀를 시켜서 부대 내부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할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탈주와 망명의 의사를 표시하면 실제로 탈주를 시키도록 노력한 것이다. 그런데 병사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아니었다. 매우 문제를 일으킨 병사들도 있었다. 이 운동은 전쟁터에서 베트남인을 직접 죽이고 온 병사들을 바로 자기 집에서 비밀로 보호하면서 같이 지내던 일반 사람의 존재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그러한 기록집이기 때문에 탈주한 병사에 배신당하고 화를 낸 기억이나, 돈 문제로 탈주 병사로 싸운 이야기 등도 나온다. 어쨌든 어제까지 전장에서 사람을 죽이거나 해온 병사들과 함께 지낸다는 실천을 이렇게까지 많은 사람이 실제로 했다는 일은 놀라운 것이다. "탈주병들은 일본 가정의 냉장고의 내부를 알게 된 최초의 외국인"(492)인 셈이다.

 

이 책이 98년에 나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쟈텍의 운동에 관여한 사람들은 긴 시간이 흘러서야 자기 운동 경험을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98년의 시점에도 아직 밝힐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논의를 하면서 추후 봉인을 풀기로 한다고 한다.(495).


2. 법의 문제

 

베트남 전쟁 시기 일본에는 일본군 병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그들의 상식에서 보면 탈주는 매우 큰 죄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미·일 안보조약에 인한 미군의 지위협정에서 미군 병사는 입국에 관해서 일본법의 적응 대상 외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탈주 운동을 지원하는 것 자체는 불법이 아니었다. 그리고 탈주병사들에게 전쟁에 되도록 참여하지 않기 위한 권리를 알리는 상담활동도 쟈텍이 수행한 중요한 운동 중 하나였다. 쟈텍이 병사들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알림으로, 그들이 제대를 신고하거나 부대 내부에서의 합법적 대항운동을 하는 것을 권장하기도 했다. 활동가들이 미군 내의 법을 배우면서 일본군의 군율과 매우 다른 부분이 많아서 놀랐다고 한다.

 

그런데 법과 관련해서 말하면 일본정부는 절대로 그들의 망명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병사들은 일본의 평화헌법을 알고 있었으며, 일본에서 살겠다는 의사를 제시한 경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백인, 흑인 병사와 함께 한국계 미국인 역시 탈주했다는 것은 지적해두어야 한다. 어떤 이는 한국전쟁 고아로 양자를 가서 미국에서 잘았다. 그는 전쟁에 나가며 일본에서 탈주했다. 그는 일본공산당, 조선총련, 쿠바대사관을 거쳐 쟈텍에 접속했다. 그는 무사히 유럽으로 출국했다. 탈주병 가운데에서는 한국군 병사도 있었다. 그는 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건너갔는데, 그가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다 마코토(小田実)라는 작가이자 당시 쟈텍의 활동에 관여하던 사람이 76년에 김일성을 만났을 때 김일성은 그 인물을 모른다고 했으며, 나중에 그런 사실은 없다는 답이 왔다고 한다.

 

어쨌든 이 운동은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나라의 대사관도 관여하기는 했는데, 결국 그런 국가들은 쟈텍을 지지하지 않았으며, 쟈텍은 정말 시민운동으로 이루어진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간첩과 조직의 문제

 

이 운동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간첩에 대한 대응 방식이다.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일이지만 미군은 쟈텍에 대해서 대응했다. 쟈텍은 제1차와 제2차로 나누어진다. 그 이유는 간첩 때문에 한 번 조직을 청산했기 때문이다. 쟈텍은 간첩을 그대로 받아 들었다. 쟈텍은 간첩 찾기를 하는 일이 스스로의 운동을 부수는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간첩 찾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간첩이 들어오면 그냥 조직자체를 무너져 버리자는 쟈텍의 생각은 비밀조직으로서의 전위주의와 아예 정반대에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에 도달할 수 있던 까닭은 운동 내부에서의 간첩 찾기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힘든 역사적 운동 경험에서 배운 운동으로 쟈텍의 간첩 대응법이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운동, 이 조직론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시사를 줄 것이다. 당시 제1차 자텍에서 운동하던 구리하라 유키오(栗原幸夫)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글의 맺음말로 이 인용문을 대신하겠다.

 

"스파이 존슨에 대해서는 그 때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자주 생각납니다. 다른 곳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저는 그가 스파이였다는 것을 확신했었습니다. 그것을 츠르미 슌스케(鶴見俊輔)씨에게 말했을 때, 츠르미씨는 찌그러진 얼굴로 "동료 사이에서 그런 의심이 생기는 것은 운동이 무너질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 때의 그의 찌그러진 얼굴을 이 30년 동안 자주 생각나면서 왜 그랬을까? 하고 계속 생각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중략) 최근 저는 겨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츠르미씨는 옳았다는 것입니다. 1차 자텍은 스파이 존슨 때문에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령 우리가 스파이의 침입에 대해서 방어태세를 취하고 모든 탈주병과 협력자에 대해서 의혹의 눈을 가졌으면 탈주병 원조 운동은 붕괴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며, 그리고 지금 이렇게 운동 경험자가 가볍게 그 무렵의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상황도 없었을 것입니다. 파괴될 것을 무서워 할 필요는 없다, 그것보다 비밀이 없는 열린 운동을 소중하게 싶다는 것이 지금 나의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조직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우리를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즉 일종의 전위주의입니다(예전의 저에게는 다분히 그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아니라 누구든지 교체할 수 있는 운동이야말로 필요합니다. 실제로 쟈텍은 그러한 운동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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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wh

웹진 수유너머N이 시작됩니다!





웹진 수유너머N 기획팀





1. [웹진 수유너머N]의 포부


수유너머N이 [웹진 수유너머N]을 시작합니다. 이미 훌륭한 인문학 웹진들이 많이 있는데 굳이 또 하나의 웹진을 보태려 하는 것은, ‘지식과 삶을 잇는 웹진’, ‘여러 지식을 나누는 웹진’을 만들고자 하는 욕심 때문입니다. 


첫 번째로 [웹진 수유너머N]은 ‘지식과 삶을 잇는 웹진’을 지향합니다. 여러 지식이 우리 삶에 어떤 가르침을 주는지 고민하는 웹진이 되겠습니다. 인문학의 부흥이라 해도 좋을 만큼 여러 글과 강의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덕분에 동양과 서양,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상이 삶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지에 대한 설명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듯합니다. 인문학만이 아닙니다. 연일 새로운 발견을 전하는 교양 과학서가 쏟아지지만, 그 발견이 우리 사유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설명하는 책은 드문 편입니다. 지식의 습득이 지적 치장이나 허세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식과 삶을 이으려는 시도가 필요합니다. [웹진 수유너머N]은 명료하고 쉬운 언어로, 여러 지식이 삶에 던지는 소중한 가치를 발굴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인문학 서적을 읽는 이유, 웹진 수유너머N이 설명해보겠습니다!^^


두 번째로 [웹진 수유너머N]은 ‘여러 지식을 나누는 웹진’이 되고자 합니다. 잘난 척 포부를 밝혔지만, 이미 여러 곳에 다양한 분들이 ‘지식과 삶을 잇는’ 훌륭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여러 웹진에서, 논문집에서, 공개 강연에서 보석 같은 산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이런 훌륭한 말과 글을 만들어내는, 함께 책을 읽으며 토론하고 고민하는 공부 모임도 많이 있습니다. 아쉬운 것은, 이런 훌륭한 글과 강연 그리고 모임들이 뿔뿔이 흩어져 있어 여간해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점입니다. [웹진 수유너머N]은 이처럼 소중한 여러 지적 산물을 수집하여 독자 여러분께 추천하고, 여러 공부 모임을 발견하여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이를 통해 귀한 말과 글이 더 널리 알려지고, 여러 공부 모임이 더 활성화되는데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2. [웹진 수유너머N]의 코너


이를 위해 우선 다섯 개의 코너를 마련해보려 합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

앞서 말씀드렸듯, 세상에는 훌륭한 말과 글이 아주 많습니다. 풍성하게 운영되는 여러 다른 웹진과 블로그의 글들에서부터, 아카데믹한 격식이 오히려 그 가치를 가리고 있는 학술논문에까지, 수없이 많은 좋은 글들이 있습니다. 글만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 부쩍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된 강연과 발표에서도 보석 같은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유너머N이 추천하는 말과 글]에서는 도처에 흩어져 있는 훌륭한 말과 글을 모아, 추천의 변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 권하려고 합니다. 



                                         보석 같은 말과 글을 원기옥 마냥 모아 모아 드립니다. 

                                             모여라! 좋은 작품! 발굴하자! 세미나! 



[우리 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직접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일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낸 지적 산물을 접하는 일만큼이나 즐겁습니다. 게다가 공부의 목적이 자신의 삶의 지침과 방향을 얻는 것이라면, 이런 적극적인 형태의 공부는 필수적입니다. 누구도 내 삶의 문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지는 못할 테니까요. 이미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공부 모임들이 있습니다. 수유너머N의 세미나도 그 중 하나입니다. [우리 세미나를 소개합니다]에서는 수유너머N의 세미나들을 시작으로, 여러 훌륭한 공부 모임을 소개합니다. 


[빌린 책]

다양한 영역의 책들을 간략하고 발랄하게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독서는 익숙한 만큼이나 무료해진 일상에서 탈출하는, 아마도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애서가로 유명한 친구의 책장이나 도서관에서 낯선 책을 빌릴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낯선 시선까지 빌립니다. 가끔은 그 빌린 책이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돌려놓기도 합니다. 평소 같으면 돌아보지 않았을 책인데 우연히 뽑아들어 읽고는 혼자 찌릿했던 감동을 나누기 위해, 세상에 수없이 존재하는 N개의 시선과 N개의 문제를 탐험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빌린 책’을 독자 여러분께 전하겠습니다. 



                                               간혹, 빌린 책에서 귀한 선물을 발견합니다^^

                 빌린 책에서 나온 돈은 돌려주셔야 하겠지만, 감동은 돌려주지 않으셔도 되니까요. 



[기획 서평]

기획 서평에서는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권의 책이나 작품을 특정한 주제와 관점을 가지고 다룹니다. 이를 통해 해당 주제에 존재하는 논쟁점과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우선 [기획 서평]은 세 가지 주제로 출발하려 합니다. 첫 번째는 [봄날엔 맑스]입니다. 봄의 에너지를 받아^^ 맑스와 엥겔스의 저작들을 시대 순으로 꼼꼼히 검토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알아봅니다. 두 번째는 [이 한 장의 사진]입니다. 한 장의 사진에 담긴 사유와 가치를 세심한 시선으로 검토합니다. 세 번째는 [진화와 생명]입니다. 생명이 지금의 모습을 얻은 과정인 진화를 여러 권의 주요한 책을 통해 검토하면서, 그것이 우리 인간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는지 탐구하고자 합니다. 


[화요토론회 스케치]

화요토론회는 수유너머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이나 외부의 연구자 혹은 활동가를 초청하여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하는 시간입니다. [화요토론회 스케치]에서는 화요토론회에서 발표된 글의 논지를 간략히 요약하는 한편, 발표자와 토론자의 사유가 겹치고 분기하며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실어 나르겠습니다.



3. [웹진 수유너머N]의 업데이트


[웹진 수유너머N]이 가진 다섯 개의 코너는 기본적으로 1주에 1번 업데이트됩니다. 다만, [화요토론회 스케치]의 경우 화요토론회가 격주로 이루어지기에, 2주에 1번 업데이트될 예정입니다. 불가피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4~5개의 글로 독자 여러분을 꾸준히 찾아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삶에서 지식을 찾고 지식으로 삶을 연마하는 웹진, 수많은 지식과 만나 소통하는 웹진이 되겠습니다. 응원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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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인문학 집중세미나란?

 

인문학의 불온성은 몇 마디 구호가 아니라 꾸준한 탐구와 현실 모색 속에 있습니다. 집중세미나는 그런 탐구와 모색을 실천하는 작은 통로가 되고자 합니다. 집중 세미나 시간에는 강의와 연구 관련된 주제의 책들을 선정해서, 20주 동안 함께 부대끼며 읽고 질문하고 토론할 것입니다. 혼자라면 외롭고 힘든 공부겠지만, 친구들과 함께 한다면 어려움도 기쁨과 보람이 되리라 믿습니다.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튜터 박은선, 유영선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신학정치론.jpg        에티카.jpg         정치론.jpg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튜터 김은영, 권은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사회를보호해야한다.jpg       통치성과 자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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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드적 대중지성 ‘불온한 인문학’ 2기를 모집합니다!

 

* 주요 프로그램

 

I. 스피노자 -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와 만나기

 

강의 주제

강의 내용

교재

1

9. 22

회차/일자강의 소개 및 오리엔테이션

2

9. 29

신에 대하여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1부

3

10.6

자유의지와 목적론

4

10.13

정신과 신체

평행론

『에티카』2부

5

10.20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6

10.27

정서와 예속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3부

7

11. 3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4부

8

11. 10

인간의 자유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5부

9

11. 17

정치에 대하여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10

11. 24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II. 푸코 -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불온한 탐험가 되기

 

 II-1 푸코 읽기

회차/일자

강의 주제

강의 내용

비고

1

12.1

담론과 권력

타자의 사유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

12.8

지식의 고고학에서 권력의 계보학으로

3

12.15

권력의 미시정치학

지식-권력-신체

『감시와 처벌』

4

12.22

권력의 미시물리학과 훈육권력

5

12.29

생명권력

『성의역사1』

 

 II-2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와 정치

회차/일자

강의제목

내용

기본참고자료

6

1. 5

1강 신자유주의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역사적 형태 변동의 맥락에서 신자유주의 출현과 그 기본 축적메커니즘을 살펴본다

데이비드 하비,

『신자유주의』/

제라르 뒤메닐 외,

『자본의 반격』

7

1. 12

2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1)

푸코의 『안전, 영토, 인구』를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성립과정과 그 사회적 효과들 주체화의 맥락에서 규명한다.

미쉘 푸코,

『안전, 영토, 인구』

8

1. 19

3강 통치성으로서 신자유주의(2)

9

2. 2

4강 배제사회와 공안체제

신자유주의의 결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을 검토하고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의 정치적 특성을 분석한다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경향신문특별취재팀,

『한국의 워킹푸어』

10

2. 9

5강 반신자유주의의 정치학의

몇 가지 길들

신자유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운동과 정치적 활동을 사유하기 위한 이론적 자원들을 살펴본다

에티엔 발리바르,

『대중들의 공포』/

자끄 랑시에르,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

이진경, 『코뮨주의』

 

 

 

III. ‘불온한 인문학’ 집중 세미나

 

트랙 I. 스피노자를 읽자!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9.10

양태의 존재론

『에티카』 1부. 정리1 ~ 정리14.

2

9.17

자유의지와 목적론

『에티카』 1부. 정리15~정리36. 부록.

3

9.24

평행론

『에티카』 2부. 정리1 ~ 정리13.

4

10.1

적합한 관념과 공통개념

『에티카』 2부. 정리13 ~ 정리49.

5

10.8

변용능력과 정서

『에티카』 3부

6

10.15

노예와 자유인

『에티카』 4부

7

10.22

영원성과 지복

『에티카』 5부

8

10.29

종교와 정치

『신학정치론』 (서문, 16~20장)

9

11.5

홉스 vs. 스피노자

『정치론』

10

11.12

불온한 인문학 워크샵

 

트랙 II.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

회차/ 일자

주제

교재 및 범위

1

12.3

권력의 계보학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7-84

2

12.10

역사와 근원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85-168

3

12.17

민족 그리고 전쟁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169-220

4

12.24

육체의 인간에서 종의 인간으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 221-305

5

1.7

자유주의의 차이와 반복 : 통치론

『통치성과 자유』 68-127

6

1.14

삶과 포개진 죽음 : 권력론

『통치성과 자유』 130-184

7

1.28

적대의 전위 : 법·규범론

『통치성과 자유』 186-233

8

2.4

‘시큐리티’의 강화 : 현대도시격리론

『통치성과 자유』 238-281

9

2.11

공포와 비밀의 정치학

『통치성과 자유』 284-324

10

2. 18

에세이 발표

 

o 강 사 : 손기태, 정정훈, 정행복

o 세미나 튜터 : 박은선, 유영선, 김은영, 권은혜

 

1. “불온한 인문학”은 2011.9. 22.목 개강, 총 20주 40여 회(매주 강의1회 세미나 1회, 총5개월) 과정으로 구성됩니다.

 

2. 매주 목요일 오후 7시~10시에는 강의가, 토요일 오후 2시~5시에는 집중 세미나가 열립니다. 이 두과정은 꼭 함께 참여해야 합니다. (부분 수강 불가)

 

3. “불온한 인문학”은 두 개의 트랙으로 진행됩니다. 10주 간 진행되는 트랙01에는 폭탄을 장전한 사유의 철학자 스피노자의 저서를 중심으로 한 강의와 세미나가, 다음 10주간의 트랙02에는 푸코와 신자유주의 통치체제의 경제-정치학을 다루는 강의와 세미나가 진행됩니다.

 

4. “불온한 인문학”은 단지 강사의 강의만을 수동적으로 “듣는”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불온한 인문학”에 참여하는 이들은 스스로 텍스트를 읽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쉽지만은 않은 과정을 통과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기성 지식의 ‘온순한’ 소비자로부터 동료들과의 소통 속에서 자기 사유의 힘을 벼려가는 ‘불온한’ 생산자가 되길 바랍니다.

 

5. 이를 위해서 “불온한 인문학” 참여자는 강의를 들은 후 2회 이상 강의 후기를 제출해야 하며, 강의와 관련된 텍스트를 읽고 함께 공부하는 동료들과 소통하는 세미나에 참여해야 합니다. 또한 세미나 진행에는 2회 이상의 텍스트 발제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함께 공부한 과정을 총괄하는 글쓰기 과제(에세이)를 제출해야 합니다.

 

6. 수강신청

정원 : 선착순 25명

신청기간 : 2011. 8. 8. 월요일부터

수강료 : 60만원, 입금 신한은행 434-04-354206 (예금주 : 김은영)

(*분납, 환불 불가합니다.)

*수강신청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불온한 인문학' 게시판(http://nomadist.org/xe/bulin)에 신청글과 함께 연락처를 함께 남겨주세요.

 

7. 문의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http://www.nomadist.org)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실 대표 번호 (070)8263-0910

김은영 010-8334-4389, 권은혜 010-4515-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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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알(Boal)의 토론연극 Forum Theatre 워크샵 “모집합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펜과 종이가 필요없이 놀이와 움직임 속에서 많이 웃고 즐거움을 경험합니다. 몸과 움직임에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 기다립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억압, 아직까지 불편함의 원인이 되는 억압, 뭔가 바꾸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던 억압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관찰하는 나, 그 자리에 있는 나, 나 아닌 나를 느낄 수 있는 시간 /놀이 속에서 즐거움과 웃음 경험하기 /신체로 말하기 /연극적 의사소통 익히기 /공연하기


나의 몸과 마음, 타인과의 만남을 깊이 경험하는 자리...


신체로 말하는 법에 익숙해지는 자리...


연극은 인간이 스스로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자신을 보다가 그 자리에 있는 자신과 그것을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 태어난다.


연극은 행복이어야 하며, 연극을 통해 우리 자신과 시대에 대해 배울 수 있어야 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선 우선 그에 대해 잘 알아야 한다. 연극은 앎의 형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 연극은 우리가 미래를 그저 기다리고 있기보다 그것을 건설해 낼 수 있도록 돕는다.

-Boal



 

시간: 매주 목요일 오전 10~12시 (9월 1일 ~ 10월 13일, 총 7회기)


장소: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그랜드볼룸(
www.nomadist.org에서 약도참고)


인원: 최대 15명 (공간이 협소한 관계로, 선착순입니다)


돕는이: 놀이(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극치료 전문가, 집단상담가)


아기곰(연극치료전문가)


연락처: 놀이 019-251-8391, apriljune@hanmail.net


준비물: 몸, 편히 움직일 수 있는 옷차림


비용: 12만원 신한은행 384-12-039154(장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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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사유방식을 거부하는 니체의 사유와 글쓰기 방식은,

때로 그의 글들을 광기의 산물로 몰고 가기도 하고,

엉뚱한 정치적 흐름의 지지자로 오해받게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에서 그렇게 숱한 오해와 몰이해에 휘말리고 있을 때에도,

다른 한편에서는 수많은 철학자들이 그를 끊임없이 재해석 하고 있기도 했던것 같아요.

우선 들뢰즈는 니체라는 철학자를 서양 철학사 전체와의 대결구도 하에서 방대한 스케일로 읽어냈습니다.

또 푸코의 경우에는 권력과 담론에 대한 그의 방대한 저작들을 통해,

끈질기게 힘이나 역사, 진리에 관한 니체의 테마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래전에 어설프게 읽었던 니체를

푸코의 저작들에서 다시 발견하고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어졌는데요.

일단은 니체의 전체 저작을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가 보려고 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주저 마시고 함께 해요~ ^^

 

p.s  세미나 명칭과 세미나 시간대가 매치가 안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요 ^^;;;

      순전히 반장의 개인적인 시간의 흐름으로..... 반장에게 10시는 새벽이라능 ㅠ

       초큼 더 보태자면 니체랑 새벽이랑 굳이 억지로라도 연결해 보겠다는 의지 ;;;;;;;;

 

(세미나실 배정 때문에 인원파악이 필요합니다. 참여하실 분들은 댓글을 달아 주세요 ^^)
(수유너머N 세미나 게시판 원글 바로가기

 

시작일 : 8월 12일 금요일부터

시 간 : 매주 금요일 새벽 10시

장 소 : 수유너머N (세미나실 미정 - 추후 공지)

문 의 : 해피 010-9404-8403

 

* <책세상>에서 나온 니체전집 기준으로

2권. 비극의 탄생/ 반시대적 고찰

6권. 바트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

7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8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2

10권. 아침놀

12권. 즐거운학문

13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4권. 선악의 저편/ 도덕의 계보

15권.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 기존에 책을 갖고 계신 분은 아무 책이나 상관이 없지만,

새로 구입하실 분은 함께 하기 편하도록 책세상본을 권합니다.

하지만 <비극의 탄생>은 박찬국씨가 번역한 아카넷본이 좋다고들 하니까 참고하시구요.

 

* 니체 저작을 다 읽고 나면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까지 한번 달려 보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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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토론회란?

화토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이 매월 두 차례, 연구실 회원과 외부의 연구자, 활동가들을 초청해 새로운 사유의 흐름과 접속해 보는 시간입니다.

연구실 회원 뿐만이 아니라 해당 주제에 관심 있으신 모든 분들에게 열린 토론의 자리입니다.

 

일시와 발표자

이번 7월 26일 화요일에 개최되는 화요토론회에는

미학자이자 문화평론가로 활약하고 계신 진중권 선생님이

오십니다. 진중권 선생님에 대해서는 따로 더 설명드릴 필요가 없겠죠?




발표주제는 "디지탈의 존재론"입니다.

최근 선생님은 디지탈예술이론을 연구하시며 디지탈세계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모색하고 계십니다. 아마도 이번 토론회에서는 그 성과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제 : 디지털의 존재론

일시 : 7월 26일 화요일 7시

장소 :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대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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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N은 올해부터 우리 시대 인문학을 비판적으로 되씹고 새로운 출발을 내딛기 위해 강의, 심포지움, 총서를 통해 <불온한 인문학>을 기획하고 있습니다.('불온한 인문학' 카테고리 바로가기) 그 일환으로 지난 3월 12일에 심포지움을 통해 발표한 글들이 책으로 묶여 출판되었습니다. '불온한 인문학' 총서의 첫번째 책입니다.

휴머니스트 홈페이지에 실린 <불온한 인문학 - 인문학과 싸우는 인문학> 책소개를 여기에 옮깁니다.
(원글 바로가기)
 







1.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는가 (기획의도)
 
지난 10년 동안 인문학의 가장 큰 화두는 ‘대중과의 소통’이었다. 무한 경쟁이라는 신자유주의적 환경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인문학은 학교 바깥에서 재기를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대중과 직접 만나서 교감하는 공부를 하고,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지식을 넘어 자유로운 토론과 대화를 통해 확장되는 앎의 지평을 지향했다. 인문학은 이렇게 사회로 걸어 나왔으며, 지금 진행되는 ‘인문학의 부흥 시대’는 그 발걸음이 만들어낸 성과다.
인문학의 대중화, 그 실험의 한복판에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도 있었다. 2000년 활동을 시작한 ‘수유너머’는 제도 밖 연구공동체 실험과 대중강연 등으로 인문학 부흥에 거름 역할을 했다. 그들의 시도는 신선했고, 앎이 삶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대중에게 알렸다.
고전을 통해 얻는 지식과 교양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도서관과 문화센터, 기업, 각종 기관에서 여는 대중강좌들을 중심으로 인문학을 찾는 사람이 늘었다. 재소자를 위한 인문학에서부터 최고경영자(CEO)를 위한 인문학까지, 그 대상과 성격도 다양했다. 그리하여 ‘쓸모없는 학문’ 취급을 받았던 인문학은 이제 ‘유용한 학문’으로 각광받고 있다.
 
멜로드라마에 책 읽는 남성 주인공이 이전에도 등장하긴 했지만 그때 그 주인공은 사회에 대한 상처를 가진 이었거나, 아니면 지식인이라는 배경이 있는 인물이었다. 가령 ‘인욱’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소지섭이 연기한 인물. 그 드라마에서 인욱은 자신이 읽었던 그람시의 《옥중수고》를 하지원이 연기한 수정이란 인물에게 선물했다.……그는 과거 학생운동을 경험한 지식인이었다. 재벌 후계자 캐릭터는 조인성이 연기한 ‘재민’이었다. 그는 이른바 ‘무개념’ 캐릭터였지 않았던가. 2000년대 초?중반만 해도 재벌과 인문학은 그리 잘 어울리지 않았던 조합이었다. 하지만 6~7년이 흐른 지금, 인문학은 재벌 후계자와도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비싼 외제차나 고가의 명품 슈트 못지않게 젊은 재벌 남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액세서리로 인문학이 선택되고 있는 건 아닐까?……나는 〈시크릿 가든〉의 인문학 책 읽는 주인공 ‘김주원’이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이 어떤 의미로 통용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인문학은 삶을 더 여유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스타일이자, 세련된 감수성과 지적인 안목을 심화하게 해주는 교양의 원천이 된 것이다.
― 본문 94~95쪽,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에서
 
 
2.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의 새 프로젝트 ‘불온한 인문학’ (이 책의 개요)
 
인문학 붐을 일으켰던 ‘수유너머(노마디스트 수유너머N)’는 ‘지금의 인문학’이 인문학 본연의 비판적 힘을 무장 해제시키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직시하고, ‘인문학 부흥’ 현상을 인문학이 빠져든 위기와 몰락의 징후로 보았다. 국가와 자본의 넘치는 관심과 후원은 인문학 재생의 밑거름이 아니라 나락일 수 있다. 즉, 인문학이 권력과 돈에 눈멀고 귀 막고 입을 봉한 산송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문학의 부흥은 이윤 창출을 위한 자본 축적 전략과 지배의 효율화를 위한 국가 통치 전략의 소프트 버전이다.

지금 이 순간, 그들은 우리 시대의 인문학과 정면으로 대결해야 한다고 외친다. 이를 위해 인문학에 ‘비판성과 전복성’을 되찾아주는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이들은 “국가와 자본, 권력에 길들여진 인문학은 ‘지금-여기’의 현실을 스스로 사유하지 못하도록 만든다”며 “지금은 인문학이 가진 위협적이고 전복적인 성격, 곧 불온함을 벼리는 것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았다. 지금의 인문학은 사회의 지배적인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불온성이 거세된 채 구체적인 삶과의 접점도 잃고 ‘문화적 교양주의’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인문학이라는 형식으로 대중과 만나고 소통하는 것은 말처럼 간단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의 소시민적 일상에 길들여진 대중이 어렵고 낯선 주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함께 고민할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현재적인 정치?사회적 주제들은 그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들기에 곧잘 반려되곤 했다. 강의는 되도록 먼 나라, 멀리 있는 사람들, 오래된 과거에 대한 정보들, 두루두루 유익하기만 한 ‘교양’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채워지는 게 권장되었다. 품격 있는 ‘고전’을 다루면서도 《논어》, 《맹자》 같은 동양의 고전은 지루하다는 이유로 제외되는 일이 허다했다. 물론, 서구의 고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플라톤이나 헤겔 등 사상사의 거인들은 너무 어려워서 빠지고, 마르크스나 레닌 등은 어딘지 위험스러워 보여서 누락되었다.……그렇게 대중과의 만남과 소통이 ‘건전해질수록’ 딜레마는 깊어진다. 사회로 발길을 돌렸을 때 인문학이 욕망하던 것은 무엇이었나? 세상과 담쌓은 ‘온실 속 지식’이 아니라, 안온한 일상에 균열을 내고, 무사안일한 상식을 질타하며 낯선 가치, 새로운 의미를 제기하자는 소신은 ‘강의를 위한 강의’에 밀려 종적 없이 사라졌다. 수준의 높낮이 문제가 아니다. 현실의 요구들에 몸을 맞추다보면, 날카롭던 칼날도 무디어지고 날쌔던 신체도 둔중해진다. 본문 6~7쪽 〈지은이의 말〉에서
 
 
3. 지은이 소개 및 차례
 
최진석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www.nomadist.org) 연구원.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공부했고, 러시아에서 문화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말과 사유, 문화의 정치적 동력학이 최근의 연구 주제다. 함께 지은 책으로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코뮨주의 선언》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레닌과 미래의 혁명》(공역), 《해체와 파괴》 등이 있다.
 
문 화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연구실에 접속하기 전까지만 해도 ‘방송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요즘은 방송 일도 잠시 접고 연구실 활동에 푹 빠졌다. 최근에는 공동체와 문학이라는 주제에 관심을 두고 있다.
 
정정훈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적 재편 이후 사회적 배제와 문화정치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준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군주론, 운명을 넘어서는 역량의 정치학》, 함께 쓴 책으로 《코뮨주의 선언》, 《소수성의 정치학》, 《모더니티의 지층들》, 《문화정치학의 영토들》,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2권, 정치사회 편) 등이 있다.
 
이진경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사회주의 붕괴 이후의 근대성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하여, 《철학과 굴뚝청소부》, 《수학의 몽상》,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등을 썼다. 그 과정에서 함께 사유했던 ‘친구’들과의 만남을 통해 《철학의 외부》, 《노마디즘》, 《자본을 넘어선 자본》, 《미-래의 맑스주의》, 《외부, 사유의 정치학》, 《역사의 공간》 등의 책을 썼다.
 
손기태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연구원. 대학에서 신학과 종교학을 공부했다. ‘스피노자’ 공부를 시작한 이후 신학과 철학, 종교는 언제나 그의 관심사 한가운데를 차지해왔다. 최근에는 바울의 정치신학을 새롭게 조명하는 시도들에 주목하고 있다.
 
박정수 수유너머R 연구원. 대학에서 현대소설을 공부했다. 프로이트, 라캉, 지젝, 푸코, 들뢰즈, 카프카, 루신에 관심이 많으며, 자칭 ‘욕망의 정치경제학’을 개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현대소설과 환상》, 《청소년을 위한 꿈의 해석》이 있고, 옮긴 책으로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등이 있다.
 
차례
지은이의 말. 불온한 인문학은 왜 인문학이 아닌가

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
1장 우리 시대 인문학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인문학 담론의 유행과 소비 양상 ― 문 화
2장 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시론 ― 최진석
3장 불온한 인문학은 사유의 정치다야만성의 인문학을 위하여 ― 정정훈
4장 횡단의 정치, 혹은 불온한 정치학불온성의 ‘트랜스내셔널’을 위하여 ― 이진경
5장 인문학의 현장은 어디인가 실수-방황의 인문학 현장 ― 박정수
6장 인문학은 위험한 존재를 만들 수 있는가‘희망의 인문학’이 가르쳐준 희망? ― 손기태
 
 
4.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불온성과 전복성의 날이 예리하게 서 있는 인문학이다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은 문제적이다. 대학생이 졸업과 동시에 신용 불량자가 되고, 청소 노동자가 화장실에서 밥을 먹어야 하며, 개발 이익에 눈먼 국가와 자본의 폭력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공권력’이라는 테러를 자행한다. 소시민의 일상은 ‘글로벌 리더십’과 ‘글로벌 스탠다드’를 이룩하고자 희생을 강요당한다. 이렇게 파괴된 삶의 터전에서 ‘인간’과 '문화'를 말하는 인문학은 어떤 희망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은 새로운 앎과 감수성, 사유와 활동이 의미를 갖기 위해 국가와 자본, 휴머니즘이라는 기치를 내건 인문학과 대결한다. 지배적 가치와 통념에 익숙한 현재의 인문학을 이탈해 새로운 삶을 향한 길을 만들고자 한다. 《불온한 인문학》은 ‘인문학'이란 이름으로 길든 영토를 떠나는 첫 걸음이다. 그 첫 걸음은 현행의 ‘인문학 배치’에 이의를 제기하고 균열을 내는 데서 시작한다. 국가와 자본의 통제를 받고 휴머니즘을 명목으로 영유되던 죽은 지식을 지금-여기에 해방적 실천을 위한 앎으로 다시 가져오는 것이다.
국가와 너는 같지 않다고 지적하는 것, 민족의 영광과 네 개인의 행복은 별개의 문제라고 말하는 것,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 뒤에 ‘우리’로부터 배제된 이웃이 있음을 폭로하는 것, 인문학은 순수하게 존재한 적이 없음을 설명하는 것. 이처럼 정체성과 동일성의 서사를 거절하는 인문학은 불온하다. 통념적인 삶의 관성에 낯설고 불쾌한 소음을 일으키며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온한 인문학, 혹은 인문학의 불온성이야말로 우리 삶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다.
 
인간과 삶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꾼다는 미명 뒤로 펼쳐진 삶의 적나라한 모순과 질곡을 질타할 줄 모르는 인문학은 인간을 위한 것도 아니고, 삶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런 환상 따위로 세상과 자신을 중독 시키는 인문학은 차라리 해체시키는 게 낫지 않을까? 새로운 인문학을 위한 제언은 국가와 사회를 부강하게 만들거나 보편적 휴머니즘을 구현하는 것도 아니요, 인문학의 잃어버린 가치를 회복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지금-여기의 현실을 작파하고 ‘다른’ 현실을, 우리의 감각과 지식, 상식의 기반을 뒤흔들어 우리를 ‘낯선’ 변경으로 던져 넣는 것이어야 한다.……불온성, 그것은 현재 알고 있는 삶의 형태를 공고하게 다지고 정상화시키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안온한 삶에 낯설고 날선 감각, 우리 자신을 베이고 다치게 함으로써 이전과는 다른 삶의 형태와 강제로 맞부딪히게 만드는 과정에 붙이는 이름이다. 잠정적으로나마 우리의 탐구에 ‘불온한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여본다면, 그것은 '진정한' 인문학을 가르친다거나, 인문학의 또 다른 '재생'이나 '반복'을 위함이 아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 여정의 출발점이 어디이며 그 과정이 어디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지도 위에 그려보기 위해 선택한 푯말일 뿐이다.
― 본문 17~18쪽〈프롤로그, 불온한 인문학을 위한 선언〉에서
 
 
5. 사유의 불온성, 사상의 전복성, 비판의 급진성! 이것이 인문학이다
 
불온성과 전복성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라고,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고 있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느끼는 기분이다. 또한 불온성은 ‘저들’은 아니지만 ‘저들’을 믿는 자들, 자신들이 저들과 같다는 감각을 갖고 있는 ‘그들’의 감정이기도 하다. 자신은 저들이 찬양하는 위대함이나 탁월함을 갖고 있지 못하면서,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을 만한 그런 지위도 갖지 못하면서, 그런 자랑과 믿음을 공유하고 있는 자들이다. 불온성은 ‘저들’을 불편하고 불쾌하게 하는 당혹스런 침범 앞에서, ‘그들’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당당함 앞에서, ‘저들’과 ‘그들’이 느끼게 되는 기분이고 감정이다.
불온함(전복성)이라 할 때 우린 통상 반정부적인 것을 떠올리지만 그것이 꼭 불온한 것은 아니다. 가령 어떤 제도를 요구하는 투쟁은 많은 경우 요구하는 내용과 이유, 사고방식, 투쟁방식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편할 수는 있겠지만 불온하다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불온함이란, 통념이나 분명한 구별들이 깨질 때 발생하는 불안감과 결부되어 있다. 그것은 확실하다고 믿던 것들을 와해시키고 그 경계를 횡단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불온한 인문학’이란 이름을 내걸고 시내 한복판에서 공개 심포지엄을 열었을 때, 입구에서 인문학이 무엇인지도 알고 책도 많이 읽었다고 자처하는 한 사람이 “이게 무얼 하려는 것인지” 물을 때에 못마땅함과 불편함, 불쾌함에 당혹스러움까지 뒤섞인 그 얼굴에서, ‘저들’, 혹은 ‘그들’이 느끼는 불온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온한 인문학》은 지식과 교양 그리고 효율과 순치의 흐름으로 구성되고 있는 인문학의 흐름에 반한다. 그리하여 인문학의 고유한 전복성과 불온성을 찾아 인문학을 재정의하고 현대자본주의 비판을 위한 담론의 장을 여는 책이다.
 
세상 모든 것에 ‘내 것’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고 싸우는 모습처럼 말에게 낯선 장면들이 또 있을까? 사유 재산 제도란 오직 인간의 눈으로 볼 때만, 익숙하고 당연했던 게 아닐까? 인문학이 소중하고 또 소중하다고 부르짖었던 것들, 즉 인간, 문화, 예술, 민족, 국가…… 사실 이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그 모든 것들에 대한 낯설게 하기가 필요한 때다!
과연 우리 자신을 낯설고 거북하게 만드는 것도 인문학의 소명이 될 수 있을까? 기존의 익숙하던 배치를 뒤엎고 다른 방식으로 뒤바꿨을 때 새로움보다는 이질성이나 거부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은 ‘나쁜[反]’ 인문학일까? 역으로 언제나 편안하고 즐거움만 선사하는 인문학, 그래서 기존의 배치를 변함없이 유지하도록 정당화 담론을 제공하는 인문학이 ‘좋은’ 인문학일까? 수월하게 소비되지 않은 인문학, 목구멍에 걸려 잘 삼켜지지 않는 인문학, 위장 장애를 일으켜 이미 소화시켰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게워내 직시하게 만드는 인문학―이제 ‘행복’과 ‘희망’의 인문학, ‘화해’와 ‘위로’의 인문학을 넘어서 ‘불편’하고 ‘낯선’ 반(反)인문학을 말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반인문학, 또는 인문학에 저항하는 인문학. 지금 필요한 것은 그 불편함과 낯섦을 창출하는 힘이며, 그 힘을 우리는 ‘불온하다’고 부를 것이다. 지금 우리가 생산해야 할 인문학의 존재 양태, ‘어떤’ 인문학이 필요한가에 대한 응답은 바로 순응하지 않는 인문학, 즉 ‘불온한 인문학’에서 찾아져야 한다.
― 본문 83쪽, 〈2장?인문학에 저항하는 불온한 사유를 시작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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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노마디스트

여름강좌(7/6-8/10) "근대의 외부들 :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 강사 인터뷰!

 

 

 

"상상력 없이 우린 변화할 수 없어요!"  

-홍서연 강사와의 인터뷰-

 

 


 

홍서연 소개 - 수유너머N 연구원.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역사인류학을 공부했음.  

 

 

 

질문 : 안녕하세요^^ 저는 인류학에 대한 관심은 많은데, 왜 이 공부에 끌리는지 잘 설명을 할 수가 없어요.

인류학은 확실히 인문학 독자들에게도 조금 낯설기도 하구요.

인류학에 대한 전반적 소개부터 부탁드립니다. 우리가 왜 인류학을 공부해야하는지도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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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서연 : 확실히 인류학은 우리나라에서 철학이나 다른 분야보다 훨씬 안 읽히죠! 인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레비-스트로스나 모스의 이름이 낯설지 않겠지만 그들의 책을 꼼꼼히 읽어본 독자는 그다지 많지 않은 듯 하고요. 외국 인류학자들이 낸 이론서와 수많은 민족지 작업들은 별로 번역되어 있지 않고, 과거에 번역된 것들도 절판되어 잊힌 상태예요. 국내 인류학자들의 작업은 소수의 전공자들만 읽고요.                        

 

인류학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실증적인 학문이라는 점이에요. 인류학자들은 '현지조사'라는 방법으로, 직접적인 관찰을 통해 기록하고 연구합니다.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사람들의 행위와 말, 의례, 생산기술 또는 생활기술, 문물, 친족관계,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 드러나는 한 사회의 지식, 정치, 상징적인 것들, 사회관계와 사회조직, 제도, 그리고 또… 한 사회의 특이성, 사람들이 한 마디로 '문화'라고 지칭하는 것이죠.

다양한 것들의 세세한 면모를 읽는 데서 아무런 재미를 못 느낄 수도 있겠죠. 취향의 차이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미미한 건 인문학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질문 : 인류학에 대한 관심이 저조한 것이 인문학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부족 때문이라... 

좀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홍서연 : 스스로 사유하기 위해 인문학을 공부하기보다, 보증된 이론 또는 이론가에게 기대기 위해 공부하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어요. 그런데 학문은 보증을 해 주는 안전장치가 아니거든요. 특히 인문학은요. 가령 철학은 언제나, 익숙한 방식으로 굳어져버린 믿음들을 전복하여 이미 있었던 개념들을 새롭게 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어요. 우리가 푸코, 들뢰즈, 랑시에르에게 열광한다면 그것 또한 그들에게 안주하기 위해서는 아니거든요. 그들의 권위에 의존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이율배반적이고요.

다시 인류학으로 돌아와서, 인류학은 현장으로부터 출발합니다. 현실의 무한한 개별성으로부터 시작하는 셈이죠.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언어로써 다루기 힘든 부분, 개념과 언어의 틀 밖으로 세어나가 버리는 부분, 거기 뿌리박고서 하는 작업입니다. 흔히 감각을 통한 사유는 편견에 지배되기가 쉬운데, 인류학의 사유는 오히려 자문화중심주의적인 편견을 깨뜨리는 사유입니다. 거기에 긴장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개별성 속에서 어떻게 편견에 치우치지 않을 것이며, 개념화 작업 속에 어떻게 특수성을 담을 것인가?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과 접촉해서 낯설고 불편한 생활양식 속으로 들어가서, 종종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들과 함께 얽히면서 강도 높은 감정적 투입 속에 자기 몸을 던져 넣어야 하지요. 인류학자들의 민족지 작업들은 그걸 견뎌낸 다음에만 탄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은 그 익숙함 때문에 다 알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착각에서 벗어날 생각이 없다면 인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죠. 우리가 경험과 교육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은 현실의 아주 작은 조각들일 뿐이에요. 인류학은 우리가 '모른다'는 걸 알게 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알 때에만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가 있어요.

 

 

mauss.jpg malinowski.jpg        Clastres1.jpg

                모스                           말리노프스키                             클라스트르        

 

질문 : 강좌 제목은 그런 인류학의 성격과 어떤 관련이 있나요?

왜 "근대의 외부들"이고 왜 "다른 세계를 발명하는 인류학적 상상력"인가요?

 

 

 

홍서연 : 필연적으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물질적 조건 속에서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려 한다면 거기서 필요한 건 상상력이에요. 상상력은 우리가 지각하는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 하나의 현상을 통해 무한한 확장을 이루는 능력이에요. 경계들을 넘어서 체감하는 능력이고, 한계들을 넘어서 인식하는 능력이죠.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은 언제나 변화를 가져옵니다. 다시 말해 상상력 없이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어요. 강좌 기간 동안 우리는 함께 책을 읽고 얘기를 하고 사유를 할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언가 변화된 상태로 나아갈 거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떤 새로운 세계를 발명할 겁니다.

이번에 다룰 여섯 권의 책은 모두 '원시사회'라고 불리는, 근대사회와는 판이하게 다른 세계에 대해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인류학이 언제나 그런 사회를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건 우리에게 가장 이질적인 문화를 통해 우리 자신을 사유하려는 전략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 책들에서 우리는 이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몹시 친숙한 것들도 만나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근대 이후의 사회는 '근대적인 것'으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한 착각인지도 알 수 있을 거예요. 결국은 나 자신에게서 나의 외부라고 생각했던 것, 다시 말해 타자를 발견할 거예요. 우리 사회 안에서 우리 사회의 바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될 거고요. 좀 전에도 '솔직함'을 말했지만,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기만에 맞설 수가 없어요.

 

 

 

질문 : 강의 주제로 되어 있는 책들의 저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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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루아-구랑                              레비-스트로스

 

 

 

홍서연 : 말리노프스키(Bronisław Malinowski, 1884-1942)는 영국 사회인류학의 창시자이고 현지조사 방법론을 정립한 사람이에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증여론>의 모스(Marcel Mauss, 1872-1950)는 증여관계뿐만 아니라 주술, 의례, 기술(테크닉)에 대해 중요한 작업들을 남겼죠.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 1911-1986)은 선사시대 도구와 종교를 연구한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에요. <인간과 물질>, <환경과 기술> 등의 책을 통해서 인지와 생태학에 대한 이후의 사유들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는데, 국내에는 거의 소개가 되어 있지 않아요.

프랑스의 정치인류학자인 클라스트르(Pierre Clastres, 1934–1977)는 남아메리카 부족사회들에 대한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해서 상당히 이론적인 논의를 전개하는데,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와 <폭력의 고고학> 두 논문집이 번역되어 있어요. (과야키족에 대한 민족지가 번역되지 않은 건 좀 아쉬워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의 구조주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의 책은 여러 권이 번역되어 있는데, 강의 주제인 <야생의 사고>는 그 중에서도 가장 구조주의적인 냄새가 옅은 책이지요.

 

 

 

질문 : 강의 프로그램으로 선택한 책들의 선정 이유를 알려주세요^^

 

 

 

홍서연 : 사유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들을 선택했습니다. 첫 강의에서는 말리노프스키와 함께 영국 사회인류학을 소개하면서 인류학이 흘러온 역사를 짚어볼 겁니다. 사회인류학은 인류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했거든요.

 

또한 경계를 넘나들기에 좋은 저자들을 선택했습니다. 인류학적 사유 자체가 경계를 넘어 체감하는 사유이지만, 선택한 책들은 특히 더 그렇습니다. 말리노프스키의 <미개사회의 성과 억압>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가지고 실험을 합니다. 모스의 <증여론>은 데리다, 부르디외 등에게 무한한 영감을 제공했고요. (길게 말하면 잔소리일 터!) 르루아-구랑의 <몸짓과 언어>는 아마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되는 것이 아닐까 싶은데, 고고학과 인류학의 연결점을 보여주기도 하고, 책의 주제 자체가 경계를 넘어 흘러요. 최근에 프랑스에서는 미학에서도 참조되고 있고요. 클라스트르의 <국가에 대항하는 사회>는 국가, 권력, 사회에 대한 철학적 문제제기들의 연장선상 안에서 읽힐 수 있죠. 들뢰즈, 가따리의 <천 개의 고원> 12장은 클라스트르의 '전쟁기계'에 대한 주석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모스의 "주술의 일반적 이론에 대한 초고"는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논문인데, 주술(magic)에 대한 민족지 자료들을 가지고 이론적 작업을 합니다. 로알드 달의 <마녀를 잡아라 The Witches>를 읽어보셨어요? 마녀는 눈동자 색이 수시로 바뀌고, 발가락이 없고, 침이 파란색이고… ^^ 이 논문에서도 이와 유사한 열거가 등장해요. (어쩜 로알드 달은 이 논문을 읽고 영감을 얻었는지도?) 하지만 로알드 달이 아이들로 하여금 마녀에게 잡히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마녀의 특징들을 열거한다면(^^), 모스는 인간이 사유하는 방식을 탐구하기 위해 주술사의 특징들을 정리하죠.

 

마지막으로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는, '지식'이라는 주제에 대해 사유할 때 푸코가 <말과 사물>에서 한 것처럼 역사성을 고려하고자 한다면, 다시 말해 시대, 지역, 사회의 특수성과 구체성을 넘어서는 보편적인 진리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분야와 관계 없이 반드시 읽어보아야 할 책이에요.

 

저자들은 공부한 여정에서도 경계를 넘어 흘러다녔어요. 레비-스트로스는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클라스트르도 인류학을 하기 전에 철학을 했죠. 모스는 사회학자이기도 했고, 르루아-구랑은 고고학자였고, 말리노프스키는 인류학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한 다음 수학과 물리학을 공부했어요.

  

 

질문 : 강좌를 듣기 전에 미리 준비할 것이 있나요?

 

 

홍서연 : 책을 읽고 오면 가장 좋겠지요(번역본이 있는 경우). 하지만 시간에 쫓긴다면 꼭 읽고 오지 않아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감각에 곧바로 와 닿는 이야기들을 들려드릴 거예요. 그러니 잘 뚫린 귀를 가지고 오세요. 그리고 들은 것들을 내가 알고 있는 것들과 결합하는 상상력을 자유롭게 풀어놓아 주세요. 강좌가 끝날 때쯤엔 더 접속률이 좋아진 뇌신경과 더 좋아진 시력과 더 예민해진 내 몸의 안테나를 확인하는 것이 이 강좌의 목적이에요.

 

 

 

     감사합니다. 7월 6일 첫 강의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강좌 신청 게시판 바로가기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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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요즘 반값 등록금 시위나 서울대 법인화 저지 점거사태 등을 보면 젊은 사람들의 정치에 관심이 높아진 것 같습니다.

이 강좌에서 언급되는 철학자들은 현재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줄 수 있을까요?

 

이진경: 통상적으로 정치라고 얘기하면 국회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떠올리기 쉽지만,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정치가 아니라 치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안의 관점에서는 사람들에게 정해진 자리에서 정해진 일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죠. 정해진 코스대로, 사회가 원하는 스펙을 쌓아서, 정해진 자리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요즘 대학생들에게 주어진 일반화된 요구입니다. 그러면서 대학 졸업장은 딱히 해주는 것도 없으면서 꼭 따야 할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을 위해 어이 없이 비싼 등록금을 내야하는 것이죠. .

 

얼마 전에 칼럼에서 ‘비정규 학생’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요즘에는 비정규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시간을 피해서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는 비정규 학생이 생긴거죠. 그렇게 일함에도 등록금을 제대로 벌 수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실 비정규직 노동자와 비정규 학생이 하나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대학졸업장을 따야하는 학생들을 불리한 위치로 몰아세우는 것이 신자유주의와 결합된 한국 학벌중심 사회의 현실입니다.

정치란 그런 자리를 벗어나는 것, 그런 자리를 뒤집어 버리는 것, 이런 것이 정치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그런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치안에 반하는 정치다’라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그의 말은 현재적인 의미가 크다라고 생각합니다.

 

  20110610214053633.jpg

<반값을 넘어 무상교육의 그날까지.... 촛불아 꺼지지 말고 계속 타올라라!>

 

변성찬: 요즘 한국 대학생은 존재 자체가 소수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들의 그렇게 지위가 변화하는 것은 위기일텐데 그것을 기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진짜 정치일 것입니다. 오랫동안 움직임이 없었던 대학생들에 움직임이 있다는 것은 그런 조건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런 의미에서 대학생들을 나서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소수화시켜 준 MB 정부에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웃음! 하하하!!)

 

 

Q. 바흐친은 요즘 한국의 대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요?

최진석: 아까 얘기했던 웃음과 연결하여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웃음은 일상의 문법으로 사용될 수 있지만 바흐친이 전복적인 힘으로 얘기하는 것은 폐부를 찌르는 비웃음과 풍자적인 불온한 웃음이죠. 그런 것들은 최근 박정수씨의 쥐그림 사태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쥐그림이 전혀 위험한 것이 아니라고 느꼈지만, 검찰은 기소 내용에서 그 그림이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고, 미래를 빼앗았다고 강조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샀습니다. 이런 방식의 웃음이야 바흐친이 말한 웃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서 검찰이 말한 아이들은 말그대로 퇴행한 MB의 아이들인거죠.

 

이렇게 정권이나 권위에 누구라도 농담을 던질 수 있는 사태 자체는 자신들의 권위의 벽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위협적인 도발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권위의 벽에 가까이 다가가 ‘이거 아무것도 아니네’ 하면서 그 벽을 건드리기도 하고, 그 벽에 오줌을 누기도 하는 방식, 직접적으로 권위를 망치로 부수는 방식이 아니라 권위 자체를 일그러뜨리는 것 냄새나게 만드는 방식이야 말로 권위의 본질을 폭로하는 것과 동시에 그 권위를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수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진경: 요즘엔 웃음에 대해서 좀 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을 준비하면서 불온한 웃음,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이 웃음이 정치적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편에 있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MB 정부가 유발하는 웃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웃길 의도가 없지만 우리로 하여금 깔깔거리고 웃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의도 없는 개그정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종류의 웃음은 왜 유발되는지, 그 의미는 뭔지, 굉장히 다른 종류의 이 웃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요즘 사회에서 웃음은 더 다양해지고 더 중요해진 것 같은데, 바흐친의 사상을 통해 웃음의 정치학가능성에 대해서 좀 더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푸하하하....-_-;; 그냥 웃기다.>

 

 최진석: 바흐친은 패러디적 웃음의 힘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죠. 예를 들어 건설부양에의 의한 정권를 비판하면서 누군가 거대한 삽의 모형을 만들어 던졌는데, 그것은 거대한 이미지를 통해 정권이 하고 있는 일과 유사하지만 들어나서는 안 되는 이미지를 들어내며 많은 사람들을 웃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패러디의 힘이라고 할 수 있죠. 보이지 않았던 본질을 보이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권위를 강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있던 권위를 추락시키는 방식들. 그것이 재미를 넘어서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웃음은 굉장히 치명적인 웃음이 될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MB 정권은 패러디 자체의 위험성의 낌새를 채로, 그 근원을 봉쇄해 버리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 안에서 우리에게 끊임없는 웃음을 주고 있지요. 강좌에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얘기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Q. ‘이런 사람들은 이 강좌를 꼭 들어야한다.’ 어떤 사람들이 있을까요?

변성찬: 등록금 투쟁하고 있는 대학생이 들으면 좋지 않을까요? ^^

이진경: 정치를 좀 더 큰 스케일로 그리고 통념을 깨는 방향으로 사유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합니다.

 

 

<대학생 여러분, 힘내세요^^!!>

사진출처 http://cafe.naver.com/wabore

 

Q. 강의 전에 읽어야 할 책이 있나요?

이진경: 강좌에서 만나게 될 철학자들의 책을 읽어오면 좋겠지만 책을 안 읽는다고 강의를 못듣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사유의 열기로 무더운 7월 금요일 밤을 더욱 화끈하게 만들어 줄 이진경, 최진석, 정정훈, 변성찬 강사의 열강이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http://nomadist.org/xe/lecture/145640 강좌 안내는 요기 클릭!!!

 

그럼, 7월 8일 첫강의에서 만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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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마디스트 수유너머 N의 대표 미남 (...........응? ) 강사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정정훈이 '히치하이커의 정치학-현대정치철학의 지형과 지표를 탐사한다'라는 알쏭달쏭한 제목의 강좌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현대 정치철학에 왠 히치하이커?

도대체 이 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이 강좌에서 만나게 될 여섯 명의 철학자들을 어떻게 한 곳에 엮을 수 있을까?

 

호기심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이진경, 변성찬, 최진석  세 강사를 만났다.

 

 

                                                                                                                                  인터뷰 : 강좌 반장 아샤   

 

 

 

Q. 강좌 제목이 특이한데요, 어떻게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진경: 사상가들을 공부할 때 어떤 때는 그들의 사유에 편승을 해서 그것을 따라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을 뒤집기도 때로는 대결하기도 하는데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종의 히치하이커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적지가 같으면 같이 가지만 목적지가 다르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딴 길로 가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히치하이커 역할을 자임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히치하이커의 정치학’이라는 제목을 붙이게 되었습니다.

 

특히나 정치학은 어디로 갈 것인지가 문제이기 때문에, 방향을 가지고 운전사·차주와 대결하는

히치하이커라는 컨셉이 재미있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번 강좌에서도 그런 관점을 가지고 정치사상가들과 대면하는 방식을 만들어보고자 하였습니다.

 

사진1.jpg 

 

변성찬: 얘기를 들어보니 히치하이커가 아니라 하이잭킹의 느낌인데요?

(일동 웃음~ 하하하하하!!)

 

 

 7438126-.jpg hijacking+hotspot.jpg

<히치하이킹?? 혹은 하이잭킹??>

 

 

Q. 강좌에서 총 여섯 명의 철학자들과 그들의 사상을 만나게 될텐데,

여섯 명을 어떻게 선택하게 되었는지 얘기해주세요.

 

최진석: 현대 정치철학 경향이나 철학자들의 사유를 소개·해설하는 방식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쉽지만 우리는 그런 방식을 거부합니다.

예를 들어 첫 강의의 주인공인 아렌트의 경우도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아렌트의 사상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그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진경: 남으로 갈 비행기를 북으로 가도록 만드는 것이죠.

 

변성찬: 그게 정확히 하이재킹이죠.

 

이진경: 랑시에르의 경우에도 랑시에르의 ‘평등성의 정치학’을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평등성까지 밀고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좌에서도 랑시에르의 얘기에 그대로 주석을 달지는 않을 것입니다.

 

Q. 정치철학 강좌인데 바흐친이 있는 것도 특이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바흐친~ 하면 문학이라고만 생각했어요.

 

최진석 : 그렇죠. 바흐친을 정치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바흐친이 얘기하는 전복성의 사유가 단순히 예술이나 문학을 논할 때의 전환점,

새로운 미적감각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흐친이 이야기하는 감각성을 현실정치적인 차원에서 도입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강좌를 통해 학문적 담론 안에 곱게 정리된 그의 사유를 끄집어내어 현실 속에 던질 수 있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보고 싶었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데리다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데리다를 정치철학적으로 전용하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포리아 자체로 끝나버리는,

‘불가능하다’와 ‘불가능하지 않다’를 동시에 말해버리는 것으로 데리다의 정치철학을 지표화해버리고 맙니다.

그것보다는 우리의 현실의 언어로서, 언어화되어 있지 않은 지점까지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그 아포리아로서 데리다의 정치철학적인 가능성을 ‘법의 힘’이라는 텍스트를 통해서 사유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바흐친이 주목했던 유머가 가진 힘과 그 정치적 가능성이라는 방향성에 대해서도 얘기해보면 흥미롭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진경 : 특히 바흐친의 웃음, 유머는 정말 공부해 볼만 하단 생각이~~ 정말 재밌다는..!

나중에 베르그송의 '웃음'이랑 같이 해서.. 더 공부를 해보면 좋을 듯...?

(인터뷰 도중에도 끊이지 않는 기획들....^^)

 

Q. 영화 평론가 변성찬이 보는 들뢰즈의 정치철학도 궁금합니다.

 

변성찬: 현대정치철학에서는 기본적으로 메타 정치학을 얘기합니다.

들뢰즈는 ‘정치란 이런 것이다’라고 사유를 한 사람이 아닌 만큼 더더욱 그럴 것 같은데요,

‘천의 고원’,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영화평론을 하는 사람인만큼 ‘씨네마’에서

들뢰즈가 지나가듯 얘기하는 현대적 정치영화와 고전적 정치영화의 차이라는 부분을 참고로 하여

들뢰즈가 얘기하는 ‘소수성의 정치’라는 개념이 갖는 함의를 좀 더 풍부하고 구체적으로 들어내 보고자 합니다.

 

 

 

 1.jpg

 

< 이번 강좌를 통해 우리가 조우하게 될 철학자들...

왼쪽 상단부터 시계방향으로 한나 아렌트, 자크 랑시에르,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미하일 바흐친, 에티엔 발리바르>

 

 

인터뷰 Part 2에서는 더욱 흥미진진한 얘기들이 펼쳐집니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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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수유너머N 최고의 미녀 강사 유정아와 박수진이 뜬다! 수유너머N의 숨겨진 보석으로 늘 쉬크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던 그녀들이 드디어 강좌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로 그 지성과 매력을 드러낸다. 수유너머에서 쉽게 접해보지 못한 예술과 미학에 대한 강의라 더욱 기대되는 마음을 안고 강사인 유정아, 박수진 선생님을 만나 보았다.

 

 

박수진.jpg 유정아.jpg

위 : 박수진 선생님 / 아래 : 유정아 선생님

 

Q. 선생님들께서 초현실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유. 제가 석사 첫 학기에 ‘다큐멘터리 사진’에 관해서 발표한 적이 있었어요. ‘세상이 참 살기 힘든거구나.’ 그 때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죠.^^; 고개를 들 수 없을 만큼 깨졌거든요. 완전히 소심해져서는 다시는 이런 주제 따위 누가 뒷돈 대준데도 공부하지 않으리라, 아니, 아예 여기서 공부를 포기해버릴까 수없이 고민했죠. 그런데 몇 년 후, 정신을 차려보니 박사논문 주제를 고르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어요.^^ 인생이란...C'est la vie...


 

암튼 그 때 미국의 대공황기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발표했었는데,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준다고 믿는 사진들 이면에는 수많은 왜곡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물론 이건 누구나 아는 얘기지만, 또 막상 파고 들어가면 쉽지 않은 얘기거든요. 그 때는 그 주제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건 예술의 근본적인 문제인 리얼리즘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구요.


 

시대를 통틀어 모든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현실을 진실하게 보여주는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했겠죠. 우리가 볼 때는 왜곡된 것처럼 보이는 표현주의나 입체주의자들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현실적인 것’을 생각해 보기 위해서 거꾸로 ‘초현실 내지는 비현실’을 다루어 보려고 하는 겁니다.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초현실주의 운동’ 자체를 미술사적으로 규명한다기 보다는 이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현실과 이미지와의 관계를 생각해 보고 싶어요. 너무 산만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중심점이 필요하죠.


 

박. 정신분석으로 논문을 썼는데, 그때는 초현실주의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는 않았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기계적으로 정신분석과 초현실주의를 연관 짓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막상 박사 졸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독립기획자로서 전시를 기획하면서 다시 만나는 초현실주의는 너무나 매력적이었습니다. 우연과 무의식과 만나는 혁명과 사랑, 그리고 번뜩이는 예술적 아이디어와 실천력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의 작품, 그리고 전시회에서 폭발하는 것 같아요.


 

 

Q. 박수진 선생님께서는 현직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2011년 한국에서, 20세기 초 유럽의 꿈꾸는 집단이었던 초현실주의자들을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요?

 

박.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 미술은 매력적이지요. 특히 21세기에 들어서서 현대미술의 현장에서는 모더니즘 미술 다시 보기를 하고 있지요. 현재 미술계에서 관심은 미술의 이즘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과 경향성입니다. 기존의 미술사가 형식주의 모더니스트의 관점에서 순수주의와 추상주의로 20세기 미술을 보지만 동시에 미술의 역사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던 것은 다다라든지 초현실주의와 같은 표현주의적 미술이었지요. 그러나 양식적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이들 표현주의 경향을 바라보고 미술사에서 평가절하되거나 배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초현실주의는 단순히 하나의 예술적 스타일에 머무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술 뿐 아니라 모든 관습적 견해에 대한 강한 불신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가 초현실주의자를 사유한다는 것은 배제되었던 역사를 지금 우리 시대에 복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들이 꿈꾸었던 욕망, 그들이 꿈을 기억하며 동시에 해석하는 방식, 그들이 무작위적인 병렬에서 생산하는 이미지들, 전통적 예술에 대한 저항, 변증법적 각성과 그 속에서 혁명적인 에너지를 읽어낸 정치적 태도들은 지금 우리 시대에서도 여전히 요구되는 것이지요.

 


 

마그리트_겨울비.jpg  

마그리트_겨울비   

 

 

Q. 강의 소개를 보니 ‘초현실주의’ ‘예술’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정치’ ‘혁명’ 이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 것 같습니다. ‘예술’ 과 정치’ 이 두 가지 사이의 관계가 이번 강의의 직접적인 화두가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데요.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듣고 싶습니다.

 

유. 어쩌면 결론은 이미 나와있는 것인데, 예술이 현실정치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지는 못하죠. 아. 쥐 포스터라면 혹시 가능할까요? ^^; 그러나 이건 예술이라기 보다는 저항운동의 한 수단일테죠. 그러나 그렇다고 예술이 현실은 나몰라라 혼자서만 고고한 한 마리의 학이 되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쉽지 않은 얘기이니, 이제까지 수많은 논쟁이 있었겠지요. 눈 앞의 대상, 각박한 사회 현실과 노동자들을 그리면 사회참여적인 예술이고, 상상의 세계를 그리면 유미주의적인 예술이라 말하는 극단적인 이분법은 이제는 사라졌다고 해도, 사실 따지고 보면 여전히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죠. 예술로부터 철학적 사유가 생겨난다는 들뢰즈의 말처럼 이 예술가들로부터 ‘정치적인 것’의 힘을 배태할 어떤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특히 연구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공부했던 들뢰즈나 벤야민에게 도움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특히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환상’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찍이 무너졌을거예요. 우리로 하여금 상품을 소비하도록 만드는 기제가 모두 (거짓) 환상을 심어주잖아요. 저 아파트에 살면, 저 옷을 입으면, 저 커피를 마시면 공주가 될 것 같은. 그래서 오히려 현실 생활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이 환상, 꿈의 (사회적) 이미지이죠. 이 얘기들은 20세기 중반에 전개된 팝아트에도 영향을 주었죠. 

 


 

하트필드_정의의 여신.jpg  

하트필드_정의의 여신 

 

 

Q. 부제가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 입니다. 여기에서 ‘꿈꾸고’와 ‘혁명하라’는 말은 앞서 드렸던 질문의 답변에서 어느 정도 해소 된 것 같습니다만, ‘사랑하고’가 들어간 이유는 무엇입니까?

 

박. 정신분석의 시작을 알렸던 히스테리의 다른 이름은 ‘작은 사랑의 역사’라고 하죠.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심의 중심에는 초월적인 관심이 놓여있습니다. 그들은 언캐니한 것에의 매혹, 미친 사랑에 대한 숭배가 자리잡고 있지요. 그것들이 아마도 초현실주의자들의 시적 무기 창고를 채우고 있는 보충물 혹은 논쟁의 원천이지 않을까 합니다. 전복적 아름다움과 히스테리의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사랑을 혁명의 원천으로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Q.강의를 듣기 전에 미리 읽거나 보면 좋을 책이나 작품이 있다면요?

 

유. 일단은 편안하게 오셔도 될 것 같아요. 머, 어려운 철학 강의가 아니니까요. 아마 여러분들 책장을 둘러보면 미술에 관련된 책이 한 권쯤은 있을 겁니다. 제가 매번 놀라는 것은 미술관에 가거나 예술에 관련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거예요. 모두들 마음 속에 모두 ‘예술’에 대한 욕망들을 꿍쳐 놓고 있는거죠. 일단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이 강의 시간 만큼은 그 꿍쳐 놓은 마음들을 좀 풀어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일단 제 말보다 여러 작품과 이미지들이 많은 즐거움과 지적 자극이 되어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이미지가 여러분들의 눈과 몸에 가서 닿는 것만으로도 (들뢰즈적 의미의) ‘폭력적인 기호’가 되어줄꺼라고 믿어요. 저는 그 이미지들의 기호를 해독해보기 위한 약간의 팁을 제공할 뿐이죠.


 

(<다다와 초현실주의>라는 책이 한길아트에서 나왔고, 오생근 선생님의 <초현실주의 시와 문학의 혁명>이라는 책도 있어요. 또한 ‘길’ 출판사에서 나온 발터벤야민 선집 5권에 <초현실주의>라는 제목의 글이 있으니 참고하시면 됩니다.)


 

 

강좌는 오는 7월 4일 월요일을 시작으로 6주간 매주 월요일 7시 30분에 시작된다. 올 여름, 초현실주의와 미녀 선생님들로 더운 열기를 확~~ 날려버릴 사람들은 주저 말고 수유너머N 여름강좌 <아방가르드 미학과 초현실주의 운동 - 꿈꾸고, 사랑하고, 혁명하라!>(강좌신청 게시판)를 클릭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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